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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하불명 2화
第一章. 형문산의 사냥꾼과 사자맹의 이공자 (2)
여전히 거꾸로 들고 있던 책을 접어서 가만히 내려놓은 사지평이 손가락으로 먹물을 뿌린 것처럼 진한 눈썹을 톡톡 두드렸다.
“너 이 새끼, 나 놀리냐?”
“……진짠데요.”
“뭐? 양진명? 아니, 그런 새끼가 있다고 쳐. 그때 만든 영약이 지금까지 안 썩고 있겠냐? 벌써 거름이 되고도 남았겠지!”
“그자가 만든 거라면 그대로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새끼 알아?”
“예. 남송 때 사람으로 무림인이기 전에 편작이나 화타에 버금가는 명의였답니다. 천하제일 무인이자 의원이었단 소리죠.”
“흐응.”
“그런 사람이 만든 영약인데 보통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단급이 아닐까 예상하는 사람이 많습니…….”
말을 잇던 가사군이 아차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지평의 붉은 입술이 서서히 찢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드러나자 가사군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두 손으로 사지평의 손을 붙잡고 절박하게 소리쳤다.
“안 됩니다!”
“이거 안 놔? 내가 뭐랬다고?”
“공자! 아무리 귀하고, 비싸고, 유명한 거라도 명백히 함정입니다!”
움찔.
의표를 찌르는 지적에 사지평이 흠칫했다. 큼큼 헛기침한 그는 가사군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아, 어차피 방(坊) 애들은 다 갈 거 아냐.”
그 치들이야 보물이라면 환장하는 놈들이 아닙니까!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가사군이 일격을 날렸다.
“하지만 맹주께선 관심 없을 겁니다.”
“…….”
“그런 거 신경 쓸 틈에 도나 한 번 더 휘두르라고 하시겠죠.”
하지만 사지평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딱 들어도 귀하고, 비싸고, 유명한 것이다. 누가 사파인 아니랄까 봐 보물 모으는―강탈할 때도 있다― 게 취미인 사지평은 쉽게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귀도왕 그 새끼도 간다고 할걸?”
“읏. 그건…….”
귀도왕의 얘기가 나오자 가사군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귀도왕(鬼刀王) 묵단양.
묵단양은 파천도제 구백천의 첫 제자이자 사자맹의 대공자였다. 사지평이 맹에 들어오기 전까진 최고의 대접을 받던 기린아로 여전히 맹의 이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였다.
“쯧.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간다니까? 나 이기겠다고 별짓 다 하는 놈이잖아. 무려 천하제일인의 비급과 영약이라는데 눈 뒤집히고도 남을걸.”
“끙.”
지금은 파천도제의 제자가 일곱까지 늘어나 정도가 덜하지만 예전의 묵단양은 사지평을 죽이지 못해 안달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근골과 오성, 파천도제의 명백한 차별 대우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사지평에 대한 묵단양의 마음이 질투라면, 그에 대한 사지평의 마음은 귀찮음 그 자체였다. 묵단양을 대하는 게 거의 파리 취급이라 상대가 더 미치는지도 몰랐다.
언젠가 가사군이 물은 적 있다. 왜 공자가 실력이 더 뛰어난데 대공자를 가만히 두느냐, 했더니 사지평이 낄낄대며 답했다. 장난감은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고. 가지고 놀다가 다 헐었을 때야 버리는 거라고.
그날은 묵단양이 남만에 서식한다는 청홍사의 독을 사지평에게 먹인 날이었다. 시퍼렇게 독 오른 얼굴로 웃으며 대꾸하는 사지평을 보며 가사군은 처음으로 묵단양이 불쌍해졌다.
“어쨌든 함정입니다. 뜬금없이 비보가 나타났다는 것도 문제지만 누구나 다 알도록 호담자를 통해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것도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그런 소문이 돈다는 건 명백하게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알아.”
“네, 알겠…… 예? 아신다고요?”
“이봐, 간신배.”
“윽! 공자! 그 말 좀…….”
“함정이든 뭐든 상관없어. 나…… 요즘 심심해.”
“…….”
가사군은 귀를 막고 싶었다.
‘심심해.’
그 말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무공을 닦는 것과 보물을 모으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지평이 심심할 때마다 얼마나 극악한 짓을 저질렀던가.
정파 후기지수(後起之秀)*의 비밀 연무장 급습하기,―무림 정기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비밀리에 훈련하고 있었다― 묵단양이 목숨처럼 아낀다는 가문의 신물을 훔쳤다가 그가 거의 돌아 버릴 때쯤 돌려주기,―이때 청홍사의 독을 먹었다― 황제의 하사품을 훔쳐 암흑가 경매장에 팔아넘기기 등등. 셀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일을 수습했던 가사군은 원형 탈모가 생길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맹주와 이사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채였다. 맹 내에는 사지평과 팽팽하게 대련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기껏해야 흑사자단 단주 흑명과 그 휘하의 단원들이 한꺼번에 덤벼야 겨뤄 볼 만할 것이다.
사십칠랑이야 무투관을 이용하지 않으면 노환을 핑계로 사지평을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남은 취미인 보물 모으기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가사군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시원치 않은 일격을 날렸다.
“맹주께서 돌아오면 허락받고 나가시죠.”
“새삼 무슨. 이 몸이 노인네와 언제부터 그렇게 끈끈했다고?”
“귀도왕은 그렇게 할 겁니다.”
“그 버러지야 사부만 보면 사부님, 사부님, 하며 알랑방귀 뀌어 대는 게 일이고. 엄마 쭈쭈 빠냐? 다 큰 새끼가 징그럽게.”
“쭈쭈…….”
천하절색의 입술에서 나오는 저질스러운 표현에 가사군이 꺅! 소리 내며 귀를 막았다. 난데없는 중년 남자의 수줍음을 목격한 사지평은 순간 주먹을 휘두를 뻔했다.
“토할 짓 하지 말고, 내가 간다면 가는 거니까 네놈은 준비만 해. 아, 묵단양에게 사람 붙이는 거 잊지 말고. 그 새끼가 비급하고 영약을 얻는 순간 가로채면 더 재밌을 테니까.”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내가 뭘?”
사지평은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서책을 들었다. 그런데 좀 전엔 보지 못했던 게 눈에 띄었다. 가사군은 고개를 죽 빼 서책 안을 확인하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선명한 붉은 색의 화첩. 춘화집이 서책 안쪽에 있었다.
‘그럼 그렇지.’
가사군은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신배. 훔쳐보지 말고 사흘 후에 출발할 거니까 내 말대로 해.”
“간신배 아닙니다!”
남송 마지막 재상이자 희대의 간신으로 불린 가사도의 후예라는 것 하나만으로 사지평에게 간신배라고 종종 놀림당하는 가사군이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다. 그러나 이미 사지평은 춘화에 몰입한 후였다.
***
쉭―
삼복이 휘두른 칼날이 단번에 짐승의 목을 갈랐다. 덫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던 새끼 멧돼지가 이내 축 늘어졌다.
새끼라지만 덩치가 만만치 않아 피를 빼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웬만큼 빠졌다 싶을 때 사냥용 끈으로 멧돼지의 몸을 여러 갈래로 묶어 등에 짊어졌다. 묵직한 무게 때문에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노옹, 어때?”
킁킁대며 주위를 살피던 노옹이 앞발을 탁탁 두드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표시였다. 삼복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어미 멧돼지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기척이 없다니 이상했다. 그때였다.
푸드드득―
일제히 산새가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매 떼가 나타났다. 족히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매 떼가 허공을 유유히 선회했다.
“아무래도 어미 멧돼지는 아저씨들이 잡았나 보다.”
매를 보고 나서야 의문이 해소되었다. 삼복은 노옹 때문에 필요 없지만 장가촌 사내들은 사냥할 때 길들인 매를 이용했다. 길을 안내하는 데 탁월하고 작은 사냥감은 직접 잡기도 하는 매는, 잘만 길들인다면 그만한 사냥 동지도 없었다.
삼복은 한 매의 꽁지에 묶인 붉은 시치미를 확인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무동 아저씨까지 온 걸 보니 큰 걸 잡으려나 봐. 우린 그만 가자.”
어쩌면 호랑이 사냥을 할지도 몰랐다. 형문산에 군림하는 대호(大虎)는 무리지만 간혹 기력이 다한 늙은 호랑이나 새끼 호랑이 정도는 운만 따라 주면 포획할 수 있었다.
삼복이야 혼자 다니니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타계한 조부도 되도록 산군(호랑이) 사냥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쪽으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삼복은 올라올 때와 달리 느긋하게 하산했다. 매 떼가 선회하는 방향을 피해 내려가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 미치겠네. 설마 이쪽으로 오나?”
한군데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명백히 사냥감을 모는 소리였다. 난감해하는 삼복의 다리를 노옹이 꼬리로 후려쳤다. 그리고 사납게 목 울음을 내뱉었다.
크르르르―
“노옹?”
의아해하던 삼복은 무언가 깨달았는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대충 훑으며 내려갈 땐 몰랐던 자국이 보였다. 족히 직경(지름) 열 치(약 30센티미터)가 넘는 매화꽃 무늬의 발자국이었다.
“억! 대호잖아!”
크기만 봐도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형문산을 주름잡는 대호의 흔적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사냥꾼이라도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였다.
삼복의 등으로 식은땀이 죽 흘렀다. 아직 마을 사람들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안다면 저렇게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삼복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사이는 데면데면해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밑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였다.
바스락.
풀숲이 흔들렸다. 바람이 멎고 사위가 침묵에 휩싸였다. 거대한 위협에 숨을 죽인 듯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놈이 나타났다.
첫인상에서 느껴진 건 딱 하나였다. ‘집이 움직인다’ 과장 좀 보태서 삼복의 초옥만큼이나 커다란 호랑이가 느릿하게 풀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순간 상황 파악 못 한 삼복은 멀거니 놈을 응시했다. 노란 홍채와 시선이 얽히자 꼼짝없이 몸이 굳었다. 그것 하나로 대호와 삼복의 서열이 결정됐다. 대호가 서서히 상체를 낮추려는 순간, 노옹이 크게 주둥이를 벌렸다.
컹! 컹컹!
정적을 가르는 소리에 그제야 삼복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 으악!”
정신이 들자마자 삼복은 정신없이 뒷걸음쳤다. 공포가 뇌리까지 치달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호가 달려들었다. 거대한 몸체가 대번에 삼복의 앞까지 다다랐다. 그 순간이 찰나에 불과했다.
대응할 새도 없이 굳어 버린 삼복과 달리 대호를 막은 건 노옹이었다. 대호에 비하면 반딧불이만큼이나 작은 몸체가 땅을 박찼다. 미끄러지듯이 대호의 아랫부분으로 파고들어 뱃가죽을 물어뜯었다. 미세한 상처였지만 대호의 움직임을 막기엔 충분했다.
퍽!
대호의 앞발이 노옹의 몸을 후려쳤다. 낑!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몸체가 허공으로 붕 날아갔다. 삼복을 해치는 대신 거추장스러운 방해꾼을 먼저 처리하려는지 놈의 관심이 노옹에게로 향했다.
“노옹!”
삼복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재빨리 노옹을 안고 함께 땅을 굴렀다. 데굴데굴 구르던 몸이 커다란 나무에 부딪쳤다. 삼복은 허겁지겁 일어나 나무 뒤쪽으로 숨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살갗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삼복은 흙 범벅인 얼굴을 정신없이 문질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크르르르―
그러나 대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소리에 삼복은 사냥칼을 꺼냈다. 이 칼로 대호를 상대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칼을 휘두르는 대신 나무에 콱 박았다.
“꽉 잡아, 노옹!”
노옹이 삼복의 앞섶을 물었다. 삼복은 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간신히 굵은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그대로 계속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더는 올라갈 곳이 없을 즈음에야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응시했다.
“헉, 허억, 허억.”
대호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눈앞에서 사냥감을 놓쳤음에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게 여유로워 보일 정도였다. 놈은 두툼한 앞발로 나무에 박힌 단검을 후려쳤다. 꽤 깊게 박혔던 칼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이제 어떡하지.”
대호가 나무를 타고 올라온다면 답이 없었다. 그래도 지상에서 쫓기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지만 어차피 오십보백보였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였다.
불길한 생각은 빗나가질 않았다. 대호가 천천히 나무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낮췄다. 결국 나무를 탈 모양이었다. 삼복의 까만 눈에 물기가 아롱아롱 고였다.
그때였다.
“여기 있다! 여기에 호랑이가 있…….”
“그럼 몰아야지! 빨리 잡…….”
“…….”
운 좋게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삼복은 반갑지 않았다.
“젠장…… 대호잖아.”
먹잇감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크허어어엉!
거대한 짐승의 포효가 산을 울렸다. 마치 사자후라도 맞은 듯 풀숲이 파스스 흔들렸다. 포위하듯 들이닥친 스무 명의 사람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들고 있던 북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는 이도 있었다.
“부, 분명 우리가 쫓던 놈은 이놈이 아니었잖아!”
“니미. 그러니까 멧돼지로 만족하자니께.”
“……울 마누라 몸 푼 지도 얼마 안 됐는디 생과부 만들게 생겼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아무 준비 없이는 대호를 이길 수 없다. 본디 호랑이 사냥은 수일간 치밀한 덫을 준비하고, 노련한 궁사(弓師)와 포수(砲手)로 그 주위를 포위해도 겨우 한 마리 포획할까 말까였다.
더군다나 포수는 화약을 쓰는 만큼 국가에서 철저히 관리하므로 아무리 장가촌이라도 그 수가 몇 되지 않는데 지금 이 자리엔 한 사람 외엔 포수가 없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못 차려? 하나라도 살아 돌아가야 할 것 아녀!”
장무동이 버럭 소리치며 일행이 정신을 일깨웠다. 무리 사냥의 대장인 데다 포수이기도 한 그는 더듬거리며 허리춤을 짚었다. 손바닥에 묵직한 질감이 느껴졌다.
‘이걸 써, 말어?’
장무동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대호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동료 하나를 발로 후려쳤다. 대호는 악, 소리도 못 내고 쓰러진 사람을 뛰어넘어 바로 다음 사람을 덮쳤다.
탕!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허벅지를 스친 총알에 대호의 눈이 장무동을 향했다. 장무동이 허리춤에서 총신을 꺼내 도화선에 불붙이고 탄환을 발사하기까지 대호가 쓰러뜨린 사람은 총 셋이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장무동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맹수의 노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을 내리까는 순간, 제 목숨 줄까지 끊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금이 저렸지만 버럭 소리치는 것으로 두려움을 떨쳤다.
“뭐 혀! 각자 역할 잊었는가!”
“헉!”
“사수 앞으로!”
장무동의 고함에 사람들이 분분히 흩어져 일제히 대호를 향해 시위를 겨눴다. 그사이에 장무동은 다시 돌화총*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총신이 대나무다 보니 오래 쓸 수 없는 게 단점이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크르르르―
사방에서 짓쳐 드는 예기에 대호의 주둥이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대호와 인간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이 흘렀다.
그것을 위에서 지켜보던 삼복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노옹의 몸을 살폈다. 사람 상체만 한 주먹에 맞았으니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까 봐 걱정됐다.
“……멀쩡하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이 터졌다. 걱정이 기우라는 듯 노옹의 몸은 멀쩡했다. 사람조차 맥없이 쓰러질 만큼의 공격을 받고도 멀쩡한 게 의아할 정도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삼복은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아저씨들은 어쩌지. 으으, 미치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미 손으로는 활과 화살을 꺼내고 있었다. 사이가 데면데면해도 장가촌 사내들이 죽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삼복은 활을 시위에 재고 한껏 뒤로 당겼다. 드득, 드득, 활줄이 늘어나는 소리와 함께 삼복의 팔뚝에 핏줄이 돋아났다. 깊게 들이쉰 숨을 탁 뱉으면서 시위를 놓았다.
씨이이잉― 퍽!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대호의 다리에 박혔다.
크헝!
펄쩍 뛴 대호가 땅을 박찼다. 거대한 몸집이 사납게 날뛰니 부딪치는 나무마다 크게 흔들리며 이파리를 떨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내들도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피피피피핑!
화살이 폭우처럼 대호에게 향했다. 다는 아니더라도 몇 방만 맞춰도 빠져나갈 시간은 벌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호는 세차게 몸을 휘도는 것만으로 화살을 모두 튕겨 냈다. 동시에 자신을 상처 입힌 자부터 처리하려는지 삼복이 오른 나무를 들이받았다.
쿵!
“으악!”
순간 뒤로 휘청거린 삼복이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대호가 어찌나 세게 들이받았는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삼복은 입 안까지 들어온 나뭇잎을 퉤퉤 뱉었다.
“저거 복이 아녀?”
“헐. 왜 저런데 올라가 있대?”
“이 틈에 도망가야 하는 거 아녀?”
“그럼 복이는 죽어!”
“흥. 죽든 말든.”
뒤늦게 삼복을 발견한 사내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그들의 의견이 갈리든 말든 장무동은 다급하게 돌화총을 겨눴다.
대호가 다시 한번 나무를 들이받았다. 나무가 지진 맞은 듯 흔들렸다. 아차 하는 사이에 손이 미끄러졌다. 삼복은 본능적으로 노옹을 위쪽으로 던졌다. 어차피 죽을 거 노옹이라도 살리려는 마음에서였다.
“으악! 떨어진다!”
“어서 쏘지 않고 뭐 혀! 복이를 죽일 참이여?”
“그냥 도망가자니께!”
“헛소리 말어! 쏴!”
컹!
주인과 떨어지게 된 노옹이 울부짖었다. 밀어 낸 반작용으로 삼복의 몸이 더욱 빠르게 추락했다. 점차 멀어지는 하늘을 보며 삼복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아서 보는 마지막 하늘이건만 감상하고픈 마음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원시천존!”
청량한 도호와 함께 누군가가 삼복의 허리를 낚아챘다. 몸이 다시 붕 떠올랐다. 눈을 뜬 삼복이 입을 떡 벌렸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주변 풍경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파라라락!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속이 메스꺼울 때쯤 드디어 지상에 닿았다.
“웩!”
“어이쿠! 괜찮은지요?”
삼복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나오는 것 없이 침만 죽 늘어졌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겨우 진정한 삼복이 입을 쓱 닦았다.
“고, 고맙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탓!
순식간에 기척이 사라졌다. 삼복이 허리를 폈을 땐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포효하는 대호의 울음과 사람들의 소란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삼복은 소리를 더듬으며 내려갔다. 그대로 기다려도 되지만 두고 온 노옹이 걱정됐다. 풀숲을 헤치고 나간 삼복은 허공에 떴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입을 떡 벌렸다.
퍼퍼퍼펑!
사람이 날고 있었다. 마치 용이 구름 위를 노니는 듯 신형이 희끗희끗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대호의 몸에 새파란 기파가 작렬했다.
크허허헝!
대호도 지지 않았다. 비호와 같이 땅을 박찼다. 몸의 충격은 무시한 채 신형을 공격했다. 호인상박(虎人相搏)이었다. 둘의 기세에 밀린 장가촌 사내들은 멀찍이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왕!
“노옹!”
멍하니 격전을 쳐다보던 삼복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서 무사히 내려왔는지 노옹이 펄쩍펄쩍 뛰어왔다. 삼복은 글썽글썽한 눈으로 품에 뛰어드는 노옹을 꽉 안았다. 정신없이 뺨을 핥는 노옹의 목덜미에 제 볼을 비볐다.
“큰일 난 줄 알았잖아. 괜찮아?”
왕!
“하아, 다행이다.”
노옹의 무사에 삼복의 몸에서 힘이 죽 빠졌다. 애써 힘을 줘 무너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전까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타핫!”
외마디 노성과 함께 푸른빛 기가 대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대호의 몸이 휘청거렸다. 몇 번이나 뒷걸음질 치더니 공격자와 훌쩍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낯선 이도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그의 외관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청관(靑冠)과 도복을 입은 도사였다.
第一章. 형문산의 사냥꾼과 사자맹의 이공자 (2)
여전히 거꾸로 들고 있던 책을 접어서 가만히 내려놓은 사지평이 손가락으로 먹물을 뿌린 것처럼 진한 눈썹을 톡톡 두드렸다.
“너 이 새끼, 나 놀리냐?”
“……진짠데요.”
“뭐? 양진명? 아니, 그런 새끼가 있다고 쳐. 그때 만든 영약이 지금까지 안 썩고 있겠냐? 벌써 거름이 되고도 남았겠지!”
“그자가 만든 거라면 그대로 남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새끼 알아?”
“예. 남송 때 사람으로 무림인이기 전에 편작이나 화타에 버금가는 명의였답니다. 천하제일 무인이자 의원이었단 소리죠.”
“흐응.”
“그런 사람이 만든 영약인데 보통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태청단급이 아닐까 예상하는 사람이 많습니…….”
말을 잇던 가사군이 아차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사지평의 붉은 입술이 서서히 찢어졌다.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드러나자 가사군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두 손으로 사지평의 손을 붙잡고 절박하게 소리쳤다.
“안 됩니다!”
“이거 안 놔? 내가 뭐랬다고?”
“공자! 아무리 귀하고, 비싸고, 유명한 거라도 명백히 함정입니다!”
움찔.
의표를 찌르는 지적에 사지평이 흠칫했다. 큼큼 헛기침한 그는 가사군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
“아, 어차피 방(坊) 애들은 다 갈 거 아냐.”
그 치들이야 보물이라면 환장하는 놈들이 아닙니까!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가사군이 일격을 날렸다.
“하지만 맹주께선 관심 없을 겁니다.”
“…….”
“그런 거 신경 쓸 틈에 도나 한 번 더 휘두르라고 하시겠죠.”
하지만 사지평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딱 들어도 귀하고, 비싸고, 유명한 것이다. 누가 사파인 아니랄까 봐 보물 모으는―강탈할 때도 있다― 게 취미인 사지평은 쉽게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귀도왕 그 새끼도 간다고 할걸?”
“읏. 그건…….”
귀도왕의 얘기가 나오자 가사군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귀도왕(鬼刀王) 묵단양.
묵단양은 파천도제 구백천의 첫 제자이자 사자맹의 대공자였다. 사지평이 맹에 들어오기 전까진 최고의 대접을 받던 기린아로 여전히 맹의 이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였다.
“쯧. 부정은 못 하겠습니다.”
“간다니까? 나 이기겠다고 별짓 다 하는 놈이잖아. 무려 천하제일인의 비급과 영약이라는데 눈 뒤집히고도 남을걸.”
“끙.”
지금은 파천도제의 제자가 일곱까지 늘어나 정도가 덜하지만 예전의 묵단양은 사지평을 죽이지 못해 안달했다. 자신보다 뛰어난 근골과 오성, 파천도제의 명백한 차별 대우 때문에 미쳐 날뛰었다.
사지평에 대한 묵단양의 마음이 질투라면, 그에 대한 사지평의 마음은 귀찮음 그 자체였다. 묵단양을 대하는 게 거의 파리 취급이라 상대가 더 미치는지도 몰랐다.
언젠가 가사군이 물은 적 있다. 왜 공자가 실력이 더 뛰어난데 대공자를 가만히 두느냐, 했더니 사지평이 낄낄대며 답했다. 장난감은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고. 가지고 놀다가 다 헐었을 때야 버리는 거라고.
그날은 묵단양이 남만에 서식한다는 청홍사의 독을 사지평에게 먹인 날이었다. 시퍼렇게 독 오른 얼굴로 웃으며 대꾸하는 사지평을 보며 가사군은 처음으로 묵단양이 불쌍해졌다.
“어쨌든 함정입니다. 뜬금없이 비보가 나타났다는 것도 문제지만 누구나 다 알도록 호담자를 통해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것도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그런 소문이 돈다는 건 명백하게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겁니다.”
“알아.”
“네, 알겠…… 예? 아신다고요?”
“이봐, 간신배.”
“윽! 공자! 그 말 좀…….”
“함정이든 뭐든 상관없어. 나…… 요즘 심심해.”
“…….”
가사군은 귀를 막고 싶었다.
‘심심해.’
그 말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다. 무공을 닦는 것과 보물을 모으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사지평이 심심할 때마다 얼마나 극악한 짓을 저질렀던가.
정파 후기지수(後起之秀)*의 비밀 연무장 급습하기,―무림 정기를 키운다는 명목으로 비밀리에 훈련하고 있었다― 묵단양이 목숨처럼 아낀다는 가문의 신물을 훔쳤다가 그가 거의 돌아 버릴 때쯤 돌려주기,―이때 청홍사의 독을 먹었다― 황제의 하사품을 훔쳐 암흑가 경매장에 팔아넘기기 등등. 셀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일을 수습했던 가사군은 원형 탈모가 생길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맹주와 이사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채였다. 맹 내에는 사지평과 팽팽하게 대련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기껏해야 흑사자단 단주 흑명과 그 휘하의 단원들이 한꺼번에 덤벼야 겨뤄 볼 만할 것이다.
사십칠랑이야 무투관을 이용하지 않으면 노환을 핑계로 사지평을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니 남은 취미인 보물 모으기를 하지 않는다면 다시 미친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가사군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시원치 않은 일격을 날렸다.
“맹주께서 돌아오면 허락받고 나가시죠.”
“새삼 무슨. 이 몸이 노인네와 언제부터 그렇게 끈끈했다고?”
“귀도왕은 그렇게 할 겁니다.”
“그 버러지야 사부만 보면 사부님, 사부님, 하며 알랑방귀 뀌어 대는 게 일이고. 엄마 쭈쭈 빠냐? 다 큰 새끼가 징그럽게.”
“쭈쭈…….”
천하절색의 입술에서 나오는 저질스러운 표현에 가사군이 꺅! 소리 내며 귀를 막았다. 난데없는 중년 남자의 수줍음을 목격한 사지평은 순간 주먹을 휘두를 뻔했다.
“토할 짓 하지 말고, 내가 간다면 가는 거니까 네놈은 준비만 해. 아, 묵단양에게 사람 붙이는 거 잊지 말고. 그 새끼가 비급하고 영약을 얻는 순간 가로채면 더 재밌을 테니까.”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내가 뭘?”
사지평은 심드렁한 얼굴로 다시 서책을 들었다. 그런데 좀 전엔 보지 못했던 게 눈에 띄었다. 가사군은 고개를 죽 빼 서책 안을 확인하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선명한 붉은 색의 화첩. 춘화집이 서책 안쪽에 있었다.
‘그럼 그렇지.’
가사군은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간신배. 훔쳐보지 말고 사흘 후에 출발할 거니까 내 말대로 해.”
“간신배 아닙니다!”
남송 마지막 재상이자 희대의 간신으로 불린 가사도의 후예라는 것 하나만으로 사지평에게 간신배라고 종종 놀림당하는 가사군이 씩씩거리며 분을 삭였다. 그러나 이미 사지평은 춘화에 몰입한 후였다.
***
쉭―
삼복이 휘두른 칼날이 단번에 짐승의 목을 갈랐다. 덫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던 새끼 멧돼지가 이내 축 늘어졌다.
새끼라지만 덩치가 만만치 않아 피를 빼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웬만큼 빠졌다 싶을 때 사냥용 끈으로 멧돼지의 몸을 여러 갈래로 묶어 등에 짊어졌다. 묵직한 무게 때문에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노옹, 어때?”
킁킁대며 주위를 살피던 노옹이 앞발을 탁탁 두드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표시였다. 삼복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어미 멧돼지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기척이 없다니 이상했다. 그때였다.
푸드드득―
일제히 산새가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매 떼가 나타났다. 족히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매 떼가 허공을 유유히 선회했다.
“아무래도 어미 멧돼지는 아저씨들이 잡았나 보다.”
매를 보고 나서야 의문이 해소되었다. 삼복은 노옹 때문에 필요 없지만 장가촌 사내들은 사냥할 때 길들인 매를 이용했다. 길을 안내하는 데 탁월하고 작은 사냥감은 직접 잡기도 하는 매는, 잘만 길들인다면 그만한 사냥 동지도 없었다.
삼복은 한 매의 꽁지에 묶인 붉은 시치미를 확인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은 무동 아저씨까지 온 걸 보니 큰 걸 잡으려나 봐. 우린 그만 가자.”
어쩌면 호랑이 사냥을 할지도 몰랐다. 형문산에 군림하는 대호(大虎)는 무리지만 간혹 기력이 다한 늙은 호랑이나 새끼 호랑이 정도는 운만 따라 주면 포획할 수 있었다.
삼복이야 혼자 다니니 그런 위험한 짓은 하지 않았다. 타계한 조부도 되도록 산군(호랑이) 사냥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쪽으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삼복은 올라올 때와 달리 느긋하게 하산했다. 매 떼가 선회하는 방향을 피해 내려가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 미치겠네. 설마 이쪽으로 오나?”
한군데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명백히 사냥감을 모는 소리였다. 난감해하는 삼복의 다리를 노옹이 꼬리로 후려쳤다. 그리고 사납게 목 울음을 내뱉었다.
크르르르―
“노옹?”
의아해하던 삼복은 무언가 깨달았는지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대충 훑으며 내려갈 땐 몰랐던 자국이 보였다. 족히 직경(지름) 열 치(약 30센티미터)가 넘는 매화꽃 무늬의 발자국이었다.
“억! 대호잖아!”
크기만 봐도 주인을 알 수 있었다. 형문산을 주름잡는 대호의 흔적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사냥꾼이라도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였다.
삼복의 등으로 식은땀이 죽 흘렀다. 아직 마을 사람들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안다면 저렇게 무모한 짓은 하지 않을 터였다. 삼복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사이는 데면데면해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밑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을 때였다.
바스락.
풀숲이 흔들렸다. 바람이 멎고 사위가 침묵에 휩싸였다. 거대한 위협에 숨을 죽인 듯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놈이 나타났다.
첫인상에서 느껴진 건 딱 하나였다. ‘집이 움직인다’ 과장 좀 보태서 삼복의 초옥만큼이나 커다란 호랑이가 느릿하게 풀숲을 헤치고 나타났다.
순간 상황 파악 못 한 삼복은 멀거니 놈을 응시했다. 노란 홍채와 시선이 얽히자 꼼짝없이 몸이 굳었다. 그것 하나로 대호와 삼복의 서열이 결정됐다. 대호가 서서히 상체를 낮추려는 순간, 노옹이 크게 주둥이를 벌렸다.
컹! 컹컹!
정적을 가르는 소리에 그제야 삼복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으, 으악!”
정신이 들자마자 삼복은 정신없이 뒷걸음쳤다. 공포가 뇌리까지 치달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호가 달려들었다. 거대한 몸체가 대번에 삼복의 앞까지 다다랐다. 그 순간이 찰나에 불과했다.
대응할 새도 없이 굳어 버린 삼복과 달리 대호를 막은 건 노옹이었다. 대호에 비하면 반딧불이만큼이나 작은 몸체가 땅을 박찼다. 미끄러지듯이 대호의 아랫부분으로 파고들어 뱃가죽을 물어뜯었다. 미세한 상처였지만 대호의 움직임을 막기엔 충분했다.
퍽!
대호의 앞발이 노옹의 몸을 후려쳤다. 낑!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몸체가 허공으로 붕 날아갔다. 삼복을 해치는 대신 거추장스러운 방해꾼을 먼저 처리하려는지 놈의 관심이 노옹에게로 향했다.
“노옹!”
삼복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재빨리 노옹을 안고 함께 땅을 굴렀다. 데굴데굴 구르던 몸이 커다란 나무에 부딪쳤다. 삼복은 허겁지겁 일어나 나무 뒤쪽으로 숨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살갗을 찢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삼복은 흙 범벅인 얼굴을 정신없이 문질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크르르르―
그러나 대호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소리에 삼복은 사냥칼을 꺼냈다. 이 칼로 대호를 상대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칼을 휘두르는 대신 나무에 콱 박았다.
“꽉 잡아, 노옹!”
노옹이 삼복의 앞섶을 물었다. 삼복은 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간신히 굵은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그대로 계속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더는 올라갈 곳이 없을 즈음에야 숨을 헐떡이며 아래를 응시했다.
“헉, 허억, 허억.”
대호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눈앞에서 사냥감을 놓쳤음에도 느릿하게 움직이는 게 여유로워 보일 정도였다. 놈은 두툼한 앞발로 나무에 박힌 단검을 후려쳤다. 꽤 깊게 박혔던 칼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이제 어떡하지.”
대호가 나무를 타고 올라온다면 답이 없었다. 그래도 지상에서 쫓기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지만 어차피 오십보백보였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였다.
불길한 생각은 빗나가질 않았다. 대호가 천천히 나무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낮췄다. 결국 나무를 탈 모양이었다. 삼복의 까만 눈에 물기가 아롱아롱 고였다.
그때였다.
“여기 있다! 여기에 호랑이가 있…….”
“그럼 몰아야지! 빨리 잡…….”
“…….”
운 좋게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삼복은 반갑지 않았다.
“젠장…… 대호잖아.”
먹잇감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크허어어엉!
거대한 짐승의 포효가 산을 울렸다. 마치 사자후라도 맞은 듯 풀숲이 파스스 흔들렸다. 포위하듯 들이닥친 스무 명의 사람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들고 있던 북을 떨어뜨리는가 하면,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는 이도 있었다.
“부, 분명 우리가 쫓던 놈은 이놈이 아니었잖아!”
“니미. 그러니까 멧돼지로 만족하자니께.”
“……울 마누라 몸 푼 지도 얼마 안 됐는디 생과부 만들게 생겼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아무 준비 없이는 대호를 이길 수 없다. 본디 호랑이 사냥은 수일간 치밀한 덫을 준비하고, 노련한 궁사(弓師)와 포수(砲手)로 그 주위를 포위해도 겨우 한 마리 포획할까 말까였다.
더군다나 포수는 화약을 쓰는 만큼 국가에서 철저히 관리하므로 아무리 장가촌이라도 그 수가 몇 되지 않는데 지금 이 자리엔 한 사람 외엔 포수가 없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못 차려? 하나라도 살아 돌아가야 할 것 아녀!”
장무동이 버럭 소리치며 일행이 정신을 일깨웠다. 무리 사냥의 대장인 데다 포수이기도 한 그는 더듬거리며 허리춤을 짚었다. 손바닥에 묵직한 질감이 느껴졌다.
‘이걸 써, 말어?’
장무동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에 대호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동료 하나를 발로 후려쳤다. 대호는 악, 소리도 못 내고 쓰러진 사람을 뛰어넘어 바로 다음 사람을 덮쳤다.
탕!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허벅지를 스친 총알에 대호의 눈이 장무동을 향했다. 장무동이 허리춤에서 총신을 꺼내 도화선에 불붙이고 탄환을 발사하기까지 대호가 쓰러뜨린 사람은 총 셋이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장무동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애써 침착한 얼굴로 맹수의 노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눈을 내리까는 순간, 제 목숨 줄까지 끊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금이 저렸지만 버럭 소리치는 것으로 두려움을 떨쳤다.
“뭐 혀! 각자 역할 잊었는가!”
“헉!”
“사수 앞으로!”
장무동의 고함에 사람들이 분분히 흩어져 일제히 대호를 향해 시위를 겨눴다. 그사이에 장무동은 다시 돌화총*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총신이 대나무다 보니 오래 쓸 수 없는 게 단점이지만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크르르르―
사방에서 짓쳐 드는 예기에 대호의 주둥이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대호와 인간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이 흘렀다.
그것을 위에서 지켜보던 삼복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노옹의 몸을 살폈다. 사람 상체만 한 주먹에 맞았으니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까 봐 걱정됐다.
“……멀쩡하네. 다행이다.”
안도의 숨이 터졌다. 걱정이 기우라는 듯 노옹의 몸은 멀쩡했다. 사람조차 맥없이 쓰러질 만큼의 공격을 받고도 멀쩡한 게 의아할 정도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삼복은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아저씨들은 어쩌지. 으으, 미치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미 손으로는 활과 화살을 꺼내고 있었다. 사이가 데면데면해도 장가촌 사내들이 죽는 걸 두고 볼 순 없었다. 삼복은 활을 시위에 재고 한껏 뒤로 당겼다. 드득, 드득, 활줄이 늘어나는 소리와 함께 삼복의 팔뚝에 핏줄이 돋아났다. 깊게 들이쉰 숨을 탁 뱉으면서 시위를 놓았다.
씨이이잉― 퍽!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대호의 다리에 박혔다.
크헝!
펄쩍 뛴 대호가 땅을 박찼다. 거대한 몸집이 사납게 날뛰니 부딪치는 나무마다 크게 흔들리며 이파리를 떨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내들도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피피피피핑!
화살이 폭우처럼 대호에게 향했다. 다는 아니더라도 몇 방만 맞춰도 빠져나갈 시간은 벌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간절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대호는 세차게 몸을 휘도는 것만으로 화살을 모두 튕겨 냈다. 동시에 자신을 상처 입힌 자부터 처리하려는지 삼복이 오른 나무를 들이받았다.
쿵!
“으악!”
순간 뒤로 휘청거린 삼복이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를 붙잡았다. 대호가 어찌나 세게 들이받았는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삼복은 입 안까지 들어온 나뭇잎을 퉤퉤 뱉었다.
“저거 복이 아녀?”
“헐. 왜 저런데 올라가 있대?”
“이 틈에 도망가야 하는 거 아녀?”
“그럼 복이는 죽어!”
“흥. 죽든 말든.”
뒤늦게 삼복을 발견한 사내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그들의 의견이 갈리든 말든 장무동은 다급하게 돌화총을 겨눴다.
대호가 다시 한번 나무를 들이받았다. 나무가 지진 맞은 듯 흔들렸다. 아차 하는 사이에 손이 미끄러졌다. 삼복은 본능적으로 노옹을 위쪽으로 던졌다. 어차피 죽을 거 노옹이라도 살리려는 마음에서였다.
“으악! 떨어진다!”
“어서 쏘지 않고 뭐 혀! 복이를 죽일 참이여?”
“그냥 도망가자니께!”
“헛소리 말어! 쏴!”
컹!
주인과 떨어지게 된 노옹이 울부짖었다. 밀어 낸 반작용으로 삼복의 몸이 더욱 빠르게 추락했다. 점차 멀어지는 하늘을 보며 삼복은 눈을 질끈 감았다. 살아서 보는 마지막 하늘이건만 감상하고픈 마음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원시천존!”
청량한 도호와 함께 누군가가 삼복의 허리를 낚아챘다. 몸이 다시 붕 떠올랐다. 눈을 뜬 삼복이 입을 떡 벌렸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주변 풍경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파라라락!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속이 메스꺼울 때쯤 드디어 지상에 닿았다.
“웩!”
“어이쿠! 괜찮은지요?”
삼복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나오는 것 없이 침만 죽 늘어졌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겨우 진정한 삼복이 입을 쓱 닦았다.
“고, 고맙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지요.”
탓!
순식간에 기척이 사라졌다. 삼복이 허리를 폈을 땐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포효하는 대호의 울음과 사람들의 소란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삼복은 소리를 더듬으며 내려갔다. 그대로 기다려도 되지만 두고 온 노옹이 걱정됐다. 풀숲을 헤치고 나간 삼복은 허공에 떴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입을 떡 벌렸다.
퍼퍼퍼펑!
사람이 날고 있었다. 마치 용이 구름 위를 노니는 듯 신형이 희끗희끗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날 때마다 대호의 몸에 새파란 기파가 작렬했다.
크허허헝!
대호도 지지 않았다. 비호와 같이 땅을 박찼다. 몸의 충격은 무시한 채 신형을 공격했다. 호인상박(虎人相搏)이었다. 둘의 기세에 밀린 장가촌 사내들은 멀찍이 떨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왕!
“노옹!”
멍하니 격전을 쳐다보던 삼복의 귀에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나무에서 무사히 내려왔는지 노옹이 펄쩍펄쩍 뛰어왔다. 삼복은 글썽글썽한 눈으로 품에 뛰어드는 노옹을 꽉 안았다. 정신없이 뺨을 핥는 노옹의 목덜미에 제 볼을 비볐다.
“큰일 난 줄 알았잖아. 괜찮아?”
왕!
“하아, 다행이다.”
노옹의 무사에 삼복의 몸에서 힘이 죽 빠졌다. 애써 힘을 줘 무너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아직은 아니었다. 이 자리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전까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타핫!”
외마디 노성과 함께 푸른빛 기가 대호의 얼굴을 후려쳤다. 대호의 몸이 휘청거렸다. 몇 번이나 뒷걸음질 치더니 공격자와 훌쩍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낯선 이도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그의 외관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청관(靑冠)과 도복을 입은 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