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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하불명 3화
第一章. 형문산의 사냥꾼과 사자맹의 이공자 (3)
“원시천존. 산의 왕은 이만 물러감이 어떠하오? 괜한 살생은 천도(天道)에 도달치 못한다는 것을 잘 알지 않소이까? 불살생(不殺生) 신선지도(神仙至道). 피를 보는 건 옳은 일이 아니오.”
크르르르―
“내 단단히 당부해 둘 터이니 장난은 이만하시지요.”
도사는 겁도 없이 대호의 앞으로 다가가 한 손을 세워 예를 표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잔뜩 일그러져 있던 대호의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노란 눈이 천천히 끔뻑였다. 가만히 도사를 보던 대호가 하얀 꼬리로 툭툭 그를 건드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주둥이를 쩍 벌렸다.
“조심……!”
삼복이 기겁해 소리쳐도 도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를 한입에 삼킬 듯하던 백호는 여전히 반응이 없자 훌쩍 뒤로 물러났다. 혀를 길게 죽 빼고 쩝쩝대는 게 뭔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조심히 가시지요.”
쐐기를 박는 도사의 말에 대호가 팽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몸에 박혀 있던 화살도 뽁 하니 피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보니 상처는커녕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 뭐지……?”
삼복과 장가촌 사내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다 죽일 듯이 굴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토라진 호랑이만 남았다. 대호는 마지막 심술을 부리듯 꼬리로 도사를 한번 후려치곤 숲 쪽으로 향했다. 마침 그 방향에 있던 삼복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숨도 못 쉬고 뻣뻣하게 굳은 그의 옆을 대호가 지나쳤다.
컹!
그 대신 노옹이 경고하듯 대호를 향해 짖었다. 힐끗 노옹을 본 대호가 킁, 코웃음 치곤 유유히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가, 갔다.”
“하아…….”
대호가 사라지자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힘이 풀려 주저앉은 이들도 있었다. 대장인 장무동만이 침착하게 부상자를 돌봤다. 죽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다들 기절했을 뿐 크게 상한 곳은 없었다.
“워, 죽는 줄 알았구먼. 분명 새끼 호랑이 흔적이었는디 왜 대호가 나온 거여.”
“대호 새끼인 거 아녀?”
“글씨다.”
장무동은 힘 빠진 기색으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내들을 뒤로하고 도사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도사를 본 그는 생각보다 어린 외양에 살짝 놀랐다.
“큰 도움을 받았구먼요. 어찌 이 은혜를 갚아야 헐지…….”
“하하, 빈도가 한 일이 뭐 있으리까. 어차피 산군에겐 살생의 뜻이 없었으니 제가 아니더라도 괜찮았을 겁니다.”
“예?”
“아, 모르셨군요. 간혹 짐승 중엔 영물로까지 진화하는 것들이 있는데 좀 전의 산군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 정도로 영력을 쌓았다면 살생을 그만둔 지 백 년도 넘었을 겁니다.”
“헉! 백 년이요?”
“예. 거의 반선(半仙)에 가까운 영물이지요.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간혹 저렇게 장난을 치거든요.”
“장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당하는 입장에선 심각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장무동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 오늘 호랑이 사냥을 하려고 했다지요?”
“아, 예.”
“그 전에 잡은 짐승이 있습니까?”
“커다란 멧돼지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아, 그리고 그 외에도 좀…….”
“그 때문이군요. 사냥이 잘못은 아니지만 산군이 더 이상의 것을 허락지 않는 것입니다.”
“…….”
“모든 만물에는 법칙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하시지요.”
사람 좋게 웃으며 권유하는 도사에 장무동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을 겪은 이상 그도 더는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원래라면 수일에 걸쳐 잡을 사냥감을 오늘 다 잡았다. 이대로 돌아가도 손해 볼 수확은 아니었다. 거기에 목숨까지 구했으니 산신제의 효험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장무동은 도사에게 꾸벅 인사한 후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낑낑대며 못 일어나는 동료들을 재촉하며 떠날 준비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다 챙긴 사내들이 하산하기 시작했다.
가장 후미에 선 장무동이 힐끗 삼복을 응시했다. 딱 마주친 시선에 삼복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장무동도 고개를 까닥이곤 이내 사내들을 뒤따랐다. 이제 이곳에 남은 이라곤 삼복과 도사뿐이었다.
“저. 감사합니다. 도사님. 목숨을 구해 주셔서…….”
“후후. 아닙니다. 도우께서도 어서 내려가시지요.”
도사의 부드러운 미소에 삼복은 작게 감탄했다. 제 또래인 것 같은데도 도사는 세상에 초탈한 듯 의연해 보였다. 넉넉한 풍채에 달덩이처럼 토실토실한 볼이 후덕한 품성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가슴 깊이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예, 그럼…….”
쑥스럽게 웃으며 삼복이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꼬르르르륵.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삼복이 움찔하며 도사를 쳐다봤다. 여전히 도사는 그 미소, 그 자세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꼬르르르륵. 꼬르르르륵.
“…….”
“…….”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삼복은 까만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는 노옹을 추슬러 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목숨을 빚졌으니 작은 성의지만 음식을 대접해도 될까요?”
도사는 여전한 미소 그대로 흔쾌히 답했다.
“도우께서 권한다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왠지 후덕한 볼살이 뻔뻔해 보이는 건 착각이리라. 삼복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
“준비는 순조롭습니다.”
“역시 내 책사야. 진작 이랬으면 좀 좋아? 평소에도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란 말이야.”
“…….”
사지평이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모시는 주인의 칭찬이건만 잔뜩 구겨진 가사군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사지평을 막아 보려던 지난날의 노력이 어떻게 스러졌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식사하고 있으면 ‘나는 이렇게 상심 중인데 그 주둥이로 밥이 넘어가?’ 하고 구박해 체할 뻔하고, 큰일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맛있는 걸 처먹었기에 똥까지 싸냐, 주제넘게’ 하고 구박해 나오던 게 쏙 들어갈 뻔했다. 결국 가사군은 이틀 만에 항복하고 짐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항상 타박을 들어서 그렇지 가사군은 유능한 책사였다. 그는 사지평의 안전을 위해 이중, 삼중으로 대비했다.
뒷거래로 몰래 들여온 총도 몇 자루 챙기고 사지평 직속 무력 단체인 흑사자단의 반을 호위 인력으로 배치했다. 나머지 반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맹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준비할 게 한가득이라 동분서주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가사군과 달리 사지평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연무장 구석에 드러누운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꼰 다리를 까닥였다. 천하태평이었다. 그런 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사낭(智蛇狼)이 꽤 분주하오. 사형, 어디 가요?”
“뭐야, 꺼져.”
“흐응……. 어디선가 위험의 냄새가 솔솔 풍겨 오네?”
파리 쫓듯 휘휘 내젓는 손길에도 인영은 개의치 않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푸른 머리카락이 사지평의 코를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슬슬 사지평의 입꼬리가 비틀리려 하자 인영이 냉큼 뒤로 물러났다.
“관심 꺼. 다 알면서 왜 모른 척이야, 고자 새끼야.”
“내 양물이 고자인지 사형이 어떻게 아세요? 한번 확인해 보시려오?”
사지평의 독설에도 사내는 꽃처럼 웃으며 대꾸했다. 쯧, 혀를 찬 사지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멀찍이 물러난 사내를 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때릴 수 있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그 또한 눈치챈 사내가 가느다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홍소(哄笑), 입을 크게 벌리고 웃거나 떠들썩하게 웃음)했다.
“아하하. 무공 쓸 데가 그렇게 없어요? 이런 일에 쓸 생각을 다 하고? 너무 무서워 소제는 두렵습니다.”
“이년아. 교태 부리지 마라. 남들이 화화미인(花花美人)이라 하니 네가 정녕 계집인 줄 아느냐?”
“사형 빼고는 다 그렇게 생각하더이다. 사형도 소제를 이년, 저년으로 부르잖아요.”
사내는 얄궂게 웃으며 사지평에게 다가갔다.
화화미인(花花美人) 홍예.
얼핏 들으면 여인의 별호와 이름 같지만 홍예는 엄연히 사내였다. 서리처럼 창백한 피부, 청해의 바다처럼 푸른 머리카락과 눈썹, 분홍빛깔이 깃든 입술은 청초하면서도 농염했다. 사지평이 근접하기 힘든 절세가인이라면 홍예는 사내를 홀리는 요화(妖花)였다.
이는 그의 출신과도 상관이 깊었다. 얼음의 대지인 북해에서 태어난 홍예는 노예 사냥꾼에 의해 중원으로 끌려와 남창이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가냘픈 몸에 맞지 않게 독살스러웠던 그는 손님으로 오는 무림인을 꼬드겨 무공을 배웠다. 그리고 기어코 복수에 성공했다.
홍예를 판 노예 사냥꾼은 오체분시 되어 길거리에 버려졌고, 그를 산 기루는 하루아침에 망했다. 다 죽어 나자빠졌으니 기루를 열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복수를 마친 홍예를 거둔 건 당시 실력이 제법이라는 소문에 그를 찾았던 파천도제였다. 그리하여 홍예는 사자맹의 삼공자가 되었다.
홍예는 어려서 제자가 된 두 사형과 달리 이미 근골이 굳은 나이에 제자가 된 탓에 파천도제의 상승 무공은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큰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그의 염원은 복수였다. 그것을 이뤘으니 맹주 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넘어설 엄두도 안 나는 실력을 갖춘 사지평이 있었다. 불가능할 게 뻔한데 맹주위 쟁탈전에 참여하거나 한 파벌에 손을 들어 주는 등의 어리석은 행동은 할 생각이 없었다.
묵단양이 일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정말 얌전히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형, 요즘 부서(腐鼠, 썩은 쥐) 새끼가 분주하던데. 그것과 연관이 있어요?”
“흥.”
홍예가 말한 썩은 쥐가 누굴 가리키는지 사지평이 모를 리 없었다.
“네 힘으로 안 되면 포기해. 내 힘 빌려서 복수할 생각 말고.”
“싫소. 그놈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건 사형뿐이니 날 떨어낼 생각은 마세요.”
심드렁하게 건넨 말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답으로 돌아왔다. 요요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홍예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것만 봐도 묵단양에 대한 홍예의 증오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홍예 님, 진정하시지요.”
“홍예 님, 아름다운 얼굴이 상할까 우려됩니다.”
“홍예 님, 냉차입니다. 먹고 심화를 가라앉히시지요.”
무럭무럭 피어나는 살기에 어디선가 우르르 나타난 사내들이 홍예를 달랬다. 하나같이 관옥(冠玉)*에 비견될 만큼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그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한껏 아부 섞인 말을 듣고서야 홍예는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반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사지평이 침을 탁 뱉었다.
“지랄한다. 썅, 토 나오네. 내가 말했지. 나하고 있을 땐 저 떨거지들 보이지 말라고.”
“사형이 먼저 시작하지 않았던가요? 일은 그놈이 먼저 저질렀어요. 내게 복수를 포기하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도 같다는 걸 사형도 잘 알잖아요.”
“그럼 그냥 죽어.”
“싫어요.”
홍예는 토라진 듯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고개를 팩 돌렸다. 사지평은 저걸 확, 하고 팔을 치켜들었다.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이지만 사내들은 기겁하며 홍예의 앞을 막았다. 사지평의 지랄 맞은 성격을 아니 혹시나 해서였다.
울멍울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내들의 소리 없는 애원에 사지평이 발을 크게 굴렀다. 목구멍까지 치민 토기를 진각(震脚)으로 해소했다. 지면이 크게 진동하자 사내들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홍예만이 동일한 기세로 진각을 일으켜 미동 없이 버텼다.
“어쨌든 숨겨 봤자 소용없어요. 소제야 비보에 관심이 없으니 참여 안 한다지만 다른 애들도 그러던가요? 목인이와 연화는 지들끼리 깨 볶느라 제외해도 소소하고 귀수는 틀림없이 사형을 귀찮게 할걸요? 특히 귀수는 더 그렇죠.”
“소소 그년이야 묵단양 첩년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귀수는 왜? 걔 사부 따라갔잖아.”
“노느라 몰랐어요? 어제 먼저 돌아왔어요. 고리타분한 노친네 모임이라고 도망쳐 온 모양이던데요.”
“썅.”
“걘 사형을 좋아하니 쉽게 떨쳐 내진 못할 거예요.”
“내가 아니라 내 무력이겠지.”
“그게 그거죠. 사형이 평소처럼 가볍게 노는 거라면 그 아이도 관심 없겠지만 이번 일은 그런 단순한 게 아니잖아요? 비보는 누구나 탐내는 보물이니까요.”
“뭐? 그것들이 내 것을 탐낸다고?”
엄연히 말하면 ‘사지평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아독존인 사지평에게 비보는 이미 ‘자신의 것’이었다. 눈이 뒤집힌 미인을 보며 홍예는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생김새와 품성이 저리 따로 노니 어디 내놓기 창피할 지경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아무튼 혹여 부서 새끼와 부딪친다면 소제 몫은 남겨 주세요.”
“그건 내 마음이고. 더 할 말 없으면 빨리 꺼져, 이년아.”
“어휴, 정말 매정하다니까―”
사지평이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젓자 홍예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묵단양 일로 더는 사지평을 자극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의 성미를 지닌 사형이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홍예는 새초롬한 얼굴로 홱 몸을 돌렸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홍예와 그 뒤를 따르는 화소단(花笑團)을 보며 사지평이 다시 한번 침을 탁 뱉었다.
“이것들 사지 한 군데는 부러뜨리고 가야 하나.”
졸지에 봉변당할 다른 이의 심정은 생각지도 않고 화풀이할 생각만 한가득한 그였다.
***
삼복은 흐뭇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어가는 노옹을 뒤따랐다. 평소와 같은 노옹의 모습을 보니 충격적이었던 대호와의 일이 기억에서 서서히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꼬르르르륵.
익숙한 소리에 삼복의 미소가 굳었다. 대체 얼마나 배고프면 배에서 쉴 새 없이 소리가 울릴까. 이제는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는 좀 더 걸음을 빨리했다.
삼복이 집에 도착한 건 하산한 지 반 시진(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울타리 문을 열자 노옹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루 밑에 자리 잡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노옹, 잠시만.”
삼복은 둘러멨던 멧돼지를 내려놓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토시와 각반을 벗자 노옹이 냉큼 채 갔다. 마치 제 몫이라는 듯 창고로 나르는 모습이 잽싸기까지 했다. 그사이에 삼복은 사냥 도구들을 정리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이라 그런지 정리를 마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묘하게 쳐다보던 도사는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아담한 초옥은 허름하긴 했으나 질 좋은 황토를 썼는지 튼튼해 보였고 목재로 만든 창고까지 딸려 있었다.
가만히 초옥을 보던 도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초옥이 일반적인 주거 형태와는 매우 달랐다. 보통 산 인근의 주거 형태는 토루(土樓, 원형의 중층 건축으로 주거 구성원이 대부분 같은 성씨인 집합 주택)가 대부분인데 삼복의 집은 조금 이국적이었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내륙에 한족만 사는 것도 아니고 삼복도 어느 소수 민족이겠거니, 하고 이해했다. 도사가 사는 지역도 소수 민족이 지역민의 반에 가까웠다.
도사는 느릿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당 한쪽에 널려 있는 약초를 보며 나직이 감탄했다.
“도우, 저기 말리고 있는 게 약초인지요?”
“아, 네. 귀한 것은 팔고 나머지는 고약으로 만들어 다쳤을 때 써요.”
“오, 고약도 만들 줄 알다니…….”
“네, 좀…….”
삼복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혼자 살려면 대부분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처럼 당당히 신분을 드러내고 살 수 없는 사람이라면 더 그랬다.
꼬르르르륵―
“허허허, 이것 참. 오늘따라 이놈이 말썽입니다그려.”
도사는 머쓱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
“앗, 시장하시죠? 여기 앉아 계세요. 바로 준비할게요.”
마루를 툭툭 두드린 삼복이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잘 벼린 칼과 오늘 잡은 멧돼지를 들고 창고 옆의 우물가로 향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멧돼지를 해체했다. 가죽을 벗겨 내고 내장을 제거한 후 부위별로 각을 뜨는 손길이 정교하면서도 빨랐다.
막 살코기를 분리하던 삼복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도사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사님, 육식도 하세요?”
“…….”
“제가 잘 몰라서요. 가끔 마을에 오는 스님께선 화식(火食)을 안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혹 도사님도 고기를 못 드시면…….”
“어, 어험. 금욕지도(禁慾至道)라지만 빈도 또한 한낱 인간일진대 어찌 욕구를 완전히 버리겠습니까. 절제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의 본성에 충실한 것도 옳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삼복이 되묻자 도사는 싱긋 웃으며 단호히 답했다.
“고기, 좋아합니다.”
“…….”
유난히 ‘고기’란 말에 힘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도사의 넉넉한 풍채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삼복은 떨떠름한 얼굴로 작업을 계속했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삼복은 소반 위에 몇 가지의 나물 무침과 조리한 고기를 올려 마루에 놓았다.
“오오오!”
향긋한 내음에 도사는 체면도 잊고 감탄을 내뱉었다. 준비하는 과정을 봤을 땐 별것 없었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다. 간단한 나물볶음에 찐 고기뿐인데도 냄새가 무척 향긋했다.
“드세요, 도사님.”
집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도사는 냉큼 고기 한 점을 집었다. 입에 넣고 느릿하게 씹던 그는 번쩍 눈을 홉떴다. 입 안 가득 탁 퍼지는 육즙, 뒤이어 스며드는 약초의 향까지…… 풍미가 대단했다. 도사는 연신 음음, 소리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그의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노옹, 네 몫.”
그사이에 삼복은 노옹 몫으로 빼 둔 고기를 건넸다. 잡은 사냥감은 공정하게 나눈다는 약속대로 접시에 수북하게 쌓은 고기가 노옹의 몫으로 돌아갔다. 식용 가능한 약초와 함께 찐 삼복표 고기찜은 노옹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역시나 노옹은 허겁지겁 접시를 비웠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고개를 돌린 삼복이 깜짝 놀랐다. 고기는 온데간데없고 그릇이 텅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많던 고기를 다 먹었음에도 도사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차마 더 달란 소리는 못하고 입맛만 쩝쩝 다시는 게 애처로울 정도였다. 삼복은 어쩔 수 없이 내일 몫의 고기까지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충 배를 채운―도사 기준이다― 도사는 그제야 자신에 대해 밝혔다.
“빈도는 청해의 곤륜산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자 도(道)를 닦는 청인이라 합니다.”
“아. 저, 저는 삼복입니다.”
“하하. 예, 삼복 도우. 빈도는 그냥 도사 나부랭이라고 해도 되니 편하게 부르십시오.”
“예, 청 도사님.”
‘청인’은 성명이 아니라 도호이니 청 도사는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청인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에게 호칭은 거추장스러운 허례허식일 뿐이었다.
第一章. 형문산의 사냥꾼과 사자맹의 이공자 (3)
“원시천존. 산의 왕은 이만 물러감이 어떠하오? 괜한 살생은 천도(天道)에 도달치 못한다는 것을 잘 알지 않소이까? 불살생(不殺生) 신선지도(神仙至道). 피를 보는 건 옳은 일이 아니오.”
크르르르―
“내 단단히 당부해 둘 터이니 장난은 이만하시지요.”
도사는 겁도 없이 대호의 앞으로 다가가 한 손을 세워 예를 표하며 깊게 허리를 숙였다. 잔뜩 일그러져 있던 대호의 얼굴이 서서히 펴졌다. 노란 눈이 천천히 끔뻑였다. 가만히 도사를 보던 대호가 하얀 꼬리로 툭툭 그를 건드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주둥이를 쩍 벌렸다.
“조심……!”
삼복이 기겁해 소리쳐도 도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그를 한입에 삼킬 듯하던 백호는 여전히 반응이 없자 훌쩍 뒤로 물러났다. 혀를 길게 죽 빼고 쩝쩝대는 게 뭔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조심히 가시지요.”
쐐기를 박는 도사의 말에 대호가 팽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몸에 박혀 있던 화살도 뽁 하니 피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보니 상처는커녕 생채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 뭐지……?”
삼복과 장가촌 사내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다 죽일 듯이 굴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토라진 호랑이만 남았다. 대호는 마지막 심술을 부리듯 꼬리로 도사를 한번 후려치곤 숲 쪽으로 향했다. 마침 그 방향에 있던 삼복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숨도 못 쉬고 뻣뻣하게 굳은 그의 옆을 대호가 지나쳤다.
컹!
그 대신 노옹이 경고하듯 대호를 향해 짖었다. 힐끗 노옹을 본 대호가 킁, 코웃음 치곤 유유히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가, 갔다.”
“하아…….”
대호가 사라지자 곳곳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힘이 풀려 주저앉은 이들도 있었다. 대장인 장무동만이 침착하게 부상자를 돌봤다. 죽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다들 기절했을 뿐 크게 상한 곳은 없었다.
“워, 죽는 줄 알았구먼. 분명 새끼 호랑이 흔적이었는디 왜 대호가 나온 거여.”
“대호 새끼인 거 아녀?”
“글씨다.”
장무동은 힘 빠진 기색으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내들을 뒤로하고 도사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도사를 본 그는 생각보다 어린 외양에 살짝 놀랐다.
“큰 도움을 받았구먼요. 어찌 이 은혜를 갚아야 헐지…….”
“하하, 빈도가 한 일이 뭐 있으리까. 어차피 산군에겐 살생의 뜻이 없었으니 제가 아니더라도 괜찮았을 겁니다.”
“예?”
“아, 모르셨군요. 간혹 짐승 중엔 영물로까지 진화하는 것들이 있는데 좀 전의 산군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 정도로 영력을 쌓았다면 살생을 그만둔 지 백 년도 넘었을 겁니다.”
“헉! 백 년이요?”
“예. 거의 반선(半仙)에 가까운 영물이지요.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간혹 저렇게 장난을 치거든요.”
“장난…….”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엔 당하는 입장에선 심각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장무동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 오늘 호랑이 사냥을 하려고 했다지요?”
“아, 예.”
“그 전에 잡은 짐승이 있습니까?”
“커다란 멧돼지 두 마리를 잡았습니다. 아, 그리고 그 외에도 좀…….”
“그 때문이군요. 사냥이 잘못은 아니지만 산군이 더 이상의 것을 허락지 않는 것입니다.”
“…….”
“모든 만물에는 법칙이 있으니 오늘은 이만하시지요.”
사람 좋게 웃으며 권유하는 도사에 장무동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을 겪은 이상 그도 더는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원래라면 수일에 걸쳐 잡을 사냥감을 오늘 다 잡았다. 이대로 돌아가도 손해 볼 수확은 아니었다. 거기에 목숨까지 구했으니 산신제의 효험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장무동은 도사에게 꾸벅 인사한 후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낑낑대며 못 일어나는 동료들을 재촉하며 떠날 준비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짐을 다 챙긴 사내들이 하산하기 시작했다.
가장 후미에 선 장무동이 힐끗 삼복을 응시했다. 딱 마주친 시선에 삼복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장무동도 고개를 까닥이곤 이내 사내들을 뒤따랐다. 이제 이곳에 남은 이라곤 삼복과 도사뿐이었다.
“저. 감사합니다. 도사님. 목숨을 구해 주셔서…….”
“후후. 아닙니다. 도우께서도 어서 내려가시지요.”
도사의 부드러운 미소에 삼복은 작게 감탄했다. 제 또래인 것 같은데도 도사는 세상에 초탈한 듯 의연해 보였다. 넉넉한 풍채에 달덩이처럼 토실토실한 볼이 후덕한 품성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가슴 깊이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예, 그럼…….”
쑥스럽게 웃으며 삼복이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꼬르르르륵.
어디선가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삼복이 움찔하며 도사를 쳐다봤다. 여전히 도사는 그 미소, 그 자세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꼬르르르륵. 꼬르르르륵.
“…….”
“…….”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삼복은 까만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는 노옹을 추슬러 안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목숨을 빚졌으니 작은 성의지만 음식을 대접해도 될까요?”
도사는 여전한 미소 그대로 흔쾌히 답했다.
“도우께서 권한다면 사양하진 않겠습니다.”
왠지 후덕한 볼살이 뻔뻔해 보이는 건 착각이리라. 삼복은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
“준비는 순조롭습니다.”
“역시 내 책사야. 진작 이랬으면 좀 좋아? 평소에도 이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란 말이야.”
“…….”
사지평이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모시는 주인의 칭찬이건만 잔뜩 구겨진 가사군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사지평을 막아 보려던 지난날의 노력이 어떻게 스러졌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식사하고 있으면 ‘나는 이렇게 상심 중인데 그 주둥이로 밥이 넘어가?’ 하고 구박해 체할 뻔하고, 큰일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맛있는 걸 처먹었기에 똥까지 싸냐, 주제넘게’ 하고 구박해 나오던 게 쏙 들어갈 뻔했다. 결국 가사군은 이틀 만에 항복하고 짐을 꾸릴 수밖에 없었다.
한번 마음을 정하니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항상 타박을 들어서 그렇지 가사군은 유능한 책사였다. 그는 사지평의 안전을 위해 이중, 삼중으로 대비했다.
뒷거래로 몰래 들여온 총도 몇 자루 챙기고 사지평 직속 무력 단체인 흑사자단의 반을 호위 인력으로 배치했다. 나머지 반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맹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준비할 게 한가득이라 동분서주했다.
분주히 움직이는 가사군과 달리 사지평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연무장 구석에 드러누운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꼰 다리를 까닥였다. 천하태평이었다. 그런 그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사낭(智蛇狼)이 꽤 분주하오. 사형, 어디 가요?”
“뭐야, 꺼져.”
“흐응……. 어디선가 위험의 냄새가 솔솔 풍겨 오네?”
파리 쫓듯 휘휘 내젓는 손길에도 인영은 개의치 않았다. 폭포수처럼 쏟아진 푸른 머리카락이 사지평의 코를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슬슬 사지평의 입꼬리가 비틀리려 하자 인영이 냉큼 뒤로 물러났다.
“관심 꺼. 다 알면서 왜 모른 척이야, 고자 새끼야.”
“내 양물이 고자인지 사형이 어떻게 아세요? 한번 확인해 보시려오?”
사지평의 독설에도 사내는 꽃처럼 웃으며 대꾸했다. 쯧, 혀를 찬 사지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멀찍이 물러난 사내를 보며 거리를 가늠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때릴 수 있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그 또한 눈치챈 사내가 가느다란 손으로 입을 막으며 홍소(哄笑), 입을 크게 벌리고 웃거나 떠들썩하게 웃음)했다.
“아하하. 무공 쓸 데가 그렇게 없어요? 이런 일에 쓸 생각을 다 하고? 너무 무서워 소제는 두렵습니다.”
“이년아. 교태 부리지 마라. 남들이 화화미인(花花美人)이라 하니 네가 정녕 계집인 줄 아느냐?”
“사형 빼고는 다 그렇게 생각하더이다. 사형도 소제를 이년, 저년으로 부르잖아요.”
사내는 얄궂게 웃으며 사지평에게 다가갔다.
화화미인(花花美人) 홍예.
얼핏 들으면 여인의 별호와 이름 같지만 홍예는 엄연히 사내였다. 서리처럼 창백한 피부, 청해의 바다처럼 푸른 머리카락과 눈썹, 분홍빛깔이 깃든 입술은 청초하면서도 농염했다. 사지평이 근접하기 힘든 절세가인이라면 홍예는 사내를 홀리는 요화(妖花)였다.
이는 그의 출신과도 상관이 깊었다. 얼음의 대지인 북해에서 태어난 홍예는 노예 사냥꾼에 의해 중원으로 끌려와 남창이 되었다. 아름다운 외모와 가냘픈 몸에 맞지 않게 독살스러웠던 그는 손님으로 오는 무림인을 꼬드겨 무공을 배웠다. 그리고 기어코 복수에 성공했다.
홍예를 판 노예 사냥꾼은 오체분시 되어 길거리에 버려졌고, 그를 산 기루는 하루아침에 망했다. 다 죽어 나자빠졌으니 기루를 열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복수를 마친 홍예를 거둔 건 당시 실력이 제법이라는 소문에 그를 찾았던 파천도제였다. 그리하여 홍예는 사자맹의 삼공자가 되었다.
홍예는 어려서 제자가 된 두 사형과 달리 이미 근골이 굳은 나이에 제자가 된 탓에 파천도제의 상승 무공은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큰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그의 염원은 복수였다. 그것을 이뤘으니 맹주 자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넘어설 엄두도 안 나는 실력을 갖춘 사지평이 있었다. 불가능할 게 뻔한데 맹주위 쟁탈전에 참여하거나 한 파벌에 손을 들어 주는 등의 어리석은 행동은 할 생각이 없었다.
묵단양이 일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정말 얌전히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형, 요즘 부서(腐鼠, 썩은 쥐) 새끼가 분주하던데. 그것과 연관이 있어요?”
“흥.”
홍예가 말한 썩은 쥐가 누굴 가리키는지 사지평이 모를 리 없었다.
“네 힘으로 안 되면 포기해. 내 힘 빌려서 복수할 생각 말고.”
“싫소. 그놈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건 사형뿐이니 날 떨어낼 생각은 마세요.”
심드렁하게 건넨 말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답으로 돌아왔다. 요요한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홍예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것만 봐도 묵단양에 대한 홍예의 증오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홍예 님, 진정하시지요.”
“홍예 님, 아름다운 얼굴이 상할까 우려됩니다.”
“홍예 님, 냉차입니다. 먹고 심화를 가라앉히시지요.”
무럭무럭 피어나는 살기에 어디선가 우르르 나타난 사내들이 홍예를 달랬다. 하나같이 관옥(冠玉)*에 비견될 만큼 아름다운 이들이었다. 그들은 안타까운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한껏 아부 섞인 말을 듣고서야 홍예는 천천히 표정을 풀었다. 반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사지평이 침을 탁 뱉었다.
“지랄한다. 썅, 토 나오네. 내가 말했지. 나하고 있을 땐 저 떨거지들 보이지 말라고.”
“사형이 먼저 시작하지 않았던가요? 일은 그놈이 먼저 저질렀어요. 내게 복수를 포기하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도 같다는 걸 사형도 잘 알잖아요.”
“그럼 그냥 죽어.”
“싫어요.”
홍예는 토라진 듯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고개를 팩 돌렸다. 사지평은 저걸 확, 하고 팔을 치켜들었다. 다분히 의식적인 행동이지만 사내들은 기겁하며 홍예의 앞을 막았다. 사지평의 지랄 맞은 성격을 아니 혹시나 해서였다.
울멍울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내들의 소리 없는 애원에 사지평이 발을 크게 굴렀다. 목구멍까지 치민 토기를 진각(震脚)으로 해소했다. 지면이 크게 진동하자 사내들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홍예만이 동일한 기세로 진각을 일으켜 미동 없이 버텼다.
“어쨌든 숨겨 봤자 소용없어요. 소제야 비보에 관심이 없으니 참여 안 한다지만 다른 애들도 그러던가요? 목인이와 연화는 지들끼리 깨 볶느라 제외해도 소소하고 귀수는 틀림없이 사형을 귀찮게 할걸요? 특히 귀수는 더 그렇죠.”
“소소 그년이야 묵단양 첩년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귀수는 왜? 걔 사부 따라갔잖아.”
“노느라 몰랐어요? 어제 먼저 돌아왔어요. 고리타분한 노친네 모임이라고 도망쳐 온 모양이던데요.”
“썅.”
“걘 사형을 좋아하니 쉽게 떨쳐 내진 못할 거예요.”
“내가 아니라 내 무력이겠지.”
“그게 그거죠. 사형이 평소처럼 가볍게 노는 거라면 그 아이도 관심 없겠지만 이번 일은 그런 단순한 게 아니잖아요? 비보는 누구나 탐내는 보물이니까요.”
“뭐? 그것들이 내 것을 탐낸다고?”
엄연히 말하면 ‘사지평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아독존인 사지평에게 비보는 이미 ‘자신의 것’이었다. 눈이 뒤집힌 미인을 보며 홍예는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생김새와 품성이 저리 따로 노니 어디 내놓기 창피할 지경이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아무튼 혹여 부서 새끼와 부딪친다면 소제 몫은 남겨 주세요.”
“그건 내 마음이고. 더 할 말 없으면 빨리 꺼져, 이년아.”
“어휴, 정말 매정하다니까―”
사지평이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젓자 홍예는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묵단양 일로 더는 사지평을 자극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의 성미를 지닌 사형이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홍예는 새초롬한 얼굴로 홱 몸을 돌렸다. 사뿐사뿐 걸어가는 홍예와 그 뒤를 따르는 화소단(花笑團)을 보며 사지평이 다시 한번 침을 탁 뱉었다.
“이것들 사지 한 군데는 부러뜨리고 가야 하나.”
졸지에 봉변당할 다른 이의 심정은 생각지도 않고 화풀이할 생각만 한가득한 그였다.
***
삼복은 흐뭇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어가는 노옹을 뒤따랐다. 평소와 같은 노옹의 모습을 보니 충격적이었던 대호와의 일이 기억에서 서서히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꼬르르르륵.
익숙한 소리에 삼복의 미소가 굳었다. 대체 얼마나 배고프면 배에서 쉴 새 없이 소리가 울릴까. 이제는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는 좀 더 걸음을 빨리했다.
삼복이 집에 도착한 건 하산한 지 반 시진(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울타리 문을 열자 노옹이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루 밑에 자리 잡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노옹, 잠시만.”
삼복은 둘러멨던 멧돼지를 내려놓고 마루에 걸터앉았다. 토시와 각반을 벗자 노옹이 냉큼 채 갔다. 마치 제 몫이라는 듯 창고로 나르는 모습이 잽싸기까지 했다. 그사이에 삼복은 사냥 도구들을 정리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이라 그런지 정리를 마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묘하게 쳐다보던 도사는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아담한 초옥은 허름하긴 했으나 질 좋은 황토를 썼는지 튼튼해 보였고 목재로 만든 창고까지 딸려 있었다.
가만히 초옥을 보던 도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초옥이 일반적인 주거 형태와는 매우 달랐다. 보통 산 인근의 주거 형태는 토루(土樓, 원형의 중층 건축으로 주거 구성원이 대부분 같은 성씨인 집합 주택)가 대부분인데 삼복의 집은 조금 이국적이었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내륙에 한족만 사는 것도 아니고 삼복도 어느 소수 민족이겠거니, 하고 이해했다. 도사가 사는 지역도 소수 민족이 지역민의 반에 가까웠다.
도사는 느릿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당 한쪽에 널려 있는 약초를 보며 나직이 감탄했다.
“도우, 저기 말리고 있는 게 약초인지요?”
“아, 네. 귀한 것은 팔고 나머지는 고약으로 만들어 다쳤을 때 써요.”
“오, 고약도 만들 줄 알다니…….”
“네, 좀…….”
삼복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혼자 살려면 대부분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그처럼 당당히 신분을 드러내고 살 수 없는 사람이라면 더 그랬다.
꼬르르르륵―
“허허허, 이것 참. 오늘따라 이놈이 말썽입니다그려.”
도사는 머쓱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
“앗, 시장하시죠? 여기 앉아 계세요. 바로 준비할게요.”
마루를 툭툭 두드린 삼복이 음식을 대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잘 벼린 칼과 오늘 잡은 멧돼지를 들고 창고 옆의 우물가로 향했다. 그리고 익숙하게 멧돼지를 해체했다. 가죽을 벗겨 내고 내장을 제거한 후 부위별로 각을 뜨는 손길이 정교하면서도 빨랐다.
막 살코기를 분리하던 삼복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도사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사님, 육식도 하세요?”
“…….”
“제가 잘 몰라서요. 가끔 마을에 오는 스님께선 화식(火食)을 안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혹 도사님도 고기를 못 드시면…….”
“어, 어험. 금욕지도(禁慾至道)라지만 빈도 또한 한낱 인간일진대 어찌 욕구를 완전히 버리겠습니까. 절제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의 본성에 충실한 것도 옳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삼복이 되묻자 도사는 싱긋 웃으며 단호히 답했다.
“고기, 좋아합니다.”
“…….”
유난히 ‘고기’란 말에 힘이 들어간 느낌이었다. 도사의 넉넉한 풍채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삼복은 떨떠름한 얼굴로 작업을 계속했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삼복은 소반 위에 몇 가지의 나물 무침과 조리한 고기를 올려 마루에 놓았다.
“오오오!”
향긋한 내음에 도사는 체면도 잊고 감탄을 내뱉었다. 준비하는 과정을 봤을 땐 별것 없었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다. 간단한 나물볶음에 찐 고기뿐인데도 냄새가 무척 향긋했다.
“드세요, 도사님.”
집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도사는 냉큼 고기 한 점을 집었다. 입에 넣고 느릿하게 씹던 그는 번쩍 눈을 홉떴다. 입 안 가득 탁 퍼지는 육즙, 뒤이어 스며드는 약초의 향까지…… 풍미가 대단했다. 도사는 연신 음음, 소리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차 그의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노옹, 네 몫.”
그사이에 삼복은 노옹 몫으로 빼 둔 고기를 건넸다. 잡은 사냥감은 공정하게 나눈다는 약속대로 접시에 수북하게 쌓은 고기가 노옹의 몫으로 돌아갔다. 식용 가능한 약초와 함께 찐 삼복표 고기찜은 노옹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역시나 노옹은 허겁지겁 접시를 비웠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고개를 돌린 삼복이 깜짝 놀랐다. 고기는 온데간데없고 그릇이 텅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많던 고기를 다 먹었음에도 도사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차마 더 달란 소리는 못하고 입맛만 쩝쩝 다시는 게 애처로울 정도였다. 삼복은 어쩔 수 없이 내일 몫의 고기까지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충 배를 채운―도사 기준이다― 도사는 그제야 자신에 대해 밝혔다.
“빈도는 청해의 곤륜산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자 도(道)를 닦는 청인이라 합니다.”
“아. 저, 저는 삼복입니다.”
“하하. 예, 삼복 도우. 빈도는 그냥 도사 나부랭이라고 해도 되니 편하게 부르십시오.”
“예, 청 도사님.”
‘청인’은 성명이 아니라 도호이니 청 도사는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청인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에게 호칭은 거추장스러운 허례허식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