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 일러두기
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 ”로 일본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안전한 남자
1화
Prologue 난 안전한 남자가 아니야
그녀는 숨을 쌕쌕거리며 남자의 집 안을 서성였다. 젖은 손을 허벅지에 비비고 마른 입술 매만지기를 여러 번. 더는 참지 못하고 욕실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쏴아―’
샤워기 물줄기 아래 선 남자는 두 눈 질끈 감고 샴푸를 하다 문 쪽을 돌아봤다. 그 바람에 샴푸 거품이 한 눈을 찔렀다.
‘쿵쿵쿵.’
두 번을 넘긴 노크 소리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긴 팔로 샤워기를 내려 빠른 손놀림으로 몸을 씻어 냈다.
목덜미로부터 복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품들이 발끝에서 아스러진다. 물거품의 소멸과 함께 드러난 자신의 남성을 내려다봤다.
‘내 과거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감당할 수 있을까.’
엉킨 머릿속도 거품 따라 아스러질 수 있다면……. 찰나나마 기쁜 상상이었다.
저 문밖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와는 많은 밤을 보냈다. 두 사람은 분명 같이 자는 사이지만 동시에 같이 자는 사이는 아니었다. 시쳇말로 손만 잡고 자는 사이.
‘오늘 하룻밤만, 안전한 남자가 돼 줘요…….’
첫날 밤, 그녀가 건넸던 말이었다. 딱 오늘처럼 찬물로 몸을 씻으면 오돌토돌 닭살이 올라오던 밤이었다.
‘안전한 남자? 그게 뭔데요.’
‘내가 잠들 때까지 안아 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냥, 안아 줄 사람.’
그 솔직한 눈동자 앞에서 아득해졌다. 홀려 버렸는지도. 그리고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서적 공복감은 그의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테마이자 족쇄였다. 그런데 처음 본 남자한테 대뜸 잠들 때까지 안아 다독여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라니…….
‘어째서 저런 말을 구걸처럼 들리지 않게 뱉을 수 있는 거지?’
저 여자한테서라면 자신도 이해받을 수 있을 거란 어떤 확신을 했던 것도 같다. 기꺼이 그녀의 ‘안전한 남자’가 되기로 했다. 그녀가 모르는 내밀하고도 지난한, 과거의 시간들을 혀 밑에 감춘 채…….
지난날을 들킨다면 그녀와 나눈 숱한 밤들은 모두 물거품을 따라 아스러질 거라 신념했다. 스스로도 몸서리쳐질 만큼 잘 알고 있으니까.
‘난, 절대 안전한 남자가 아니야…….’
*
5년 전. 그는 지금의 그녀와 정반대인 한 여자애를 알고 지냈다. 고작 스물 언저리의 여자라면, 모름지기 위험한 남자에게 미혹당하는 법이었다. 안전한 남자한테선 일말의 매력도 느끼지 못하던 여자에게 그의 존재는 마냥 아름다울 뿐이었다.
스물둘이 시작될 무렵의 그는 내리막길 위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 같았다. 위험하고 또 위험한 주제에 더는 그럴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표정으로 시간 속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마치 파멸을 맞으러 가는 길인 양. 철이 없던 여자의 눈엔 그의 추락마저 슈퍼카의 드리프트처럼 근사해 보였다.
빨갛게 들뜬 맘으로 온통 뜨거웠던 여자는 제 사랑에 심취해 그의 고통―이를테면 평화로운 얼굴 이면의 위태로움― 같은 건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덕분에 이사비 완전 굳었다. 나 때문에 힘들었지?”
“괜찮아.”
그는 좁다란 방구석에 여자의 마지막 이삿짐을 들여놓고는 손을 털었다. 이사 좀 도와 달라고 무려 한 달을 졸라 엎드려 받은 절이었다. 그래도 여자는 감격스러웠다. 그는 조른다고 봐 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반지하 방에 용달도 없이 이사한다니 불쌍해 보였던가. 동정으로 선행을 베풀 남자도 아니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
이사를 마쳤으니 그의 역할은 끝이었다. 둘 사이에 시공간이 멈춘 듯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까부터 책상 위에 발딱 올라앉아 있던 여자는 애꿎은 책상만 손톱 끝으로 피아노 치듯 두드렸다.
“무슨 독서실 책상을 아직도 쓰냐.”
흡사 독서실 책상 같은 구식 학생용 책상을 보며 그가 말했다.
“어? 하하……. 그러게. 웃기지? 난 이게 좋더라구. 없으면 공부가 안 돼.”
“형광등도 달렸네.”
여자가 중학교 시절부터 탐닉해 온 그의 얼굴은 볼 때마다 새삼 감탄하게 되는 외모였다. 남자치고 흰 피부는 결점 없이 깨끗했고, 선이 돋보이는 서늘한 얼굴이지만 눈이 따뜻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수영이나 무용을 하리라 짐작할 법한 체형이었다. 밸런스 좋은 몸을 나른하게 구부리는 자세가 어울렸다. 앞머리가 콧등을 간질이자 손가락빗으로 아무렇잖게 쓸어 넘기는, 바로 저런 모습에 반했던 것 같다.
긴 세월 끈질기게 곁을 맴돌아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가 이사를 도와주러 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눈부셔서 다른 세계 사람 같았던 남자와 한방에 같이 있다. 동창이라기보다 차라리 스타의 팬 같았었는데…… 지금 이렇게 여자의 자취방에 같이.
이럴 땐 무슨 말을 어떻게, 무슨 표정을 어떻게……. 정신없이 이삿짐을 나를 때까진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더는 할 일이 없어진 지금 이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내, 내가 형광등 켜지는 거 보여 줄까?”
여자는 딱 죽고만 싶었다. 책상 형광등 켜기가 마술도 아니고. 고작 이따위 것으로 그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그는 저 문을 나서며 돌아갈 테고,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이렇게 단둘만의 공간에 놓인 사치스러운 행복 따위도 다시없을 테다. 여자는 숨어 버리기라도 하듯 책상 형광등에 고개를 처박았다.
“옮길 때 삐뚤어졌나? 이게 지금은 잘 안 켜지는데 이렇게 잘…… 맞추면…… 어라? 이상하네. 잠깐만 있어 봐. 이렇게 돌려서……!”
순간, 허리에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큰 손바닥이 등허리 전체를 덮더니 양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가볍게 쥐듯 어루만졌다. 미동도 차마 못 하고 침만 겨우 꼴깍 삼켰다.
“왜…… 안 켜지지? 아, 안 되나 보다. 고장, 났나 봐…….”
포기하고 책상 형광등에서 손을 떼자, 그의 손도 허리춤에서 떨어졌다. 겨우 몸을 돌렸다. 용기 내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코앞에 와 서 있던 그의 눈은 이미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가만한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던 그때 ‘파밧’ 하고 천장의 형광등 불이 꺼졌다. 밖은 벌써 어둑해져 순식간에 방 안에 어둠이 내렸다.
“어? 저건 또 왜…… 명불허전 반지하. 형광등 두 개 사 와야겠네. 너 갈 때 따라 나가면 되겠다.”
아직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여자는 내려오려 책상 앞 의자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그가 의자를 치웠다.
“……!”
그리고 의자가 있던 자리에 그의 발을 놓았다. 자기 두 종아리 사이로 들어선 남자의 다리가 느껴지는 순간부터 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안 보인다야……. 더 늦기 전에 얼른 나가서 사 와야…….”
그 순간, 등 뒤에서 책상 형광등 불이 깜빡이다 끝내 켜졌다. 방 안에 책상 있는 곳만 밝았다. 그는 자꾸만 여자의 눈과 마주치려 했다. 빤히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 여자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연신 책상을 피아노 삼아 두드렸다.
“봐…… 내가, 켜진다고 했지?”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따…….’
그의 손가락이 여자의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이제야 둘은 눈을 맞췄다. 그가 여자의 치마 속 허벅지로 손을 옮기며 나지막이 물었다.
“해도 돼?”
‘좀 더 로맨틱한 말은 없었니?’
원망 어린 눈 속에 눈물을 그렁하게 담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 남짓의 여자는 ‘로맨틱하게 꼬셔 주기 전엔 못 줘’라든가, 손익 분기점은 D점에서 형성하는지 E점에서 형성하는지 따위를 계산할 줄 몰랐다.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도 나를 원하고 있구나’ 그 사실 하나만 감동적이면 되는 거였다.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촌스럽게. 그만 울어야지’만 연거푸 되뇌었다.
그동안 그는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여자의 팬티를 벗겨 냈다. 한 손으론 바지 지퍼를 내리고 남은 손으론 제 목에서 여자의 팔을 가져와 다시 물었다.
“후회, 안 할 거지 넌……?”
‘난 네 눈이 좋아. 항상 이렇게 촉촉한 눈…….’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왠지 슬프게 보이던 그의 눈이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아파 와 목이 멨다.
“왜 울어. 바보같이…….”
그는 눈물을 닦아 줬다.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스윽 팔로 남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어느덧 바짝 다가온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며 키스하는 상상을 여러 번 했더랬다.
‘행복해. 난, 다른 여자들보다 더 똑똑하려고 했는데……. 똑똑하면 이렇게 쉽게 끄덕이면 안 되는 건데……. 몰라, 그냥 행복할래. 사랑해…….’
마음이 행복으로 벅찬 여자의 첫 키스는 과격하고 서툴렀다. 상대 입술의 통통한 부피감을 가늠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치아가 그의 입술을 찍듯 할퀴어 오자 그는 가만 엄지를 들어 여자의 입술에 댔다. 마치 진정하라는 듯.
그제야 얌전해진 여자는 그가 이끄는 대로 입술을 맡겼고 그러자 신세계로 가는 문이 열렸다. 달큰하고 미지근한 혀의 감촉과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입술 새로 흘러드는 바람의 촉감까지.
‘이런 게 키스구나…….’
맥이 풀렸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꾸만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사 날 굳이 치마를 입었던 건 확실히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이렇게 만들 계산은 맹세코 없었다.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던 그를 이쪽에서 먼저 유혹한다는 건, 감히 될 법한 상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멋대로 달아오른 몸에 여자의 가운데가 진작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안 돼. 키스만으로 치마까지 적셔 버린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아!’
이럴 작정으로 이사를 도와 달라 칭얼댄 여자처럼 보일까 봐 두렵고, 창피했다. 그가 다리 사이로 깊게 들어올수록 치마 밑 습기와 온도가 전해질 것만 같아 자꾸만 엉덩이를 뒤로 뺐다.
‘제발. 더는……! 그렇지만, 키스가 너무…….’
꼭 내일이 없을 사람처럼 적나라하게 쏟아붓는 그의 자극적 키스에 결국 모든 생각이 멈춰 버렸다. 수치심마저도.
넋을 놓고 빠져 있던 그 순간, 그가 여자의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허리를 양다리로 감은 채 아직도 입술에만 빠져 있는 여자의 엉덩이를 제 쪽으로 세차게 끌어당겼다.
“아!”
여자는 그제야 좀 전에 하기로 했던 게 키스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그의 입술을 놓았다. 밀쳐 내고 싶을 만큼 아려 올수록 그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흡. 상……. 아! 아아. 상…….”
그의 이름은 ‘상’이었다. 이씨 성에 이름자는 상. 선생님들은 ‘이상’이라 불렀고 친구들은 ‘상이’라고 불렀다. 여자는 달리 부르고 싶어 외자 그대로 ‘상’이라고 불렀다. 오직 머릿속으로만. 소리 내 그의 이름을 불러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읏. 상, 들려? 너 이름 부르는 내 목소리…… 듣고 있지, 상? 흡!”
“…….”
움직임이 빨라지고 숨이 거칠어질수록 그의 시선은 여자 등 뒤의 저 책꽂이로 꽂혔다. 자꾸만 흔들리는 게 곧 와르르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결국 한 팔을 뻗어 책꽂이를 잡았다. 덕분에 안으로 더욱 깊어지는 살결에 여자의 비명이 소리를 높였다.
놀란 스물둘의 남자는 그제야 여자의 눈을 봤다. 몸을 맞댄 뒤 처음이었지만 여자는 깨닫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안대도 그건 전혀 중요치 않은 부분이었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하고는 세차게 끌어안고 마지막 30초를 빠르게 움직였다.
“읍! 으흠…… 상, 상…… 상……!”
있는 힘껏 참고 또 참다 그의 이름을 연거푸 몇 번을 불렀을 때야 동작이 잠잠해졌다. 그는 그대로 여자의 어깨를 한참을 안고 서 있었고, 여자 역시 책상에 걸터앉은 그대로 안겨 있었다.
“하아…… 후우…….”
숨을 고르다 마지막을 깊게 내뱉더니 그가 또다시 물었다.
“여기 집세, 내가 반절 낼까?”
“……?”
그가 몸을 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랑, 같이 살 수 있겠어?”
촌스럽게. 정말 그만 울어야 하는데,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나 가정에 취미 없는 거 알지? 너 애 셋 낳아 키우는 게 꿈이라며.”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욕심까지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 남자랑 같이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관심 없었다. ‘엉엉’ 소리까지 내며 그의 목에 매달려 한참을 울었다. 살을 섞는 순간들에 수없이 이름을 불러도 단 한 번의 대꾸가 없는 것이 남자답다 느낄 나이였다. 그즈음엔 대개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그렇게 울 수가 있었다.
스물을 갓 넘긴 그 퍼렇던 날들에는, 다들 그랬다.
본문 중에 한국어 대화는 “ ”로 일본어 대화는 「 」로 표기했습니다.
안전한 남자
1화
Prologue 난 안전한 남자가 아니야
그녀는 숨을 쌕쌕거리며 남자의 집 안을 서성였다. 젖은 손을 허벅지에 비비고 마른 입술 매만지기를 여러 번. 더는 참지 못하고 욕실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쏴아―’
샤워기 물줄기 아래 선 남자는 두 눈 질끈 감고 샴푸를 하다 문 쪽을 돌아봤다. 그 바람에 샴푸 거품이 한 눈을 찔렀다.
‘쿵쿵쿵.’
두 번을 넘긴 노크 소리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긴 팔로 샤워기를 내려 빠른 손놀림으로 몸을 씻어 냈다.
목덜미로부터 복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거품들이 발끝에서 아스러진다. 물거품의 소멸과 함께 드러난 자신의 남성을 내려다봤다.
‘내 과거를 알게 된다면…… 그녀는 감당할 수 있을까.’
엉킨 머릿속도 거품 따라 아스러질 수 있다면……. 찰나나마 기쁜 상상이었다.
저 문밖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와는 많은 밤을 보냈다. 두 사람은 분명 같이 자는 사이지만 동시에 같이 자는 사이는 아니었다. 시쳇말로 손만 잡고 자는 사이.
‘오늘 하룻밤만, 안전한 남자가 돼 줘요…….’
첫날 밤, 그녀가 건넸던 말이었다. 딱 오늘처럼 찬물로 몸을 씻으면 오돌토돌 닭살이 올라오던 밤이었다.
‘안전한 남자? 그게 뭔데요.’
‘내가 잠들 때까지 안아 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냥, 안아 줄 사람.’
그 솔직한 눈동자 앞에서 아득해졌다. 홀려 버렸는지도. 그리고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서적 공복감은 그의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테마이자 족쇄였다. 그런데 처음 본 남자한테 대뜸 잠들 때까지 안아 다독여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라니…….
‘어째서 저런 말을 구걸처럼 들리지 않게 뱉을 수 있는 거지?’
저 여자한테서라면 자신도 이해받을 수 있을 거란 어떤 확신을 했던 것도 같다. 기꺼이 그녀의 ‘안전한 남자’가 되기로 했다. 그녀가 모르는 내밀하고도 지난한, 과거의 시간들을 혀 밑에 감춘 채…….
지난날을 들킨다면 그녀와 나눈 숱한 밤들은 모두 물거품을 따라 아스러질 거라 신념했다. 스스로도 몸서리쳐질 만큼 잘 알고 있으니까.
‘난, 절대 안전한 남자가 아니야…….’
5년 전. 그는 지금의 그녀와 정반대인 한 여자애를 알고 지냈다. 고작 스물 언저리의 여자라면, 모름지기 위험한 남자에게 미혹당하는 법이었다. 안전한 남자한테선 일말의 매력도 느끼지 못하던 여자에게 그의 존재는 마냥 아름다울 뿐이었다.
스물둘이 시작될 무렵의 그는 내리막길 위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 같았다. 위험하고 또 위험한 주제에 더는 그럴 수 없을 만큼 평화로운 표정으로 시간 속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마치 파멸을 맞으러 가는 길인 양. 철이 없던 여자의 눈엔 그의 추락마저 슈퍼카의 드리프트처럼 근사해 보였다.
빨갛게 들뜬 맘으로 온통 뜨거웠던 여자는 제 사랑에 심취해 그의 고통―이를테면 평화로운 얼굴 이면의 위태로움― 같은 건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덕분에 이사비 완전 굳었다. 나 때문에 힘들었지?”
“괜찮아.”
그는 좁다란 방구석에 여자의 마지막 이삿짐을 들여놓고는 손을 털었다. 이사 좀 도와 달라고 무려 한 달을 졸라 엎드려 받은 절이었다. 그래도 여자는 감격스러웠다. 그는 조른다고 봐 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반지하 방에 용달도 없이 이사한다니 불쌍해 보였던가. 동정으로 선행을 베풀 남자도 아니었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
이사를 마쳤으니 그의 역할은 끝이었다. 둘 사이에 시공간이 멈춘 듯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까부터 책상 위에 발딱 올라앉아 있던 여자는 애꿎은 책상만 손톱 끝으로 피아노 치듯 두드렸다.
“무슨 독서실 책상을 아직도 쓰냐.”
흡사 독서실 책상 같은 구식 학생용 책상을 보며 그가 말했다.
“어? 하하……. 그러게. 웃기지? 난 이게 좋더라구. 없으면 공부가 안 돼.”
“형광등도 달렸네.”
여자가 중학교 시절부터 탐닉해 온 그의 얼굴은 볼 때마다 새삼 감탄하게 되는 외모였다. 남자치고 흰 피부는 결점 없이 깨끗했고, 선이 돋보이는 서늘한 얼굴이지만 눈이 따뜻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수영이나 무용을 하리라 짐작할 법한 체형이었다. 밸런스 좋은 몸을 나른하게 구부리는 자세가 어울렸다. 앞머리가 콧등을 간질이자 손가락빗으로 아무렇잖게 쓸어 넘기는, 바로 저런 모습에 반했던 것 같다.
긴 세월 끈질기게 곁을 맴돌아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그가 이사를 도와주러 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 눈부셔서 다른 세계 사람 같았던 남자와 한방에 같이 있다. 동창이라기보다 차라리 스타의 팬 같았었는데…… 지금 이렇게 여자의 자취방에 같이.
이럴 땐 무슨 말을 어떻게, 무슨 표정을 어떻게……. 정신없이 이삿짐을 나를 때까진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더는 할 일이 없어진 지금 이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
“내, 내가 형광등 켜지는 거 보여 줄까?”
여자는 딱 죽고만 싶었다. 책상 형광등 켜기가 마술도 아니고. 고작 이따위 것으로 그를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그는 저 문을 나서며 돌아갈 테고,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이렇게 단둘만의 공간에 놓인 사치스러운 행복 따위도 다시없을 테다. 여자는 숨어 버리기라도 하듯 책상 형광등에 고개를 처박았다.
“옮길 때 삐뚤어졌나? 이게 지금은 잘 안 켜지는데 이렇게 잘…… 맞추면…… 어라? 이상하네. 잠깐만 있어 봐. 이렇게 돌려서……!”
순간, 허리에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큰 손바닥이 등허리 전체를 덮더니 양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가볍게 쥐듯 어루만졌다. 미동도 차마 못 하고 침만 겨우 꼴깍 삼켰다.
“왜…… 안 켜지지? 아, 안 되나 보다. 고장, 났나 봐…….”
포기하고 책상 형광등에서 손을 떼자, 그의 손도 허리춤에서 떨어졌다. 겨우 몸을 돌렸다. 용기 내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코앞에 와 서 있던 그의 눈은 이미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가만한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던 그때 ‘파밧’ 하고 천장의 형광등 불이 꺼졌다. 밖은 벌써 어둑해져 순식간에 방 안에 어둠이 내렸다.
“어? 저건 또 왜…… 명불허전 반지하. 형광등 두 개 사 와야겠네. 너 갈 때 따라 나가면 되겠다.”
아직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여자는 내려오려 책상 앞 의자에 발을 디뎠다. 그런데, 그가 의자를 치웠다.
“……!”
그리고 의자가 있던 자리에 그의 발을 놓았다. 자기 두 종아리 사이로 들어선 남자의 다리가 느껴지는 순간부터 그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안 보인다야……. 더 늦기 전에 얼른 나가서 사 와야…….”
그 순간, 등 뒤에서 책상 형광등 불이 깜빡이다 끝내 켜졌다. 방 안에 책상 있는 곳만 밝았다. 그는 자꾸만 여자의 눈과 마주치려 했다. 빤히 쳐다보는 것이 부끄러워 여자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연신 책상을 피아노 삼아 두드렸다.
“봐…… 내가, 켜진다고 했지?”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따…….’
그의 손가락이 여자의 손가락을 멈추게 했다. 이제야 둘은 눈을 맞췄다. 그가 여자의 치마 속 허벅지로 손을 옮기며 나지막이 물었다.
“해도 돼?”
‘좀 더 로맨틱한 말은 없었니?’
원망 어린 눈 속에 눈물을 그렁하게 담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 남짓의 여자는 ‘로맨틱하게 꼬셔 주기 전엔 못 줘’라든가, 손익 분기점은 D점에서 형성하는지 E점에서 형성하는지 따위를 계산할 줄 몰랐다. 오직 ‘내가 좋아하는 이 사람도 나를 원하고 있구나’ 그 사실 하나만 감동적이면 되는 거였다. 그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촌스럽게. 그만 울어야지’만 연거푸 되뇌었다.
그동안 그는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여자의 팬티를 벗겨 냈다. 한 손으론 바지 지퍼를 내리고 남은 손으론 제 목에서 여자의 팔을 가져와 다시 물었다.
“후회, 안 할 거지 넌……?”
‘난 네 눈이 좋아. 항상 이렇게 촉촉한 눈…….’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왠지 슬프게 보이던 그의 눈이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아파 와 목이 멨다.
“왜 울어. 바보같이…….”
그는 눈물을 닦아 줬다.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스윽 팔로 남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어느덧 바짝 다가온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며 키스하는 상상을 여러 번 했더랬다.
‘행복해. 난, 다른 여자들보다 더 똑똑하려고 했는데……. 똑똑하면 이렇게 쉽게 끄덕이면 안 되는 건데……. 몰라, 그냥 행복할래. 사랑해…….’
마음이 행복으로 벅찬 여자의 첫 키스는 과격하고 서툴렀다. 상대 입술의 통통한 부피감을 가늠할 새도 없이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치아가 그의 입술을 찍듯 할퀴어 오자 그는 가만 엄지를 들어 여자의 입술에 댔다. 마치 진정하라는 듯.
그제야 얌전해진 여자는 그가 이끄는 대로 입술을 맡겼고 그러자 신세계로 가는 문이 열렸다. 달큰하고 미지근한 혀의 감촉과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입술 새로 흘러드는 바람의 촉감까지.
‘이런 게 키스구나…….’
맥이 풀렸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꾸만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사 날 굳이 치마를 입었던 건 확실히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이렇게 만들 계산은 맹세코 없었다. 눈도 마주치기 어려웠던 그를 이쪽에서 먼저 유혹한다는 건, 감히 될 법한 상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멋대로 달아오른 몸에 여자의 가운데가 진작부터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안 돼. 키스만으로 치마까지 적셔 버린 사실은 들키고 싶지 않아!’
이럴 작정으로 이사를 도와 달라 칭얼댄 여자처럼 보일까 봐 두렵고, 창피했다. 그가 다리 사이로 깊게 들어올수록 치마 밑 습기와 온도가 전해질 것만 같아 자꾸만 엉덩이를 뒤로 뺐다.
‘제발. 더는……! 그렇지만, 키스가 너무…….’
꼭 내일이 없을 사람처럼 적나라하게 쏟아붓는 그의 자극적 키스에 결국 모든 생각이 멈춰 버렸다. 수치심마저도.
넋을 놓고 빠져 있던 그 순간, 그가 여자의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의 허리를 양다리로 감은 채 아직도 입술에만 빠져 있는 여자의 엉덩이를 제 쪽으로 세차게 끌어당겼다.
“아!”
여자는 그제야 좀 전에 하기로 했던 게 키스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그의 입술을 놓았다. 밀쳐 내고 싶을 만큼 아려 올수록 그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흡. 상……. 아! 아아. 상…….”
그의 이름은 ‘상’이었다. 이씨 성에 이름자는 상. 선생님들은 ‘이상’이라 불렀고 친구들은 ‘상이’라고 불렀다. 여자는 달리 부르고 싶어 외자 그대로 ‘상’이라고 불렀다. 오직 머릿속으로만. 소리 내 그의 이름을 불러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읏. 상, 들려? 너 이름 부르는 내 목소리…… 듣고 있지, 상? 흡!”
“…….”
움직임이 빨라지고 숨이 거칠어질수록 그의 시선은 여자 등 뒤의 저 책꽂이로 꽂혔다. 자꾸만 흔들리는 게 곧 와르르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결국 한 팔을 뻗어 책꽂이를 잡았다. 덕분에 안으로 더욱 깊어지는 살결에 여자의 비명이 소리를 높였다.
놀란 스물둘의 남자는 그제야 여자의 눈을 봤다. 몸을 맞댄 뒤 처음이었지만 여자는 깨닫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안대도 그건 전혀 중요치 않은 부분이었다.
“조금만 참아, 조금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하고는 세차게 끌어안고 마지막 30초를 빠르게 움직였다.
“읍! 으흠…… 상, 상…… 상……!”
있는 힘껏 참고 또 참다 그의 이름을 연거푸 몇 번을 불렀을 때야 동작이 잠잠해졌다. 그는 그대로 여자의 어깨를 한참을 안고 서 있었고, 여자 역시 책상에 걸터앉은 그대로 안겨 있었다.
“하아…… 후우…….”
숨을 고르다 마지막을 깊게 내뱉더니 그가 또다시 물었다.
“여기 집세, 내가 반절 낼까?”
“……?”
그가 몸을 떼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랑, 같이 살 수 있겠어?”
촌스럽게. 정말 그만 울어야 하는데,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눈물이 나고 말았다.
“나 가정에 취미 없는 거 알지? 너 애 셋 낳아 키우는 게 꿈이라며.”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욕심까지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 남자랑 같이 있는 것 외엔 아무것도 관심 없었다. ‘엉엉’ 소리까지 내며 그의 목에 매달려 한참을 울었다. 살을 섞는 순간들에 수없이 이름을 불러도 단 한 번의 대꾸가 없는 것이 남자답다 느낄 나이였다. 그즈음엔 대개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그렇게 울 수가 있었다.
스물을 갓 넘긴 그 퍼렇던 날들에는, 다들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