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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시 5년 후.
‘쿵쿵쿵.’
수인은 욕실 문을 두드리며 그를 재촉했다. 이내 문이 열리고, 드디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상. 그는 미처 다 입지 못한 후드 티를 꿰며 서 있었다. 급하게 입느라 모자가 씌워진 채로 나오며 그는 등 뒤로 손을 뻗어 욕실 문을 닫았다.
“윽!”
수인은 다급하게 그의 옷을 낚아채 끌어당기며 들이받듯 안겼다. 있는 힘껏 품으로 달려드는 그녀의 기세에 밀려 욕실 문에 쿵 하고 그의 등이 닿았다. 상은 귀엽다는 듯 살풋 웃으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데?”
수인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큰 심호흡을 반복했다. 마치 공황 발작에 봉투 호흡이라도 하는 양 그의 체취를 깊게 빨아들였다. 상은 문득 자신의 후드 티 끄트머리를 잡은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본다. 이제야 그녀의 예사롭지 않은 심사를 눈치챈다.
“괜찮아? 응?”
수인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무너지듯 스러졌다. 따라 주저앉으며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이내 조용한 흐느낌이 이어진다. 제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슬픔이 심장에 박혀 와 아프다.
“당신을 어쩌면 좋냐…….”
분명 혼자라는 생각에 울컥했을 거다. 수인이 그를 찾아왔다는 건 으레 그런 심정의 날이었으니까. 언제나 포커페이스를 단정히 유지했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5년 전의 여자애는 그가 달래 주면 금세 웃었더랬다.
하지만 이 여자는 다르다. 대체, 당신을 어쩌면 좋을까. 상은 자신의 긴 양다리를 오므려 그녀를 다리 사이에 가뒀다. 그러곤 품듯이 꼬옥 보듬었다.
“안전벨트.”
그의 다리가 만들어 준 안전지대 속에서 수인은 차츰 마음을 진정시킨다. 좀 더 안전하기 위해, 안락한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그런 수인의 정수리 끝에 턱을 괴고 아담하고 볼록한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녀의 불안을 어르고 달래며 동시에 위로받는 상이였다. 품 안 그녀의 체온은 그의 공허를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삐― 삐―’
그녀의 등 너머로 제대로 닫히지 않은 현관문을 다시 닫으라며 도어록 경고음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상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여자를 품는 순간에도 흔들리는 책꽂이를 신경 쓰던 남자가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난 당신이 찾는 안전한 남자가 아니야. 하지만, 당신은 날 안전하게 해. 5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당신을 기다려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면…… 믿겠어? 내 빈방은 오직 당신만으로 채울 수 있다는 걸,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을…… 당신은 믿을 수 있을까.’
더는 없을 줄 알았던 사랑을 다시 만났다. 그의 모든 걸 흔들고, 무너뜨려도 좋을 여자. 상은 수인을 더 꼭 끌어안았다.



1 하룻밤만 안전한 남자가 돼 줘요


신주쿠의 밤은 네온사인으로 휘황했다. 여기저기 호객 행위가 한창인 가운데 수인은 픽업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기말 스타일의 노란 바람머리를 한 캬바쿠라 삐끼는 대어를 낚은 표정으로 수인을 훑었다.
「오오. 아가씨 부내가 줄줄 흐르네. 좋은 데 있는데 놀다 갈래요?」
뉴트럴한 핑크베이지 계통의 팬츠 정장에 재킷을 캐주얼하게 걸쳐 입은 수인은 당연한 듯 자신을 일본 여자로 오해하고 있는 삐끼를 곁눈으로 바라봤다.
단정한 아이라인과 버건디 립스틱 외엔 변변한 색조 메이크업도 없는 수인의 깔끔한 얼굴은 중국에 가면 중국인, 일본에선 일본인으로 무리 없이 묻히곤 했다. 어딘가 모르게 이국적이란 평가에 일일이 변명해야 하는 나라는 동양에선 한국뿐이었다. 때문에 차라리 마음 편한 해외 취재 건은 웬만하면 거절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본행은 초장부터 삐걱거린다.
「우리 가게 바로 저긴데, 지금 나랑 같이 어때요? 완벽한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공항까지 차를 보낸다던 인터뷰이는 신주쿠까지만 혼자 와 달라며 급작스레 동선을 변경시키더니, 그녀를 20여 분이 지나도록 길 위에 방치하고 있었다. 성가신 호객 행위가 이어지자 수인은 어깨 위 카메라 가방 줄을 고쳐 잡고 인도 아래로 내려갔다.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 그녀 앞에 은색 롤스로이스가 섰다.
“마, 한참 기다렸제? 타소, 타.”
저 50대 남자는 맨주먹 하나로 일본에 건너가 아카사카에서 5성급 호텔을 일궜단다. 다음 달 경제지 CEO 인터뷰 페이지의 주인공, 수인의 취재원이었다.
“이래 미인 기자님이 오는 줄 알았음 내 단디 하고 나오는 긴데 말이야. 오늘 밤 대접 하나는 단디 할꾸마! 여 재밌는 거 많습니다. 하하!”
느낌이 좋지 않다.

“내 호텔까지 와가, 방 구경도 않고 가모 내사 마 안 섭하겠나!”
여자로 태어났음에 감사 기도라도 올려야 할까. 신이 주신 육감, 여자의 촉은 언제나 최고의 적중률을 자랑한다. 롤스로이스에 어울리지 않는 저렴한 말투로 차에서부터 은근슬쩍 수인의 손을 주무르더니, 호텔 구석구석 친히 소개하면서 에스코트를 핑계 삼아 어깨와 허리를 수시로 훑는 성공 CEO님이셨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서울에서 또 일정이 있어서요.”
“에헤이……. 한창 이삘 때 일만 하고. 그카믄 늙어져 후회한대이. 며칠만 있다 가아.”
성공 CEO님은 아예 임직원 전용 통로로 이끌었다. 눈짓을 보내자 벨보이도 쭈뼛쭈뼛 물러갔다.
“우리 스위트 잘해 놨다. 말라꼬 두바이 안 부럽게 돈을 처발라 놨겠나! 다 이럴 때 좋자는 거 아이겠나…….”
수인은 등허리를 느리게 쓸어내리는 둔탁한 검지의 감촉에 속눈썹 하나도 꿈틀 않고 평온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스위트룸이라뇨.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이렇게 큰 신세 지기는 좀…….”
“스읍! 내 절대로 두 번은 안 권한다! 싫다는데 억지로 그카는 건 싸나이가 아이그든. 진짜로. 딱! 하룻밤만 있다 가자.”
“아무리 하룻밤이라고 하셔도…….”
“그으래! 딱 하룻밤만 여 묵고, 낼 밝으면 내 직접 운전해가 공항 앞에 턱 하니 뫼셔다 준다꼬.”
드디어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정 그러시다면 오늘 하루만…….”
수인의 수긍에 성공 CEO님의 얼굴엔 금세 화색이 돌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치댈 요량으로 엉덩이를 향해 손을 뻗는데, 수인은 얼른 몸을 빼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어잉?”
“그럼, 덕분에, 오늘 밤 편히 쉬다 가겠습니다.”
수인은 닫히는 문틈 새로 성공 CEO님을 향해 정중하고 우아한 묵례를 건넸다.
“저! 저……!”
황망한 눈으로 어버버 하고 선 성공 CEO님은 닫혀 버린 엘리베이터 금속 문에 비친 자신을 머쓱하게 바라봤다.

스위트룸 복도에 들어서자 성공 CEO님께서 대기시켜 놓은 담당 컨시어즈가 그녀를 객실까지 안내했다. 참았던 짜증이 솟구쳐 가방을 버리듯 던져 놓고 소파에 풀썩 앉아 버렸다.
「택시 한 대 부탁드려요. 5분만 있다 내려갈게요.」
컨시어즈가 나가고, 수인은 인터뷰 내내 희롱당한 불쾌감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혼자뿐인데도 떨리는 손을 누가 볼까 무서워 허벅지 밑에 깔고 앉았다. 더러 있는 일이었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인 경우는 처음이었다. 어른스럽게 이 참담한 심정을 이겨 내려 마음을 다잡아 보는데,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휴대폰 액정에 뜬 이름은 ‘재혁’. 무려 4년간 공식도 비공식도 아닌 어중간하고 지지부진한 연애를 그와 이어 가고 있었다. 명색이 ‘애인’인 그는 아카사카 호텔 부자한테 겪은 그녀의 수치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수인은 내내 아버지뻘 남성의 손아귀에서 주물러지던 자신의 손을 옷에 슥슥 닦으며 되뇌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 나이 먹었다고 남자 아니냐? 남자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그게 얼마나 더러운 느낌인지 알아? 당신 여동생한테, 이런 일이 생겼대도 그렇게 말해?”
한숨과 함께 후회가 터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다.
“후우……. 전화 왜 했는데?”
― 별일 없으면…… 오라고 할라 그랬지.
밤에 걸려 온 남자의 ‘보고 싶다’는 전화가 사실 ‘자고 싶다’임은 자명하다. 굳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성의를 봐서 알면서도 속아 주는 것이 여자 아니겠는가. 재혁은 그 성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상황에?’
좀 전까지 애인의 성추행이 대화 토픽 아니었던가. 4년을 알았지만, 그의 공격 패턴은 아직도 파악이 안 된다. 이 대단한 전술가에게 새삼 한 번 더 실망하는 수인이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네. 애인이란 남자도 데리고 잘 생각밖에 못 하게 하는 싸구려.”
― 아아. 왜 또 분위기 피곤하게 몰아.
“당신한테 난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하찮니?”
휴대폰 너머 그의 짜증 섞인 한숨 소리가 둔기가 되어 가슴을 쳤다.
「실례합니다. 묵고 가시겠습니까?」
수인이 내려오지 않자 다시 올라온 컨시어즈가 눈치 빠르게 사태 파악을 했다. 수인은 무심결에 끄덕였고, 휴대폰을 든 채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와중에도 놀랄 만큼 예쁜 아카사카의 반짝이는 야경을 배경으로 재혁의 나머지 말을 들었다.
― 그만하자 진짜! 넌, 날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저 위로가 필요했을 뿐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결론에 다다랐을까. 문득 이 아름다운 밤 배경에 이런 남자의 목소리는 방해 전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하아…… 넌 날 안 만나는 게 낫겠어.
“…….”
그의 말에 수인은 입술을 앙다문 채 휴대폰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판단은 누가 대신해 주는 게 아니야. 특히, 헤어지자고 말하는 쪽에선.”
전화를 끊어 버리고 나서야 드디어 완벽해진 야경을 내려다본다. 그림은 분명 좋아졌지만, 갑자기 아무 의미 없는 풍경이 됐다.

정말 이 호텔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됐다. 화장대 위엔 벌써 반이나 빈 양주병이 놓였고, 수인은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를 말린다. 머리칼 사이로 눈물이 비친다. 요란한 드라이어 소음만이 감도는 스위트룸의 넓이가 견딜 수 없게 쓸쓸했다.
‘풀썩.’
화장대 위에 그대로 엎드리는데 툭 핸드백이 떨어졌다. 쏟아진 내용물을 주워 담다가 카드 전단지를 발견했다.

『어떤 요구든 들어 드립니다. 각종 대행. 출장 서비스.』

아까 저녁, 신주쿠 유흥가에서 만났던 노랑머리 삐끼가 몰래 찔러 넣어 둔 모양이었다. 수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카드 속에서 춤추는 글자들을 유심히 읽었다.

*


같은 시각. 호텔 로비에선 후드 티를 뒤집어쓴 남자, 상이 들어서고 있었다. 막대사탕을 입에 문 채 주차관리요원과 장난스럽게 눈인사를 나누는 모양새가 한눈에도 장기 투숙객 같았다.
그는 복도 끝 자기 방까지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다가 일순, 괜찮은 영감이 떠올라 우뚝 멈춰 섰다. 그러더니 흡사 팬터마임을 하듯이 복도를 누비며 혼자 연기를 시작했다. 복도 끝에서 걸어와 총 쏘는 사람, 총알 피하는 상대편 사람, 주변에서 비명 지르는 여자 등 1인 3역을 해내고 있었다.
“빵! 으윽…….”
총에 맞아 죽어 가는 시늉을 하다가 끝내 철퍼덕 쓰러진다.
‘쿵!’
하필 다른 객실 문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하잇테 구다사이. (들어오세요.)”
“……?”
또 하필, 수인이 묵고 있던 객실이었다.
상은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가운 차림의 수인과 눈이 마주쳤다.
“하잇테 구다사이.”
들어오라니? 상은 당황해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켰고, 수인은 객실로 앞장서 들어가며 다시 일본어로 말을 이었다.
「문 좀 닫아 주세요.」
상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대로 문을 닫았다. 복도 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