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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검은색 슈트를 몸에 걸친 남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치 서인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 신가요?”
“세 시 조금 넘었습니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남자가 답했다. 군기가 바짝 든 남자의 이름이 정우진이라고 했던가. 간병인 대신이라며 자신을 편하게 대해 달라던 말과는 다르게 정우진은 서인을 감시하고 있었다.
“깨어나셨습니다.”
지금도 휴대폰으로 그 남자에게 자신의 상태를 보고하며 병실 밖으로 나갔으니까.
문서인이 일어나면 곁을 지키고 있던 정우진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그 남자가 들어오곤 했다. 남자가 들어오는 시간은 들쑥날쑥했다. 어떤 날은 정우진이 보고를 하자마자 들어 온 날도 있었고 다른 날은 세네 시간 후, 아니면 문서인이 다시 잠이 들기 전이라든가, 그가 들어오는 시간대는 다양했다. 바쁜 사람인 것 같았다.
“일어났나 보군.”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지러운 곳은?”
“괜찮아요.”
바로 옆으로 다가온 그를 힐끗 보며 답했다. 오늘도 남자는 각이 잡힌 클래식 슈트를 입었다. 그는 항상 몸에 착 감기는 슈트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짙은 다크 브라운 컬러에 안은 살짝 회색빛이 도는 실크 셔츠. 톤 다운 된 보석이 박힌 커프스단추와 칼로 잰 듯 반듯한 옷차림은 남자를 격조 있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무거움도 존재했다.
남자의 목을 감싸는 넥타이조차 박제된 나비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인은 몸매를 드러내는 탄탄한 실루엣에서 고개를 돌렸다. 남자에게선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새하얀 도화지에 거친 사포질을 한 듯한 질감이 있었다.
“…….”
며칠 남자와 있었지만 그는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건 서인도 마찬가지.
단둘이 있으면 적막함, 고요함, 그리고 둘만의 숨소리 외에 들리는 것이 없었다. 처음엔 불편해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나아졌다.
남자는 딱히, 서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강압적인 자세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저 서인이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눕고 싶으면 누워 있게 했다. 워낙 편하게 해 주니 신경을 아예 끈 건가 싶다가도 불현듯 날아온 시선에 꼼짝없이 얼어야 했다. 그럴 때면 서인은 흠흠,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가슴부터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 붕대가 보였다. 서인이 손끝으로 붕대를 톡톡, 간 보듯 두드렸다.
서인의 마지막 기억은 그녀의 새엄마이자 강 사장이라 불리는 강혜주가 데려온 딸 문이라가, 하늘식품 장 상무를 꼬신다며 새로 산 원피스를 입어 보는 장면이다. 우연히 파티에 초청되어 갔다가 한눈에 반했다나.
그 뒤로 병원에서 깨어났을 땐 지난 일 년의 기억이 몽땅 도려내져 있었다. 누군가 사각사각 갉아먹은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의사는 일시적 기억상실증일수도 있다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며칠 더 입원하는 것으로 병원 생활을 연장해야 했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 일이다. 서인은 눈가를 문질렀다.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장승처럼 서 있는 남자를 비롯해 병실을 찾아온 남자의 주변 인물들까지 얼마나 경계를 했던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은 그녀의 경계심에 남자와 말을 트게 된 것도 고작 삼 일 전이다.
물론 서인이 그렇게 경계를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자를 비롯해, 주변인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녀는 방관자가 되어 그들을 지켜보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며칠 내내 침대에 누워 오가는 사람들과 남자의 관계를 추론하며 깨달은, 적어도 이것만큼은 정확히 알겠다 싶은 사실은.
“뭘 찾는 거지?”
모두들 이 남자의 말에 복종한다는 것.
“제 휴대폰이요.”
“뭐 하려고.”
남자는 서인의 속을 파헤칠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화할 곳이 있어요, 라고 말하면 어디에? 라고 물을 것 같았다.
서인은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서류를 들추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엄숙한 분위기의 남자는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지고서도 좀처럼 웃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손끝 하나라도 대면 베일 듯 매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보다, 그 눈빛에서 새어 나오는 날카로움 때문일지 모른다.
“휴대폰은 물에 빠져서 당분간 정지시켰어. 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저 말이.
“그래요?”
진짜일까?
서인의 경계심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더 심해졌다. 그녀를 지켜 줄 유일한 울타리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겨 둔 동네 커피숍을 새어머니가 가로채면서부터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강혜주에게 커피숍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비록 동네 작은 커피숍일지라도 부녀가 그 가게에 쏟은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죽기 직전 서인의 손을 잡고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이십 대 못지않게 탱탱한 피부, 그리고 우아한 분위기와 다르게 강혜주는 가게를 이끌어 나갈 능력이 부족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아버지 대신 앞에 나서면서 매출이 하향세로 돌아섰으니까.
불현듯, 서인의 턱 밑으로 타인의 손길이 닿았다.
장서도가 손을 뻗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한 손끝이 그녀의 턱선을 따라 살결을 느리게 문질렀다. 서인은 괜히 긴장이 됐다. 남자의 손끝은 부드러웠다. 가만가만 쓸어내라는 손길에 턱에 힘이 들어간다.
“말랐군.”
묘한 느낌에 뒤로 물러서기 전 턱 밑을 지분거리던 손이 거둬졌다. 쯧, 손을 거둔 그가 혀를 찼다. 못마땅한 눈치였다. 남자는 마치 그녀의 보호자처럼 굴었다.
서인은 갑자기 느껴진 간지러움에 턱 끝을 벅벅 긁었다.
“긁지 마.”
그가 서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내렸다.
“피 나잖아.”
목덜미에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감겼다. 서인은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다. 턱 밑에 닿은 남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입김에 턱 아래가 바르르 떨릴 때쯤.
“읏.”
넓게 편 혀가 서인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턱 밑을 파고든 혀가 삼킬 듯 살을 빨아들였다. 그의 체온이 지나가는 부위가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따끔따끔했다.
“상무님. 오늘 아침 임원진 회의 자료 정리해서…….”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비서인 양수찬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당혹스러운 기척도 없었다. 서인은 곧장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팔을 힘주어 잡았다. 병실 문턱에 서 있던 양 비서가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서인이 고개를 들자 양 비서는 시선을 회피했다.
“두고 가.”
병실 문 앞에서 머뭇머뭇하던 그가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고 나갔다. 양 비서는 병실에 들어와서 밖으로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서인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1
“착한 아이네.”
퇴원 수속을 밟고 올라온 장서도의 첫마디에 서인은 드물게 입을 벙긋거렸다. 병원복을 갈아입고 짐이랄 것도 없는 가방을 멘 채 침대 끝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게 과연 칭찬받을 일인가 싶었다.
병원 앞으로 내려가니 며칠 내내 지겹도록 보았던 정우진과 양 비서가 자동차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끝끝내 서인의 어깨에 멘 가방을 받아 든 정우진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가 뒷좌석에 올라타자 문이 닫히고 곧 자동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 내부는 고요했다. 앞에 있는 두 사람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지라, 정우진은 운전에 집중했고 조수석에 앉은 양수찬은 백화점에 납품될 물품을 체크했다. 바쁜 와중에 새로 개발한 신제품까지 일일이 확인하며 신경 쓰다 보니 그의 머릿골이 울렸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수찬의 생각이 샛길로 샜다.
문서인이 기억을 잃었다.
단지 일 년뿐이지만 그 일 년은 단순한 일 년이 아니다. 장서도와 문서인이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그 일 년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모두 지워 버렸다는건,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
장서도 자체를 기억 속에서 도려냈다는 뜻이 된다.
문서인은 기억을 잃고 나서 이것저것 물었지만 가장 주된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교통사고를 어디에서 당했는지.
왜 여기에서 깨어났는지.
그리고.
“……우린 어떻게 만났나요.”
장서도와 자신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장서도의 눈을 피해 매번 그에게 물었지만 수찬이 답해 줄 수 있는 선은 마지막 질문뿐이었다.
‘아마, 가까운 사이였을 겁니다.’
그때 문서인의 얼굴이 어땠더라. 굉장히 기묘한 표정이었지. 솔직히 못 믿는 눈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더 기이한 이야기를 장서도가 꺼내고 있었다.
“내가 쫓아다녔어.”
장서도와 자신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세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문서인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저를요?”
의외의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문서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답에 놀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운전하고 있던 우진 또한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이 커졌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우진의 표정에 수찬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부가 한층 더 조용해졌다.
“왜요?”
“네가 예쁘니까.”
“그럼 우린…….”
말끝을 늘어트린 문서인이 눈을 깜빡였다. 사슴 목처럼 길고 여린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연인 사이였나요?”
고심 끝에 머뭇거리며 내놓는 물음에 장서도는 쉽게 수긍했다.
“그래.”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연인 사이였지.”
연인 사이.
하, 우진은 그 말을 듣고 기함을 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무표정을 고수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태풍이 지나간 듯했다. 도대체 상무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조수석에 앉아 보고서를 체크하던 수찬도 결국은 애매하게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그럴 수밖에. 둘은 키스는커녕 손도 잡아 보지 못한 사이니까.
한동안 앞좌석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졸리네요.”
퇴원하기 전 먹었던 약에 수면제 성분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며 중얼거린 문서인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떠졌다.
“거의 다 왔어.”
장서도와 몇 마디 더 주고받던 문서인의 고개가 옆으로 맥없이 꺾어졌다. 결국 잠이 든 것이다.
오 분 뒤면 도착인데. 그사이 잠이 깊게 들면 곤란했다. 수찬이 뒤를 돌아 손을 뻗는데 장서도가 들고 있던 서류로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 냈다.
“한 바퀴 더 돌아.”
장서도의 말이 떨어지자 수찬은 문서인을 향해 뻗었던 손을 조심스럽게 거뒀다. 우진이 재빠르게 운전대를 옆으로 꺾었다. 익숙하게 접어든 길을 달리던 차가 옆길로 샜다. 쭉 뻗은 도로를 지나가는 동안 누구도 쉽사리 먼저 말을 열지 못했다.
1화
프롤로그
눈을 뜨니 병원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검은색 슈트를 몸에 걸친 남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치 서인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 신가요?”
“세 시 조금 넘었습니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남자가 답했다. 군기가 바짝 든 남자의 이름이 정우진이라고 했던가. 간병인 대신이라며 자신을 편하게 대해 달라던 말과는 다르게 정우진은 서인을 감시하고 있었다.
“깨어나셨습니다.”
지금도 휴대폰으로 그 남자에게 자신의 상태를 보고하며 병실 밖으로 나갔으니까.
문서인이 일어나면 곁을 지키고 있던 정우진이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그 남자가 들어오곤 했다. 남자가 들어오는 시간은 들쑥날쑥했다. 어떤 날은 정우진이 보고를 하자마자 들어 온 날도 있었고 다른 날은 세네 시간 후, 아니면 문서인이 다시 잠이 들기 전이라든가, 그가 들어오는 시간대는 다양했다. 바쁜 사람인 것 같았다.
“일어났나 보군.”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지러운 곳은?”
“괜찮아요.”
바로 옆으로 다가온 그를 힐끗 보며 답했다. 오늘도 남자는 각이 잡힌 클래식 슈트를 입었다. 그는 항상 몸에 착 감기는 슈트를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짙은 다크 브라운 컬러에 안은 살짝 회색빛이 도는 실크 셔츠. 톤 다운 된 보석이 박힌 커프스단추와 칼로 잰 듯 반듯한 옷차림은 남자를 격조 있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무거움도 존재했다.
남자의 목을 감싸는 넥타이조차 박제된 나비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서인은 몸매를 드러내는 탄탄한 실루엣에서 고개를 돌렸다. 남자에게선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새하얀 도화지에 거친 사포질을 한 듯한 질감이 있었다.
“…….”
며칠 남자와 있었지만 그는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건 서인도 마찬가지.
단둘이 있으면 적막함, 고요함, 그리고 둘만의 숨소리 외에 들리는 것이 없었다. 처음엔 불편해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나아졌다.
남자는 딱히, 서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강압적인 자세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저 서인이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눕고 싶으면 누워 있게 했다. 워낙 편하게 해 주니 신경을 아예 끈 건가 싶다가도 불현듯 날아온 시선에 꼼짝없이 얼어야 했다. 그럴 때면 서인은 흠흠, 시선을 둘 곳이 없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가슴부터 허리를 부드럽게 감싼 붕대가 보였다. 서인이 손끝으로 붕대를 톡톡, 간 보듯 두드렸다.
서인의 마지막 기억은 그녀의 새엄마이자 강 사장이라 불리는 강혜주가 데려온 딸 문이라가, 하늘식품 장 상무를 꼬신다며 새로 산 원피스를 입어 보는 장면이다. 우연히 파티에 초청되어 갔다가 한눈에 반했다나.
그 뒤로 병원에서 깨어났을 땐 지난 일 년의 기억이 몽땅 도려내져 있었다. 누군가 사각사각 갉아먹은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의사는 일시적 기억상실증일수도 있다며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다. 며칠 더 입원하는 것으로 병원 생활을 연장해야 했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 일이다. 서인은 눈가를 문질렀다.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장승처럼 서 있는 남자를 비롯해 병실을 찾아온 남자의 주변 인물들까지 얼마나 경계를 했던가. 쉽사리 수그러들지 않은 그녀의 경계심에 남자와 말을 트게 된 것도 고작 삼 일 전이다.
물론 서인이 그렇게 경계를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자를 비롯해, 주변인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녀는 방관자가 되어 그들을 지켜보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며칠 내내 침대에 누워 오가는 사람들과 남자의 관계를 추론하며 깨달은, 적어도 이것만큼은 정확히 알겠다 싶은 사실은.
“뭘 찾는 거지?”
모두들 이 남자의 말에 복종한다는 것.
“제 휴대폰이요.”
“뭐 하려고.”
남자는 서인의 속을 파헤칠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화할 곳이 있어요, 라고 말하면 어디에? 라고 물을 것 같았다.
서인은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서류를 들추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엄숙한 분위기의 남자는 화려한 이목구비를 가지고서도 좀처럼 웃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손끝 하나라도 대면 베일 듯 매서운 분위기를 풍겼다. 시원하게 찢어진 눈매보다, 그 눈빛에서 새어 나오는 날카로움 때문일지 모른다.
“휴대폰은 물에 빠져서 당분간 정지시켰어. 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건가?”
저 말이.
“그래요?”
진짜일까?
서인의 경계심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더 심해졌다. 그녀를 지켜 줄 유일한 울타리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겨 둔 동네 커피숍을 새어머니가 가로채면서부터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강혜주에게 커피숍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비록 동네 작은 커피숍일지라도 부녀가 그 가게에 쏟은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죽기 직전 서인의 손을 잡고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이십 대 못지않게 탱탱한 피부, 그리고 우아한 분위기와 다르게 강혜주는 가게를 이끌어 나갈 능력이 부족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아버지 대신 앞에 나서면서 매출이 하향세로 돌아섰으니까.
불현듯, 서인의 턱 밑으로 타인의 손길이 닿았다.
장서도가 손을 뻗었다. 마디가 굵고 단단한 손끝이 그녀의 턱선을 따라 살결을 느리게 문질렀다. 서인은 괜히 긴장이 됐다. 남자의 손끝은 부드러웠다. 가만가만 쓸어내라는 손길에 턱에 힘이 들어간다.
“말랐군.”
묘한 느낌에 뒤로 물러서기 전 턱 밑을 지분거리던 손이 거둬졌다. 쯧, 손을 거둔 그가 혀를 찼다. 못마땅한 눈치였다. 남자는 마치 그녀의 보호자처럼 굴었다.
서인은 갑자기 느껴진 간지러움에 턱 끝을 벅벅 긁었다.
“긁지 마.”
그가 서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내렸다.
“피 나잖아.”
목덜미에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감겼다. 서인은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다. 턱 밑에 닿은 남자의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입김에 턱 아래가 바르르 떨릴 때쯤.
“읏.”
넓게 편 혀가 서인의 턱 아래를 부드럽게 쓸어 내렸다. 턱 밑을 파고든 혀가 삼킬 듯 살을 빨아들였다. 그의 체온이 지나가는 부위가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따끔따끔했다.
“상무님. 오늘 아침 임원진 회의 자료 정리해서…….”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남자의 비서인 양수찬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당혹스러운 기척도 없었다. 서인은 곧장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팔을 힘주어 잡았다. 병실 문턱에 서 있던 양 비서가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서인이 고개를 들자 양 비서는 시선을 회피했다.
“두고 가.”
병실 문 앞에서 머뭇머뭇하던 그가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고 나갔다. 양 비서는 병실에 들어와서 밖으로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서인과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1
“착한 아이네.”
퇴원 수속을 밟고 올라온 장서도의 첫마디에 서인은 드물게 입을 벙긋거렸다. 병원복을 갈아입고 짐이랄 것도 없는 가방을 멘 채 침대 끝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게 과연 칭찬받을 일인가 싶었다.
병원 앞으로 내려가니 며칠 내내 지겹도록 보았던 정우진과 양 비서가 자동차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끝끝내 서인의 어깨에 멘 가방을 받아 든 정우진이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가 뒷좌석에 올라타자 문이 닫히고 곧 자동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 내부는 고요했다. 앞에 있는 두 사람도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닌지라, 정우진은 운전에 집중했고 조수석에 앉은 양수찬은 백화점에 납품될 물품을 체크했다. 바쁜 와중에 새로 개발한 신제품까지 일일이 확인하며 신경 쓰다 보니 그의 머릿골이 울렸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수찬의 생각이 샛길로 샜다.
문서인이 기억을 잃었다.
단지 일 년뿐이지만 그 일 년은 단순한 일 년이 아니다. 장서도와 문서인이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그 일 년 안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모두 지워 버렸다는건,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
장서도 자체를 기억 속에서 도려냈다는 뜻이 된다.
문서인은 기억을 잃고 나서 이것저것 물었지만 가장 주된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교통사고를 어디에서 당했는지.
왜 여기에서 깨어났는지.
그리고.
“……우린 어떻게 만났나요.”
장서도와 자신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장서도의 눈을 피해 매번 그에게 물었지만 수찬이 답해 줄 수 있는 선은 마지막 질문뿐이었다.
‘아마, 가까운 사이였을 겁니다.’
그때 문서인의 얼굴이 어땠더라. 굉장히 기묘한 표정이었지. 솔직히 못 믿는 눈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더 기이한 이야기를 장서도가 꺼내고 있었다.
“내가 쫓아다녔어.”
장서도와 자신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세세하게 알고 싶어 하는 문서인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저를요?”
의외의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문서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답에 놀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운전하고 있던 우진 또한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이 커졌으니까.
무슨 말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우진의 표정에 수찬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내부가 한층 더 조용해졌다.
“왜요?”
“네가 예쁘니까.”
“그럼 우린…….”
말끝을 늘어트린 문서인이 눈을 깜빡였다. 사슴 목처럼 길고 여린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연인 사이였나요?”
고심 끝에 머뭇거리며 내놓는 물음에 장서도는 쉽게 수긍했다.
“그래.”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연인 사이였지.”
연인 사이.
하, 우진은 그 말을 듣고 기함을 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무표정을 고수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태풍이 지나간 듯했다. 도대체 상무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조수석에 앉아 보고서를 체크하던 수찬도 결국은 애매하게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그럴 수밖에. 둘은 키스는커녕 손도 잡아 보지 못한 사이니까.
한동안 앞좌석에는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렀다.
“졸리네요.”
퇴원하기 전 먹었던 약에 수면제 성분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며 중얼거린 문서인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 떠졌다.
“거의 다 왔어.”
장서도와 몇 마디 더 주고받던 문서인의 고개가 옆으로 맥없이 꺾어졌다. 결국 잠이 든 것이다.
오 분 뒤면 도착인데. 그사이 잠이 깊게 들면 곤란했다. 수찬이 뒤를 돌아 손을 뻗는데 장서도가 들고 있던 서류로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 냈다.
“한 바퀴 더 돌아.”
장서도의 말이 떨어지자 수찬은 문서인을 향해 뻗었던 손을 조심스럽게 거뒀다. 우진이 재빠르게 운전대를 옆으로 꺾었다. 익숙하게 접어든 길을 달리던 차가 옆길로 샜다. 쭉 뻗은 도로를 지나가는 동안 누구도 쉽사리 먼저 말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