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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잘 먹었습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 냈다.
“한 공기 더 드릴까요?”
이미 주걱을 들고 선 정우진의 모습에 서인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
거절을 입에 담자 남자가 주걱을 들고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서도란 남자가 엊그제 지나가며 했던 말을 들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너무 말랐군.’
결국 서인은 한 공기를 더 비운 뒤에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앞마당을 거닐다 별채에 들어온 서인이 거실 소파에 앉았다. 포만감을 넘어선 배에 손을 얹었다. 배가 꺼지기는커녕 볼록해진 기분이다.
“두 그릇은 무리였어.”
다음엔 무언의 눈빛에도 강경하게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땐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속이 더부룩했다. 서인은 몸에 힘을 축 뺀 뒤 소파에 등을 기댔다. 워낙 푹신한 소파라 거의 몸이 묻히다시피 했다. 그대로 고개를 든 서인이 아파트 내부를 쭉 훑었다.
대리석을 사용해 집을 지은 내부는 단정하고 정갈해 보였다. 마치 깨끗한 물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라고 할까. 주위를 쭉 훑어도 걸리는 것 없이 확 트인 거실은 벽 한 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문을 열고 나가면 건장한 성인 다섯 명 정도는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이렇게 가만히 집 안 풍경을 더듬으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원래 살았던 집이 생각도 안 날 정도로.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새어머니와 문이라의 존재를. 막연히 어떻게 된 일인지라도 알려면 연락을 해 봐야 하는데, 생각은 했지만 좀처럼 휴대폰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물에 빠진 걸까.
혹시나 싶어 자신의 방이라고 알려 준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휴대폰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물론 휴대폰을 빌리면 될 테지만 뭐랄까. 영 내키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인이지.’
일말의 의심이 잔재했다.
‘아마, 가까운 사이일 겁니다.’
그와 그녀가 어떤 사이냐고 묻는 질문에 양 비서가 그렇게만 말하지 않았어도, 서인은 못 믿겠다는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결국은 수긍했을 것이다. 서인이 병실에서 며칠 둘의 관계를 지켜본 결과 양수찬은 장서도의 손과 발이었다. 그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끼리 친하다고 했으니 집 안 밥그릇 개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개인 사생활쯤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일 년 가까이 이곳에서 같이 지냈다는데, 가까운 사이일 겁니다, 아마?
양 비서의 말을 되짚어 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이런 식의 말투였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상당히 묘한 어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아니지 않을까, 결단을 내리지 못한 건 남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장서도는 정말 연인처럼 굴었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 식품에 대한 보고서를 훑어볼 때도 그녀의 말 한마디면 하던 일도 멈추고 돌아봤다. 그저 지나가듯 날씨가 덥네, 중얼거린 말에도 그러게, 꼬박꼬박 답을 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은 저녁 같이 드실 수 있다고 합니다.’
‘네?’
‘상무님이요. 일이 일찍 끝났다고 하시네요.’
남자의 집에 들어오면서 정우진이 한 말에 처음에는 ‘아…… 그래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일방적으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오늘은 좀 늦으실 겁니다.’
‘오늘은 상무님 새벽에 귀가하신답니다.’
‘상무님께서 오늘은 일곱 시 정도에 도착하신답니다.’
집안일을 해 주는 아주머니도 꼬박꼬박 남자의 귀가 시간을 알렸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었지만 서인은 이내 알아차리고 말았다. 하루도 아니고, 계속해서 그녀에게 알려 주는 건 남자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서도의 행동이 문서인의 모든 생각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한번은 서인이 빵을 먹다가 사레가 걸려 기침을 하는데,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곧, 그녀의 눈앞으로 물 잔이 불쑥 들어왔다. 단숨에 물 잔을 비워 낸 서인이 바로 옆에 앉는 그에게 다정하시네요, 지나가듯 감상을 툭 흘렸더니 돌아온 답은.
‘문서인에게만이겠지.’
‘…….’
‘잘 보이고 싶으니까.’
담백했지만 뜨거움이 담긴 말이 서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날, 하루 종일 정신이 멍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배가 꺼지자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속의 평소라면 이 시간에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은 강 사장 밑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대부분 잡일이었다.
이것도 일 년 전 기억인데.
방으로 돌아가 어제 보다 덮은 책이나 마저 보자, 싶어 옮기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복도 끝,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힐끗, 현관 쪽을 봤지만 장서도가 온 건 아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는 방이었다. 일을 마치고 와서도 그가 한참이나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에 서인은 그 방만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만 닫아 주자.
결심한 서인이 방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을 때였다.
“저건…….”
원목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건 분명 전화기였다. 서인이 홀린 듯 문을 열고 책상 앞에 섰다. 별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던 전화기가 여기에 떡하니 있었다. 서인은 손을 뻗어 전화기를 잡고 귀에 댔다.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숫자를 누르자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우선,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뒤 일 년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버지와 재혼한 뒤 한집에서 쭉 살았던 그녀라면 자신에 관해서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평소보다 낮은 톤이었다. 일하는 중이신가?
“저예요. 문서인.”
답하기 무섭게 귓가에 강혜주의 고함이 터졌다.
― 네가 무슨 염치로 전화를 해! 네가 무슨 염치로!
순간 너무 놀라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강혜주는 아버지를 만난 뒤부턴 매번 고상한 척하느라 언성을 높인 일이 없었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비웃으며 조곤조곤 말하면 말했지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리라곤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는데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뻔뻔한 년. 너 같은 걸 자식이라고 거둬 키운 내가 미친년이지. 안 그러니? 장 상무네 집에 눌러앉더니 어미도 못 알아보더구나. 그런 걸 딸이라고 키웠으니 돌아가신 네 아버지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야……!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억눌려 있던 응어리가 한 번에 폭발한 듯했다. 하지만 서인은 그와 별개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귓가를 땡땡 얼리는 높은 톤에 미간이 좁아졌다.
서인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강 사장님.”
― 그래, 네가 꼬박꼬박 강 사장님이라고 부를 때부터 넌 내가 이렇게 되기만을 이를 갈고 있었던 거야! 그러고도 너는 잠이 왔니? 밥은 잘 넘어갔고? 아니다. 괜한 걸 물었어.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넘어갔겠구나! 독한 것……!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 무슨 소리? 허!
기가 막힌다는 웃음이 휴대폰 너머로 새어 나왔다.
― 네 언니가 장 상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불현듯 서인은 그녀의 마지막 기억 속, 원피스를 입고 들뜬 문이라의 말이 생각났다.
‘하늘식품 장 상무, 내가 유혹할 거야.’
서인은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하늘식품 장 상무가……장서도 씨…….”
― 모르는 척하는 것도 가증스럽구나.
그제야 강혜주의 원성이 이해가 됐다. 그 당시 문이라는 파티에서 우연히 장 상무를 본 순간 마음을 뺏겼다고 했던가. 십 대 소녀처럼 들떠 이리저리 백화점을 돌며 원피스를 고르던 문이라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누군가는 너무 예뻐 향기 없는 꽃이라고도 했지만 문이라가 손을 내밀면 기꺼이 그 꽃을 꺾었다. 그녀에게 안 넘어간 남자들이 없었다. 젊은 남자들 틈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던 그 문이라도 나이가 들면서 정신을 차린 건지 남자의 재력을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강혜주가 이리저리 알아보며 괜찮은 집안의 자제들을 소개해 줬지만 문이라는 성이 차지 않는 듯 심드렁했다. 그동안 만난 남자들의 외모가 출중해선지 평범한 외모의 재력가들이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강혜주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며 그녀를 얼마나 어르고 달랬던가. 그랬던 문이라의 눈에 든 게 장 상무였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 언제까지 행복이 계속 갈 것 같니? 장 상무가 너를 정말 좋아해서 데리고 있는 줄 알아? 언니가 마음에 둔 남자를 가로채다니. 천벌받을 거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휴대폰을 들고 있던 서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 년 전에도 사람을 대놓고 비웃는 버릇은 여전했지만 저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는데.
― 그……!
강 사장의 목소리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서인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서재를 나왔다. 그길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저 지난 일 년의 기억을 찾으려고 전화했을 뿐인데.
서인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기분이 낮게 가라앉았다.
깊은 수면 속에 가라앉은 의식이 가슴을 두드리는 손길에 점차 또렷해졌다.
아, 그렇지. 침대에 누워 있다 잠이 들었지.
가슴 부근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침대에 걸터앉은 장서도가 어슴푸레 보였다. 서인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나른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였다. 어둠에 파묻힌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서인이 몸을 일으켰다.
“몇 시예요?”
“여덟 시.”
서재에서 통화를 끝내고 나온 시간이 두 시 좀 넘었으니까.
“……여섯 시간.”
아침에도 늦잠을 자서 늦게 일어났는데. 몸에 피로가 쌓인 걸까. 서인이 자신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잠만보 되겠네.”
“음?”
혼잣말을 들었는지, 침대에서 일어선 그가 거실로 나서다 말고 서인을 돌아봤다.
“아뇨. 아니에요.”
서인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별말 없이 주방으로 들어선 장서도는 테이블을 덮은 식탁보를 걷어 냈다. 언제 차렸는지 맛깔스러운 한정식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서인이 의자를 뒤로 끌어당긴 뒤 앉자 그도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는 조용했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고요한 분위기에 적응한 서인이 공기를 반쯤 비워 냈을까.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제가 그쪽 뭐라고 불렀어요?”
“잘 먹었습니다.”
정갈하게 차려진 밥상에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 냈다.
“한 공기 더 드릴까요?”
이미 주걱을 들고 선 정우진의 모습에 서인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
거절을 입에 담자 남자가 주걱을 들고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서도란 남자가 엊그제 지나가며 했던 말을 들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너무 말랐군.’
결국 서인은 한 공기를 더 비운 뒤에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앞마당을 거닐다 별채에 들어온 서인이 거실 소파에 앉았다. 포만감을 넘어선 배에 손을 얹었다. 배가 꺼지기는커녕 볼록해진 기분이다.
“두 그릇은 무리였어.”
다음엔 무언의 눈빛에도 강경하게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을 땐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속이 더부룩했다. 서인은 몸에 힘을 축 뺀 뒤 소파에 등을 기댔다. 워낙 푹신한 소파라 거의 몸이 묻히다시피 했다. 그대로 고개를 든 서인이 아파트 내부를 쭉 훑었다.
대리석을 사용해 집을 지은 내부는 단정하고 정갈해 보였다. 마치 깨끗한 물에 몸을 담그는 기분이라고 할까. 주위를 쭉 훑어도 걸리는 것 없이 확 트인 거실은 벽 한 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문을 열고 나가면 건장한 성인 다섯 명 정도는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이렇게 가만히 집 안 풍경을 더듬으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원래 살았던 집이 생각도 안 날 정도로.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다. 새어머니와 문이라의 존재를. 막연히 어떻게 된 일인지라도 알려면 연락을 해 봐야 하는데, 생각은 했지만 좀처럼 휴대폰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물에 빠진 걸까.
혹시나 싶어 자신의 방이라고 알려 준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휴대폰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없었다. 물론 휴대폰을 빌리면 될 테지만 뭐랄까. 영 내키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연인이지.’
일말의 의심이 잔재했다.
‘아마, 가까운 사이일 겁니다.’
그와 그녀가 어떤 사이냐고 묻는 질문에 양 비서가 그렇게만 말하지 않았어도, 서인은 못 믿겠다는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결국은 수긍했을 것이다. 서인이 병실에서 며칠 둘의 관계를 지켜본 결과 양수찬은 장서도의 손과 발이었다. 그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끼리 친하다고 했으니 집 안 밥그릇 개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개인 사생활쯤은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것도 일 년 가까이 이곳에서 같이 지냈다는데, 가까운 사이일 겁니다, 아마?
양 비서의 말을 되짚어 보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이런 식의 말투였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상당히 묘한 어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아니지 않을까, 결단을 내리지 못한 건 남자의 행동 때문이었다.
장서도는 정말 연인처럼 굴었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 식품에 대한 보고서를 훑어볼 때도 그녀의 말 한마디면 하던 일도 멈추고 돌아봤다. 그저 지나가듯 날씨가 덥네, 중얼거린 말에도 그러게, 꼬박꼬박 답을 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오늘은 저녁 같이 드실 수 있다고 합니다.’
‘네?’
‘상무님이요. 일이 일찍 끝났다고 하시네요.’
남자의 집에 들어오면서 정우진이 한 말에 처음에는 ‘아…… 그래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듯 일방적으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오늘은 좀 늦으실 겁니다.’
‘오늘은 상무님 새벽에 귀가하신답니다.’
‘상무님께서 오늘은 일곱 시 정도에 도착하신답니다.’
집안일을 해 주는 아주머니도 꼬박꼬박 남자의 귀가 시간을 알렸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었지만 서인은 이내 알아차리고 말았다. 하루도 아니고, 계속해서 그녀에게 알려 주는 건 남자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장서도의 행동이 문서인의 모든 생각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한번은 서인이 빵을 먹다가 사레가 걸려 기침을 하는데,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부엌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곧, 그녀의 눈앞으로 물 잔이 불쑥 들어왔다. 단숨에 물 잔을 비워 낸 서인이 바로 옆에 앉는 그에게 다정하시네요, 지나가듯 감상을 툭 흘렸더니 돌아온 답은.
‘문서인에게만이겠지.’
‘…….’
‘잘 보이고 싶으니까.’
담백했지만 뜨거움이 담긴 말이 서인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날, 하루 종일 정신이 멍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배가 꺼지자 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억 속의 평소라면 이 시간에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은 강 사장 밑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대부분 잡일이었다.
이것도 일 년 전 기억인데.
방으로 돌아가 어제 보다 덮은 책이나 마저 보자, 싶어 옮기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복도 끝,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힐끗, 현관 쪽을 봤지만 장서도가 온 건 아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는 방이었다. 일을 마치고 와서도 그가 한참이나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에 서인은 그 방만은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만 닫아 주자.
결심한 서인이 방문을 닫기 위해 손을 뻗을 때였다.
“저건…….”
원목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건 분명 전화기였다. 서인이 홀린 듯 문을 열고 책상 앞에 섰다. 별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던 전화기가 여기에 떡하니 있었다. 서인은 손을 뻗어 전화기를 잡고 귀에 댔다.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숫자를 누르자 귓가에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우선,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뒤 일 년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물어볼 생각이었다. 아버지와 재혼한 뒤 한집에서 쭉 살았던 그녀라면 자신에 관해서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평소보다 낮은 톤이었다. 일하는 중이신가?
“저예요. 문서인.”
답하기 무섭게 귓가에 강혜주의 고함이 터졌다.
― 네가 무슨 염치로 전화를 해! 네가 무슨 염치로!
순간 너무 놀라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강혜주는 아버지를 만난 뒤부턴 매번 고상한 척하느라 언성을 높인 일이 없었다.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비웃으며 조곤조곤 말하면 말했지 이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리라곤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는데 또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뻔뻔한 년. 너 같은 걸 자식이라고 거둬 키운 내가 미친년이지. 안 그러니? 장 상무네 집에 눌러앉더니 어미도 못 알아보더구나. 그런 걸 딸이라고 키웠으니 돌아가신 네 아버지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야……!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억눌려 있던 응어리가 한 번에 폭발한 듯했다. 하지만 서인은 그와 별개로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귓가를 땡땡 얼리는 높은 톤에 미간이 좁아졌다.
서인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강 사장님.”
― 그래, 네가 꼬박꼬박 강 사장님이라고 부를 때부터 넌 내가 이렇게 되기만을 이를 갈고 있었던 거야! 그러고도 너는 잠이 왔니? 밥은 잘 넘어갔고? 아니다. 괜한 걸 물었어.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넘어갔겠구나! 독한 것……!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 무슨 소리? 허!
기가 막힌다는 웃음이 휴대폰 너머로 새어 나왔다.
― 네 언니가 장 상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불현듯 서인은 그녀의 마지막 기억 속, 원피스를 입고 들뜬 문이라의 말이 생각났다.
‘하늘식품 장 상무, 내가 유혹할 거야.’
서인은 설마 하며 물었다.
“혹시 하늘식품 장 상무가……장서도 씨…….”
― 모르는 척하는 것도 가증스럽구나.
그제야 강혜주의 원성이 이해가 됐다. 그 당시 문이라는 파티에서 우연히 장 상무를 본 순간 마음을 뺏겼다고 했던가. 십 대 소녀처럼 들떠 이리저리 백화점을 돌며 원피스를 고르던 문이라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강아지 같은 눈망울. 오똑한 코. 도톰한 입술. 누군가는 너무 예뻐 향기 없는 꽃이라고도 했지만 문이라가 손을 내밀면 기꺼이 그 꽃을 꺾었다. 그녀에게 안 넘어간 남자들이 없었다. 젊은 남자들 틈에서 여왕처럼 군림하던 그 문이라도 나이가 들면서 정신을 차린 건지 남자의 재력을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강혜주가 이리저리 알아보며 괜찮은 집안의 자제들을 소개해 줬지만 문이라는 성이 차지 않는 듯 심드렁했다. 그동안 만난 남자들의 외모가 출중해선지 평범한 외모의 재력가들이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강혜주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며 그녀를 얼마나 어르고 달랬던가. 그랬던 문이라의 눈에 든 게 장 상무였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 언제까지 행복이 계속 갈 것 같니? 장 상무가 너를 정말 좋아해서 데리고 있는 줄 알아? 언니가 마음에 둔 남자를 가로채다니. 천벌받을 거다!
“말씀이 심하시네요.”
휴대폰을 들고 있던 서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 년 전에도 사람을 대놓고 비웃는 버릇은 여전했지만 저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는데.
― 그……!
강 사장의 목소리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서인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서재를 나왔다. 그길로 방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저 지난 일 년의 기억을 찾으려고 전화했을 뿐인데.
서인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기분이 낮게 가라앉았다.
깊은 수면 속에 가라앉은 의식이 가슴을 두드리는 손길에 점차 또렷해졌다.
아, 그렇지. 침대에 누워 있다 잠이 들었지.
가슴 부근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침대에 걸터앉은 장서도가 어슴푸레 보였다. 서인은 눈을 비비며 물었다.
“언제 오셨어요?”
“방금.”
나른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였다. 어둠에 파묻힌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서인이 몸을 일으켰다.
“몇 시예요?”
“여덟 시.”
서재에서 통화를 끝내고 나온 시간이 두 시 좀 넘었으니까.
“……여섯 시간.”
아침에도 늦잠을 자서 늦게 일어났는데. 몸에 피로가 쌓인 걸까. 서인이 자신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중얼거렸다.
“잠만보 되겠네.”
“음?”
혼잣말을 들었는지, 침대에서 일어선 그가 거실로 나서다 말고 서인을 돌아봤다.
“아뇨. 아니에요.”
서인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별말 없이 주방으로 들어선 장서도는 테이블을 덮은 식탁보를 걷어 냈다. 언제 차렸는지 맛깔스러운 한정식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서인이 의자를 뒤로 끌어당긴 뒤 앉자 그도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는 조용했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고요한 분위기에 적응한 서인이 공기를 반쯤 비워 냈을까.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제가 그쪽 뭐라고 불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