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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생각해 보니 매번 이쪽, 그쪽, 저기요 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지칭할 호칭이 애매했다.
“뭐라고 불렀을 거 같아?”
그가 웃음기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그의 물음에 서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게 재미있는지 장서도가 식사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
“네?”
“아저씨.”
“어…….”
“그렇게 불렀지. 나이 차이가 나니까.”
남자는 나이 차이 난다는 말을 덤덤하게 입에 담았다.
‘얼마나 나이 차이가 나기에, 아저씨?’
서인은 새삼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그를 훑었다. 집에 막 들어온 차림의 장서도는 검은색 베스트와 회색 실크 셔츠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어 전신이 보이지 않음에도 남자의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그가 젓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팔뚝을 감싼 셔츠가 팽팽해졌다.
서인의 시선이 쓱, 위로 올라왔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나이가 가려졌다. 나이 특유의 어른다운 매력이 존재했지만 그 위에 이 남자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아주 무겁고, 진중한. 그녀가 또래 남자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짙은 수컷 냄새가 났다.
“몇 살 차이길래요? 다섯 살?”
자신이 지금 스무 살, 아니, 기억을 일 년 잃었다고 했으니 스물한 살이다. 다섯 살 차이면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 그래도 까마득히 높아 보였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내 표정이 없던 그가 작게 실소했다.
“다섯 살 차이면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였겠지.”
그럼 더 많다는 건가?
조금 놀란 눈으로 변하는데 그가 젓가락을 든 채 구석구석 집요하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마치 작은 감정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했다.
“그럼.”
찌를 듯한 시선에 서인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몇 살이세요?”
답은 곧장 날아왔다.
“서른넷.”
열세 살 차이.
“으음.”
신음 같은 소리였다. 문서인이 식사를 재개했다. 싫다는 건지, 단순히 놀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서인은 이미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감춰 버렸다. 수저로 밥을 크게 한 술 푸는 단정한 움직임을 서도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서인은 수묵화처럼 단아하면서도 수채화처럼 여렸다. 꽃에 사뿐히 앉은 나비처럼 하늘하늘하다가도 저 작은 입술로 사랑을 말할 땐 올곧은 눈빛에 아래가 저릿해 왔다.
처음부터 시선을 끌었었지. 화려한 얼굴을 가진 문이라와는 다른 매력에 저도 모르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버렸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서도의 시선이 서인의 동선을 따라갔다.
문서인은 촉이 좋았다.
‘연인이지.’
달콤하게 속삭인 말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면서 그의 말에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문서인.”
식사를 하던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왜요?”
이쪽을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에는 따뜻한 감정이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눈빛이기도 했다. 그게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눈으로는 웃으며 어금니를 지그시 물어야 했다.
서도가 입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휴대폰 필요해?”
물로 입을 헹구며 묻는 말에 밥을 먹던 문서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이요?”
좀 놀란 눈치였다. 서도는 그 시선을 모른 척 넘겼다.
퇴근해서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서류 가방을 서재에 두고 나오려는데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뭘까.
처음에는 파악하지 못했다. 책장에 꽂아 놓은 책들도 가지런했고 누군가 들어와 서재를 어지럽힌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서도는 팔짱을 낀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서재 내부를 천천히 주변을 훑어가다 어느 한 곳에 딱 멈췄다.
전화기.
서재에는 그만의 질서가 존재했다. 버릇처럼 사선으로 내려놓던 전화기가 일자로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휴대폰 없으면 불편하겠지. 내일 정 실장 통해서 보내지. 특별히 원하는 기종 있나?”
“가, 갑자기 휴대폰은 왜요?”
문서인이 발뺌을 할 모양이었다. 그는 이대로 넘어가 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왜냐니.”
“…….”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서재 들어와서 전화기 쓰니까 그러지.”
“사, 살금살금은 아니었……!”
“당당하게 쓰라는 거야.”
예상하지 못한 말에 서인이 입을 벌렸다.
“문서인은 그래도 돼.”
장서도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마치 기억하라는 듯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서인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상냥하시네요.”
“너만 할까.”
“네?”
“너도 상냥했어.”
어쩐지 미소가 밴 듯한 목소리에 서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넘어가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였지. 그래서…….”
말을 늘어트린 장서도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에 와 닿는 건조함을 가장한 뜨거움에 서인은 목이 탔다.
“완전히 넘어가 버렸어.”
장서도가 후, 하고 짧게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식사를 끝낸 뒤 그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서재로 들어갔고 서인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고요한 내부에 어쩐지 어색함이 밀려와, 서인이 리모컨을 움켜잡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방음이 잘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일하는데 티브이의 잡음도 미안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얹혀사는 신세가 아닌가.
그때 강 사장의 기세로 봐서는 집에 다시 들어가기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모아 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자신의 거처가 참 곤란해져 버렸다. 서인은 끌어안고 있던 무릎을 쭉 폈다.
“돈을 벌어야 할 텐데.”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깨트리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시간만 죽일 수도 없는 일이니까. 서인은 바로 앞을 향해 쭉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방치된 신문 끝이 잡혔다. 그대로 힘주어 끌어당기자 턱 하니 신문이 무릎에 안착한다.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기껏해야 회사 사무실 보조가 전부였는데.
서인이 신문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피며 넘기는데 어느 순간 그녀의 옆으로 길게 그림자가 생겼다.
“뭐 해?”
그였다.
“벌써 일 다 하셨어요?”
들어간 지 겨우 이십 분 정도 되지 않았나? 이런 눈빛으로 보자 남자가 서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훑어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보다, 부드럽네.”
단단한 손가락이 더 깊숙이 들어와 서인의 머리를 헤집었다. 손가락 틈 사이로 착착 감기는 느낌이 마음에 든 듯했다.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어내리던 서도가 문득 시선을 밑으로 뚝, 떨어뜨렸다. 활짝 펼쳐진 신문. 자세히 보니 구인구직란이다. 시선을 느낀 건지 문서인이 신문 한 장을 팔랑, 넘기며 입을 열었다.
“일자리 구해야죠. 언제까지 놀고먹을 수는 없으니까.”
문서인은 제법 덤덤하게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스물한 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기특하네.”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이 뺨으로 내려왔다. 서인은 그의 다정한 손짓에 기분이 묘해졌다. 서도가 매끄럽고 작은 얼굴을 감싸며 엄지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회사에 자리가 하나 비었어.”
담담한 그의 말에 신문을 보고 있던 서인의 시선이 위로 쑥 올라왔다.
“기존 상품 마케팅팀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부서가 하나 있는데 소수 인원이라 옆에서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해.”
“아.”
“어떡할래.”
서도는 이미 반쯤 넘어온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서인이가 해 볼래?”
착한 사람이구나. 게다가 남아 있던 일말의 경계심이 미안할 정도로 자상했다. 사실, 서인은 이런 친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이었다.
‘정말 내가 그의 연인인 걸까?’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연인이 아니라면 이런 호의를 그가 서인에게 베풀 이유도 없었다. 분명 그렇긴 한데 왜 목에 가시가 걸린 느낌이 드는 걸까.
우선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인이 일어나서 꾸벅 정중하게 인사하자 서도의 입가에 머물던 미약한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문서인은 격식을 차렸다. 너무나도 정중해서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타인처럼.
거리감이 느껴지는 행동에 그의 가슴 한쪽이 싸하게 식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 내색하지 못할 것이다.
“…….”
그가 좋다고 말하는 문서인에게 거리를 둔 건 그, 장서도였으니까.
* * *
출근은 삼 일 뒤부터였다.
자세한 건 회사에 도착하면 주 대리가 설명해 줄 거라고 했던가. 서인은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배웅하고 별채 마루에 나와 몸을 눕혔다. 그날 이후로 강 사장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통화 중 이쪽이 제멋대로 끊어서 난리 칠 줄 알았더니.
나이가 드시더니 한풀 꺾이신 건가. 아니면, 일이 밀려서 이쪽에 관심을 둘 시간이 없는 걸지도.
일부러 아버지 사업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애써 다듬어 온 길을 강 사장이 망치지만 않길 바랄 뿐.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살며시 눈을 떴다.
“……아.”
정우진이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서인을 아래서부터 위로 쭉 훑었다. 간편한 티셔츠와 얇은 긴바지 차림의 여자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침입자를 본 사람치고는 눈빛이 무덤덤했다.
어깨 아래까지 길게 늘어트린 검은색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여자는 무척이나 어려 보였다.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가 아니었다면 학생이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눈을 깜빡일 때 보이는 옅은 갈색 눈동자. 굳게 닫혀 있는 얇실한 입술을 하나로 합쳐 놓으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단아하면서도 단정했다. 마치,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짓누르는 듯했다. 특히나 자신을 바라보는 저 고요한 시선이 은근히 사람 눈길을 끌게 했다.
장 상무님 취향이 이랬던가? 분명 여자가 처음 이곳에서 지내게 됐을 때만 해도…….
우진이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서인에게 건넸다.
“뭐예요?”
서인은 누운 채로 쇼핑백을 받아 들며 물었다.
“휴대폰입니다. 최신 기종이라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쇼핑백 안에 있는 상자를 열자 분홍색 메탈로 감싼 휴대폰이 나왔다. 전원을 켜 보니 이미 개통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주소록에는 번호 세 개가 이미 저장되어 있었다.
정우진. 양 비서. 상무님.
누가 저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 여대생들이 선호하는 휴대폰이라는데…….”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니 매번 이쪽, 그쪽, 저기요 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를 지칭할 호칭이 애매했다.
“뭐라고 불렀을 거 같아?”
그가 웃음기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그의 물음에 서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머리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는 게 재미있는지 장서도가 식사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
“네?”
“아저씨.”
“어…….”
“그렇게 불렀지. 나이 차이가 나니까.”
남자는 나이 차이 난다는 말을 덤덤하게 입에 담았다.
‘얼마나 나이 차이가 나기에, 아저씨?’
서인은 새삼스럽게 맞은편에 앉은 그를 훑었다. 집에 막 들어온 차림의 장서도는 검은색 베스트와 회색 실크 셔츠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어 전신이 보이지 않음에도 남자의 단단한 몸이 드러났다. 그가 젓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팔뚝을 감싼 셔츠가 팽팽해졌다.
서인의 시선이 쓱, 위로 올라왔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나이가 가려졌다. 나이 특유의 어른다운 매력이 존재했지만 그 위에 이 남자만의 분위기가 있었다. 아주 무겁고, 진중한. 그녀가 또래 남자들에게서 느끼지 못한 짙은 수컷 냄새가 났다.
“몇 살 차이길래요? 다섯 살?”
자신이 지금 스무 살, 아니, 기억을 일 년 잃었다고 했으니 스물한 살이다. 다섯 살 차이면 그의 나이는 스물여섯. 그래도 까마득히 높아 보였다. 그러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내 표정이 없던 그가 작게 실소했다.
“다섯 살 차이면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였겠지.”
그럼 더 많다는 건가?
조금 놀란 눈으로 변하는데 그가 젓가락을 든 채 구석구석 집요하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마치 작은 감정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했다.
“그럼.”
찌를 듯한 시선에 서인은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몇 살이세요?”
답은 곧장 날아왔다.
“서른넷.”
열세 살 차이.
“으음.”
신음 같은 소리였다. 문서인이 식사를 재개했다. 싫다는 건지, 단순히 놀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서인은 이미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감춰 버렸다. 수저로 밥을 크게 한 술 푸는 단정한 움직임을 서도가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서인은 수묵화처럼 단아하면서도 수채화처럼 여렸다. 꽃에 사뿐히 앉은 나비처럼 하늘하늘하다가도 저 작은 입술로 사랑을 말할 땐 올곧은 눈빛에 아래가 저릿해 왔다.
처음부터 시선을 끌었었지. 화려한 얼굴을 가진 문이라와는 다른 매력에 저도 모르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버렸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서도의 시선이 서인의 동선을 따라갔다.
문서인은 촉이 좋았다.
‘연인이지.’
달콤하게 속삭인 말에도 쉽사리 마음을 열어 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면서 그의 말에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문서인.”
식사를 하던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왜요?”
이쪽을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에는 따뜻한 감정이 없었다. 자신이 모르는 눈빛이기도 했다. 그게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눈으로는 웃으며 어금니를 지그시 물어야 했다.
서도가 입가를 느슨하게 풀었다.
“휴대폰 필요해?”
물로 입을 헹구며 묻는 말에 밥을 먹던 문서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이요?”
좀 놀란 눈치였다. 서도는 그 시선을 모른 척 넘겼다.
퇴근해서 별채에 도착하자마자 서류 가방을 서재에 두고 나오려는데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뭘까.
처음에는 파악하지 못했다. 책장에 꽂아 놓은 책들도 가지런했고 누군가 들어와 서재를 어지럽힌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 서도는 팔짱을 낀 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이 서재 내부를 천천히 주변을 훑어가다 어느 한 곳에 딱 멈췄다.
전화기.
서재에는 그만의 질서가 존재했다. 버릇처럼 사선으로 내려놓던 전화기가 일자로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휴대폰 없으면 불편하겠지. 내일 정 실장 통해서 보내지. 특별히 원하는 기종 있나?”
“가, 갑자기 휴대폰은 왜요?”
문서인이 발뺌을 할 모양이었다. 그는 이대로 넘어가 줄까, 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왜냐니.”
“…….”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서재 들어와서 전화기 쓰니까 그러지.”
“사, 살금살금은 아니었……!”
“당당하게 쓰라는 거야.”
예상하지 못한 말에 서인이 입을 벌렸다.
“문서인은 그래도 돼.”
장서도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마치 기억하라는 듯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서인이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상냥하시네요.”
“너만 할까.”
“네?”
“너도 상냥했어.”
어쩐지 미소가 밴 듯한 목소리에 서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넘어가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였지. 그래서…….”
말을 늘어트린 장서도의 시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의 얼굴에 와 닿는 건조함을 가장한 뜨거움에 서인은 목이 탔다.
“완전히 넘어가 버렸어.”
장서도가 후, 하고 짧게 웃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식사를 끝낸 뒤 그는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서재로 들어갔고 서인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고요한 내부에 어쩐지 어색함이 밀려와, 서인이 리모컨을 움켜잡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방음이 잘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일하는데 티브이의 잡음도 미안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얹혀사는 신세가 아닌가.
그때 강 사장의 기세로 봐서는 집에 다시 들어가기 힘들 것 같고. 그렇다고 모아 둔 돈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자신의 거처가 참 곤란해져 버렸다. 서인은 끌어안고 있던 무릎을 쭉 폈다.
“돈을 벌어야 할 텐데.”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를 깨트리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시간만 죽일 수도 없는 일이니까. 서인은 바로 앞을 향해 쭉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방치된 신문 끝이 잡혔다. 그대로 힘주어 끌어당기자 턱 하니 신문이 무릎에 안착한다.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기껏해야 회사 사무실 보조가 전부였는데.
서인이 신문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피며 넘기는데 어느 순간 그녀의 옆으로 길게 그림자가 생겼다.
“뭐 해?”
그였다.
“벌써 일 다 하셨어요?”
들어간 지 겨우 이십 분 정도 되지 않았나? 이런 눈빛으로 보자 남자가 서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훑어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보다, 부드럽네.”
단단한 손가락이 더 깊숙이 들어와 서인의 머리를 헤집었다. 손가락 틈 사이로 착착 감기는 느낌이 마음에 든 듯했다.
머리카락을 느리게 쓸어내리던 서도가 문득 시선을 밑으로 뚝, 떨어뜨렸다. 활짝 펼쳐진 신문. 자세히 보니 구인구직란이다. 시선을 느낀 건지 문서인이 신문 한 장을 팔랑, 넘기며 입을 열었다.
“일자리 구해야죠. 언제까지 놀고먹을 수는 없으니까.”
문서인은 제법 덤덤하게 말했다. 이럴 때 보면 스물한 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기특하네.”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이 뺨으로 내려왔다. 서인은 그의 다정한 손짓에 기분이 묘해졌다. 서도가 매끄럽고 작은 얼굴을 감싸며 엄지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회사에 자리가 하나 비었어.”
담담한 그의 말에 신문을 보고 있던 서인의 시선이 위로 쑥 올라왔다.
“기존 상품 마케팅팀에서 따로 떨어져 나온 부서가 하나 있는데 소수 인원이라 옆에서 보조해 줄 사람이 필요해.”
“아.”
“어떡할래.”
서도는 이미 반쯤 넘어온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서인이가 해 볼래?”
착한 사람이구나. 게다가 남아 있던 일말의 경계심이 미안할 정도로 자상했다. 사실, 서인은 이런 친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이었다.
‘정말 내가 그의 연인인 걸까?’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연인이 아니라면 이런 호의를 그가 서인에게 베풀 이유도 없었다. 분명 그렇긴 한데 왜 목에 가시가 걸린 느낌이 드는 걸까.
우선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인이 일어나서 꾸벅 정중하게 인사하자 서도의 입가에 머물던 미약한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문서인은 격식을 차렸다. 너무나도 정중해서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마치 타인처럼.
거리감이 느껴지는 행동에 그의 가슴 한쪽이 싸하게 식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마, 내색하지 못할 것이다.
“…….”
그가 좋다고 말하는 문서인에게 거리를 둔 건 그, 장서도였으니까.
* * *
출근은 삼 일 뒤부터였다.
자세한 건 회사에 도착하면 주 대리가 설명해 줄 거라고 했던가. 서인은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배웅하고 별채 마루에 나와 몸을 눕혔다. 그날 이후로 강 사장에게서는 전화가 없었다. 통화 중 이쪽이 제멋대로 끊어서 난리 칠 줄 알았더니.
나이가 드시더니 한풀 꺾이신 건가. 아니면, 일이 밀려서 이쪽에 관심을 둘 시간이 없는 걸지도.
일부러 아버지 사업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애써 다듬어 온 길을 강 사장이 망치지만 않길 바랄 뿐.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살며시 눈을 떴다.
“……아.”
정우진이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서인을 아래서부터 위로 쭉 훑었다. 간편한 티셔츠와 얇은 긴바지 차림의 여자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침입자를 본 사람치고는 눈빛이 무덤덤했다.
어깨 아래까지 길게 늘어트린 검은색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여자는 무척이나 어려 보였다.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가 아니었다면 학생이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와 눈을 깜빡일 때 보이는 옅은 갈색 눈동자. 굳게 닫혀 있는 얇실한 입술을 하나로 합쳐 놓으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단아하면서도 단정했다. 마치, 청량한 향기가 코끝을 짓누르는 듯했다. 특히나 자신을 바라보는 저 고요한 시선이 은근히 사람 눈길을 끌게 했다.
장 상무님 취향이 이랬던가? 분명 여자가 처음 이곳에서 지내게 됐을 때만 해도…….
우진이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서인에게 건넸다.
“뭐예요?”
서인은 누운 채로 쇼핑백을 받아 들며 물었다.
“휴대폰입니다. 최신 기종이라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쇼핑백 안에 있는 상자를 열자 분홍색 메탈로 감싼 휴대폰이 나왔다. 전원을 켜 보니 이미 개통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주소록에는 번호 세 개가 이미 저장되어 있었다.
정우진. 양 비서. 상무님.
누가 저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 여대생들이 선호하는 휴대폰이라는데…….”
“예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