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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자장
1화
프롤로그


오전 6시 29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태하의 아침이 시작된다. 정확히 30분에 울리기로 된 알람은 벌써 몇 년간 소리를 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태하의 아침은 6시 29분에 시작되는 것이다.
“또…… 시작이군.”
지겹다는 목소리와는 달리 침대를 빠져나오는 태하의 동작은 간결했다. 오히려 착착 자로 잰 듯이 뉴스 채널을 켜고 욕실로 향하는 일상이 침대 속보다 더 편안한 것 같아 보인다. 실제로 차라리 태하에겐 분주한 아침이 더 나았다. 끔찍한 불면이 이어지는 한밤중보단 훨씬 더 견딜 만했다.

― 오늘도 사상 최대치의 온도를 경신하며 폭염을 이어 갈 전망입니다. 특히나 올여름 더위는 열대야 현상을 동반하여 시민들이 잠을 못 이룬다는 푸념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기상 특보원 연결해 보겠습니다.

셔츠를 걸치던 태하가 앵커의 목소리에 피식, 낮은 실소를 했다. 유치한 심정이라는 건 알지만 괜히 심사가 꼬이는 탓이다. 누군 열대야를 떠나서 숙면의 느낌조차 잊고 산 지가 몇 년인데, 고작 그 정도로 엄살이라니.
[도착했습니다.]
늘 같은 시각에 울리는 메시지가 태하의 불만을 끊어 냈다. 오늘도 똑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어제만큼이나 피곤하고, 내일만큼이나 지겨운 나날들이.

“좋은 아침입니다, 이사님.”
안 실장을 만난 후로 좋은 아침이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젊은 나이답지 않게 늘 깍듯한 예를 차리는 안 실장에게 그 말을 못 해 매일 같은 소리를 듣는 태하였다.
“커피는 늘 드시던 걸로 준비해 뒀습니다.”
태하가 차에 타자마자 안 실장이 뒷좌석의 홀더를 가리켰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라 한 번쯤 넘어갈 법도 한데 참 빡빡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하긴, 공복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억지로 하루를 시작하는 태하가 누구더러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겠지만.
“오늘 일정은 미리 보고드렸던 것과 같습니다만, 약간의 변동이 생겼습니다.”
“안 실장이 그렇다면 불가피한 사안이겠지.”
안 실장은 태하 못지않은 원칙주의자였기에, 분초를 다투는 스케줄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태하의 곁에서 버텨 낸 유일한 수행원이기도 했고.
“예, 그렇습니다. 다섯 시에 본사에 방문하는 일정을 부득이 가장 첫 스케줄로 변경했습니다.”
“굳이 가장 짜증 나는 스케줄을 맨 처음으로 넣은 이유는?”
“본사 정문에 취재진이 몰려들 예정인데, 그나마 가장 마찰이 적은 시간대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장 떠오르는 문제는 많았다. 어제저녁 뉴스로는 본사의 회장이 내정된 공개 채용을 전면 취소하면서 했던 발언이 핫 이슈였지.
“영감님은 또 왜 쓸데없는 말씀을 하셔 가지고는…… 안 그래, 안 실장?”
“저는.”
빽빽한 강남대로에 접어든 안 실장이 빨간불 앞에서 느릿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노코멘트하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안 실장은 휘어지느니 부러질 사람이었다.
“그보다, 이사님.”
하지만 마냥 뻣뻣하지만은 않은 게 또 태하의 맘에 들었다.
“새로 공수해 온 침구 세트는 어떠셨는지요.”
“아, 그거.”
“예, 어젯밤에는 매트리스부터 새롭게 세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다 버려.”
“예.”
“차라리 저번 주에 시도했던 게 그나마 나았어.”
“그럼 그걸로 다시 교체하겠습니다. 그런데…….”
신호에서 벗어나자 본사의 건물이 코앞이었다. 안 실장은 곤란하다는 듯이 취재진이 에워싼 정문을 봤다.
“정문으로는 못 들어가실 것 같습니다.”
“뒤로 들어가지.”
애써 짜증을 억누른 태하가 차창 밖을 보았다. 저걸 뚫고 가느니 자신이 피해 가겠다는 심산이었다.
“어차피 이사님께서 돌파하셔야 할 문제 아닐까요. 회장님께선 언론 쪽에 문제가 생기면 늘 이사님을 찾으시니까요.”
“안 실장.”
태하는 낮게 안 실장을 불렀다. 더 듣지 않아도 뻔한 이야기니 이제 그만하라는 뜻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가 뭐지.”
“시간 낭비와 소모적인 것들이죠.”
“그럼 답은 나왔군.”
대쪽 같은 안 실장도 이 고집엔 못 당했다. 체념한 안 실장이 건물 뒤편으로 차를 몰아가는 사이 태하는 흘깃 왼쪽 손목에 찬 시계를 봤다.
반짝이는 다이아가 꼭 열두 개 박혀 있는, 언제나 지겹고 무의미한 시곗바늘을.

* * *

부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스가 멀어진다.
“아, 놓쳤다.”
사실 뛰어가면 잡았을 거리지만, 애초부터 의욕이 없었던 목소리로 초연이 말했다.
“뭐, 다음 거 타면 되지.”
원래 양반은 뛰지 않는 법이랬다. 뭣보다 더워서 뛸 기력도 없다. 초연은 어제 버스에서 주웠던 뽀로로 부채를 팔랑이며 터벅터벅, 버스 정거장으로 향했다.
“삼복더위에 조교 팔자가 서럽구나.”
대학엔 방학이 시작됐지만, 초연은 출근지가 학교에서 정 교수의 센터로 바뀌었을 뿐, 쉴 수는 없었다. 솔직히 경쟁률이 치열한 정 교수의 센터 조교로 도대체 왜 자신이 뽑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뭐 다 이유가 있겠지 싶었다.
“전산 오류는 아니겠지. 어제 전화도 왔으니까…….”
복잡한 생각은 초연과 어울리지 않는다. 정 교수의 수면의학센터는 국내에서 전문성으론 최고였고, 초연이 시작한 심리학 석사 과정 논문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만큼 피 터지는 경쟁률을 자랑하는 자리라 기대도 안 했는데, 덜컥 초연이 뽑혀 버렸다.
“거긴 에어컨 빵빵했으면 좋겠다.”
태평하게 다음 버스를 내다보며, 초연은 이 행운을 즐기기로 했다.

잠시 후, 초연이 내린 정거장은 으리으리한 빌딩들이 서 있는 강남의 한복판이었다. 그중 삼 층짜리 수면의학센터는 여러모로 눈에 뜨이는 건물이었다. 찾아야 눈에 들어오는 작은 간판과 현대적이고 심플한 디자인은 초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당분간, 여기가 초연의 직장 아닌 직장이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스르륵,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밝은 초연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널찍한 실내와 잔잔히 흐르는 클래식 음악은 초연이 상상했던 분위기 그대로였는데, 인사를 받아 주는 사람만 달랐다.
“이초연 학생?”
“예, 제가 오늘부터 여기서 조교로 근무하게 된 이초연이라고 합니다.”
로비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던 중년의 여성이 읏차, 하며 허리를 폈다. 무섭고 딱딱한 사람만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왠지 찜질방 단골일 것 같은 아주머니의 인상에 초연의 마음이 놓였다.
“실례지만, 정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미 했는데.”
“……네?”
에이, 설마. 선배들의 풍문을 엿들은 바로는 정 교수님은 이 바닥의 실력자인 동시에 가장 대하기 어려운 교수로 꼽히는 사람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인상 좋은, 조금 난해한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아주머니와 동일 인물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학생이 찾는 사람이 정화진 교수라면, 내가 맞아.”
“아…… 정말 실례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이번 학기에 진학하느라 교수님을 뵌 건 재작년 대형 강의실에, 그것도 자리가 없어서 저 먼발치에서만 뵙느라고…….”
“불쾌하지 않았으니 변명은 안 해도 돼. 그럼, 업무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 볼까.”
“네…… 네!”
정 교수가 먼저 원장실로 들어가 초연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깔끔한 로비와는 달리 서적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상이 오히려 정 교수와 더 어울렸다.
“이초연 씨는 앞으로 서류 관리와 환자들의 수면 측정 데이터를 주로 다루게 될 거야. 조교의 수준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들이니 부담 가질 거 없어.”
“네, 알겠습니다.”
또렷한 초연의 대답에 정 교수는 한참 동안 말없이 초연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꿀꺽, 초연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려는 순간, 다행히 정 교수가 다시 입을 떼었다.
“이초연 씨는 왜 이 자리에 본인이 뽑혔다고 생각하지?”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다. 솔직히 초연이 생각해도 그리 우수한 인재는 아니었으니까.
“모르겠습니다.”
“정직해서 좋군. 난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해. 그리고 그게 이초연 씨를 뽑은 이유야.”
“그 말씀도…… 잘 모르겠는데요.”
지원자 중 초연의 성적이 최하위였다. 꼴찌라는 것까진 몰라도 스스로 하위권이라는 건 아는 초연이다.
“난 평생 사람 공부를 해 왔어. 그 연장선이라고 해 두지. 이초연 씨가 정말 내가 생각한 그런 특별한 사람인지 앞으로 증명해 주길 바라.”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사람이라니까 좋은 뜻인 것 같다. 초연은 정 교수의 말에 일단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해타산은커녕 타인에 대한 경계심조차 하나도 없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 * *

안 실장의 예상대로 회장실에서 나온 태하의 얼굴은 구겨져 있었다. 예전부터 언론 쪽에 문제가 터지면 태하에게 뒷수습을 맡기는 게 회장의 특기였다. 화통하고 유쾌한 최 회장의 성격 덕분에 때때로 쏟아지는 자극적인 발언은 기자들의 주 먹잇감이었고, 태하는 매번 그 희생양이 되었다.
“기자들 인터뷰 스케줄 잡겠습니다.”
눈치 빠른 안 실장의 말에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녁부터 괜찮을까요?”
“오늘 저녁은 안 돼.”
“내일 아침까지 해결이 안 되면 회장님께서 한 말씀 하실 텐데요. 정 교수님과의 일정을 미루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 돼.”
이 문제에 있어서 태하의 고집은 쇠심줄 같았다. 꼬박꼬박 잡혀 있는 수면 측정과 내담, 할 수 있는 갖가지 검사를 다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약물치료에 반대하는 입장인 정 교수가 최소량으로 처방한 수면제를 먹으면서도 미국에서 공수한 멜라토닌에 잠이 잘 온다는 침구를 끼고, 때때로 침까지 맞았다. 심지어 그걸로도 효과가 없어 정 교수에겐 비밀로 한약까지 먹어 본 태하다.
“그러실 것 같아서 일단 보도 자료 돌려 놨습니다.”
“그럼 안 실장은 이만 퇴근해. 센터엔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가지.”
“예, 알겠습니다.”
태하는 오랜만에 직접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길부터 이미 지난밤의 불면으로 머리가 멍했지만 검사를 앞두고 커피를 마실 수는 없었다. 태하는 꽉 막힌 도로를 보며 라디오를 틀었다.

― 오늘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대규모 정전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여름철 전력 수요가 막대한 가운데 공급량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요.

라디오의 내용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게다가 자체 비상 전력을 보유한 회사 건물이나 태하의 집과는 거리가 먼 내용인지라 태하는 채널을 돌렸다.

― 제이드 그룹 총수인 최재두 회장이 또 구설에 올랐습니다. 하반기 공개 채용을 취소하는 과정에서 기자들과의 오찬 중 요즘 젊은이들이 부실한 것을 이윤을 내는 기업이 책임질 필요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기 때문인데요…….

이런, 더 답답한 소식이다. 태하는 아예 라디오를 끈 채로 막 파란색으로 바뀐 신호등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이 지친 하루가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길 바랄 뿐이다.

* * *

정 교수와의 면담을 끝낸 초연은 오후가 되도록 강 실장과 이런저런 업무를 익히고 있었다.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삼십 대 중반의 강 실장은 깐깐해 보이는 첫인상답게 똑 부러지는 교육을 진행 중이었다.
“여기는 수면 관측실이야. 환자분이 오시면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이곳에서 잠을 자도록 유도하지. 이 장치들은 그 환자의 심박과 뇌파를 측정하는 거고, 장치는 피부에 직접 닿되 너무 자극이 되지 않도록 붙여 주면 돼. 자세한 매뉴얼은 여기.”
강 실장이 건네준 자료를 보며 초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항상 분명히 하도록.”
“네!”
바짝 얼어 대답하는 초연을 보던 강 실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 때문이 아니야. 생긴 거랑 달리 군기 잡는 데 취미도 없고.”
“아, 네…… 전 괜찮은데.”
“여기 오는 환자들은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사람들이야. 지쳐 있기도 하고.”
그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이런 데 와서 잠을 자는 걸 관찰할 사람들이면 그럴 만도 했다.
“가급적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 대답은 명확하게 하되, 먼저 말을 걸지는 말고. 모르는 게 있으면 교수님께 대답을 넘겨, 괜히 어설픈 대처는 일만 커지게 만드니까.”
“네, 알겠습니다.”
비록 초연의 성적을 보고 반대했던 강 실장이지만 씩씩한 건 썩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할지는 지켜봐야 아는 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