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오늘 관측실 일정은 하나 남았어. 자주 오시는 분이니 별다른 안내는 필요 없고, 기기 부착만 해 드리면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저 혼자서요?”
“그래, 매뉴얼대로만 하면 돼.”
“네!”
다시 한번 씩씩하게 대답하는 초연은 그때까지만 해도 강 실장이 태하를 고의적으로 피하는 줄은 몰랐다. 그가 얼마나 피곤한 남자인지도. 초연은 배운 대로 머리를 한 번 더 정리하고 기기들을 부착할 순서에 따라 꺼내 놓았다. 환자의 안정감을 위해 향기가 나는 디퓨저를 테이블 위에 꺼내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태하와 정 교수의 면담이 끝나고, 수면 관측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한 지 불과 삼 초 만이었다.
“안녕하세요, 정 교수님의 새로 온 조교 이초연이라고 합니다.”
지시대로 짧은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철저한 무시였다.
“지금부터 수면 관측 기기를 부착할 테니, 소매를 조금 걷어 주시고 편안한 자세로…….”
“설명은 필요 없어.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니까.”
저음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상도 어딘지 날카로웠다. 다소 창백해 보이는 안색, 유난히 강한 눈매에 찌푸린 미간, 굳게 다문 입술까지.
“저, 그럼…… 일단 부착하겠습니다.”
역시나 대답은 없다. 중간에 긴장한 초연의 손이 살짝 떨리자 바로 매섭게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하필이면 첫 환자가 이런 사람이라니, 액땜이라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 순간, 초연의 손이 재차 미끄러졌다. 자꾸 의식을 하니 부담이 되어 쉬운 일도 버거워진다.
“내가 할 테니 나가 봐.”
“하지만 제가…….”
“앞으로 나한테 두 번 말 시키지 말고.”
매뉴얼에 이런 상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초연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태하는 익숙한 손길로 제 몸에 장치들을 부착하고 있었다.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그럼, 기기 전원은 제가 켜고 나가 보겠습니다.”
도저히 태하의 손에서 기기를 뺏을 수 없던 초연이 내린 선택은 남은 일을 해치우고 나가자는 것뿐이었다. 그저 전원만 켜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어…… 이게 왜 이러지…….”
그런데 초연이 누른 스위치가 빠르게 깜박이기 시작한다. 이것도 매뉴얼엔 없던 이야기인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군.”
“아뇨, 그게 아니라 원래대로면 이게 켜져야 하는데.”
“됐고, 다른 사람 불러와. 그쪽한테 낭비할 시간 없어.”
초연이 뭐라 반박하려는 사이, 이번엔 실내의 형광등이 깜박이기 시작한다. 초연의 잘못이 아닌 건 확실한데,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불이 완전히 꺼졌다. 초연의 손끝에 있던 기계의 스위치도, 방 안의 조명도 전부 다.
“갑자기 이게 무슨…….”
주머니에서 무언가 뒤적뒤적 꺼내던 초연이 우습게 생긴 인형을 누르자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거기에 비친 초연의 얼굴이 더 무섭다는 말 대신 태하는 고개를 돌렸다.
“정전이겠지.”
아까 라디오의 이야기를 떠올린 태하가 나직이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실장에게 전화해서 인터뷰 스케줄을 잡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실험은 글러 먹었으니.
“저, 죄송한데요.”
초연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나서려던 태하가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아까 교육받을 때, 이 건물의 모든 방은 밖에서 잠기면 안에선 열 수 없다고…….”
초연의 말을 무시한 태하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문손잡이를 찾았다. 그러나 쿵, 거칠게 문손잡이를 밀어 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초연의 말이 사실이란 뜻이다.
“그리고 모든 보안 설비가 최신식 전자장치라서 전기가 없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걸로 아는데…….”
“그 말을 왜 지금 하나!”
홱, 돌아보는 태하의 타깃은 이제 열리지 않는 문 대신 초연이다.
“제가 말하려고 했는데 무시하셨잖아요.”
“그렇게 느리게 말을 하는 걸 내가 일일이 기다려 줘야 할 의무는?”
“없죠.”
다소 맥 빠지는 초연의 반응에 태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보다 적극적으로 변명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조교 나부랭이 주제에.
“저기,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팍 구긴 태하의 표정이 꽤 인상적이지만 초연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뇨, 잘되는데요.”
“지금 일종의 조난 상태라는…….”
“그냥 정전인데 무슨 조난이에요.”
초연은 계속 작은 빛을 내고 있는 열쇠고리를 흔들어 보이며 태연히 말했다.
“이런 첨단 장비가 있는 조난이 어디 있다고.”
“진심으로 그딴 애들 장난감 같은 게 첨단 장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초연은 이제 태하의 말 대부분을 적당히 무시하기로 한 것 같았다.
“세상에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없다니까?”
“그래서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초연의 반격에 순간 태하가 말문을 잃었다. 보통 이렇게 몰아붙이면 대개의 사람들은 해법을 내놓거나 변명이라도 하기 마련인데, 아무리 실내라지만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태하를 본다.
“그래서가 아니라 대책을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닌가?”
“뭐, 영화에서처럼 문 부수고 탈출이라도 해요?”
“비현실적인 소리는 집어치우지. 핸드폰으로 정 교수님이든 119든 연락해 봐.”
환자는 옷을 갈아입으며 개인 소지품을 모두 맡기게 되어 있었다. 조금 성가시긴 했지만 혼자가 아닌 초연이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없는데요.”
“뭐?”
“가방에 두고 왔나 봐요.”
저 태평한 표정이 태하를 더 미치게 만든다.
“왜?”
“깜박했나 보죠.”
“하, 진짜 돌겠군.”
새삼 안 실장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잠깐, 이 건물 전체라는 건…… 직원들도 건물 밖으로 못 나가는 건가? 신고도 못 하고?”
“그건 저도 모르죠. 오늘 처음 왔거든요.”
“그쪽은 대체 아는 게 뭐야? 이런 때를 대비한 대책은 교육 안 받았나?”
아, 진짜. 이 남자는 언제 봤다고 성질인가. 초연이 보기에는 정전을 일으킨 게 그녀도 아니고, 남들도 불편을 겪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대책이랄 게 뭐 있겠어요. 핸드폰도 없고 문은 잠겼고, 정전도 가끔 있는 일이잖아요.”
“정전 때문에 강제로 감금되는 일은 없지! 구조대도 바쁠 테니 금방 온다는 보장도 없고!”
버럭 태하가 성질을 냈다. 그는 초연의 태도에 체면이고 뭐고 열이 뻗쳐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오겠죠!”
하지만 성질이라면 누구한테 지지 않는 초연이다. 초연이 맞받아치자 제가 먼저 소리친 건 생각도 안 하고 태하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놀란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 태하는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초연을 향해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다.
“그쪽이 그렇게 팔자 좋게 바닥에 앉아 있을 때가 아닌 걸로 아는데?”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어때요.”
정 교수가 이상한 걸 센터에 들여놨다. 태하가 생전 처음 보는 타입의, 아주 이상한 여자.
“저기요, 제가 좀 피곤해서 그런데.”
“내가 더 피곤해. 단언컨대 그쪽보다 훨씬 더.”
일차원적인 상황이 되자 사람도 일차원적으로 유치해지나 보다. 평소라면 이런 말싸움 따위 쳐다도 보지 않았을 태하가 오히려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난 팔 년째 불면증을 앓고 있어. 덕분에 안 그래도 소중한 시간을 매달 이런 곳에서 허비하고 있지. 그쪽처럼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쉴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시간은 계속 낭비되는 중이야.”
다다다, 쏘아붙이는 태하를 보는 초연의 얼굴에선 특별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니, 말을 제대로 듣고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누가 위로해 달라고 했나?”
그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이래서야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던 어린이집에서 했던 일과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 드릴까요.”
아이들에게도 늘 이렇게 물었다. 눈을 빤히 바라본 채로, 정확히 원하는 걸 말해 보라고.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해야지!”
대체로 떼를 쓰는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모른다. 모르니까 답답하고 그래서 상대에게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초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큰 아이라고 생각하자. 이런 때는 또 특효약이 있었다.
“하, 어쩔 수 없네요.”
초연이 바닥에서 일어나 툭툭 제 옷을 털었다. 태하는 그 먼지조차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 당장은 일말의 가능성 있는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초연뿐이기에 꾹 참았다. 하다못해 구조요청 흉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말씀하셨듯이 긴급한 사태니까 할 수 없죠.”
태하가 재촉하려는 사이 초연이 주머니에서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작은 약병을 꺼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약병 속에선 톡, 하고 하얀색 알약이 나온다.
“뭐야.”
태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초연이 내민 알약을 훑어본다. 태하가 생각한 대책에 이런 종류는 없었던 것 같아서 더더욱 미심쩍다.
“진정제니까 드세요.”
“처음 보는 약인데? 어지간한 진정제는 내가 다…….”
“신약이에요. 제가 연구실 출신이거든요. 물론 임상도 완료했으니까 안전해요. 겨울에 출시할 약이었거든요.”
초연이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던 태하의 눈동자에서 망설임이 읽힌다.
“안 내키시면…….”
“아니.”
망설이다가도 도로 가져가려고 하면 발끈하는 게 아이들의 특징이다. 지금 태하도 그랬다. 초연의 마음이 변할세라 알약을 낚아채곤 입에 달랑 털어 넣는 모습이 우스울 정도로.
“그럼 이제 쉬세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초연이 다시 벽에 기대고 맨바닥에 앉았다.
“아니, 이게 대책의 단가? 나더러 그냥 쉬고 있으라고?”
“네, 다예요.”
“뭔가 조치를 취해 줘야 하는 거…….”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 보세요.”
“장난하자는 거지? 지금…….”
황당함에 찬 태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연이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행했다.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것이다.
“장난 아니에요.”
태하의 기준에서 이 긴급한 조난 상황이 이 여자에겐 아무 일도 아닌 것 같다. 아니, 태하의 존재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그리고 그 약, 정말 효과적인 신약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초연은 말이 없었다. 오히려 숨소리가 조금 고르고 차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 세상에.”
믿기지 않지만, 이 여자는 이대로 잠들 작정인가 보다. 어떤 의미에선 부러울 정도로 무신경한 여자였다.
따스하고 얕은 바다에 온몸이 잠긴 것 같다. 잔잔한 파도가 서서히 밀려들고, 어딘지 아득한 기분이 드는 곳. 언제까지고 이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곳…… 그건 태하의 무의식이었다.
쾅! 요란한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 소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팟, 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감은 눈꺼풀조차 날카롭게 찌르는 조명이 억지로 태하를 깨우고야 말았다.
“최 이사, 미안해. 우리 센터 측이 정전에 대비를 못 해서. 별일 없었지?”
다급하게 들어온 정 교수의 눈에 비친 태하는 처음 보는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은 거야? 상태가…….”
태하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들지 않았는지 대답도 않은 채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피곤하다고 하시더니, 좀 주무셨나 봐요.”
옆에 있던 초연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실내의 모든 사람이 소리 없는 경악을 했다. 당사자인 태하는 여전히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파악조차 안 되는 상태로 몽롱한 머리를 짚어 볼 뿐이었다.
“이 조교, 여기가 어디지?”
간신히 평정을 찾은 정 교수의 말에 초연이 해맑게 답한다.
“수면의학센터요.”
그리고 잠시의 간격을 두고 아, 하는 탄성을 냈다.
“불면증 있으시다고 했죠, 참.”
정 교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초연은 너무도 쉽게 말한다. 그 둘의 대화를 듣는 태하로서는 가뜩이나 멍한 머릿속이 더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저 무신경한 여자의 말대로라면 나는 잠들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약 한 시간이 지난 시각, 잠시 끊겼던 의식과 기억을 두고 보면 가장 설득력 있는 답안이었다.
“내가…… 잠에 들었다고…….”
믿기지 않는 나머지 나직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네. 주무셨잖아요.”
“내가?”
“아, 저도 깜박 졸긴 했죠.”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저 무신경한 여자가 정전에도 손을 놓고 있길래 조금 닦달을 했더니 아직 출시도 되지 않은 진정제를 줬었다. 설마, 정말로 신약의 효과로 잠에 든 건가. 여태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잠들지 못했던 자신이, 고작 신약 하나로?
“오늘 관측실 일정은 하나 남았어. 자주 오시는 분이니 별다른 안내는 필요 없고, 기기 부착만 해 드리면 돼.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저 혼자서요?”
“그래, 매뉴얼대로만 하면 돼.”
“네!”
다시 한번 씩씩하게 대답하는 초연은 그때까지만 해도 강 실장이 태하를 고의적으로 피하는 줄은 몰랐다. 그가 얼마나 피곤한 남자인지도. 초연은 배운 대로 머리를 한 번 더 정리하고 기기들을 부착할 순서에 따라 꺼내 놓았다. 환자의 안정감을 위해 향기가 나는 디퓨저를 테이블 위에 꺼내 놓기까지 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었다. 태하와 정 교수의 면담이 끝나고, 수면 관측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한 지 불과 삼 초 만이었다.
“안녕하세요, 정 교수님의 새로 온 조교 이초연이라고 합니다.”
지시대로 짧은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건 철저한 무시였다.
“지금부터 수면 관측 기기를 부착할 테니, 소매를 조금 걷어 주시고 편안한 자세로…….”
“설명은 필요 없어.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니까.”
저음의 목소리엔 날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상도 어딘지 날카로웠다. 다소 창백해 보이는 안색, 유난히 강한 눈매에 찌푸린 미간, 굳게 다문 입술까지.
“저, 그럼…… 일단 부착하겠습니다.”
역시나 대답은 없다. 중간에 긴장한 초연의 손이 살짝 떨리자 바로 매섭게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하필이면 첫 환자가 이런 사람이라니, 액땜이라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 순간, 초연의 손이 재차 미끄러졌다. 자꾸 의식을 하니 부담이 되어 쉬운 일도 버거워진다.
“내가 할 테니 나가 봐.”
“하지만 제가…….”
“앞으로 나한테 두 번 말 시키지 말고.”
매뉴얼에 이런 상황은 적혀 있지 않았다. 초연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 태하는 익숙한 손길로 제 몸에 장치들을 부착하고 있었다.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그럼, 기기 전원은 제가 켜고 나가 보겠습니다.”
도저히 태하의 손에서 기기를 뺏을 수 없던 초연이 내린 선택은 남은 일을 해치우고 나가자는 것뿐이었다. 그저 전원만 켜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어…… 이게 왜 이러지…….”
그런데 초연이 누른 스위치가 빠르게 깜박이기 시작한다. 이것도 매뉴얼엔 없던 이야기인데.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군.”
“아뇨, 그게 아니라 원래대로면 이게 켜져야 하는데.”
“됐고, 다른 사람 불러와. 그쪽한테 낭비할 시간 없어.”
초연이 뭐라 반박하려는 사이, 이번엔 실내의 형광등이 깜박이기 시작한다. 초연의 잘못이 아닌 건 확실한데,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 불이 완전히 꺼졌다. 초연의 손끝에 있던 기계의 스위치도, 방 안의 조명도 전부 다.
“갑자기 이게 무슨…….”
주머니에서 무언가 뒤적뒤적 꺼내던 초연이 우습게 생긴 인형을 누르자 작은 빛이 새어 나왔다. 거기에 비친 초연의 얼굴이 더 무섭다는 말 대신 태하는 고개를 돌렸다.
“정전이겠지.”
아까 라디오의 이야기를 떠올린 태하가 나직이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실장에게 전화해서 인터뷰 스케줄을 잡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실험은 글러 먹었으니.
“저, 죄송한데요.”
초연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나서려던 태하가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아까 교육받을 때, 이 건물의 모든 방은 밖에서 잠기면 안에선 열 수 없다고…….”
초연의 말을 무시한 태하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문손잡이를 찾았다. 그러나 쿵, 거칠게 문손잡이를 밀어 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초연의 말이 사실이란 뜻이다.
“그리고 모든 보안 설비가 최신식 전자장치라서 전기가 없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걸로 아는데…….”
“그 말을 왜 지금 하나!”
홱, 돌아보는 태하의 타깃은 이제 열리지 않는 문 대신 초연이다.
“제가 말하려고 했는데 무시하셨잖아요.”
“그렇게 느리게 말을 하는 걸 내가 일일이 기다려 줘야 할 의무는?”
“없죠.”
다소 맥 빠지는 초연의 반응에 태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보다 적극적으로 변명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조교 나부랭이 주제에.
“저기,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팍 구긴 태하의 표정이 꽤 인상적이지만 초연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뇨, 잘되는데요.”
“지금 일종의 조난 상태라는…….”
“그냥 정전인데 무슨 조난이에요.”
초연은 계속 작은 빛을 내고 있는 열쇠고리를 흔들어 보이며 태연히 말했다.
“이런 첨단 장비가 있는 조난이 어디 있다고.”
“진심으로 그딴 애들 장난감 같은 게 첨단 장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초연은 이제 태하의 말 대부분을 적당히 무시하기로 한 것 같았다.
“세상에 백 퍼센트 확실한 건 없다니까?”
“그래서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초연의 반격에 순간 태하가 말문을 잃었다. 보통 이렇게 몰아붙이면 대개의 사람들은 해법을 내놓거나 변명이라도 하기 마련인데, 아무리 실내라지만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여자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태하를 본다.
“그래서가 아니라 대책을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닌가?”
“뭐, 영화에서처럼 문 부수고 탈출이라도 해요?”
“비현실적인 소리는 집어치우지. 핸드폰으로 정 교수님이든 119든 연락해 봐.”
환자는 옷을 갈아입으며 개인 소지품을 모두 맡기게 되어 있었다. 조금 성가시긴 했지만 혼자가 아닌 초연이라도 있어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없는데요.”
“뭐?”
“가방에 두고 왔나 봐요.”
저 태평한 표정이 태하를 더 미치게 만든다.
“왜?”
“깜박했나 보죠.”
“하, 진짜 돌겠군.”
새삼 안 실장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잠깐, 이 건물 전체라는 건…… 직원들도 건물 밖으로 못 나가는 건가? 신고도 못 하고?”
“그건 저도 모르죠. 오늘 처음 왔거든요.”
“그쪽은 대체 아는 게 뭐야? 이런 때를 대비한 대책은 교육 안 받았나?”
아, 진짜. 이 남자는 언제 봤다고 성질인가. 초연이 보기에는 정전을 일으킨 게 그녀도 아니고, 남들도 불편을 겪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었다.
“대책이랄 게 뭐 있겠어요. 핸드폰도 없고 문은 잠겼고, 정전도 가끔 있는 일이잖아요.”
“정전 때문에 강제로 감금되는 일은 없지! 구조대도 바쁠 테니 금방 온다는 보장도 없고!”
버럭 태하가 성질을 냈다. 그는 초연의 태도에 체면이고 뭐고 열이 뻗쳐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오겠죠!”
하지만 성질이라면 누구한테 지지 않는 초연이다. 초연이 맞받아치자 제가 먼저 소리친 건 생각도 안 하고 태하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놀란 내색을 전혀 하지 않는 태하는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다시 초연을 향해 시비 아닌 시비를 걸었다.
“그쪽이 그렇게 팔자 좋게 바닥에 앉아 있을 때가 아닌 걸로 아는데?”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좀 어때요.”
정 교수가 이상한 걸 센터에 들여놨다. 태하가 생전 처음 보는 타입의, 아주 이상한 여자.
“저기요, 제가 좀 피곤해서 그런데.”
“내가 더 피곤해. 단언컨대 그쪽보다 훨씬 더.”
일차원적인 상황이 되자 사람도 일차원적으로 유치해지나 보다. 평소라면 이런 말싸움 따위 쳐다도 보지 않았을 태하가 오히려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난 팔 년째 불면증을 앓고 있어. 덕분에 안 그래도 소중한 시간을 매달 이런 곳에서 허비하고 있지. 그쪽처럼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쉴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시간은 계속 낭비되는 중이야.”
다다다, 쏘아붙이는 태하를 보는 초연의 얼굴에선 특별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니, 말을 제대로 듣고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네요.”
“누가 위로해 달라고 했나?”
그럼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이래서야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던 어린이집에서 했던 일과 다를 것도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해 드릴까요.”
아이들에게도 늘 이렇게 물었다. 눈을 빤히 바라본 채로, 정확히 원하는 걸 말해 보라고.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해야지!”
대체로 떼를 쓰는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모른다. 모르니까 답답하고 그래서 상대에게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초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큰 아이라고 생각하자. 이런 때는 또 특효약이 있었다.
“하, 어쩔 수 없네요.”
초연이 바닥에서 일어나 툭툭 제 옷을 털었다. 태하는 그 먼지조차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 당장은 일말의 가능성 있는 대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초연뿐이기에 꾹 참았다. 하다못해 구조요청 흉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말씀하셨듯이 긴급한 사태니까 할 수 없죠.”
태하가 재촉하려는 사이 초연이 주머니에서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작은 약병을 꺼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약병 속에선 톡, 하고 하얀색 알약이 나온다.
“뭐야.”
태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초연이 내민 알약을 훑어본다. 태하가 생각한 대책에 이런 종류는 없었던 것 같아서 더더욱 미심쩍다.
“진정제니까 드세요.”
“처음 보는 약인데? 어지간한 진정제는 내가 다…….”
“신약이에요. 제가 연구실 출신이거든요. 물론 임상도 완료했으니까 안전해요. 겨울에 출시할 약이었거든요.”
초연이 내민 손을 잠시 바라보던 태하의 눈동자에서 망설임이 읽힌다.
“안 내키시면…….”
“아니.”
망설이다가도 도로 가져가려고 하면 발끈하는 게 아이들의 특징이다. 지금 태하도 그랬다. 초연의 마음이 변할세라 알약을 낚아채곤 입에 달랑 털어 넣는 모습이 우스울 정도로.
“그럼 이제 쉬세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초연이 다시 벽에 기대고 맨바닥에 앉았다.
“아니, 이게 대책의 단가? 나더러 그냥 쉬고 있으라고?”
“네, 다예요.”
“뭔가 조치를 취해 줘야 하는 거…….”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 보세요.”
“장난하자는 거지? 지금…….”
황당함에 찬 태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초연이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행했다.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는 것이다.
“장난 아니에요.”
태하의 기준에서 이 긴급한 조난 상황이 이 여자에겐 아무 일도 아닌 것 같다. 아니, 태하의 존재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
“그리고 그 약, 정말 효과적인 신약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초연은 말이 없었다. 오히려 숨소리가 조금 고르고 차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 세상에.”
믿기지 않지만, 이 여자는 이대로 잠들 작정인가 보다. 어떤 의미에선 부러울 정도로 무신경한 여자였다.
따스하고 얕은 바다에 온몸이 잠긴 것 같다. 잔잔한 파도가 서서히 밀려들고, 어딘지 아득한 기분이 드는 곳. 언제까지고 이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곳…… 그건 태하의 무의식이었다.
쾅! 요란한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 소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팟, 하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감은 눈꺼풀조차 날카롭게 찌르는 조명이 억지로 태하를 깨우고야 말았다.
“최 이사, 미안해. 우리 센터 측이 정전에 대비를 못 해서. 별일 없었지?”
다급하게 들어온 정 교수의 눈에 비친 태하는 처음 보는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괜찮은 거야? 상태가…….”
태하는 아직 정신이 완전히 들지 않았는지 대답도 않은 채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피곤하다고 하시더니, 좀 주무셨나 봐요.”
옆에 있던 초연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실내의 모든 사람이 소리 없는 경악을 했다. 당사자인 태하는 여전히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파악조차 안 되는 상태로 몽롱한 머리를 짚어 볼 뿐이었다.
“이 조교, 여기가 어디지?”
간신히 평정을 찾은 정 교수의 말에 초연이 해맑게 답한다.
“수면의학센터요.”
그리고 잠시의 간격을 두고 아, 하는 탄성을 냈다.
“불면증 있으시다고 했죠, 참.”
정 교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초연은 너무도 쉽게 말한다. 그 둘의 대화를 듣는 태하로서는 가뜩이나 멍한 머릿속이 더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저 무신경한 여자의 말대로라면 나는 잠들었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약 한 시간이 지난 시각, 잠시 끊겼던 의식과 기억을 두고 보면 가장 설득력 있는 답안이었다.
“내가…… 잠에 들었다고…….”
믿기지 않는 나머지 나직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네. 주무셨잖아요.”
“내가?”
“아, 저도 깜박 졸긴 했죠.”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저 무신경한 여자가 정전에도 손을 놓고 있길래 조금 닦달을 했더니 아직 출시도 되지 않은 진정제를 줬었다. 설마, 정말로 신약의 효과로 잠에 든 건가. 여태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잠들지 못했던 자신이, 고작 신약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