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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최 이사, 일단 불편한 데 없으면 안정하고 있어. 아무래도 내가 보안 프로그램을 재부팅하고 와야겠어. 첨단인 건 좋은데 꼭 내 지문이 필요하다니까. 거기 다른 직원들도 다 따라와요.”
“네.”
정 교수가 떠나자 단둘이 있기가 어색해진 초연도 황급히 방을 나서려 했다.
“잠깐만!”
처음 신경질적이던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태하가 절박하게 초연의 소매를 붙들었다. 초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슥, 태하를 올려 봤다.
“아, 그 약이요?”
“어, 이번엔 말이 좀 통하네.”
태하의 눈동자에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로, 피로감이 켜켜이 쌓여 있던 아까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초연을 뚫어져라 보았다.
“비밀, 지켜 주셔야 해요. 들키면 저도 큰일 나거든요.”
“무조건 지킬게. 단, 그 약에 대해서 나와 다시 한번 얘기할 기회를 준다면.”
“뭐, 그러죠.”
예상외로 선선히 대답한 초연은 이내 밖에서 자신을 찾는 정 교수의 목소리를 듣더니 후다닥 나가 버렸다. 사실, 곤란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발이 빨라졌던 것 같다.
“저, 교수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로비에서 컴퓨터를 체크하던 정 교수가 의아한 눈짓으로 되묻는다.
“아까 정전이 일어났을 때 최태하 씨가 많이 예민하고 또 흥분 상태를 보이셔서요.”
“왜 아니겠어. 그 정도는 나도 예상한 바야, 고생 많았지?”
“그래서 제가…… 약을 드렸어요. 그리고 아마 지금 잠들었던 것도 그 약의 효과 덕분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는 것 같아요.”
“약을 줬다고?”
“네, 제가 평소에 먹는 건데, 마침 주머니에 있어서…….”
우물쭈물 솔직하게 고백하는 초연을 보면서 정 교수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난 팔 년간 다뤘던 환자 최태하는 각종 수면제는 물론 진정제에도 강한 내성을 갖고 있었다. 즉, 마취제가 아닌 단순한 알약 정도로 잠이 드는 건 불가능하단 뜻이다.
“이번 실험엔 변수가 있었군.”
정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살아 있는 변수, 초연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구 년이 되기 전에 최태하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Ch. 1
원장실 책상에 앉은 정 교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각각 그 맞은편에 앉은 태하와 초연도 그런 정 교수를 주목하고 있다.
“최 이사는 잠이 든 것 같다고 했지? 이 조교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었고.”
“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애석하게도 하필 정전인 때라 장치가 작동되지 않아서 확인할 길은 없어.”
태하가 원했던 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래야만 여태 고생을 한 보람이라도 있을 텐데.
“하지만 소득이 없던 건 아니야. 새로운 가설을 세워 볼 수는 있게 됐어.”
“그게 뭡니까.”
“여태까지 했던 실험과 다른 새로운 변수, 즉 이초연 씨가 같은 자리에 있었을 때 최 이사가 잠에 들었다는 거야.”
태하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아까 비밀이라던 초연을 떠올리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약물치료에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 정 교수가 알아봐야 좋을 게 없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실험 세트를 최 이사 자택으로 옮기면 어떨까 해. 익숙한 장소에서라면 새로운 변수가 더 도드라질 거야.”
“그 새로운 변수까지 제 집에 들이라는 뜻입니까?”
“물론 쉽지 않은 행동이겠지만, 그게 아니면 새로운 가설을 입증할 길이 없어. 실제로 최 이사의 정확한 병명은 상세 불명의 심인성 불면증이잖아. 말 그대로 확실한 원인을 파악할 수도 없고, 그로 인해 뜻밖의 조치로 개선된 사례도 많아. 영국의 의료진도 환자와 어린아이를 동침하게 해서 큰 효과를 본 경우가 있다고 하고, 반려 동물을 통해 치유된 경우도 꽤 흔하다니까.”
우습지만, 그 두 가지 모두 태하가 시도했던 것들이었다.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일시적인 고혈압이 왔었고, 동물의 경우에는 실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알러지 발작으로 죽음의 문턱을 건널 뻔한 이력이 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아까부터 멍하게 듣고만 있던 초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새로운 변수라는 게 설마…… 전가요?”
“아직은 아냐. 하지만 초연 씨가 동의해 준다면 그렇게 되겠지.”
그 말과 함께 정 교수는 태하를 슥 봤다. 정전이 됐던 한 시간 남짓 동안 태하가 어떤 진상을 부려 댔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즉, 이 시점부턴 태하가 속이 타는 사람이란 것이다.
“글쎄요, 저는 최태하 씨랑은 좀 안 맞는 것…….”
“아니, 잠깐. 그 전에 나부터 말할 기회를 줘.”
기회를 달라는 사람이 저렇게 무서운 눈을 하면 쓰나. 보다 못한 정 교수가 둘의 사이에 개입했다.
“최 이사,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지?”
어디 가서 이런 취급 받을 일이 없는 태하가 이번엔 대꾸 한 번을 제대로 못 했다. 정 교수의 강단 있는 성격을 잘 알기도 했지만, 상황이 저에게 불리하다는 걸 잘 아는 탓이었다.
“어차피 최 이사는 이 이야기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나가 줘. 이 조교와는 내가 이야기 나눠 볼게.”
“교수님!”
“안 그러면 센터에서 아예 쫓아내는 방법도 있고. 어떻게 할래?”
정 교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아직은 철이 덜 들었던 태하가 술에 취해 찾아왔을 땐 정말로 경비를 써서 건물 밖으로 쫓아낸 이력이 있다.
“그럼 로비에서 기다리죠. 그것까지 못 하게 하시진 않겠죠?”
“그래.”
못내 미련이 남은 듯했지만, 정 교수가 한 번 더 쏘아보자 태하는 별말 없이 문을 나섰다. 이제부터 속 타는 기다림이 시작될 것을 알지만 정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 들어 보자. 최 이사한테 줬다는 그 약, 대체 정체가 뭐야?”
태하가 나가자마자 아까부터 궁금했던 화두를 꺼내는 정 교수였다. 초연은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이내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게…… 비타민이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정 교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푸하하하……!”
그러고는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바람에 초연은 흠칫 놀라야만 했다. 정 교수는 동그랗게 눈을 뜬 초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역시 큰일을 내는군.”
정 교수가 새로운 조교를 뽑을 때 성적보다 비중을 둔 항목이 바로 상세한 심리 검사 결과였다. 사실 초연은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케이스였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흔히 겪지 않는 일들을 겪으며 살았던 흔적이 보였지만, 보통 그런 분포에 위치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도덕성이나 가치관 역시 느긋하고 관대했으며 무엇보다 악한 성향 자체가 일반인보다도 큰 폭으로 낮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백지처럼 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정 교수가 초연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제가 사고를 친 건가요?”
“아니, 반대야. 아주 잘했어.”
“환자를 속였는데도요? 물론 몸에 좋은 비타민이지만.”
뒤로 갈수록 초연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자못 진지한 그녀의 말투에 정 교수는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최 이사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그놈은 처방약을 받으면 그 약에 관한 논문까지 검사해서 임상 실험 결과까지 제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야. 그러니 진정제로 진정이 될까? 언제쯤, 얼마만큼의 약효가 돌까 매사 노심초사하는데 진정이 되겠냐는 말이야.”
“하긴…….”
초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들어도, 아니 그녀가 실제로 본 바로만 해도 태하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최 이사가 흔하디흔한 플라시보 효과에 넘어가다니, 넌센스가 따로 없어.”
“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닦달을 하길래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조용히 시키려던 건데…… 당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잖아요. 괜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닌지…….”
정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인 말에 초연은 덜컥 걱정이 들었다. 태하가 무서운 건 아니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뒷문이 있다면 빠져나가고 싶을 정도다.
“아냐, 아주 멋진 거짓말이었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멋진 사실은 뭘까?”
“뭔데……요?”
“내가 아까 말한 가설은 거짓말이 아냐.”
“……네?”
“초연 씨가 변수인 것 같아. 자택 실험에 동참해 줬으면 해. 물론 이건 교수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최 이사를 위한 부탁이고.”
깜박,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초연이 눈을 감았다 떴다. 첫 출근을 하자마자 정전에, 엄청나게 까칠한 환자에, 이젠 자신이 새로운 변수가 되다니.
“솔직히 나로서는 초연 씨의 어떤 점이 이번 사건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아직까지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니까.”
“아…… 아까 그분이 많이 기대하시는 것 같던데.”
“걱정할 거 없어, 당장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야.”
정 교수는 따뜻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꼼꼼하게 초연을 훑어보았다. 정 교수의 시선에서 초연은 아직 대학생의 앳된 티를 다 벗지 못한 어린 아가씨로 보였다.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환하고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하기도 힘들었다.
“저, 초연 씨.”
“네?”
하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또렷한 눈망울에서 선의를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아가씨의 무엇이 태하를 잠들게 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쩌면 도움이 되어 줄지 모른다는 희망도.
“이건 현직 심리상담가와 미래의 심리상담가 간의 비밀이었으면 하는데…… 내 얘기 들어 줄 수 있겠어요?”
“네, 저야 영광인데…….”
여전히 천진한 초연의 표정을 보며 정 교수는 잠시 태하를 떠올리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태하, 아니 최 이사는.”
진지한 정 교수의 말에 초연은 긴장한 듯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그 남자의 이름이 태하인가 보다. 최태하. 서늘한 인상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걷어 낸다면 훨씬 더 보기 좋은 얼굴일 텐데.
“팔 년 전부터 내게 치료를 받았어. 치료라고 하기도 뭐한 게, 난 거의 도움이 된 적이 없지.”
“네.”
“초연 씨는 머리만 대면 잠드는 스타일이라고 했죠?”
“네, 전 엄청 잘 자요. 시간이 없어서 못 자는데요.”
정 교수는 쓰게 웃었다. 이런 사람만 있다면 정 교수는 직업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
“세상엔 그 당연한 일이 너무 힘든 사람들이 있어. 상상이 잘 안 될 거야. 배가 너무 고파서 굶어 죽을 것 같은데, 음식을 넘길 수 없는 것처럼.”
“아…….”
정 교수의 목소리를 따라 초연의 얼굴도 잠시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렇게 신경질적인 표정을 하고 있던 걸까. 피곤에 절어 있는 날카로운 눈빛이, 이렇게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된다. 조금 안쓰럽기도.
“최 이사는 일반적인 약물 치료로는 개선이 되지 않는 사례야. 심인성 불면증이라고 하는데 원인을 찾아서 완전히 해결하기가 어려워. 나도 안 해 본 노력이 없지만…… 솔직히 아까 최 이사가 잠시라도 잠들었다고 해서 놀랐을 정도니까.”
“전 그렇게 대단한 일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피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남을 귀찮게 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속으로 세 번쯤은 욕했었는데.
“초연 씨는 최 이사와 남남이니까 꼭 도울 의무는 없어. 그게 조교의 업무 범위도 아니고.”
“그렇……죠.”
“하지만 초연 씨도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걸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잖아?”
“그것도…… 그렇죠.”
거짓말을 해서 양심에 찔리는 건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초연이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적어도 남의 마음을 고치고 싶어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 환자를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됐는데.
“이건 의료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 최태하를 팔 년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 즉 오프 더 레코드인데.”
“네.”
“초연 씨 옆에서 잠들었다던 그 한 시간이 태하에겐 팔 년 만의 유일한 휴식이었을 거야. 난 그 점에서 초연 씨한테 고맙다고 하고 싶어요.”
“아뇨, 전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이런 말을 들을수록 초연은 부끄러움이 커질 뿐이다. 정 교수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더더욱.
“그리고, 도와줬으면 좋겠어. 태하에게 그런 순간이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오늘 오전에 잠깐 찾아왔던 기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내가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게 도와줄래?”
정 교수의 진지한 부탁을 들은 초연은 푹 고개를 숙였다. 잠시 아래를 보는 초연의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정 교수는 애가 탔다.
“저…… 교수님.”
천천히 떨어지는 초연의 입술을 보며, 정 교수는 자신도 이러한데 태하는 얼마나 애가 탔을지 감히 짐작이 되었다.
“당장 대답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생각해 보고…….”
“아뇨, 전 결정했어요.”
초연의 목소리는 느릿한데도 또렷했다.
“제가 돕게 해 주세요.”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그 눈동자에 정 교수는 희망을 걸기로 했다.
“최 이사, 일단 불편한 데 없으면 안정하고 있어. 아무래도 내가 보안 프로그램을 재부팅하고 와야겠어. 첨단인 건 좋은데 꼭 내 지문이 필요하다니까. 거기 다른 직원들도 다 따라와요.”
“네.”
정 교수가 떠나자 단둘이 있기가 어색해진 초연도 황급히 방을 나서려 했다.
“잠깐만!”
처음 신경질적이던 남자는 어디로 갔는지 태하가 절박하게 초연의 소매를 붙들었다. 초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슥, 태하를 올려 봤다.
“아, 그 약이요?”
“어, 이번엔 말이 좀 통하네.”
태하의 눈동자에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로, 피로감이 켜켜이 쌓여 있던 아까의 남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초연을 뚫어져라 보았다.
“비밀, 지켜 주셔야 해요. 들키면 저도 큰일 나거든요.”
“무조건 지킬게. 단, 그 약에 대해서 나와 다시 한번 얘기할 기회를 준다면.”
“뭐, 그러죠.”
예상외로 선선히 대답한 초연은 이내 밖에서 자신을 찾는 정 교수의 목소리를 듣더니 후다닥 나가 버렸다. 사실, 곤란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발이 빨라졌던 것 같다.
“저, 교수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로비에서 컴퓨터를 체크하던 정 교수가 의아한 눈짓으로 되묻는다.
“아까 정전이 일어났을 때 최태하 씨가 많이 예민하고 또 흥분 상태를 보이셔서요.”
“왜 아니겠어. 그 정도는 나도 예상한 바야, 고생 많았지?”
“그래서 제가…… 약을 드렸어요. 그리고 아마 지금 잠들었던 것도 그 약의 효과 덕분이라고 굳게 믿고 계시는 것 같아요.”
“약을 줬다고?”
“네, 제가 평소에 먹는 건데, 마침 주머니에 있어서…….”
우물쭈물 솔직하게 고백하는 초연을 보면서 정 교수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난 팔 년간 다뤘던 환자 최태하는 각종 수면제는 물론 진정제에도 강한 내성을 갖고 있었다. 즉, 마취제가 아닌 단순한 알약 정도로 잠이 드는 건 불가능하단 뜻이다.
“이번 실험엔 변수가 있었군.”
정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살아 있는 변수, 초연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구 년이 되기 전에 최태하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Ch. 1
원장실 책상에 앉은 정 교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각각 그 맞은편에 앉은 태하와 초연도 그런 정 교수를 주목하고 있다.
“최 이사는 잠이 든 것 같다고 했지? 이 조교의 말도 비슷한 맥락이었고.”
“네.”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애석하게도 하필 정전인 때라 장치가 작동되지 않아서 확인할 길은 없어.”
태하가 원했던 건 명확한 사실이었다. 그래야만 여태 고생을 한 보람이라도 있을 텐데.
“하지만 소득이 없던 건 아니야. 새로운 가설을 세워 볼 수는 있게 됐어.”
“그게 뭡니까.”
“여태까지 했던 실험과 다른 새로운 변수, 즉 이초연 씨가 같은 자리에 있었을 때 최 이사가 잠에 들었다는 거야.”
태하의 생각은 전혀 달랐지만, 아까 비밀이라던 초연을 떠올리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약물치료에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는 정 교수가 알아봐야 좋을 게 없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실험 세트를 최 이사 자택으로 옮기면 어떨까 해. 익숙한 장소에서라면 새로운 변수가 더 도드라질 거야.”
“그 새로운 변수까지 제 집에 들이라는 뜻입니까?”
“물론 쉽지 않은 행동이겠지만, 그게 아니면 새로운 가설을 입증할 길이 없어. 실제로 최 이사의 정확한 병명은 상세 불명의 심인성 불면증이잖아. 말 그대로 확실한 원인을 파악할 수도 없고, 그로 인해 뜻밖의 조치로 개선된 사례도 많아. 영국의 의료진도 환자와 어린아이를 동침하게 해서 큰 효과를 본 경우가 있다고 하고, 반려 동물을 통해 치유된 경우도 꽤 흔하다니까.”
우습지만, 그 두 가지 모두 태하가 시도했던 것들이었다.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스트레스가 심해져서 일시적인 고혈압이 왔었고, 동물의 경우에는 실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알러지 발작으로 죽음의 문턱을 건널 뻔한 이력이 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아까부터 멍하게 듣고만 있던 초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새로운 변수라는 게 설마…… 전가요?”
“아직은 아냐. 하지만 초연 씨가 동의해 준다면 그렇게 되겠지.”
그 말과 함께 정 교수는 태하를 슥 봤다. 정전이 됐던 한 시간 남짓 동안 태하가 어떤 진상을 부려 댔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즉, 이 시점부턴 태하가 속이 타는 사람이란 것이다.
“글쎄요, 저는 최태하 씨랑은 좀 안 맞는 것…….”
“아니, 잠깐. 그 전에 나부터 말할 기회를 줘.”
기회를 달라는 사람이 저렇게 무서운 눈을 하면 쓰나. 보다 못한 정 교수가 둘의 사이에 개입했다.
“최 이사,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되지?”
어디 가서 이런 취급 받을 일이 없는 태하가 이번엔 대꾸 한 번을 제대로 못 했다. 정 교수의 강단 있는 성격을 잘 알기도 했지만, 상황이 저에게 불리하다는 걸 잘 아는 탓이었다.
“어차피 최 이사는 이 이야기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 나가 줘. 이 조교와는 내가 이야기 나눠 볼게.”
“교수님!”
“안 그러면 센터에서 아예 쫓아내는 방법도 있고. 어떻게 할래?”
정 교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아직은 철이 덜 들었던 태하가 술에 취해 찾아왔을 땐 정말로 경비를 써서 건물 밖으로 쫓아낸 이력이 있다.
“그럼 로비에서 기다리죠. 그것까지 못 하게 하시진 않겠죠?”
“그래.”
못내 미련이 남은 듯했지만, 정 교수가 한 번 더 쏘아보자 태하는 별말 없이 문을 나섰다. 이제부터 속 타는 기다림이 시작될 것을 알지만 정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 들어 보자. 최 이사한테 줬다는 그 약, 대체 정체가 뭐야?”
태하가 나가자마자 아까부터 궁금했던 화두를 꺼내는 정 교수였다. 초연은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이내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게…… 비타민이요.”
잠시 정적이 흐르고, 정 교수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푸하하하……!”
그러고는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바람에 초연은 흠칫 놀라야만 했다. 정 교수는 동그랗게 눈을 뜬 초연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역시 큰일을 내는군.”
정 교수가 새로운 조교를 뽑을 때 성적보다 비중을 둔 항목이 바로 상세한 심리 검사 결과였다. 사실 초연은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케이스였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흔히 겪지 않는 일들을 겪으며 살았던 흔적이 보였지만, 보통 그런 분포에 위치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갖고 있었다. 도덕성이나 가치관 역시 느긋하고 관대했으며 무엇보다 악한 성향 자체가 일반인보다도 큰 폭으로 낮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무엇이든 백지처럼 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정 교수가 초연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제가 사고를 친 건가요?”
“아니, 반대야. 아주 잘했어.”
“환자를 속였는데도요? 물론 몸에 좋은 비타민이지만.”
뒤로 갈수록 초연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자못 진지한 그녀의 말투에 정 교수는 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최 이사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아? 그놈은 처방약을 받으면 그 약에 관한 논문까지 검사해서 임상 실험 결과까지 제 눈으로 확인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야. 그러니 진정제로 진정이 될까? 언제쯤, 얼마만큼의 약효가 돌까 매사 노심초사하는데 진정이 되겠냐는 말이야.”
“하긴…….”
초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만 들어도, 아니 그녀가 실제로 본 바로만 해도 태하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최 이사가 흔하디흔한 플라시보 효과에 넘어가다니, 넌센스가 따로 없어.”
“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너무 닦달을 하길래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조용히 시키려던 건데…… 당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잖아요. 괜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닌지…….”
정 교수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인 말에 초연은 덜컥 걱정이 들었다. 태하가 무서운 건 아니지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뒷문이 있다면 빠져나가고 싶을 정도다.
“아냐, 아주 멋진 거짓말이었어. 그리고 한 가지 더 멋진 사실은 뭘까?”
“뭔데……요?”
“내가 아까 말한 가설은 거짓말이 아냐.”
“……네?”
“초연 씨가 변수인 것 같아. 자택 실험에 동참해 줬으면 해. 물론 이건 교수로서의 명령이 아니라 최 이사를 위한 부탁이고.”
깜박,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초연이 눈을 감았다 떴다. 첫 출근을 하자마자 정전에, 엄청나게 까칠한 환자에, 이젠 자신이 새로운 변수가 되다니.
“솔직히 나로서는 초연 씨의 어떤 점이 이번 사건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 아직까지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니까.”
“아…… 아까 그분이 많이 기대하시는 것 같던데.”
“걱정할 거 없어, 당장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야.”
정 교수는 따뜻한 눈빛으로 다시 한번 꼼꼼하게 초연을 훑어보았다. 정 교수의 시선에서 초연은 아직 대학생의 앳된 티를 다 벗지 못한 어린 아가씨로 보였다.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환하고 예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하기도 힘들었다.
“저, 초연 씨.”
“네?”
하지만 상대를 바라보는 또렷한 눈망울에서 선의를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아가씨의 무엇이 태하를 잠들게 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어쩌면 도움이 되어 줄지 모른다는 희망도.
“이건 현직 심리상담가와 미래의 심리상담가 간의 비밀이었으면 하는데…… 내 얘기 들어 줄 수 있겠어요?”
“네, 저야 영광인데…….”
여전히 천진한 초연의 표정을 보며 정 교수는 잠시 태하를 떠올리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태하, 아니 최 이사는.”
진지한 정 교수의 말에 초연은 긴장한 듯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그 남자의 이름이 태하인가 보다. 최태하. 서늘한 인상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신경질적인 표정을 걷어 낸다면 훨씬 더 보기 좋은 얼굴일 텐데.
“팔 년 전부터 내게 치료를 받았어. 치료라고 하기도 뭐한 게, 난 거의 도움이 된 적이 없지.”
“네.”
“초연 씨는 머리만 대면 잠드는 스타일이라고 했죠?”
“네, 전 엄청 잘 자요. 시간이 없어서 못 자는데요.”
정 교수는 쓰게 웃었다. 이런 사람만 있다면 정 교수는 직업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
“세상엔 그 당연한 일이 너무 힘든 사람들이 있어. 상상이 잘 안 될 거야. 배가 너무 고파서 굶어 죽을 것 같은데, 음식을 넘길 수 없는 것처럼.”
“아…….”
정 교수의 목소리를 따라 초연의 얼굴도 잠시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렇게 신경질적인 표정을 하고 있던 걸까. 피곤에 절어 있는 날카로운 눈빛이, 이렇게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된다. 조금 안쓰럽기도.
“최 이사는 일반적인 약물 치료로는 개선이 되지 않는 사례야. 심인성 불면증이라고 하는데 원인을 찾아서 완전히 해결하기가 어려워. 나도 안 해 본 노력이 없지만…… 솔직히 아까 최 이사가 잠시라도 잠들었다고 해서 놀랐을 정도니까.”
“전 그렇게 대단한 일인 줄은 몰랐어요.”
그냥 피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남을 귀찮게 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속으로 세 번쯤은 욕했었는데.
“초연 씨는 최 이사와 남남이니까 꼭 도울 의무는 없어. 그게 조교의 업무 범위도 아니고.”
“그렇……죠.”
“하지만 초연 씨도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걸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잖아?”
“그것도…… 그렇죠.”
거짓말을 해서 양심에 찔리는 건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초연이 느끼는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적어도 남의 마음을 고치고 싶어서 공부를 하는 사람이 환자를 귀찮게 여겨서는 안 됐는데.
“이건 의료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인간 최태하를 팔 년간 지켜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 즉 오프 더 레코드인데.”
“네.”
“초연 씨 옆에서 잠들었다던 그 한 시간이 태하에겐 팔 년 만의 유일한 휴식이었을 거야. 난 그 점에서 초연 씨한테 고맙다고 하고 싶어요.”
“아뇨, 전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이런 말을 들을수록 초연은 부끄러움이 커질 뿐이다. 정 교수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어서 더더욱.
“그리고, 도와줬으면 좋겠어. 태하에게 그런 순간이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오늘 오전에 잠깐 찾아왔던 기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내가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게 도와줄래?”
정 교수의 진지한 부탁을 들은 초연은 푹 고개를 숙였다. 잠시 아래를 보는 초연의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정 교수는 애가 탔다.
“저…… 교수님.”
천천히 떨어지는 초연의 입술을 보며, 정 교수는 자신도 이러한데 태하는 얼마나 애가 탔을지 감히 짐작이 되었다.
“당장 대답하기 어려우면 천천히 생각해 보고…….”
“아뇨, 전 결정했어요.”
초연의 목소리는 느릿한데도 또렷했다.
“제가 돕게 해 주세요.”
부드럽지만 힘이 있는 그 눈동자에 정 교수는 희망을 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