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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d·don(아바돈)
파멸의 장소, 지옥, 나락(奈落)
1권
1화
#프롤로그


“자, 연습을 해 봤으니, 실전도 잘할 수 있겠지?”
남자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에 닿을 듯이 다가왔다. 처음 그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에는 술 냄새로 가득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그에게선 달달한 향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아주 달고 단 사탕을 핥듯이, 여자의 입술이 남자의 입술에 포개어지며 조금 전 배운 대로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핥아 냈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제 입술을 핥는 여자의 혀끝을 입술로 아프지 않게 물었다 놓은 그가 이내 자신의 혀를 내어 그녀의 입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손가락과 다르게 부드러운 혀가 밀려들어 오자 여자의 입술 사이로 묘한 비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혀를 찾아 휘감으며, 남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헝클어 놓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체온보다도 따뜻했고, 그녀의 입술보다도 부드러웠다.
“하아…… 그만…….”
“조금만 더…….”
잠깐의 틈을 주고 남자의 입술이 다시 여자에게로 닿아 왔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그의 혀를 끌어당기며 그녀가 가만히 남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죽도록 미운 남자의 손길을, 끔찍하게 잔인한 이 남자의 입술을 원하고 있는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금 더’를 바라는 남자를 거부하지 못한 채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그에게 자신의 입술을 맡기고 있었다.
적막한 방 안에 두 사람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며 내는 촉촉한 소리와 간간히 뱉어지는 여자의 달뜬 호흡 소리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여자의 입술을 물고 놓아주지 않던 남자가 한순간 몸에 힘을 빼며 아래로 늘어졌다. 그의 고개가 힘없이 여자의 어깨에 닿았고, 그녀의 머리칼을 헤집었던 그의 손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흥분에 달해 가빠진 숨을 몰아쉬고 있던 여자가 시선을 내려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도 제 입술을 농락하던 이 남자는 어느새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편안한 호흡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이 든 듯.
“……말도 안 돼.”
여자의 눈에서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키스에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고 느끼다니. 몽롱해졌던 정신이 돌아오며 현실을 깨우친 그녀가 남자의 가슴을 밀어 내며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어둠이 너무 짙어 무언가에 홀린 것이 분명했다. 이런 남자와의 키스에 저도 모르게 응하게 된 것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약 기운 때문일 것이다.
여자가 밀어 내는 반동에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남자의 몸이 힘없이 침대 위로 쓰려졌다. 술에 취해 잠이 든 듯, 그는 차분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여자는 조심스럽게 몸을 세우고 일어섰다.
이 남자가, 이 지독하게 차갑기만 한 남자가 자꾸만 자신을 이상하게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의 손안에서 쾌락을 위해 허리를 흔들더니, 이제는 스스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모든 것이 이 남자 때문임이 분명하다.
“이봐요. 당신…….”
여자의 부름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깊이 잠이 든 듯 새근새근 숨소리만을 내고 있을 뿐. 조금 전까지도 제 손으로 한 여자를 흥분시켰던 이 남자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정말 악마인 것일까? 그저 악마의 흉내를 내는 인간일 뿐인 걸까? 내가 죽을 수 없다면, 이곳에서 절대로 내가 죽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라면…… 나를 자꾸만 변화시키는 이 남자를 죽이면 어떨까? 이 남자만 없다면 나, 앞으로 내가 얼마나 더 나도 모르는 본성을 드러내며 변해 갈지 두려워하며 살지 않아도 되겠지.
천천히 발소리를 죽여 남자의 곁으로 다가온 여자가 다시 한번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남자는 정말로 잠이 든 듯 그녀의 부름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회는 지금뿐. 앞으로는 정말 죽이고 싶은 날이 와도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침대 위로 무릎을 올린 여자가 남자의 허리춤 위로 걸터앉아서 떨리는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 쥐었다.
‘깨지 마. 제발 깨어나지 마.’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또 외우며, 남자의 목을 감싼 여자의 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감정이 없는 악마 같은 남자를 죽여 버리자. 이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의 심장을 깨 버리자.
그에게 물든 내 몸이, 그를 용서하고 싶어지기 전에…….

* * *

지하 1, 2층은 모두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주차장을 제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출입구는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단 하나의 엘리베이터뿐.
1층엔 일반 회원을 위한 BAR와 Room이 있었고, 2층엔 VIP를 위한 Room이, 3층은 직원들을 위한 피트니스와 사우나, 뷰티숍 외 휴게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4층은 직원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고, 5층은 여느 호텔의 스위트룸도 부럽지 않을 만큼 호화스러운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차를 하고 건물의 유일한 출입구인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 자신의 회원 카드를 인식시킨다.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는 이곳은 직원과 회원 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버튼을 눌러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카드에 인식된 정보에 따라 일반 회원은 1층에서, VIP는 2층에서 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 건물엔 주차장과 연결된 이 엘리베이터 외에 다른 출입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 밖에서 아무리 돌고 돌아도 1층에선 안으로 통하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차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오거나, 헬기나 전용기를 타고 옥상으로 오거나. 그마저도 등록된 회원이 아니라면, 건물 외관을 구경하는 정도로 끝날 수밖에 없겠지만.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회원이 될 수 있는 조건도 까다롭지만, 그 역시도 6개월마다 갱신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한민국의 유흥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라면 하나같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와 보기를 꿈꾸는 곳이 이곳이었고,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재벌들이나 그 재벌의 자제들, 돈 좀 있고 명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곳의 회원이 되기를 갈망했다.
이곳의 VIP 회원이라는 것이 그들의 이름값을 높이는 또 다른 수단일 수 있기에.
때문에 이곳은 그저 유희를 즐기는 것으로 지나지 않고, 기업과 기업의 대화의 장이 되거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어느 그룹의 누구와 어느 집안 누구의 싸움의 장으로 탈바꿈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비밀이 보장되었고, 아주 사소한 트러블도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아마도 높으신 분들이 이곳을 원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을지도.
호스티스 혹은 호스트들이 있는 BAR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연예인 뺨치는 외모라는 말을 소문으로만 듣다가 이곳에 온다면, 그 연예인 뺨치는 외모가 어떤 것인지 깊게 깨닫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타고난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여느 곳처럼 손님을 유혹하기 위해 화장을 짙게 한다거나, 몸의 일부를 드러내는 자극적인 의상을 입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야한 농담이나 음탕한 단어 선택도 없었다. 검정 슈트에 말끔한 타이를 착용한 호스트, 품격 있는 드레스로 우아함을 잃지 않는 호스티스들은 손님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때때로 조언을 하기도 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아무리 높은 인사라 해도 술이나 따르고 웃음이나 파는 천한 부류로 취급할 수 없는 존재, 호스티스 혹은 호스트이지만 손님과 대등한 매너와 지식을 갖추고 나란히 눈을 맞춰 앉을 수 있는 이들. 거기에 눈을 뗄 수 없는 외모로 시선을 끄는 직원들이 넘쳐 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보통의 성향이든, 게이이든, 레즈비언이든, 바이이든 그것은 전혀 중요치 않았다. 한 번이라도 이곳에 발을 들이게 되면 눈을 뗄 수 없는 그들의 당당한 눈동자에 취하게 되고, 천하지 않은 몸가짐에 물들게 된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찾다 보면 어느새 깊이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곳, 현실과 이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인간의 들뜬 마음속에 파고들어 절대 해독되지 않는 독을 심어 놓고 물러선다. 그러면 독에 중독된 이들은 그 끝이 파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갈증을 참지 못하고 달콤함을 찾아 파멸의 장소로 하나, 둘 모여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택한 파멸의 장소는 바로 대한민국 하이 레벨의 화류계 BAR, A·bad·don(아바돈)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요한 묵시록에 의하면, 다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무저갱의 문이 열린다고 했다. 그러면 전갈 독을 가진 수많은 메뚜기 떼가 쏟아져 5개월 동안 인간을 괴롭힌다고 한다.
이 메뚜기의 독은 고통만을 주고 죽이지 않아 인간은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고 전해진다. A·bad·don(아바돈)은 이 메뚜기 악마들의 대장으로, 무자비한 파괴자 악마의 수장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죽고 싶다고 갈망했던 적이 있는가. 죽이지 않고 고통만 주는 것과 차라리 죽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상냥하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까? 하지만 내게 누군가 그 어리석은 질문을 해 온다면 죽이는 것이 더한 상냥함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할 것이다.
그때의 내겐, 아니 지금의 내게도 그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그때 그 사람이 내게 그러한 상냥함을 베풀어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죽음의 문턱에서 죽지 못하게 하는 잔인함이 아닌, 차라리 죽을 수 있는 상냥함을 가진 남자였다면 나는 더 쉽게 그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A·bad·don(아바돈), 그곳은 내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파멸의 장소에서 서서히 나를 잃고 최후엔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러나 무자비한 파괴자 악마의 수장은 내 모든 것을 파괴하고도 죽음의 달콤함은 끝내 주지 않았다.

천로역정에 의하면, A·bad·don(아바돈)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원래 살던 타락한 도시의 지배자이다. 천국을 찾아가는 크리스천의 앞에 나타나 그를 방해하지만 결국에 크리스천은 A·bad·don(아바돈)을 이겨 낸다.
결국엔 모든 것이 그렇다. 악(惡)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끝내 악이 이기는 이야기는 없다. 고통과 시련과 절망이 따르고, 혹은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끝내 악은 패(敗)하게 될 뿐이다.
나는 그것을 알려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옥 같은 시간도 끝내는 끝이 찾아오게 된다고. 천국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선 A·bad·don(아바돈)의 방해를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그 어떤 악마보다도 악독하기에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수천 번도 더 하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이겨 내고 난 후엔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네가 살아 주길 바랐다.
견디고 또 견뎌서 결국엔 천국에 다다르길.



#제1장


남자는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아직은 캐주얼한 차림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앳된 얼굴을 한 그는 지난주부터 출근한 아버지 회사의 운영 방침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아직은 친구들과 더 놀고 싶다느니, 회사 경영은 형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른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느니 하는 배부른 투정을 30분째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도 곧 여름휴가이니 그나마 좀 낫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겨우 2주라니, 너무하지 않아? 2주 동안은 어디 해외에 나가기도 힘들다고.”
“국내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국내? 에이. 국내에 뭐 볼 게 있다고. 제주도는 백 번도 더 가 봤을 거야.”
“우리나라에 관광지는 제주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님.”
“이사님은 무슨……. 그냥 우현이라고 부르라니까!”
“하지만 그 호칭에도 익숙해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스물다섯의 나이에 이사라는 직위를 얻었다. 물론 실력을 바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부모덕에 거저 얻은 것이었지만, 이 나이 어린 도련님은 그 직함이 꽤나 어색한 모양이었다.
조금은 단호한 헌의 목소리에 시무룩해진 우현은 입술을 삐쭉거리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런 우현의 모습을 바라보던 헌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것만이 좋은 휴가는 아닙니다. 또 휴가라고 반드시 유명한 곳으로 가야 할 필요도 없고요. 가끔은 평범하게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 하긴 휴가 땐 매번 해외에 가서 쇼핑만 잔뜩 해 댔으니까. 가끔은 그런 것도 괜찮겠지. 어디 좋은 곳이라도 알고 있어?”
토라졌던 것도 잠시, 헌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 듯 우현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의견을 물어 왔다.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입을 다물었던 헌이 우현을 향해 물었다.
“글쎄요. 가지고 계신 별장이 있지 않으신가요?”
“별장이라면 제주도에……. 아, 영월에도 하나 있을 거야. 그거 말곤 거의 외국이라…….”
“영월도 나쁘지 않습니다. 공기도 좋고, 무엇보다 밤이면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이 예쁘죠.”
“별? 음! 꽤 낭만적인데? 이번 휴가는 영월로 가야겠다.”
“그거 잘됐군요.”
다짐하듯 ‘영월’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우현이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빛내며 헌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받은 헌이 얘기하라는 듯 눈빛을 보내자, 조금 망설이던 그가 주변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헌에게 속삭였다.
“헌도 함께 가자.”
“그건 곤란합니다.”
“알아. 사적으로 손님을 만나는 건 규칙을 어기는 거라고……. 그래서 이렇게 작게 얘기하고 있잖아. 한 번 정도인데 뭐 어때. 비밀은 꼭 지킬게. 응?”
어린아이처럼 조르며, 우현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헌을 바라봤다. 그의 가느다란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지는 것을 보며 헌도 얼굴에 미소를 담았지만, 그의 입술은 긍정적인 답을 내어 주지 않았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곤란합니다.”
정중한 거절이었다. 이곳의 모든 직원들이 그러하지만, 헌은 유독 맺고 끊는 것이 정확했다. 별 뜻 없는 작은 선물 하나도 절대로 받아 준 적이 없는 헌인데 지금의 부탁이 통할 리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작은 기대를 가져 봤지만, 결과는 역시나일 뿐.
마음 같아서는 그가 알았다고 할 때까지 졸라 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 고지식한 남자에게 정말로 미움을 사게 될까 두려워 우현은 이쯤 단념하기로 했다. 대신 자신을 거절한 대가를 다른 것으로 치르게 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좋아. 그런 면에서 단호한 헌을 좋아하니까. 이번엔 내가 단념할게.”
“고맙습니다.”
“대신…….”
“…….”
“오늘 밤엔 나로 정해 줘.”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빤히 바라보는 헌의 시선에 우현의 두 볼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제야 말의 의미를 파악한 듯 헌이 미소를 지었고, 그런 헌의 미소에 더욱 얼굴이 붉어진 우현은 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술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아니 뭐. 꼭 하고 싶어서라기보단…….”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헌과 더 많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저도 이사님과 대화하는 게 즐거우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술을 더 드릴까요?”
“아아, 그래.”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빈 술잔을 입술에 대고 대꾸하던 우현이 헌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채워지는 술잔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힐끔 시선을 들어 헌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내 놓고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놀리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용기 내어 말을 꺼내 놓고도 막상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배려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주는 것일까.
“5층 Room 예약해야 하지? 매니저를 불러 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