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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 건물의 5층엔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방이 총 열 개가 있었다.
사적으로 절대 손님을 만날 수 없는 규칙이 있었기에, 이곳의 직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손님과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아무리 하이 레벨이라 할지라도 그 근본은 화류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욕정을 배제하고 장사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을 택하는 것에 강압이 없고, 때에 따라 직원이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 다른 곳에 비해 신사적일 뿐.
쉽게 말해 접대 후 2차를 원하는 손님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 5층의 Room인 것이었다.
직원은 지명한 손님만을 접대한다. 간혹 새로 온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엔 매니저가 임의로 정해서 데려오기도 하지만, 보통은 손님이 다른 이를 찾지 않는 이상 늘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 단골이 마음이 변해 다른 직원을 택하게 되더라도 절대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기도 했다. 직원의 지명권은 오로지 손님에게만 있을 뿐이다.
직원 지명 시, 최대 접대 시간은 세 시간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비용을 다시 지불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사이 다른 손님이 그를 지명하고 대기 중이라면 연장은 불가하다.
5층의 Room은 12시 이후부터 사용이 가능하며 딱 10명의 손님을 정원으로 받는다. 중간에 방을 비우더라도 이미 누군가 사용한 방을 다른 손님에게 내어 주는 일은 없다. 직원의 동의 없이 손님 혼자서 미리 방을 예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Room 안에서의 모든 행위도 직원의 동의하에 행해져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하루에도 수천만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그중 헌의 지명 순위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높았다. 그가 하룻밤 사이 벌어들이는 금액을 두고, 혹자는 ‘내 연봉의 두 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외제차 한 대 가격.’이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부르려던 것을 알았는지 헌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먼저 도착한 매니저가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우현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가 헌에게로 다가와선 허리를 숙였다.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매니저가 다시 허리를 폈고, 헌이 곤란한 표정으로 우현을 바라봤다.
“위에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가 봐야 하는 거야?”
“아무래도…….”
“얼마나?”
우현의 물음에 헌의 표정이 더욱 곤란하게 바뀌었다. 아마도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자신을 두고 가는 것이 몹시 서운하긴 했지만, 어쩐지 이 남자에겐 미움받고 싶지 않은 그였기에 최대한 서운한 기색을 감추고 우현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아, 난 괜찮으니까 가 봐.”
“하지만…….”
“헌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함께 있고 싶진 않으니까.”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우현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 헌이 막 Room을 빠져나가려 할 때, 급하게 일어선 우현이 그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돌아서는 헌의 볼에 기습 입맞춤을 하며 그가 붉어진 얼굴로 샐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만이야. 다음엔 절대로 안 보내 줄 거야.”
“물론입니다. 다음엔 보내 주신다고 해도, 제가 가지 않겠습니다.”
헌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우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미안하다는 말을 뱉은 헌이 빠른 걸음으로 Room을 빠져나갔다.
총매니저의 갑작스러운 호출이었다. 예고 없이 부르는 일도 흔치 않았지만, 접대 중에 빼 가는 일은 더욱 드물었기에 헌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그를 부르러 온 매니저 역시도 영문을 모르는 듯 고개만 저어 댈 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했을 때, 헌과 똑같은 표정을 한 시안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시안의 물음에 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아냐는 그녀의 물음에 헌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저어 댈 뿐이었다. 그들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총매니저가 회의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접대 중에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구나.”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냐 물어보는 헌을 향해 총매니저는 대답을 대신해 카드키를 내밀었다. 그것은 시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407호, 414호. 각각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방의 카드키이다. 지금은 분명 비어 있는 방일 텐데 왜…….
“신입이 들어왔다.”
카드를 받으려던 헌의 손이 멈칫했다. 이미 그것을 받아 든 시안도 놀란 표정으로 총매니저를 바라봤다. 신입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방의 키가 주어졌다는 것은 아마도…….
“교육은 너희가 맡으라는 사장님 지시야.”
“하아…….”
시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가능한 피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신입의 교육을 맡게 되는 것. 그녀 역시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 끔찍한 시간을 경험했기에 더더욱 그 기억을 각인해 주는 입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헌은 담담한 표정으로 키를 받아 들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총매니저의 대답은 단호했고, 헌도 수긍도 빨랐다. 시안만이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카드키만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기간은 한 달, 한 달간은 특별한 경우 외엔 접대를 하지 않아도 좋다. 별도의 교육 수당이 평소 버는 것 못지않게 지급될 테니까. 지금부터 배정된 방으로 가서 바로 교육에 들어가도록 해. 둘 다 경험이 없으니까 조금 고생을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바로 해야 한다고요?”
“그래.”
시안의 표정이 울듯이 일그러졌지만, 헌은 상관없다는 듯 407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헌의 팔목을 억지로 잡아 세운 시안이 총매니저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교육이라면 경험이 있는 다른 선배들이 해도 되잖아요.”
“사장님이 너희를 지명했다고 했잖아.”
“어째서…….”
“원래 교육은 에이스가 맡아서 하는 것이 전통이다.”
“이따위 가게에 전통 따위…….”
“한시안, 이 이상의 건방은 허락하지 않는다.”
엄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총매니저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시안에게 잡혀 있던 손을 풀어낸 헌은 407호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시안도 하는 수 없이 414호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최헌, 어떻게 하면 너처럼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거냐?”
시안의 물음은 헌에게 닿지 못하고, 그녀의 입가에서 흩어져 버렸다.
* * *
그녀의 결혼 생활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연애할 땐 다정하고 성실하기만 하던 남자였지만, 결혼을 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일도 하지 않았다. 항상 술과 도박에 빠져 살았고, 어쩌다 한번 집에 들어올 때는 다른 여자의 향기를 잔뜩 달고 들어왔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두려워 헤어져 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손을 벌리는 탓에 친정과의 사이도 멀어졌고, 친구들도 모두 떠나갔다. 하지만 남자는 늘 그녀에게 돈을 요구했다.
도박으로 진 빚은 점점 늘어 갔고, 남자의 행패도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겨 버렸다.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절대 아니었다. 수술할 돈이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낳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남편에게 받는 그녀의 스트레스는 그대로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 떡하니 생겨 버린 짐이 그녀에게 사랑스러울 리 없을 테니.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알고 보면 엄마는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니까.
남편의 빚은 끝없이 늘어 갔고, 그녀가 버는 돈과 딸이 아르바이트로 벌어 오는 돈으로는 이자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찾아왔다. 남편이 또 도박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담보로 내놓을 것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딸을 걸고 돈을 빌렸다고 했다.
그래, 잘됐다. 어차피 짐스러웠는데, 어차피 원치도 않는 자식이었는데 이 기회에 없애 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들에게 순순히 자신의 딸을 내어 주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너무도 착한 딸. 자신이 더 많이 일할 테니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울며 매달리던 딸의 손을 뿌리치고, 애타게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 홀가분하다. 어차피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이니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눈동자에 쉽게 초점이 맞춰지질 않았다. 등 뒤로 닿은 푹신한 침대도 온몸을 감은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도 모두가 생경한 것들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오르고 난 이후부턴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이곳에 누워 있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은 무겁고 나른했다.
딸깍.
문이 열리며 빛이 들어오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저벅저벅 걸어온 발걸음 소리는 머리맡에서 멈춰 섰다. 눈을 떠서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 보내 달라고 부탁해 보고 싶었지만 몸이 쉽게 말을 듣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김유리. 스무 살인가.”
불쑥 내뱉어진 자신의 이름에 쿵 하고 내려앉은 심장의 동요를 겨우 진정시키며 그녀는 여전히 자는 척을 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눈을 감고 있으니 더욱 예민해진 청각 덕분인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테이블 근처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침대 가까운 곳에 앉은 낮선 이가 다시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으십시오.”
그는 자신이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기에 그냥 말을 하려는 걸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지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화류계 BAR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는 그런 BAR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정도의 BAR라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달간 당신을 교육할 최헌이라고 합니다. 교육이라고 해 봤자 거창한 것은 없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을 몸에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줄줄 새어 나왔다. 낮고 차가워서 한여름에 시트까지 덮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자꾸만 떨려 왔다. 듣는 이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설명이었다. 졸지에 모르는 곳으로 끌려와서 화류계의 일을 해야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그저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인수인계하듯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그가 몸을 일으킨 듯, 의자가 조금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매트리스의 한쪽이 기울어지며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고 그를 밀어 내야 하지만 여전히 몸은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신입을 위한 배려도 여기까지.”
지금까지 그의 행동과 말투에선 그 어떤 배려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배려가 거기까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침대 위로 몸을 완전히 올린 헌이 유리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듯 엎드렸다. 잠들어 있는, 아니 잠든 척하는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지금까지보다 더 낮은, 그리고 더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정말로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상관없다. 나는 지금 너를 안을 테니까.”
#제2장
‘하아…… 싫어. 아파. ……하지 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다. 겨우 잊고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잊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여전히 매일 밤 그때의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리고, 아침이면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 눈을 떴다. 다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은 무뎌지고, 조금은 익숙해졌다는 것뿐.
그때의 시안은 스무 살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친구들도 하나둘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부족한 생활이었지만, 많은 것을 가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따뜻한 날들이었다.
그 온기를 손에 쥐기까진 너무 긴 시간이 걸렸는데, 그 잠깐의 따스함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에서 시안과 어울리는 친구들은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시안의 당당함에 끌린 이들도 있었고, 그녀의 우수한 성적에 덕을 보려고 친구가 된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디에 있든 눈에 띄는 그녀의 외모만으로도 주변에 사람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접근해 오는 많은 사람 중 어느 누가 진심으로 다가오는지, 아니면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를 가늠해 내는 일은 어려웠다. 외롭게 자란 그녀는 사람의 온정에 목말라 있었다.
1학년 1학기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종강 기념 술자리를 열었다. 평소엔 그런 자리에 얼굴만 비치고 일찍 자리를 뜨던 시안이었지만, 그날은 마침 아르바이트도 쉬는 날이라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였다.
1차 그리고 2차가 이어질 때까지도 몇몇 선배들의 눈치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다.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 여학생들은 대부분 집으로 귀가를 한 상태였고, 시안도 슬슬 집에 갈 생각에 일어날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클럽 갈 건데, 시안이 너도 같이 가자.’
‘클럽? 됐어. 난 가 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이 기회에 가자는 거지. 자, 빼지 말고. 가자. 가자.’
평소 가깝게 지내던 남자 동기의 꼬임에 넘어가 클럽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 나이 또래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봤을 곳이지만, 시안에게 클럽은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스테이지로 나가 춤을 추기도 하며 클럽에 적응해 가던 시안은 친구들이 지인을 소개해 준다는 이야기에 구석진 곳의 Room으로 따라갔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호흡과 시야를 동시에 답답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테이블을 두른 소파엔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친구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는 시안의 얼굴을 확인하곤 저마다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귓속말을 해 대기 시작했다.
‘얘기하고 나와. 내가 있을 곳은 아닌 것 같네. 밖에서 기다릴게.’
좋지 않은 느낌을 감지한 시안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머릿속에 삐― 하고 울리는 경고음이 그녀에게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겁먹을 거 없어. 다 좋은 형님들이야. 그냥 술 한잔만 같이 하려는 건데, 뭐.’
돌아서 나가려던 시안의 손목을 잡은 친구가 억지로 그녀를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술을 가득 담은 잔이 내밀어졌다.
‘그렇게 무서워하는 티 팍팍 내는 건 실례라고. 동생.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야.’
‘아, 저는…….’
‘그래. 알아. 괜찮아. 우리가 좀 험하게 생기기는 했으니까. 자, 일단 한 잔 해.’
그래, 딱 한 잔만 얼른 비우고 자리를 피하자.
그렇게 생각한 시안은 꾹꾹 술이 눌러 담긴 술잔을 입술에 대고 단숨에 들이켰다.
‘잘 마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인사를 하고 일어서던 시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급하게 마신 술이 탈이 난 것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점점 눈이 감겨 왔다.
나가야 하는데, 이곳은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
풀썩 소파 위로 쓰러진 시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양주라는 술은 원래 이렇게 한 잔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일까.
‘정말 아무 탈 없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왔을 무렵, 시안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목소리는 친구와 그녀에게 술을 권했던 남자의 것이었다.
이 건물의 5층엔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호화스럽게 꾸며진 방이 총 열 개가 있었다.
사적으로 절대 손님을 만날 수 없는 규칙이 있었기에, 이곳의 직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손님과 함께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이 아무리 하이 레벨이라 할지라도 그 근본은 화류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인 욕정을 배제하고 장사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그것을 택하는 것에 강압이 없고, 때에 따라 직원이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이 다른 곳에 비해 신사적일 뿐.
쉽게 말해 접대 후 2차를 원하는 손님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 5층의 Room인 것이었다.
직원은 지명한 손님만을 접대한다. 간혹 새로 온 손님을 접대하는 경우엔 매니저가 임의로 정해서 데려오기도 하지만, 보통은 손님이 다른 이를 찾지 않는 이상 늘 찾아오는 단골손님이 한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 단골이 마음이 변해 다른 직원을 택하게 되더라도 절대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기도 했다. 직원의 지명권은 오로지 손님에게만 있을 뿐이다.
직원 지명 시, 최대 접대 시간은 세 시간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비용을 다시 지불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사이 다른 손님이 그를 지명하고 대기 중이라면 연장은 불가하다.
5층의 Room은 12시 이후부터 사용이 가능하며 딱 10명의 손님을 정원으로 받는다. 중간에 방을 비우더라도 이미 누군가 사용한 방을 다른 손님에게 내어 주는 일은 없다. 직원의 동의 없이 손님 혼자서 미리 방을 예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Room 안에서의 모든 행위도 직원의 동의하에 행해져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하루에도 수천만 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그중 헌의 지명 순위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높았다. 그가 하룻밤 사이 벌어들이는 금액을 두고, 혹자는 ‘내 연봉의 두 배.’라고 이야기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외제차 한 대 가격.’이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부르려던 것을 알았는지 헌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먼저 도착한 매니저가 문을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우현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가 헌에게로 다가와선 허리를 숙였다. 그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매니저가 다시 허리를 폈고, 헌이 곤란한 표정으로 우현을 바라봤다.
“위에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가 봐야 하는 거야?”
“아무래도…….”
“얼마나?”
우현의 물음에 헌의 표정이 더욱 곤란하게 바뀌었다. 아마도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지 알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자신을 두고 가는 것이 몹시 서운하긴 했지만, 어쩐지 이 남자에겐 미움받고 싶지 않은 그였기에 최대한 서운한 기색을 감추고 우현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아, 난 괜찮으니까 가 봐.”
“하지만…….”
“헌을 곤란하게 만들면서까지 함께 있고 싶진 않으니까.”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우현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한 헌이 막 Room을 빠져나가려 할 때, 급하게 일어선 우현이 그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돌아서는 헌의 볼에 기습 입맞춤을 하며 그가 붉어진 얼굴로 샐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만이야. 다음엔 절대로 안 보내 줄 거야.”
“물론입니다. 다음엔 보내 주신다고 해도, 제가 가지 않겠습니다.”
헌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우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미안하다는 말을 뱉은 헌이 빠른 걸음으로 Room을 빠져나갔다.
총매니저의 갑작스러운 호출이었다. 예고 없이 부르는 일도 흔치 않았지만, 접대 중에 빼 가는 일은 더욱 드물었기에 헌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그를 부르러 온 매니저 역시도 영문을 모르는 듯 고개만 저어 댈 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했을 때, 헌과 똑같은 표정을 한 시안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시안의 물음에 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 아냐는 그녀의 물음에 헌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저어 댈 뿐이었다. 그들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총매니저가 회의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접대 중에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구나.”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냐 물어보는 헌을 향해 총매니저는 대답을 대신해 카드키를 내밀었다. 그것은 시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407호, 414호. 각각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방의 카드키이다. 지금은 분명 비어 있는 방일 텐데 왜…….
“신입이 들어왔다.”
카드를 받으려던 헌의 손이 멈칫했다. 이미 그것을 받아 든 시안도 놀란 표정으로 총매니저를 바라봤다. 신입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리고 그들에게 새로운 방의 키가 주어졌다는 것은 아마도…….
“교육은 너희가 맡으라는 사장님 지시야.”
“하아…….”
시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가능한 피하고 싶었던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신입의 교육을 맡게 되는 것. 그녀 역시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그 끔찍한 시간을 경험했기에 더더욱 그 기억을 각인해 주는 입장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헌은 담담한 표정으로 키를 받아 들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총매니저의 대답은 단호했고, 헌도 수긍도 빨랐다. 시안만이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쥔 카드키만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기간은 한 달, 한 달간은 특별한 경우 외엔 접대를 하지 않아도 좋다. 별도의 교육 수당이 평소 버는 것 못지않게 지급될 테니까. 지금부터 배정된 방으로 가서 바로 교육에 들어가도록 해. 둘 다 경험이 없으니까 조금 고생을 해야 할 것 같다.”
“지금 바로 해야 한다고요?”
“그래.”
시안의 표정이 울듯이 일그러졌지만, 헌은 상관없다는 듯 407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헌의 팔목을 억지로 잡아 세운 시안이 총매니저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교육이라면 경험이 있는 다른 선배들이 해도 되잖아요.”
“사장님이 너희를 지명했다고 했잖아.”
“어째서…….”
“원래 교육은 에이스가 맡아서 하는 것이 전통이다.”
“이따위 가게에 전통 따위…….”
“한시안, 이 이상의 건방은 허락하지 않는다.”
엄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총매니저는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시안에게 잡혀 있던 손을 풀어낸 헌은 407호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시안도 하는 수 없이 414호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최헌, 어떻게 하면 너처럼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거냐?”
시안의 물음은 헌에게 닿지 못하고, 그녀의 입가에서 흩어져 버렸다.
* * *
그녀의 결혼 생활은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연애할 땐 다정하고 성실하기만 하던 남자였지만, 결혼을 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일도 하지 않았다. 항상 술과 도박에 빠져 살았고, 어쩌다 한번 집에 들어올 때는 다른 여자의 향기를 잔뜩 달고 들어왔다.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두려워 헤어져 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매일같이 손을 벌리는 탓에 친정과의 사이도 멀어졌고, 친구들도 모두 떠나갔다. 하지만 남자는 늘 그녀에게 돈을 요구했다.
도박으로 진 빚은 점점 늘어 갔고, 남자의 행패도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끔찍하게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겨 버렸다. 낳고 싶어서 낳은 것이 절대 아니었다. 수술할 돈이 없었기에 할 수 없이 낳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남편에게 받는 그녀의 스트레스는 그대로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 떡하니 생겨 버린 짐이 그녀에게 사랑스러울 리 없을 테니.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이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알고 보면 엄마는 너무나 불쌍한 사람이니까.
남편의 빚은 끝없이 늘어 갔고, 그녀가 버는 돈과 딸이 아르바이트로 벌어 오는 돈으로는 이자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찾아왔다. 남편이 또 도박을 했다고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담보로 내놓을 것이 없었던 그는 자신의 딸을 걸고 돈을 빌렸다고 했다.
그래, 잘됐다. 어차피 짐스러웠는데, 어차피 원치도 않는 자식이었는데 이 기회에 없애 버리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들에게 순순히 자신의 딸을 내어 주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너무도 착한 딸. 자신이 더 많이 일할 테니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울며 매달리던 딸의 손을 뿌리치고, 애타게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답해 주지 않았다.
그래. 홀가분하다. 어차피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이니까.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눈동자에 쉽게 초점이 맞춰지질 않았다. 등 뒤로 닿은 푹신한 침대도 온몸을 감은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도 모두가 생경한 것들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오르고 난 이후부턴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문득 눈을 떠 보니, 이곳에 누워 있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은 무겁고 나른했다.
딸깍.
문이 열리며 빛이 들어오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저벅저벅 걸어온 발걸음 소리는 머리맡에서 멈춰 섰다. 눈을 떠서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 보내 달라고 부탁해 보고 싶었지만 몸이 쉽게 말을 듣질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김유리. 스무 살인가.”
불쑥 내뱉어진 자신의 이름에 쿵 하고 내려앉은 심장의 동요를 겨우 진정시키며 그녀는 여전히 자는 척을 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눈을 감고 있으니 더욱 예민해진 청각 덕분인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테이블 근처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침대 가까운 곳에 앉은 낮선 이가 다시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설명할 테니, 잘 들으십시오.”
그는 자신이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기에 그냥 말을 하려는 걸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지 아니면 전혀 모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화류계 BAR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머릿속에 인식되어 있는 그런 BAR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정도의 BAR라고 생각하고 교육을 받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달간 당신을 교육할 최헌이라고 합니다. 교육이라고 해 봤자 거창한 것은 없습니다. 이곳에서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을 몸에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줄줄 새어 나왔다. 낮고 차가워서 한여름에 시트까지 덮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자꾸만 떨려 왔다. 듣는 이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설명이었다. 졸지에 모르는 곳으로 끌려와서 화류계의 일을 해야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그저 단순한 아르바이트를 인수인계하듯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
그가 몸을 일으킨 듯, 의자가 조금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매트리스의 한쪽이 기울어지며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고 그를 밀어 내야 하지만 여전히 몸은 천근만근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신입을 위한 배려도 여기까지.”
지금까지 그의 행동과 말투에선 그 어떤 배려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배려가 거기까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침대 위로 몸을 완전히 올린 헌이 유리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치듯 엎드렸다. 잠들어 있는, 아니 잠든 척하는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지금까지보다 더 낮은, 그리고 더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정말로 잠이 든 것인지, 아니면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상관없다. 나는 지금 너를 안을 테니까.”
#제2장
‘하아…… 싫어. 아파. ……하지 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다. 겨우 잊고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잊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여전히 매일 밤 그때의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리고, 아침이면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 눈을 떴다. 다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은 무뎌지고, 조금은 익숙해졌다는 것뿐.
그때의 시안은 스무 살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학업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친구들도 하나둘 마음을 열고 다가왔다. 부족한 생활이었지만, 많은 것을 가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고 따뜻한 날들이었다.
그 온기를 손에 쥐기까진 너무 긴 시간이 걸렸는데, 그 잠깐의 따스함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에서 시안과 어울리는 친구들은 모두 그녀에게 친절했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시안의 당당함에 끌린 이들도 있었고, 그녀의 우수한 성적에 덕을 보려고 친구가 된 이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어디에 있든 눈에 띄는 그녀의 외모만으로도 주변에 사람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접근해 오는 많은 사람 중 어느 누가 진심으로 다가오는지, 아니면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를 가늠해 내는 일은 어려웠다. 외롭게 자란 그녀는 사람의 온정에 목말라 있었다.
1학년 1학기의 기말고사가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종강 기념 술자리를 열었다. 평소엔 그런 자리에 얼굴만 비치고 일찍 자리를 뜨던 시안이었지만, 그날은 마침 아르바이트도 쉬는 날이라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술잔을 기울였다.
1차 그리고 2차가 이어질 때까지도 몇몇 선배들의 눈치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던 그녀였다.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 여학생들은 대부분 집으로 귀가를 한 상태였고, 시안도 슬슬 집에 갈 생각에 일어날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클럽 갈 건데, 시안이 너도 같이 가자.’
‘클럽? 됐어. 난 가 본 적도 없고…….’
‘그러니까. 이 기회에 가자는 거지. 자, 빼지 말고. 가자. 가자.’
평소 가깝게 지내던 남자 동기의 꼬임에 넘어가 클럽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그 나이 또래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봤을 곳이지만, 시안에게 클럽은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스테이지로 나가 춤을 추기도 하며 클럽에 적응해 가던 시안은 친구들이 지인을 소개해 준다는 이야기에 구석진 곳의 Room으로 따라갔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호흡과 시야를 동시에 답답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테이블을 두른 소파엔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친구의 손에 이끌려 들어오는 시안의 얼굴을 확인하곤 저마다 입가에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귓속말을 해 대기 시작했다.
‘얘기하고 나와. 내가 있을 곳은 아닌 것 같네. 밖에서 기다릴게.’
좋지 않은 느낌을 감지한 시안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머릿속에 삐― 하고 울리는 경고음이 그녀에게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겁먹을 거 없어. 다 좋은 형님들이야. 그냥 술 한잔만 같이 하려는 건데, 뭐.’
돌아서 나가려던 시안의 손목을 잡은 친구가 억지로 그녀를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술을 가득 담은 잔이 내밀어졌다.
‘그렇게 무서워하는 티 팍팍 내는 건 실례라고. 동생.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야.’
‘아, 저는…….’
‘그래. 알아. 괜찮아. 우리가 좀 험하게 생기기는 했으니까. 자, 일단 한 잔 해.’
그래, 딱 한 잔만 얼른 비우고 자리를 피하자.
그렇게 생각한 시안은 꾹꾹 술이 눌러 담긴 술잔을 입술에 대고 단숨에 들이켰다.
‘잘 마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인사를 하고 일어서던 시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급하게 마신 술이 탈이 난 것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점점 눈이 감겨 왔다.
나가야 하는데, 이곳은 너무 위험한 것 같은데…….
풀썩 소파 위로 쓰러진 시안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양주라는 술은 원래 이렇게 한 잔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일까.
‘정말 아무 탈 없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왔을 무렵, 시안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목소리는 친구와 그녀에게 술을 권했던 남자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