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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d·don(아바돈)
파멸의 장소, 지옥, 나락(奈落)
2권
1화
#제25장
호스트와 호스티스들이 지내는 방엔 밖으로 난 창이 하나씩 있었다. 물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방범창을 설치해 두긴 했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유리는 이곳에 온 지 3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한 번도 그 창을 열어 보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방 창문엔 언제나 커튼이 쳐져 있었다.
가끔 그녀의 방에 들른 안 매니저가 일부러라도 환기를 좀 시켜야겠다며 창문을 열어 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운동이나 식사를 핑계 삼아 방을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무엇 때문에 밖을 보기가 꺼려지는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처음으로 창가에 섰다. 초여름이 시작되던 때에 이곳에 왔는데,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듯했다.
창밖의 풍경은 그저 도시의 야경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없는 것을 그녀는 왜 그리도 보기가 꺼려졌던 것일까? 그 답을 찾아보려는 듯 유리의 시선이 오래도록 검은 배경에 어지럽게 빛나는 불빛들을 좇았다.
창문을 조금 열어 보니 쌀쌀한 밤공기가 문틈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슬립 한 장만 입고 있던 유리가 팔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을 닫지 않은 채, 온몸을 휘감는 가을의 공기를 느꼈다.
이곳에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름 내내 건물의 어느 곳이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며 냉방을 했고, 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따뜻한 온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안 매니저를 통해 들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유리는 시간의 흐름도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어떤 날엔 문득 이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버린 자신을 느끼며 A·bad·don에 온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마치 어제 이곳에 온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어떤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건 간에 더 이상은 죽고 싶단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열어 둔 창으로 들어온 가을의 공기가 온 방 안을 시리게 만들고 나서야 유리는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저는 언제쯤 밖에 나가 볼 수 있어요?”
침대 위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헌을 향해 그녀가 물었다. 유리를 안고 난 후, 하얀 시트를 하체에 대충 말아 감은 채로 침대에 늘어져 있는 그의 모습은 세상 시름 하나 없는 남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헌의 모습은 무척 낯선 것이었는데, 유리는 그의 무방비함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날이 서고 차가웠던 그가 이제는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가고 싶어?”
헌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가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도 있었고, 나가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이런 표현을 하자니 우습지만, A·bad·don의 생활은 부족한 것이 없었다.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은 매니저들이 모두 구해다 주었고, 먹고 싶은 음식은 솜씨 좋은 주방 이모님이 말만 하면 언제든 만들어 주셨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녀에겐 굳이 밖에 나가야 하거나, 나가고 싶은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언제쯤 나갈 수 있냐고 물어본 것은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오로지 그녀에게만 허락되지 않은 그것이 언제쯤 자유로워지는지가 단순히 궁금해졌기 때문에.
A·bad·don에서 일하는 직원들 중 스스로 이 일을 택한 이들은 외부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유리나 시안처럼 강제로 이곳으로 오게 된 이들은 일정 기간 동안 외부로의 출입은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망치거나 혹은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강제로 오게 된 이들에겐 완벽하게 A·bad·don에 적응하여 더 이상 이곳에서 도망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우려가 없다고 판단이 되어야만 그때 비로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씩 걸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직원들을 직접 상대하는 매니저들과 총매니저의 회의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아직도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가?”
헌이 유리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의 질문에 유리는 이곳에 처음 오던 날 그에게 들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에게 그는 ‘돌아갈 집이 있나?’,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지 물었다.’라고 심장도 얼려 버릴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리는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차갑게 응수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한없이 따뜻한 질문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어렵겠죠? 알아요.”
오늘 일 때문에 더더욱 매니저들은 여전히 유리가 불안정하다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짧게는 6개월의 꿈은 물 건너갔고, 그저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만은 피해 보는 수밖에.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실망은 담겨 있지 않았다. 어차피 외부에 나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처음으로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게 된 이유는 아마도 절대 이루어졌을 리 없는 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와 내가 이곳이 아닌 저 바깥세상에서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우리도 아주 평범한 연인들처럼 그렇게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도 그저 안타깝고 슬프기만 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도,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이어서 유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다시 돌아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유리의 곁으로 헌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인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는 그의 팔이 제 어깨를 감싸 안자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 유리의 등을 감싸며 다가온 헌이 그런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놀라는 것을 보니,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군.”
“아니에요.”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유리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숙인 헌이 유리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는 부드럽게 핥았다.
유리의 몸은 마음껏 입술을 댈 곳이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하얗고 고운 피부에 흉하게 새겨진 상처들은 이미 보고 또 본 것이라 눈에 익은 것이 되었음에도 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 같았다.
“몸이 차다. 가서 눕자.”
유리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헌의 팔이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안으로 잡아끄는 힘에 유리는 저항하지 않고 헌의 걸음을 따랐다. 침대로 옮겨 가는 동안에도 유리의 시선은 창밖의 풍경에 머물러 있었다.
“마실 걸 좀 줄까?”
유리를 침대에 눕힌 헌이 그녀에게 물었다. 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방 한쪽에 있는 냉장고로 향하려던 헌이 손목을 잡는 느낌에 움직임을 멈췄다.
“괜찮아요.”
헌이 다시 침대 위에 앉았는데도 유리는 잡고 있는 그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맥박이 뛰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평온하고 일정하게 뛰는 그 느낌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그와 반대로 유리의 심장 박동은 이유 없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가까이, 이렇게나 편안한 마음으로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몸은 좀 어때?”
“지금 제 몸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
“아깐 제 몸 걱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던 분 같던데…….”
말을 뱉어 놓고는 유리는 쑥스럽고 부끄러운 듯 베개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잠시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뻑이고 있던 헌은 이내 조금 전 격했던 두 사람의 정사를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헌의 시선이 지그시 유리에게로 가서 박혔다. 저가 말해 놓고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많이 대범해졌군.”
헌의 커다란 손이 유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베개에 묻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유리의 곁으로 헌의 상체가 숙여졌다.
“충분히 배려했다고 생각했는데, 느끼지 못했나 보군?”
“네?”
귓가에 나지막하게 울리는 헌의 목소리에 유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네?’ 하고 묻던 그녀는 생각보다 가까운 헌의 호흡을 느끼고는 상체를 뒤로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가 물러선 만큼 헌의 상체가 조금 더 그녀에게로 숙여지는 바람에 그의 호흡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배려한 거라고요?”
“그래.”
“도대체 어느 부분이……. 그냥 평소랑 똑같았던 것 같은데…….”
우물쭈물 말하며 유리가 조금 더 뒤로 몸을 움직였고, 헌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고 뱉어진 숨이 유리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네? 뭘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너를 배려한 것인지를.”
“그게 배려라고요?”
헌의 상체가 순식간에 유리의 몸 위를 덮었다. 그 바람에 놀란 유리의 몸이 털썩 침대 위로 바로 눕혀져 버렸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헌을 마주하며 유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지금 자신의 처지가 꼭 맹수 아래 놓인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모르는 것 같으니, 알게 해 주마.”
“네? 그게 무슨…….”
“사랑하는 여자를 안을 땐 어떻게 다른지. 아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배려했는지. 지금 한 말 후회하게 해 주마.”
“아니, 잠깐…….”
아래로 내려온 헌의 입술이 유리의 입술을 삼켰다. 버둥거리는 유리의 몸 위로 무게를 실은 헌의 몸이 겹쳐졌다.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 뜨거운 혀가 유리의 호흡을 삼켰다. 치열을 고르고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느낌에 그의 어깨를 밀어 내려던 유리의 팔에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어느새 아래로 내려간 유리의 팔이 헌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그의 입술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오로지 헌에게만 길들여진 입술은 뜨겁고 진한 그의 키스를 능숙하게 받아 냈다.
헌의 혀가 유리의 혀를 휘감아 제 입 안으로 빨아들이곤 이내 깊게 흡입했다. 뿌리가 뽑힐 듯 아릿한 통증에 유리에게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 입 안에서 마치 달달한 사탕을 굴려 대듯 유리의 혀끝을 헌의 이가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거칠게 움직이던 입술이 잠시 떨어질 때마다 유리는 가쁜 숨을 뱉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뜨겁고 달콤한 키스는 그녀의 사고를 정지시켰고, 입술에서 시작된 온몸을 휘감는 야릇한 느낌에 허덕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리의 허벅지 위를 더듬던 헌의 손바닥이 부드러운 슬립 안으로 들어왔다. 실크 소재의 얇은 천은 가느다란 유리의 몸을 여실히 드러낸 채로 그녀의 몸에 휘감겨 있었다. 이미 그의 품 아래서 흥분하기 시작한 여체는 헌의 입술과 손이 선사할 쾌감을 기대한 듯 열에 들떠 있었다.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 살을 쓸어내리던 손이 이내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파리하게 떨리며 긴장하는 근육들이 귀여웠다. 몇 번을 만져도 늘 똑같이, 그녀의 은밀한 곳은 수줍게 그를 반겼다.
보드라운 수풀 아래 숨어 있는 동그란 꽃씨를 찾는 손길에 유리의 허리가 튕겨 올랐다. 헌의 입술은 그녀의 호흡을 돌려준 채로 귓가와 목덜미를 오가며 진득한 효과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앙…….”
유리의 입술 사이로 야릇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꽃씨 주변을 맴돌던 헌의 손가락이 천천히 도톰하고 말랑한 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유리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척추를 타고 찌르르 전해 오는 쾌감에 그녀의 입술 사이로 뱉어지는 신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앗……! 하아…….”
귓불을 물고 귓바퀴를 핥는 그의 입술이 마치 그녀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집요하고 진득하게 움직였다. 귓가를, 목덜미를 쇄골을 괴롭히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하얀 피부 곳곳에 새겨진 붉은 상처들을 피해 내려온 입술이 슬립 아래 솟은 가슴 위에 닿았다.
하늘거리는 천 위로 입술을 올리자, 입술 끝에 딱딱하게 솟은 유두가 느껴졌다. 입술 사이에 솟아오른 돌기를 넣고 살살 문지르니 숨죽이고 있던 가슴이 봉긋하게 피어올랐다. 들썩이는 숨소리와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의 소리가 헌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살아 있음을,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반응하는 것을 느끼는 일은 매우 벅찬 감정이 차오르게 했다.
꽃씨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조금 더 아래 깊은 샘을 향해 이동했다. 바짝 말라 있던 샘의 주변이 어느 샌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은밀한 곳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던 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 기대하고 이렇게 젖어 버린 거지?”
“기대하길 뭘……. 아!”
놀리는 듯한 헌의 질문에 대꾸하던 유리는 가슴 끝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통증에 짧은 비명과 함께 가슴을 들썩였다. 입술 사이에 물고 맛보던 그녀의 유두를 헌이 이를 세워 앙 물어 버린 탓이었다.
유리의 은밀한 곳에서 흘러넘친 샘물을 묻힌 손가락이 다시 두툼한 살결 아래 꽃씨로 옮겨 왔다. 짓궂게 돌리는 손가락의 느낌에 유리의 발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침대에 뻗어 있던 가느라단 다리가 연신 버둥거렸다.
그러나 헌은 유리의 그런 조급함 따위 더 이상 ‘배려’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집요하고 짓궂게 그녀의 예민한 곳을 애무했다. 질척질척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여린 피부를 문지르며 야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방 안 가득 울리는 민망한 소리에 유리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집요하고 짓궂은 그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감정 없이 교육으로만 그녀를 안아 오던 헌이었기에, 괴롭히듯 그녀의 흥분을 유도하고 있는 그의 모든 것이 낯선 자극이었다.
“하아……. 앗!”
헌의 기다란 손가락 하나가 불쑥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빡빡하게 조여 오는 근육들을 헤치고 들어간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온 헌의 입술은 유리의 동그란 아랫배를 진득하게 핥았다. 그리고 질척하게 움직이는 입술만큼이나 느릿한 속도로 그의 손가락은 유리를 애태우고 있었다.
느리고 부드럽게, 느낄 듯 말 듯 움직이는 손가락은 유리를 점점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유리의 손이 헌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하얀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고 있던 헌이 고개를 들자,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
“……움직여 주세요.”
파멸의 장소, 지옥, 나락(奈落)
2권
1화
#제25장
호스트와 호스티스들이 지내는 방엔 밖으로 난 창이 하나씩 있었다. 물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방범창을 설치해 두긴 했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바깥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하지만 유리는 이곳에 온 지 3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한 번도 그 창을 열어 보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방 창문엔 언제나 커튼이 쳐져 있었다.
가끔 그녀의 방에 들른 안 매니저가 일부러라도 환기를 좀 시켜야겠다며 창문을 열어 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운동이나 식사를 핑계 삼아 방을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무엇 때문에 밖을 보기가 꺼려지는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처음으로 창가에 섰다. 초여름이 시작되던 때에 이곳에 왔는데,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듯했다.
창밖의 풍경은 그저 도시의 야경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없는 것을 그녀는 왜 그리도 보기가 꺼려졌던 것일까? 그 답을 찾아보려는 듯 유리의 시선이 오래도록 검은 배경에 어지럽게 빛나는 불빛들을 좇았다.
창문을 조금 열어 보니 쌀쌀한 밤공기가 문틈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슬립 한 장만 입고 있던 유리가 팔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녀는 창문을 닫지 않은 채, 온몸을 휘감는 가을의 공기를 느꼈다.
이곳에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름 내내 건물의 어느 곳이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며 냉방을 했고, 겨울에도 추위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따뜻한 온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안 매니저를 통해 들었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유리는 시간의 흐름도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어떤 날엔 문득 이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버린 자신을 느끼며 A·bad·don에 온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낯선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마치 어제 이곳에 온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어떤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건 간에 더 이상은 죽고 싶단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열어 둔 창으로 들어온 가을의 공기가 온 방 안을 시리게 만들고 나서야 유리는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저는 언제쯤 밖에 나가 볼 수 있어요?”
침대 위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헌을 향해 그녀가 물었다. 유리를 안고 난 후, 하얀 시트를 하체에 대충 말아 감은 채로 침대에 늘어져 있는 그의 모습은 세상 시름 하나 없는 남자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헌의 모습은 무척 낯선 것이었는데, 유리는 그의 무방비함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날이 서고 차가웠던 그가 이제는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가고 싶어?”
헌의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가고 싶은 것은 아니라는 의미도 있었고, 나가고 싶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나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이런 표현을 하자니 우습지만, A·bad·don의 생활은 부족한 것이 없었다. 필요로 하고, 원하는 것은 매니저들이 모두 구해다 주었고, 먹고 싶은 음식은 솜씨 좋은 주방 이모님이 말만 하면 언제든 만들어 주셨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녀에겐 굳이 밖에 나가야 하거나, 나가고 싶은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언제쯤 나갈 수 있냐고 물어본 것은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오로지 그녀에게만 허락되지 않은 그것이 언제쯤 자유로워지는지가 단순히 궁금해졌기 때문에.
A·bad·don에서 일하는 직원들 중 스스로 이 일을 택한 이들은 외부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유리나 시안처럼 강제로 이곳으로 오게 된 이들은 일정 기간 동안 외부로의 출입은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망치거나 혹은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강제로 오게 된 이들에겐 완벽하게 A·bad·don에 적응하여 더 이상 이곳에서 도망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우려가 없다고 판단이 되어야만 그때 비로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씩 걸리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직원들을 직접 상대하는 매니저들과 총매니저의 회의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아직도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가?”
헌이 유리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의 질문에 유리는 이곳에 처음 오던 날 그에게 들었던 말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그녀에게 그는 ‘돌아갈 집이 있나?’,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지 물었다.’라고 심장도 얼려 버릴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리는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차갑게 응수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한없이 따뜻한 질문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어렵겠죠? 알아요.”
오늘 일 때문에 더더욱 매니저들은 여전히 유리가 불안정하다고 평가하게 될 것이다. 짧게는 6개월의 꿈은 물 건너갔고, 그저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 일만은 피해 보는 수밖에.
알고 있다고 대답하는 목소리에 실망은 담겨 있지 않았다. 어차피 외부에 나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처음으로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게 된 이유는 아마도 절대 이루어졌을 리 없는 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와 내가 이곳이 아닌 저 바깥세상에서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우리도 아주 평범한 연인들처럼 그렇게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도 그저 안타깝고 슬프기만 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도,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이어서 유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다시 돌아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서 있는 유리의 곁으로 헌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인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는 그의 팔이 제 어깨를 감싸 안자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 유리의 등을 감싸며 다가온 헌이 그런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놀라는 것을 보니,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군.”
“아니에요.”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유리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숙인 헌이 유리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는 부드럽게 핥았다.
유리의 몸은 마음껏 입술을 댈 곳이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하얗고 고운 피부에 흉하게 새겨진 상처들은 이미 보고 또 본 것이라 눈에 익은 것이 되었음에도 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 같았다.
“몸이 차다. 가서 눕자.”
유리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헌의 팔이 아래로 내려와 그녀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안으로 잡아끄는 힘에 유리는 저항하지 않고 헌의 걸음을 따랐다. 침대로 옮겨 가는 동안에도 유리의 시선은 창밖의 풍경에 머물러 있었다.
“마실 걸 좀 줄까?”
유리를 침대에 눕힌 헌이 그녀에게 물었다. 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방 한쪽에 있는 냉장고로 향하려던 헌이 손목을 잡는 느낌에 움직임을 멈췄다.
“괜찮아요.”
헌이 다시 침대 위에 앉았는데도 유리는 잡고 있는 그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맥박이 뛰는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평온하고 일정하게 뛰는 그 느낌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그와 반대로 유리의 심장 박동은 이유 없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가까이, 이렇게나 편안한 마음으로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몸은 좀 어때?”
“지금 제 몸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
“아깐 제 몸 걱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던 분 같던데…….”
말을 뱉어 놓고는 유리는 쑥스럽고 부끄러운 듯 베개로 얼굴을 묻어 버렸다. 잠시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껌뻑이고 있던 헌은 이내 조금 전 격했던 두 사람의 정사를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달았다.
헌의 시선이 지그시 유리에게로 가서 박혔다. 저가 말해 놓고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많이 대범해졌군.”
헌의 커다란 손이 유리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여전히 베개에 묻은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유리의 곁으로 헌의 상체가 숙여졌다.
“충분히 배려했다고 생각했는데, 느끼지 못했나 보군?”
“네?”
귓가에 나지막하게 울리는 헌의 목소리에 유리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네?’ 하고 묻던 그녀는 생각보다 가까운 헌의 호흡을 느끼고는 상체를 뒤로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가 물러선 만큼 헌의 상체가 조금 더 그녀에게로 숙여지는 바람에 그의 호흡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배려한 거라고요?”
“그래.”
“도대체 어느 부분이……. 그냥 평소랑 똑같았던 것 같은데…….”
우물쭈물 말하며 유리가 조금 더 뒤로 몸을 움직였고, 헌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은 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하고 뱉어진 숨이 유리의 머리카락을 간질였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네? 뭘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너를 배려한 것인지를.”
“그게 배려라고요?”
헌의 상체가 순식간에 유리의 몸 위를 덮었다. 그 바람에 놀란 유리의 몸이 털썩 침대 위로 바로 눕혀져 버렸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헌을 마주하며 유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쩐지 지금 자신의 처지가 꼭 맹수 아래 놓인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모르는 것 같으니, 알게 해 주마.”
“네? 그게 무슨…….”
“사랑하는 여자를 안을 땐 어떻게 다른지. 아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배려했는지. 지금 한 말 후회하게 해 주마.”
“아니, 잠깐…….”
아래로 내려온 헌의 입술이 유리의 입술을 삼켰다. 버둥거리는 유리의 몸 위로 무게를 실은 헌의 몸이 겹쳐졌다.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 뜨거운 혀가 유리의 호흡을 삼켰다. 치열을 고르고 입천장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느낌에 그의 어깨를 밀어 내려던 유리의 팔에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어느새 아래로 내려간 유리의 팔이 헌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그의 입술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오로지 헌에게만 길들여진 입술은 뜨겁고 진한 그의 키스를 능숙하게 받아 냈다.
헌의 혀가 유리의 혀를 휘감아 제 입 안으로 빨아들이곤 이내 깊게 흡입했다. 뿌리가 뽑힐 듯 아릿한 통증에 유리에게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제 입 안에서 마치 달달한 사탕을 굴려 대듯 유리의 혀끝을 헌의 이가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거칠게 움직이던 입술이 잠시 떨어질 때마다 유리는 가쁜 숨을 뱉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뜨겁고 달콤한 키스는 그녀의 사고를 정지시켰고, 입술에서 시작된 온몸을 휘감는 야릇한 느낌에 허덕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리의 허벅지 위를 더듬던 헌의 손바닥이 부드러운 슬립 안으로 들어왔다. 실크 소재의 얇은 천은 가느다란 유리의 몸을 여실히 드러낸 채로 그녀의 몸에 휘감겨 있었다. 이미 그의 품 아래서 흥분하기 시작한 여체는 헌의 입술과 손이 선사할 쾌감을 기대한 듯 열에 들떠 있었다.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 살을 쓸어내리던 손이 이내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파리하게 떨리며 긴장하는 근육들이 귀여웠다. 몇 번을 만져도 늘 똑같이, 그녀의 은밀한 곳은 수줍게 그를 반겼다.
보드라운 수풀 아래 숨어 있는 동그란 꽃씨를 찾는 손길에 유리의 허리가 튕겨 올랐다. 헌의 입술은 그녀의 호흡을 돌려준 채로 귓가와 목덜미를 오가며 진득한 효과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앙…….”
유리의 입술 사이로 야릇한 비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양 꽃씨 주변을 맴돌던 헌의 손가락이 천천히 도톰하고 말랑한 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에 유리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척추를 타고 찌르르 전해 오는 쾌감에 그녀의 입술 사이로 뱉어지는 신음이 더욱 짙어졌다.
“아앗……! 하아…….”
귓불을 물고 귓바퀴를 핥는 그의 입술이 마치 그녀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집요하고 진득하게 움직였다. 귓가를, 목덜미를 쇄골을 괴롭히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하얀 피부 곳곳에 새겨진 붉은 상처들을 피해 내려온 입술이 슬립 아래 솟은 가슴 위에 닿았다.
하늘거리는 천 위로 입술을 올리자, 입술 끝에 딱딱하게 솟은 유두가 느껴졌다. 입술 사이에 솟아오른 돌기를 넣고 살살 문지르니 숨죽이고 있던 가슴이 봉긋하게 피어올랐다. 들썩이는 숨소리와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의 소리가 헌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살아 있음을,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살아 숨 쉬며 반응하는 것을 느끼는 일은 매우 벅찬 감정이 차오르게 했다.
꽃씨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조금 더 아래 깊은 샘을 향해 이동했다. 바짝 말라 있던 샘의 주변이 어느 샌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은밀한 곳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던 헌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뭘 기대하고 이렇게 젖어 버린 거지?”
“기대하길 뭘……. 아!”
놀리는 듯한 헌의 질문에 대꾸하던 유리는 가슴 끝에서 전해지는 아릿한 통증에 짧은 비명과 함께 가슴을 들썩였다. 입술 사이에 물고 맛보던 그녀의 유두를 헌이 이를 세워 앙 물어 버린 탓이었다.
유리의 은밀한 곳에서 흘러넘친 샘물을 묻힌 손가락이 다시 두툼한 살결 아래 꽃씨로 옮겨 왔다. 짓궂게 돌리는 손가락의 느낌에 유리의 발끝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침대에 뻗어 있던 가느라단 다리가 연신 버둥거렸다.
그러나 헌은 유리의 그런 조급함 따위 더 이상 ‘배려’해 줄 생각이 없는 듯 집요하고 짓궂게 그녀의 예민한 곳을 애무했다. 질척질척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여린 피부를 문지르며 야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방 안 가득 울리는 민망한 소리에 유리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집요하고 짓궂은 그는 처음이었다. 언제나 냉정하고 감정 없이 교육으로만 그녀를 안아 오던 헌이었기에, 괴롭히듯 그녀의 흥분을 유도하고 있는 그의 모든 것이 낯선 자극이었다.
“하아……. 앗!”
헌의 기다란 손가락 하나가 불쑥 안으로 침범해 들어왔다. 빡빡하게 조여 오는 근육들을 헤치고 들어간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온 헌의 입술은 유리의 동그란 아랫배를 진득하게 핥았다. 그리고 질척하게 움직이는 입술만큼이나 느릿한 속도로 그의 손가락은 유리를 애태우고 있었다.
느리고 부드럽게, 느낄 듯 말 듯 움직이는 손가락은 유리를 점점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침대 위에 늘어져 있던 유리의 손이 헌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하얀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묻고 있던 헌이 고개를 들자,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만…….”
“…….”
“……움직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