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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총매니저의 옆에서 있던 김 매니저는 자신이 담당하는 직원의 등장에 펄쩍 몸을 뛰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달려가 머리를 쥐어박고 다시 방으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상황이 너무 커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지후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하나둘 직원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복도에 섰다.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으로 총매니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헌과 유리에 대한 납득할 만한 처분뿐이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아닌, 이곳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내려지는 처분과도 같은 것이라 느껴졌기에.
A·bad·don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모든 직원들이 뜻을 합쳐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한시안과 김지후 둘뿐일 때는 어떻게든 제압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직원일 경우엔 이야기가 달랐다. 주춤하고 물러서는 총매니저의 곁으로 핸드폰을 손에 든 안 매니저가 다가섰다.
“사장님 전화입니다. 총매니저님.”
안 매니저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들고 통화를 이어 가던 총매니저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복도를 한 번 훑어보고는 이내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 매니저와 눈빛을 주고받은 김 매니저가 그의 뒤를 따랐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안 매니저가 직원들을 향해 섰다.
“시안 씨, 괜찮아요?”
부드러운 안 매니저의 목소리가 시안에게로 향했다. 총매니저와의 대화가 충격이 컸던 듯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안 매니저의 물음에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보던 안 매니저가 이내 다른 직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최헌 씨와 유리 양에 대한 처벌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이뤄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 전무님은 오늘부로 A·bad·don VIP 자격을 박탈하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어요. 여러분은 더 이상 일을 크게 키우지 말고 접대 준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차분한 안 매니저의 목소리에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안 매니저에게서 들은 말대로라면 크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을 할 만한 처분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던 직원들은 하나둘 접대 준비를 위해 방으로 들어갔고, 돌아서려는 시안의 팔을 안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시안 씨…….”
“괜찮아요, 안 매니저님. 저 그 정도 말엔 꿈쩍도 안 하는 거 아시잖아요.”
“하지만…….”
“또 틀린 말도 아니었고요.”
걱정스러움과 미안함을 담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안 매니저를 향해 시안이 웃어 보였다. 얼굴 가득 그려지는 웃음이 더없이 예뻐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처해 있는 현실은 너무도 가시 같았기 때문에.
* * *
헌과 유리에게는 한 달 동안 근신을 하라는 처분이 떨어졌다. 이것이 그저 보여 주기 위한 처분이라는 것은 A·bad·don에 있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었다.
A·bad·don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높으신 분들이 A·bad·don을 찾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칫 허물이 될 수 있는 일도 묵인되는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번 일의 경우는 사건의 당사자인 김 전무가 VIP 회원 자격을 박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A·bad·don 내에서 있었던 일을 주변 지인들에게 퍼뜨려 버렸다. 제 얼굴에 침 뱉기인 줄도 모르고, 헌과 오갔던 폭력이나 유리에게 저질렀던 악행 등을 전부 떠들어 댔다. 그렇기에 A·bad·don 입장에서도 사건을 일으킨 헌과 유리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는 넘어가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헌과 유리의 처벌은 A·bad·don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무언의 경고가 되었다. 자칫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을 했다간 김 전무와 같이 VIP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심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실수로 인해 해당 직원의 징계까지 내려진다면, 그 직원을 찾는 다른 고객들의 원성 또한 제 몫으로 돌아오는 일이 될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예로 현재 헌과 유리를 찾던 고객들이 한 달간이나 그들을 만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김 전무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일은 그들과 연관된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로 인해 A·bad·don을 찾는 고객들은 자신을 담당하는 호스트 혹은 호스티스들을 대해는 태도에 많은 변화를 보였다.
한 달이라는 근신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헌과 유리에게 벌보다는 상에 더 가까운 처분이었다. 그저 보여 주기 위한 처분으로 그들이 받을 피해를 굳이 꼽아 보자면, 근신 기간 동안엔 ‘돈’을 벌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을 보기 위해 찾아오던 ‘고객’들을 다른 직원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물론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거니와, 그들을 찾던 단골 고객들 역시 한 달이란 기간 동안 두 사람을 기다리는 의리를 보여 주었다.
한 달 내내 헌과 유리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같이 책을 잃고,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며 마치 데이트를 즐기듯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A·bad·don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누리는 달콤한 시간은 시한부와도 같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매 순간순간 서로를 각인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확인했다. 너무 멀리 오래 돌아왔기에 어쩌면 다시 누리지 못할 그 시간들은 두 사람에게 가을이라는 짧은 계절이 준 선물과도 같았다.
#제26장
A·bad·don의 3층엔 직원들을 위한 헤어숍이 위치해 있었다. 남자 호스트들의 경우 자신이 직접 머리를 만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성 호스티스들의 경우 거의 모든 직원들이 영업시간 전에 이곳에 들러 드라이를 받고 있었다.
헤어숍의 디자이너들은 강남의 유명한 숍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낮 시간엔 자신의 숍을 지키던 그들은 A·bad·don의 영업이 시작되기 전 5시부터 8시까지만 이곳으로 와 직원들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개중에는 고객이 자신의 호스트 혹은 호스티스만을 전담으로 관리해 주기 위해 고용한 디자이너들도 있었다. 직원 한 사람당 드라이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30분 남짓이었고, 염색이나 펌을 원하는 경우에는 미리 담당 디자이너와 상의하여 시간 약속을 정해야만 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3층의 헤어숍으로 들어오던 시안이 그녀보다 먼저 와서 드라이를 받고 있던 이를 발견하곤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한 달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은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맡겨 놓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네 오는 디자이너들에게 검지를 세워 ‘쉿!’ 하는 신호를 보낸 시안이 조심스럽게 졸고 있는 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헤어숍에 먼저 와 있던 이는 옆자리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무방비한 상태로 졸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 디자이너를 향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 시안이 앞으로 쏠려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갔다.
“최헌이 밤마다 전혀 안 재우는 거냐?”
불쑥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졸고 있던 이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뺐다. 두 눈을 껌벅이며 코앞에 다가와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던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하아……. 시안 선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안의 표정이 뚱해졌다. 반가운 목소리는 듣기 좋은데, 이름 뒤에 붙은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안이 유리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쥐었다 놓았다.
“언니라고 부르라고 몇 번 말했어, 김유리!”
“아! 맞다. 시안 언니…….”
우물쭈물하는 유리의 입술 사이로 ‘언니’라는 말이 나오자, 시안의 얼굴이 금세 환한 웃음을 띠었다. 여동생을 바라보듯 다정한 눈빛으로 시안이 가만히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아…….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김 전무에 대한 과거는 나도 있으니까.”
“네?”
“나도 김 전무 담당했던 적이 있었거든. 일주일을 못 견디고 포기해 버리긴 했지만…….”
“…….”
“유리야.”
“네.”
“다시는 안 그럴 거지?”
“네.”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유리의 머리를 시안이 한껏 헝클어 놓았다. 공들여 드라이를 하고 있던 디자이너의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시안은 그저 통쾌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 역시 그런 시안을 마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도 따뜻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음에도 스스로를 혼자라 생각하고, 처한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봤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죽여 가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에 칼날을 꽂는 일인 줄은 모르고.
몰랐었다. 그때는. 자신을 이렇게나 아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정작 일이 커지고 보니, 다치고 상처 입은 것은 자신인데 그런 자신보다도 더 아파하고,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을 때는 보이지 않던 따스함이었다.
이렇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유리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안을 담당하는 디자이너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고, 잠시 물러서 있던 유리의 담당도 다시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하자, 두 사람의 대화도 자연스레 끊어졌다. 유리와 시안은 말없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리는 이내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 달이나 쉬어 놓고서는 매일같이 접대를 했던 자신보다 더 피곤해하는 모습에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유리의 원활한 접대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최헌에게 주의를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이가 먼저 끝이 났는데도 유리는 자리를 뜨지 않고 시안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시안은 드라이를 마치자마자 유리와 함께 호스티스들의 휴게실을 찾았다. 아직 접대 준비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커피 줄까?”
휴게실 한쪽에 준비되어 있는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내리며 시안이 유리를 향해 물었고, 유리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휴게실 안이 금세 향긋한 커피 향으로 가득 찼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을 양손에 든 시안이 유리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마셔. 아무나 맛볼 수 없다는 한시안표 원두커피.”
“고맙습니다.”
시안이 건넨 잔을 두 손으로 그러쥐고, 유리는 말이 없었다. 홀짝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 시안이 유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도 괜찮아.”
“아, 저기 그게…….”
“최헌에 대한 거지?”
시안의 추측에 유리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눈치 빠른 시안이 모를 리도 없거니와, 꼭 눈치가 빠르지 않더라도 자신이 궁금해할 만한 것은 헌의 대한 일이라는 걸 그와 그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추측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본인에게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해 줘서요.”
“뭔데?”
“그……. 왜 여성 고객보다 남성 고객이 더 많은 건지 물어봤었거든요.”
“…….”
“그런데 아무 대답도 안 해 주셨어요.”
처음엔 헌에게 대수롭지 않게 물어본 질문이었기에 그에게서도 아무렇지 않게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질문에는 모두 답을 해 주던 헌이 그 질문에만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그의 그런 반응으로 인해 대수롭지 않던 질문이 매우 궁금한 질문이 되어 버린 유리였다.
유리의 질문을 들은 시안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곧 그녀의 얼굴로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듯하다, 이내 미소는 큰 웃음이 되어 그녀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한참이나 상체를 숙인 채 깔깔거리고 웃던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긴, 천하의 최헌이라도 이걸 본인 입으로 말하긴 쑥스러웠을 거야.”
“네? 그게 무슨…….”
시안의 반응으로 보아 그녀는 유리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유리가 마침내 그 답을 들을 수 있단 기대에 긴장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봤고,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시안이 중요한 비밀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3년 전에 말이야. A·bad·don이 문을 닫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 최헌 때문에…….”
“네?”
시안의 말에 유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헌 때문에 A·bad·don이 문을 닫을 뻔하다니, 방금 전 본인의 두 귀로 듣고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놀랍지? FM 최헌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A·bad·don이 문 닫을 위기까지 처하게 된 건지. 믿기 힘들 거야.”
시안도 놀라는 유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최헌이 A·bad·don으로 출근했을 때, 아주 난리가 났지. 이곳엔 없던 캐릭터였거든. 잘 웃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은데 칼같이 정중하고 매너 좋은 미남자. 부잣집 사모님들, 재벌의 영애들 할 것 없이 헌과의 하룻밤을 꿈꿨으니까.”
시안의 이야기에 유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거일 뿐이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그를 원했던 다른 여성들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안은 왠지 모르게 즐거운 느낌이었다.
“사건은 헌이 A·bad·don에서 일한 지 5년 정도 흘렀을 때 일어났어. 평소에도 헌을 자주 찾아오던 단골 고객 세 명이서 싸움이 붙은 거야.”
“아…….”
“세 사람 모두 이름만 대면 세 살짜리 어린애들도 알 만큼 유명한 기업의 관계자였지. 가지신 분들의 싸움, 아주 치열하더라고. 평범한 여자들처럼 머리 쥐어뜯고 싸우는 게 아니었어. 주식으로 휘두르고, 사업적으로 골탕 먹이고. 3년 전에 유리는 어려서 몰랐겠지만, 당시 그 일은 뉴스에서도 떠들어 댈 만큼 치열한 전쟁 같았거든.”
“…….”
“물론 뉴스에서 A·bad·don이 거론된 건 아니었어. 그냥 기업 간의 이야기로만 다뤄졌지.”
유리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한 남자가 과거엔 엄청난 기업의 관계자들을 흔들 만큼 대단한 인기남이었다니. 아, 물론 그는 지금도 A·bad·don에서 에이스로 꼽히는 인물이긴 했지만, 지금은 성비에 있어서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이 많은 편이었다.
총매니저의 옆에서 있던 김 매니저는 자신이 담당하는 직원의 등장에 펄쩍 몸을 뛰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 달려가 머리를 쥐어박고 다시 방으로 밀어 넣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상황이 너무 커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지후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하나둘 직원들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복도에 섰다.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으로 총매니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 헌과 유리에 대한 납득할 만한 처분뿐이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아닌, 이곳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내려지는 처분과도 같은 것이라 느껴졌기에.
A·bad·don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모든 직원들이 뜻을 합쳐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한시안과 김지후 둘뿐일 때는 어떻게든 제압이 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직원일 경우엔 이야기가 달랐다. 주춤하고 물러서는 총매니저의 곁으로 핸드폰을 손에 든 안 매니저가 다가섰다.
“사장님 전화입니다. 총매니저님.”
안 매니저에게서 핸드폰을 받아 들고 통화를 이어 가던 총매니저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복도를 한 번 훑어보고는 이내 자신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안 매니저와 눈빛을 주고받은 김 매니저가 그의 뒤를 따랐고,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안 매니저가 직원들을 향해 섰다.
“시안 씨, 괜찮아요?”
부드러운 안 매니저의 목소리가 시안에게로 향했다. 총매니저와의 대화가 충격이 컸던 듯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안 매니저의 물음에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걱정을 담은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보던 안 매니저가 이내 다른 직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최헌 씨와 유리 양에 대한 처벌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이뤄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김 전무님은 오늘부로 A·bad·don VIP 자격을 박탈하라는 사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어요. 여러분은 더 이상 일을 크게 키우지 말고 접대 준비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차분한 안 매니저의 목소리에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안 매니저에게서 들은 말대로라면 크게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납득을 할 만한 처분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던 직원들은 하나둘 접대 준비를 위해 방으로 들어갔고, 돌아서려는 시안의 팔을 안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시안 씨…….”
“괜찮아요, 안 매니저님. 저 그 정도 말엔 꿈쩍도 안 하는 거 아시잖아요.”
“하지만…….”
“또 틀린 말도 아니었고요.”
걱정스러움과 미안함을 담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안 매니저를 향해 시안이 웃어 보였다. 얼굴 가득 그려지는 웃음이 더없이 예뻐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처해 있는 현실은 너무도 가시 같았기 때문에.
* * *
헌과 유리에게는 한 달 동안 근신을 하라는 처분이 떨어졌다. 이것이 그저 보여 주기 위한 처분이라는 것은 A·bad·don에 있는 모두가 예상할 수 있었다.
A·bad·don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것이 높으신 분들이 A·bad·don을 찾는 가장 큰 이유였다. 자칫 허물이 될 수 있는 일도 묵인되는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번 일의 경우는 사건의 당사자인 김 전무가 VIP 회원 자격을 박탈당한 것에 앙심을 품고 A·bad·don 내에서 있었던 일을 주변 지인들에게 퍼뜨려 버렸다. 제 얼굴에 침 뱉기인 줄도 모르고, 헌과 오갔던 폭력이나 유리에게 저질렀던 악행 등을 전부 떠들어 댔다. 그렇기에 A·bad·don 입장에서도 사건을 일으킨 헌과 유리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는 넘어가기가 어려워진 것이었다.
헌과 유리의 처벌은 A·bad·don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무언의 경고가 되었다. 자칫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을 했다간 김 전무와 같이 VIP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심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실수로 인해 해당 직원의 징계까지 내려진다면, 그 직원을 찾는 다른 고객들의 원성 또한 제 몫으로 돌아오는 일이 될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예로 현재 헌과 유리를 찾던 고객들이 한 달간이나 그들을 만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김 전무에게 큰 불만을 갖게 되었으며, 이 일은 그들과 연관된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로 인해 A·bad·don을 찾는 고객들은 자신을 담당하는 호스트 혹은 호스티스들을 대해는 태도에 많은 변화를 보였다.
한 달이라는 근신은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헌과 유리에게 벌보다는 상에 더 가까운 처분이었다. 그저 보여 주기 위한 처분으로 그들이 받을 피해를 굳이 꼽아 보자면, 근신 기간 동안엔 ‘돈’을 벌 수 없다는 것과 그들을 보기 위해 찾아오던 ‘고객’들을 다른 직원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물론 두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기도 했거니와, 그들을 찾던 단골 고객들 역시 한 달이란 기간 동안 두 사람을 기다리는 의리를 보여 주었다.
한 달 내내 헌과 유리는 함께 시간을 보냈다. 같이 책을 잃고,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며 마치 데이트를 즐기듯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A·bad·don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누리는 달콤한 시간은 시한부와도 같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은 매 순간순간 서로를 각인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확인했다. 너무 멀리 오래 돌아왔기에 어쩌면 다시 누리지 못할 그 시간들은 두 사람에게 가을이라는 짧은 계절이 준 선물과도 같았다.
#제26장
A·bad·don의 3층엔 직원들을 위한 헤어숍이 위치해 있었다. 남자 호스트들의 경우 자신이 직접 머리를 만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성 호스티스들의 경우 거의 모든 직원들이 영업시간 전에 이곳에 들러 드라이를 받고 있었다.
헤어숍의 디자이너들은 강남의 유명한 숍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낮 시간엔 자신의 숍을 지키던 그들은 A·bad·don의 영업이 시작되기 전 5시부터 8시까지만 이곳으로 와 직원들의 머리를 만져 주었다.
개중에는 고객이 자신의 호스트 혹은 호스티스만을 전담으로 관리해 주기 위해 고용한 디자이너들도 있었다. 직원 한 사람당 드라이를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30분 남짓이었고, 염색이나 펌을 원하는 경우에는 미리 담당 디자이너와 상의하여 시간 약속을 정해야만 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 3층의 헤어숍으로 들어오던 시안이 그녀보다 먼저 와서 드라이를 받고 있던 이를 발견하곤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한 달 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은 디자이너에게 머리를 맡겨 놓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네 오는 디자이너들에게 검지를 세워 ‘쉿!’ 하는 신호를 보낸 시안이 조심스럽게 졸고 있는 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헤어숍에 먼저 와 있던 이는 옆자리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할 만큼 무방비한 상태로 졸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만지고 있는 디자이너를 향해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 시안이 앞으로 쏠려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갔다.
“최헌이 밤마다 전혀 안 재우는 거냐?”
불쑥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졸고 있던 이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뺐다. 두 눈을 껌벅이며 코앞에 다가와 있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던 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하아……. 시안 선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시안의 표정이 뚱해졌다. 반가운 목소리는 듣기 좋은데, 이름 뒤에 붙은 호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안이 유리의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아프지 않게 쥐었다 놓았다.
“언니라고 부르라고 몇 번 말했어, 김유리!”
“아! 맞다. 시안 언니…….”
우물쭈물하는 유리의 입술 사이로 ‘언니’라는 말이 나오자, 시안의 얼굴이 금세 환한 웃음을 띠었다. 여동생을 바라보듯 다정한 눈빛으로 시안이 가만히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다.”
“아…….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괜찮아. 김 전무에 대한 과거는 나도 있으니까.”
“네?”
“나도 김 전무 담당했던 적이 있었거든. 일주일을 못 견디고 포기해 버리긴 했지만…….”
“…….”
“유리야.”
“네.”
“다시는 안 그럴 거지?”
“네.”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유리의 머리를 시안이 한껏 헝클어 놓았다. 공들여 드라이를 하고 있던 디자이너의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시안은 그저 통쾌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유리 역시 그런 시안을 마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도 따뜻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음에도 스스로를 혼자라 생각하고, 처한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봤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죽여 가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에 칼날을 꽂는 일인 줄은 모르고.
몰랐었다. 그때는. 자신을 이렇게나 아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정작 일이 커지고 보니, 다치고 상처 입은 것은 자신인데 그런 자신보다도 더 아파하고,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을 때는 보이지 않던 따스함이었다.
이렇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유리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안을 담당하는 디자이너가 그녀의 뒤로 다가왔고, 잠시 물러서 있던 유리의 담당도 다시 그녀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하자, 두 사람의 대화도 자연스레 끊어졌다. 유리와 시안은 말없이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고, 유리는 이내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 달이나 쉬어 놓고서는 매일같이 접대를 했던 자신보다 더 피곤해하는 모습에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유리의 원활한 접대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최헌에게 주의를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이가 먼저 끝이 났는데도 유리는 자리를 뜨지 않고 시안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시안은 드라이를 마치자마자 유리와 함께 호스티스들의 휴게실을 찾았다. 아직 접대 준비를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기에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커피 줄까?”
휴게실 한쪽에 준비되어 있는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내리며 시안이 유리를 향해 물었고, 유리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휴게실 안이 금세 향긋한 커피 향으로 가득 찼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잔을 양손에 든 시안이 유리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마셔. 아무나 맛볼 수 없다는 한시안표 원두커피.”
“고맙습니다.”
시안이 건넨 잔을 두 손으로 그러쥐고, 유리는 말이 없었다. 홀짝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켠 시안이 유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봐도 괜찮아.”
“아, 저기 그게…….”
“최헌에 대한 거지?”
시안의 추측에 유리가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눈치 빠른 시안이 모를 리도 없거니와, 꼭 눈치가 빠르지 않더라도 자신이 궁금해할 만한 것은 헌의 대한 일이라는 걸 그와 그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들이라면 얼마든지 추측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본인에게 물었더니 대답을 안 해 줘서요.”
“뭔데?”
“그……. 왜 여성 고객보다 남성 고객이 더 많은 건지 물어봤었거든요.”
“…….”
“그런데 아무 대답도 안 해 주셨어요.”
처음엔 헌에게 대수롭지 않게 물어본 질문이었기에 그에게서도 아무렇지 않게 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질문에는 모두 답을 해 주던 헌이 그 질문에만 입을 다물어 버린 것이다. 그의 그런 반응으로 인해 대수롭지 않던 질문이 매우 궁금한 질문이 되어 버린 유리였다.
유리의 질문을 들은 시안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곧 그녀의 얼굴로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듯하다, 이내 미소는 큰 웃음이 되어 그녀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한참이나 상체를 숙인 채 깔깔거리고 웃던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긴, 천하의 최헌이라도 이걸 본인 입으로 말하긴 쑥스러웠을 거야.”
“네? 그게 무슨…….”
시안의 반응으로 보아 그녀는 유리가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유리가 마침내 그 답을 들을 수 있단 기대에 긴장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봤고,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시안이 중요한 비밀을 이야기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3년 전에 말이야. A·bad·don이 문을 닫을 뻔한 적이 있었거든. 최헌 때문에…….”
“네?”
시안의 말에 유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헌 때문에 A·bad·don이 문을 닫을 뻔하다니, 방금 전 본인의 두 귀로 듣고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놀랍지? FM 최헌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A·bad·don이 문 닫을 위기까지 처하게 된 건지. 믿기 힘들 거야.”
시안도 놀라는 유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최헌이 A·bad·don으로 출근했을 때, 아주 난리가 났지. 이곳엔 없던 캐릭터였거든. 잘 웃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은데 칼같이 정중하고 매너 좋은 미남자. 부잣집 사모님들, 재벌의 영애들 할 것 없이 헌과의 하룻밤을 꿈꿨으니까.”
시안의 이야기에 유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거일 뿐이고,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그를 원했던 다른 여성들이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안은 왠지 모르게 즐거운 느낌이었다.
“사건은 헌이 A·bad·don에서 일한 지 5년 정도 흘렀을 때 일어났어. 평소에도 헌을 자주 찾아오던 단골 고객 세 명이서 싸움이 붙은 거야.”
“아…….”
“세 사람 모두 이름만 대면 세 살짜리 어린애들도 알 만큼 유명한 기업의 관계자였지. 가지신 분들의 싸움, 아주 치열하더라고. 평범한 여자들처럼 머리 쥐어뜯고 싸우는 게 아니었어. 주식으로 휘두르고, 사업적으로 골탕 먹이고. 3년 전에 유리는 어려서 몰랐겠지만, 당시 그 일은 뉴스에서도 떠들어 댈 만큼 치열한 전쟁 같았거든.”
“…….”
“물론 뉴스에서 A·bad·don이 거론된 건 아니었어. 그냥 기업 간의 이야기로만 다뤄졌지.”
유리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한 남자가 과거엔 엄청난 기업의 관계자들을 흔들 만큼 대단한 인기남이었다니. 아, 물론 그는 지금도 A·bad·don에서 에이스로 꼽히는 인물이긴 했지만, 지금은 성비에 있어서 남성이 여성보다 월등이 많은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