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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d‧don(아바돈)
파멸의 장소, 지옥, 나락(奈落)
외전
1화
번외1 : Paradise Lost
A‧bad‧don의 2층은 VIP 손님을 위한 공간으로 100% Room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손님과 직원의 일대일 접대만이 가능하지만, 1층은 일반 손님을 위한 공간으로 BAR와 HALL로 이루어진 공개된 접대 공간이었다.
A‧bad‧don은 매년 연말 1층의 HALL에서 VIP 손님들을 위한 파티를 개최하고 있었다. 초대장은 아주 은밀하게 암호화된 단어들로 손님들에게 전해진다. 암호를 푸는 사람만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님, 직원 예외 없이 모두 얼굴을 드러내고 나서야 하는 공개된 파티이니만큼, 암호를 해독하더라도 참석의 유무는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었다. 때문에 A‧bad‧don의 파티에는 보통 주변의 눈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젊은 층의 재벌 2세 혹은 3세들의 참석이 대부분이었다.
HALL에는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어느 정도 술이 오른 이들은 저마다 안면이 있는 이들과 짝을 이뤄 이야기꽃을 피우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며칠 전 병원에서 퇴원한 시안도 준혁의 부축을 받고 나와선 HALL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접대를 하거나, 술을 마실 수는 없었지만, A‧bad‧don의 파티에 A·bad·don의 꽃이 빠질 수는 없다며 고집을 피워 참석한 그녀였다.
준혁은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시안이 혼자 있을 수 있으니, 너도 가서 파티를 즐기라고 말했지만, 준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어 대고는 시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여러 번 말해 봤자, 제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안은 그를 떼어 내는 것을 포기하고, 파티나 즐기자는 마음으로 HALL을 둘러보았다.
HALL은 오랜만에 젊음이 가득 넘쳐 났다. 사람들의 얼굴은 다들 즐거워 보였고, 곳곳에선 흥에 겨워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들어 대는 이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나도 다치지만 않았더라면 저 틈에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운 마음을 갖고 고개를 돌리던 시안의 시야에 유독 눈에 띄는 테이블 하나가 들어왔다.
HALL의 중앙에 떡하니 위치한 그 테이블엔 헌과 유리, 그리고 데니과 우현이 앉아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그들의 테이블은 뭔가 어색하고 무거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들에게 말이나 한번 붙여 봐야겠다 다짐하고 있던 이들은 그 테이블이 내뿜는 묘한 기운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을 서성이다 돌아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안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렇게 파티를 망치고 앉아 있을 거라면 대체 왜 참석을 한 걸까. 저들은.
“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A·bad·don이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 ‘넌 나의 노예!’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HALL의 앞쪽에 마련된 작은 스테이지에 김 매니저가 올라섰다. 자신을 이번 파티의 사회자라고 소개한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억지로 박수를 유도하고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간 A·bad·don의 파티에서 ‘노예팅’이라는 이벤트가 진행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 매니저의 독단적인 계획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그를 제외한 다른 매니저들이 서로에게 무전으로 비상을 알리며 스테이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김 매니저는 사람들이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보던, 자신의 동료들이 그를 스테이지에서 끌어 내리려고 하던 상관하지 않고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각자 앉아 있는 의자 아래를 보면 작은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종이엔 숫자가 쓰여 있고, 제가 지금부터 다섯 개의 숫자를 호명하면 그 숫자에 해당하는 분이 노예가 되는 겁니다. 손님과 직원의 구분은 없습니다. 자, 다들 이해하셨죠? 똑똑한 분들이니 이 정도는 껌이지. 껌.”
가장 신이 난 것은 누구도 아닌 김 매니저 자신인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허무맹랑한 계획에 사람들이 하나둘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놀라운 것은 지금껏 파티가 무료한 듯 챙겨 온 의학 서적만 읽고 있던 데니가 처음으로 책을 덮고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 매니저를 말리기 위해 스테이지에 오르던 다른 매니저들이 파티에 참관했던 총매니저가 번쩍 손을 들자, 그 움직임을 멈췄다.
홀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은 혼나야 마땅하지만, 손님들이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하니, 더 두고 보자는 결정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총매니저의 지지에 힘을 입은 김 매니저가 총 다섯 개의 숫자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4번, 16번, 32번, 65번, 마지막으로 77번.”
뒤늦게 의자 아래에 붙은 종이를 떼어 숫자를 확인하던 유리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크게 놀라며 종이를 떨어뜨렸다.
하얀 종이에 검정색 글씨로 정확하게 7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2나 5, 6이나 9가 아닌 이상 거꾸로 보고 착각을 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리는 혹시나 잘못 본 건가 하고 제 눈을 의심할 수조차 없었다.
유리가 떨어뜨린 종이를 집어 든 데니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그가 헌을 향해 보란 듯이 종이를 펼쳐 들었고, 종이에 적힌 숫자를 확인한 헌의 눈가가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우현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유리를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넋이 나가 버린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서 오로지 즐거워 보이는 이는 데니뿐이었다.
이미 스테이지에는 4번, 16번, 32번, 65번의 종이를 가진 이들이 나가서 일렬로 서 있었고, 아직 오르지 않은 이는 77번의 종이를 가진 이 하나였다.
‘77번 종이 가지신 분 어서 올라오십시오.’라는 김 매니저의 재촉하는 멘트가 이어졌고, 유리가 곤란한 표정으로 무대 위의 그를 바라봤다.
그 순간 김 매니저와 유리의 눈이 마주쳤고,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불길한 예감이 유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웃음은 뭘까. 혹시 그는 77번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인가?
“77번 빨리 올라오세요!”
이번엔 좀 더 정확하게 김 매니저가 유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했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이렇게 딱 들어맞을 수 있는 것일까? 유리는 김 매니저가 놓은 덫에 완전히 걸려 버린 모양이었다.
어서 올라가라는 듯 데니가 유리의 팔을 잡아 일으켰고, 이젠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버린 유리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유리를 대신해서 노예를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손님과 직원이 어울려서 즐기는 파티라지만, 우현에게 노예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헌에게 부탁을 하기엔 왠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럼 77번 굼벵이 노예가 올라올 때까지,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놀라운 혜택을 말씀드려 볼까요? 첫 번째, 높은 가격으로 노예를 사는 분께는 그 노예와 A·bad·don 5층 Room을 이용할 수 있는 특혜를 드립니다. 두 번째, 다섯 명 중 가장 높은 가격으로 낙찰된 노예에게는 최고급 명품 시계를 선물로 드립니다. 짜잔!”
명품 시계라는 말에 유리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김 매니저의 손에 들려 있는 시계 케이스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그녀가 성큼성큼 스테이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 조금 전 곤란한 표정으로 난감해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리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김 매니저는 마지막으로 ‘넌 나의 노예’ 이벤트의 수익금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사용된다는 말을 하고 이벤트에 대한 설명을 끝냈다.
우연인지, 아니면 김 매니저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대 위에 올라온 노예들은 전부 A·bad·don의 직원들이었다. 그중에는 유리와 안면이 있는 이들이 몇 있어서 그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한 유리가 제일 끝에 자리를 잡고 섰다.
“워낙 유명한 A·bad·don의 직원들이니, 소개는 생략하고 비싸게 팔리려면 매력 발산을 해 보여야겠죠? 노예들의 장기자랑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먼저 4번!”
무대에는 4번만이 남아 있고, 다른 이들은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섰다. 스테이지 근처에 서 있던 안 매니저는 노예로 지명되어 올라간 유리가 걱정되어, 빠른 걸음으로 유리의 곁에 섰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안 매니저를 향해, 유리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빙긋이 웃어 보였다.
“곤란하면 제가 김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잘 해 볼까요?”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유리 양…….”
“다들 흥이 나 있는데, 그걸 깰 순 없잖아요.”
“근데 장기자랑을 해야 할 텐데 괜찮아요? 노래나 춤 이런 걸…….”
“아, 그래서 말인데요. 안 매니저님, MR 하나만 찾아 주실 수 있으세요?”
“음악이요?”
“네. 제가 유일하게 출 수 있는 곡이 딱 하나 있긴 있거든요. 같이 편의점 알바하던 친구에게 배운 건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찾아볼게요.”
“감사해요. 그리고 도와주시는 김에 하나 더…….”
“뭐죠?”
“조명을…….”
유리가 은밀할 작전을 말하듯 안 매니저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그녀의 말에 따라 끄덕끄덕 안 매니저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고, 잠시 후 두 사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앞 순서들의 차례는 빠르게 지나갔다. A·bad·don의 직원들은 외모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노래 실력과 춤 실력 역시 연예인 못지않은 끼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65번 노예로 뽑힌 지후는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며 감미로운 발라드로 관객들을 단번에 사로잡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는 지금까지 나온 노예들 중 가장 높은 가격으로 낙찰이 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유리는 긴장했다. 앞서 너무 좋은 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이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자, 이제 마지막 무대입니다. 뜸 들이지 말고 바로 만나 볼까요?”
A·bad·don의 신예, 주목받는 신입에게 거는 기대는 반으로 줄어 있었다. 앞의 무대가 너무나도 완벽했기에 그보다 더한 무대를 만들어 낼 거라고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척 보기에도 수줍음 많을 것같이 생긴 신입이 기껏해야 노래 한 소절 부르는 것이 전부이겠거니, 아마도 다들 그런 마음으로 유리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스테이지 위에서 유리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어수선한 객석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조금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녀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이 차츰 잦아들어 가자 유리가 천천히 눈을 떴고, 그 순간 조명이 모두 꺼지며 HALL 안은 어둠에 휩싸였다.
파멸의 장소, 지옥, 나락(奈落)
외전
1화
번외1 : Paradise Lost
A‧bad‧don의 2층은 VIP 손님을 위한 공간으로 100% Room으로만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손님과 직원의 일대일 접대만이 가능하지만, 1층은 일반 손님을 위한 공간으로 BAR와 HALL로 이루어진 공개된 접대 공간이었다.
A‧bad‧don은 매년 연말 1층의 HALL에서 VIP 손님들을 위한 파티를 개최하고 있었다. 초대장은 아주 은밀하게 암호화된 단어들로 손님들에게 전해진다. 암호를 푸는 사람만이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님, 직원 예외 없이 모두 얼굴을 드러내고 나서야 하는 공개된 파티이니만큼, 암호를 해독하더라도 참석의 유무는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었다. 때문에 A‧bad‧don의 파티에는 보통 주변의 눈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젊은 층의 재벌 2세 혹은 3세들의 참석이 대부분이었다.
HALL에는 신나는 음악이 흐르고, 어느 정도 술이 오른 이들은 저마다 안면이 있는 이들과 짝을 이뤄 이야기꽃을 피우며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며칠 전 병원에서 퇴원한 시안도 준혁의 부축을 받고 나와선 HALL의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접대를 하거나, 술을 마실 수는 없었지만, A‧bad‧don의 파티에 A·bad·don의 꽃이 빠질 수는 없다며 고집을 피워 참석한 그녀였다.
준혁은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의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시안이 혼자 있을 수 있으니, 너도 가서 파티를 즐기라고 말했지만, 준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어 대고는 시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여러 번 말해 봤자, 제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안은 그를 떼어 내는 것을 포기하고, 파티나 즐기자는 마음으로 HALL을 둘러보았다.
HALL은 오랜만에 젊음이 가득 넘쳐 났다. 사람들의 얼굴은 다들 즐거워 보였고, 곳곳에선 흥에 겨워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몸을 흔들어 대는 이들도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나도 다치지만 않았더라면 저 틈에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운 마음을 갖고 고개를 돌리던 시안의 시야에 유독 눈에 띄는 테이블 하나가 들어왔다.
HALL의 중앙에 떡하니 위치한 그 테이블엔 헌과 유리, 그리고 데니과 우현이 앉아 있었다. 즐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그들의 테이블은 뭔가 어색하고 무거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들에게 말이나 한번 붙여 봐야겠다 다짐하고 있던 이들은 그 테이블이 내뿜는 묘한 기운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을 서성이다 돌아설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시안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렇게 파티를 망치고 앉아 있을 거라면 대체 왜 참석을 한 걸까. 저들은.
“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A·bad·don이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 ‘넌 나의 노예!’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HALL의 앞쪽에 마련된 작은 스테이지에 김 매니저가 올라섰다. 자신을 이번 파티의 사회자라고 소개한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들에게 억지로 박수를 유도하고는 만족한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그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간 A·bad·don의 파티에서 ‘노예팅’이라는 이벤트가 진행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 매니저의 독단적인 계획이라는 것을 보여 주듯 그를 제외한 다른 매니저들이 서로에게 무전으로 비상을 알리며 스테이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김 매니저는 사람들이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보던, 자신의 동료들이 그를 스테이지에서 끌어 내리려고 하던 상관하지 않고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각자 앉아 있는 의자 아래를 보면 작은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종이엔 숫자가 쓰여 있고, 제가 지금부터 다섯 개의 숫자를 호명하면 그 숫자에 해당하는 분이 노예가 되는 겁니다. 손님과 직원의 구분은 없습니다. 자, 다들 이해하셨죠? 똑똑한 분들이니 이 정도는 껌이지. 껌.”
가장 신이 난 것은 누구도 아닌 김 매니저 자신인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허무맹랑한 계획에 사람들이 하나둘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놀라운 것은 지금껏 파티가 무료한 듯 챙겨 온 의학 서적만 읽고 있던 데니가 처음으로 책을 덮고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 매니저를 말리기 위해 스테이지에 오르던 다른 매니저들이 파티에 참관했던 총매니저가 번쩍 손을 들자, 그 움직임을 멈췄다.
홀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은 혼나야 마땅하지만, 손님들이 제법 흥미를 느끼는 듯하니, 더 두고 보자는 결정이 내려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총매니저의 지지에 힘을 입은 김 매니저가 총 다섯 개의 숫자를 호명하기 시작했다.
“4번, 16번, 32번, 65번, 마지막으로 77번.”
뒤늦게 의자 아래에 붙은 종이를 떼어 숫자를 확인하던 유리는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크게 놀라며 종이를 떨어뜨렸다.
하얀 종이에 검정색 글씨로 정확하게 77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2나 5, 6이나 9가 아닌 이상 거꾸로 보고 착각을 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리는 혹시나 잘못 본 건가 하고 제 눈을 의심할 수조차 없었다.
유리가 떨어뜨린 종이를 집어 든 데니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졌다. 그가 헌을 향해 보란 듯이 종이를 펼쳐 들었고, 종이에 적힌 숫자를 확인한 헌의 눈가가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우현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유리를 바라보니, 그녀는 이미 넋이 나가 버린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테이블에서 오로지 즐거워 보이는 이는 데니뿐이었다.
이미 스테이지에는 4번, 16번, 32번, 65번의 종이를 가진 이들이 나가서 일렬로 서 있었고, 아직 오르지 않은 이는 77번의 종이를 가진 이 하나였다.
‘77번 종이 가지신 분 어서 올라오십시오.’라는 김 매니저의 재촉하는 멘트가 이어졌고, 유리가 곤란한 표정으로 무대 위의 그를 바라봤다.
그 순간 김 매니저와 유리의 눈이 마주쳤고,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불길한 예감이 유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웃음은 뭘까. 혹시 그는 77번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인가?
“77번 빨리 올라오세요!”
이번엔 좀 더 정확하게 김 매니저가 유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했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이렇게 딱 들어맞을 수 있는 것일까? 유리는 김 매니저가 놓은 덫에 완전히 걸려 버린 모양이었다.
어서 올라가라는 듯 데니가 유리의 팔을 잡아 일으켰고, 이젠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버린 유리가 테이블에 앉은 다른 이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누구도 유리를 대신해서 노예를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손님과 직원이 어울려서 즐기는 파티라지만, 우현에게 노예를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헌에게 부탁을 하기엔 왠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럼 77번 굼벵이 노예가 올라올 때까지,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는 분들께 드리는 놀라운 혜택을 말씀드려 볼까요? 첫 번째, 높은 가격으로 노예를 사는 분께는 그 노예와 A·bad·don 5층 Room을 이용할 수 있는 특혜를 드립니다. 두 번째, 다섯 명 중 가장 높은 가격으로 낙찰된 노예에게는 최고급 명품 시계를 선물로 드립니다. 짜잔!”
명품 시계라는 말에 유리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김 매니저의 손에 들려 있는 시계 케이스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그녀가 성큼성큼 스테이지를 향해 걸어 나갔다. 조금 전 곤란한 표정으로 난감해하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리가 무대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김 매니저는 마지막으로 ‘넌 나의 노예’ 이벤트의 수익금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 사용된다는 말을 하고 이벤트에 대한 설명을 끝냈다.
우연인지, 아니면 김 매니저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대 위에 올라온 노예들은 전부 A·bad·don의 직원들이었다. 그중에는 유리와 안면이 있는 이들이 몇 있어서 그들에게 꾸벅꾸벅 인사를 한 유리가 제일 끝에 자리를 잡고 섰다.
“워낙 유명한 A·bad·don의 직원들이니, 소개는 생략하고 비싸게 팔리려면 매력 발산을 해 보여야겠죠? 노예들의 장기자랑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먼저 4번!”
무대에는 4번만이 남아 있고, 다른 이들은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섰다. 스테이지 근처에 서 있던 안 매니저는 노예로 지명되어 올라간 유리가 걱정되어, 빠른 걸음으로 유리의 곁에 섰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안 매니저를 향해, 유리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빙긋이 웃어 보였다.
“곤란하면 제가 김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잘 해 볼까요?”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유리 양…….”
“다들 흥이 나 있는데, 그걸 깰 순 없잖아요.”
“근데 장기자랑을 해야 할 텐데 괜찮아요? 노래나 춤 이런 걸…….”
“아, 그래서 말인데요. 안 매니저님, MR 하나만 찾아 주실 수 있으세요?”
“음악이요?”
“네. 제가 유일하게 출 수 있는 곡이 딱 하나 있긴 있거든요. 같이 편의점 알바하던 친구에게 배운 건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찾아볼게요.”
“감사해요. 그리고 도와주시는 김에 하나 더…….”
“뭐죠?”
“조명을…….”
유리가 은밀할 작전을 말하듯 안 매니저에게 바짝 다가가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그녀의 말에 따라 끄덕끄덕 안 매니저의 고개가 아래위로 움직였고, 잠시 후 두 사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앞 순서들의 차례는 빠르게 지나갔다. A·bad·don의 직원들은 외모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노래 실력과 춤 실력 역시 연예인 못지않은 끼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65번 노예로 뽑힌 지후는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며 감미로운 발라드로 관객들을 단번에 사로잡는 무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겠지만, 그는 지금까지 나온 노예들 중 가장 높은 가격으로 낙찰이 되는 성과를 이루었다.
유리는 긴장했다. 앞서 너무 좋은 무대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이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만 했다.
“자, 이제 마지막 무대입니다. 뜸 들이지 말고 바로 만나 볼까요?”
A·bad·don의 신예, 주목받는 신입에게 거는 기대는 반으로 줄어 있었다. 앞의 무대가 너무나도 완벽했기에 그보다 더한 무대를 만들어 낼 거라고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척 보기에도 수줍음 많을 것같이 생긴 신입이 기껏해야 노래 한 소절 부르는 것이 전부이겠거니, 아마도 다들 그런 마음으로 유리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스테이지 위에서 유리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어수선한 객석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조금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녀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이 차츰 잦아들어 가자 유리가 천천히 눈을 떴고, 그 순간 조명이 모두 꺼지며 HALL 안은 어둠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