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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갑작스러운 어둠에 HALL은 혼란스러워졌고, 잦아들었던 웅성거림이 배로 더해 갈 때쯤 희미한 핀 조명 하나가 스테이지 위로 떨어졌다. 다시 객석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는 유리에게로.
무대를 위한 연출이었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조용히 스테이지를 응시했다. 그리고 낮고 강하게 마지막 무대를 위한 전주가 시작되었다.
“설마 이 노래…….”
무대에서 내려온 김 매니저가 믿지 못하겠단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옆에 서 있던 안 매니저만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음악은 몇 년 전 섹시 컨셉으로 굉장한 이슈를 터뜨렸던 한 여가수의 노래였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해서, 짐작도 할 수 없었던 유리의 노래가 HALL 안을 가득 채웠다. 조곤조곤 말을 뱉어 내던 미성의 목소리는 음악과 만나자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매력을 발산했다.
그녀가 이렇게도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녀가 이렇게도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강하게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노래뿐이 아니었다. 노래에 맞춰 움직이는 몸놀림은 평소의 조용하고 수줍어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저런 눈빛을 가진 아이였던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던 아이였던가, 저런 손짓과 몸놀림으로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잡아끌 수도 있던 아이였던가.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이 마치 거짓말 같은 유리의 무대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거 내가 아는 베이비 맞아?”
툭! 데니의 손에 들려 있던 의학 서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책을 집으려 고개를 숙이려던 데니는 이내 그것을 다시 줍는 것을 포기하고 유리의 무대에 집중했다. 책을 줍는 잠깐의 순간조차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을 만큼 예쁘게도 허리를 튕겨 대고 있었다.
고작 스무 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 녀석이. 폭탄주 하나 제대로 말지 못해서 쩔쩔매던 그 순진한 신입이 말이다.
곧은 쇄골과 하얀 어깨를 드러내고, 고개를 한껏 젖힌 유리가 뇌쇄적인 표정으로 객석을 바라봤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입술이 붉고 촉촉하게 빛나며 야릇한 미소를 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마른침을 삼킨 듯, 꿀꺽― 하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다들 넋을 놓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여신이라도 강림한 듯 유리를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만 헌만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이며, 굳어진 표정으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대박! 시안 선배……. 앞으로 A·bad·don의 꽃 자리는 물려주셔야겠는데요?”
준혁의 말에 시안은 머리를 감싸 쥔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저 멀리 보이는 이는 그동안 알고 있던 신입 꼬맹이 김유리가 아니었다. 제대로 누구 하나 꼬셔 보려고 작정 하고 나온 선수가 아니고서야 저런 노래를 저런 표정과 몸짓으로 부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의 무대가 객석에 어떤 여파를 가지고 올지, 스스로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녀가 모르고 저런 무대를 선보이고 있는 것이라면, 그녀는 정말 모르고 사람도 죽일 수 있을 만큼 무서운 존재임이 분명했다.
최헌, 너 신입 교육 한번 제대로 했구나.
무대가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립한 사람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구석구석에선 앵콜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무대 위에서 섹시한 표정과 몸짓으로 노래를 하던 유리는 어느새 수줍은 신입 직원이 되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환호하는 객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을 진행한 김 매니저조차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무대였던 듯, 이벤트의 진행을 잊은 채 유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이가 옆구리를 찔러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영 자신이 사회자로 자처하고 나섰던 일을 기억해 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와! 진짜 입이 떡 벌어지는 춤과 노래였습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는 게 믿어지십니까? 요염합니다. 요염해!”
유리가 쭈뼛거리며 무대 뒤로 섰다. 먼저 무대를 마친 네 명이 모두 스테이지 위로 올라왔고, 유리의 옆에 선 지후가 수고했다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유리 역시 그의 무대가 좋았다는 인사를 하며 웃어 보였고, 어쩐지 다정해 보이는 두 사람에게로 질투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것이 지후를 향한 유리의 미소 때문인지, 유리의 등을 다독이는 지후의 손길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자! 곧바로 경매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번 노예는 과감하게 백만 원부터 시작합니다.”
순간 유리의 입에서 헉하는 숨이 쏟아졌다. 번쩍 고개를 들고 김 매니저를 바라보는 유리의 표정이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런 과감한 시도를 왜 꼭 자신의 차례에 한단 말인가. 조금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유리에게 나만 믿으라는 듯 윙크를 해 보인 김 매니저가 계속해서 이벤트를 진행했다.
“자, 백만 원 없으십니까?”
그의 멘트에 저 구석에서 ‘이백만 원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유리를 향해 ‘그거 봐. 나만 믿으랬지?’ 하는 김 매니저의 자신만만한 눈빛까지.
이백만 원을 시작으로 금액은 점점 늘어났다. 이백오십만 원, 삼백만 원, 사백만 원. 숫자가 높아질수록 유리의 가슴은 시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천만 원.”
딸랑 하고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서 천만 원을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와 김 매니저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저 앞에서 작은 종을 들고 천만 원을 외친 이는 데니 류 선생이 분명했다.
누군가 마치 HALL을 들었다 놓은 것처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천하의 데니 류 선생이 노예팅에 참여하다니, 그것도 신입을 낙찰받기 위해 천만 원이나 불러 가면서.
이번 A·bad·don의 파티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흥미진진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전에 없던 노예팅 이벤트도 그러했고, A·bad·don 에이스의 끝내주는 피아노 연주 실력과 노래, 그리고 신입의 혼을 쏙 빼놓는 춤사위를 본 것으로도 모라자서 데니 류 선생의 적극적인 참여까지 있으니 말이다.
“처, 천만 원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진행을 하는 김 매니저까지 말을 더듬는 걸 보면, 저 데니 류 선생이 대단하긴 대단한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천오백.”
데니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종이 다른 이의 손으로 옮겨지고 다시 한번 딸랑 하는 소리가 울렸다. 데니가 불렀던 금액에서 오백이나 더한 천오백만 원이었다. 그리고 그 금액을 부른 이는 바로 S그룹의 막내아들, 서우현 이사였다.
“이천.”
데니의 입술이 묘하게 말려 올라가며, 우현이 부른 숫자에 오백을 더했다. 질 수 없다는 듯이 우현 역시 그의 말을 받아 오백을 더해 순식간에 유리의 낙찰가를 이천오백만 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천오백도 적다는 듯이 김 매니저의 멘트가 없이도 알아서 배틀을 이어 나갔다.
“삼천.”
“삼천오백.”
“오천.”
점점 커지는 숫자에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벌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댔다. 커지는 금액도 금액이지만, 그 상황이야말로 정말 놀라웠다.
헌의 단골로 알려진 데니 류와 서우현이 떡하니 헌을 같은 테이블에 앉혀 두고 신입 직원을 차지하기 위한 배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담당하는 헌은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서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은가.
이거 혹시 네 사람이 짜고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유리가 멍하니 서 있는 김 매니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좀 말려 보라는 듯. 그녀가 원했던 것은 이런 그림이 아니었다.
그저 다섯 중에 근소한 차이로 높은 가격을 받아 시계만 손에 넣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뒤에 있을 낙찰자와 5층 Room으로 가야 한다던가 하는 일은 안중에 없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 저 두 사람이 그녀가 다른 이와 5층 Room에 가는 것을 막아 주기 위해 유리를 도와주려는 것이라면, 이쯤에서 배틀을 멈춰 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니, 지금 멈추는 것도 한참 늦긴 했다. 금액이 커져도 너무 커져 버렸으니까. 오천만 원이라니.
“자, 오천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좀 말려 보라는 유리의 눈빛은 받지 못한 건지, 저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김 매니저는 배틀을 말릴 생각은 하지 않고 경매를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러나 누구도 쉽게 오천의 다음을 부르지 못했다. 무엇보다 S그룹 서 이사와 닥터 류의 배틀에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끼어들 용자가 그리 쉽게 나타날 리가 없었다.
“자, 그럼 카운트하겠습니다. 5, 4, 3…….”
드르륵!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아, 저 신입은 오늘 밤 데니 류 선생의 차지가 되겠구나.’라고. 그런데 그 생각을 비웃어 주기라도 하듯, 김 매니저의 카운트 소리를 막으며 드르륵 하고 의자 밀리는 소리가 HALL을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고, 지금까지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던 헌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서 있었다. 그의 감정 없는 눈동자는 스테이지 위의 유리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모두들 숨을 죽이고 헌을 바라봤다.
저벅저벅 그의 걸음이 천천히 스테이지를 향해 나아갔다.
높지 않은 무대 앞에 서서 헌이 김 매니저를 향해 손을 까딱여 보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헌에게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고, 이내 헌이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을 뱉어 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한 이들이 귀를 쫑긋 세워 봤지만, 그의 목소리는 너무 낮고 작아서 김 매니저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였다.
말을 마친 헌이 이내 김 매니저에게서 떨어져 유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얼떨떨한 표정의 유리가 김 매니저를 바라봤지만, 그는 조금 전 헌에게 들은 말이 심히 충격적이었던 듯 넋이 나간 상태였다. 망설이고 있는 유리를 향해 헌이 재촉하듯 손을 조금 더 뻗었고, 마침내 유리가 헌의 손을 잡았다.
손에 힘주어 유리를 무대 아래로 끌어 내린 헌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유유히 HALL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헌을 말릴 수가 없었다. 유리를 데리고 나가는 그의 어깨가 너무도 당당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