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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한참을 멍하게 넋을 놓고 있던, 김 매니저가 느릿하게 마이크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나, 낙찰!”
아직도 그의 귓가엔 헌의 낮고 작은 목소리가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월급.’

헌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혹자는 ‘내 연봉보다 많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외제차 한 대 가격.’이라고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는 그의 한 달 월급을 낙찰가로 내놓은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끌려온 유리가 아프게 손목을 쥐고 있는 헌의 손을 밀어 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은 헌에게 낙찰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계획했던 것엔 조금 차질이 생기게 되는데 이를 어쩌지, 라고 고민하던 유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헌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잠시만, 잠깐 다녀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유리가 다시 HALL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4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릴 때쯤 유리가 작은 상자 하나를 들고 허겁지겁 헌의 앞에 섰다.
“이거…….”
유리가 내민 상자를 받아 든 헌이 뚜껑을 열자, 은색의 시계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김 매니저가 최고가로 낙찰되는 노예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보여 주었던 바로 그 시계였다.
“이거 드리고 싶었어요.”
“내게?”
“네.”
상자에서 시계를 꺼낸 유리가 헌의 손목에 그것을 채워 주었다. 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심플한 디자인의 시계였다.
“네 상품인데, 이걸 왜…….”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신의 소중한 시계에 비하면 의미 없는 것이겠지만, 제가 당신의 것을 맡고 있는 동안에 이걸 대신해서 사용해 주세요.”
“…….”
“소중한 시계를 망가뜨려 놓고,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죄송해요.”
헌의 손가락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유리의 손목을 다시 잡아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받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네?”
“줄 수 있겠나?”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라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헌의 입술이 유리의 입술로 겹쳐졌다. 당황하는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그의 혀가 더듬더듬 유리의 것을 찾아 휘감아 왔다. 목구멍으로 삼켜지는 호흡엔 진득한 알코올 향이 담겨 있었다. 조금 더 깊게 유리의 입 안을 헤집어 놓으며 헌이 더듬더듬 엘리베이터의 4층의 버튼을 눌렀다.
그들에겐 5층의 화려한 Room이 허락되었지만, 그는 그곳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조금 더 그들과 어울리는 장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처지와 너무도 잘 맞는, 두 사람의 호흡과 향기로 가득한 곳.
“내가 너를 샀다. 오늘 밤은 넌 나의 노예,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야 한다. 알고 있겠지?”
탐하던 입술을 뗀 헌의 낮은 목소리에 유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떨어졌던 헌의 입술이 다시 유리의 입술을 삼키며 다가왔다. 다시 한번 그의 혀가 유리의 혀를 찾아 말캉하게 휘감아 오려는 찰나,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4층에 도착했다. 무엇이든 최고에 가까운 A·bad·don은 엘리베이터 속도마저도 경이로울 정도로 빨랐다.
아쉬움을 남기고 헌의 입술이 유리에게서 떨어졌고, 다시 유리의 손목을 잡은 헌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가르며 헌이 말했다.
“그 춤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지.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407호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처지와 너무도 잘 맞는, 두 사람의 호흡과 향기로 가득한 곳을 향해서.
딸깍.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유리는 정신없이 제 입술을 탐하는 헌의 입술을 받아 내느라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진한 알코올 향을 진득하게 묻히고 입 안으로 들어온 헌의 혀는 애타게 유리의 입 안을 헤매고 있었다. 채워도, 채워도 목마른 듯 그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유리의 가쁜 호흡과 옅은 신음을 삼켜 냈다.
“자…… 잠시만요.”
견디다 못한 유리가 힘껏 헌의 가슴을 밀어 내고 재빠르게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를 다시 잡으려는 헌의 팔을 가볍게 벗어난 그녀가 방의 중앙에 위치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헌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안 매니저님께서 오실 거예요.”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리하며 유리가 이쪽으로 오라는 듯 맞은편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지만, 헌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유리가 무대에게 춤을 추는 내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많은 술을 마셔 버린 모양이었다.
예쁘게 손짓을 할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허리를 튕겨 댈 때마다, 고운 목소리가 은밀한 노래 가사를 속삭일 때마다 타는 속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을 견디려 더 뜨거운 독한 술을 찾아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도 순식간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홀려 버릴, 예쁘고 아슬아슬한 목소리와 몸짓은 저 혼자만의 것이고 싶었다.
그런데 4층에 도착해 격렬한 키스를 나누다 말고 제 품에서 떨어져 나간 유리는 다시 평소의 수줍음 많은 그녀로 돌아가 버린 것 같았다.
테이블에 앉아서 이리로 오라 손짓하는 유리에게선 불과 몇 분 전 무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홀리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무언가에 단단히 홀려 버린 느낌이었다.
똑똑.
멍하니 서 있는 헌의 등 뒤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는 이는 유리의 말대로 안 매니저였다. 그가 두 사람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들고 온 것을 테이블 위에 세팅할 때까지도 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유리에게로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안 매니저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그녀에게로.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안 매니저가 방을 빠져나가고 헌이 천천히 유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테이블에는 양주와 맥주 몇 병 그리고 오렌지 주스와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헌이 궁금증을 담은 눈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이게 다 무엇이냐.’라고 묻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의 궁금증을 읽은 것인지 유리가 다시 한번 그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한 번도 편하게 같이 술 마셔 본 적 없는 것 같아서요.”
유리의 말을 들은 헌이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맞은편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의자를 당겨 그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유리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그때 만들어 주셨던 술, 또 만들어 주실 수 있으세요?”
유리를 빤히 바라보며 헌은 또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방으로 들어오며 말을 잃은 사람처럼 오로지 그윽하고 진한 눈빛으로 유리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싫으시면 그냥 제가…….’라며 헌의 앞에 있던 술잔을 다시 가져가는 유리의 손을 그가 붙잡았다. 그는 유리의 손에 들린 잔을 빼앗아 말없이 폭탄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잔에 오렌지 주스를 넣고 그 위에 양주가 담긴 잔을 겹쳐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큰 잔에 넣은 뒤 맥주를 채우면 일명 ‘쓰지 않은 술’이 완성되었다. 그 작업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유리가 헌이 내미는 술잔을 망설임 없이 받아 들었다.
꼴깍꼴깍― 소리를 내며 유리의 목으로 술이 흘러 들어갔다. 아래 잔에 담긴 오렌지 주스까지 모두 흘러 들어가고 난 후에야 유리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고 헌을 바라봤다. 폭탄주의 맛이 마음에 든 듯, 그녀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잔 더 주세요.”
“…….”
“더 마시고 싶어요.”
“또 잠이 들어 버리려고?”
“아니에요! 그땐 술이 처음이었고, 지금은 그래도 좀 늘었어요. 두 잔은 괜찮아요.”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헌에게 유리는 몇 번이고, ‘정말이에요. 진짜라니까요.’라며 억울한 듯 말을 뱉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헌이 못이기는 척 두 번째 폭탄주를 만들어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번에도 단숨에 그가 건넨 폭탄주를 들이켠 유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헌을 빤히 바라봤다. 연거푸 두 잔의 폭탄주를 원샷 한 그녀의 두 볼이 발그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발그레함이 취기보다는 부끄러움에 더 가까운 듯 보였다.
“저도 만들어 드릴게요.”
빈 스트레이트 잔을 제 앞으로 가져온 유리가 양주 병을 집어 들었다. ‘이게 먼저다.’라며 헌이 오렌지 주스 병을 내밀었지만, 유리는 그냥 보고만 있으라는 듯 헌을 향해 손바닥을 한 번 내보이고는 스트레이트 잔에 양주를 반쯤 채워 넣었다.
뭔가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내쉰 유리가 눈을 질끈 감고 반쯤 채워 넣은 양주를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유리의 의중을 모르는 헌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입 안에 양주를 머금은 유리가 술의 쓴맛에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나 빤히 바라보고 있는 헌을 향해 상체를 숙인 유리가 그의 허벅지를 두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헌의 두 눈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고 양주를 머금은 그녀의 입술이 헌의 입술 위로 닿았다. 유리의 입 안에 있던 양주가 스르륵 헌의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많지 않은 양의 양주를 헌에게 전부 넘겨주고는 유리가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고 그를 바라봤다.
“이건 제가 개발한 쓰지 않은 술이에요.”
수줍게 말을 뱉은 유리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헌에게서 떨어지려던 찰나였다. 멀어지는 유리의 턱을 아프지 않게 쥔 헌이 그대로 다시 자신의 입술을 유리의 입술 위로 겹쳐 놓았다. 양주 향을 가득 머금은 헌의 혀가 유리의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