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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서 결혼해요
1화
1. 남편은 무슨


채윤은 서둘러 지하철 역 계단을 올랐다. 바람에서 풋풋한 습기가 느껴졌다. 벌써 하늘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아직 오후 여덟 시. 캄캄한 도로 위에 별처럼 반짝이는 것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닿은 빗방울들.
이슬비가 안개처럼 머리카락으로 스며들었다.
“웬 비야?”
채윤은 붐비는 사람들 틈을 비집으며 출구를 빠져나왔다. 가방 안에 우산을 챙겨 놨지만, 백화점 쇼핑백 여덟 개가 양손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빗방울이 굵지 않았다. 집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5분 거리였다.
‘집에 토끼 같은 남편이라도 숨겨 놨어?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면서 일찍 들어가면 뭐 해?’
비싼 저녁을 사 주겠다는 상사의 유혹을 물리칠 때마다 정해진 대사를 들어야 하는 대한민국 흔한 솔로, 독거 직장인, 전채윤 26세. 남편이 아니라 남자 친구도 없는 자유의 몸이었지만, 퇴근하면 한사코 집으로 돌아가는 집순이였다. 재택으로 부업을 하고 있기도 했고, 혼자인 집이 편했기 때문이다.
토끼 같은 남편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 방해 없이 편히 쉴 때가 최고지.
채윤은 아늑한 보금자리를 생각하며 지친 다리를 채찍질했다. 백화점에 들러야 할 줄 알았더라면 높은 구두를 신지 않았을 텐데. 일이 바쁘다고 명절 날짜도 잊고 지냈다. 일주일 전쯤부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수없이 주고받았으면서.
오늘 오전 사무실에서 고향 잘 다녀오시라는 후임의 인사를 듣고서야 부랴부랴 고속버스 예매 사이트를 뒤졌다. 내일 꼭두새벽에 출발하는 차편 구석 좌석을 겨우 예매했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백화점 문이 닫힐세라 달려가 명절 선물을 사들였다. 집안 어른 여덟 명분을 위한 선물을 고르고 나르는 게 채윤의 연례 행사였다.
“아이고…….”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뺨은 시린 공기에 얼어붙고 발바닥은 불에 달군 자갈 위를 밟는 듯 화끈거렸다.
선물을 미리 주문해서 택배로 보내면 편할 걸, 매번 이렇게 삽질이다. 채윤도 슬슬 평범하게 돈 봉투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에게 돈 봉투 받기를 마다하는 고상한 할머니는 예외로 하고서라도.
삐리리리, 휴대폰 벨소리까지 울려 대 정신을 사납게 했다. 채윤은 벨소리를 무시하고 길을 재촉했다. 이 시간에 전화라면 어머니나 둘째 이모밖에 없었다. 엊그제 통화하다 끊겼던 이모가 생각났다.
그 밑도 끝도 없던 결혼 얘기.

― 결혼 축하해! 청첩장은 언제 돌리니?
“이모, 저 채윤인데요. 전화 잘못 거셨나 봐요.”
― 어머, 얘 시치미는? 지금 총각 사진까지 보고 깜짝 놀라서 전화하는 거야! 기가 막히게 잘생겼더라! 우리 사위 기죽일까 봐 내가 승혜한테는 보여 주지도 못했잖니.
“……뭐가요? 무슨 사진?”
결혼이니 총각 사진이니, 금시초문이었다. 둘째 이모의 허풍을 하루 이틀 들어 온 채윤이 아니었다.
“아, 알겠다. 이모, 지금 승혜 언니 결혼했다고 저 독촉하시려는 거죠. 명절까지 며칠 남았으니까 기다렸다가 해 줘요.”
―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너를 독촉하니? 네 엄마가 말 안 하든? 총각 한국 들어오는 김에 자리 마련한다더니, 네 엄마는 하여간 꼭 이상한 데서 늑장을 부리더라.
이모는 짐짓 시치미를 떼면서도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나도 잘은 몰라. 강 배우님네 손자랬나, 아들이랬나 있다네? 양가 합의 다 됐다고 결혼식장만 알아보면 된다던 걸. 나 궁금해 죽겠다, 얘. 너 집에는 언제 오니?
채윤은 그제야 심각성을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스물여섯. 강제로 맞선에 떠밀릴 나이는 결코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집에서 시집가라, 연애해라 잔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가끔 채윤에게 남자 친구 없냐고 떠보곤, 연애가 필수는 아니니 솔로 생활을 마음껏 즐기라는 덕담까지 했으니까.
“갑자기 웬 결혼 얘기? 나 전혀 못 들었는데…….”
문득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본가에서 예고도 없이 저질렀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채윤의 명의로 각종 보험 가입 정도는 예삿일이었다.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여배우와 손녀들’이라는 특집에 캐스팅되었다가 인터뷰만 짧게 내보내는 걸로 무마한 적도 있었다. 학기 중 연락 없이 고향에 내려갔던 때는 어땠던가. 제게 말도 없이 이사해 텅 빈 건물 앞에 앉아 가족 누군가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처량하게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결혼이라니.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더군다나 남자는 여자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애물단지라는 게 채윤의 평소 지론이었다.
배우 시절부터 바람둥이 난봉꾼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할머니 속을 썩인 할아버지. 무뚝뚝한 데다 게으르기까지 해서 바깥일도 집안일도 형편없었던 아버지. 그밖에 각종 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행한 사례들…….
‘남자가 조신하니 부인에게 꽃신 만들어 주고 연애편지 쓰던 시대는 한 오백 년 전에 갔어. 우리 세대에는 희망이 없단다.’
승혜 언니도 사춘기 시절부터 곧잘 그런 말을 했다. 그 집안 남자들이 부인에게 꽃신 만들어 주고 연애편지 써 주는 장본인들이었음에도.
그러니 협조성 없는 집안 남자들을 보고 자란 채윤은 오죽하겠는가. 그 와중에 본인이 좋아하는 일로 바쁜 매일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남 신경 쓸 필요 없이 혼자 쉬는 시간은 꿀 같았다. 까딱하면 애물단지로 전락할지 모를 타인을 인생에 끌어들이는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 얘, 채윤아? 너 결혼 얘기라고 부담 가질 거 없다? 서로 아는 집안인데 어차피 오며 가며 친하게 지내면 좋지 뭘 그래.
“이거 새해부터 시집살이 체험하라는 거 아녜요?”
― 아냐, 얘는! 그러고 보니 내가 인제 기억이 났는데 말야. 총각이 연휴 동안 너랑 제주도 별장에 가 있겠다고 그랬다지? 절대 너 데려가서 시집살이 시킬 남자는 아닌 것 같더라.
“미쳤네. 미친놈 아니야?”
채윤은 치를 떨었다.
“누가 지랑 둘이 여행을 간대? 내 의견은 들어 보지도 않고,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어요? 그리고 저 외국물 먹은 사람 싫어요. 성향이 안 맞을 것 같아. 저 요즘 한국 민속학 시리즈를 열성적으로 작업 중인 거 아시죠?”
민속학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채윤은 첫 남자 친구가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유학 3개월 만에 마약과 여자에 눈떠 딴 사람이 되었던 그. 그것이 채윤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가 되었다.
덕분에 선입견이 차곡차곡 쌓였다. 가정에 충실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들만 인생에 엮였다. 그런 우연이 겹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채윤은 화목한 이모네를 보며 결혼에 대한 희망을 가져 볼 수도 있었으리라.
“저 유학파 싫어요. 취향 아니야. 안 만나. 당장 엄마한테 전화해서 거절해야지.”
― 오해야! 사실 그 총각이 외국물을 먹었다고 하기도 좀 그렇다니까? 막 제대해서 복학 시기 조정하느라고 잠깐 어학연수 갔다 왔다나 봐. 집하고 학교밖에 모르던 얌전한 총각이라더라. 어른들한테도 싹싹하고 얼마나 참한데?
“……제대? 복학? 나더러 몇 살짜리 애기를 데리고 살라고?”
― 아유, 애기는 무슨! 군대를 살짝 늦게 갔다 와서 그렇지, 너랑 동갑이거나 기껏해야 한 살 어릴걸, 근데 요즘도 연상 연하 따지는 사람이 있니? 촌스럽게.
자세히는 모른다더니 이모의 말은 상세해도 너무 상세했다. 억지 해명 탓인지 앞뒤가 전부 모순이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대체 그 남자는 뭐 하는 남자인가 두려워지게 했다.
이모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안 그래, 아니야, 얘! 오해야!’ 하고 일관하다 잘 안 들린다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여기까지가 엊그제의 통화.

채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양가 합의가 끝났다는 말이 사실일 거다. 집안일에 비협조적이고 자유분방한 둘째 이모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온다는 건 이미 온 식구가 한패가 되어 뜻을 맞춰 놓았다는 방증. 필시 조만간 막무가내로 상견례가 치러질 것이다.
“아, 무거워…….”
축축 처지는 쇼핑백 다발을 추슬러 들었다. 고향집에 나타날지도 모를 남자를 상상하면 한숨만 나왔다. 결혼이야 안 한다고 우기면 그만이겠지만, 새해부터 트라우마를 되살려 낼 듯한 남자와 맞선 자리를 가져야 한다니 우울했다.
당장 내일일지도 모른다. 화끈한 추진력으로는 어디 내놔도 지지 않을 집안 아닌가.
채윤은 무거운 마음으로 터덜터덜 빌라 앞에 도착했다. 제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때였다.
“채윤 씨?”
처음 보는 남자가 집 앞에서 저를 맞이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채윤의 귀에 엊그제 들었던 이모의 음성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기가 막히게 잘생겼더라!’
과연, 둘째 이모 사위의 기를 일백 번 고쳐 죽이고도 남을 미모였다.
“왜 이제 들어옵니까? 저 되게 오래 기다렸어요.”
그는 마치 매일 여기서 채윤을 기다리고 맞이하는 사이라도 되는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채윤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175센티미터가 넘는 채윤보다도 10센티미터쯤 커 보이는 압도적인 기럭지. 서글서글하게 단정한 이목구비와 고운 피부는 어른들 입에서 참하게 생겼다는 칭찬 좀 들을 듯싶었다. 하지만 그 속은?
체격 좋은 몸에 넥타이까지 갖춘 정장을 하고 있으니 학생치고 성숙하게 보였지만, 사회인으로서 기본예절도 모르는 듯 불쑥 다가오는 애 같은 태도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날도 어두운데 일찍 다니시지…….”
초면인데도 불평이 이어졌다. 연인에게 하듯 은근한 투정 섞인 달콤한 저음의 목소리. 눈빛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향하는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뜨끈뜨끈.
조신하면서도 싹싹한 남자라더니.
“그거 제가 들겠습니다. 설 선물인가요?”
“누구신데 그러시죠?”
채윤은 그와 손이 맞닿을 뻔하자 얼굴을 굳히며 뒤로 물러섰다. 목덜미까지 화끈거렸다. 세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 정도로 취향을 직격한 그의 외모 탓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방어가 허물어질 뻔한 것을 본능적인 경계심이 막아 냈다.
“아, 저는…….”
그가 힐끔 눈치를 보곤 뒤늦게 예의 차리며 허리를 숙였다.
“채윤 씨 남편입니다. 한준서입니다.”
슬그머니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
……경찰에 신고할까? 채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남편은 무슨 남편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남편이 ‘될 예정’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물론 그렇게 될 일도 없겠지만.
“채윤 씨, 그 짐들은 지금 차에 실어 두죠. 혹시 꺼내야 하는 물건이 있으면 그것만 빼시고…….”
“저기, 죄송하지만.”
채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잘랐다.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네요. 부모님께서 저하고 상의도 없이 일을 진행하신 모양인데, 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제대로 듣지도 못했어요. 오해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예……?”
“나중에 어른들을 통해 다시 말씀 전하겠습니다. 전 그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하지만, 채윤 씨는…….”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거절을 들은 듯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뽀얗고 앳돼 보이는 볼이 빨개지더니 눈가까지 촉촉해졌다. 실망을 넘어 절망의 빛이 그의 물기 어린 눈동자에 어른거렸다.
채윤도 그의 반응 때문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잠깐 흠칫했다가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빌라 계단을 뛰어오르듯 잽싸게 도망쳤다. 두 팔에 가득한 짐의 무게도, 조금 전까지 다리가 아팠던 것도 잊어버리고서.

“……뭐야. 진짜 깜짝 놀랐네.”
채윤은 지친 몸을 거실 소파 위로 내던졌다.
심장이 뛰쳐나올 듯 펄떡거렸다. 3층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온 탓에 바싹 긴장해 있던 온몸의 근육이 풀리며 팔다리가 욱신욱신 쑤셨다.
한준서. 다짜고짜 ‘제가 채윤 씨 남편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그런 남자. 이모 말마따나 깜짝 놀라게 하는 사람이었다. 상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어떤 면에서는 훨씬 보통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훨씬 범상치 않았다.
어디서 그런 물건을 수배했을까? 무슨 배우네 손자라니 할머니 쪽 인연일 것이다. 오로지 인물만으로 남편을 골랐다던 할머니 솜씨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채윤 씨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에 세상 무너지는 걸 본 듯했던 그의 표정이 아른거렸다.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사실 외모와 분위기만으로는 거절하기 아쉬울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채윤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마구 흔들고선 휴대폰을 집었다.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발신인은 전부 어머니. 꼭 이렇게 닥쳐서 전화를 하니까 아까 같은 불상사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채윤은 엉겁결에 발신 번호도 확인하지 못한 채로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 한준서입니다, 채윤 씨.
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 저,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어른들께서 채윤 씨를 데리고 내려오라고 하시기에 그 생각만 했습니다. 전화를 먼저 드려 봤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냥 오게 됐어요.
당연히 채윤의 집에서 부추기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줬겠지만, 그가 멋대로 전화까지 걸어온 게 달갑지 않아서 채윤은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네. 대충 이해했어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일을 보고 와서 너무 피곤하네요. 나중에 어른들을 통해서…….”
―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십니까?
채윤은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밝혔는데도 이유를 따져 묻다니, 혹시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죽겠는데 언쟁을 벌이려니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제가 그런 판단까지 할 입장이 아니라서요. 어쨌든 저는 준서 씨와 만날 생각도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어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채윤이 이만 끊겠다고 말하려던 때, 준서의 작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제가 그 정도로 별로인가요?
“네?”
― 제가…….
그가 말을 흐렸다. 뒤이은 정적 속에서 채윤은 잔뜩 인상 쓴 얼굴로 귀를 쫑긋 세웠다. 작게 숨을 마시는 소리 뒤에 준서의 말이 이어졌다.
― 제가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는 채윤 씨도 우리 일에 대해 충분히, 긍정적이신 줄 알았어요.
애써 담담하게 전하려는 듯, 띄엄띄엄 억누른 목소리.
― 쉬셔야 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돌아갈게요. 잘 있어요, 채윤 씨.
“……네. 안녕히 가세요.”
어색한 작별 인사 후 전화가 끊겼다. 채윤은 머뭇거리다가 휴대폰을 소파 구석에 던져 놓았다. 쿡쿡 쑤시는 다리를 쿠션 위에 올려 두고 눈을 감았다. 조용한 빗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실내 공기는 어느새 훈훈하게 데워졌다.
어디 보자. 짐을 싸 놔야 하는데…….
‘채윤 씨도 우리 일에 대해 충분히, 긍정적이신 줄 알았어요.’
그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채윤의 의사를 지어내서 그를 속였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일방적으로 쏘아붙였다. 어쩐지 과하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 게 이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