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영식은 일어나서 딸에게 등을 보인 채 물을 한 잔 마셨다. 쓰다. 맹물 같은 남자라고 아내는 종종 놀렸다. 그 말을 영식은 좋아했다. 맹물은 심심하지만 싫증이 안 난다. 평생 사랑받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건넨 말은 모두 좋았다. 자신을 닮았다는 맹물이 이제는 쓰다. 어쩌면 이것이 껍질을 벗겨 낸 삶의 속살 맛인 것 같다. 다행히 아내와의 인연은 남아 있다. 아내는 이제 자신이 태어난 집 앞에 묻혀 있다. 그녀와 함께한 유년 시절의 기억과 그녀의 육신이 존재하는 고택에서 영식은 남은 인생을 누릴 수 있다. ‘그 사람’은 단지 아내의 가슴 한 조각을 가졌을 뿐이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의 몫은 풍족하다. 그만하면 웃을 수 있지 않은가.
영식은 표정을 다스린 뒤에 딸에게 돌아섰다. 마주한 눈맵시에 역시 ‘그 사람’이 보인다. 딸이 소리친다.
“약속하셨으니, 이젠 가게를 처분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래, 네가 이겼다. 근데 일단 졸업은 해야겠지?”
***
턱걸이 학점으로 겨우 졸업장을 받아 냈다. 대부분의 시간을 조리 현장에서 보냈던 정아는 영식의 당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양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학점이 형편없는 대신에 세 가지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냈다.
영식은 가게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한시적이라면서 조용우 셰프가 가게를 맡았다.
“네 고모할머니가 걷지를 못 하신다.”
보살핌을 핑계로 아버지는 섬으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숙제를 다시 내준다.
“반드시 여길 취직해라.”
“꼭 그럴 이유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식품 회사잖니.”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거기서 기어이 성공해라. 스스로 당당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날 불러라. 그 전엔 절대로 섬에 오지 마라.”
‘기어이’와 ‘절대로’라는 말이 퍽이나 부당하게 들린다.
“네가 선택한 길이잖니. 기왕 선택했으면 최고가 되라 그거다.”
최고가 된 다음에야 ‘섬과 섬’의 주인 자격을 준다고 한다.
“직장이 멀면 집도 따로 얻어라. 통장에 방 얻을 돈을 넣어 두었다.”
“왜 집까지?”
“노총각이 도맡아 하는 집에 네가 사는 것도 그렇잖니.”
그렇게 아버지는 수원을 떠났다. 당신을 끝내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던 어머니의 무덤 곁으로.
***
제이푸드의 신입 조리사 공채는 지역별로 치러진다. 해외 파견 인력과 경력직, 그리고 수도권 지역은 본사인 서울에서 일괄 처리 한다. 정아는 서울을 1차 희망 근무지로, 수원을 2차로 기입했다. 사이버 서류 전형에서 합격 통지를 받고 본사를 방문했다. 그룹의 모태여서 총수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곳이라 그런지 라운지의 식품 박물관부터 시작해 회사의 작은 발자취까지 기념비적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직원이 친절하게 정아에게 설명한다.
“유정아 씨는 3조이시고요, 이틀 뒤 오전 8시까지 이 장소로 나가세요.”
2차는 개별 면접이고, 1차는 집단 면접이다. 그 집단 면접의 장소는 의외였다.
이틀 뒤 정아는 규모가 꽤 큰 레스토랑 주방에 서 있었다. 3조의 인원은 8명이었다. 2차 면접까지 통과하는 사람은 각 조에서 서너 명 정도라는 귀동냥을 들었다. 입사를 하면 업계 최고의 대우와 정년이 보장되지만, 2차 면접까지 통과하기가 너무 까다로워 특출한 인재가 아니면 지원을 꺼린다는 게 정아가 알고 있는 회사의 정보이다.
“저는 여러분의 스펙을 전혀 모릅니다. 아는 건 응시번호뿐입니다.”
자신을 김 조리장이라고 소개한 사십 대 초반의 학자풍의 남자가 지원자들을 통솔했다.
“블라인드 면접이라고 여기십시오. 아니 면접이 아니라 실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요리 솜씨를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은 선배에게 새로 배울 테니까요. 저와 함께 여러분은 음식을 만들 겁니다. 도중에 제가 질문을 할 때면 정직한 답변을 해 주시면 됩니다.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십시오. 참고로 여긴 회사 소유의 업장입니다. 영업시간이 되는 10시면 비워 줘야 합니다. 서두르겠습니다.”
***
점심을 먹고 나니 나른하게 몸이 풀린다. 재웅은 간밤에 모처럼 밴드에 합류해 새벽까지 합주를 즐긴 후유증을 기꺼이 감당하는 중이다. 오후에도 두어 시간의 면접이 잡혀 있다. 신입 중에서도 엘리트를 뽑는 특별한 면접이다. 재웅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자 딱딱한 면접관 의자에 뒤통수를 기댔다.
언제 돌아왔는지 다른 면접관 의자의 주인들이 속달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겨자를 왜 찬물이 아닌 미지근한 물에 풀어야 하냐는 질문에, 매운 향인 시니그린을 활성화 시키는 효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답했어요. 역시 영양사다운 답변이죠?”
“글쎄요. 그 효소가 티오글루코시다아제 라는 구체적인 용어까진 들먹이지 않았으니, 조리사의 답변으로 봐도 무난할 것 같은데요.”
“뭘 그리 어려운 용어까지. 나 정도 학구파라면 모를까. 대체로 조리사들은 시니그린 용어 자체를 들먹이지 않아요.”
조리 지원부의 수장인 강 부장과 수석 영양사인 조 차장의 대화다. 딴에는 졸고 있는 재웅을 배려한다고 속삭이지만 고스란히 재웅의 귀에 닿는다. 짜증을 담으려던 재웅의 얼굴에 이내 호기심이 번진다.
“다른 면접도 아니고, 오늘은 우수 인재를 따로 구하는 자리잖아요. 아무래도 난 영양사 쪽으로 추천하고 싶어요. 조리사론 안 맞을 것 같아요.”
“강 부장님, 전 우리 회사에 이런 조리사도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김 조리장은 아무런 정보가 없이 이 사람을 대했어요. 보세요. 조리 적성과 음식 윤리에 후한 점수를 주셨잖아요. 김 조리장이 이 정도 점수 줬던 조리사가 어디 흔해요?”
“조 차장님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린 훗날 조리실을 통제할 인재를 키우는 건데, 여자가 과연 휘어잡을 수 있을까요?”
영양사에 조리사, 그리고 여자? 어쩐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재웅은 번쩍 눈을 떴다.
“죄송한데요, 그 사람 이력서 제가 봐도 될까요?”
“어머, 백 과장님. 저희들이 방해했나요?”
시계를 힐긋 보고는 조 차장이 미안한 얼굴을 한다.
“백 과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서울 지원자예요.”
중년의 간부들이 주관하는 면접 자리에 새파란 재웅이 끼어든 건 해외나 수도권의 정체된 매장에 새바람을 일으켜 줄 인물을 면접할 때를 위해서다.
본사로 들어온 뒤로 한 달 간격으로 경기도의 여러 지역을 차례로 근무했다. 본사에서 전문가의 교육을 받은 뒤 각 지역 매장을 방문해 새로운 메뉴와 경영을 알려 주는 마케팅 지원이었다. 아버지의 지시로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도 짧게나마 다녀왔다. 분주하지만 도중에 휴가를 마음껏 쓸 수 있었고 시야가 넓어졌다. 덕분에 회사 근무는 평택의 현장 근무까지 합쳐 2년을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적어도 수도권 매장 사정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과장이라는 감투도 신설 부서를 통해 얻은 탓에 과하다 여기면서도 딱히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재웅은 사장의 아들임을 숨긴 채 일하고 있었지만 간부들은 다들 알고 있는 듯싶다. 지금도 그렇다. 까마득한 부하 직원인 재웅에게 강 부장과 조 차장은 지나치게 정중하다.
“호기심이 생겨서요.”
재웅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지원서를 건네받았다. 기억에 닮고 있는 얼굴보다 갸름해서 사진으로는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을 본 뒤 다시 사진을 보았다. 비명이 터지려는 입을 막았다. 가까스로 표정을 감추고 무심한 척 지원서를 돌려주었다. 몸이 이상하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다는 바를 늦게야 헤아렸다.
‘별 사이도 아닌데 웃기는 일이군.’
스스로에게 냉소를 보내고는 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응시했다. 나머지 한 명의 면접관인 조 상무가 묵직한 몸을 건들거리며 들어왔다. 부하 직원들의 안목을 믿고 맡기라는 백 사장의 만류에도 한사코 면접관을 고집한다는 노장이다.
“인재 농사가 곧 회사 농사가 아니겠나. 그 씨앗을 고르는 일에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나.”
당신의 소신을 이번 면접에도 털어놓았다. 조 상무는 지독히 보수적인 애국자이며, 공처가면서도 집 밖에서는 남성우월주의자다. 과연 정아의 지원서를 살피는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2차 면접은 한 사람씩 방으로 들이고 있다. 이윽고 그녀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정장 차림이다. 재웅은 신음을 삼켰다.
‘제길, 그동안 여자가 되어 버렸네!’
꾸벅 숙였던 고개를 든 정아가 네 사람을 훑다가 흠칫한다. 말쑥한 슈트 차림의 재웅에게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갸웃한다. 이내 눈동자가 커진다. 재웅이 재빨리 나섰다.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나같이 젊은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있어 놀라셨죠?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
재웅은 한쪽 눈을 찡긋 감고는 면접 의자를 가리켰다.
“아! 감사합니다.”
독하고 현명한 여자는 이내 재웅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며 면접 의자로 앉는다. 바로 앞에 앉은 조 상무가 테이블의 지원서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여전히 이맛살은 구겨져 있다.
‘아닐 거야. 그 남자가 왜 여길.’
정아는 기연미연하여 다시금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잔뜩 찡그린 채 정아를 주시하고 있는 지긋한 나이의 면접관 때문에 몸이 굳는다. 테이블 위로 상무라는 일회용 직위 패가 놓여 있다. 정아는 공손히 가슴을 펴고 마주했다.
“유정아 씨, 영양사 지원이 아니라 조리사 지원이 맞는 게죠?”
“네, 그렇습니다.”
한마디 묻고 지원서를 다시 힐끔거리던 상무가 휙 고개를 돌려 버린다.
“강 부장이 먼저 하지.”
“네, 상무님.”
상무와 무언가 눈짓으로 대화를 나눈 강 부장이 정아를 상대한다.
“요리할 때 파는 왜 나중에 넣어야 하죠?”
의외의 질문이다. 두 남자가 모두 호의적이지 않다는 예감이 스친다.
“향이 열에 손실되기 때문입니다.”
“향의 손실이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파는 영양이 풍부한 야채이면서 향신료입니다. 오래 가열하면 비타민의 파괴보다 향을 잃는다는 손해가 더 큽니다.”
“혹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네. 파의 향기 성분은 열에 조직이 파괴되며, 오래 끓이면 황화수소와 디메틸설파이드 같은 좋지 않은 냄새로 변질됩니다. 알린 역시 파괴됩니다.”
“알린은 우리 몸에 어떤 도움을 주죠?”
“향기 성분인 알린은 체내에 흡수되어 비타민 B1의 이용을 돕습니다.”
“성실한 답변, 고맙습니다.”
강 부장이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조리사들은 파를 나중에 넣어야 한다는 바를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같은 호기심 많은 고객을 상대하려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모든 조리사들에게 전문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립니다.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 옆에 유능한 영양사가 있으면 되니까요. 아시다시피 단체 급식에는 영양사가 필수적으로 파견되잖아요? 솔직히 말씀 드리죠. 우리 회사는 유정아 씨 같은 특별한 영양사를 원합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고 마는 강 부장이 야속하다.
“죄송한데요, 저는 지금 조리사 지원 중입니다.”
“맞습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단지 권고를 한 번 했던 겁니다.”
“게다가 전 영양사로서는 학점도 형편없습니다.”
“뭘, 영양사 면허증이 있잖아요. 유정아 씨처럼 조리 실무에 탁월한 영양사는 아주 드물어요. 그러니 잘 생각해 보세요.”
강 부장에 이어 사십 대 중반의 여자인 조 차장이 정아를 상대한다. 마주한 표정부터 정아를 편하게 해준다.
“파 이야기 잘 들었어요. 제가 파를 좋아해서 지인들이 임신하면 파김치로 엽산을 다 채워 줬거든요. 영양사는 주로 영양소를 우선시하는데, 향신료의 가치로 접근하는 자세가 진짜 조리사다워요.”
“감사합니다.”
“아버님이 일식집을 하셨군요. ‘섬과 섬’이라면 혹시 수원에 있는 작은 가게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저도 그 집 알아요. 음식이 몸을 웃게 한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한 번 가 봤어요.”
먹는 사람에게 연애를 거는 음식이면 으뜸이 될 수 있다고 영식은 주장했다. 몸이 좋아하는 음식, 몸을 웃게 하는 음식을 조 차장이 들먹이니 정아는 뿌듯한 기분에 젖어 든다.
“일식은 아버님께 배웠나요?”
“따로 배웠습니다.”
“용케도 자격증까지 따셨군요. 대단한 열정이네요. 일식은 그렇다 치고 한식과 양식도 학원을 다녀서 자격증을 땄군요. 조리 기구 활용에 탁월하다는 김 조리장님 평가를 보니, 경력도 꽤 갖추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리사로 진출하고 싶어서 학교보다는 거의 조리실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원서의 성격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조용우의 구내식당 외엔 짧은 아르바이트는 적지 않았다. 물론 시장닭집도 적지 않았다.
“우리 회사가 가장 강조하는 음식 윤리도 후한 점수를 받았더군요. 이렇게 우수한 인재가 저희 회사에 지원해 줘서 고마워요.”
강 부장과는 달리 조 차장은 퍽이나 호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인 젊은 남자의 태도가 자못 궁금하다. 그런데 다음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은 상무였다.
“유정아 씨, 우린 평생 보조를 뽑자고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닙니다. 장차 매장의 책임자로 클 재목을 구하는 중이랍니다. 조리실엔 인생에 상처 많은 사람들이 흔해요. 겉에서 보면 상냥한 아줌마들도 겪어 보면 독종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에요. 책임자가 강렬한 카리스마로 휘어잡지 않으면 자칫 개판이 되어 버린답니다. 이리 곱게 생긴 아가씨가 과연 휘어잡을 수 있을까, 걱정부터 들어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만든 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라고 믿습니다.”
“호오!”
당돌한 대답을 들었다는 양 상무가 헛바람을 날린다.
“대부분 남자 조리사들인데, 여자 몸으로 부하들을 이끌 자신 있어요? 거 남자 조리사들은 여자 상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실력으로 보여 주고 싶습니다.”
시종 여자라는 이유를 들먹이는 면접 분위기에 반감이 생기고 만다. 또박또박 분명하게 대답했다.
“됐습니다. 차후 개별 통보를 할게요.”
상무의 마무리가 불길하다. 귀찮은 일에서 손을 털고 일어나는 모양새다.
“잠깐만요!”
저쪽 끝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소리친다. 상무가 다시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인다. 정아는 의자를 회전시켜 비로소 그의 직위 패를 찬찬히 살폈다.
「마케팅 지원팀/백재웅 과장」
구 여사의 구박과 극한 작업장을 감당하던 그가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웅이 분명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확신하지 못했다. 복장뿐 아니라 사람의 분위기도 확연히 변했지만 굵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여전하다.
“유정아 씨, 꼭 서울이어야 합니까?”
“네, 서울을 우선 원합니다.”
“사실 지방 지사의 면접이라면 신입 조리사로 쉽게 합격할 수 있는 조건이거든요.”
“서울은 더욱 다양한 요리를 접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의 산물일 뿐이죠. 더욱이 대형 매장을 희망하셨군요. 많이 배우고 싶은 욕심입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재웅의 몸짓이 낯설다. 영화에서 보아 온 유능한 변호사의 발언을 보는 성싶다. 증인석에 앉은 약자에게 은근히 힘을 실어 주는 그런 몸짓이다. 또 있다. 세상 물정을 한참 몰라 보였던 젊은 남자가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사무적인 남자로 변신한 느낌이다. 재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여백으로 불쑥 상무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우린 이것저것 하는 조리사보단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한데?”
“아! 상무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재웅이 상무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재판장을 대하는 태도 같다. 그가 정아를 다시 보았다.
“유정아 씨도 상무님의 말씀에 공감하시죠?”
그가 유도한 대로 대답하고 만다.
“네, 상무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상무님 말씀대로 우린 각 파트의 전문가를 필요로 합니다. 유정아 씨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게 음식 윤리인데, 이례적으로 점수가 높군요. 음식을 아는 것보단 이해해야 한다는 기업 윤리가 우리 회사의 강점이긴 하지만 솔직히 저는 지나치게 높은 점수가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확인 차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세요.”
재웅이 고개를 모로 틀고 생각에 잠겼다가 묻는다.
“좀 큰 틀에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식품 회사는 애국자여야 한다는 게 저희 상무님의 지론이십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묻겠습니다. 식품 회사의 윤리가 국가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요?”
“……!”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질문이어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우연도 있을까? 정아의 논문 제목이 나온 것이다.
“우선 지대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인 예를 제시해 줄 수 있습니까?”
“좀 장황해도 괜찮을까요?”
“편하게 하세요.”
“예. KBS 다큐 생로병사의 비밀에 소개되기도 했던,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을 예로 들겠습니다. 인구 1억 2천의 자바 섬에는 3백만 명 이상이 요오드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갑상선종 환자뿐 아니라 지능과 체중의 성장을 막아 버리는 크레틴병 환자도 흔합니다. 자바 섬은 비옥한 땅 자체에 요오드 성분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소금으로 요오드를 자연스럽게 섭취하는데, 자바 섬은 소금에도 요오드가 없습니다. 결국 국가에서 나서 모든 소금 공장에 요오드를 함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특정 지역에서 요오드 결핍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요오드화염이라고 판매했던 소금들이 죄다 엉터리였습니다. 포장지와는 달리 요오드가 거의 함유되지 않았지요. 소금 공장의 윤리 의식 실종이 노동력을 죽이고, 사회적 비용을 늘린 예입니다. 결과적으로 요오드 결핍증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과 환자의 치료 등으로 국가는 5프로 이상의 국가경쟁력을 손해 보는 중입니다.”
장황한 정아의 설명을 사람들은 끈기 있게 들어 주었다.
“매국노가 따로 없군.”
상무가 혀를 찼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그거야. 봐, 좋은 음식 만드는 사람이 결국엔 애국자잖아.”
의외로 정아의 말에 가장 먼저 공감을 표시하는 상무이다. 힐긋 재웅을 보았다. 그는 볼펜을 든 채 무심한 얼굴로 정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제길, 성냥팔이 소녀가 여자가 돼서 나타났어.’
회의실로 향하면서 재웅은 연방 투덜거렸다. 여느 여자와 다른 행동거지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정아였다. 하지만 어제의 여성적인 차림새며 행동거지가 여느 여자와 비슷해 보이니 묘한 짜증이 치민다. 여전히 이성은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여자이면서도 남자처럼 편했던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느닷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면 당황하면서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느긋하게 즐겼다. 그래서 그녀의 남자 친구를 발견했을 때도 허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고 여겼다.
여하튼 남녀를 떠나 인간적인 우정으로 기억이 정리되었다고 믿었고, 면접 자리에서 재회한 그녀를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녀가 여자로 보이는 순간 이미 당혹감은 시작되었다. 때문에 재웅의 실력으로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특출한 인재를 선발하는 비밀 프로젝트에 그녀가 후보로 등장했다는 놀라움은 나중 일이 되었다.
영식은 일어나서 딸에게 등을 보인 채 물을 한 잔 마셨다. 쓰다. 맹물 같은 남자라고 아내는 종종 놀렸다. 그 말을 영식은 좋아했다. 맹물은 심심하지만 싫증이 안 난다. 평생 사랑받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건넨 말은 모두 좋았다. 자신을 닮았다는 맹물이 이제는 쓰다. 어쩌면 이것이 껍질을 벗겨 낸 삶의 속살 맛인 것 같다. 다행히 아내와의 인연은 남아 있다. 아내는 이제 자신이 태어난 집 앞에 묻혀 있다. 그녀와 함께한 유년 시절의 기억과 그녀의 육신이 존재하는 고택에서 영식은 남은 인생을 누릴 수 있다. ‘그 사람’은 단지 아내의 가슴 한 조각을 가졌을 뿐이다. 거기에 비하면 자신의 몫은 풍족하다. 그만하면 웃을 수 있지 않은가.
영식은 표정을 다스린 뒤에 딸에게 돌아섰다. 마주한 눈맵시에 역시 ‘그 사람’이 보인다. 딸이 소리친다.
“약속하셨으니, 이젠 가게를 처분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래, 네가 이겼다. 근데 일단 졸업은 해야겠지?”
***
턱걸이 학점으로 겨우 졸업장을 받아 냈다. 대부분의 시간을 조리 현장에서 보냈던 정아는 영식의 당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양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학점이 형편없는 대신에 세 가지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냈다.
영식은 가게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은 지켰다. 한시적이라면서 조용우 셰프가 가게를 맡았다.
“네 고모할머니가 걷지를 못 하신다.”
보살핌을 핑계로 아버지는 섬으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숙제를 다시 내준다.
“반드시 여길 취직해라.”
“꼭 그럴 이유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식품 회사잖니.”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거기서 기어이 성공해라. 스스로 당당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날 불러라. 그 전엔 절대로 섬에 오지 마라.”
‘기어이’와 ‘절대로’라는 말이 퍽이나 부당하게 들린다.
“네가 선택한 길이잖니. 기왕 선택했으면 최고가 되라 그거다.”
최고가 된 다음에야 ‘섬과 섬’의 주인 자격을 준다고 한다.
“직장이 멀면 집도 따로 얻어라. 통장에 방 얻을 돈을 넣어 두었다.”
“왜 집까지?”
“노총각이 도맡아 하는 집에 네가 사는 것도 그렇잖니.”
그렇게 아버지는 수원을 떠났다. 당신을 끝내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던 어머니의 무덤 곁으로.
***
제이푸드의 신입 조리사 공채는 지역별로 치러진다. 해외 파견 인력과 경력직, 그리고 수도권 지역은 본사인 서울에서 일괄 처리 한다. 정아는 서울을 1차 희망 근무지로, 수원을 2차로 기입했다. 사이버 서류 전형에서 합격 통지를 받고 본사를 방문했다. 그룹의 모태여서 총수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곳이라 그런지 라운지의 식품 박물관부터 시작해 회사의 작은 발자취까지 기념비적으로 보존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직원이 친절하게 정아에게 설명한다.
“유정아 씨는 3조이시고요, 이틀 뒤 오전 8시까지 이 장소로 나가세요.”
2차는 개별 면접이고, 1차는 집단 면접이다. 그 집단 면접의 장소는 의외였다.
이틀 뒤 정아는 규모가 꽤 큰 레스토랑 주방에 서 있었다. 3조의 인원은 8명이었다. 2차 면접까지 통과하는 사람은 각 조에서 서너 명 정도라는 귀동냥을 들었다. 입사를 하면 업계 최고의 대우와 정년이 보장되지만, 2차 면접까지 통과하기가 너무 까다로워 특출한 인재가 아니면 지원을 꺼린다는 게 정아가 알고 있는 회사의 정보이다.
“저는 여러분의 스펙을 전혀 모릅니다. 아는 건 응시번호뿐입니다.”
자신을 김 조리장이라고 소개한 사십 대 초반의 학자풍의 남자가 지원자들을 통솔했다.
“블라인드 면접이라고 여기십시오. 아니 면접이 아니라 실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요리 솜씨를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여러분들은 선배에게 새로 배울 테니까요. 저와 함께 여러분은 음식을 만들 겁니다. 도중에 제가 질문을 할 때면 정직한 답변을 해 주시면 됩니다.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십시오. 참고로 여긴 회사 소유의 업장입니다. 영업시간이 되는 10시면 비워 줘야 합니다. 서두르겠습니다.”
***
점심을 먹고 나니 나른하게 몸이 풀린다. 재웅은 간밤에 모처럼 밴드에 합류해 새벽까지 합주를 즐긴 후유증을 기꺼이 감당하는 중이다. 오후에도 두어 시간의 면접이 잡혀 있다. 신입 중에서도 엘리트를 뽑는 특별한 면접이다. 재웅은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자 딱딱한 면접관 의자에 뒤통수를 기댔다.
언제 돌아왔는지 다른 면접관 의자의 주인들이 속달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겨자를 왜 찬물이 아닌 미지근한 물에 풀어야 하냐는 질문에, 매운 향인 시니그린을 활성화 시키는 효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답했어요. 역시 영양사다운 답변이죠?”
“글쎄요. 그 효소가 티오글루코시다아제 라는 구체적인 용어까진 들먹이지 않았으니, 조리사의 답변으로 봐도 무난할 것 같은데요.”
“뭘 그리 어려운 용어까지. 나 정도 학구파라면 모를까. 대체로 조리사들은 시니그린 용어 자체를 들먹이지 않아요.”
조리 지원부의 수장인 강 부장과 수석 영양사인 조 차장의 대화다. 딴에는 졸고 있는 재웅을 배려한다고 속삭이지만 고스란히 재웅의 귀에 닿는다. 짜증을 담으려던 재웅의 얼굴에 이내 호기심이 번진다.
“다른 면접도 아니고, 오늘은 우수 인재를 따로 구하는 자리잖아요. 아무래도 난 영양사 쪽으로 추천하고 싶어요. 조리사론 안 맞을 것 같아요.”
“강 부장님, 전 우리 회사에 이런 조리사도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김 조리장은 아무런 정보가 없이 이 사람을 대했어요. 보세요. 조리 적성과 음식 윤리에 후한 점수를 주셨잖아요. 김 조리장이 이 정도 점수 줬던 조리사가 어디 흔해요?”
“조 차장님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린 훗날 조리실을 통제할 인재를 키우는 건데, 여자가 과연 휘어잡을 수 있을까요?”
영양사에 조리사, 그리고 여자? 어쩐지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재웅은 번쩍 눈을 떴다.
“죄송한데요, 그 사람 이력서 제가 봐도 될까요?”
“어머, 백 과장님. 저희들이 방해했나요?”
시계를 힐긋 보고는 조 차장이 미안한 얼굴을 한다.
“백 과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서울 지원자예요.”
중년의 간부들이 주관하는 면접 자리에 새파란 재웅이 끼어든 건 해외나 수도권의 정체된 매장에 새바람을 일으켜 줄 인물을 면접할 때를 위해서다.
본사로 들어온 뒤로 한 달 간격으로 경기도의 여러 지역을 차례로 근무했다. 본사에서 전문가의 교육을 받은 뒤 각 지역 매장을 방문해 새로운 메뉴와 경영을 알려 주는 마케팅 지원이었다. 아버지의 지시로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도 짧게나마 다녀왔다. 분주하지만 도중에 휴가를 마음껏 쓸 수 있었고 시야가 넓어졌다. 덕분에 회사 근무는 평택의 현장 근무까지 합쳐 2년을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적어도 수도권 매장 사정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과장이라는 감투도 신설 부서를 통해 얻은 탓에 과하다 여기면서도 딱히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재웅은 사장의 아들임을 숨긴 채 일하고 있었지만 간부들은 다들 알고 있는 듯싶다. 지금도 그렇다. 까마득한 부하 직원인 재웅에게 강 부장과 조 차장은 지나치게 정중하다.
“호기심이 생겨서요.”
재웅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지원서를 건네받았다. 기억에 닮고 있는 얼굴보다 갸름해서 사진으로는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을 본 뒤 다시 사진을 보았다. 비명이 터지려는 입을 막았다. 가까스로 표정을 감추고 무심한 척 지원서를 돌려주었다. 몸이 이상하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다는 바를 늦게야 헤아렸다.
‘별 사이도 아닌데 웃기는 일이군.’
스스로에게 냉소를 보내고는 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응시했다. 나머지 한 명의 면접관인 조 상무가 묵직한 몸을 건들거리며 들어왔다. 부하 직원들의 안목을 믿고 맡기라는 백 사장의 만류에도 한사코 면접관을 고집한다는 노장이다.
“인재 농사가 곧 회사 농사가 아니겠나. 그 씨앗을 고르는 일에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나.”
당신의 소신을 이번 면접에도 털어놓았다. 조 상무는 지독히 보수적인 애국자이며, 공처가면서도 집 밖에서는 남성우월주의자다. 과연 정아의 지원서를 살피는 그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2차 면접은 한 사람씩 방으로 들이고 있다. 이윽고 그녀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정장 차림이다. 재웅은 신음을 삼켰다.
‘제길, 그동안 여자가 되어 버렸네!’
꾸벅 숙였던 고개를 든 정아가 네 사람을 훑다가 흠칫한다. 말쑥한 슈트 차림의 재웅에게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갸웃한다. 이내 눈동자가 커진다. 재웅이 재빨리 나섰다.
“하하, 처음 뵙겠습니다. 나같이 젊은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있어 놀라셨죠?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
재웅은 한쪽 눈을 찡긋 감고는 면접 의자를 가리켰다.
“아! 감사합니다.”
독하고 현명한 여자는 이내 재웅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며 면접 의자로 앉는다. 바로 앞에 앉은 조 상무가 테이블의 지원서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여전히 이맛살은 구겨져 있다.
‘아닐 거야. 그 남자가 왜 여길.’
정아는 기연미연하여 다시금 눈길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잔뜩 찡그린 채 정아를 주시하고 있는 지긋한 나이의 면접관 때문에 몸이 굳는다. 테이블 위로 상무라는 일회용 직위 패가 놓여 있다. 정아는 공손히 가슴을 펴고 마주했다.
“유정아 씨, 영양사 지원이 아니라 조리사 지원이 맞는 게죠?”
“네, 그렇습니다.”
한마디 묻고 지원서를 다시 힐끔거리던 상무가 휙 고개를 돌려 버린다.
“강 부장이 먼저 하지.”
“네, 상무님.”
상무와 무언가 눈짓으로 대화를 나눈 강 부장이 정아를 상대한다.
“요리할 때 파는 왜 나중에 넣어야 하죠?”
의외의 질문이다. 두 남자가 모두 호의적이지 않다는 예감이 스친다.
“향이 열에 손실되기 때문입니다.”
“향의 손실이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파는 영양이 풍부한 야채이면서 향신료입니다. 오래 가열하면 비타민의 파괴보다 향을 잃는다는 손해가 더 큽니다.”
“혹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네. 파의 향기 성분은 열에 조직이 파괴되며, 오래 끓이면 황화수소와 디메틸설파이드 같은 좋지 않은 냄새로 변질됩니다. 알린 역시 파괴됩니다.”
“알린은 우리 몸에 어떤 도움을 주죠?”
“향기 성분인 알린은 체내에 흡수되어 비타민 B1의 이용을 돕습니다.”
“성실한 답변, 고맙습니다.”
강 부장이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연다.
“조리사들은 파를 나중에 넣어야 한다는 바를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같은 호기심 많은 고객을 상대하려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모든 조리사들에게 전문 지식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립니다.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 옆에 유능한 영양사가 있으면 되니까요. 아시다시피 단체 급식에는 영양사가 필수적으로 파견되잖아요? 솔직히 말씀 드리죠. 우리 회사는 유정아 씨 같은 특별한 영양사를 원합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고 마는 강 부장이 야속하다.
“죄송한데요, 저는 지금 조리사 지원 중입니다.”
“맞습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단지 권고를 한 번 했던 겁니다.”
“게다가 전 영양사로서는 학점도 형편없습니다.”
“뭘, 영양사 면허증이 있잖아요. 유정아 씨처럼 조리 실무에 탁월한 영양사는 아주 드물어요. 그러니 잘 생각해 보세요.”
강 부장에 이어 사십 대 중반의 여자인 조 차장이 정아를 상대한다. 마주한 표정부터 정아를 편하게 해준다.
“파 이야기 잘 들었어요. 제가 파를 좋아해서 지인들이 임신하면 파김치로 엽산을 다 채워 줬거든요. 영양사는 주로 영양소를 우선시하는데, 향신료의 가치로 접근하는 자세가 진짜 조리사다워요.”
“감사합니다.”
“아버님이 일식집을 하셨군요. ‘섬과 섬’이라면 혹시 수원에 있는 작은 가게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저도 그 집 알아요. 음식이 몸을 웃게 한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한 번 가 봤어요.”
먹는 사람에게 연애를 거는 음식이면 으뜸이 될 수 있다고 영식은 주장했다. 몸이 좋아하는 음식, 몸을 웃게 하는 음식을 조 차장이 들먹이니 정아는 뿌듯한 기분에 젖어 든다.
“일식은 아버님께 배웠나요?”
“따로 배웠습니다.”
“용케도 자격증까지 따셨군요. 대단한 열정이네요. 일식은 그렇다 치고 한식과 양식도 학원을 다녀서 자격증을 땄군요. 조리 기구 활용에 탁월하다는 김 조리장님 평가를 보니, 경력도 꽤 갖추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조리사로 진출하고 싶어서 학교보다는 거의 조리실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원서의 성격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 조용우의 구내식당 외엔 짧은 아르바이트는 적지 않았다. 물론 시장닭집도 적지 않았다.
“우리 회사가 가장 강조하는 음식 윤리도 후한 점수를 받았더군요. 이렇게 우수한 인재가 저희 회사에 지원해 줘서 고마워요.”
강 부장과는 달리 조 차장은 퍽이나 호의적이다. 다른 한 사람인 젊은 남자의 태도가 자못 궁금하다. 그런데 다음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은 상무였다.
“유정아 씨, 우린 평생 보조를 뽑자고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닙니다. 장차 매장의 책임자로 클 재목을 구하는 중이랍니다. 조리실엔 인생에 상처 많은 사람들이 흔해요. 겉에서 보면 상냥한 아줌마들도 겪어 보면 독종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에요. 책임자가 강렬한 카리스마로 휘어잡지 않으면 자칫 개판이 되어 버린답니다. 이리 곱게 생긴 아가씨가 과연 휘어잡을 수 있을까, 걱정부터 들어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 만든 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살이라고 믿습니다.”
“호오!”
당돌한 대답을 들었다는 양 상무가 헛바람을 날린다.
“대부분 남자 조리사들인데, 여자 몸으로 부하들을 이끌 자신 있어요? 거 남자 조리사들은 여자 상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실력으로 보여 주고 싶습니다.”
시종 여자라는 이유를 들먹이는 면접 분위기에 반감이 생기고 만다. 또박또박 분명하게 대답했다.
“됐습니다. 차후 개별 통보를 할게요.”
상무의 마무리가 불길하다. 귀찮은 일에서 손을 털고 일어나는 모양새다.
“잠깐만요!”
저쪽 끝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소리친다. 상무가 다시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인다. 정아는 의자를 회전시켜 비로소 그의 직위 패를 찬찬히 살폈다.
「마케팅 지원팀/백재웅 과장」
구 여사의 구박과 극한 작업장을 감당하던 그가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웅이 분명하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확신하지 못했다. 복장뿐 아니라 사람의 분위기도 확연히 변했지만 굵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는 여전하다.
“유정아 씨, 꼭 서울이어야 합니까?”
“네, 서울을 우선 원합니다.”
“사실 지방 지사의 면접이라면 신입 조리사로 쉽게 합격할 수 있는 조건이거든요.”
“서울은 더욱 다양한 요리를 접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치열한 경쟁의 산물일 뿐이죠. 더욱이 대형 매장을 희망하셨군요. 많이 배우고 싶은 욕심입니까?”
“솔직히 그렇습니다.”
재웅의 몸짓이 낯설다. 영화에서 보아 온 유능한 변호사의 발언을 보는 성싶다. 증인석에 앉은 약자에게 은근히 힘을 실어 주는 그런 몸짓이다. 또 있다. 세상 물정을 한참 몰라 보였던 젊은 남자가 속내를 가늠할 수 없는 사무적인 남자로 변신한 느낌이다. 재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여백으로 불쑥 상무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우린 이것저것 하는 조리사보단 각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한데?”
“아! 상무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재웅이 상무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재판장을 대하는 태도 같다. 그가 정아를 다시 보았다.
“유정아 씨도 상무님의 말씀에 공감하시죠?”
그가 유도한 대로 대답하고 만다.
“네, 상무님 말씀이 옳으십니다.”
“상무님 말씀대로 우린 각 파트의 전문가를 필요로 합니다. 유정아 씨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게 음식 윤리인데, 이례적으로 점수가 높군요. 음식을 아는 것보단 이해해야 한다는 기업 윤리가 우리 회사의 강점이긴 하지만 솔직히 저는 지나치게 높은 점수가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확인 차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세요.”
재웅이 고개를 모로 틀고 생각에 잠겼다가 묻는다.
“좀 큰 틀에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식품 회사는 애국자여야 한다는 게 저희 상무님의 지론이십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묻겠습니다. 식품 회사의 윤리가 국가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요?”
“……!”
예상 범위를 뛰어넘는 질문이어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우연도 있을까? 정아의 논문 제목이 나온 것이다.
“우선 지대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구체적인 예를 제시해 줄 수 있습니까?”
“좀 장황해도 괜찮을까요?”
“편하게 하세요.”
“예. KBS 다큐 생로병사의 비밀에 소개되기도 했던,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을 예로 들겠습니다. 인구 1억 2천의 자바 섬에는 3백만 명 이상이 요오드 결핍증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갑상선종 환자뿐 아니라 지능과 체중의 성장을 막아 버리는 크레틴병 환자도 흔합니다. 자바 섬은 비옥한 땅 자체에 요오드 성분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소금으로 요오드를 자연스럽게 섭취하는데, 자바 섬은 소금에도 요오드가 없습니다. 결국 국가에서 나서 모든 소금 공장에 요오드를 함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특정 지역에서 요오드 결핍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요오드화염이라고 판매했던 소금들이 죄다 엉터리였습니다. 포장지와는 달리 요오드가 거의 함유되지 않았지요. 소금 공장의 윤리 의식 실종이 노동력을 죽이고, 사회적 비용을 늘린 예입니다. 결과적으로 요오드 결핍증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과 환자의 치료 등으로 국가는 5프로 이상의 국가경쟁력을 손해 보는 중입니다.”
장황한 정아의 설명을 사람들은 끈기 있게 들어 주었다.
“매국노가 따로 없군.”
상무가 혀를 찼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그거야. 봐, 좋은 음식 만드는 사람이 결국엔 애국자잖아.”
의외로 정아의 말에 가장 먼저 공감을 표시하는 상무이다. 힐긋 재웅을 보았다. 그는 볼펜을 든 채 무심한 얼굴로 정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제길, 성냥팔이 소녀가 여자가 돼서 나타났어.’
회의실로 향하면서 재웅은 연방 투덜거렸다. 여느 여자와 다른 행동거지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정아였다. 하지만 어제의 여성적인 차림새며 행동거지가 여느 여자와 비슷해 보이니 묘한 짜증이 치민다. 여전히 이성은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여자이면서도 남자처럼 편했던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느닷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면 당황하면서도 걱정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느긋하게 즐겼다. 그래서 그녀의 남자 친구를 발견했을 때도 허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되었다고 여겼다.
여하튼 남녀를 떠나 인간적인 우정으로 기억이 정리되었다고 믿었고, 면접 자리에서 재회한 그녀를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녀가 여자로 보이는 순간 이미 당혹감은 시작되었다. 때문에 재웅의 실력으로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특출한 인재를 선발하는 비밀 프로젝트에 그녀가 후보로 등장했다는 놀라움은 나중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