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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 2권
1화
도전


화영이 합병증으로 다시금 긴 병원 생활을 이어 가고 있을 때, 영식은 은밀히 고향 섬을 찾았다. 장인에 이어 장모가 도시의 장례식장에서 세상을 떠난 직후이기도 했다.
영식은 섬의 고택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무성한 잡초가 몰락한 정 사장의 말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대대로 집안은 지주와 선주로 군림했고, 그 자식들도 군림하는 습관을 물려받았다. 세상의 급박한 변화는 사고가 정지된 그들을 죄다 몰락시켰다. 몰락한 자식들은 아무도 섬을 찾지 않았다. 그들이 사업을 위해 저당 잡힌 고택은 경매장을 기웃거릴 처지에 놓였다.
연로한 고모를 만나고 돌아온 영식은 딸에게 선언했다.
“네 엄마가 퇴원하면 돌아갈 집을 사기로 했다.”
그해에 영식은 섬의 고택을 매입했다. 고택 뒤의 밭과 언덕바지까지 사들였다. 영식의 선물을, 아내는 살아서는 누리지 못했다. 영식은 죽은 아내를 고택의 언덕바지에 쉬게 했다.
“다 안다. 얼마나 여기 오고 싶었는지. 말 안 해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너무 늦게 데려와서 미안하다. 혼이라도 실컷 여기서 놀아라.”
모처럼 동행했다가 영식의 오열을 목격한 정아는 막연한 불안감에 떨었다. 처절한 슬픔 속에 도사린 수상한 광기를 보고 말았다.
“여기가 네 엄마가 태어난 집이다. 이제부턴 우리 집이다.”
고모할머니의 감회 어린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정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버지의 행동거지를 지켜보았다.
정아의 불안감은 서서히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영식은 살아 있는 딸을 남기고 죽은 어머니 곁에서 머물고 싶어 한다는 징후를 종종 드러냈다. 화영의 선물을 위해 가진 돈을 털었다. 남은 가게인 ‘섬과 섬’도 온전한 재산이 못 되었다. 융자금을 갚을 생각도, 가게를 키울 의욕도 보이지 않는다.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식은 한동안 끊었던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하루는 탁자에 얼굴을 붙이고 잠든 영식을 깨우러 갔다가 정아는 들었다.
“사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후훗,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한다, 흐흐.”
영식의 서글픈 잠꼬대 앞에서 정아는 무릎을 꿇고는 낮은 목소리로 빌었다.
“제가, 제가 엄마 몫까지 사랑할게요. 제발.”
요리를 즐거워하던 영식의 몸짓도 습관적인 행동거지로 변했다.
“정아가 지금 몇 학년이지?”
종종 묻는다. 졸업을 빨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같다. 그 와중에서도 정아의 끼니는 정성을 다해 챙겼다.
“이젠 제가 차린다니까요.”
“됐다.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런다. 너 졸업할 때까진 내게 맡겨.”
‘시집갈 때까지’라고 했던 말이 달라졌다. 늦게 배운 술이 원인이 되었던 것일까? 갑자기 영식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여러 날 동안 한쪽으로 몸이 쏠리기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일을 못 할 만큼 악화되었다.
“누워 있으면 좋아진다.”
어머니가 떠난 뒤부터 병원 가기를 죽어라 싫어하는 아버지다. 정아는 억지로 병원에 데려갔다. 혈관 질환이었다. 수술을 할 만큼 도드라진 증세는 없어서 며칠 만에 퇴원을 했다. 혈전 용해제를 복용하면서 꾸준히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숙제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너 졸업하면 가게를 정리할 거다. 어차피 물려받을 사람도 없고 하니.”
병이 영식의 변명을 하나 더 만들고 말았다.
“너무해요. 제발 떠날 생각 좀 그만하세요!”
“언제 또 몸이 굳을지 모르는 형국이니 어차피 오래 못 할 일이잖냐?”
“아녜요! 제가 맡아서 할 거예요. 여기가 어떤 곳인데요. 가게에도 엄마의 인생이 가득 머물고 있다고요!”
그때부터 조리사로 가겠다는 정아와 영양사의 길을 권하는 영식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요리에 파고드는 정아를 영식은 무심히 지켜보기만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아에게 본격적인 요리를 가르쳤던 조용우 셰프가 어느 날 영식을 찾아왔다. 한때 제자였던 조용우가 돌아간 다음 영식은 정아와 마주 앉았다.
“요리가 좋냐?”
“예. 해 보니 저한테 맞아요.”
“다림질한 유니폼 입고, 수천만 원짜리 오븐으로 요리하고, 여럿이 떠들면서 일하니까 좋겠지.”
“칼질하고 튀김도 해요.”
“아주 작은 현장을 본 걸로 요리를 안다고 착각하지 마라.”
드물게 엄숙한 영식의 태도이다.
“넌 용우가 왜 뉴욕에서 포기하고 돌아온 줄 아니? 그리고 왜 급식소로 취직한 줄도 아니?”
여름 방학에 정아를 데리고 일했던 조용우는 자신의 속내를 밝히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일했을 뿐이라는 그의 대답은 신뢰감이 너무 부족하다. 게다가 그가 구내식당도 그만두어서 겨울 방학이 되었는데도 그의 일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조용우에 관해 정아가 침묵하자, 아버지는 말머리를 돌린다.
“남들이 쉴 시간에 요리사는 바쁘게 일한다. 그런데도 백 명이 도전해서 고작 서너 명이 인정받지.”
“아버지가 절 가르쳐 주세요.”
“또! 내키지 않는데 어떻게 가르치냐?”
“그러니까 제 스스로 길을 찾고 있잖아요.”
“정말 요리가 좋냐?”
“네?”
“좋냐고!”
“예. 제 몸에 맞아요! 맞춘 옷처럼, 오래된 옷처럼 딱 맞고 편해요!”
“그렇다면 정말 맞는지 우선 알아봐라.”
“……!”
“생선 배 갈라서 내장 훑어 내는 것도 요리고, 소, 돼지, 닭 해체하는 것도 요리다. 그런 것도 네가 할 수 있겠냐?”
“할 수 있어요.”
“좋다.”
영식은 볼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 정아에게 건넸다.
“여길 찾아가서 한 달을 겪어 봐라. 그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
메모지를 보고 정아가 찾아낸 곳은 허름한 단층 건물이었다. 식품 회사 상호를 달기에는 미안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지저분한 내부에 이르자, 중년의 남자 두 명과 아주머니 한 명이 돼지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영식이 미리 전화를 해 두었는지, 그들은 당장 일을 시켰다. 돼지 머리를 삶아 낸 다음 토치램프로 털을 태우고 윤기를 내는 일을 정아는 이를 악물고 견뎠다.
“학생, 주둥이는 살살 다뤄. 애인 거시기처럼 잘 쓰다듬어 줘서 돼지를 웃게 해야 돼.”
돼지 머리 뒤를 면도날로 긁어내고 있던 남자가 이죽거렸다.
“돼지 머린 웃는 얼굴이어야 제값을 받거든.”
다른 남자가 점잖게 거든다.
정아는 저녁까지 견뎌 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아빠, 정말이에요. 일이야 구역질 참으면서 견뎌 냈다고요!”
정작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술병을 끼고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저녁이 가까울수록 술 냄새는 진해지고 음탕한 언어가 난무했다. 남자 둘 옆의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아주머닌 아빠 가게에서도 1년을 착실히 일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가게 손님이고, 우리 가게 일하러 오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중에 그걸 품지 못하겠다고 조리사도 주인도 그만둘 테냐?”
“좋아요. 어떤 일도 하겠어요. 대신 술 취한 사람 상대 안 하는 주방이었으면 해요. 요즘 주방은 술 먹고 일하는 분들이 없잖아요.”
정아의 항변에 영식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볼펜을 들었다.
“개학이 언제지?”
묻고는 쪽지를 건네준다.
“그렇다면 여길 가 봐라. 대신 두 달을 꼬박 채워야 한다.”
쪽지에 적힌 상호는 ‘시장닭집’이었다.

***

섬마을에 잔치가 생기면 아낙은 암탉이 낳은 알을 모았다.
“너는 커서 돈을 많이 벌어 놓고 결혼하그라. 아니다. 섬을 떠나라. 절대로 섬에서 색시를 맞이하지 말아라.”
사내아이를 끌어안고 아낙이 당부했다.
“술 먹고 죄 없는 색시를 때리지도 말거라. 못난 엄마는 더 못 견디겠다. 용서해라. 아니다. 엄마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생각하지도 말고 잊어버려라.”
아낙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는 볏짚 계란 꾸러미를 안았다. 친지의 혼인 선물이었다. 소고기 한 근을 축의금 대신에 들고 가기도 하는 그런 시절이었고, 계란 열 개는 소고기 한 근과 진배없었다.
혼례식을 간다면서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간 아낙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큰고모의 손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고깃배를 타지 않고 술독에 빠졌다. 아이는 오른발과 왼발의 길이가 달라 절뚝거리며 걸었다. 크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심했다.
어느 날, 더 크기 전에 수술을 해야 한다고, 보건소의 공중의가 고모에게 알려 주었다. 고모는 한달음에 아버지에게 달려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떠난 년은 떠난 년이고, 남은 새끼는 어쩔 테냐! 아비는 사지 멀쩡하면서 새끼는 평생 병신 만들 테냐. 지금 다리를 잘랐다가 다시 붙이면 고친다잖냐!”
아버지는 새 술잔을 채우려다가 개다리소반을 엎어 버렸다.
“쌍년! 낳았으면 데려갈 것이지!”
아버지의 난폭한 행짜에 고모는 움찔했지만, 소년은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는 슬그머니 아들에게 눈길을 준다. 소년의 크고 맑은 눈은 흔들림이 없다. 칼을 들고 설쳐도 흔들리지 않을 자세다. 아버지는 절대로 아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그런 맹신을 품고 있는 눈동자이기도 했다.
“징그러운 새끼! 차라리 짐승처럼 울어라!”
아버지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가 벽에 머리를 박았다. 소년은 여전히 맑은 눈동자로 아버지를 묵묵히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다시 배를 타겠다면서 선주인 정 사장의 집을 찾아갔다. 다시 배를 타라며 무수히 아버지를 설득했던 정 사장은 의외로 반색하지 않았다.
“자네 솜씨야 아직도 최고라고 인정은 한다만은.”
정 사장은 고심 끝에 단서를 달았다.
“술을 먼저 끊게. 석 달 동안 술을 안 마시고 일하면, 내 자네 아들 수술비를 미리 대 주겠네.”
다음 날부터 당장 아버지는 고깃배를 탔고, 소년의 집에는 술병이 사라졌다. 바다에서 참았던 술을 집에 들어와 먹으려 들면, 고모가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소년은 여전히 맑고 커다란 눈으로 애원을 보냈다. 아버지는 눈물을 보였다. 술이 고파서, 술을 참고 싶어서 울었다. 그러면서 석 달을 견뎠다. 소년은 육지로 나갔다. 정 사장의 친척이 의사로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소년은 석고 붕대를 제거하러 마지막으로 병원을 다녀왔다. 수술의 성공을 확인하고 모처럼 가족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 소년을 곤혹스럽게 하는 일이 생겼다. 장시간 밀폐되어 부숭부숭한 다리는 터럭이 잔뜩 붙어 있었다. 고모가 면도기로 밀어 주었지만 터럭은 금방 다시 생겼다.
다리가 나은 소년은 여전히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여름이 지나고 긴바지를 입으면 섞여 볼 터였다. 방파제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고, 구름의 흐름을 눈길로 따라잡으면서 육지를 상상하곤 했다. 볏짚 계란 꾸러미와 한복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 윤곽은 기억에 희미하다.
그때 한 소녀가 다가왔다.
“다리 다 나았다며?”
정 사장집의 막내딸인 화영이었다.
“왜 함께 안 놀아?”
화영은 반벌거숭이로 뛰노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그러는 너는?”
소년은 대답이 궁해서 되물었다.
“시시해서.”
화영의 대답이 멋있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나도 그래. 시시해.”
“우리 집 갈래?”
정 사장의 집은 솟을대문에 행랑채와 연못과 정원과 뒤란을 두루 갖춘 전통 한옥이다. 그곳에서 소년은 처음으로 전축을 구경했다. 화영이 노래를 틀어 주었다. 그리고 라디오를 함께 들었다. 라디오 연속극을 듣기도 하고 음악을 공유했다. 화영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소년에게 간식을 아끼지 않았다. 화영의 어머니가 말했다.
“지 아부지가 밖에서 못 놀게 해서 짠했는데 영식이 너라도 놀러 와 주니 고맙다.”
자신이 소녀가 초대한 유일한 손님임을 알게 된 영식은 뿌듯했다. 이따금 영식의 집으로 화영이 놀러 왔다. 고모가 키우는 닭을 구경하기 위해서다. 널찍한 닭장을 갖추었어도 풀어놓고 길러 닭들은 마당을 쏘다니며 지렁이나 벌레를 잡아먹었다.
구, 구구구.
화영은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보리쌀을 마당에 뿌려 닭들을 불러들였다. 닭장으로 보내야 할 때면 그 먹이를 미끼로 바구니로 덫을 만들곤 했다.
숫기가 없던 영식은 화영의 입에 웃음이 걸리게 하고자 넉살을 익혔고, 화영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나약함을 버렸다. 집에서 닭을 잡는 날이면 미리 도망갔던 영식이다. 하지만 남자답지 못하다고 핀잔을 주는 아버지 앞에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하루는, 화영이 책을 읽다 말고 말했다.
“좋아하면 닮는다가 맞아.”
“응?”
“닮아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면 닮는다가 맞지 않니?”
영식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닮고 싶어서 더욱 화영의 행동거지를 따라 했다. 화영의 집에는 동화책이 가득했다. 책도 공유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영식은 그 집을 들락거렸다. 영식의 출입을 의외로 선선히 허락했던 정 사장이 말했다.
“난 네 녀석을 믿는다.”
무슨 뜻인지 곰곰 생각을 굴리다가 고모에게 말했다.
“참말로 무서운 말이다. 영식이 너 정말 처신 야무지게 해야 한다.”
고등학생이 된 화영은 육지의 친척 집으로 갔다. 방학이 되면 서로 만나서 회포를 풀었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신청곡과 함께 서로의 안부를 동봉했다.
고3 개학을 앞두고 화영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사흘 동안 오열했다.
“할머니 인생을 계산해 봤거든. 세상에! 구십 평생에 남한 땅의 오분지 일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거 있지! 부잣집 딸로 태어나 시집와 놓고도 평생을 새장 같은 세상에서 죽어라 일만하고 가셨어. 우리 할머니가 그 정돈데, 다른 할머닌 오죽할까.”
좋아하면 닮아야 하는데도 그녀의 깊은 슬픔에 공감이 안 가고 위로하는 방도를 모르겠다. 처음으로 그녀의 슬픔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곤 속으로 맹세한다. 다음에 또 화영에게 슬픔이 생긴다면 이렇듯 무능하게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겠다고.
할머니를 잃은 뒤부터 그녀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주말마다 시외버스를 탔다. 급기야 수업을 빠지고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이 섬까지 날아들었다. 여행 상대가 과외 선생인 대학생이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방학에도 화영은 섬을 찾지 않았다. 영식에게 편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의 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도 나중에야 들었다. 수산고를 졸업한 영식은 항구 앞 일식 식당의 조리사로 취직했다.

영식이 첫 월급을 탔던 날, 아버지는 억병으로 취해서 아들에게도 술을 권했다.
“지겨운 새끼. 이제야 어른이 되었구나. 다 좋은데 눈빛이 영 틀려먹었어. 어른이면 독한 눈빛을 품어야 써. 니 엄마 같이 사슴 눈깔 달고 다님 이 개같이 험한 세상 절대로 못 견딘다!”
유언이 되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바다에 빠졌다. 해경이 시체를 건졌고, 음주 후 부주의에 의한 실족사로 처리되었다. 오열하는 영식에게 고모가 비아냥거렸다.
“애써 눈물 짤 필요도 없다. 니 아버진 필경 만세 부르고 죽었을 거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도 화영은 섬에 오지 않았다. 화영의 부모도, 아니 마을 사람 모두가 그녀의 이야기를 일체 꺼내지 않았다. 쉬쉬하는 가운데 수상한 소문만 바람처럼 떠돌 뿐이었다.
군대를 가면서 영식도 섬을 떠났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 화영과 함께 돌아왔다. 정 사장 내외에게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서였다.

그때 화영의 배 속에서 자라고 있었던 딸이 어엿한 어른이 되어 영식 앞에 서 있다. 시장닭집의 험한 일을 마침내 치러 낸 뒤였다.
“아빠, 두 달 채운 거 아시죠? 하루도 안 빠졌어요. 지각 한 번 안 했다고요.”
딸이 운다. 성취감? 아니다. 극한 일터로 내몰았던 아버지에 대한 서러움을 토해 내는 것 같다. 영식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딸을 바라보았다.
‘독한 녀석.’
정말로 두 달을 견뎌 낼 줄은 몰랐다. 딸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뭇 아프다.
‘내 딸을 내가 모르다니.’
핏줄에 대한 비밀스러운 상처가 덧난다. 이어서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살아 있을까. 드라마를 보면 소식이 끊어진 어머니가 모피 코트에 멋진 승용차를 타서 버린 자식을 찾아오곤 했다. 어릴 적에는 그런 꿈을 종종 꾸었다. 나이를 먹은 지금은 남루한 모습이라도 좋으니 돌아오기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욱 섬에 머물고 싶다. 화영의 무덤 곁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싶다. 어쩌면 몰래 몇 번인가 섬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보이지 않으니 아쉬움만 삼키고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화영의 고향 집을 지키는 일은 오롯이 영식의 몫이다. 정아에게는 기회를 주어야 했다. 화영의 유언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겠다.
화영의 말에 이어 용우가 해 준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조리사도 타고난 사람이 있긴 하죠. 정아가 그래요.’

딸의 얼굴을 새삼 조목조목 살폈다. 겨우내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거칠어진 피부인데도 제 엄마를 닮아 여전히 탐스럽다. 눈매와 입술을 살피다가 왈칵 치미는 당혹스러운 서러움을 마주하고 만다. 역시 닮았다. 죽는 날까지 인정하기 싫은데도 이제는 도리가 없다. 더욱이 독한 의지에 타고난 재능까지도 ‘그 사람’을 닮아 있다.
‘그 사람’은 영식의 취사병 동기였다. 뛰어난 재능 덕분에 군대에서 ‘그 사람’의 별명은 ‘짬밥스타’였다. 방황하는 화영이 요리에 재미를 붙여 식품 회사에 취업을 했고, 그 회사에서 시행한 다국적 요리 레시피 공모전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휴가를 나와서 알았다. 영식은 ‘짬밥스타’를 그녀의 스승으로 소개시켜 주었다. 바보같이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애인이 아니고, 그냥 고향 친구?’

‘짬밥스타’가 묻는 말에도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연애가 서로 행복하다고 결혼까지 행복한 건 아녜요. 두 사람은 절대로 더 이상 안 돼요! 아가씨 과거도 다 알아냈어요. 그나마 아가씨를 보호하고 싶다면 영식 씨가 협조해요.’

짬밥스타의 어머니가 협박할 때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서 영식의 손에 들어온 ‘그 사람’이 일본에서 보낸 편지도 그녀에게 끝내 건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행복하면 되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병실에서 영식은 묻고 말았다.

‘그 사람, 한 번 만나볼 테야?’
‘아니. 쓸데없는 일이야. 다만 저 애한테는 기회를 주었으면 해.’

야속한 사람. 정아한테 무슨 기회를 주라는 것일까. 우리 딸에게, 내 딸에게 무슨 기회가 또 필요하단 말인가.
“아빠, 무슨 말씀이라도 해 봐요. 저 두 달을 다 채웠다고요!”
눈앞의 사랑스러운 딸이 젖은 목소리로 채근한다. 시장닭집에서 두 달을 견딘 딸이다. ‘그 사람’은 서자였다. 입대하기 전에 후계 수업의 시험으로 ‘그 사람’의 부친은 그를 시장닭집으로 보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약속한 석 달을 무난히 채웠다. 훗날 영식은 시장닭집이 궁금했고 막연한 오기도 생겼다. 어린 용우에게 가게를 맡기고 비밀스럽게 그곳에 취직을 했다. 아내에게는 큰 식당에서 일을 배우러 다닌다고 꾸며 댔다. 한 달을 다니고 지쳐서 포기했다. ‘그 사람’에 대한 열등감만 안고 말았다. 여하튼 의지력에 있어서도 딸은 영식보단 ‘그 사람’을 닮았다는 자괴감이 찾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