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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건성으로 밀지만 말고 흔들면서 쑤셔야지!”
닭을 볶던 구 여사가 한마디 쏘아붙였다. 참지 못하고 대꾸하고 만다.
“파이프가 죄다 깨져서 엉뚱한 곳으로 박히잖아요.”
“대가리 나쁜 것들이 연장 탓한다더니.”
구 여사가 혼잣말로 투덜거린다. 이쯤에서 끝날 일이었다. 재웅이 침묵했다면.
“이거야 원. 통로가 죄 갈라져 지렁이까지 납시네. 완전 부실 공사군. 공사를 다시 하면 간단할 텐데.”
고개를 숙인 채 하수구에 분풀이를 했을 뿐이다.
“뭐가 부실하다는 게냐?”
“네?”
과하게 반응하는 구 여사의 태도에 재웅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놈의 주둥이가 무슨 자격으로 공사를 다시 하네 마네 오지랖이냐!”
“사장님, 전 그저.”
“병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지렁이 나오고 잡초 튀어나온다고 집이 몹쓸 집이냐! 여기만큼 사람 살기 좋은 집이 어디 있다고 그래. 그래서 헐기라도 하자는 게냐? 50년 동안 짱짱하기만 했다!”
“아니, 말씀이 이상하게 진화하시네요.”
“저리 비껴!”
이내 재웅을 떠밀고는 손수 기구를 잡는다. 재웅은 부아가 치밀어 벌떡 일어났다. 구 여사의 손놀림에 가득한 구정물이 줄어들더니 이내 쪼르르 소리를 내며 바닥을 드러낸다.
“일 끝났음 냉큼 갈 일이지, 뭐 하고 있어!”

재웅은 구정물까지 더해진 더러운 몸을 이끌고 블랙이글의 공연장을 찾아갔다. 연습실로 이동해 늦도록 합주에 푹 빠지고 싶었다. 드럼을 맡고 있는 철수가 판을 깨고 만다.
“미안하다. 새벽에 일 나가야 해.”
“임마, 시위하니? 왜 내가 올 때마다 물먹이냐!”
시장닭집에서 달고 온 짜증을 철수에게 풀어놓고 말았다.
“제길, 연습실 사수하려고 지옥 같은 시베리아에서 버티고 왔다. 소리 한 번 맞춰 주는 데도 인색하니!”
“미안하다.”
굳은 얼굴로 돌아서는 철수의 뒷덜미를 재웅이 낚아챘다.
“임마! 친구가 소리가 너무 고프다잖니. 넌 프리랜서라며? 하루쯤 쉬어도 상관없잖아!”
철수가 천천히 돌아선다.
“방세가 밀렸어.”
철수를 더 붙잡지 못했다. 밴드를 반대하는 부모의 집을 나온 그다. 모두 나이를 먹어 버렸다. 손을 벌릴 나이를 넘어 버렸다. 형석에게 물었다.
“클럽 페이는 얼마나 되냐?”
“아직은 십만 원이 안 돼.”
다섯이 나누면 일당이 이만 원이다.
“하긴. 개런티 없는 팀도 있다던데.”
자조의 한숨을 토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지방 자치단체의 축제에 참가해도 고작 이십만 원을 받았다. 그래도 큰돈이라고 기뻐했다. 갑자기 나이를 먹어 버렸다. 꿈을 먹고 만은 살 수 없는 나이가 어느새 블랙이글에도 들이닥친 것이다.
“기운 내자. 어차피 우린 직장인 밴드로 가는 중이잖아!”
애써 큰 소리로 갈무리를 하고는 술판을 벌였다.
억병으로 마시고 집에 들어갔다. 장 여사의 잔소리가 별나게 따가워 짜증을 풀풀 날리고는 더러운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웠다.
갈증이 나서 깨어났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거실에서 백 사장이 홀로 앉아 술잔을 들고 있었다.
“더 마실 수 있겠냐?”
백 사장의 진중한 고독에 압도당해 마주 앉았다. 얼음을 채운 잔에 백 사장이 술을 따라 준다.
“견디기 힘드냐?”
“몸은 괜찮은데, 마음공부가 좀 부족한 것 같네요.”
“보름 견뎠구나. 그 정도면 나쁘진 않아. 그보다 러시아 잠깐 다녀올 생각은 없냐?”
“러시아라뇨?”
“마침 마케팅 지원 자리가 하나 비었다.”
“전 노어도 거의 모르는데요?”
“보조하는 일이니 영어면 돼.”
“시장닭집은요?”
“한 달 채운 걸로 치고, 네 취미 생활은 지원해 주마.”
“그래도 전 조리실 현장으로 가고 싶습니다.”
“아들아, 내 궁극적인 소망을 솔직히 말하마. 너도 알다시피 난 회장님과 함께 내 인생을 회사에 걸었다. 회장님이 계열사를 늘려 가는 동안 나는 차곡차곡 식품회사의 지분을 확보했다. 그 지분이 내 인생의 증거다. 그걸 네가 물려받았으면 한다.”
“그래서 경영 쪽을?”
“물론 조리를 익히는 것이 도움은 되겠지. 넌 어느 정도 익혔다고 여기는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로 아는 사람 앞에 군림하긴 싫습니다.”
“군림이라…… 틀린 말이 아니군. 고, 고맙다.”
“네?”
“잘 자라줘서 고맙다. 본립도생 本立道生 이라고, 뿌리가 튼실하게 뻗어 있으면 가지가 어느 쪽으로 흘러도 거목으로 성장하는 데 문제없다. 한데 왜 꼭 조리 현장이어야 할까?”
“아버지 지시로 알바를 시작했지만, 현장에 있다 보니 서로 협력해서 하나의 음식을 완성해 가는 일이 좋더군요. 박진감 넘치는 분주함도 매력 있고요.”
“어째 밴드 한다는 이유하고 엇비슷하구나.”
“사실 음식하고 음악하고 공통점이 많아요. 창작이고 협동해서 만든다는 점에서요.”
“마케팅에도 창의적인 사람이 필요하지. 조리 이론도 필요하고. 마침 네가 고속 승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술잔을 흔들었다. 시장닭집에 기어이 두 달을 채우겠다는 오기도 술처럼 흔들린다.
“때가 맞아떨어져서 그런다. 러시아에 일도 배울 겸 두 달만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딱 두 달만 다녀오면 뭐든지 후원해 주겠다.”
백 사장은 대화를 나눌 때 타이밍을 잘 맞춘다. 흔들리는 시점에 여지없이 당신의 의중을 밀어 넣는다. 더 이상의 대화는 후회를 부를 것이라고 뇌에서 경고를 보낸다. 재웅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너 지금 취한 거냐?”
“아녜요. 술 다 깼어요.”
시종 숙이고 있던 고개를 세우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내일까지 답을 줘도 된다. 쉬면서 생각해 봐라.”
“잠깐만요, 아버지!”
일어서던 백 사장이 돌아본다. 엷은 웃음이 번지고 있다.
“어째서 시장닭집이어야 하죠?”
이내 백 사장의 웃음이 사라진다.
“정말이지 배울 게 뭔지 모르겠어요. 마귀할멈의 독설이며 전근대적인 시설이며 마치 극기 훈련 장소 같아서요.”
“글쎄. 과연 그럴까?”
“극기 훈련이 맞죠?”
백 사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힘이 들더냐?”
“아, 아닙니다. 쉬세요, 아버지.”
설득의 귀재인 백 사장으로부터 일단 물러났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뒤숭숭한 꿈 때문에 곧 일어났다.
새벽에 살그머니 집을 나왔다. 칼바람을 맞고 거리를 걸었다. 어둑새벽에 이른 하루를 여는 삶들이 펼쳐진다. 청소하는, 식자재를 배송하는, 우유를 싣고 나르는 바지런한 인생들이 재웅 자신의 인생 고민을 사치라고 비웃는 것 같다. 시장닭집에서 십수 년 동안 구 여사의 타박을 견뎌 내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거친 피부들이 뇌리를 가로지르고, 정아의 튼 손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나란 놈은 참으로 어렸구나.”
허연 입김과 함께 탄식이 새어 나왔다.
무작정 걷다 보니 철수의 집 앞이다. 혼자 사는 녀석이어서 만만하면 찾아갔던 곳이다. 창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부르려고 하는데, 불이 꺼진다. 철수가 털 잠바를 두르고 나오다가 움찔한다.
“깜짝이야!”
“너 아침이라도 사 주려고 왔더니, 빨리도 출근하네?”
“알잖아.”
한겨울에도 늦게 나가면 일손을 놓친다고 철수가 말해 준 적이 있다. 인력 소개소까지 어두운 길을 함께 걸었다. 서너 명이 벌써 나와 조악한 사무실 앞으로 화톳불을 피우고 있었다. 철수가 사무실에서 커피를 뽑아서 나온다.
“고생이다.”
그런 말밖에 안 나온다.
“몸뚱이 짱짱하게 낳아 준 부모님이 고맙지, 뭐.”
굳어 있던 철수가 웃었다. 재웅도 비로소 활짝 웃었다. 철수가 덧붙였다.
“삽질하고 망치질하는 거 말이지. 스틱 잡는 힘 키우는 일이야. 드럼은 자고로 손목 힘이잖아.”
“그렇군.”
봉고차가 도착했고, 철수가 호명을 받았다.
“고맙다.”
함께 있어 준 바가 고맙다고 말하며 친구는 일터로 떠났다. 겨울 땀을 흠뻑 흘리고 난 밤에는 이내 드럼 앞에서 오롯한 행복에 빠질 터였다. 차라리 아버지 회사의 조리사로 일할 생각은 없냐는 질문은 하지 못했다. 친구는 다른 일을 찾을 수 있는데도 기꺼이 막노동을 선택했다. 그곳에서 자유를 맛보았다고 했고, 누군가 직업을 물으면 자신 있게 프리랜서라고 대답한다. 누군가에게는 고단해 보이는 일이 그 자신에게는 가장 편한 일일 수도 있다. 아침을 사 주지도 못했다. 해장국집으로 혼자 들어갔다. 백 사장이 던진 숙제의 답이 좀처럼 나오지 않아 술을 곁들였다. 겨우 생각을 정리한 뒤 출근하기 위해 씻으러 들어간 집에서 그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

최 씨의 일이 다시 늘었다. 10시가 넘도록 재웅이 출근하지 않고 있다. 내장을 삶아서 들고 온 나주 이모가 정아 앞에 앉아 일을 거든다.
“그 총각 어제 골이 잔뜩 나서 가는 폼이 어째 위태롭다 했지.”
“몸이 아프거나 무슨 사정이 있겠지요.”
구 여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다고 쉽게 포기할 재웅은 아니라고 정아는 믿었다.
“인사도 안 하고 횅하니 갔다니까. 하필 집이 낡았다는 둥, 안 그래도 끓고 있던 노인네 속내를 긁어 댈 게 뭐야. 젊은 사람이 그나마 오래 버텨 기특했는데.”
고작 보름을 조금 넘겼는데도 오래 버텨 기특하단다.
“참! 정아 너도 낼모레면 끝이라지?”
“네. 개학하니까요.”
“너야말로 진짜 대단하다. 요즘 세상에 너같이 고운 학생이 이런 고생을 두 달씩이나 달게 삼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처음이 힘들었을 뿐이다. 세상이 일이 다 그렇다는 생각이다. 익숙하지 않거나 벅차 보이는 일도 안으로 들어가 견디다 보면 어느새 길이 생겨 있다. 문득 궁금증 하나가 스친다.
“이모, 젊은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아주머니들은 다들 오래 계셨잖아요. 무슨 노하우라도 있나 봐요?”
나이 탓인지 다섯 아주머니 모두 성한 사람이 없다. 허리가, 무릎이, 뼈마디가, 그리고 오장육부가 죄다 고장이 났다며 약을 먹고 파스를 붙이고 일한다. 그런데도 별채 주방보다 더 급박하게 돌아가는 본채의 고된 일을 곧잘 견딘다.
“우리야 자식들이 있잖냐. 세상의 아빠나 엄마는 가족 수만큼 쓸개를 더 품고 있단다. 한두 개 꺼내 줘도 참고 지낼 쓸개가 남아서 또 견디지.”
“그, 그렇겠네요.”
따지고 보면 정아 역시 가족의 힘으로 견딜 수 있었다. 아버지 곁에 머물고 싶어서.
“그만두더라도 사장님 미워하진 말아라. 속은 좋은 양반이셔.”
미워하진 않겠지만, 존경심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나주 이모가 최 씨를 힐긋 보더니 털어놓는다.
“여기 오래 일한 사람 중 사장님 신세 안 진 사람 없어. 나도 한때 고관절이 무너져 걷지도 못했어. 사장님이 병원을 데리고 가시더니 인공관절 수술빌 공짜로 대 줬어. 돈벌레인 당신 자식들 귀에 들어가면 골치 아프니 아무 소리 말라고 당부하시더라.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노인네가 짠하더라. 저 양반…….”
다시금 최 씨를 힐긋 보다가 입을 다문다. 최 씨 부인의 인공 와우 수술 결정도 구 여사의 작품인 성싶다.
재웅의 빈자리가 의외로 크다. 그의 오디오를 건드리지 않고 음악을 참았다. 밉지 않은 허세가 벌써 그립다. 그가 장만해 준 레인지에 물을 끓였고, 그가 가지고 온 차를 타서 최 씨와 둘이 마셨다. 그가 자비로 바꾼 실용적인 압력 호스로 닭을 씻은 다음, 그가 선물한 핸드크림을 발랐다. 그의 작은 개혁은 남은 사람에게 두고두고 도움을 줄 터였다.
‘또 아픈 것일까?’
링거를 꼽고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어울리지 않게 병원 특실에 머물고 있었다. 정말로 ‘백이 있는’ 병원인 듯싶다. 전우애라고 했던가? 병원에 한번 들러 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한다.
‘과민하긴. 어차피 안 볼 사람인데.’
정아는 쓸쓸히 웃고는 별채 주방을 나와 마당을 터벅터벅 걸었다. 그때 본채 주방이 열리면서 재웅이 허겁지겁 달려온다.
“어디 가요? 차 한 잔 타 주고 가야죠!”

먼저 차를 마셨다는 그녀는 뜨거운 물을 담은 잔을 두 손에 쥐고 마주 앉았다. 재웅은 음악을 틀어 놓고 느긋하게 꿀 차를 홀짝거렸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는 하기 싫은 과정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 기억나요?”
재웅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의 모습이 드물게 소곳하다. 아니, 평소의 모습인데도 새삼 그렇게 와 닿는다. 아마도 독한 여자라는 선입견에 파묻혔던 모습이었나 보다. 그녀가 빤히 본다.
그래서요? 하고 묻는 것 같다.
“뭐, 그 힘든 과정을 치르는 도중 지각할 수도 있다 그거죠.”
어제 그녀에게 그 말을 꺼냈던 일이 결정적이었다. 목표를 위해서는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제법 선민사상을 읊어 놓고는 정작 자신이 맥없이 포기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끝까지 여기서 버티기로 했고, 구 여사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힌 뒤에 일터로 돌아온 것이다. 더욱이 이틀 뒤면 그녀는 먼저 이곳을 떠난다. 별로 예쁘지도 않고 독종인 여자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하고 싶다. 그렇다고 임자가 있는 것 같은 여자를 따로 만나기는 부담스럽다. 어쩐지 단둘이 커피 한잔 마시러 가는 일도 부담스러워 한다 싶었다. 사귀는 남자가 있었던 것이다.
“남자 친구는 잘 달랬어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떠보고 만다. 그녀가 흠칫하다가 차분히 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설마 했던 답이 나오자 돌연 꿀 차가 쓰다.
그녀가 본채 주방으로 건너갔다. 아까는 못 느꼈던 한기가 보조 주방에 가득하다. 재채기를 한 번 하고는 최 씨의 일을 거들었다. 돌연 최 씨가 이맛살을 모은다.
“칼질 그만두고 딴 일 해.”
목소리가 날씨보다 차다.
“대장님, 왜 그러신지.”
“술 냄새 풍기고 칼 잡지 마.”
단호하게 재웅을 밀어 낸다. 항변하지 못하고 재웅은 허드렛일을 찾아야 했다. 기본을 망각했다. 자신이 근무했던 조리실에서 부하 직원이 술 냄새를 풍기면 그대로 내쫒아 버렸던 재웅이다.
‘제길, 양치를 몇 번씩 했는데.’
얼결에 느슨한 일감을 붙들고 앉아 있던 재웅의 눈길에 정아의 공책이 잡힌다. 살짝 펼쳐 보았다.
「식품업자의 양심이 국가 경쟁력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에 관해.」
전공에 관한 논문 초안 같다. 이내 몰입해 읽어 나갔다.

정아가 마지막으로 근무하는 날, 재웅은 그녀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제의했다.
“아빠하고 약속이 있어요.”
단박에 거절한다. 퇴근 전에 차나 한 잔 더 타 주라고 까탈을 부려 보조 주방에서 마주 앉았다.
“고마웠어요.”
재웅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덕분에 떨어져 나가지 않고 버티는 중이거든.”
여전히 갸웃한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어요. 고맙다는 의미로 내가 전화번호 하나 선물할게요.”
전화번호 하나 받는 일인데도 주저주저하다가 저장하는 그녀가 야속하다.
“위급할 때 전화하면 어떤 서비스도 가능한 번호니까 잘 보관해요.”
“풋, 알았어요.”
경직된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깔린다. 웃어 줘서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웃기는 반응이다.
“그건 그렇고, 남아 있는 가련한 중생을 위해 당부하실 말씀은 없으신가?”
“글쎄요. 사장님 말씀은 무조건 옳다고 여기라는 말씀은 이미 해드렸고.”
“일도 일이지만, 정아 씨도 사장님 때문에 힘들었죠?”
그녀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연다.
“솔직히 처음엔 일보단 사장님이 더 힘들었어요. 나중에 알았어요. 사장님은 우리와 다른 시대에 살고 계셨어요. 그래서 소통이 어긋나 공연히 상처를 받곤 했던 것 같아요.”
“다른 시대라면, 조선 시대 할머니와 첨단 사회의 우리 정도?”
“사장님은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다 모든 시간을 정지시켜 놓으셨어요. 배고픈 시절에서 배부른 시절이 오고, 자식들이 어여삐 자라 주던 어느 순간을 최고의 시간으로 설정하신 거죠. 우리가 먼 과거를 불우하게 여기는 것은 현재의 풍요와 비교하기 때문이잖아요. 여기 낡은 건물도 그렇잖아요. 지푸라기 지붕을 얹은 흙집에 살던 사장님에게는 당시엔 대궐 같은 기와집이었겠죠. 하지만 제가 상처를 받은 만큼 사장님이 받으신 상처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요컨대 사장님 최고 인생의 유일한 증거물로 남은 이 건물을 모욕하는 일 같은 거 말이에요.”
“그건 돈만 빨아먹는 자식들이 건물을 올리자고 해서 민감하셨던 거라고 들었는데.”
“네. 덕분에 재웅 씨가 억울한 매를 맞으셨지요. 그런데요, 50년 건물을 해체하는 일이 사장님께는 가족을 해체하는 결과물로 느껴지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분하고 논리적인 그녀의 설명에 재웅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그녀가 얼굴을 붉힌다.
“개인적인 추측을 너무 드러냈네요.”
“아뇨. 박애주의자의 멋진 통찰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제가 쉽게 일하고 싶어서 사장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어쩌면 저를 위한 시나리오겠지요. 속 편하게 시나리오를 짜는 게 제 특기거든요.”
썩 유익한 특기가 아닐 수 없다. 겪을수록 현명하게 독하다. 그녀에게 질문할 생각이 없었던 의혹이 저절로 입 밖으로 나온다.
“자식들도 모르는 사장님의 숨겨진 재산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아 씬 아는 게 있어요?”
“몰라요. 전혀.”
아버지에게 시장닭집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버지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러시아 파견 운운하던 말은 없었던 것처럼 굴어서 재웅이 당황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한마디 충고를 건넸다.

‘거기 사장님에게 행여 무례한 행동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이라 밝히는데, 그곳 구 여사님은 우리 회사의 중요한 분이시다.’

‘중요한 분’이라는 말을 재웅은 대주주로 정도로 해석해 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떠났고, 재웅은 남았다.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예감은 빗나갔다. 한동안 날마다 핸드폰을 살폈다. 그리고 분주한 일상으로 편입되면서 그녀의 존재감이 기억의 비중에서 줄어들었다. 이따금 그녀와 공유한 음악을 들을 때, 그리고 회사의 독한 여자를 발견할 때면 오롯이 그녀를 추억했다.
재웅은 자신이 무언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그런 말을 종종 듣다 보니 실감했다. 혹자는 재웅이 과묵하고 차갑게 변했다고 했다.
“갑자기 어른이 되었구나.”
백 사장은 다른 각도로 아들의 변모를 판단했다.
“너한텐 서러울지 몰라도 네 엄마나 나는 보기 좋다.”
부자간의 술자리에서 건넨 백 사장의 말에 재웅은 쓸쓸한 웃음으로 응수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좋은 모습이라니 다행이네요. 사실은 어른이 되게 해 준 은인이 한 명이 있어요.”
“은인?”
“네. 누군지 지금 밝힐 수는 없고요. 훗날에라도 은혜를 갚을 기회가 오면 아버지가 한 번쯤 도와주세요.”
“기꺼이.”
해가 바뀌었다. 재웅은 여전히 정아를 닮은 사람을 길에서 보면 고개를 돌려 살펴보았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전우애로 참석해 주고 싶다는 제법 여유로운 욕심도 가졌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시장닭집에서 헤어진 지 1년 만이었다.


―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