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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겨울나무 같은 몰골의 여자가 정아를 발견한다. 희미하게 웃는다. 정아는 떨어지는 눈물을 꿰뚫고 여전히 노려보았다.
“너, 언제 온 거냐?”
뒤늦게 정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영식이 당황하며 물었다. 정아는 환자를 쏘아보면서 오열했다.
“엄만 정말이지 끔찍이도 잔인하다!”
“이 녀석이!”
영식이 잡아끌었지만 정아는 버텼다.
“어쩜 끝까지 이기적이야! 아빠가 엄마한테 뭘 잘못했어? 평생 엄마를 위해 살았잖아!”
“환자에게 뭐 하는 짓이야!”
쫘악!
생애 처음으로 영식에게 뺨을 맞았다.
그날 이후 영식은 웃음을 잃었다. 마지막 한 달 동안의 간병에서 나오는 웃음은 모조리 거짓으로 보였다. 더는 말을 못 하는 어머니 곁에서 영식은 날마다 이야기를 건넸다.
“청각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단다. 정아 너도 좋은 말을 많이 해 둬라.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정아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미안하다고 말했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한 번만 의식을 되찾고 말을 해 달라고 애원했다.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 달라고.
“엄마, 사실은 아빨 사랑하지? 그래서 결혼한 거잖아. 사랑한 게 맞지? 맞으면 눈을 깜박여 봐.”
정아는 이내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아빠, 봤죠? 눈을 깜박였어요. 아빨 사랑한다고 했어요!”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영식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의 귀에 대고 주문처럼 뇌까렸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어.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맙다.”
맥박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뜨거운 사랑을 토해 내며 어머니를 보냈다.
그날 이후 거짓 웃음마저 내던진 영식은 제철을 다 누려 버린 꽃처럼 서서히 시들어 갔다.

***

늦잠을 잤다. 눈을 비비고 창을 보니 겨울나무 가지가 칼바람을 견디고 있다. 꿈에서 보았던 어머니의 앙상한 얼굴이 겹쳐진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음식에 대한 영식의 집요한 걸음은 오직 한 사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특히 김치에 대한 욕심이 남달랐다. 정아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당신이 세상에서 최고야.’

아버지의 김치를 먹어 본 뒤 어머니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갑자기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갸웃하며 뒤따른 정아는 울고 있는 영식을 보았다. 훗날 알았다. ‘세상에서 최고야’라는 말은 ‘그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처녀 시절 어머니는 ‘그 사람’의 김치를 먹고 반했다, ‘그 사람’과 헤어지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를 다시는 못 먹게 됐다는 말로 결별을 표현했다. 영식은 ‘그 사람’의 솜씨를 능가하고자 애를 썼다. 지나치게 솔직한 어머니는 ‘맛있네.’라는 칭찬에는 후했지만, ‘최고’라는 찬사는 해 주지 않았다. 영식의 도전은 계속되었고, 무려 십수 년이 지난 그날에야 비로소 ‘세상에서 최고’라고 어머니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다.
식탁으로 나오니 이미 상이 다 차려져 있다. 영식은 당신의 걸작인 김치와 함께 가볍게 먼저 식사를 끝냈다고 개수대의 빈 그릇으로 알려 준다. 상에는 으깬 두부를 된장과 버무린 톳과 생굴 등이 차려져 있다. 새콤하게 익은 김치를 먼저 한입 넣었다. 이내 몸이 웃는 것 같다. 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는 재주가 유영식표 요리의 으뜸 매력이다. 김치의 유산균은 무채 등의 당분을 좋아하고 산소를 싫어한다. 잡균은 산소가 넉넉할수록 번창한다. 그래서 김치를 맛있게 익히려면 통의 여백을 배제하고 꾹 눌러 담아 일관된 온도에 저장해야 한다. 정아는 지식으로 얻었고, 아버지는 경험으로 얻었다. 경험은 지식을 압도한다. 특히 요리의 세계에서는.
시계를 힐긋 보고는 서둘러 먹었다.
알람을 대신하던 도마 소리도, 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오늘은 없었다. 이제는 노골적으로 마주하기를 피한다. 쌓아 올린 부녀의 정을 애써 무너뜨리려는 무모한 의중도 엿보인다. 어머니의 병원비와 상실의 후유증으로 돈이 거의 말랐는데도 시골집을 사들였다고 한다. 가게를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가게는 온전히 남을 것이다. 정아가 약속한 바를 이행한다면. 그때까지 견디기 위해 찬그릇을 남김없이 비워냈다.

최 씨가 다시 출근한 보조 주방에는 여유가 흘렀다. 한편 본채에는 묘한 긴장감이 떠다닌다. 나주 이모라고 불리는 아주머니가 귀엣말을 해 준다.
“아침에 오 사장이 와서 뒤집고 갔어.”
오 사장이라면 구 여사의 둘째 아들이며, 다른 동네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환갑을 넘긴 장남은 유능한 손자 덕분에 프랜차이즈 치킨으로 성공해 부를 누리고 있지만, 다른 핏줄들은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한다.
“막무가내로 건물을 올리자고 해서 한바탕했지.”
빌딩을 지어 1층에서는 장사를 하고, 나머지 층은 세를 놓자는 의견이지만, 진짜 의도는 층별로 자식들에게 무상 분양하자는 것이란다.
“연로한 당신 돌아가시면 재산 싸움이 뻔하니 미리 교통정리를 해 주라는 게지.”
“사장님은 아드님보다 더 정정하시던데요.”
“그러게. 손자들이 자기 아버지한테 바람들을 넣나 봐. 사장님이 엄청난 재력가라는 말은 있어도 당신 말고는 아무도 정확한 재산을 모른다잖아. 미리 하나씩 알아내려고 아들딸들이 작당을 한 게지.”
“사장님이 속상하시겠네요.”
“미련한 양반이시지, 뭐. 저승에 가지고 갈 것도 아니면서 왜 그리 악착같이 모았는지 모르겠어. 남들은 성공한 노인네라고들 하는데, 내 눈엔 불쌍하더라. 늙어서 최고 훈장은 자식 농사가 아니겠어?”
자식 농사를 줄줄이 망쳤다는 구 여사다. 나주 이모는 자식이 옹골지게 자라 명문대를 다닌다는 자부심 덕분에 구 여사의 구박을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를 떠나서 정아는 나주 이모를 존경한다. 구 여사 밑에서 일한 지가 무려 15년이란다.
과연 구 여사는 신경이 예민했다. 주방을 지휘하면서 연방 매운 힐책을 토해 낸다.
점심을 먹고 보조 주방에 들러서 꿀 차를 탔다. 최 씨는 여느 때처럼 자신의 일에만 열중이다. 병원 일은 서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재웅 또한 최 씨가 같은 병원에 머물렀던 바를 모르는 듯했다.
“오늘 사장님 저기압이에요.”
정아는 재웅에게 넌지시 경고했다.
“이미 접수해서 조심 중입니다.”
“다행히 둔하진 않으시네요.”
“봐요, 온풍기도 꺼놓았잖아요.”
“틀렸어요. 또 감기 품으려 든다고 한 소리 들을 걸요?”
“어, 난 잔소리보단 얼어 죽는 게 나은데? 근데 정아 씬 어떻게 마귀할멈을 잘 요리하죠? 비결이 뭡니까?”
확실히 그가 변했다. 공손한 태도는 아니지만 제법 고참의 짬밥을 인정하고 있다.
“비결은 단순해요. 사장님의 말씀은 무조건 옳다고 인정하세요. 우리가 지금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건 다 고생한 어른들 때문이라고 하셔도 토를 달지 말고, 밥 한 톨이라도 남기면 지옥 가는 법이라고 하셔도 토를 달지 말아요. 닭이 새고기라고 말씀하셔도 무조건 인정하시고요. 그리하면 그쪽이 평화를 얻으실 거예요.”
“무슨 사이비 경전 같군. 사장님은 교주고.”
“경장사상으로 받아들이세요.”
어느새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그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다.
“잠깐! 닭이 새가 맞긴 하나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재웅이 제법 진지하게 물었다.
“사장님 말씀으론 맞대요. 새가 아니면 왜 날개가 있냐고 하시더군요. 사실 조류, 꿩과에 속하긴 하잖아요?”
“그럼 펭귄이나 타조도 새인가?”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에 잠기는 재웅이다. 그 모습이 문득 귀엽다. 늙은 대학생이 알바 뛰러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던 그가 있어서 좋다. 종일 아빠 생각이며 어두운 생각을 담고 말없이 일을 해 왔다. 추위보다 더 진절머리 나는 진부한 긴장감을 그를 통해 풀어내는 요즘이다. 그리고 퇴근길에 그를 태우러 오는 여자를 두어 번 보았다. 귀티가 흐르면서 정아 자신보다 월등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 덕분에 그가 남자여서 불편하지도 않다. 지금처럼 차를 마시면서 그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유익한 덤이다. 덕분에 아침부터 시작된 우울한 기분이 어느 정도 씻겨 나간다. 본채 주방으로 건너가려고 일어서는데, 긴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소리친다.
“새가 맞네!”
그가 똥집을 가리켰다.
“조류는 이빨이 없어서 근위에서 음식을 분해하잖아. 저 똥집이 조류의 증거 아니겠어요?”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양 과장되게 어깨를 편다.
본채에 들어갔더니 홀에 낯익은 얼굴이 보여 정아는 이맛살을 모았다. 진구가 낯선 친구들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모른 척하고 주방으로 숨어서 일했다.
“이년이 어째 여기만 처박혀 있냐. 손님 나간 거 안 보이냐? 홀 먼저 빨리 치워야 할 게 아냐!”
구 여사에게 쫓겨 쟁반을 들고 나갔다. 진구를 외면한 채 테이블의 빈 그릇과 술병을 치웠다. 진구가 기어이 이름을 부른다.
“정아야.”
돌아보지 않은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왜 그래? 인사도 어렵니?”
“미안. 바빠서.”
힐긋 보고는 재빨리 걷다가 바닥의 전선 막대에 발끝이 걸렸다.
와장창!
쟁반이 엎어지면서 그릇과 유리잔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황급히 수습하다가 깨진 유리 조각을 건드렸더니 손가락이 따끔하다.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구 여사가 한달음에 달려온다.
“이년이 정신머릴 어딜 팔아먹었냐! 하기 싫은 일 시켰다고 꼬장 부리는 게야?”
“죄송해요.”
“컵은 대체 몇 개나 깨 먹는 게냐, 쯧쯧!”
이쯤에서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진구가 정아의 손가락을 잡아채는 바람에 일이 커지고 만다.
“이리 줘 봐. 이런, 피가 나잖아!”
진구가 정아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성을 낸다. 이내 구 여사를 노려본다.
“할머니, 종업원이 다쳤는데도 고작 싸구려 유리잔 타령밖에 못 합니까!”
“뭐야?”
구 여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진구가 정아를 거칠게 일으켜 세운다.
“이딴 데 당장 그만둬!”
“놔!”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지? 이게 요리 배우는 짓이니? 또, 이딴 야비한 늙은이 밑에서 뭘 배운다고 그래. 내가 일류 요리사 붙여 줄 테니, 그만둬!”
“놔. 놓으란 말이야!”
진구의 완력에 완강히 저항했다. 그때 구 여사가 악을 쓴다.
“나가! 둘 다 냉큼 꺼져!”
“사장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머리를 조아리는 정아를 진구가 힐난한다.
“뭘 잘못했다고 빌어!”
“그만 좀 해!”
급기야 정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일이야! 난 여기가 절실하단 말이야! 알지도 모르면서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방해? 방해를 한다고? 내가?”
이내 축 늘어지면서 진구가 정아의 손을 놓는다.
“내가 너한테 그 정도 비중도 없었던 거니? 너 때문에 다른 여자들 다 거절했어. 모델 여자가 술 사 준다고 했어도 거절했다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그의 버릇이 튀어나오고 만다. 자신에 공손하지 않는 여자에게는 냉정한 행동거지가. 그런데 막상 겪어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다.
아무렴.
정아는 그의 감정을 무시한 채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부탁했잖아. 날 내버려 두라고.”
“요것들아! 정신 사납다. 나가서 싸우라니까!”
구 여사가 다시 소리친다.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든다.
“손님들도 많은데,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재웅이었다. 진구는 재웅을 노려보면서 떠밀려 밖으로 나갔다.
“죄송해요, 사장님. 금방 들어올게요.”
정아도 뒤따랐다. 골목에 두 남자가 부릅뜬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적당히 하시죠. 군바리가 민간인한테 폐를 끼치면 골치 아프잖소.”
재웅이 충고를 건넸다. 진구는 정아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재웅에게 비릿하게 말한다.
“그쪽은 자릴 피해 주시지.”
진구의 주문에 재웅은 정아를 보았고, 정아는 고개를 가벼이 끄덕였다.
“그러지요.”
정아의 뜻에 따르겠다는 양 재웅은 선선히 안으로 들어갔다.
“저 남자 때문이니?”
진구가 재웅이 사라진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묻는다. 그야말로 뜬금없는 질문이다.
“같이 커피를 마시는 모양이 다정해 보이더군.”
“커피라니?”
재웅에게 붙잡혀 가게 앞에서 차를 마신 날이 떠오른다.
“설마 너, 날 감시했던 거니?”
“그날 아침에 네가 워낙 답답하게 굴어서 종일 머리가 아팠어. 너와 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저녁에 이야기를 하고 싶어 왔다가 저 남자가 네 손을 잡고 찻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을 뿐이야.”
“마음대로 생각해. 다만 여기 일하는 거 방해만 말아 줘.”
“내일 부대 들어간다. 이대로 귀대하면 두고두고 머리가 아플 것 같아서 못 참겠더라. 마침 친구들이 턱을 낸다기에 여기로 장소를 정했을 뿐이야. 한데 넌 나를 피하더라. 참을 수 없어서 네 이름을 불렀어.”
“진구야. 부탁이다. 그냥 가 주라.”
“내가 너한테 그 정도 위치도 못 되는 거니? 케이푸드 사장 아들인 내가 이딴 허접한 가게에 와서 할망구 타박이나 들어야 하니?”
“취한 것 같은데 일찍 가서 쉬어.”
“안 취했어. 차라리 취했으면 좋겠다. 말짱해서 미치겠다. 그래, 그럼 하나만 묻자. 왜 꼭 이 닭집이어야 하니?”
집요함은 인간의 품격을 추락시키는 일등 공신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더 실망시키지 않고 그만 가 줬으면 좋겠는데도 그는 더 추락하고 만다.
“정말 그 남자 때문이야?”
그건 아니야, 하고 말하려 했다.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다.
“솔직히 네가 피곤하다. 그래, 마음대로 생각해.”
“유정아.”
진구가 불쑥 다가와 어깨 위로 손을 짚는다.
“기억나니? 네 엄마 아플 때 너 힘들었잖아. 기댈 아름드리나무가 필요하다면 그건 내 몫이라고 했잖아. 아직 유용해. 그리고 난 나한테 의지하는 사람에겐 반드시 보상을 한다. 아까 한 말은 사과할게.”
어깨를 누르는 그의 손을 정아는 거칠게 뿌리쳤다.
“한창 바쁜 시간이야. 들어가야 해.”
정아는 돌아서서 바삐 걸었다. 다행히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저쪽에서 급히 몸을 돌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재웅의 모습이 보인다.

재웅은 돌아서면서 불퉁거렸다.
“멍청한 자식. 안아 줄 거면 으스러지게 껴안고 위로해 줄 일이지. 피곤한 정아 씨 어깨만 누르고 있어.”
가슴을 쓰다듬었다. 이상하다. 아까부터 명치가 아프다.
“제길, 뭐가 또 고장 난 거야!”
불퉁거리며 본채 주방을 통과하는데, 구 여사가 부른다.

정아는 홀에 앉은 진구의 일행을 지나쳐 주방으로 곧장 들어갔다.
“죄송해요, 사장님.”
설거지통 앞에서 고무장갑을 끼려는데, 구 여사가 말린다.
“뒷 주방에나 먼저 가 봐.”
“아, 네.”
보조 주방으로 들어갔다. 재웅이 손짓으로 앉은뱅이 의자를 가리킨다.
“손 좀 빌립시다.”
그의 손에는 연고와 밴드가 들려 있다.
“어서요! 사장님이 나보고 발라 주라고 약 주셨어요.”
구 여사의 지시라고 하니, 순순히 엄지로 짓누르고 있던 집게손가락을 내밀었다.
“살짝 찔린 거예요.”
“별말씀의 겸손을 다.”
그가 덥석 잡더니 고인 피를 짜내며 정색한다.
“피 나잖아요! 죽을 수도 있으니 가만있어요.”
병원에서 정아가 했던 말투까지 흉내 낸다.
“핸드크림은 잘 바르기나 해요?”
“조금.”
“아직도 손이 텄잖아요. 손이 트면 죽을 수도 있으니 신경 좀 쓰셔.”
재웅이 약을 넉넉히 발라 문지르고는 밴드를 붙여 준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래요. 사장님 엄명이십니다.”
“괜찮아요.”
“대신 내일 일찍 나와서 내장 작업 하래요.”
오늘은 내장이 꽁꽁 얼어서 왔다. 녹지 않으면 작업을 할 수 없다. 선선한 곳에서 자연해동을 시켜야 하는데, 추운 날씨 탓에 좀처럼 녹지 않아 다음 날 작업하려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닭 내장을 좋아하는 인구가 꽤 되는데도 판매소가 드문 이유는 신선도 유지의 어려움에 있다. 내장 한 가지를 배달하기 위해 매일 새벽 냉장차를 운행하는 업체는 거의 없다. 시장닭집은 새벽마다 도계장에서 운송되는 생닭에 내장과 똥집 등의 부산물이 곁들여 반입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닭 내장은 정식 식품관리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먼저 가기 미안하면 꿀 차나 한 잔 타 주시든가.”
재웅의 제의에 따랐다. 진구 일행이 가게를 나간 다음에 천천히 나서고 싶어서 느긋하게 차를 탔다. 올드 팝송과 뜨거운 차가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오늘따라 최 씨의 반응이 도드라져 보인다. 음악에, 소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바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의 종교였던 성스러운 침묵을 깨는 일이 종종 미안했는데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찾아든다. 덕분에 음악을 더 편하게 즐긴다. 같은 공간의 두 남자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밀려든다.
“고마워요.”
저절로 마음이 입 밖으로 나오고 만다.
“전우애죠.”
“……?”
“전방에서 극한 상황에 닥치면 미웠던 동지와도 우애를 쌓거든요. 우리도 전우라 그겁니다.”
미웠던 동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재웅이 이쪽을 연방 힐긋거린다.
“정아 씬 정말로 요리를 배우려고 여길 온 건가요?”
조심스럽게 묻는다.
“네, 맞아요.”
“왜 꼭 여기여야 했는지 궁금해서요.”
“여기가 아니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뭐, 아까 그 잘생긴 친구 말이 틀린 건 아닌 것 같아서. 일류 요리사까지 붙여 준다던데.”
“여기가 맞아요. 요리를 하려면 여길 반드시 거쳐야 해요.”
“실용주의 입장으로 보자면, 영양사 스펙 보강으론 한식과 양식 자격증이 가장 무난하다고 알고 있어서 말입니다.”
“거기까지만 하세요. 수상한 알바생 아저씨.”
그쪽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는 투로 대꾸했다.
“사람은 말이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과정을 거칠 줄 알아야 한대요.”
그가 스스로 자신을 설명하려고 든다. 정아는 말꼬리를 붙들지 않고 침묵했다. 지금 욕심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음악과 차였다.

혼자 보조 주방에 남아서 재웅은 바닥의 기름 떼를 박박 문질렀다. 낮 동안 가득했던 기묘한 에너지가 오후부터 스르르 빠져나갔다. 간간이 가슴이 찌르르 저려 온다.
‘뭐야? 백재웅. 남들 연애하는 거 처음 봐!’
쓴웃음으로 갈무리하고 청소를 얼추 마쳐 가는데, 나주 이모가 뛰어 들어온다.
“재웅 총각, 하수구 막혔어!”
“또요?”
울상을 하고 창고로 갔다. 얼마나 자주 막혔기에 숫제 뚫는 기계까지 갖추고 있다. 일주일 전에도 막혀서 재웅이 뚫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막힌다더니.’
분주한 본채 주방으로 기계를 옮겨 놓고 철사 봉이 달린 쇠줄을 밀어 넣었다. 하수구 초입이 온통 닭기름투성이다. 추운 날씨로 죄다 덩어리로 뭉쳐 있다. 구 여사가 좀처럼 온수를 사용하지 않은 탓이다.
‘지독한 노인네!’
속으로 저주하면서 손잡이를 돌리며 한 손으로는 쇠줄을 밀어 넣었다. 넘치지 직전인 구정물 속에 잠긴 손이 시리고 가렵다. 쉽게 뚫릴 것 같지는 않다. 수상한 아픔으로 가슴 속을 맴돌던 어떤 덩어리가 화풀이 대상을 만난 양 꿈틀거린다. 급기야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