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순정 본능 2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커피 한 잔을 내려 손에 들었다. 창문 너머로 푸른 냄새가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교정에 우람한 자태를 뽐내는 전나무도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무……. 흔한 이름은 아닌데. 그래도 그 아이 일리 없어. 그 아이는…….”
그녀의 기억 속 나무는 참 볼품없는 아이였다. 윤나무 선생처럼 멋지지도 않고 당당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고 있었다. 안쓰럽고 미안하고 그리워서. 그녀의 어린 시절 한때 정말 행복했던 그때를 같이했던 소년이었기에. 그리고 그녀처럼 거의 같은 시기 불행해진 소년이었기에 더 그랬다.
무엇보다도 이름이 같아서 그런 것 같았다. 최근 어린 시절의 기억 속 나무란 소년을 자주 떠올리게 된 것도. 너무나 오래 까맣게 잊고 살았던 자신이 미안할 정도로 많은 추억을 공유한 그 아이가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윤나무 선생 때문에 자꾸만 강제로 기억 소환을 당하고 있었다.


1. 엉뚱한 인연


꽤 늦은 시각까지 교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한 해 행사 총괄 계획을 수립 중이던 그녀는 당직 선생의 기침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퇴근해야 자신도 문단속을 하고 퇴근할 수 있다고 눈치를 주어서.
이미 어두워진 교정을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향하며 그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아버지께 가는 날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주말을 같이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집에, 이젠 어머니가 없는 그 집에 아버지는 혼자 살고 계셨다. 한동안 임대를 주거나 비워 두거나 했는데, 이번 근무지인 학교가 가까워서 굳이 그곳에 살겠다고 했다. 무슨 고집에서인지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지. 그녀로서는 마치 다정다감했던 부부였음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여서 탐탁지 않았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 대신 그녀는 학교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어 독립했다. 아버지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사실, 어른이 되고 보니 부부지간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린 시절과 달리 일방적으로 엄마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요즘은 어쩌면 어머니만 힘들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이왕 가끔 보기로 했으니 좋은 얼굴로 보자 마음먹을 정도로 아버지와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좋아지고 있었다. 단지 그곳으로 갈 때마다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 눈에 선해서 잔뜩 날이 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저어, 이제 퇴근하세요?”
“아, 예.”
또 윤나무 선생이었다. 반갑지 않은 사람을 보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했다. 그날 이후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진 않았지만 뒤따르는 시선은 여전했다. 그런 데다 모두가 퇴근한 시간, 갑자기 나타난 그는 그녀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일이 많으신가 봐요.”
“예. 누구와 달라 전 담임이라.”
그녀의 대답은 참 뾰족하고 간결했다. 말을 건네기가 어려울 정도로 차가운 말투에 보통 사람들은 더는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지독할 정도로 차게 굴었다. 그럼 상대방도 그녀를 피하기 마련이었다.
그도 그래 줬으면 했다. 유난히 시선을 끄는 스타일의 그가 그녀에게 어떤 식의 관심이든 보이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로 인해 여자 선생님들의 부러움과 여학생들의 시기나 질투 따위는 딱 사절이었기에. 그래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망설이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 붙여 확실히 했다.
“그리고 선생님 제 스타일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남자, 여자가 아니라 동료로서도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 없어요. 그러니까…….”
“저한테……아니,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죠? 그것도 많이.”
의외였다. 보통이 사람들과 달리 그녀의 말을 가로채서 그가 물어왔다. 하얗게 질려서 가 버려야 하는데 그는 달랐다. 오히려 그녀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예?”
“저를 보는 시선이 왠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
그의 말이 너무 의외여서 대답할 수 없었다. 아니,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랬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당사자 앞에서 말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런데 그는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아쉬움을 모르고 편히 살아온 한 선생과 같은 부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선생이 늘 그랬기에. 다른 사람의 입장 따위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지금 눈앞의 그처럼.
“지금도 마치…….”
“예.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요. 이렇게 막무가내인 것.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르는 것도. 피곤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나요? 이 시간까지 일하고 있었다면.”
“아, 예. 당연히…… 죄송해요.”
그래서 더 날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교육 현장을 취미 삼아 나온다는 한 선생과 같은 부류라면 굳이 예의를 갖출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그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보자 그녀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만 보면 차가워지는 자신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람이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며 이번 기회에 확실히 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죄송해하셔야죠. 그런데 한 가지 여쭤도 될까요?”
“아, 예. 하세요.”
“혹시 어린 시절 삼청동에 살았어요?”
“아, 아뇨.”
잠시였지만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뭔가 그녀가 묻는 의도가 궁금해서 얼른 대답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뭔가 숨기는 사람처럼 두려움이 보였다. 그럴 리 없는데.
“그렇죠?”
“그런데…… 그건 왜?”
“제가 어릴 때 알던 선생님과 같은 이름의 아이가 있어서요.”
“그 아이가 그립나 보네요. 많이.”
“아뇨!”
너무나 빠르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마치 그 아이를 그리워하면 안 되는 사람처럼. 냉큼.
“좋은 아이가 아니었나 봐요.”
“그런 것은 아니에요. 그냥 동생 같은 아이였는데 갑자기 이별했거든요. 그리고 어렸고. 딱히 그리워할 정도로…….”
‘사실 그 아이와 저 비슷한 시기에 엄마를 잃고 외톨이가 되었거든요. 우린 운명 공동체 같은 존재라고 할까요? 그래서 걱정스러워요. 어떻게 사는지, 잘 있는지…….’
속으로 그녀는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픈 기억이었기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걸 놓치지 않은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모른 척 넘어가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라고 말하면 끝날 것을 어쭙잖은 위로를 하려는 그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보아하니…… 그 아이와의 기억이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잘 살 겁니다. 다들 잘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혹시 제가 그 아이가 아니어서 마음에 안 드는 건가요? 그 아이를 생각나게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상하네요. 선생님이 제 마음에 들고 안 들고 따위 무슨 문제죠? 마음에 든다고 달라질 것이 있나요? 선생님은 자신이 모든 여자, 하물며 동료의 마음에까지 들어야 하나 보죠? 그런데 제가 그렇지 않아 보여서 화가 나나 봐요. 어떻게든 마음에 든다며 따라다니는 추종자 패거리가 되는 것을 보아야만 이런 식의 반갑잖은 호의를 접을 건가 보죠?”
“그게 아니라…….”
그는 일방적인 그녀의 말에 놀란 듯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너무 적개심을 드러낸 것 같아 미안했지만, 이왕 엎질러진 물이니 그대로 두기로 했다. 주워 담으려는 노력 따위 할 필요 없다고 자위하며.
“그런데 전 좀 아주 달라요, 그런 점에선. 전 누군가의 마음에 드나 안 드나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거든요. 단지 주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나 안 끼치나가 더 중요할 뿐. 그러니까 오늘까지만 하셨으면 해요. 또 그러시면 정말 마음에 안 들 것 같거든요.”
“!”
“그럼 이만. 더는 선생님께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네요.”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자신의 소형차에 몸을 실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언뜻 백미러를 보았을 때 멀리 장승처럼 선 그의 모습이 의아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아직 어색하기만 한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누군가를 걱정할 마음의 여유마저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늘 점심에는 중요한 손님이 올 거다. 식사 같이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라.”
“예.”
늘 그런 식이었기에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찬혁을 소개해 줄 때도 그런 식이었기에 불편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엔 적어도 그 ‘중요한 손님’이 남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에 누가 오든 상관없었다. 이미 그녀에게는 찬혁이 있었고 아버지가 원한 사윗감으로 찬혁은 완벽한 남자였다. 중요한 손님이 그 누구든 신경 쓸 필요 없어 건성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