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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다 (개정판) 1화

프롤로그


8년 전.
따뜻한 남쪽 나라, 오키나와에서 돌아오니 한국의 칼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나 2월의 우중충한 날씨도 이제 곧 만나게 될 그녀를 생각하면 아무런 방해가 되질 않았다.
연수는 오피스텔 근처 꽃가게에서 꽃다발을 사고 가벼운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서은은 꽃 선물을 유독 좋아했다. 연수는 그게 귀여웠다. 다른 여자들처럼 명품백이나 비싼 옷, 고가의 액세서리가 아닌 저처럼 화사하고 어여쁜 꽃을 좋아하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의 안목이 자랑스러웠다.
아직 학생 신분이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뷰의 오피스텔은 아니었지만, 근처에 상가도 형성되어 있고, 교통도 편리한 곳에 위치한 이곳은 그들만의 아지트이자 보금자리였다. 일정보다 하루 앞당겨 들어와 서은은 그를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녀를 놀래켜 줄 생각에 연수는 미소를 지으며 오피스텔 문을 열었다. 현관에 못 보던 남자 구두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순간 이상한 직감으로 머릿속이 찌르르 울렸고, 그의 손에서 꽃다발이 툭 떨어졌다. 툭 내려앉은 그의 심장처럼.
연수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가자 서은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연수 씨, 갑자기 어떻게……? 내일 온다고 했잖아요.”
방 안 가득한 열기로 인해 연수의 눈이 뒤집혔다. 그 와중에도 여자를 때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남자의 머리채를 잡고 침대에서 끌어냈다.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씩씩거렸다.
“연수 씨, 이 사람은 잘못 없어요. 내가 꼬셨어요.”
서은이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매달리자 그 틈에 남자는 옷가지를 대충 챙겨서 침실을 나가 버렸다.
“이거 놔! 저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제발 부탁이에요. 차라리 나를 죽여요. 내가 잘못했어요!”
연수가 서은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분이 안 풀렸다. 죽을 만큼 패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분노가 가라앉질 않았다.
연수는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우산, 커피포트, 컵, 시계 등 그의 손에 잡히는 것들이 전부 바닥을 나뒹굴었다.
서은이 옷을 대충 입고 나와 떨어진 물건들을 줍기 시작했다.
“하루의 시간을 주지. 내일까지 짐 챙겨서 나가.”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변명을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서은은 아나운서가 꿈이었다.

“아버지가 송화건설 회장님이라면서요?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방송국에 한마디만 해 주면 돼요. 나보다 얼굴도 못생기고 성적도 낮은 다른 애들은 줄줄이 붙는데, 왜 나만 안 되는 건데요? 이게 다 든든한 백이 없어서 그렇다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그녀의 애원을 외면할 수 없어 연수는 용기를 냈다. 아버지에게 한 번만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런 별 볼 일 없는 여자애나 만나고 다니는 거 못 본 척해 주는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뭐가 어쩌고 어째? 네가 지금 그런 시시한 여자애한테 목매고 있을 때야? 당장 헤어져!”

서은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 남자가 아나운서로 가는 지름길이었다면, 차라리 연수와 헤어지고 그 남자를 만났어야 했다. 이렇게 그의 뒤통수를 칠 것이 아니라.
엄청난 배신감에 연수는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울면서 붙잡는 서은을 뿌리치고 오피스텔을 나왔다. 급하게 차를 몰고 가다 거리 어디쯤에서 사고가 나고 말았다.
그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보내졌다.

* * *


6년 전.
“계십니까?”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이연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누구세요?”
문이 잠겨 있지 않았던지 누군가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이연은 힘없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연아, 혼자 있니? 엄마는?”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인 박응규였다.
“엄마 잠깐 나가셨어요. 웬일이세요?”
이연은 그 남자가 싫었다. 쳐다보는 눈빛도 이상하고, 능글맞은 웃음도 꼴 보기 싫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이런 남자와 오랫동안 동업을 했을까.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그녀였지만 이 남자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장례식도 끝나고 마음이 헛헛할 것 같아 위로라도 해 주려고 왔어.”
그는 거실의 소파에 앉으며 이연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도드라져 보이는 타이트한 노란색 티셔츠와 숏팬츠를 입고 있었다. 긴 생머리는 어깨에서 찰랑였고, 눈망울은 크고 반짝거렸다. 다리도 길고 예쁘게 빠져 있어, 다리에 알배기면 어쩔 거냐고 엄마는 태권도를 그만두라며 자주 말하곤 했다.
이연은 우두커니 서서 망설였다. 몸에 부대자루라도 둘러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냥 나가 버릴까? 방에 들어갈까? 그래도 손님인데 마실 거라도 줘야 되나?
“아, 덥다…….”
할 수 없이 이연은 부엌에 가서 시원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박응규는 이연의 손을 만지며 물컵을 받았다. 이연은 소름이 끼쳐서 재빨리 손을 뺐다.
“손이 참 보드랍고 예쁘구나. 이렇게 예쁜 손이 이제부터 고생하게 생겼으니 어떡하니?”
그는 자못 안쓰럽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회사도 넘어가고 이제 이 집도 경매에 붙여질 테니, 거리로 나앉게 생기기 않았니?”
아버지가 운영하던 건설자재 회사는 근래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부도가 날 위기에 처해 송화건설에 넘어갔다고 했다.
잠도 못 주무시고 열심히 일했는데 왜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엄마는 말했다.
“어디 갈 데도 없지 않아? 친척도 없고.”
아저씨가 상관할 일 아니에요, 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걸 이연은 꾹 참았다.
“너희 엄마한테도 한 번 얘기했다만 아저씨랑 같이 살지 않을래? 엄마랑 아저씨랑 결혼하면 거리로 쫓겨나지 않아도 되고,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밥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을 텐데.”
지난번에 장례식장에서 엄마랑 둘이 하던 얘기가 그거였나?
“아저씨 아니어도 저희 먹고살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그녀의 말에 박응규는 컵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예쁜 얼굴로 거리에 나앉으면 어떤 놈이 짓밟을지 몰라. 두렵지 않니?”
“그게 무슨…….”
“보면 볼수록 예쁘단 말이야. 특히 이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
그는 갑자기 이연의 허리를 끌어당겨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이연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그 손가락을 꽉 물어 버렸다.
“악!”
비명 소리가 났고, 곧이어 번개라도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뺨에 느껴졌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는지. 오냐오냐 귀여워해 줬더니 넌 위아래도 없냐?”
“아저씨야말로 딸 같은 아이한테 이게 무슨 추태예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입술 좀 만진 것 가지고 유난 떨기는.”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당장 나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
“하, 네가 경찰을 불러? 이년이 보자보자 하니까.”
달아나려는 이연을 뒤에서 박응규가 붙잡아 억지로 방에 데려가려고 했다. 이연은 발로 박응규의 발등을 내리찍은 뒤 돌아서서 무릎으로 남자의 급소를 걷어찼다. 박응규는 너무 아파서 소리도 못 내고, 급소를 움켜쥔 채 동동거렸다.
이연은 이어서 돌려차기로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이연은 재빨리 현관문을 나섰다. 마침 엄마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연아, 무슨 일이야?”
그녀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엄마가 물었다.
“엄마, 그 아저씨가 날 겁탈하려고 했어.”
“뭐? 어떤 아저씨?”
“아버지 동업자 아저씨 말이야.”
그 말에 엄마는 마당에 놓인 빗자루를 들어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그 남자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감히 네 놈이 내 딸을 건드려? 이 악마 같은 놈. 그렇게 싫다고 해도 들러붙더니,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엄마는 눈이 뒤집혀서 빗자루로 마구 남자를 내려쳤다.
“모녀가 아주 쌍으로 미쳤구만. 내가 지금 어떤 호의를 베풀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딴 호의 필요 없으니까 꺼져. 다시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이 망할 놈.”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 네년들이 무사할 줄 알아?”
눈을 희번덕거리며 박응규가 나가자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평소에 막말은커녕 인상 한번 쓰지 않는 엄마였기에 이연은 가슴이 아파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집 정리되는 대로 떠나자. 이 동네는 터가 못 써.”
이연은 엄마의 옆에 앉아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 외나무다리


그가 아버지의 실종을 보고 받은 것은 사흘 전이었다. 집에 경호원까지 두고 사시는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 실종되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소식을 들은 순간 그의 뇌리에 스친 것은 혹시 아버지의 계략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영국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며 한국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 아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비장의 한 수. 그러나 만약을 대비해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신문에도 뉴스에도 송화건설 회장 정만수의 실종을 대서특필하고 있었으니 확인하지 않고는 속단할 수 없었다.
연수는 집의 보안을 해제해 3층의 창문을 열어 집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아버지의 침실과 욕실을 확인하고, 혹시 서재에 계신가 싶어 들어가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잠시 서재 창가에서 가로등으로 밝혀진 마당을 내다보고 있는데, 복도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들리고 문손잡이가 덜거덕거렸다. 연수는 커다란 책상 밑으로 잠시 몸을 숨겼다.
가벼운 발소리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문이 닫혔다. 여기저기 훑어보고 다니던 그 발은 곧 책상으로 다가왔다.
연수는 책상으로 다가온 사람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훅 끌려오는 느낌이 가벼운 것으로 미루어 상대는 여자임이 틀림없었다. 그의 가슴을 치고 달아나는 여자를 뒤에서 잡아 넘어뜨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위에서 내리눌렀다.
여자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누구지? 여긴 왜 들어왔어?”
마스크를 벗기자 얼굴이 드러났다. 도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어리고 예뻤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원하는 게 뭐야? 빨리 말해. 경찰 부르기 전에.”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노려보면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연수의 힘에 압도당해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찰나 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경비원일 것이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 뒤 여자를 일으켜 책상 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연수가 한국에 들어온 사실을 아직 아무도 모르고 있으니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되었다.
숨을 죽이고 경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불이 켜졌다. 방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여기 계신 거 알고 있습니다. 나오시죠.”
이런, 들켰군.
그는 할 수 없이 천천히 일어나 뒤로 돌았다. 책상 건너편에 아버지의 오른팔이자 비서인 윤 실장이 서 있었다.
“하하, 윤 실장님.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국에 들어오신 것을 조금 전에서야 알았습니다. 행적을 숨기려고 두 번이나 경유를 해서 오셨더군요. 그래서 짐작을 해 봤죠. 몰래 입국해서 어디 계신 걸까.”
“아버지 어디 계시죠?”
그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윤 실장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실종되신 분을 여기서 찾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정말 실종되신 거 맞아요? 그렇다면 모든 책임을 윤 실장님께 물을 수밖에 없는데.”
그의 협박에도 윤 실장은 여유로웠다.
“책임지라 하시면 지겠습니다.”
“뭐, 좋습니다. 정말로 아버지가 실종되었다 칩시다. 찾는 것은 경찰의 몫이고, 회사는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면 될 테니, 저는 굳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전 그만 영국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평생 일구신 회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시려고요? 정 회장님 다음으로 지분이 많은 사람은 김진영 이사고, 김 이사는 시시때때로 이 회사를 집어삼킬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상어 떼처럼 달려들어 회사를 갈가리 찢어 놓을 적들은 아주 많습니다만, 오너의 아드님께서 아무 상관 없으시다면 저야…….”
송화건설. 어머니의 이름 송화를 그대로 딴 회사 이름. 10년 전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뒤 아버지는 그때부터 더욱 일에만 몰두했다.
어머니의 이름이 걸린 회사를 상어 떼에게 넘겨주고, 그는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을 것인가.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일단 회장님 직무대행을 하셔야죠. 회장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회사를 지켜내셔야 합니다.”
제법 비장하고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말투였다.
“저는 회사 경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건 차차 배우시면 됩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하지 않습니까?”
점점 이 모든 상황이 아버지의 연출인 것 같은 의심이 짙어졌다.
“제가 회사를 말아먹으면 어쩌시려고.”
“그 정도로 능력 없는 분 아니잖습니까.”
연수는 능력이 없다기보다 의지가 없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다니지 마시고 2층 침실을 쓰십시오. 돌아오실 때를 준비해 방을 새로 꾸며 두었습니다.”
윤 실장이 나가려고 할 때 연수가 입을 뗐다.
“그만 나오지. 여기 도둑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습니다.”
연수는 책상 쪽을 바라보며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그새 마스크와 선글라스, 모자까지 다시 쓰고 있었다.
“저 여자는 뭡니까?”
윤 실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글쎄요. 뭘까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여자는 창가 쪽으로 물러서는 듯하더니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창문을 단번에 부수고, 말릴 새도 없이 밖으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