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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다 (개정판) 2화


그들이 있는 곳은 3층이었다. 3층에서 떨어지고도 무사할 수 있을까?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니 까만 그림자가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건물 옆에 선 커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땅으로 뛰어내린 게 틀림없었다.

* * *


“정말 그렇게 하고 면접 갈 거야?”
문간에 기대선 재현이 거울에 비친 이연의 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헬멧을 들고 바이크 재킷을 입은 그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죄다 외모치장에 쏟아부었는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반짝반짝했다.
이연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한숨을 꾹 참았다.
“스타일리스트 면접이라면서 그렇게 입고 온 애를 누가 뽑아 주겠어? 내가 면접관이라면 넌 당장 탈락이야.”
박시한 초록색 티셔츠에 펑퍼짐하고 긴 남색 치마, 하얀 양말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머리는 집 근처 허름한 미용실에서 거금 28,000원을 투자해 펌을 했건만, 머리는 꼬불거리다 못해 라면을 끓여 먹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말려 있었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기초화장품만 간신히 바른 얼굴은 마치 흑백 사진처럼 희멀건 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피부에선 윤기가 나고,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했다.
“스타일리스트가 다른 사람만 멋지게 만들어 주면 장땡이지.”
“넌 제대로 꾸미면 미스코리아 뺨치게 예쁠 텐데, 왜 맨날 그러고 돌아다녀?”
까만 크로스백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서는 이연에게 재현은 못마땅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이연은 입 아프게 설명하기 싫었다.
이연은 재현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고, 그가 건넨 헬멧을 썼다.
“면접 끝나고 결과 문자로 보내줘. 딱히 기대는 안 하고 있겠지만.”
BK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 이연을 내려 주고 재현은 휭하니 사라졌다.
대한민국 제일가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답게 사옥은 높고 웅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데스크에 있던 여직원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무래도 연예인들 드나드는 회사라 일반인의 출입 통제가 엄격한 것 같았다.
“스타일리스트 면접을 보러 왔어요.”
“성함이?”
“손이연입니다.”
직원은 명단을 확인해 보더니 이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스타일리스트라면서 차림새가 왜 이래? 하는 표정이었다.
“10층 인사과로 가세요.”
이연은 직원이 주는 일일패찰을 목에 걸고 검색대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TV에서 많이 보던 아이돌 가수들이 내렸다.
인사과에 들어가자 이름을 확인한 직원이 잠깐 기다리라며 말하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대표이사실로 오라고 하시네요. 대표님께서 직접 면접을 보시겠답니다.”
대표가 직접?
“거기가 어딘데요?”
“바로 위층입니다.”
이연은 꾸벅 인사를 하고, 이번엔 계단을 이용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비서가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확인 없이 바로 안내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소파에 다리를 꼬고 비스듬하게 앉은 30대 중반의 남자가 이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대표이사치고는 지나치게 젊어 보였다. 대표실에는 대표말고도 여러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스타일리스트 면접을 보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본인 스타일은 전혀 신경 안 쓰나 봐요?”
대표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굉장히 세련되게 차려입은 여자가 물었다.
“제 스타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요.”
“본인 스타일이 그렇게 형편없는데, 다른 사람을 멋지게 변신시킬 수 있겠어요?”
같은 여자가 다시 물었다.
이연은 가방에서 준비해 온 포트폴리오와 추천서를 꺼내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그것들을 받아 대표에게 건네주었다.
“패셔니스타 스타일샵 대표, 문선희 씨에게 소개받은 사람입니다.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고, 실력을 보라고 하시더군요.”
그 남자가 인사과 부장인 모양이다.
“패셔니스타에서 일했다고? 얼마나?”
대표가 포트폴리오를 뒤적이며 물었다.
“재작년 1년간 일했습니다.”
“문선희 씨가 여간 깐깐한 사람이 아닌데 1년이나 붙어 있었다니. 그래도 끈기는 있는 모양이네.”
“계약한 기간은 채워야 하니까요.”
그녀의 대답에 대표는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버티느냐도 이 바닥에선 중요하지. 그럼, 작년엔 뭘 했지?”
그는 포트폴리오를 다른 직원들에게 돌렸다.
“학교를 다녔습니다.”
“학교? 아직 졸업을 못 했나?”
“돈을 직접 벌어서 학교를 다녀야했기 때문에 아직 못했습니다.”
“뭐, 좋아. 실력도 알겠고 사정도 알겠어. 난 어떤 스타일이 어울릴 것 같지? 나를 한 번 변신시켜 봐.”
그는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었고, 코는 뭉툭하며 눈매는 날카로웠다. 키는 177~8 사이, 몸무게는 68~9. 양복은 명품이었으나 브라운 톤은 약간 노란 피부색과 어울리지 않았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모노톤이었다.
“제가 제안한 대로 해 보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아무도 내 옷차림에 대해 불만은 없는 것 같지만,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일단 머리는 갈색으로 염색하고, 살짝 펌을 하시면 인상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더 어려 보이게 될 거예요. 옷은 갈색보다는 남색이나 빨간색, 파란색 같은 좀 더 확실한 색을 입는 편이 피부하고도 어울리고, 회사 대표로서 결단력을 돋보이게 하겠지만 넥타이는 어울리지 않으십니다. 눈매가 날카롭고, 목이 짧은 편이라 넥타이가 답답해 보이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손이연 씨 제안대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 한번 바꿔 보고, 마음에 들면 당장 채용하도록 하지.”
마음에 들면 채용한다고? 떨어진 건가? 어차피 큰 기대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BK같은 엄청난 규모의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변변한 자격증도, 경력도 없는 조무래기 스타일리스트를 채용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인사를 꾸벅하고 뒤돌아섰다.
재현의 말대로 제대로 꾸미고 왔어야 했나?
그때, 문이 열리고 온통 명품으로 치장한 배우 조아란이 들어섰다. 아역으로 데뷔해 결혼까지 한 그녀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스타일은 늘 치렁치렁하고 장식이 과했다. 치렁치렁한 걸로 따지면 현재 이연의 차림새도 만만치 않았지만, 조아란은 번쩍거리는 목걸이에 길게 매단 귀걸이, 몇 개를 겹쳤는지 모를 팔찌에다가 한겨울도 아닌데 모피 베스트를 걸치고 있었다.
조아란은 도도한 자세로 이연을 훑어 내렸다.
“이 후줄근한 앤 뭐예요?”
그녀를 지나쳐 나가려고 할 때 이 대표가 이연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 기다려 봐.”
이연은 걸음을 멈췄다.
“아란이 너, 아직 협찬 못 받았지?”
대표의 물음에 아란은 콧방귀를 뀌며 반대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까짓 협찬이 뭐 대수라고? 내가 직접 산 내 옷을 입고 갈 테니 걱정 말아요.”
“너의 그 독특한 안목에 맞는 심각하게 이상한 옷?”
“왜 이래요? 패션의 패자도 모르는 사람이? 언제부터 내 패션에 관심 있었다고.”
“손이연 씨. 이리 와서 조아란 패션에 대해 평가 좀 해 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난감하다. 솔직한 평가를 했다가 조아란에게 무슨 트집을 잡힐지 알 수 없었다. 스타일리스트로 고용해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런 건 뭐하러 시킨담?
“어머, 대표님. 저 무시하시는 거예요? 저런 후줄근한 애한테 내 패션을 평가받다뇨?”
“나도 평가받았어. 스타일리스트에게 패션을 평가받는 게 뭐가 이상해?”
“어머, 꼴에 스타일리스트래. 미치겠다, 진짜.”
그 말에 열이 확 받는다. 내가 너보다 10배는 감각이 뛰어나거든, 쏘아주고 싶은 걸 오랜 시간 단련된 감정 훈련으로 참았다. 이보다 더한 대접도 받으면서 일했다. 사람들은 대개 외모로 1차적인 평가를 하게 마련이다. 그들이 두 번 다시 그녀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실력뿐이었다.
“조아란 씨 패션은 워낙 유명하니 제가 굳이 평가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이연의 말에 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뭐야, 이 반응들은. 내 패션이 어때서? 요즘 트렌드를 꼭 따라야만 패셔니스타가 되는 건 아니잖아. 나처럼 개성 있게 연출하는 것도 나름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패션만큼이나 성격도 독특하네. 지금까지 아란이 맡은 배역만 해도,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는 캐릭터가 많았던 건, 어쩌면 이런 성격 탓일 수도 있겠다.
“연말에 있을 시상식에 입고 갈 드레스 한 벌도 협찬을 못 받으니 하는 말이야. 스타가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치렁치렁한 이미지를 원할 브랜드가 어디 있어? 자, 겁내지 말고 말해 봐. 어떻게 변신시키는 게 좋을까?”
대표의 격려에 힘입어 이연은 조아란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키는 약 172cm. 단발머리에 쌍꺼풀 진한 눈, 가슴은 별로 크지 않고, 다리는 길었다.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슬림한 몸매였다. 굴곡 있는 예쁜 몸은 아니었지만, 이런 몸이 오히려 옷 입히기는 더 편했다.
아란은 못마땅하다는 듯 새침한 눈을 치켜뜬 채 이연을 쳐다보았다.
“옷은 최대한 심플한 디자인과 색상을 선택하는 게 좋겠죠. 나머지 아웃핏이 간결한 대신 머리는 길게 웨이브를 넣고, 눈이 예쁘시니까 눈동자의 사랑스러움을 최대한 부각해서 메이크업을 하면 한층 이미지가 부드러워 보일 거예요. 물론, 본인이 소화를 못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 준들 소용은 없겠지만요. 어떤 멋진 패션이라도 그 사람의 태도가 받쳐 주지 않으면 다 쓸데없어요.”
이연의 말에 아란은 발끈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다가왔다.
“네 말은 내가 그런 패션을 소화 못 한다는 거니?”
“심플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하진 않으니까, 너무 그렇게 발끈하실 필요 없어요.”
너무 도발했나? 어차피 채용될 것도 아닌데 상관없겠지?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어쩔 건데?”
“그 말은 한 번 시도해 보겠다는 뜻인가?”
대표가 끼어들었다.
“좋아요. 대신 성공 못 하면 얜 당장 잘라요.”
“아직 채용도 안 했어. 서 부장, 손이연 씨를 스타일리스트 팀에 데려다주고, 일 한번 시켜 봐.”
그렇게 해서 이연은 인사부장을 따라 씩씩거리며 쫓아오는 조아란을 뒤에 매달고, 스타일리스트 팀이 있는 5층으로 내려갔다.
“이쪽은 스타일리스트 팀을 총괄하는 배미나 팀장입니다. 여기는 손이연 씨. 조아란 씨 스타일을 바꿔 보겠다는데, 도와주시죠.”
배 팀장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아란 씨 스타일을 바꾼다고요?”
지금까지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배 팀장뿐 아니라 그 팀에 소속되어 있던 다른 직원들 모두 신기하다는 듯 이연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패션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스타일을 바꾼다는 건지…….”
“일단 맡겨 보시죠.”
인사부장이 나가고, 조아란은 거울 앞 의자에 앉았다.
“나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하자.”
다들 아란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일단 메이크업은 화사하게, 눈 화장에 특히 신경 써 주세요. 섀도는 핑크나 피치로 해 주시고. 최대한 사랑스러워 보이게. 가발은 어디 있죠?”
이연의 물음에 누군가 옆방을 가리켰다. 그녀는 가발 중에서 특히 머리카락이 풍성하고, 웨이브가 자연스럽게 들어간 밝은 갈색의 긴 가발을 가져와 아란의 머리에 덮어씌웠다.
아란은 눈을 감고 있다가 다 되었다는 말에 눈을 떴다. 그리고 거울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스타일은 처음인데…… 뭐, 나름…….”
“잘 어울리는데요?”
메이크업해 준 직원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립스틱은 섀도와 맞춰서 같은 색으로 부탁해요.”
립스틱까지 바르고 나자 얼굴이 완성되었다.
“자, 이제 옷을 갈아입을게요. 옷은 어디 있죠?”
배 팀장이 수백 벌의 의상이 걸린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연은 거기 걸린 옷들 중에서 아이보리색 바지 정장을 꺼내 왔다.
“뭐야. 이런 허여멀건 한 정장을 입으라고?”
아란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했지만, 옷을 갈아입고 나와 전신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나쁘지 않은데요?”
“잘 어울려요. 굉장히 세련돼 보여요.”
사람들이 칭찬을 마구 던지자 아란은 마지못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클러치를 매치하고, 은색 하이힐을 신어 보세요.”
스타일링을 끝내니 아란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까와는 180도 달라져서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진작 스타일 좀 바꾸자고 했잖아요. 이렇게 멋있는데.”
배 팀장의 말에 아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부턴 태도가 중요해요. 어깨는 펴고, 허리는 죽 늘이세요. 당당하게 걷되 건방져 보여서는 안 돼요. 시선은 부드럽게 처리하고,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띠어요.”
이연의 코치대로 아란은 거울 앞에서 연습을 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다 됐으면 올려 보내라는데요?”
전화를 받은 직원이 이연과 아란을 보며 말했다.
아란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사람들이 전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떤 사람은 눈을 비비며 재차 확인하기도 했다.
“와우! 난 전혀 다른 사람이 들어온 줄 알았네. 이게 누구야?”
대표는 아란을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아까 이연에게 그런 몰골로 스타일리스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냐고 물었던 여자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인재를 몰라보다니. 문선희 씨가 추천할 만한 이유가 있었네. 당장 채용하도록 하지. 내일부터 스타일리스트 팀에서 근무하도록 하세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우리 잘해 봐요.”
아란이 나가려는 이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첫 출근. 그렇게도 피하려 했던 길을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오게 되다니.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건가.
운명은 무슨 개뿔. 이건 아버지가 파 놓은 함정에 불과했다. 속수무책 걸려들 수밖에 없는 치밀한 함정.
“떨리십니까?”
뒷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연수에게 윤 실장이 물었다.
“아무 생각 없습니다.”
그의 대답에 윤 실장이 웃었다.
“긴장하셔야 될 텐데요. 피 한 방울만 흘려도 득달같이 달려와 살점을 물고 늘어질 인간들이 아주 많습니다. 오늘 임시 이사 회의에서 그들의 실체를 보게 될 겁니다.”
윤 실장은 걱정스럽다는 듯 을러댔지만 표정은 무덤덤했다.
“뭔가 대책을 강구하셔야죠. 저만 믿고 있다가 큰코다치면 어쩌시려고?”
그가 마련해 놓은 대책이 뭔지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회사 정문엔 조금은 재수 없는 후배이자 말끝마다 그의 신경을 긁는 재주가 있는 강신재가 말쑥하고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대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