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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사랑 1화
01.
“전생 체험이요?”
“응. 생각 있어? 이번에 잡지 모델들 특집 기사로 ‘모델들의 전생 체험’이라는 타이틀을 기획 중이거든. 근데 모델들이 참여를 꺼려해서 혹시 하려는 사람 있으면 스태프도 상관없는데, 어때?”
“글쎄요.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
“예주 씨. 그러지 말고! 응? 지금 줄줄이 거부하는 팔자에 예주 씨마저 이러면 어떻게 해?”
예주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에디터를 질린 듯 쳐다봤다. 1시간 전부터 자신에게 전생 체험에 참여하라는 둥 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둥 별의별 방법으로 자신을 꼬시고 있었다.
예주는 저번 주에 촬영 일지를 받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전생 체험 소재는 매번 여름 납량 특집을 기획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였다. 하지만 그 전생 체험을 진행하는 박사가 성추행으로 한 번 기소된 전과가 있던 사람이란 게 문제였다. 그러니 어떤 모델이 무방비한 상태로 그 남자 앞에서 눈을 감고 있을까. 아무리 카메라가 돈다고 해도.
그 탓에 모델들 세 명이 거부 의사를 밝힌 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후 촬영 스태프들한테 그 손을 뻗친다는 거였고, 이번에는 예주 차례였다.
“그래도 불안하단 말이에요.”
“그거 법원에서 인정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잠깐 논란이 된 것뿐이야. 별거 아니라니까? 오히려 예주 씨 평소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모델들하고 서 있어도 꿀리지 않는다는 말이 많은데, 혹시 알아? 이참에 모델로 데뷔할지.”
예주는 그 말에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던 예주는 170 정도의 키에 늘씬한 몸매를 가졌다. 주변 동료들도 모델에 도전하라 여러 번 권장했지만 실상 스태프로 참여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어떻게 체중 관리를 해?’
그게 그녀가 모델 일에 도전할 마음도 먹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잘 먹고 잘 지내는 건 그녀의 인생 모토였다.
더군다나 예주의 나이가 아무리 이 중에서 어리다고는 해도 촬영 스태프로 일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28살이란 나이를 먹고 이 바닥에서 4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생해 왔던 그녀가 저런 말에 홀라당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예주는 팔을 슬쩍 뺐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팔목이 욱신거렸지만 최대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 특집이 중요한 건 저도 알겠어요. 하지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예주 씨, 정말이야?”
“네.”
“정말로?”
“네. 정말의 정말로.”
“하아……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예주는 이 인간이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긴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에디터는 한숨을 탁 쉬더니 그녀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 달 상여금 200% 어때?”
“2, 200%?”
예주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에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는 잠깐 생각했다. 그저 전생 체험 한 번 하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는 거로 200%라니. 남는 장사였다.
“250%는 안 돼요?”
“…….”
예주는 불안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어두운 천장을 쳐다보니 왠지 잠이 솔솔 오는 거 같았다. 괜히 이상한 짓 당하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했지만 그래도 돈 받고 전생체험을 한다는 건 가만 생각해 보니 남는 장사라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었다.
‘그래, 사진도 찍고 밖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별문제 없겠지.’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솟아나는 불안감을 상여금이라는 세 글자로 막았다.
이윽고 촬영이 시작됐다.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고 창문 밖에서는 촬영용 카메라가, 방 안에는 무음 카메라로 이중으로 촬영이 진행됐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박사가 들어와 그녀를 내려다봤다.
예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박사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생에 대해 믿으십니까?”
예주는 잠깐 당황했다. 아니, 그냥 촬영을 하면 되지 갑자기 믿느냐니. 이런 특집 기사는 대체적으로 형식만 갖춘 편이 많았었다. 그렇기에 예주도 얼추 형식만 갖추고 촬영이 진행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예.”
“당신의 전생이 무엇인 거 같습니까?”
“음…… 공주?”
“다들 자신의 전생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죠. 나는 과거에 어떤 인물일까를 생각하면 늘 자신은 인간이었고 아주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었을 거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전생은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박사가 눈을 깜빡이며 손을 딱 쳤다. 약간 멍했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박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뒤로 살짝 누르니 의자가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예주는 자신의 몸이 의자에 눕혀지자 아늑함을 느꼈다.
박사는 침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상황에서 침착한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전생 체험에 들어가겠습니다. 몸에 힘을 푸시구요. 자, 제가 들려 드리는 소리에 집중하세요.”
예주는 박사가 자신의 눈꺼풀을 살며시 감기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들려오는 똑딱거리는 자명종 소리. 묘한 기분에 예주는 몸에서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서서히 잠기는 듯한 기분.
박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
“어떤 기분이십니까?”
“……졸려요.”
“자아, 상상해 보십시오. 아주 어두운 방안에 예주 씨는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걷습니다. 아주, 아주 천천히. 한참을 걷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근데 저쪽에 문이 하나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뭔가…… 있는 거 같아요.”
“좋습니다. 제 소리에 맞춰 문을 여시는 겁니다. 자, 하나 둘 셋!”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예주의 의식이 멀어져 갔다.
* * *
“제가 왕비였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첩? 뭐 그런 거지.”
“에이, 무슨 말이에요. 아닌가? 좋은 건가.”
예주가 음료수를 마시며 특집 기사를 담당한 AD랑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AD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억 안 나? 자기 막 울고 그랬다니까.”
“슬퍼서 울었나?”
“아니. 무서워서 같은데?”
“무서워서요?”
“응. 살려주세요! 저는 아니에요! 죄가 없어요! 폐하! 폐하! 죽이지 마세요! 이렇게.”
그렇게까지 표현할 필요는 없는데……. 예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강렬한 모습을 보이는 AD를 바라봤다. AD는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전생 체험은 반이 거짓말이고 반은 자신이 봤던 걸 구현해 낸다니까. 예주 씨가 감명 깊게 본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온 걸 착각한 거 아니야?”
“그렇겠죠?”
예주가 다 마신 캔을 구겨 휴지통에 던지자 AD는 씨익 웃었다.
“아니면 진짜거나.”
이후 예주는 계획되어 있던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나서야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작가로서 여했던 경험만 있던 그녀에게 직접 인터뷰를 하고 촬영까지 하는 일은 처음 겪었으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씻는 것보다는 침대를 택했고 그 위에 털썩 쓰러지니 잠이 솔솔 오는 걸 느꼈다. 예주는 눈을 감고 오늘 이른 아침 경험했던 전생 체험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녀의 기억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가 다시 소리가 들리면 돌아왔다. 그사이에 기억은 없지만 마치 꿈을 꾼 듯했다. 기억을 되찾은 예주는 가장 먼저 자신의 목을 만졌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온몸의 털은 곤두서 있었다. 눈을 떴음에도 실감이 나질 않아 계속해서 입을 벌리고 있던 그녀에게 촬영 감독이 끝났다는 사인을 보낸 뒤 불을 켜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살려주세요, 죽이지 마세요라…….”
예주는 AD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꺼림칙했다. 그저 재미로 하는 전생 체험이라지만 이 정도로 몸이 격렬하게 반응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나쁜 기분이 들자 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 뒀던 맥주를 꺼내 한 모금 크게 들이킨 다음 탁자 위에 내려놨다.
“뭐가 왕비야, 왕비가.”
숨을 탁하고 쉬자 문득 더운 날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5월 17일이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날씨임에도 무척이나 더웠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무의미한 숫자 세기라지만 30줄에 다가가는 그녀에게 생일은 한 살 더 먹는 날이었다. 예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뒤 한 살을 더 먹는구나.
“예주 씨. 어제 전생 체험한 거,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알아낸 거라뇨?”
한창 서류를 정리하던 예주는 어제 대화했던 AD가 다가와 묻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AD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 있잖아. 왕비, 첩인가? 아무튼. 예주 씨 전생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
“글쎄요?”
예주는 기껏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한 말을 들어 기분이 찝찝해졌다. 하지만 눈치 없는 AD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어제 궁금해서 찾아봤거든?”
“아, 그래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했다. 할 일 없으면 내 일이나 도와주지. 그녀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걸 모르는 AD가 말을 이었다.
“혹시 이거 알아?”
AD는 포스터 한 장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뮤지컬 홍보용 포스터였다.
“이거 그거잖아요. 이번에 홍보하는 천일의 앤인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볼린의 사랑 이야기? 그런 거로 알고 있어요.”
“맞아. 내가 보기에 자기 이거 같아.”
“이거라뇨?”
“이 사람! 앤 볼린이 자기 전생 같다고!”
“네?”
예주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봤다. AD는 답답한 듯 미간을 좁히더니 말했다.
“예주 씨도 전생에서 사형당했지?”
“저야 모르죠. 그렇게 말한 건 AD님이니까요.”
“그래. 근데 이 앤 볼린도 사형당했어. 자기 남편인 헨리 8세에 의해서!”
“그래서요?”
“더군다나 봐봐. 여기 앤 볼린이 사형 당한 날짜, 5월 19일. 자기 생일도 5월 19일 아냐? 어쩜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 내가 보기에 자기 딱 앤 볼린 맞는 거 같다니까?”
짐짓 황홀한 표정을 짓고 감동했다는 듯 환상에 빠지는 그의 모습에 예주는 불쾌감을 느꼈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 이 일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는데 대뜸 와서는 네 생일이랑 여자가 죽은 날이랑 같다느니 개소리를 하는 탓에 예주의 미간에 실선이 그어졌다. 그녀와 함께 작업을 하던 작가가 일어나 AD를 말리자 그제야 정신 차리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람은 좋은데 눈치가 없어서 탈이라니까.”
“하하…… 그러게요.”
예주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 계속해서 쌓여 있는 찝찝함은 그녀를 따라다녔다.
아침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망상은 저녁이 다 돼 가는 시점에서도 그녀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다음 달에 실을 기사에 대해서 회의하는 자리에서도 예주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예주 씨,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있는 거 같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아무 일 없어요.”
“아무 일 없으면 회의에 집중하지. 오늘 야근하고 싶어서 그래? 내일 예주 씨 생일이라고 특별히 쉬게 해 줬는데 오늘 개판 치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예주는 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꾸짖는 팀장의 말에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이어진 회의에서 최대한 그 생각을 지운 채 진행했고, 저녁 시간이 될 때쯤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자, 그럼 다들 퇴근해.”
“웬일로 오늘은 칼퇴예요?”
“회식 잡혔어. 팀장급 이상으로 말이지.”
팀장은 피곤하다는 듯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작가가 아는 척을 했다.
“아! 그 저희 잡지 최대 후원사인 DTS그룹의 후계자가 온다고 했던가요?”
“맞아. 인터넷에 난리도 아니던데? 뭐라더라, 별명도 있던데.”
“황태자!”
“맞아, 황태자. 전무이사라는 직함보다 황태자로 불리는 사람이지.”
가끔가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은 예주도 읽어본 적 있었다. 뛰어난 수완이나 실력, 업무 수행 같은 사무적인 것보다 더 유명한 건 그의 외모였다. 잘난 외모와 멋진 배경.
여자들이 황태자라 부르며 인지도를 쌓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멋진 남자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여자들에게 그는 현재 가장 부합하는 남자였다.
가끔 사진이나 이름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던 예주의 심장이 그의 이름을 듣자 빠르게 뛰었다.
“그 이진현 전무라는 사람이 아주 사람 귀찮게 한단 말이야. 이번 평가에서 맘에 들지 않은 잡지에서는 아예 손을 떼라고 지시했대. 덕분에 우리만 귀찮아졌잖아. 이번 기사도 그렇고.”
“그래요? 그럼 이번 전생 체험 기사니 뭐니 기획한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어요?”
“그렇다니까. 그 사람 생긴 건 멀쩡한데 만났다 하면 전생이 어쩌고저쩌고. 무당이 따로 없다니까.”
“깬다…….”
작가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팀장이 비식 웃었다.
“그래도 잘생기고 능력 있으니 그것도 매력이지.”
“하긴.”
이번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는 그 광경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팀장의 눈빛이 그녀에게 머물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저 표정이네. 다들 퇴근해. 난 가 볼 테니까.”
“네.”
작가들은 자신들의 짐을 싸며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때 회의실을 나가려던 팀장의 전화가 울렸다. 팀장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회의실 안쪽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알았다는 듯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예주 씨.”
“네?”
“회식 자리 같이 가야겠어.”
“제가요?”
“응.”
작가들이 예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지목당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팀장은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제 자신도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황태자께서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예주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
01.
“전생 체험이요?”
“응. 생각 있어? 이번에 잡지 모델들 특집 기사로 ‘모델들의 전생 체험’이라는 타이틀을 기획 중이거든. 근데 모델들이 참여를 꺼려해서 혹시 하려는 사람 있으면 스태프도 상관없는데, 어때?”
“글쎄요.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
“예주 씨. 그러지 말고! 응? 지금 줄줄이 거부하는 팔자에 예주 씨마저 이러면 어떻게 해?”
예주는 자신의 팔을 붙들고 늘어지는 에디터를 질린 듯 쳐다봤다. 1시간 전부터 자신에게 전생 체험에 참여하라는 둥 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둥 별의별 방법으로 자신을 꼬시고 있었다.
예주는 저번 주에 촬영 일지를 받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전생 체험 소재는 매번 여름 납량 특집을 기획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였다. 하지만 그 전생 체험을 진행하는 박사가 성추행으로 한 번 기소된 전과가 있던 사람이란 게 문제였다. 그러니 어떤 모델이 무방비한 상태로 그 남자 앞에서 눈을 감고 있을까. 아무리 카메라가 돈다고 해도.
그 탓에 모델들 세 명이 거부 의사를 밝힌 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이후 촬영 스태프들한테 그 손을 뻗친다는 거였고, 이번에는 예주 차례였다.
“그래도 불안하단 말이에요.”
“그거 법원에서 인정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잠깐 논란이 된 것뿐이야. 별거 아니라니까? 오히려 예주 씨 평소에 스태프들 사이에서 모델들하고 서 있어도 꿀리지 않는다는 말이 많은데, 혹시 알아? 이참에 모델로 데뷔할지.”
예주는 그 말에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던 예주는 170 정도의 키에 늘씬한 몸매를 가졌다. 주변 동료들도 모델에 도전하라 여러 번 권장했지만 실상 스태프로 참여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어떻게 체중 관리를 해?’
그게 그녀가 모델 일에 도전할 마음도 먹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잘 먹고 잘 지내는 건 그녀의 인생 모토였다.
더군다나 예주의 나이가 아무리 이 중에서 어리다고는 해도 촬영 스태프로 일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28살이란 나이를 먹고 이 바닥에서 4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생해 왔던 그녀가 저런 말에 홀라당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예주는 팔을 슬쩍 뺐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팔목이 욱신거렸지만 최대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번 특집이 중요한 건 저도 알겠어요. 하지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예주 씨, 정말이야?”
“네.”
“정말로?”
“네. 정말의 정말로.”
“하아…… 이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예주는 이 인간이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긴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에디터는 한숨을 탁 쉬더니 그녀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 달 상여금 200% 어때?”
“2, 200%?”
예주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니 에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는 잠깐 생각했다. 그저 전생 체험 한 번 하고 사진 찍고 인터뷰하는 거로 200%라니. 남는 장사였다.
“250%는 안 돼요?”
“…….”
예주는 불안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어두운 천장을 쳐다보니 왠지 잠이 솔솔 오는 거 같았다. 괜히 이상한 짓 당하는 건 아닌가 싶어 불안했지만 그래도 돈 받고 전생체험을 한다는 건 가만 생각해 보니 남는 장사라 마음을 편하게 먹고 있었다.
‘그래, 사진도 찍고 밖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별문제 없겠지.’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음 한편에 솟아나는 불안감을 상여금이라는 세 글자로 막았다.
이윽고 촬영이 시작됐다. 조용한 분위기가 흐르고 창문 밖에서는 촬영용 카메라가, 방 안에는 무음 카메라로 이중으로 촬영이 진행됐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박사가 들어와 그녀를 내려다봤다.
예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박사는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생에 대해 믿으십니까?”
예주는 잠깐 당황했다. 아니, 그냥 촬영을 하면 되지 갑자기 믿느냐니. 이런 특집 기사는 대체적으로 형식만 갖춘 편이 많았었다. 그렇기에 예주도 얼추 형식만 갖추고 촬영이 진행될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예.”
“당신의 전생이 무엇인 거 같습니까?”
“음…… 공주?”
“다들 자신의 전생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죠. 나는 과거에 어떤 인물일까를 생각하면 늘 자신은 인간이었고 아주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었을 거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전생은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박사가 눈을 깜빡이며 손을 딱 쳤다. 약간 멍했던 정신이 번뜩 들었다. 박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뒤로 살짝 누르니 의자가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예주는 자신의 몸이 의자에 눕혀지자 아늑함을 느꼈다.
박사는 침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상황에서 침착한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전생 체험에 들어가겠습니다. 몸에 힘을 푸시구요. 자, 제가 들려 드리는 소리에 집중하세요.”
예주는 박사가 자신의 눈꺼풀을 살며시 감기자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들려오는 똑딱거리는 자명종 소리. 묘한 기분에 예주는 몸에서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서서히 잠기는 듯한 기분.
박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울렸다.
“어떤 기분이십니까?”
“……졸려요.”
“자아, 상상해 보십시오. 아주 어두운 방안에 예주 씨는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걷습니다. 아주, 아주 천천히. 한참을 걷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근데 저쪽에 문이 하나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뭔가…… 있는 거 같아요.”
“좋습니다. 제 소리에 맞춰 문을 여시는 겁니다. 자, 하나 둘 셋!”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예주의 의식이 멀어져 갔다.
“제가 왕비였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첩? 뭐 그런 거지.”
“에이, 무슨 말이에요. 아닌가? 좋은 건가.”
예주가 음료수를 마시며 특집 기사를 담당한 AD랑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AD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억 안 나? 자기 막 울고 그랬다니까.”
“슬퍼서 울었나?”
“아니. 무서워서 같은데?”
“무서워서요?”
“응. 살려주세요! 저는 아니에요! 죄가 없어요! 폐하! 폐하! 죽이지 마세요! 이렇게.”
그렇게까지 표현할 필요는 없는데……. 예주가 어색하게 웃으며 강렬한 모습을 보이는 AD를 바라봤다. AD는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전생 체험은 반이 거짓말이고 반은 자신이 봤던 걸 구현해 낸다니까. 예주 씨가 감명 깊게 본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온 걸 착각한 거 아니야?”
“그렇겠죠?”
예주가 다 마신 캔을 구겨 휴지통에 던지자 AD는 씨익 웃었다.
“아니면 진짜거나.”
이후 예주는 계획되어 있던 스케줄을 모두 소화하고 나서야 겨우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작가로서 여했던 경험만 있던 그녀에게 직접 인터뷰를 하고 촬영까지 하는 일은 처음 겪었으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씻는 것보다는 침대를 택했고 그 위에 털썩 쓰러지니 잠이 솔솔 오는 걸 느꼈다. 예주는 눈을 감고 오늘 이른 아침 경험했던 전생 체험을 떠올렸다.
“분명히…….”
그녀의 기억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가 다시 소리가 들리면 돌아왔다. 그사이에 기억은 없지만 마치 꿈을 꾼 듯했다. 기억을 되찾은 예주는 가장 먼저 자신의 목을 만졌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온몸의 털은 곤두서 있었다. 눈을 떴음에도 실감이 나질 않아 계속해서 입을 벌리고 있던 그녀에게 촬영 감독이 끝났다는 사인을 보낸 뒤 불을 켜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살려주세요, 죽이지 마세요라…….”
예주는 AD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꺼림칙했다. 그저 재미로 하는 전생 체험이라지만 이 정도로 몸이 격렬하게 반응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계속해서 나쁜 기분이 들자 예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넣어 뒀던 맥주를 꺼내 한 모금 크게 들이킨 다음 탁자 위에 내려놨다.
“뭐가 왕비야, 왕비가.”
숨을 탁하고 쉬자 문득 더운 날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5월 17일이었다.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날씨임에도 무척이나 더웠다.
그 말은 곧 자신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무의미한 숫자 세기라지만 30줄에 다가가는 그녀에게 생일은 한 살 더 먹는 날이었다. 예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뒤 한 살을 더 먹는구나.
“예주 씨. 어제 전생 체험한 거, 뭐 좀 알아낸 거 있어?”
“알아낸 거라뇨?”
한창 서류를 정리하던 예주는 어제 대화했던 AD가 다가와 묻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AD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 있잖아. 왕비, 첩인가? 아무튼. 예주 씨 전생에 대해 궁금하지 않아?”
“글쎄요?”
예주는 기껏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한 말을 들어 기분이 찝찝해졌다. 하지만 눈치 없는 AD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어제 궁금해서 찾아봤거든?”
“아, 그래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가 대답했다. 할 일 없으면 내 일이나 도와주지. 그녀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걸 모르는 AD가 말을 이었다.
“혹시 이거 알아?”
AD는 포스터 한 장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뮤지컬 홍보용 포스터였다.
“이거 그거잖아요. 이번에 홍보하는 천일의 앤인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볼린의 사랑 이야기? 그런 거로 알고 있어요.”
“맞아. 내가 보기에 자기 이거 같아.”
“이거라뇨?”
“이 사람! 앤 볼린이 자기 전생 같다고!”
“네?”
예주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쳐다봤다. AD는 답답한 듯 미간을 좁히더니 말했다.
“예주 씨도 전생에서 사형당했지?”
“저야 모르죠. 그렇게 말한 건 AD님이니까요.”
“그래. 근데 이 앤 볼린도 사형당했어. 자기 남편인 헨리 8세에 의해서!”
“그래서요?”
“더군다나 봐봐. 여기 앤 볼린이 사형 당한 날짜, 5월 19일. 자기 생일도 5월 19일 아냐? 어쩜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어. 내가 보기에 자기 딱 앤 볼린 맞는 거 같다니까?”
짐짓 황홀한 표정을 짓고 감동했다는 듯 환상에 빠지는 그의 모습에 예주는 불쾌감을 느꼈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 이 일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는데 대뜸 와서는 네 생일이랑 여자가 죽은 날이랑 같다느니 개소리를 하는 탓에 예주의 미간에 실선이 그어졌다. 그녀와 함께 작업을 하던 작가가 일어나 AD를 말리자 그제야 정신 차리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람은 좋은데 눈치가 없어서 탈이라니까.”
“하하…… 그러게요.”
예주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 계속해서 쌓여 있는 찝찝함은 그녀를 따라다녔다.
아침 내내 그녀를 괴롭히던 망상은 저녁이 다 돼 가는 시점에서도 그녀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다. 다음 달에 실을 기사에 대해서 회의하는 자리에서도 예주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예주 씨,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있는 거 같네.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아무 일 없어요.”
“아무 일 없으면 회의에 집중하지. 오늘 야근하고 싶어서 그래? 내일 예주 씨 생일이라고 특별히 쉬게 해 줬는데 오늘 개판 치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예주는 엄한 표정으로 자신을 꾸짖는 팀장의 말에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이어진 회의에서 최대한 그 생각을 지운 채 진행했고, 저녁 시간이 될 때쯤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자, 그럼 다들 퇴근해.”
“웬일로 오늘은 칼퇴예요?”
“회식 잡혔어. 팀장급 이상으로 말이지.”
팀장은 피곤하다는 듯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작가가 아는 척을 했다.
“아! 그 저희 잡지 최대 후원사인 DTS그룹의 후계자가 온다고 했던가요?”
“맞아. 인터넷에 난리도 아니던데? 뭐라더라, 별명도 있던데.”
“황태자!”
“맞아, 황태자. 전무이사라는 직함보다 황태자로 불리는 사람이지.”
가끔가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은 예주도 읽어본 적 있었다. 뛰어난 수완이나 실력, 업무 수행 같은 사무적인 것보다 더 유명한 건 그의 외모였다. 잘난 외모와 멋진 배경.
여자들이 황태자라 부르며 인지도를 쌓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멋진 남자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여자들에게 그는 현재 가장 부합하는 남자였다.
가끔 사진이나 이름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던 예주의 심장이 그의 이름을 듣자 빠르게 뛰었다.
“그 이진현 전무라는 사람이 아주 사람 귀찮게 한단 말이야. 이번 평가에서 맘에 들지 않은 잡지에서는 아예 손을 떼라고 지시했대. 덕분에 우리만 귀찮아졌잖아. 이번 기사도 그렇고.”
“그래요? 그럼 이번 전생 체험 기사니 뭐니 기획한 것도 그 사람 때문이었어요?”
“그렇다니까. 그 사람 생긴 건 멀쩡한데 만났다 하면 전생이 어쩌고저쩌고. 무당이 따로 없다니까.”
“깬다…….”
작가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팀장이 비식 웃었다.
“그래도 잘생기고 능력 있으니 그것도 매력이지.”
“하긴.”
이번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는 그 광경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팀장의 눈빛이 그녀에게 머물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저 표정이네. 다들 퇴근해. 난 가 볼 테니까.”
“네.”
작가들은 자신들의 짐을 싸며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때 회의실을 나가려던 팀장의 전화가 울렸다. 팀장은 반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받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회의실 안쪽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알았다는 듯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예주 씨.”
“네?”
“회식 자리 같이 가야겠어.”
“제가요?”
“응.”
작가들이 예주를 쳐다봤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지목당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팀장은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제 자신도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황태자께서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
예주의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