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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사랑 2화
02.
“아, 짜증 나.”
예주의 입에서 자연스레 불평이 터져 나왔다. 하루 종일 정신이 멍하고 힘들어 빨리 집에 가 쉬고 싶었던 욕구는 어느새 철저히 무시되었다.
잘난 남자의 손짓에 평소 콧대가 높기로 소문난 악덕 팀장은 그녀를 황태자라는 사람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들어가기 직전 잠깐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근처 편의점에 들린 예주는 자신의 손에 들린 위생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소화제라니. 무심하게 얼른 돌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회식 장소로 향하는 팀장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예주는 한숨을 쉬며 위생천의 뚜껑을 열었다.
쓴 향이 코로 느껴지자 예주의 시선이 자연스레 찡그려졌고, 입에 넣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병을 내려놨다.
“그냥 좀 집에 보내 주면 안 되나? 자기들 노는 장소에 왜 나를 보고 싶다고 하고 난리야. 술 따라 주는 아가씨 부르는 것도 아니고.”
툴툴거리는 예주가 편의점 유리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어느덧 밤이 짙게 깔린 오후 8시의 도로는 퇴근하는 차로 붐볐다. 저 무리에 끼어 자신도 퇴근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느끼고 있을 때쯤, 편의점 문이 열리며 경쾌한 종소리가 들렸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예주의 시선은 자연스레 문 쪽으로 돌아갔다.
맨 처음 느낀 감정은 차분하다였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와 시원한 이마가 그의 성격을 말해 주듯 평온해 보였다. 그 아래를 따라 똑 떨어진 콧대와 도톰한 입술이 이 남자의 신분을 말해 주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예주는 소화제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보기 드문 미남. 예주의 평가는 심플했다. 흥미가 가는 것도 없이 잡지사에서 일하는 예주에게는 늘 당연한 일이었다.
“응?”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예주를 훑더니 뚜벅뚜벅 걸어 반대쪽 코너로 사라졌다. 예주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 신경 쓰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런 미남을 어디선가 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기에,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소화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끄으…… 소화제는 왜 이렇게 쓴 거야?”
“맛있으면 많이 먹어서 곤란해서요.”
“네?”
예주는 방금 전 들어왔던 미남이 어느새 자신 옆에 서서 말을 거는 상황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쳐다보니 한결 그의 외모가 빛나 보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말을 걸며 자신의 혼잣말을 받는 상황이 예주에게는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아, 예…….”
그저 고개만 끄덕인 채 슬그머니 옆으로 떨어지자 남자가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키가 크네요.”
“감사합니다.”
“눈도 크고, 미인이시네.”
“네…… 고마워요.”
“어려 보이기까지 하고.”
“…….”
“성격도 좋아 보여.”
“저기요.”
“능력도 좋아 보이고.”
“지금 무슨 말을……?”
남자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봤다.
“키스도 잘할 거 같아.”
“이봐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예주는 마지막 남자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가한 편의점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은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비식 웃음을 지었다.
“목소리도 이쁜 걸 빼먹어서 화내는구나.”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쪽 누구예요?”
“몰라요?”
“알 거 같아요?”
“모를 리가 없는데.”
“모를 리가 있는데?”
“말도 재밌게 하네. 귀여워.”
낯간지러운 칭찬을 남발하는 남자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예주가 몸을 돌렸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생긴 건 멀쩡해서 제대로 미쳤어. 중얼거리며 소화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편의점을 나갔다.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던 남자도 발걸음을 옮겼다.
예주는 회식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뒤를 신경 썼다.
남자가 자신의 다리 길이를 자랑하려는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보폭을 넓게 잡으며 편안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도 작은 키는 아닌데 그 남자에 비해서는 턱도 없었기 때문에 바삐 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삼사 분간을 다리 길이 싸움하듯 열심히 옮기던 예주는 결국 회식을 하는 식당 앞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예주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자꾸 따라와요?”
“따라온 거 아닌데.”
“그럼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궁금해요?”
“아뇨. 생긴 건 멀쩡해서 제대로 미친 거 같은데 한마디 해 줄게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주 큰 실례예요. 설사 칭찬이라고 해도.”
“그래요?”
“네. 알았어요?”
남자는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웃음을 지었다.
“대부분 좋아하던데.”
“그건 골빈 사람들만 그런 거죠.”
“그렇군. 알았어요. 들어가 봐요.”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예요. 따라오지 마세요. 저 안쪽에 제 동료들 아주 많으니까.”
“알았어요.”
양손을 들며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 번 믿어보자는 심산으로 예주가 등을 돌렸다.
가게로 들어가니 벌써부터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몇 보였다. 예주가 웃으며 인사하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그녀를 반겼다.
“예주 씨 왔어?”
“네. 다들 많이 취하신 거 같네요.”
“취하긴. 그나저나 예주 씨는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는 거 같아. 모델 해도 되겠어.”
하하하 웃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마치 품평을 당하는 마네킹의 입장이 돼 버린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늘 이 키는 그녀에게 똑같은 레퍼토리를 제공했다. 이제 질릴 대로 질려 버린 대화에 무덤덤해진 그녀가 주위를 살폈다.
“왜 그래, 예주 씨?”
“이사님이 절 보자고 하셨다고 해서…….”
“이사님? 못 뵀어?”
“네?”
“예주 씨 속 안 좋다고 하니까 자신이 불러서 그런 것 같다며 걱정된다고 나가셨거든. 편의점까지 알려드렸는데 중간에 엇갈렸나?”
자기와 함께 왔던 팀장이 이상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 또 그래? 아직 속이 안 좋아? 그러면 먼저 들어가. 이사님한테는 우리가 잘 말해 둘 테니까.”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그들의 배려와는 달리 예주는 묘한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불안함의 실체는 어느덧 그녀의 뒤에 다가와 있었다.
“이사님, 늦으셨네요. 이 친구가 서예주라고 그 뵙고 싶다던 저희 막내 작가입니다. 아까 안내해 드렸는데 중간에 엇갈렸나 봅니다.”
“아뇨. 만났습니다. 근데 저를 못 알아보더라고요.”
“그래요? 아마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라 그랬나 봅니다.”
“네, 그렇겠지요. 그렇죠, 서예주 씨?”
“네? 아, 네. 그, 그런 거 같아요.”
예주는 자신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보는 그의 눈동자를 보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자신이 방금 충고를 건네고 귀찮게 굴지 말라며 짜증을 부린 상대가 자신이 속한 잡지사의 최대 후원자이자, 오늘 자신을이 자리로 부른 이진현 이사라는 건 그녀로서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그래도 섭섭한데.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 건.”
“하, 하하…….”
예주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쳐다보자 진현은 그녀를 지나쳐 자기 자리에 앉았다. 예주는 진현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주변 눈치를 살폈다.
좌불안석이었다.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 그런 장난을 쳤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와 그녀 사이에는 넘지 못하는 직위와 신분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가능한 빠르게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최대한 이 회식 자리에서 눈에 띄지 않고 눈을 받을 일도 없을 만큼 조심히 행동했다.
예주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펴봤다. 다들 술기운이 올라 서로 대화하기 바빴다. 중년 남성들 사이에 껴 있는 젊은 남성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모든 대화의 주제와 분위기는 진현을 기점으로 흐르고 있었다.
웃으며 대화하던 진현의 눈동자가 대록 굴렀다. 진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예주의 시선은 진현의 눈동자와 바로 마주쳤다. 예주는 화들짝 놀라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진현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과 얽혀 있었다.
예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숨을 죽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피곤한 몸 상태 때문에 슬금슬금 졸음이 오려고 할 때쯤, 예주의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주 씨 사진 잘 봤습니다. 인터뷰 정리한 것도 잘 봤구요. 아주 흥미로웠어요.”
예주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주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정신을 차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원래 그런데 흥미가 있어서…… 덕분에 재밌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진짜로?”
“네?”
“아니, 진짜냐고 묻는 거예요.”
진현이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며 부드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주는 그의 시선이 진득한 늪같이 느껴졌다. 빠지면 쉽게 나오지 못할 만큼 아주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그런 늪.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예주의 질문에 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전생을 탐구하는 걸 아주 좋아해요, 서예주 씨.”
“아…… 네.”
“예주 씨도 전생에 관심이 많은 거 같은데, 그쪽이 보기에 저는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을 거 같아요?”
갑작스런 질문에 다들 흥미로운 표정으로 예주를 바라봤다. 예주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되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 황태자?”
“하하하! 들었어요, 다들? 황태자래요.”
“그러게요. 하긴, 이사님이 그런 느낌이긴 하죠. 실제로 인터넷에서도 그렇게 불리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를 만들며 웃자 진현도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겠다는 듯.
“반은 맞아요.”
“네?”
진현의 미소가 장막이 걷히듯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부드럽게 밀려 올라가 있던 입꼬리는 내려와 굳센 창을 만들었고 눈은 가라앉았다. 붉은 입술은 당장이라도 피를 흘릴 것처럼 찐득해 보였다.
“내 전생이, 네 남편이었거든.”
손아귀에 꺾여 버린 꽃처럼 예주의 몸이 그의 눈빛에 강하게 묶여 버리고 말았다.
03.
예주의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끄러운 소음과 더운 말소리에도 그녀의 감각은 오롯이 진현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지금 무슨…….”
“이해력이 별로인가?”
진현은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까닥. 손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주위 사람들이 눈치를 보더니 가방을 들고 자리를 슬그머니 뜨기 시작했다. 마치 이런 게 이해력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려는 듯.
갑작스런 그들의 행동에 놀란 예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한테 집중해야지 어디를 그렇게 봐?”
예주는 자신의 귀에 은근하게 스며드는 목소리에 놀라 시선을 돌렸다. 분명 진현과 예주 사이에 두세 개의 테이블이 있음에도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살짝 굽혀진 상체가, 자신 쪽으로 향해진 발이, 집중하라는 듯 은밀한 속삭임이 예주를 강하게 묶었다.
“남편한테 집중해야지.”
“이봐요!”
“왜?”
차갑게 말하다가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미소를 짓는다. 표정 변화에 따른 공기가 변한다. 이 남자는 자신의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게 원하는 게 뭐예요, 대체?”
“원하는 거? 남편이 부인한테 원하는 게 뭐가 있겠어.”
“전 당신 부인이 아니에요.”
“흐음…….”
진현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원래 말투가 그런 건가, 아니면 당황해서 그런 건가?”
“뭐라고요?”
“억지로 존댓말 쓰는 거 같아. 당장이라도 욕과 반말을 한 바탕 쏟아내고 싶어 보이는데 꾹 참고 있는 거 같단 말이지.”
다시 진현의 상체가 기울어진다.
“괜찮아, 이해해 줄게. 그렇게 해도 돼. 우리는 부부잖아.”
“아니라고!”
진현은 눈을 부릅뜨고 부정을 하는 예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술잔이 비어 있었다. 진현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오라는 표시. 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진현이 씨익 웃더니 잔과 술을 들고 그녀 앞으로 가 앉으며 말했다.
“매력 있네. 이렇게 남자 부려먹을 줄도 알고. 어디서 배웠어?”
“배운 적 없어. 그리고 댁이 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실례야. 알아?”
“아니. 칭찬이지.”
“뭐?”
“황태자라 불리는 이진현이 손수 여자 술잔을 채워 준다…… 나한테 술 한 잔 받아보려고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애원하는지 알아?”
“본인 입으로 그런 말 하는 거 부끄럽지 않아?”
“응. 전혀.”
02.
“아, 짜증 나.”
예주의 입에서 자연스레 불평이 터져 나왔다. 하루 종일 정신이 멍하고 힘들어 빨리 집에 가 쉬고 싶었던 욕구는 어느새 철저히 무시되었다.
잘난 남자의 손짓에 평소 콧대가 높기로 소문난 악덕 팀장은 그녀를 황태자라는 사람 앞으로 질질 끌고 왔다. 들어가기 직전 잠깐 속이 안 좋다는 핑계로 근처 편의점에 들린 예주는 자신의 손에 들린 위생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소화제라니. 무심하게 얼른 돌아오라는 말만 남기고 회식 장소로 향하는 팀장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예주는 한숨을 쉬며 위생천의 뚜껑을 열었다.
쓴 향이 코로 느껴지자 예주의 시선이 자연스레 찡그려졌고, 입에 넣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병을 내려놨다.
“그냥 좀 집에 보내 주면 안 되나? 자기들 노는 장소에 왜 나를 보고 싶다고 하고 난리야. 술 따라 주는 아가씨 부르는 것도 아니고.”
툴툴거리는 예주가 편의점 유리벽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어느덧 밤이 짙게 깔린 오후 8시의 도로는 퇴근하는 차로 붐볐다. 저 무리에 끼어 자신도 퇴근하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을 느끼고 있을 때쯤, 편의점 문이 열리며 경쾌한 종소리가 들렸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은 예주의 시선은 자연스레 문 쪽으로 돌아갔다.
맨 처음 느낀 감정은 차분하다였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와 시원한 이마가 그의 성격을 말해 주듯 평온해 보였다. 그 아래를 따라 똑 떨어진 콧대와 도톰한 입술이 이 남자의 신분을 말해 주는 것처럼 매끄러웠다.
예주는 소화제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보기 드문 미남. 예주의 평가는 심플했다. 흥미가 가는 것도 없이 잡지사에서 일하는 예주에게는 늘 당연한 일이었다.
“응?”
남자는 들어오자마자 예주를 훑더니 뚜벅뚜벅 걸어 반대쪽 코너로 사라졌다. 예주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 신경 쓰여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저런 미남을 어디선가 봤다면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건 아니었기에,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소화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끄으…… 소화제는 왜 이렇게 쓴 거야?”
“맛있으면 많이 먹어서 곤란해서요.”
“네?”
예주는 방금 전 들어왔던 미남이 어느새 자신 옆에 서서 말을 거는 상황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쳐다보니 한결 그의 외모가 빛나 보였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말을 걸며 자신의 혼잣말을 받는 상황이 예주에게는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아, 예…….”
그저 고개만 끄덕인 채 슬그머니 옆으로 떨어지자 남자가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키가 크네요.”
“감사합니다.”
“눈도 크고, 미인이시네.”
“네…… 고마워요.”
“어려 보이기까지 하고.”
“…….”
“성격도 좋아 보여.”
“저기요.”
“능력도 좋아 보이고.”
“지금 무슨 말을……?”
남자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봤다.
“키스도 잘할 거 같아.”
“이봐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예주는 마지막 남자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가한 편의점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은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에 비식 웃음을 지었다.
“목소리도 이쁜 걸 빼먹어서 화내는구나.”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쪽 누구예요?”
“몰라요?”
“알 거 같아요?”
“모를 리가 없는데.”
“모를 리가 있는데?”
“말도 재밌게 하네. 귀여워.”
낯간지러운 칭찬을 남발하는 남자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예주가 몸을 돌렸다.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생긴 건 멀쩡해서 제대로 미쳤어. 중얼거리며 소화제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편의점을 나갔다.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던 남자도 발걸음을 옮겼다.
예주는 회식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뒤를 신경 썼다.
남자가 자신의 다리 길이를 자랑하려는 듯 여유로운 모습으로 보폭을 넓게 잡으며 편안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도 작은 키는 아닌데 그 남자에 비해서는 턱도 없었기 때문에 바삐 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삼사 분간을 다리 길이 싸움하듯 열심히 옮기던 예주는 결국 회식을 하는 식당 앞에 서서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흥미롭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예주는 그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자꾸 따라와요?”
“따라온 거 아닌데.”
“그럼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궁금해요?”
“아뇨. 생긴 건 멀쩡해서 제대로 미친 거 같은데 한마디 해 줄게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주 큰 실례예요. 설사 칭찬이라고 해도.”
“그래요?”
“네. 알았어요?”
남자는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웃음을 지었다.
“대부분 좋아하던데.”
“그건 골빈 사람들만 그런 거죠.”
“그렇군. 알았어요. 들어가 봐요.”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예요. 따라오지 마세요. 저 안쪽에 제 동료들 아주 많으니까.”
“알았어요.”
양손을 들며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 번 믿어보자는 심산으로 예주가 등을 돌렸다.
가게로 들어가니 벌써부터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이 몇 보였다. 예주가 웃으며 인사하자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그녀를 반겼다.
“예주 씨 왔어?”
“네. 다들 많이 취하신 거 같네요.”
“취하긴. 그나저나 예주 씨는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는 거 같아. 모델 해도 되겠어.”
하하하 웃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마치 품평을 당하는 마네킹의 입장이 돼 버린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늘 이 키는 그녀에게 똑같은 레퍼토리를 제공했다. 이제 질릴 대로 질려 버린 대화에 무덤덤해진 그녀가 주위를 살폈다.
“왜 그래, 예주 씨?”
“이사님이 절 보자고 하셨다고 해서…….”
“이사님? 못 뵀어?”
“네?”
“예주 씨 속 안 좋다고 하니까 자신이 불러서 그런 것 같다며 걱정된다고 나가셨거든. 편의점까지 알려드렸는데 중간에 엇갈렸나?”
자기와 함께 왔던 팀장이 이상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 또 그래? 아직 속이 안 좋아? 그러면 먼저 들어가. 이사님한테는 우리가 잘 말해 둘 테니까.”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그들의 배려와는 달리 예주는 묘한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불안함의 실체는 어느덧 그녀의 뒤에 다가와 있었다.
“이사님, 늦으셨네요. 이 친구가 서예주라고 그 뵙고 싶다던 저희 막내 작가입니다. 아까 안내해 드렸는데 중간에 엇갈렸나 봅니다.”
“아뇨. 만났습니다. 근데 저를 못 알아보더라고요.”
“그래요? 아마 실제로 뵙는 건 처음이라 그랬나 봅니다.”
“네, 그렇겠지요. 그렇죠, 서예주 씨?”
“네? 아, 네. 그, 그런 거 같아요.”
예주는 자신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보는 그의 눈동자를 보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자신이 방금 충고를 건네고 귀찮게 굴지 말라며 짜증을 부린 상대가 자신이 속한 잡지사의 최대 후원자이자, 오늘 자신을이 자리로 부른 이진현 이사라는 건 그녀로서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그래도 섭섭한데.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 건.”
“하, 하하…….”
예주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쳐다보자 진현은 그녀를 지나쳐 자기 자리에 앉았다. 예주는 진현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주변 눈치를 살폈다.
좌불안석이었다.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 그런 장난을 쳤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와 그녀 사이에는 넘지 못하는 직위와 신분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가능한 빠르게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에 최대한 이 회식 자리에서 눈에 띄지 않고 눈을 받을 일도 없을 만큼 조심히 행동했다.
예주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펴봤다. 다들 술기운이 올라 서로 대화하기 바빴다. 중년 남성들 사이에 껴 있는 젊은 남성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모든 대화의 주제와 분위기는 진현을 기점으로 흐르고 있었다.
웃으며 대화하던 진현의 눈동자가 대록 굴렀다. 진현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예주의 시선은 진현의 눈동자와 바로 마주쳤다. 예주는 화들짝 놀라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슬쩍 눈동자를 돌렸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진현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과 얽혀 있었다.
예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숨을 죽였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피곤한 몸 상태 때문에 슬금슬금 졸음이 오려고 할 때쯤, 예주의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주 씨 사진 잘 봤습니다. 인터뷰 정리한 것도 잘 봤구요. 아주 흥미로웠어요.”
예주는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예주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정신을 차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원래 그런데 흥미가 있어서…… 덕분에 재밌게 촬영할 수 있었어요.”
“진짜로?”
“네?”
“아니, 진짜냐고 묻는 거예요.”
진현이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며 부드럽게 쳐다봤다. 하지만 예주는 그의 시선이 진득한 늪같이 느껴졌다. 빠지면 쉽게 나오지 못할 만큼 아주 매혹적이고 매력적인 그런 늪.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예주의 질문에 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저도 전생을 탐구하는 걸 아주 좋아해요, 서예주 씨.”
“아…… 네.”
“예주 씨도 전생에 관심이 많은 거 같은데, 그쪽이 보기에 저는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을 거 같아요?”
갑작스런 질문에 다들 흥미로운 표정으로 예주를 바라봤다. 예주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되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 황태자?”
“하하하! 들었어요, 다들? 황태자래요.”
“그러게요. 하긴, 이사님이 그런 느낌이긴 하죠. 실제로 인터넷에서도 그렇게 불리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를 만들며 웃자 진현도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겠다는 듯.
“반은 맞아요.”
“네?”
진현의 미소가 장막이 걷히듯 그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부드럽게 밀려 올라가 있던 입꼬리는 내려와 굳센 창을 만들었고 눈은 가라앉았다. 붉은 입술은 당장이라도 피를 흘릴 것처럼 찐득해 보였다.
“내 전생이, 네 남편이었거든.”
손아귀에 꺾여 버린 꽃처럼 예주의 몸이 그의 눈빛에 강하게 묶여 버리고 말았다.
03.
예주의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끄러운 소음과 더운 말소리에도 그녀의 감각은 오롯이 진현에게만 매달려 있었다.
“지금 무슨…….”
“이해력이 별로인가?”
진현은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까닥. 손짓 한 번 했을 뿐인데 주위 사람들이 눈치를 보더니 가방을 들고 자리를 슬그머니 뜨기 시작했다. 마치 이런 게 이해력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려는 듯.
갑작스런 그들의 행동에 놀란 예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한테 집중해야지 어디를 그렇게 봐?”
예주는 자신의 귀에 은근하게 스며드는 목소리에 놀라 시선을 돌렸다. 분명 진현과 예주 사이에 두세 개의 테이블이 있음에도 가까이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살짝 굽혀진 상체가, 자신 쪽으로 향해진 발이, 집중하라는 듯 은밀한 속삭임이 예주를 강하게 묶었다.
“남편한테 집중해야지.”
“이봐요!”
“왜?”
차갑게 말하다가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미소를 짓는다. 표정 변화에 따른 공기가 변한다. 이 남자는 자신의 분위기를 누구보다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게 원하는 게 뭐예요, 대체?”
“원하는 거? 남편이 부인한테 원하는 게 뭐가 있겠어.”
“전 당신 부인이 아니에요.”
“흐음…….”
진현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허리를 기댔다.
“원래 말투가 그런 건가, 아니면 당황해서 그런 건가?”
“뭐라고요?”
“억지로 존댓말 쓰는 거 같아. 당장이라도 욕과 반말을 한 바탕 쏟아내고 싶어 보이는데 꾹 참고 있는 거 같단 말이지.”
다시 진현의 상체가 기울어진다.
“괜찮아, 이해해 줄게. 그렇게 해도 돼. 우리는 부부잖아.”
“아니라고!”
진현은 눈을 부릅뜨고 부정을 하는 예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술잔이 비어 있었다. 진현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오라는 표시. 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진현이 씨익 웃더니 잔과 술을 들고 그녀 앞으로 가 앉으며 말했다.
“매력 있네. 이렇게 남자 부려먹을 줄도 알고. 어디서 배웠어?”
“배운 적 없어. 그리고 댁이 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실례야. 알아?”
“아니. 칭찬이지.”
“뭐?”
“황태자라 불리는 이진현이 손수 여자 술잔을 채워 준다…… 나한테 술 한 잔 받아보려고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애원하는지 알아?”
“본인 입으로 그런 말 하는 거 부끄럽지 않아?”
“응. 전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