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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1화
01. 그 이름
-네, 대표님. 준비하라고 하신 그림들 현재 회사 내에 모두 입고된 상태입니다. 생각보다 좋은 물건들이 많아서 쉽게 고르기가 힘들더라고요. 투자 금액상 서너 명 정도의 작가와 계약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째깍째깍 빠르게 돌아가는 시곗바늘의 움직임처럼 민후의 발걸음 역시 뜀박질에 가까울 만큼 재빨랐다. 통화와 연결 가능한 이어폰을 한쪽 귀에 걸고 빠르게 움직이는 민후는 이내 담당 기사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곧장 차 뒷좌석에 올라타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알겠습니다.
근 10년 만에 밟아 보는 고향 땅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공기 한 번 맡을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현실이 고달프지만, 그만큼 준비하고 또 고대해 온 사업이었기에 민후는 뜀박질을 멈출 수 없었다. 공항에서부터 회사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는 고작 30분 남짓이었지만, 민후는 쉴 틈 없이 누군가와 긴밀한 통화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야만 했다.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아, 고마워요.”
조금 전 통화했던 비서가 코앞까지 마중을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그 사이로 민후의 훤칠한 다리 길이가 드러나고, 말끔하게 올린 머리카락 한 올이 반동에 흩날려 향기를 흩뿌렸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이가 바로, J아트의 강민후 대표다.
“어디로 가면 되죠?”
“이쪽입니다, 대표님.”
말끝마다 대표님 소리를 붙여 가며 예의를 지키는 남자는 맨 처음 민후와 통화한 인물이자 그의 비서인 태오였다. 여기저기서 들여온 고가의 작품들을 고이 모셔 놓은 소강당으로 들어선 민후는 태오의 안내에 따라 벽에 걸린 작품들을 하나씩 둘러보기 시작했다.
“J갤러리는 주로 온화함과 포근함이 무기인지라 되도록 잔잔한 그림들로만 모아 봤습니다.”
완벽한 그림들만 뽑아 골라낸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것처럼 이어지는 태오의 목소리에도 민후는 요지부동 않고 진열된 그림들을 쭉 눈에 담았다. 어떤 건 색이 너무 진하고, 어떤 건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어떤 건 그나마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이건 무슨 작품이죠?”
머릿속을 정확히 관통해 지나가는 듯한 그림 한편에 민후는 굳게 닫힌 입술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쭉 봐 왔던 그림들과 사뭇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심금을 울린다고나 할까.
“이 작품은 갤러리 카페에서 공수해 온 견본입니다.”
“갤러리 카페요?”
상당히 의외였다. 이 정도 수준이면 개인 갤러리의 유명한 작가 정도는 될 줄 알았건만, 고작 카페라니.
“네, ‘아랑 갤러리’라고 외곽 지역에 위치한 카페인데요. 무명인 작가 작품치고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더라고요. 나름 새로운 측면으로 이목을 끌 수 있을 거 같아 한 번 가져와 봤습니다.”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었다. 유명 작가들이 판을 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민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그림은 이게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른 작가들은 품을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제목이 없네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의의를 담은 제목을 써 놓기 태반인데, 이상하게도 이 그림에는 제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무명작가로 추정되는 사람의 작은 서명 한 자뿐이었다.
“아무래도 무명이다 보니 제목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과연 그럴까.
아무리 무명일지언정 작품에 대한 애정이 존재한다면 필히 제목이나 부연 설명을 늘어놓고는 할 텐데.
“앞에 3번과 7번 그림으로 절차 진행합시다.”
“마지막은 무슨 그림으로 할까요?”
태오의 물음에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마지막 그림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던 민후는 약간의 고심 끝에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은 이거로 하죠.”
“네, 대표님. 곧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입 안에 쌉쌀한 맛이 감돌았다. 속전속결로 일이 진행되어 기분은 좋지만, 캐나다에서 여기까지 아홉 시간 하고도 45분을 더 날아 왔으니 금방이라도 몸이 부서질 것처럼 피곤했다. 배꼽까지 내려올 만큼 축 처진 민후의 퀭한 몰골을 그제야 발견한 태오는 황급히 말문을 열었다.
“아, 오피스텔 준비해 뒀으니 지금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맡아서 할 테니까, 대표님은 하루만이라도 푹 쉬고 계세요.”
“그럼 본가에 들렀다가 오피스텔로 넘어가 있을게요. 따로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고.”
“걱정 마세요, 대표님.”
아무리 피곤해도 본가에는 들릴 수밖에 없기에, 민후는 왠지 모를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곧장 본가로 향했다.
* * *
민후의 집안은 본래 재산이 많고 부유한 가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 중 하나인 ‘J그룹’을 대대로 이끄는 집안이었고,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 같은 게 아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기업의 자부심을 안고, 현재는 민후의 아버지 준식이 그 계보를 잇는 중이었다.
“에구머니나, 도련님!”
커다란 정문 앞에 내려 현관으로 통하는 마당을 지나 본가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인 민후를 가장 먼저 반겨 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그냥 가정부가 아니라 민후를 먹여 주고 길러 준 보모라고 해도 될 만큼 그들은 각별한 사이였다. 민후는 한껏 반가운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우, 그럼요! 나야 뭐 회장님 밑에서 항상 잘 먹고 잘살았죠.”
이제야 진짜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에 울컥 눈물이 치밀었지만, 아주머니의 농담으로 민후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버지는요?”
“회장님은 서재에 계세요. 요즘도 사업 일로 바쁘시거든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민후는 다시금 묵직한 걸음으로 준식의 서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이럴 땐 오히려 가정부 아주머니가 더 친근한 가족처럼 느껴진다. 후우, 하고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 한숨을 내쉰 민후는 금테로 둘러진 서재 문고리를 잡아 내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 재꼈다.
“저 왔어요, 아버지.”
무려 9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9년 전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머리카락에 새치가 조금 늘고, 신경성으로 인한 미간에 주름이 생겼을 뿐이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어, 그래.”
무덤덤함은 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9년 전이 아니라 아홉 시간 전에 본 사람마냥 준식은 살짝 고개를 들어 민후를 힐끗 쳐다보는 것 말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민후도 더 이상 상처 받을 일은 없었다.
“사업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아버지와 한 약속은 잊지 않고 지킬게요.”
“알았으니 이만 나가 봐. 서류 읽느라 정신이 없구나.”
언제나 이래왔잖아. 라는 말 한마디만으로 정리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바로 민후와 아버지의 관계였다.
“앞으로 오피스텔에서 묵기로 했습니다. 본가에는 종종 들릴게요.”
“그럴 필요 없다. 넌 네 일이나 잘하기만 하면 돼.”
예의상 던진 말에 탁구공 치듯 받아쳐 버리는 준식이 이젠 얄밉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토록 무감각해진 현실이 더욱 잔인한 걸지도 모른다.
민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서재를 빠져나왔다. 잔뜩 올랐던 긴장을 풀고 나니 더욱 전신이 노곤해졌다.
“벌써 내려오셨어요?”
부엌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담고 있던 아주머니가 민후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후다닥 달려 나왔다. 그에 민후는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오래 있을 이유도 없는 거 아시잖아요.”
“회장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9년 만에 보는 아들 얼굴을 그리 넘긴대요?”
“전 괜찮아요,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늘 민후를 안타까워 했다. 언제나 바르고, 똑똑하고, 뭐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한 길로만 쭉 성장한 아들이니만큼 금지옥엽이라며 엉덩이를 두들겨 줘도 모자를 판에 이런 식으로 차가운 대우를 마지않는 준식의 행동이 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때문에 아주머니는 그만큼 더 민후를 챙겨 주려 노력하곤 했다. 그나마 민후의 곁을 지켜 주었던 그의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이제 남은 따듯한 손길이라고는 제 손 하나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 반찬들 좀 가져가요. 내가 도련님 좋아하는 반찬 바리바리 싸 놨어.”
연분홍색 보따리 안에 다섯 겹은 족히 돼 보이는 반찬통 쪽으로 시선을 옮긴 민후는 무척 기뻐하며 그것을 집어 들곤 물었다.
“와, 장조림도 있어요?”
“그럼요! 장조림부터 시작해서 잡채, 꼬막, 불고기 등등 안 해 놓은 반찬이 없을 정도라니까요?”
분명 웃음꽃을 피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후는 울고 싶었다. 누구 앞에서는 이 정도는 익숙해졌다고 큰소리나 떵떵 쳐 댔지만, 사실 하나도 익숙지 않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최고의 대표라고 소문이 자자한 민후 역시, 하나뿐인 아버지에게 그저 사랑받고 싶은 아들에 불과하기에.
“힘내요, 도련님. 이 반찬 다 먹으면 또 놀러 오고요. 응?”
민후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는 사람이 바로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이는 민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웃음을 잃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이 세상에서 도련님만 한 아들 없다고 생각해. 그뿐인 줄 알아요?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대견한걸.”
“정말 감사해요, 아주머니…….”
“감사하긴!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가지고. 이거 다 먹으면 꼭 다시 와야 해요? 이것보다 더 맛있는 반찬 많이 해 줄 테니까.”
민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머니와 아쉬운 포옹을 끝으로 본가를 나왔다. 그는 두 손 가득 먹음직스러운 반찬을 싸 들고 앞으로 묵게 될 오피스텔로 자취를 옮겼다.
* * *
“계, 계약이요?”
도시의 외곽 지역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 카페, 아랑. 그 안에 ‘매니저’라는 이름표를 달고 앉아 있던 여주의 눈이 휘둥그레 늘어났다.
“예,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부탁으로 가져갔던 그림을 저희 대표님께서 무척 좋아하셔서,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만들어진 ‘J갤러리’에 여기 작가님 그림을 걸려고 합니다.”
가지런하게 이어지는 태오의 말을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고 귀에 담아낸 여주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앞에 놓인 시원한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러니까, 지금 저희 카페 그림들을 전부 가져가시겠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물론 그림은 작가님의 소유물이고, 창작물에 대해 저희는 일체 관여하지 않을 거고요. 저희 J그룹 자체가 워낙 큰 규모여서 계약하시면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또 한 번, 여주가 뒤로 나자빠지고 만다. 두 귀를 의심할 필요도 없이 똑똑히 들었다.
“제, 제이 그룹이요?”
“네. 그곳에서 파생된 게 바로 J갤러리 입니다.”
맙소사.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하면 서러운 대기업들 중 하나인 J그룹에서 먼저 계약이 들어왔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YES!’를 외쳐야 할 경우였다. 하지만 여주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그런데요. 계약하기 전에 아무래도 작가님께 허락을 받아야…….”
“아아, 네. 저희도 지금 당장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사흘 정도 말미를 드릴 테니 그 안에 결정하시고, 여기 명함에 적인 번호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워낙 좋은 회사여서 그런지 명함에서마저 번쩍번쩍 빛이 나는 착각이 일었다.
비서가 떠난 뒤 여주는 아래 직원들에게 남은 일들을 맡기고는 곧바로 카페 내부에 있는 승강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숨을 들이켤 틈도 없이 신발을 벗고 뛰어들어가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 여자의 곁으로 다가섰다.
“마리야! 완전 대박 났어, 우리!”
마리.
카페에 걸린 그림의 주인이자,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잃고 은둔 생활을 하는 작가이다. 생전 햇빛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새하얗다 못해 창백함에 가까운 피부를 갖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여주의 호들갑에 마리의 미간이 아주 엷게나마 찌푸려졌다. 그림을 그리던 중에 방해를 놓은 것이 불만스럽다는 듯 쳐다봄에도 불구하고 여주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그림이랑 계약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게다가 그 사람이 어디서 나온 건 줄 알아? 바로 그 유명한 J그룹에서 나왔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뉴스에 종종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우리 이 계약하자. 넌 그냥 그림만 계속 그리면 되는 거야!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거랑 같은 셈이라니까? 응? 마리야.”
계약이고 돈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큰 관심이 없는 마리이기에 일시적인 거부감이 찾아왔지만, 부담스러우리만치 초롱초롱 빛나는 여주를 보자니 무조건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래 봐야 사업은 그쪽으로 빠삭한 여주가 알아서 할 테고, 그림 그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딱히 아니랄 것도 없다.
“그래, 그렇게 해.”
“정말? 정말이지? 너 말 바꾸기 없기다?”
“알았어, 알았어.”
언제나 발랄하고 유쾌한 여주이지만 또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기에, 마리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주는 마리를 대신해 장소에 나가 서명을 마쳤고, 2년 동안 유지하겠다는 약속까지 끝마쳤다. 그러자 J아트 쪽에서 다시금 연락이 돌아왔다. J갤러리의 대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작은 연회를 열 예정이니 그곳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난 안 가.”
“에이, 그러지 말고. 너도 오랜만에 바깥 구경하고 좋잖아! 너보고 절대 앞에 서라는 거 아냐. 그냥 나랑 같이 가서 구경만 하고 오자.”
01. 그 이름
-네, 대표님. 준비하라고 하신 그림들 현재 회사 내에 모두 입고된 상태입니다. 생각보다 좋은 물건들이 많아서 쉽게 고르기가 힘들더라고요. 투자 금액상 서너 명 정도의 작가와 계약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째깍째깍 빠르게 돌아가는 시곗바늘의 움직임처럼 민후의 발걸음 역시 뜀박질에 가까울 만큼 재빨랐다. 통화와 연결 가능한 이어폰을 한쪽 귀에 걸고 빠르게 움직이는 민후는 이내 담당 기사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고 곧장 차 뒷좌석에 올라타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그쪽으로 갈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알겠습니다.
근 10년 만에 밟아 보는 고향 땅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공기 한 번 맡을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현실이 고달프지만, 그만큼 준비하고 또 고대해 온 사업이었기에 민후는 뜀박질을 멈출 수 없었다. 공항에서부터 회사까지 걸리는 시간이라고는 고작 30분 남짓이었지만, 민후는 쉴 틈 없이 누군가와 긴밀한 통화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야만 했다.
“도착했습니다, 대표님.”
“아, 고마워요.”
조금 전 통화했던 비서가 코앞까지 마중을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 줬다. 그 사이로 민후의 훤칠한 다리 길이가 드러나고, 말끔하게 올린 머리카락 한 올이 반동에 흩날려 향기를 흩뿌렸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반짝반짝 빛나는 이가 바로, J아트의 강민후 대표다.
“어디로 가면 되죠?”
“이쪽입니다, 대표님.”
말끝마다 대표님 소리를 붙여 가며 예의를 지키는 남자는 맨 처음 민후와 통화한 인물이자 그의 비서인 태오였다. 여기저기서 들여온 고가의 작품들을 고이 모셔 놓은 소강당으로 들어선 민후는 태오의 안내에 따라 벽에 걸린 작품들을 하나씩 둘러보기 시작했다.
“J갤러리는 주로 온화함과 포근함이 무기인지라 되도록 잔잔한 그림들로만 모아 봤습니다.”
완벽한 그림들만 뽑아 골라낸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것처럼 이어지는 태오의 목소리에도 민후는 요지부동 않고 진열된 그림들을 쭉 눈에 담았다. 어떤 건 색이 너무 진하고, 어떤 건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고, 또 어떤 건 그나마 괜찮겠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이건 무슨 작품이죠?”
머릿속을 정확히 관통해 지나가는 듯한 그림 한편에 민후는 굳게 닫힌 입술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쭉 봐 왔던 그림들과 사뭇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심금을 울린다고나 할까.
“이 작품은 갤러리 카페에서 공수해 온 견본입니다.”
“갤러리 카페요?”
상당히 의외였다. 이 정도 수준이면 개인 갤러리의 유명한 작가 정도는 될 줄 알았건만, 고작 카페라니.
“네, ‘아랑 갤러리’라고 외곽 지역에 위치한 카페인데요. 무명인 작가 작품치고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더라고요. 나름 새로운 측면으로 이목을 끌 수 있을 거 같아 한 번 가져와 봤습니다.”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은 사실이었다. 유명 작가들이 판을 치는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민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그림은 이게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른 작가들은 품을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제목이 없네요?”
대부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의의를 담은 제목을 써 놓기 태반인데, 이상하게도 이 그림에는 제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거라고는 무명작가로 추정되는 사람의 작은 서명 한 자뿐이었다.
“아무래도 무명이다 보니 제목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과연 그럴까.
아무리 무명일지언정 작품에 대한 애정이 존재한다면 필히 제목이나 부연 설명을 늘어놓고는 할 텐데.
“앞에 3번과 7번 그림으로 절차 진행합시다.”
“마지막은 무슨 그림으로 할까요?”
태오의 물음에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마지막 그림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던 민후는 약간의 고심 끝에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은 이거로 하죠.”
“네, 대표님. 곧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입 안에 쌉쌀한 맛이 감돌았다. 속전속결로 일이 진행되어 기분은 좋지만, 캐나다에서 여기까지 아홉 시간 하고도 45분을 더 날아 왔으니 금방이라도 몸이 부서질 것처럼 피곤했다. 배꼽까지 내려올 만큼 축 처진 민후의 퀭한 몰골을 그제야 발견한 태오는 황급히 말문을 열었다.
“아, 오피스텔 준비해 뒀으니 지금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맡아서 할 테니까, 대표님은 하루만이라도 푹 쉬고 계세요.”
“그럼 본가에 들렀다가 오피스텔로 넘어가 있을게요. 따로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고.”
“걱정 마세요, 대표님.”
아무리 피곤해도 본가에는 들릴 수밖에 없기에, 민후는 왠지 모를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곧장 본가로 향했다.
민후의 집안은 본래 재산이 많고 부유한 가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기업 중 하나인 ‘J그룹’을 대대로 이끄는 집안이었고,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 같은 게 아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는 기업의 자부심을 안고, 현재는 민후의 아버지 준식이 그 계보를 잇는 중이었다.
“에구머니나, 도련님!”
커다란 정문 앞에 내려 현관으로 통하는 마당을 지나 본가 안으로 완전히 발을 들인 민후를 가장 먼저 반겨 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그냥 가정부가 아니라 민후를 먹여 주고 길러 준 보모라고 해도 될 만큼 그들은 각별한 사이였다. 민후는 한껏 반가운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우, 그럼요! 나야 뭐 회장님 밑에서 항상 잘 먹고 잘살았죠.”
이제야 진짜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에 울컥 눈물이 치밀었지만, 아주머니의 농담으로 민후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버지는요?”
“회장님은 서재에 계세요. 요즘도 사업 일로 바쁘시거든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민후는 다시금 묵직한 걸음으로 준식의 서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이럴 땐 오히려 가정부 아주머니가 더 친근한 가족처럼 느껴진다. 후우, 하고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 한숨을 내쉰 민후는 금테로 둘러진 서재 문고리를 잡아 내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어 재꼈다.
“저 왔어요, 아버지.”
무려 9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9년 전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머리카락에 새치가 조금 늘고, 신경성으로 인한 미간에 주름이 생겼을 뿐이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어, 그래.”
무덤덤함은 준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9년 전이 아니라 아홉 시간 전에 본 사람마냥 준식은 살짝 고개를 들어 민후를 힐끗 쳐다보는 것 말고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민후도 더 이상 상처 받을 일은 없었다.
“사업 허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아버지와 한 약속은 잊지 않고 지킬게요.”
“알았으니 이만 나가 봐. 서류 읽느라 정신이 없구나.”
언제나 이래왔잖아. 라는 말 한마디만으로 정리할 수 있는 관계. 그것이 바로 민후와 아버지의 관계였다.
“앞으로 오피스텔에서 묵기로 했습니다. 본가에는 종종 들릴게요.”
“그럴 필요 없다. 넌 네 일이나 잘하기만 하면 돼.”
예의상 던진 말에 탁구공 치듯 받아쳐 버리는 준식이 이젠 얄밉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토록 무감각해진 현실이 더욱 잔인한 걸지도 모른다.
민후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서재를 빠져나왔다. 잔뜩 올랐던 긴장을 풀고 나니 더욱 전신이 노곤해졌다.
“벌써 내려오셨어요?”
부엌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담고 있던 아주머니가 민후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후다닥 달려 나왔다. 그에 민후는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오래 있을 이유도 없는 거 아시잖아요.”
“회장님도 참 무심하시지. 어떻게 9년 만에 보는 아들 얼굴을 그리 넘긴대요?”
“전 괜찮아요,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늘 민후를 안타까워 했다. 언제나 바르고, 똑똑하고, 뭐 하나 빠지는 구석 없이 한 길로만 쭉 성장한 아들이니만큼 금지옥엽이라며 엉덩이를 두들겨 줘도 모자를 판에 이런 식으로 차가운 대우를 마지않는 준식의 행동이 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때문에 아주머니는 그만큼 더 민후를 챙겨 주려 노력하곤 했다. 그나마 민후의 곁을 지켜 주었던 그의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이제 남은 따듯한 손길이라고는 제 손 하나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여기 반찬들 좀 가져가요. 내가 도련님 좋아하는 반찬 바리바리 싸 놨어.”
연분홍색 보따리 안에 다섯 겹은 족히 돼 보이는 반찬통 쪽으로 시선을 옮긴 민후는 무척 기뻐하며 그것을 집어 들곤 물었다.
“와, 장조림도 있어요?”
“그럼요! 장조림부터 시작해서 잡채, 꼬막, 불고기 등등 안 해 놓은 반찬이 없을 정도라니까요?”
분명 웃음꽃을 피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후는 울고 싶었다. 누구 앞에서는 이 정도는 익숙해졌다고 큰소리나 떵떵 쳐 댔지만, 사실 하나도 익숙지 않다.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최고의 대표라고 소문이 자자한 민후 역시, 하나뿐인 아버지에게 그저 사랑받고 싶은 아들에 불과하기에.
“힘내요, 도련님. 이 반찬 다 먹으면 또 놀러 오고요. 응?”
민후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리는 사람이 바로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이는 민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웃음을 잃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이 세상에서 도련님만 한 아들 없다고 생각해. 그뿐인 줄 알아요?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대견한걸.”
“정말 감사해요, 아주머니…….”
“감사하긴!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 가지고. 이거 다 먹으면 꼭 다시 와야 해요? 이것보다 더 맛있는 반찬 많이 해 줄 테니까.”
민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머니와 아쉬운 포옹을 끝으로 본가를 나왔다. 그는 두 손 가득 먹음직스러운 반찬을 싸 들고 앞으로 묵게 될 오피스텔로 자취를 옮겼다.
“계, 계약이요?”
도시의 외곽 지역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 카페, 아랑. 그 안에 ‘매니저’라는 이름표를 달고 앉아 있던 여주의 눈이 휘둥그레 늘어났다.
“예, 그렇습니다. 지난번에 부탁으로 가져갔던 그림을 저희 대표님께서 무척 좋아하셔서,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만들어진 ‘J갤러리’에 여기 작가님 그림을 걸려고 합니다.”
가지런하게 이어지는 태오의 말을 한 자, 한 자 놓치지 않고 귀에 담아낸 여주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앞에 놓인 시원한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러니까, 지금 저희 카페 그림들을 전부 가져가시겠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물론 그림은 작가님의 소유물이고, 창작물에 대해 저희는 일체 관여하지 않을 거고요. 저희 J그룹 자체가 워낙 큰 규모여서 계약하시면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또 한 번, 여주가 뒤로 나자빠지고 만다. 두 귀를 의심할 필요도 없이 똑똑히 들었다.
“제, 제이 그룹이요?”
“네. 그곳에서 파생된 게 바로 J갤러리 입니다.”
맙소사.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하면 서러운 대기업들 중 하나인 J그룹에서 먼저 계약이 들어왔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YES!’를 외쳐야 할 경우였다. 하지만 여주는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그런데요. 계약하기 전에 아무래도 작가님께 허락을 받아야…….”
“아아, 네. 저희도 지금 당장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사흘 정도 말미를 드릴 테니 그 안에 결정하시고, 여기 명함에 적인 번호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워낙 좋은 회사여서 그런지 명함에서마저 번쩍번쩍 빛이 나는 착각이 일었다.
비서가 떠난 뒤 여주는 아래 직원들에게 남은 일들을 맡기고는 곧바로 카페 내부에 있는 승강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숨을 들이켤 틈도 없이 신발을 벗고 뛰어들어가 전동휠체어에 앉아 있는 한 여자의 곁으로 다가섰다.
“마리야! 완전 대박 났어, 우리!”
마리.
카페에 걸린 그림의 주인이자, 불의의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잃고 은둔 생활을 하는 작가이다. 생전 햇빛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새하얗다 못해 창백함에 가까운 피부를 갖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여주의 호들갑에 마리의 미간이 아주 엷게나마 찌푸려졌다. 그림을 그리던 중에 방해를 놓은 것이 불만스럽다는 듯 쳐다봄에도 불구하고 여주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그림이랑 계약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게다가 그 사람이 어디서 나온 건 줄 알아? 바로 그 유명한 J그룹에서 나왔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뉴스에 종종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우리 이 계약하자. 넌 그냥 그림만 계속 그리면 되는 거야!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거랑 같은 셈이라니까? 응? 마리야.”
계약이고 돈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큰 관심이 없는 마리이기에 일시적인 거부감이 찾아왔지만, 부담스러우리만치 초롱초롱 빛나는 여주를 보자니 무조건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래 봐야 사업은 그쪽으로 빠삭한 여주가 알아서 할 테고, 그림 그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딱히 아니랄 것도 없다.
“그래, 그렇게 해.”
“정말? 정말이지? 너 말 바꾸기 없기다?”
“알았어, 알았어.”
언제나 발랄하고 유쾌한 여주이지만 또 이렇게까지 기뻐하는 건 처음 보는 모습이기에, 마리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여주는 마리를 대신해 장소에 나가 서명을 마쳤고, 2년 동안 유지하겠다는 약속까지 끝마쳤다. 그러자 J아트 쪽에서 다시금 연락이 돌아왔다. J갤러리의 대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작은 연회를 열 예정이니 그곳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난 안 가.”
“에이, 그러지 말고. 너도 오랜만에 바깥 구경하고 좋잖아! 너보고 절대 앞에 서라는 거 아냐. 그냥 나랑 같이 가서 구경만 하고 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