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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2화


마리는 극구 반대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여주의 고집은 당할 수 없었다. 결국 마리는 여주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꽤나 오랜만에 드러내는 몸인지라 불안하고 두려웠지만, 그런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비록 연회장 안에서 파티를 즐기지는 못해도 창가 쪽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네, 이사님. 마음껏 즐기다 가세요.”
한편, 그 연회장에 주최자로 등장한 민후는 진즉 참석자들과 축배를 들어 이벤트를 마치고 내려와 친한 주주들과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샴페인 한 잔을 들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앞으로 열릴 J갤러리에 대해 광고 아닌 광고를 던질 무렵, 저도 모르게 움직인 민후의 시선이 문득 창가 구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옆모습. 그렇지만 어디서 본 적은 없는 듯싶다. 분명 여기에 초대된 사람은 맞는 것 같은데…….
“마리야! 여기 샴페인 더 가져왔어.”
마리. 그 한마디에 민후의 머릿속 모든 회로가 그대로 멈춰 버렸다.



02. 미술실 귀신


“여기가 앞으로 네가 다니게 될 학교다.”
어머니의 죽음, 그것은 민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였다.
유명 인사들의 자녀가 많이 다니는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던 민후는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떠도는 소문을 견디지 못하고 잘 쌓아온 성적을 단번에 추락시켰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높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의 아버지 준식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따로 살 집을 얻어 주고, J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감춘 채 일반 고등학교로 거처를 옮겨 주었다.
“따로 붙인 경호원 있고 가정부도 있으니 사는데 지장은 없을 거다. 뭐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준식에게 민후란 하나뿐인 핏줄이자 하나뿐인 기회였다. 그렇기에 뭐든 민후의 일이라면 간섭할 수밖에 없었고, 최선을 다해 지켜내야만 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연락은 가끔 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한순간에 지루하고 따분한 구렁텅이에 빠져 버린 민후에게 꿈과 희망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였지만, 지극정성을 다해 저를 보필하려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버티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그림자에 가려졌을 지라도, 제 할 일은 해야만 한다고.
“민후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니?”
이번 학교는 그간 다녔던 사립 고등학교와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돌아오는 질문이라고는 이런 쓸데없는 재력 조사뿐이다. 인간이 바라는 건 모두 똑같다는 걸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작은 사업을 하십니다.”
“아…… 그래?”
부드럽던 선생의 표정이 단번에 뒤바뀌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아버지의 ‘작은 사업’이라는 말에 저리 실망한 거겠지. 잘난 놈 하나만 들어오면 학교도 덕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무튼 반으로 가자.”
“네.”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시끌벅적한 복도는 금세 조용해졌고, 선생은 민후와 함께 2학년 7반 교실로 향했다. 그나마 민후의 마음에 드는 것은 한 반당 학생이 스무 명 남짓이라는 사실이었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앞문이 열렸다. 숨을 죽이고 앉아 선생을 기다리던 아이들은 또래에 비해 큰 편인 그를 올려다보기 바빴다.
교탁 위의 교과서들을 가지런히 배치한 선생이 민후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자, 인사하렴.”
민후는 여전히 무던한 표정이었다. 백 명도 넘는 자리에 서서 기업에 관한 연설도 해 봤던 민후이기에 고작 이 정도로 떨릴 이유는 없었다.
“강민후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
그에 한 박자 늦은 박수가 작게나마 터져 나왔다. 시골스러운 학교에 유난히 빛나는 학생이 전학왔으니 여학생들은 이미 눈이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남학생들 또한 벌써부터 민후와 친해질 생각에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민후 너는 저기 창가 쪽에 앉으렴.”
“네.”
지정받은 자리는 낮잠 자기에 안성맞춤인 명당이었다. 따사로운 햇빛이 반기고 있었지만 민후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가져온 교과서를 펼쳐 들었다. 사립고에서도 전교 10위 안에 들었던 성적인데, 아마 전교 1등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 했지?”
그로부터 50분이 지났다. 1교시부터 수학이었기에 지루한 냄새가 폴폴 풍겼지만, 모두 몸부림을 칠 때에도 민후는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물론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고, 미리 복습한 적은 더더욱 없는 진정한 모범생의 면모였다.
반장의 인사와 함께 선생님이 나가고 곧바로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다들 각자의 친구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거나,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지만 민후는 여전히 교과서를 손에서 놓지 않는 상태였다.
“저기…… 민후야!”
그때였다. 먼발치에 서서 민후를 바라보고 있던 여학생 한 명이 슬그머니 그에게 다가왔다. 동시에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전학생에게 말을 건다는 건, 특히나 민후 같이 엄청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에게 다가선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낸 그 여학생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내가 부반장이어서 네 정보가 필요한데, 전화번호 좀 알려 줄 수 있어?”
민후는 심오한 눈빛으로 여학생을 쳐다봤다. 눈꺼풀 아래에 슬며시 깔린 피곤은 민후의 얼굴을 더욱 섹시하게 만들어 주었다. 금방이라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시선을 내리깔고 마는 여학생을 묵묵히 응시하던 민후는 종이 위에 전화번호를 적은 뒤 찢어 건네었다.
“여기.”
“아, 고, 고마워!”
쭈뼛거리는 여학생이 사라지고 다음 수업이 시작된 후에도 민후는 끝까지 학습하고, 또 학습했다.
배워야 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든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게 민후의 특성이자,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증상이었다.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는데,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별거 아니었던 특성이 강박증이라는 탈을 쓰고 말았다.
“다음 시간은 미술이니까 미술실로 모이도록.”
“네.”
미술이라는 두 글자에 민후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이제야 정신이 들어 현실을 자각하는 사람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는 조금 전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여학생에게 다가가 스스럼없이 질문을 던졌다.
“미술실이 어디에 있지?”
“미, 미술실? 아, 저기 계단으로 한 층 내려가면 돼!”
“고마워.”
여학생은 신나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민후는 조금의 관심도 없이 교실을 나와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복도 저 끝에 미술실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민후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눈빛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왠지 모르게 공기부터 다르고, 오래된 물감 냄새가 나는 이곳이 민후에게는 유독 익숙했다. 어쩐지 떨리는 눈빛으로 미술실 안이 내다보이는 창문 쪽을 응시했다.
“어……?”
그런데 미술실 안에 누군가가 보였다. 긴 머리를 허리춤까지 내린 걸 보아하니 여학생인 듯싶었다. 거뭇거뭇 칠해진 캔버스 위로 열심히 붓질을 잇는 그녀의 모습을 민후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보기 시작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리는데 여념이 없는 뒷모습이 자꾸만 낯이 익었다.
왜지? 민후는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미술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버렸다. 그 바람에 화들짝 놀란 여학생이 그림을 그리다 말고 뒤로 돌아 민후를 쳐다봤다.
“아, 혹시 다음이 미술 시간이니?”
그녀의 물음에 민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학생이 황급히 미술 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쓰던 붓부터 수채물감이 잔뜩 묻은 팔레트를 정리한 여학생은 그리다 만 캔버스를 번쩍 들어 구석진 곳으로 옮겨 뒀다.
그리고는 민후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선생님께는 말하지 말아 줄래? 내가 여길 몰래 썼다는 걸 알면 분명 화내실 거야.”
보아하니 한두 번 이런 게 아닌 모양이다. 이를 생각도 없었지만, 그걸 기회 삼아 궁금한 걸 물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뻗어진 민후의 손이 나가려던 여학생의 팔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화들짝 놀라하는 얼굴을 보고도 민후는 나지막이 질문을 던졌다.
“너…… 이름이 뭐야?”
너무 단순한 질문에 일순간 멍하니 서 있던 여학생은 이내 배시시 웃으며 자신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가리켰다.
“이게 내 이름.”
마리.
예쁘고 특이한 그 이름 두 글자가 민후의 머릿속에 정확히 박히는 순간이었다.

* * *


“오늘도 왔다 갔나?”
“누구?”
미술 시간이 시작되고, 각자 배정받은 자리에 앉아 정물화를 그리던 때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학생 두 명이 의뭉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연필로 밑그림을 잡던 민후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 있잖아, 미술실 귀신.”
“미술실 귀신?”
“몰랐어? 미술실에 사람이 없을 때면 홀연히 나타나서 그림만 그리다가 떠난다는 귀신 말이야.”
귀신이라, 생각보다 얘기가 흥미진진하다.
“진짜 그런 귀신이 있단 말이야?”
“바보야, 설마 진짜 귀신이겠냐? 5반에 마리 말하는 거잖아. 그 미술광이라는 여자애.”
마리라는 말에 민후의 두 눈이 순식간에 크게 늘어났다. 선생님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기에 저 말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건만, 이미 교내 학생들은 대부분 마리가 미술실을 몰래 들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싶었다.
“알기로는 매 시간마다 온다던데, 어떤 날은 방과 후 늦게까지 남아서 혼자 그림만 그리다 간대.”
“괜히 으스스하다. 그런 애들은 정신이 좀 이상할 거 같지 않아?”
“모르지. 어떤 애들은 무섭다고도 하는데, 또 어떤 애들은 의외로 예쁘다더라고.”
누가 저런 몹쓸 소문을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후는 마리의 첫인상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신비스러운 모습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방과 후에 구경하러 올래?”
구경은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얼굴이 보고 싶은 거면 그냥 5반에 가면 되잖아.”
“쉬는 시간마다 없어지니까 그렇지! 이따 방과 후에 한 번 와 보자. 응?”
“어우, 난 싫어. 무서운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민후는 마리의 귀까지 저 소문이 퍼졌을까 봐 문득 걱정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쓸데없는 소문 따위 함부로 믿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민후는 그림을 그리던 캔버스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
수다 소리에 정신을 빼놓고 있다 보니 캔버스 위 밑그림이 엉망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민후는 재빨리 그림을 고쳐야만 했다.
“야, 민후야. 우리랑 밥 같이 먹을래?”
“그래.”
어영부영 점심시간을 맞이한 민후는 식판을 들고 먼저 말을 건 남학생 무리 사이에 자릴 잡았다.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수업도 무던하게 지나갔다. 종례를 마친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학생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가방을 챙겨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뒤이어 가방을 챙기는 민후의 곁으로 익숙한 그림자가 다가온다.
“민후야.”
수줍은 부름에 민후가 고개를 돌렸다.
“응?”
저를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부반장이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채 가리지도 못한 부반장은 여전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잠깐 시간 되면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반장은 어디 갔는데?”
“그,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하교했어! 힘을 좀 써야 하는데 아무래도 나 혼자는 무리인 거 같아서…….”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민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되물었다.
“뭘 하면 돼?”
“미술실에 쌓여 있는 스케치북을 교무실로 올려다 놓는 거야. 그렇게 많지는 않아.”
그 소리에 민후는 곧장 팔을 걷어붙였다.
“가자.”
그러지 않아도 미술실에 다시 가 볼 생각이었는데 잘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리를 또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고, 고마워.”
민후의 진짜 의도를 알 리 없는 부반장은 자신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먼저 미술실로 내려온 민후는 문을 열기 직전 고개를 들어 창문 내부를 확인했다.
“역시…….”
마리가 있다. 방과 후에까지 남아서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아까 전 보았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앉아 열심히 그림에 열중하는 마리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뒤따라 내려온 부반장으로 인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 그 소문이 진짜인가 보네?”
부반장도 소문을 알고 있는지 꽤나 신기한 표정으로 마리를 구경하기 바빴다. 그에 민후는 문고리를 쥔 채로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가서 가지고 나올게.”
“어? 어어.”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미술실 문이 열렸다. 부반장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은 민후는 조심스레 마리의 뒤로 다가갔다. 얼마나 그림에 열중을 했는지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는 마리를 향해 민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는다.
“저기.”
“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