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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특종 1화

프롤로그


띠링.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태완의 시선이 닿은 곳은 현관 입구에 나란히 놓인 색깔도 디자인도 모두 다른 네 켤레의 구두였다. 흐트러짐 없이 일렬로 놓인 구두들은 모두 그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태완이 왔니?”
곧이어 들려온 송현화의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마흔이라는 나이의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 배우이자 대한민국 제1 야당인 한국당 서우찬 대표의 아내 송현화가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 켤레의 구두는 누구의 것일까.
“어서 들어오렴.”
태완의 시선이 자신의 손을 잡은 송현화의 손을 잠시 스친 뒤 거실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누구 와 있어요?”
그가 이 집에서 지낸 지도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도우미 아주머니와 1년에 두세 번 방문하는 송현화 외에 다른 이가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잠깐 이리 와 볼래.”
그녀의 매끄러운 손이 그의 손을 더욱 꼭 움켜잡았다.
“너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어.”
“누구……?”
높은 천장의 넓은 거실은 커다란 창을 통해 새하얗게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으로 가득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비로소 중앙에 놓인 쇼파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어림잡아도 일흔은 넘어 보이는 노파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파를 발견한 순간 태완의 입에서 나오려던 질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단순히 노파의 존재가 낯설어서만은 아니었다. 입고 있는, 흠잡을 데 없는 짙은 보라색의 정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명할 수 없는 기운과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사자 같은 서늘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녀 양옆으로 선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들도 움직임 없이 태완을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태완이냐?”
송현화의 손에 이끌려 소파 앞에 다다른 태완의 발걸음이 느리게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시죠?”
상대의 머릿속까지도 꿰뚫을 듯 차가운 눈빛의 노파가 앉은 자세 그대로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소리 또한 상대방을 압도할 거만함을 품고 있었다.
“어미를 닮았구나.”
뜻밖에도 노파는 세상 모두에게 비밀로 부쳐진 그의 비밀에 대해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비밀의 내용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뜻일 텐데, 그에 대해 송현화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가늘어진 태완의 시선이 자신의 옆에 선 송현화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소파에 앉은 노파에게 향해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태완의 눈꼬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누구……시죠?”
태완의 시선이 다시 노파를 향해 움직였다.
“나 말이냐?”
“네. 누구신데 집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 계신 겁니까?”
그가 차분한, 하지만 열일곱의 나이보다는 성인에 좀 더 가까운 중저음의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노파에게 고정된 그의 눈동자 또한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집주인? 훗, 어린놈이 호기는 있구나.”
“누구신데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 계신 건지 물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냐?”
노파는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거실 안에 있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 숨결, 작은 미동,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살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은 경박하거나 섬뜩하기보다는 작은 짐승을 산 채로 잡아 삼키기 전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포식자처럼 민첩하고도 예리했다. 오후의 만개한 태양은 그런 노파를 포식자의 왕이라도 되는 듯 오묘하게, 백발은 더욱 신비롭게 감싸고 있었다.
노파의 질문에 태완은 어깨에서 흘러내린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대답했다.
“연세가 있으셔서 잘 들리지 않으시는 모양인데, 누구신지 정확히 네 번 물었고 왜 남의 집에 들어와 계신지는 두 번 물었습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어릴 적부터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외모와 또래보다 큰 키 탓에 평소 최소한의 말 외에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며 살아왔던 그였다. 만약 지금 서 있는 곳이 다른 장소였다면 그는 어떤 상대를 만나든, 상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자극하든 분명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곳이 자신의 집 안이라는 사실은 그를 평소처럼 행동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태완은 고개를 돌려 다시 송현화를 바라보았다. 텔레파시라도 통한 듯 때마침 고개를 돌리던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태완은 지금 묻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저 노파는 누구이며, 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끌어내지 않고 있는지.
하지만 어떤 질문도 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자신의 질문으로 인해 듣게 될 말들에 그는 이유 없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지 않으신다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겨우 감정을 억누른 그의 입술 사이로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는 도대체 애를 어떻게 키운 거냐?”
그 순간 태완의 눈이 짙은 빛을 띠며 어둡게 가라앉았다.
“저 눈빛하고는…….”
“그런 말씀 하실 입장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태완이 입을 열기 전 그의 앞으로 팔을 뻗어 막으며 송현화가 말했다. 처음으로 노파를 향해 입을 연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은 그가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싸늘하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송현화, 그녀는 20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데뷔와 동시에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올랐던 여인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이름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미인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아니, 굳이 먼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지 않아도 변함없는 그녀의 모습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선을 빼앗겼다. 마치 시간이 그녀만은 비켜 가고 있는 듯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우아했으며,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할 여유와 겸손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생부도 처음엔 그녀를 동경하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그녀를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 혹은 감춰야 하는 무언가를 가진 사람에게 그 아름다움은 호기심으로 한 번 꺾어 보고 싶은 꽃일 뿐 시들해지면 처치 곤란한 것이 되어 버리는지도 모른다.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송현화는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 밖 현실의 냉혹함은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태완이 앞에서 말씀 조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자격, 없으시잖아요?”
“너도 많이 컸구나. 허긴 밤낮없이 거짓말만 늘어놓는 놈과 함께 사니 쓸데없이 배포가 커진 탓이겠지.”
노파가 입가의 비릿한 냉소를 감추지 않은 채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볼일 있어서 나가 볼게요.”
“태완아.”
몸을 돌려 다시 나가려는 그의 팔을 송현화가 재빨리 잡았다.
“약속이 있어요. 가방만 놓고 나가려고 잠깐 들어왔던 거예요.”
지난겨울에 마지막으로 봤으니 6개월 만이었다. 송현화의 표정에는 그 시간만큼 자라난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눈자위로 어른거리는 붉은 기운은 태완의 가슴을 뜨끔거리게 만들었다.
이제 더는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할 필요 없다고, 당신이 힘들어 하는 걸 원치 않는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송현화에게 감춰진 멍에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어금니를 악 물며 모든 감정을, 어설픈 위로를 삼켰다.
“그리고 사람들 눈도 있는데,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그는 담담한 손길로 그녀의 가녀린 손을 자신의 팔에서 떼어 냈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는 송현화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태완아, 저 분…….”
자신 앞에 그림처럼 아름답게 선 송현화의 입에서 흘러나오려다 녹아 없어진 말을 태완은 그녀의 미세한 떨림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가 알지 못했으면 더 좋았을 자신의 태생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외삼촌을 통해서였다. 외삼촌에게 이제 어머니의 나라로 가 혼자 지내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 이유를 묻자 언젠가 말해 주려 했었다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외삼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의 시작은 그가 송현화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였다. 태완의 생부, 혹은 생부의 가족들은 그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사적으로, 혹은 상의나 부탁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의학적으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칠게 반항하다 실신 상태로 옮겨진 병원에서 송현화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오빠가 살고 있는 하와이로 도피해 그를 낳았다. 이후 몇 년간 죽은 듯 그곳에서 숨어 살다 오빠 부부에게 그를 맡기고 다시 국내로 귀국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세상 누구도 그가 송현화의 숨겨 둔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국내로 돌아와 소위 말하는 대박 작품에 연이어 출연한 뒤 다시 스타 자리에 올랐다. 그러다 당시 정치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그 뒤로 그녀에게 아이는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껏 남편과 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만을 키우는 이유를 세상 사람들은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불행과 행복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타고 달리는 동안 그는 외삼촌 부부의 호적에 올라 자랐다. 평범한 어린 시절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크게 불행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하와이에서 사업을 했던 외삼촌은 부유했고, 송현화는 1년에 한두 번 반드시 그를 보기 위해 하와이로 날아와 주었으니까.
하지만 외삼촌이 친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부터 알아 버렸기에 태완은 일찍 철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외삼촌 부부가 파경을 맞은 5년 전 담담하게 한국행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고모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던 송현화의 나라에서 지내게 된 것은 그에게 분명 도전이었고 모험이었다. 이제야 조금씩 모든 것에 적응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완은 서둘러 현관으로 걸어가 조금 전 벗어 두었던 신발 안으로 한쪽 발을 밀어 넣었다. 그사이 송현화가 다시 그에게 다가와 팔을 잡았다.
“태완아.”
“…….”
“저분이 네 할머니야.”
태완은 한쪽 운동화만 신은 채 고개를 들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가는 손을 떨쳐 냈다.
“태완아.”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했다.
“널 데려가려고 오신 거야. 더 이상 너 혼자 외롭게 살지 않을 수 있게. 네가 있어야 했던 자리로 데려가기 위해서…….”
붉어진 송현화의 눈자위가 경련하듯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를 두고 돌아설 때면 감추려 해도 파리하게 젖어 들었던 눈동자였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로 잔뜩 겁을 먹은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저 노파가 자신을 데려갈까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원망할까 봐, 미워할까 봐, 용서하지 않을까 봐, 다시는 볼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들이 평범한 모자 사이일 수 없는 이유가 누군가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왔는데 이제는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저 노파와 연관이 있었다는 걸.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 송현화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는 더욱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러려고 절 낳으셨던 거예요? 낳기만 하면 제 인생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셨던 거냐고요?”
그 순간 송현화의 양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런 게 아니야…….”
“앞으로 죽을 때까지 눈앞에 나타나지 않고 살아 드릴 테니까.”
“아니야, 태완아. 어, 어떻게…….”
“절 낳았다는 기억도 깨끗하게 지우고 사세요.”
그가 나머지 발도 운동화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나이 열일곱에 이제야 사춘기가 온 모양이구나.”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녀 양옆으로 서 있던 검은 정장 차림의 남자 둘이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와 결박하듯 양팔을 잡았다.
태완은 이미 180cm가 넘는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키와 덩치를 웃도는 남자 둘이 팔을 붙잡자 쉽게 그들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죽을 때까지 네가 무슨 수로 숨어서 살 건데?”
“놔요!”
“머리 깎고 산에라도 들어가겠다는 거냐?”
태완은 대답 대신 붙잡힌 팔을 더 힘껏 비틀었다.
“너, 내가 누군 줄은 알고 있는 게냐?”
그제야 그는 잔뜩 힘이 들어간 눈으로 노파를 노려보았다.
“네 애비가 누군지는 알고 있고?”
어느새 노파가 그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남자들의 힘에 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태완은 입을 더욱 굳게 다물었다. 지금껏 송현화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않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산 세월이 17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이었다. 생부가 누구인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여전히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는지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알지 않아도 된다면 죽을 때까지 모른 채로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