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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특종 2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던 적 없습니다.”
“왜?”
사내들에게 붙잡힌 팔 아래 그의 손이 제힘을 이기지 못하고 멋대로 비틀렸다. 눈앞의 노파나 송현화, 또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생부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환영받지도 못할 주제에 세상에 태어나 평범한 사람인 척, 남들과 다르지 않은 척 살려 했던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분명 우리 재우 아들이 맞았는데. 하긴 뭐 하나 제대로 보고 배운 적이 없었을 테니.”
마뜩잖은 눈길로 그를 보다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정말 그의 존재를 변변찮게 여기는 듯했다.
“재원그룹.”
살기 어린 태완의 눈빛을 우습게 외면한 노파가 송현화를 향해 시선을 옮기며 서슬 퍼런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재원그룹.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이 알고 있는 기업이었다. 설마 그의 생부란 사람은, 눈앞의 노파는 재원그룹과 관련 있는 사람인 것일까.
“내 아들이 바로 재원그룹 창업주의 아들이자 2대 사장이었다.”
노파가 다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놀랍긴 했으나 그 순간 태완의 가슴 속에는 커다란 분노가 솟구쳤다. 그 정도로 대단한 재벌가의 사람이, 누구보다 많은 교육을 받고 자랐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제 자식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서도, 배우지 못해서도,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으로 인해 잉태된 생명도,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인도, 모든 것이 우습고 사소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들에게 자신이 고작 그런 존재인 것이라면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모르는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옳았다.
“그런 내 아들이, 네 애비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노파가 잠시 말을 끊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정적은 태완을 더없이 고통스럽게 했다.
“죽었다. 네 이복형과 함께.”
“…….”
“너도 내가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만 나도 네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허나 어쩌겠느냐? 네가 이 세상에 남겨진 내 아들의 유일한 핏줄인 것을.”
그래서였던 것이다. 그가 노파를 경계하며 본능적으로 몸을 사렸던 이유가.
“그건 당신들 사정이죠.”
중얼거리듯 나직한 소리로 말한 태완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몸을 비틀며 사방으로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단정했던 머리는 어느새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악문 입술 끝 어딘가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단정했던 모습보다 흐트러지고 볼이 붉게 상기돼 씩씩거리는 모습이 오히려 송현화와 더욱 흡사해 팔을 잡고 선 사내들의 시선까지도 빼앗아 갔다. 그러나 태완은 살이 찢기고 팔다리가 다 떨어져 나가도 눈앞의 노파에게 순순히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단지 재벌이라는 이유로 지금껏 자신들의 모든 죄를 손쉽게 용서받으며 살아왔을지 모르겠으나 그는 그들을 용서할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다.
“필요 없을 땐 그렇게 쉽게 버리더니, 이제 와서 용서 따윈 구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하겠다고요? 내가 왜 그런 당신들 뜻대로 순순히 따라 줘야 하는 겁니까? 당신들이 뭐라고!”
하지만 반항이 거세질수록 더해지는 고통과 괴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것 역시 그였다.
“그래 봐야 네 몸만 상한다.”
노파의 말대로였다. 그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그를 옥죄고 있는 남자들의 아귀힘은 조금도 느슨해지지 않았다. 마치 벽에 팽팽하게 고정돼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끊어 낼 수 없는 쇠사슬에 묶인 것 같았다.
“애 상한다. 적당히 해라.”
노파의 말에 남자들의 손에서 재깍 힘이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그를 놓아준 것은 아니었다.
“너한테 선택권은 없다. 하지만 내가 필요해져 널 찾은 이상 너도 분명 얻게 되는 것들이 있을 게다.”
노파가 그의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듯 닮은 싸늘한 두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가령 송태완으로 산다면 죽어도 넘볼 수 없는 재원그룹을, 강재우의 아들 강태완이라면 통째로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태완의 눈동자가 치밀어 오르는 격노로 꿈틀 움직였다. 이 노파는 지금 그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원그룹이라는 이름 안에 그를 가두고 자신이 가진 힘으로 그를 평생 조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 없어지면 또다시 버리겠지. 흔적도 찾을 수 없도록 완벽하게.
“어디로 데려가실 겁니까?”
이번엔 송현화가 물었다.
“네가 그건 알아서 뭘 하게?”
“우리 태완이, 재원그룹의 주인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세워 주신다고 하셨던 약속은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합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저 망아지 같은 놈은 내 아들 재우의 핏줄이다.”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게 회장님 친손자로…… 꼭 그렇게 지켜 주셔야 합니다.”
“누가 이 아일 무시한다는 게냐? 감히 우리 재우 아들을 누가!”
나직한 목소리였으나 엄포와 같았다.
노파의 말에 송현화가 길을 터주듯 옆으로 비켜섰다.
“너는 한 시간 더 머물렀다 나오너라.”
노파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송현화에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러자 태완을 잡고 선 남자 중 하나가 재빨리 그의 팔을 놓고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1. 운명의 새벽


주변은 온통 암흑뿐이었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 또한 자신의 숨소리가 전부였다. 연주는 몸을 더욱 웅크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숨소리까지 은밀하게 숨겼다.
“저쪽이다!”
그때였다. 완벽하게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소리치자 그녀가 몸을 숨긴 방향을 향해 구두 소리가 다급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길.
연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신고 있던 구두를 벗어 소형 카메라를 들지 않은 손에 든 뒤 전력 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새벽이었다. 침묵에 잠긴 거리는 간간이 보이는 가로등 외에 불빛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변 상가들도 모두 불이 꺼진 상태였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말 그대로 지루한 고요함에 잠식당한 풍경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목적지도 없이 눈앞의 길만을 보며 달려 나가고 있었다.
새벽을 가르는 연주의 발소리는 그녀를 쫓고 있는 남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는 듯했다. 타닥타닥, 발바닥이 아스팔트 도로와 마찰하는 소리가 울렸다.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며 그녀가 벌이고 있는 사투가 우습게 뒤따르는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번화가는 고사하고 다시 몸을 숨길 시도를 해 보기도 전에 저들에게 붙잡히게 될 듯싶었다.
머릿속으로 자신과 뒤를 쫓고 있는 남자들 사이의 거리와 그들에게 잡히기 전까지 남은 시간, 그리고 막연한 상황의 변수를 계산해 보는 동안에도 그녀의 발은 쉬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다 불쑥 지금 달리고 있는 길의 끄트머리쯤 제법 이름 있는 한옥 호텔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호텔 안까지 들어가 본 적은 없었으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러 차례 얘기를 들었고 사진으로 건물의 전경을 본 적도 있었다. 지금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저 남자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그곳까지 뛰어갈 수만 있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몸을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미약하나마 희망적인 생각에 연주는 더욱 힘을 내 달렸다. 그러나 점점 무뎌지는 발바닥의 통증과 달리 기도와 폐는 찢어질 듯 쓰렸고, 심장도 터질 듯 욱신거리고 있었다. 이제 한계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감아 놓은 태엽의 힘으로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는 두 다리 또한 뛰고 있는 박자의 간격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당장에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호텔은 아직도 어림잡아 30m는 남았음 직했다.
“놓치면 안 돼!”
“더 빨리 쫓아!”
저 멀리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그새 더 다가와 있었다. 연주는 장애물 없는 대로변을 달리는 자신의 모습이 야생 동물을 유인하고 있는 미끼처럼 느껴졌다. 지금 속도를 끝까지 유지하며 운 좋게 호텔 입구에 도착한다 해도 그곳에서 잡히고 말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 순간이었다. 멀리에서도 한눈에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고급 세단이 어둠을 가르고 호텔 앞쪽으로 달려와 멈춰 서더니 제복 차림의 호텔 직원이 재빨리 달려가 뒷좌석 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타려 한다는 사실을 직원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남자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호텔 투숙객인지,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또 다른 일행이 있는지 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으나 분명 그가 걷고 있는 방향은 호텔 직원이 문을 열어 주는 차에 올라타려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한 번씩 힘없이 휘청거리는 다리로 호텔 앞에 다다른 순간 그녀의 예상대로 짙은 색의 슈트를 입은 남자가 뒷좌석으로 올라탔고 옆에 있던 직원이 문을 닫아 주려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연주는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직원이 닫아 주려는 문을 잡고 재빨리 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그리고 당황한 직원이 잠시 사태를 파악하려는 사이,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닫았다.
쾅, 쾅, 쾅…….
귓가에 들려오는 울림이 호텔 직원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인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온전한 정신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인지 제대로 판단할 틈도 없이 일을 저질러 버렸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연주는 뒤늦게 섣불리 얼굴조차 마주 볼 수 없는 차의 주인이 어쩌면 차를 출발시키기 전 직접 자신을 뒤쫓고 있던 남자들에게 넘겨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입을 열었다.
“뭡니까?”
그녀가 거친 숨을 고르느라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로 판단해 본 남자는 지금 그녀가 타고 있는 정도의 차 뒷좌석에 앉기에는 너무 젊은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느낌을 감지한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었다.
“무례한 행동이었다는 건 알지만 제가 지금 쫓기고 있어서 그러는데,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
“모르는 사람들인데 아까부터 절 계속 쫓아오고 있어요.”
“그쪽 사정입니다.”
이어진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남자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차갑기만 했다.
“100m 정도만 가서 내려 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내 말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습니까?”
“저 사람들 손에 칼이 있어요.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래요.”
“끌어내려야 합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어떤 말을 해야 단번에 이 남자의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을까.
“한 실장님.”
“만약 지금 절 모른 척하신다면 조만간 이 근방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접하시게 될지도 몰라요.”
연주는 얕은 숨을 들이마셨다.
“변사자의 사망 추정 시간은 오늘 새벽일 테고, 사망 원인은 다발성 창상에 의한 과다 출혈이겠네요. 그런 기사를 접하면 분명 죄책감을 느끼실 거고,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의 절 모른 척하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실 거예요.”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공연히 뒷목이 뻣뻣해졌지만 그녀는 변사체와 사망 추정 시간이란 단어를 특히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문득문득 오늘의 일이 떠올라…….”
환청일 가능성이 높았으나 자신을 쫓던 남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이제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지금 내 걱정까지 해 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네, 지금 제 걱정하는 거예요. 그러니 제발 부탁드릴게요.”
“한 실장님.”
“네.”
때마침 그녀를 쫓던 남자들이 근처까지 도착해 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출발하죠.”
철컹 하는 작은 울림이 문 열리는 소리일 거라고 생각한 연주는 본능적으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자신의 목소리 때문에 남자가 하는 말은 분명하게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소리는 밖에서 차의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들기는 둔탁한 울림이었다. 뭐라고 소리치는 듯한 소리도 희미하게 들려왔으나 차의 방음 장치 덕에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처럼 불분명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귀를 틀어막고 있던 그녀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고맙습니다.”
차가 출발하고도 얼마간 더 차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연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만 세우세요.”
정말 100m쯤 달린 듯했다. 그녀 옆자리의 남자가 지시하자 운전석의 남자가 차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힐끔 바라 본 백미러를 통해 저 멀리 그녀를 태운 차를 따라 여전히 뛰어오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차가 출발한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쫓아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