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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풀이
딩-동-댕-동.
중간고사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난 이후, 교무실 문 앞에 내내 붙어 있던 ‘학생 출입금지’라 크게 적혀있던 종이가 떨어져 나갔다. 운 좋게도 마지막 시험 감독으로 배정되지 않아 여유롭게 서류 정리를 끝낸 지운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앞으로 채점해야 할 주관식 시험지들이 산더미처럼 제 앞에 쌓일 거라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에 대한 걱정보다는 몇 주간 내내 이어졌던 묵직한 긴장감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후련함이 먼저였다.
“지운 쌤, 지운 쌤!”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댄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지운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등을 세웠다. 다급한 목소리로 지운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의 옆자리인 국어 교사, 석현이었다.
2학년 국어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요즘 교무실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어제 치러진 시험에서, 그가 출제한 문제에 중복 답안이 나오는 바람에 선임 교사들에게 깨지고 학생들에게 들들 볶아지느라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퇴근하지?”
“응.”
“나 요즘 진짜 죽겠다. 처음에 이의제기한 학생 애들이 그때는 아니라더니 왜 지금은 맞냐고 들들 볶고.”
“답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중복 처리. 위에 선생님들이 눈치 주고 난리야.”
퀭한 눈 밑이 안타까워 지운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잘 좀 하지.”
“쌤까지 그러지 마. 나 요즘 진짜 죽겠어.”
국어는 매 해 꼭 한 번씩은 정답과 오답 사이에서 설전이 벌어지는 과목 중 하나였다. 중의적인 보기가 섞이는 것이 늘 문제여서 고심의 고심을 다해 출제를 해도 꼭 한두 개씩 문제가 생기곤 했다. 지금처럼.
“나 부장 선생님한테 불려가야 돼서 그러는데, 퇴근하는 거면 부탁 하나만.”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얼굴로 애원하는 석현을 빤히 바라보며 지운이 대답했다.
“싫어.”
“지금 당장 가야 돼서 그래. 진짜 어려운 거 아닌데.”
지운이 다시 한 번 거절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자 석현이 제 책상 아래에서 쇼핑백을 꺼내 얼른 내밀었다. 그의 빠른 행동에 말문이 막힌 지운이 싸늘한 눈으로 석현을 바라보았다.
“이거 이도 도서관에서 필독 도서 때문에 빌렸던 책인데, 오늘까지 반납이거든.”
딱 보아도 족히 스무 권은 되어 보이는 부피에 지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납만 해 주면 되는데…….”
“반납만 하면 되겠네. 부탁할 일 없이.”
“석현 쌤. 부장 선생님 호출.”
옆문으로 슬쩍 나온 다른 교사의 목소리에 마음이 급해진 석현이 지운에게 쇼핑백을 들이밀었다.
“나 지금 가야 되네. 늦었다, 쌤. 부탁해!”
밀어낼 새도 없이 제 품에 안겨 드는 묵직함에 지운이 눈을 찌푸렸다. 석현이 뒷걸음질 치며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내일 점심 살게. 부탁해요, 쌤.”
점심 살 돈이면 연체료 백 번도 더 내겠네. 지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쇼핑백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퇴근하기 위해 가방을 챙기는 지운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학교 도서실에서 빌리면 될 걸 가지고.”
가방을 옆으로 멘 지운은 여전히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쇼핑백을 안아 들었다. 기분 나쁜 묵직함이 팔 전체에 올라앉았다. 마주치는 교사들과 인사를 나눈 지운이 힘겹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쌤. 이번 수학 문제 너무 어려웠어요!”
“맞아요! 저 주관식 진짜 하나도 못 풀었어요.”
계단을 내려가던 3학년 학생들이 지운과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던 것처럼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식만 알면 다 풀 수 있는데 뭐가 어려워.”
“무슨 공식으로 풀어야 하는지 알아야 풀죠!”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칭얼거리는 여학생을 향해 지운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공식을 모르는 걸 어떻게 해. 난 다 가르쳐 준 거다.”
차갑기 짝이 없는 대답 뒤로 원망을 품은 아우성이 이어졌다. 역시 제수포. 옅게 들리는 제 별명에 지운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제수포’는 ‘쟤 때문에 수학 포기’를 줄인 말이자 지운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난 진짜 망했어!”
“나도야. 나 완전 망했어.”
“그러니까 나처럼 진작 포기하지. 수학 별거 아니다. 포기하면 쉬워.”
지운의 입장에선 답답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이었다. 공식만 알면 되는걸. 수학은 언제나 문제 속에 답이 있는 과목이었다. 공식을 알고, 그 공식에 문제 속 숫자들만 넣어 풀면 답이 나오는 명쾌하고 깔끔한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험지는 언제나 비가 내렸다.
“답답한 것들.”
지운은 진심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며 학생들에 대한 제 마음을 표했다.
* * *
시험이 끝나자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조용해진 도서관에 발을 들인 지운이 주변을 살폈다. 처음 왔어요. 라는 말이 적힌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찌나 조용한지, 땅에 닿는 발소리가 탁, 탁하고 울릴 정도였다. 지운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문이 열려 있는 대여실 안으로 향했다.
대여실 안으로 들어간 지운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눈 안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빽빽하게 이어져 있는 큰 책장들이었다. 임용고시가 끝난 이후로 도서관엔 발도 들이지 않았으니, 이런 전경을 보는 것은 거진 2년 만이었다. 악몽 같은 고시의 추억에 잠시 젖어 있던 지운이 고개를 흔들며 안고 있던 쇼핑백의 끈을 손으로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선 지운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윽한 커피 향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커피 향에 지운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사람의 형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정수리였다. 지운의 눈이 자동으로 아래로 향했다. 살짝 내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 아래로 펼쳐진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지운은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렸다.
“어…….”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쏟아진 스무 권의 책들이었다. 그제야 지운은 들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벼워진 쇼핑백의 무게가 느껴졌다. 지운이 황망한 얼굴로 손을 위로 치켜들자 밑바닥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쇼핑백이 그를 놀리듯 눈앞에 펼쳐졌다. 상황 파악을 완전히 끝낸 지운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죄송합니다. 쇼핑백 아래가 찢어져서.”
생전 도움도 안 되는 이석현. 이 번거로움을 초래한 석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운이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반납하러 오셨나 봐요.”
네모난 책 사이로 불쑥 들어오는 작은 손이 닿자 빠르게 움직이던 지운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제 큰 손의 반을 겨우 덮는 조그만 손을 따라 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다시 보이는 머리카락의 위를 따라 올라가던 지운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정면으로 보이는 낯선 얼굴에 지운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 밑으로 보이는 동글동글한 두 눈, 코, 붉은색이 감도는 입술. 낯선 여자의 얼굴을 살피던 지운은 순간 꿈에서 깬 사람처럼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무례한 짓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지는 제 행동에 지운이 민망함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반납, 맞으시죠?”
불현듯 들리는 목소리에 지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보이는 것은 검은색 단화였다. 저가 얼이 빠져 있는 동안 다 정리를 한 것인지, 켜켜이 쌓은 책들이 책상 위로 향하는 것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 반납, 하려고요.”
드디어 대답을 들은 여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서 책상으로 향하는 여자의 어깨 아래로 머리카락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피곤해서 커피 좀 타오느라, 하마터면 기다리게 할 뻔했네요.”
지운이 눈을 크게 떴다. 피곤한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탓인지 자꾸만 집중력을 잃는 느낌이었다. 지운은 다시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긴장이 풀려 그러나. 하고 생각하며 제 뒷목을 억세게 주물렀다.
“네.”
자그맣게 들리는 소리에 지운이 반문했다.
“네?”
그 소리에 놀란 듯 모니터를 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커진 눈이 지운의 눈에 닿았다. 한 번 깜빡, 하고 감았다 떠지는 눈이 마치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보이자 지운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뜬 눈에도 여전히 여자의 까만 눈동자가 닿아 있었다.
“아, 저. 네, 라고 하시길래.”
“아아.”
여자의 눈이 가로로 휘었다.
“반납 처리됐거든요.”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자 그 옆으로 보조개가 폭 패였다. 지운은 다시 대답하는 것을 잊은 채 멍하니 쏙 들어간 보조개를 바라보았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가, 보조개가 사라질 때까지.
“가셔도 되는데.”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지운은 바보처럼 눈만 깜빡였다.
“저기, 가셔도…….”
바깥을 가리키는 손이 여자의 얼굴을 가리자, 그제야 지운은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 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민망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훑으며 지운이 고개를 숙였다. 맞절을 하듯 따라 숙였다가 다시 올라오는 여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그는 빠르게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지운의 걸음이 멈춘 것은 도서관을 완전히 벗어난 뒤부터도 한참 후였다. 큰길을 가로질러 한참 동안 걷던 지운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뭐지?”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 사람이 바보가 되기도 하는 건가. 아니면 그 순간 피로가 몰려와서 멍해졌나. 난생처음으로 얼이 빠진 바보가 되었던 조금 전의 모습을 스스로 곱씹으며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뭐지. 진짜.”
이 ‘뭐지. 진짜’와 함께 하는 의문은 그다음 날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 * *
“지운 쌤.”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제 책상까지 의자를 밀어 바짝 붙은 석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제 잠 못 잤어?”
“아니. 못 잔 것까진 아니었는데.”
딩-동-댕-동.
중간고사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가 난 이후, 교무실 문 앞에 내내 붙어 있던 ‘학생 출입금지’라 크게 적혀있던 종이가 떨어져 나갔다. 운 좋게도 마지막 시험 감독으로 배정되지 않아 여유롭게 서류 정리를 끝낸 지운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앞으로 채점해야 할 주관식 시험지들이 산더미처럼 제 앞에 쌓일 거라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지만, 그에 대한 걱정보다는 몇 주간 내내 이어졌던 묵직한 긴장감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후련함이 먼저였다.
“지운 쌤, 지운 쌤!”
의자에 편히 등을 기댄 채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지운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등을 세웠다. 다급한 목소리로 지운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의 옆자리인 국어 교사, 석현이었다.
2학년 국어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요즘 교무실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어제 치러진 시험에서, 그가 출제한 문제에 중복 답안이 나오는 바람에 선임 교사들에게 깨지고 학생들에게 들들 볶아지느라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퇴근하지?”
“응.”
“나 요즘 진짜 죽겠다. 처음에 이의제기한 학생 애들이 그때는 아니라더니 왜 지금은 맞냐고 들들 볶고.”
“답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중복 처리. 위에 선생님들이 눈치 주고 난리야.”
퀭한 눈 밑이 안타까워 지운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잘 좀 하지.”
“쌤까지 그러지 마. 나 요즘 진짜 죽겠어.”
국어는 매 해 꼭 한 번씩은 정답과 오답 사이에서 설전이 벌어지는 과목 중 하나였다. 중의적인 보기가 섞이는 것이 늘 문제여서 고심의 고심을 다해 출제를 해도 꼭 한두 개씩 문제가 생기곤 했다. 지금처럼.
“나 부장 선생님한테 불려가야 돼서 그러는데, 퇴근하는 거면 부탁 하나만.”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얼굴로 애원하는 석현을 빤히 바라보며 지운이 대답했다.
“싫어.”
“지금 당장 가야 돼서 그래. 진짜 어려운 거 아닌데.”
지운이 다시 한 번 거절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자 석현이 제 책상 아래에서 쇼핑백을 꺼내 얼른 내밀었다. 그의 빠른 행동에 말문이 막힌 지운이 싸늘한 눈으로 석현을 바라보았다.
“이거 이도 도서관에서 필독 도서 때문에 빌렸던 책인데, 오늘까지 반납이거든.”
딱 보아도 족히 스무 권은 되어 보이는 부피에 지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납만 해 주면 되는데…….”
“반납만 하면 되겠네. 부탁할 일 없이.”
“석현 쌤. 부장 선생님 호출.”
옆문으로 슬쩍 나온 다른 교사의 목소리에 마음이 급해진 석현이 지운에게 쇼핑백을 들이밀었다.
“나 지금 가야 되네. 늦었다, 쌤. 부탁해!”
밀어낼 새도 없이 제 품에 안겨 드는 묵직함에 지운이 눈을 찌푸렸다. 석현이 뒷걸음질 치며 두 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했다.
“내일 점심 살게. 부탁해요, 쌤.”
점심 살 돈이면 연체료 백 번도 더 내겠네. 지운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쇼핑백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퇴근하기 위해 가방을 챙기는 지운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학교 도서실에서 빌리면 될 걸 가지고.”
가방을 옆으로 멘 지운은 여전히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쇼핑백을 안아 들었다. 기분 나쁜 묵직함이 팔 전체에 올라앉았다. 마주치는 교사들과 인사를 나눈 지운이 힘겹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쌤. 이번 수학 문제 너무 어려웠어요!”
“맞아요! 저 주관식 진짜 하나도 못 풀었어요.”
계단을 내려가던 3학년 학생들이 지운과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던 것처럼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식만 알면 다 풀 수 있는데 뭐가 어려워.”
“무슨 공식으로 풀어야 하는지 알아야 풀죠!”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로 칭얼거리는 여학생을 향해 지운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공식을 모르는 걸 어떻게 해. 난 다 가르쳐 준 거다.”
차갑기 짝이 없는 대답 뒤로 원망을 품은 아우성이 이어졌다. 역시 제수포. 옅게 들리는 제 별명에 지운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제수포’는 ‘쟤 때문에 수학 포기’를 줄인 말이자 지운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난 진짜 망했어!”
“나도야. 나 완전 망했어.”
“그러니까 나처럼 진작 포기하지. 수학 별거 아니다. 포기하면 쉬워.”
지운의 입장에선 답답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이었다. 공식만 알면 되는걸. 수학은 언제나 문제 속에 답이 있는 과목이었다. 공식을 알고, 그 공식에 문제 속 숫자들만 넣어 풀면 답이 나오는 명쾌하고 깔끔한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험지는 언제나 비가 내렸다.
“답답한 것들.”
지운은 진심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며 학생들에 대한 제 마음을 표했다.
* * *
시험이 끝나자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조용해진 도서관에 발을 들인 지운이 주변을 살폈다. 처음 왔어요. 라는 말이 적힌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찌나 조용한지, 땅에 닿는 발소리가 탁, 탁하고 울릴 정도였다. 지운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문이 열려 있는 대여실 안으로 향했다.
대여실 안으로 들어간 지운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눈 안에 다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빽빽하게 이어져 있는 큰 책장들이었다. 임용고시가 끝난 이후로 도서관엔 발도 들이지 않았으니, 이런 전경을 보는 것은 거진 2년 만이었다. 악몽 같은 고시의 추억에 잠시 젖어 있던 지운이 고개를 흔들며 안고 있던 쇼핑백의 끈을 손으로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선 지운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윽한 커피 향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커피 향에 지운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사람의 형체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정수리였다. 지운의 눈이 자동으로 아래로 향했다. 살짝 내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조그맣고 동그란 어깨 아래로 펼쳐진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지운은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렸다.
“어…….”
그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쏟아진 스무 권의 책들이었다. 그제야 지운은 들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벼워진 쇼핑백의 무게가 느껴졌다. 지운이 황망한 얼굴로 손을 위로 치켜들자 밑바닥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쇼핑백이 그를 놀리듯 눈앞에 펼쳐졌다. 상황 파악을 완전히 끝낸 지운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무릎을 굽히고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죄송합니다. 쇼핑백 아래가 찢어져서.”
생전 도움도 안 되는 이석현. 이 번거로움을 초래한 석현의 얼굴을 떠올리며 지운이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반납하러 오셨나 봐요.”
네모난 책 사이로 불쑥 들어오는 작은 손이 닿자 빠르게 움직이던 지운의 손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제 큰 손의 반을 겨우 덮는 조그만 손을 따라 그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괜찮으세요?”
다시 보이는 머리카락의 위를 따라 올라가던 지운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정면으로 보이는 낯선 얼굴에 지운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 밑으로 보이는 동글동글한 두 눈, 코, 붉은색이 감도는 입술. 낯선 여자의 얼굴을 살피던 지운은 순간 꿈에서 깬 사람처럼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무례한 짓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지는 제 행동에 지운이 민망함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반납, 맞으시죠?”
불현듯 들리는 목소리에 지운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보이는 것은 검은색 단화였다. 저가 얼이 빠져 있는 동안 다 정리를 한 것인지, 켜켜이 쌓은 책들이 책상 위로 향하는 것을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 반납, 하려고요.”
드디어 대답을 들은 여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돌아서 책상으로 향하는 여자의 어깨 아래로 머리카락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피곤해서 커피 좀 타오느라, 하마터면 기다리게 할 뻔했네요.”
지운이 눈을 크게 떴다. 피곤한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탓인지 자꾸만 집중력을 잃는 느낌이었다. 지운은 다시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긴장이 풀려 그러나. 하고 생각하며 제 뒷목을 억세게 주물렀다.
“네.”
자그맣게 들리는 소리에 지운이 반문했다.
“네?”
그 소리에 놀란 듯 모니터를 보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살짝 커진 눈이 지운의 눈에 닿았다. 한 번 깜빡, 하고 감았다 떠지는 눈이 마치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보이자 지운은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뜬 눈에도 여전히 여자의 까만 눈동자가 닿아 있었다.
“아, 저. 네, 라고 하시길래.”
“아아.”
여자의 눈이 가로로 휘었다.
“반납 처리됐거든요.”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자 그 옆으로 보조개가 폭 패였다. 지운은 다시 대답하는 것을 잊은 채 멍하니 쏙 들어간 보조개를 바라보았다. 올라갔던 입꼬리가 다시 내려가, 보조개가 사라질 때까지.
“가셔도 되는데.”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지운은 바보처럼 눈만 깜빡였다.
“저기, 가셔도…….”
바깥을 가리키는 손이 여자의 얼굴을 가리자, 그제야 지운은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아, 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민망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훑으며 지운이 고개를 숙였다. 맞절을 하듯 따라 숙였다가 다시 올라오는 여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그는 빠르게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지운의 걸음이 멈춘 것은 도서관을 완전히 벗어난 뒤부터도 한참 후였다. 큰길을 가로질러 한참 동안 걷던 지운이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뭐지?”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 사람이 바보가 되기도 하는 건가. 아니면 그 순간 피로가 몰려와서 멍해졌나. 난생처음으로 얼이 빠진 바보가 되었던 조금 전의 모습을 스스로 곱씹으며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뭐지. 진짜.”
이 ‘뭐지. 진짜’와 함께 하는 의문은 그다음 날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 * *
“지운 쌤.”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제 책상까지 의자를 밀어 바짝 붙은 석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제 잠 못 잤어?”
“아니. 못 잔 것까진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