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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뭉스러운 대답에 석현의 얼굴이 한층 알 수 없게 변했다.
“그런데 왜 그래? 아까 회의시간에도 멍한 것 같고.”
“그러게.”
지운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게.”
“응?”
“나 진짜 왜 이러지.”
자신의 멍함의 이유를 유추하기 위해 지운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개운치 못한 아침이었다. 새벽에 몇 번씩 깬 탓이었다. 이른 저녁부터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막상 겨우 잠이 든 것은 자정이 지날 무렵이었다. 잠이 들 때까지는 멍하다가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왜 갑자기 바보처럼 굴었는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허겁지겁 도서관에서 달아나듯 빠져나와 한참을 걷고 걸어 횡단보도 앞에 서서부터 시작한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가셔도 되는데.”
바보처럼 서 있던 저를 보던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 순간부터,
“반납 처리됐거든요.”
가로로 휘어진 눈과 올라간 입꼬리 옆에 폭 패인 보조개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참, 어제 도와준 거 고마워.”
“모르겠어.”
지운의 혼잣말을 들은 석현이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에이, 내가 말로만 고맙다고 할까 봐? 점심 산다니까.”
지운이 그런 석현을 돌아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알겠는데, 모르겠어.”
말 그대로였다. 오늘 아침부터 어제까지 통째로 곱씹어 왜 자꾸 멍하게 되는지 시작점을 찾긴 찾았으나, 그게 왜 시작된 건지는 영 알 수가 없었다. 좌표에 아무렇게나 톡 찍혀 있는 점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게 직선인지 곡선인지, 위로 향하는 그래프인지 아래로 향하는 그래프인지, 무언가와 교차할지 말지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는, 그저 점 하나를.
“오늘 영 상태 안 좋네.”
지운의 안 좋은 상태가 심화된 것은 점심시간이 시작된 직후부터였다. 석현이 기껏 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몇 숟가락 떠넘기던 지운은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풀어지지 않는 생각의 늪에 빠진 채로는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왜 그 순간에 시작되어 버렸는지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자꾸 멍해지고, 저녁엔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엔 잠자리를 뒤척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한 번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어제 자신을 바보로 만들었던 그 여자를.
“깜짝이야. 왜 그래?”
방금 나온 음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손댄 자국이 거의 없는 그릇을 보던 석현은 일어선 채로 물을 들이켜는 지운을 보며 물었다.
“설마 다 먹은 거야?”
“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운과 무안할 정도로 멀쩡한 음식을 번갈아 보던 석현이 다시 말을 건넸다.
“설마…… 가려고?”
“응.”
“나 두고?”
바람과는 달리 지운의 대답은 명쾌했다.
“응.”
지운이 탁, 소리가 나게 식탁 위에 컵을 놓았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석현의 어깨를 한 번 붙잡으며 지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잘 먹었어.”
전혀 잘 먹지 않은 얼굴로 휙 사라지는 지운의 등을 향해 석현이 소리쳤다.
“어디 가!”
* * *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쫓기는 것처럼 바쁘게 걷던 지운이 멈춰선 곳은 도서관 앞이었다. 이도 도서관. 현관문 옆에 세로로 걸려 있는 현판을 보며 지운은 숨을 골랐다.
시계를 확인한 지운이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마침 5교시도 없는 날이어서 눈치껏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한결 여유로워진 지운이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한 걸음 움직이던 그때였다. 야옹, 하는 자그마한 울음소리에 지운의 발이 완전히 멈췄다.
……야옹?
“어어, 이리 와.”
다시, 야옹.
어렴풋이 들리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가까워지자 지운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크기의 노란 고양이가 지운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야옹.”
고양이를 흉내 내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지운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조그만 고양이를 뒤따라 쫑쫑 걸음으로 제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지운은 저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나가면 안 돼. 이리 와.”
고양이에게 시선을 빼앗긴 여자는 앞에 지운이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고양이를 향해 뻗어진 하얀 손이 보이자 지운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는 사이 고양이는 어느새 제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달려오다시피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지운 자리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짧은 다리로 힘차게 오고 있는 고양이를 막아 세우기 위해 지운이 손바닥을 펼쳐 앞을 막았다.
야옹. 순식간에 길이 막힌 고양이가 애달픈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이 앞에 다다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여자가 조심히 고양이를 안았다. 얌전히 안겨 있는 고양이를 잠시 보던 지운이 바로 위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잡았네요.”
고양이에 콕 박혀 있는 검은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지운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정말 문제였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이 알 수 없는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짐작조차 못했다. 문제가 아닐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리에 힘이 생겨서 그런지 쫓아다니기가 벅차요.”
지운의 귀 밖으로 튕겨 나간 목소리가 발아래에 맴돌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여자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제처럼 올라간 입꼬리 옆에는 보조개가 쏙 파여 있었다. 고양이의 조그만 얼굴에 턱을 부비며 웃는 여자는 어제와 같은 얼굴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까…… 어제 오셨던 분인 것 같은데.”
여자의 입가가 살며시 벌어졌다. 환하게 웃는 여자의 얼굴이 햇살에 빛나 반짝였다.
“안녕하세요.”
저를 향한 여자의 인사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지운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얼굴에 걸어진 미소를 보며 그는 짐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절대 이 의문을 풀지 못할 것 같다고. 또한 지운은 생각했다.
“오늘은 책 빌리러 오셨어요?”
제 발걸음은 또다시 이곳으로 향할 것 같다고.
서정을 따라 대여실 안으로 들어간 지운은 한쪽 책장에 쌓여 있는 책들 중 하나를 냉큼 집었다. 그사이 제자리로 돌아가 앉은 서정이 고개를 들었다.
“반납할 때 회원이셨던 것 같은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지운은 교육을 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답을 ‘찍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적은 답이 오답이라 할지라도 그는 언제나 과정을 적어가며 문제를 풀이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이 순간에, 햇살에 반짝이는 저 미소 앞에서, 진정 처음으로 제 의문에 대한 답을 찍었다.
“……네.”
간단하게 말하자면, 반한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아니면, 회원증 혹시 가지고 오셨으면…….”
풀이 과정은 단 한 줄도 없었지만, 찍어낸 보기가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늦은 인사를 하는 지운을 보며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네. 안녕하세요.”
지운의 인사에 답해 준 한 여자는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그녀가 무언가를 찾는 그동안에도 지운은 그저 멍하니 아니, 조금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잊은 채 바보처럼 서 있는 사이, 서랍에서 노란 파일을 꺼낸 여자가 그 안의 종이 몇 장을 뒤적이다 다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도 중학교 필독 도서 한 번에 대여해 가셨던 선생님 맞으시죠? 그때 제가 자리를 비워서 봉사하러 온 학생이 여기에 적어 놨었거든요. 이름이…….”
그 말에 지운의 눈이 깜빡깜빡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쭉 훑던 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이석현 선생님?”
당황한 지운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웃음기가 여전한 얼굴의 여자가 말을 이었다.
“국어 선생님이신가 봐요. 책 잠깐 주시겠어요?”
이 망할 입은 왜 이렇게 떨어지질 않는 건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지운은 가까스로 여자에게 책을 내밀었다. 책을 받은 여자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리더기로 책 앞에 붙어 있는 바코드를 찍은 뒤에 다시 지운에게 건넸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반납해 주시면 돼요.”
다시 한 번, 환한 그 미소에 지운은 말을 잃은 사람이 되어 입을 다문 채 책을 받아 들었다. 제 이름은 이석현이 아니라 문지운이라는 것도, 국어 선생님이 아니라 수학 선생님이라는 것도 말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맑은 목소리가 마치 자신이 찍어 맞춘 답 위에 닿는 것만 같아 지운은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이 그를 대신해 답을 채점했다. 분명한 정답이었다.
2. 그는 반했고, 그녀는 반하지 않았다.
싸리 눈이 쏟아지는 땅 아래에 쌓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너였다. 네 모든 순간이 쌓인 길 위에 나는 서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싸리 눈처럼 내리는 너였다. 또다시 고개를 내렸다. 네가 쌓이는 것은 땅이 아닌 내 마음이었다. 나는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다. 내게 포근히 쌓이는 너의 마음에 작은 흠집도 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내 온 마음을 채우고 넘칠 때까지, 너는 내게로 쌓이고 있었다. 오직 내 안에서, 내게 내리는, 나만의 첫눈이었다.
펼쳐진 책 속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지운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석현이 양치를 하고 왔는지 화한 향기가 지운의 코를 찔렀다. 석현은 지운이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눈을 흘겼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뒷말을 잘라 먹은 질문에 지운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가.”
“이거 읽고 있던 거 아냐?”
석현이 책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물었다. 기울여 써진 표지 제목을 슥 쳐다본 지운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왜 그래? 아까 회의시간에도 멍한 것 같고.”
“그러게.”
지운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게.”
“응?”
“나 진짜 왜 이러지.”
자신의 멍함의 이유를 유추하기 위해 지운은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개운치 못한 아침이었다. 새벽에 몇 번씩 깬 탓이었다. 이른 저녁부터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막상 겨우 잠이 든 것은 자정이 지날 무렵이었다. 잠이 들 때까지는 멍하다가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왜 갑자기 바보처럼 굴었는지에 대한 생각이었다. 허겁지겁 도서관에서 달아나듯 빠져나와 한참을 걷고 걸어 횡단보도 앞에 서서부터 시작한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가셔도 되는데.”
바보처럼 서 있던 저를 보던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 순간부터,
“반납 처리됐거든요.”
가로로 휘어진 눈과 올라간 입꼬리 옆에 폭 패인 보조개를 가만히 보고 있던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
“참, 어제 도와준 거 고마워.”
“모르겠어.”
지운의 혼잣말을 들은 석현이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에이, 내가 말로만 고맙다고 할까 봐? 점심 산다니까.”
지운이 그런 석현을 돌아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알겠는데, 모르겠어.”
말 그대로였다. 오늘 아침부터 어제까지 통째로 곱씹어 왜 자꾸 멍하게 되는지 시작점을 찾긴 찾았으나, 그게 왜 시작된 건지는 영 알 수가 없었다. 좌표에 아무렇게나 톡 찍혀 있는 점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게 직선인지 곡선인지, 위로 향하는 그래프인지 아래로 향하는 그래프인지, 무언가와 교차할지 말지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는, 그저 점 하나를.
“오늘 영 상태 안 좋네.”
지운의 안 좋은 상태가 심화된 것은 점심시간이 시작된 직후부터였다. 석현이 기껏 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몇 숟가락 떠넘기던 지운은 대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풀어지지 않는 생각의 늪에 빠진 채로는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히 알겠는데, 왜 그 순간에 시작되어 버렸는지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자꾸 생각나고, 그래서 자꾸 멍해지고, 저녁엔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엔 잠자리를 뒤척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다시 한 번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시 한 번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어제 자신을 바보로 만들었던 그 여자를.
“깜짝이야. 왜 그래?”
방금 나온 음식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손댄 자국이 거의 없는 그릇을 보던 석현은 일어선 채로 물을 들이켜는 지운을 보며 물었다.
“설마 다 먹은 거야?”
“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운과 무안할 정도로 멀쩡한 음식을 번갈아 보던 석현이 다시 말을 건넸다.
“설마…… 가려고?”
“응.”
“나 두고?”
바람과는 달리 지운의 대답은 명쾌했다.
“응.”
지운이 탁, 소리가 나게 식탁 위에 컵을 놓았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석현의 어깨를 한 번 붙잡으며 지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잘 먹었어.”
전혀 잘 먹지 않은 얼굴로 휙 사라지는 지운의 등을 향해 석현이 소리쳤다.
“어디 가!”
* * *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쫓기는 것처럼 바쁘게 걷던 지운이 멈춰선 곳은 도서관 앞이었다. 이도 도서관. 현관문 옆에 세로로 걸려 있는 현판을 보며 지운은 숨을 골랐다.
시계를 확인한 지운이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마침 5교시도 없는 날이어서 눈치껏 들어가면 되는 일이었다. 한결 여유로워진 지운이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한 걸음 움직이던 그때였다. 야옹, 하는 자그마한 울음소리에 지운의 발이 완전히 멈췄다.
……야옹?
“어어, 이리 와.”
다시, 야옹.
어렴풋이 들리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가까워지자 지운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한 손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크기의 노란 고양이가 지운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야옹.”
고양이를 흉내 내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지운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조그만 고양이를 뒤따라 쫑쫑 걸음으로 제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지운은 저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나가면 안 돼. 이리 와.”
고양이에게 시선을 빼앗긴 여자는 앞에 지운이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고양이를 향해 뻗어진 하얀 손이 보이자 지운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는 사이 고양이는 어느새 제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달려오다시피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지운 자리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짧은 다리로 힘차게 오고 있는 고양이를 막아 세우기 위해 지운이 손바닥을 펼쳐 앞을 막았다.
야옹. 순식간에 길이 막힌 고양이가 애달픈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이 앞에 다다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쉰 여자가 조심히 고양이를 안았다. 얌전히 안겨 있는 고양이를 잠시 보던 지운이 바로 위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잡았네요.”
고양이에 콕 박혀 있는 검은색 눈동자를 바라보는 지운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정말 문제였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이 알 수 없는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좋을지 짐작조차 못했다. 문제가 아닐 수가 없는 일이었다.
“다리에 힘이 생겨서 그런지 쫓아다니기가 벅차요.”
지운의 귀 밖으로 튕겨 나간 목소리가 발아래에 맴돌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여자의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제처럼 올라간 입꼬리 옆에는 보조개가 쏙 파여 있었다. 고양이의 조그만 얼굴에 턱을 부비며 웃는 여자는 어제와 같은 얼굴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까…… 어제 오셨던 분인 것 같은데.”
여자의 입가가 살며시 벌어졌다. 환하게 웃는 여자의 얼굴이 햇살에 빛나 반짝였다.
“안녕하세요.”
저를 향한 여자의 인사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지운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얼굴에 걸어진 미소를 보며 그는 짐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절대 이 의문을 풀지 못할 것 같다고. 또한 지운은 생각했다.
“오늘은 책 빌리러 오셨어요?”
제 발걸음은 또다시 이곳으로 향할 것 같다고.
서정을 따라 대여실 안으로 들어간 지운은 한쪽 책장에 쌓여 있는 책들 중 하나를 냉큼 집었다. 그사이 제자리로 돌아가 앉은 서정이 고개를 들었다.
“반납할 때 회원이셨던 것 같은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지운은 교육을 접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답을 ‘찍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적은 답이 오답이라 할지라도 그는 언제나 과정을 적어가며 문제를 풀이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이 순간에, 햇살에 반짝이는 저 미소 앞에서, 진정 처음으로 제 의문에 대한 답을 찍었다.
“……네.”
간단하게 말하자면, 반한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아니면, 회원증 혹시 가지고 오셨으면…….”
풀이 과정은 단 한 줄도 없었지만, 찍어낸 보기가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늦은 인사를 하는 지운을 보며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던 여자가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네. 안녕하세요.”
지운의 인사에 답해 준 한 여자는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그녀가 무언가를 찾는 그동안에도 지운은 그저 멍하니 아니, 조금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말도 잊은 채 바보처럼 서 있는 사이, 서랍에서 노란 파일을 꺼낸 여자가 그 안의 종이 몇 장을 뒤적이다 다시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도 중학교 필독 도서 한 번에 대여해 가셨던 선생님 맞으시죠? 그때 제가 자리를 비워서 봉사하러 온 학생이 여기에 적어 놨었거든요. 이름이…….”
그 말에 지운의 눈이 깜빡깜빡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쭉 훑던 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이석현 선생님?”
당황한 지운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웃음기가 여전한 얼굴의 여자가 말을 이었다.
“국어 선생님이신가 봐요. 책 잠깐 주시겠어요?”
이 망할 입은 왜 이렇게 떨어지질 않는 건지.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지운은 가까스로 여자에게 책을 내밀었다. 책을 받은 여자가 키보드를 두드리고, 리더기로 책 앞에 붙어 있는 바코드를 찍은 뒤에 다시 지운에게 건넸다.
“다음 주 수요일까지 반납해 주시면 돼요.”
다시 한 번, 환한 그 미소에 지운은 말을 잃은 사람이 되어 입을 다문 채 책을 받아 들었다. 제 이름은 이석현이 아니라 문지운이라는 것도, 국어 선생님이 아니라 수학 선생님이라는 것도 말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안녕히 가세요.”
맑은 목소리가 마치 자신이 찍어 맞춘 답 위에 닿는 것만 같아 지운은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이 그를 대신해 답을 채점했다. 분명한 정답이었다.
2. 그는 반했고, 그녀는 반하지 않았다.
싸리 눈이 쏟아지는 땅 아래에 쌓이는 것은 눈이 아니라 너였다. 네 모든 순간이 쌓인 길 위에 나는 서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싸리 눈처럼 내리는 너였다. 또다시 고개를 내렸다. 네가 쌓이는 것은 땅이 아닌 내 마음이었다. 나는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다. 내게 포근히 쌓이는 너의 마음에 작은 흠집도 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내 온 마음을 채우고 넘칠 때까지, 너는 내게로 쌓이고 있었다. 오직 내 안에서, 내게 내리는, 나만의 첫눈이었다.
펼쳐진 책 속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지운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석현이 양치를 하고 왔는지 화한 향기가 지운의 코를 찔렀다. 석현은 지운이 방금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눈을 흘겼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뒷말을 잘라 먹은 질문에 지운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가.”
“이거 읽고 있던 거 아냐?”
석현이 책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물었다. 기울여 써진 표지 제목을 슥 쳐다본 지운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