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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
수연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내일이면 아이들이 첫 수업을 받으러 오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뤘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마침내 저의 이름을 건 작은 피아노 학원을 차렸다. 인테리어 공사를 모두 마치고, 마무리 정리도 끝이 났다. 한데 여기저기 꼼꼼하게 둘러보다 보니 눈에 띄는 몇몇 것들이 수연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수연은 버거워도 웃으며 일했다. 감회가 새로워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수연이 한창 바쁘게 마무리를 하고 있을 무렵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휴대폰을 확인한 그녀는 설핏 미소 지었다.
“네, 엄마.”
―정리는? 잘 마무리했어? 내일 첫 수업이지?
수연은 깔끔한 학원 내부를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네, 거의 다 했어요. 근데 조금 떨리네.”
엄마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딸 잘할 거야. 너무 장해.
엄마의 다독임에 수연은 괜히 울컥해졌다.
“다 엄마 덕분이지, 뭐.”
―내가 뭐 한 게 있니? 그나저나 원생들은 어때? 많이 모집했어?
“음, 처음이니까 아주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쉴 틈은 없을 것 같아요.”
―그래. 차차 모집하면 되지. 엄마가 시간이 되면 내일 가 보겠는데 짬이 안 나네.
수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도 내일은 이래저래 정신없고 바쁠 것 같아요.”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엄마가 너무 미안하다.
작아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 한쪽이 시큰거려 코끝이 찡해졌다.
수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어깨를 들썩였다. 애써 밝은 척 목소리를 높이고 엄마를 다독였다.
“엄마도 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엄마가 왜 미안해.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내일 첫 수업 잘 하고 조만간 갈게. 밥 잘 챙겨 먹어.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고.
“알았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 정말 괜찮아. 쉬어요, 엄마.”
통화를 마치자 수연의 입 밖으로 알 수 없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학원을 둘러보다 설움이 복받쳐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엄마의 한숨에 괜히 옛 생각이 났다. 조용한 학원에 혼자 있다 보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모양이다. 그녀의 집안은 부유하지 못했다.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더 휘청거렸다.
게다가 수연은 어렸을 때부터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못할 만큼 소심해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었다.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의 부모님은 빠듯한 살림에도 수연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렇게라도 친구를 사귀었으면 했었다.
그렇게 그녀는 얼떨결에 피아노에 입문했다. 처음엔 그마저도 쑥스러워 가길 꺼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연은 피아노를 치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 되었다.
수연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뒷정리를 마친 뒤 그녀는 피아노 학원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어서 와. 안녕하세요, 어머님.”
수연은 제 엄마와 학원을 찾은 여자아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치원생인 꼬마 아이는 낯가림이 심한 것인지 엄마 다리를 붙들고 떨어질 줄 몰랐다.
왠지 어린 시절의 저를 보는 것 같았다. 수연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
“부끄럽니?”
수연의 질문에 아이는 눈만 깜빡거렸다. 아이 엄마는 난처한지 수연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유, 선생님. 우리 혜진이가 이렇게 낯가림이 심해요.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수연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리곤 아이와 눈을 맞추며 조곤조곤 말했다.
“혜진아, 피아노 치기 싫어?”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도 어렸을 땐 많이 부끄러워했었어. 근데 피아노 치다 보면 하나도 안 부끄러워져. 진짜야.”
수연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연의 말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 수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혜진아, 선생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같이 피아노 쳐 볼까?”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방긋 웃으며 아이 엄마에게 말했다.
“어머님, 아마 처음 며칠은 하기 싫다고 할지도 몰라요. 계이름이나 음표 공부를 하다 보면 재미없다고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것만 잘 지나가면 좋아할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님께서 단단히 마음먹으시고 도와주세요.”
“아이, 그럼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 엄마의 반듯한 인사에 수연은 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알았어요. 그럼 이따 혜진이 데리러 올게요. 혜진아, 엄마 이따 올게. 재미있게 해.”
엄마가 인사하자 아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자신과 닮은 아이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이는 제 엄마가 가고 나자 다시 쭈뼛거렸다. 수연은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다 말을 걸었다.
“혜진아, 오늘은 혜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피아노 치고 싶으면 피아노 치고, 책 보고 싶으면 책 보고.”
수연의 말에 아이는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무것도 몰라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아이의 얼굴엔 점차 미소가 번져 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수업을 마치고 청소를 하던 수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하루 종일 긴장했지만 첫 수업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했다. 수연은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에 괜히 코끝이 찡했다.
그녀는 청소를 마무리 짓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간 피아노 학원을 차리는 것에 급급해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했던 것이 아쉽던 차였다. 심호흡을 하고 건반에 손을 올렸다. 좋아하는 곡을 머릿속에 그리며 계이름부터 차례로 손을 풀었다.
“저기, 계세요?”
수연이 손을 풀고 막 연주를 하려던 찰나였다.
“네, 잠시 만요.”
수연은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모뻘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 학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네, 어떻게 오셨어요?”
수연의 물음에 그녀는 활짝 웃었다.
“아, 원장님이시구나. 생각보다 많이 젊으시네.”
“네, 근데 어떻게 오신건지…….”
수연이 재차 되물었다. 그녀는 수연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여기 위층 속셈 학원 원장이에요. 피아노 학원 들어오는 건 알았는데 인사를 못 하기도 했고 그냥 좀 궁금해서요.”
수연은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인사는 한 번 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잘됐다싶었다.
“아, 그러시구나. 제가 먼저 인사 드려야 했는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차 한잔하실래요? 여기 앉으세요.”
“그럴까요?”
푸근한 인상의 속셈 원장은 수연을 친근하게 대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와 잘 지내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한 수연은 그녀의 호의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수연이 차를 건네자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아니에요. 종종 마시러 오세요.”
그녀는 수연의 말에 피식 웃었다. 차를 한 모금 입에 넣고 학원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감탄하듯 넌지시 말했다.
“와, 엄청 깨끗하고 잘해 놨다. 학원 운영은 처음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이에요. 그래서 아직 좀 얼떨떨하네요.”
“그럼 원생들은요? 어떻게 모집했어요?”
“전단지 돌렸죠. 카페 같은 곳에 가서 홍보하기도 했고.”
“많이 모았어요? 이쪽 상가 근처에 아파트 단지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많을 거예요. 잘되면 좋겠다.”
수연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운이 좋다는 생각은 했어요. 사실 보증금도 그렇고 임대료도 싼 편이잖아요. 부동산에서도 적극 추천하던 대요?”
수연이 부동산 얘길 꺼내자 속셈 원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제 몸을 수연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속삭이듯 작게 입을 열었다.
“부동산에서 추천했어요? 뭐, 다른 말은 안 하고?”
원장의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모습에 수연은 호기심이 생겼다.
“왜요? 뭐, 안 좋은 거라도 있나요?”
수연의 질문에 속셈 원장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뭐,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뭔데요? 그냥 말해 주세요.”
“그게 내가 사실은 이번 주 주말에 학원을 뺄 거예요.”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꽤 오랫동안 학원을 운영한 것으로 들었는데 왜 그만두려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정말 이 건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부동산에선 아무 말도 없었는데…….
수연은 괜히 긴장했다.
“왜 그만두세요? 다른 곳으로 옮기시려고요?”
원장이 설핏 미소 지었다.
“아니, 이제 좀 쉬려고요. 너무 일만 한 거 같아서. 그동안 내 시간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아…….”
“저기, 근데 내가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요.”
수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확실히 뭔가 있는 모양이다.
“네, 그냥 편히 말씀하세요. 뭐예요?”
“그게 이 상가 건물주가 조폭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겉보기엔 그냥 돈 많은 멀쩡한 노인인데, 젊었을 때 이 동네를 아주 주름잡는 거물이었다네?”
수연은 왠지 흥미진진해졌다.
“그래서요?”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의 아들놈이 문제야.”
“아들이요?”
그녀는 건물주 아들을 운운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아들놈이 아주 망나니거든. 제 아버지 빽 믿고 어찌나 설쳐 대는지, 가끔 덩치들을 데리고 여기 종종 오거든요. 지가 건물주라도 되는 것처럼 쌍 팔년도 수법으로 못된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수연은 흠칫했다.
“못된 짓이요? 어떤…….”
“왜 영화에서 조폭들 하는 짓 있잖아요. 여기 내가 주인이다. 곱게 장사하고 싶으면 자릿세 내놓아라. 뭐, 이런 거. 아주 저질이라니까.”
수연은 몸을 움찔했다.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원장님은 어떻게 하셨는데요? 그거 불법이잖아요. 신고하면 콩밥 먹는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죠. 근데 사람이 그렇잖아. 덩치들 보면 위축되고, 겁부터 먹고. 더군다나 남자들이니까. 사실 자기 들어오기 전에 여기가 미용실이었거든. 그 원장이 총대 매고 신고를 했는데 그놈 아버지가 장난 좀 친 거라면서 돈으로 합의하고 그랬어요.”
수연은 계속 소름이 끼쳤다. 진짜 영화에서 보던 일이 실제로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해 봤다. 상권도 좋고 모든 조건이 좋아 덜컥 계약했는데, 첫 날부터 이 무슨…….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리고는요? 더 이상 안 왔어요?”
그녀는 인상을 구기며 손사래를 쳤다.
“안 오긴. 그놈이 제 아버지 몰래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사람 피를 말렸다니까.”
“또 돈 뜯어 갔어요?”
“아니, 이발하러 왔다면서 눈치 주고 괜히 어슬렁거리면서 다른 손님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어찌나 사람을 괴롭히던지 결국 못 이기고 나갔잖아요.”
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도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장은 실컷 다 얘기해 놓고 수연의 굳은 표정에 머쓱한 듯 웃었다.
“아이고, 내가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한테 괜한 말을 했나 싶긴 한데 걱정이 되어서.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나싶어서. 혹시 결혼했어요?”
수연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럼 애인이나 남동생은?”
“없어요. 저 혼자거든요. 부모님도 지방에 계시고.”
원장은 혀를 끌끌 찼다.
“저런, 그럼 진짜 더 조심해야겠다. 늦게까지 여기 있지 말고 바로바로 들어가요.”
“네, 그럴게요.”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답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다 벌떡 일어섰다.
“그럼 나 이만 가 볼게요. 나 나가기 전까진 종종 차 마셔요.”
“네, 그래요. 그리고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에이, 감사할 것까진 아니지. 암튼 나 가요.”
수연은 그녀가 가자마자 안에서 문을 잠갔다. 괜히 불안하고 마음이 급해 꼼꼼히 하던 청소도 대충 마무리 짓고 쏜살같이 학원을 나왔다.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려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제 웃으며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조폭이라니. 아니, 그런 것들은 양아치라 하나?
수연은 제 어깨를 잡고 몸을 부르르 떨며 걸음을 재촉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원장의 말이 신경 쓰여 하루 종일 긴장 상태였다.
학원 운영엔 문제가 없었다. 매일 몇 번씩 상담이 들어오고, 첫 수업을 함께했던 아이들도 조금씩 적응하는 듯했다.
수연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내일이면 아이들이 첫 수업을 받으러 오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뤘다.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마침내 저의 이름을 건 작은 피아노 학원을 차렸다. 인테리어 공사를 모두 마치고, 마무리 정리도 끝이 났다. 한데 여기저기 꼼꼼하게 둘러보다 보니 눈에 띄는 몇몇 것들이 수연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수연은 버거워도 웃으며 일했다. 감회가 새로워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수연이 한창 바쁘게 마무리를 하고 있을 무렵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휴대폰을 확인한 그녀는 설핏 미소 지었다.
“네, 엄마.”
―정리는? 잘 마무리했어? 내일 첫 수업이지?
수연은 깔끔한 학원 내부를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네, 거의 다 했어요. 근데 조금 떨리네.”
엄마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딸 잘할 거야. 너무 장해.
엄마의 다독임에 수연은 괜히 울컥해졌다.
“다 엄마 덕분이지, 뭐.”
―내가 뭐 한 게 있니? 그나저나 원생들은 어때? 많이 모집했어?
“음, 처음이니까 아주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쉴 틈은 없을 것 같아요.”
―그래. 차차 모집하면 되지. 엄마가 시간이 되면 내일 가 보겠는데 짬이 안 나네.
수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도 내일은 이래저래 정신없고 바쁠 것 같아요.”
―도와주지도 못했는데, 엄마가 너무 미안하다.
작아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 한쪽이 시큰거려 코끝이 찡해졌다.
수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어깨를 들썩였다. 애써 밝은 척 목소리를 높이고 엄마를 다독였다.
“엄마도 참,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엄마가 왜 미안해.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엄마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내일 첫 수업 잘 하고 조만간 갈게. 밥 잘 챙겨 먹어.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고.
“알았어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나 정말 괜찮아. 쉬어요, 엄마.”
통화를 마치자 수연의 입 밖으로 알 수 없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학원을 둘러보다 설움이 복받쳐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엄마의 한숨에 괜히 옛 생각이 났다. 조용한 학원에 혼자 있다 보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드는 모양이다. 그녀의 집안은 부유하지 못했다. 그녀가 1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더 휘청거렸다.
게다가 수연은 어렸을 때부터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못할 만큼 소심해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었다.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안타까워 그녀의 부모님은 빠듯한 살림에도 수연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렇게라도 친구를 사귀었으면 했었다.
그렇게 그녀는 얼떨결에 피아노에 입문했다. 처음엔 그마저도 쑥스러워 가길 꺼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연은 피아노를 치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 되었다.
수연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뒷정리를 마친 뒤 그녀는 피아노 학원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어서 와. 안녕하세요, 어머님.”
수연은 제 엄마와 학원을 찾은 여자아이를 반갑게 맞이했다. 유치원생인 꼬마 아이는 낯가림이 심한 것인지 엄마 다리를 붙들고 떨어질 줄 몰랐다.
왠지 어린 시절의 저를 보는 것 같았다. 수연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
“부끄럽니?”
수연의 질문에 아이는 눈만 깜빡거렸다. 아이 엄마는 난처한지 수연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유, 선생님. 우리 혜진이가 이렇게 낯가림이 심해요.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수연은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리곤 아이와 눈을 맞추며 조곤조곤 말했다.
“혜진아, 피아노 치기 싫어?”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생님도 어렸을 땐 많이 부끄러워했었어. 근데 피아노 치다 보면 하나도 안 부끄러워져. 진짜야.”
수연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연의 말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고사리 같은 손이 수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혜진아, 선생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같이 피아노 쳐 볼까?”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방긋 웃으며 아이 엄마에게 말했다.
“어머님, 아마 처음 며칠은 하기 싫다고 할지도 몰라요. 계이름이나 음표 공부를 하다 보면 재미없다고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것만 잘 지나가면 좋아할 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님께서 단단히 마음먹으시고 도와주세요.”
“아이, 그럼요.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 엄마의 반듯한 인사에 수연은 같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부탁은 제가 드려야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알았어요. 그럼 이따 혜진이 데리러 올게요. 혜진아, 엄마 이따 올게. 재미있게 해.”
엄마가 인사하자 아이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자신과 닮은 아이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이는 제 엄마가 가고 나자 다시 쭈뼛거렸다. 수연은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다 말을 걸었다.
“혜진아, 오늘은 혜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피아노 치고 싶으면 피아노 치고, 책 보고 싶으면 책 보고.”
수연의 말에 아이는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무것도 몰라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전부였지만 아이의 얼굴엔 점차 미소가 번져 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수업을 마치고 청소를 하던 수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하루 종일 긴장했지만 첫 수업은 별 탈 없이 잘 마무리했다. 수연은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에 괜히 코끝이 찡했다.
그녀는 청소를 마무리 짓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간 피아노 학원을 차리는 것에 급급해 피아노를 제대로 치지 못했던 것이 아쉽던 차였다. 심호흡을 하고 건반에 손을 올렸다. 좋아하는 곡을 머릿속에 그리며 계이름부터 차례로 손을 풀었다.
“저기, 계세요?”
수연이 손을 풀고 막 연주를 하려던 찰나였다.
“네, 잠시 만요.”
수연은 벌떡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갔다. 이모뻘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 학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네, 어떻게 오셨어요?”
수연의 물음에 그녀는 활짝 웃었다.
“아, 원장님이시구나. 생각보다 많이 젊으시네.”
“네, 근데 어떻게 오신건지…….”
수연이 재차 되물었다. 그녀는 수연과 시선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여기 위층 속셈 학원 원장이에요. 피아노 학원 들어오는 건 알았는데 인사를 못 하기도 했고 그냥 좀 궁금해서요.”
수연은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인사는 한 번 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잘됐다싶었다.
“아, 그러시구나. 제가 먼저 인사 드려야 했는데 너무 정신이 없어서요. 차 한잔하실래요? 여기 앉으세요.”
“그럴까요?”
푸근한 인상의 속셈 원장은 수연을 친근하게 대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녀와 잘 지내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한 수연은 그녀의 호의를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수연이 차를 건네자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아니에요. 종종 마시러 오세요.”
그녀는 수연의 말에 피식 웃었다. 차를 한 모금 입에 넣고 학원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감탄하듯 넌지시 말했다.
“와, 엄청 깨끗하고 잘해 놨다. 학원 운영은 처음이에요?”
그녀의 질문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처음이에요. 그래서 아직 좀 얼떨떨하네요.”
“그럼 원생들은요? 어떻게 모집했어요?”
“전단지 돌렸죠. 카페 같은 곳에 가서 홍보하기도 했고.”
“많이 모았어요? 이쪽 상가 근처에 아파트 단지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어서 아이들은 많을 거예요. 잘되면 좋겠다.”
수연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운이 좋다는 생각은 했어요. 사실 보증금도 그렇고 임대료도 싼 편이잖아요. 부동산에서도 적극 추천하던 대요?”
수연이 부동산 얘길 꺼내자 속셈 원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제 몸을 수연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속삭이듯 작게 입을 열었다.
“부동산에서 추천했어요? 뭐, 다른 말은 안 하고?”
원장의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모습에 수연은 호기심이 생겼다.
“왜요? 뭐, 안 좋은 거라도 있나요?”
수연의 질문에 속셈 원장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뭐,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뭔데요? 그냥 말해 주세요.”
“그게 내가 사실은 이번 주 주말에 학원을 뺄 거예요.”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꽤 오랫동안 학원을 운영한 것으로 들었는데 왜 그만두려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정말 이 건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부동산에선 아무 말도 없었는데…….
수연은 괜히 긴장했다.
“왜 그만두세요? 다른 곳으로 옮기시려고요?”
원장이 설핏 미소 지었다.
“아니, 이제 좀 쉬려고요. 너무 일만 한 거 같아서. 그동안 내 시간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아…….”
“저기, 근데 내가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요.”
수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확실히 뭔가 있는 모양이다.
“네, 그냥 편히 말씀하세요. 뭐예요?”
“그게 이 상가 건물주가 조폭이라는 소문이 있어요. 겉보기엔 그냥 돈 많은 멀쩡한 노인인데, 젊었을 때 이 동네를 아주 주름잡는 거물이었다네?”
수연은 왠지 흥미진진해졌다.
“그래서요?”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의 아들놈이 문제야.”
“아들이요?”
그녀는 건물주 아들을 운운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아들놈이 아주 망나니거든. 제 아버지 빽 믿고 어찌나 설쳐 대는지, 가끔 덩치들을 데리고 여기 종종 오거든요. 지가 건물주라도 되는 것처럼 쌍 팔년도 수법으로 못된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수연은 흠칫했다.
“못된 짓이요? 어떤…….”
“왜 영화에서 조폭들 하는 짓 있잖아요. 여기 내가 주인이다. 곱게 장사하고 싶으면 자릿세 내놓아라. 뭐, 이런 거. 아주 저질이라니까.”
수연은 몸을 움찔했다.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원장님은 어떻게 하셨는데요? 그거 불법이잖아요. 신고하면 콩밥 먹는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죠. 근데 사람이 그렇잖아. 덩치들 보면 위축되고, 겁부터 먹고. 더군다나 남자들이니까. 사실 자기 들어오기 전에 여기가 미용실이었거든. 그 원장이 총대 매고 신고를 했는데 그놈 아버지가 장난 좀 친 거라면서 돈으로 합의하고 그랬어요.”
수연은 계속 소름이 끼쳤다. 진짜 영화에서 보던 일이 실제로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해 봤다. 상권도 좋고 모든 조건이 좋아 덜컥 계약했는데, 첫 날부터 이 무슨…….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리고는요? 더 이상 안 왔어요?”
그녀는 인상을 구기며 손사래를 쳤다.
“안 오긴. 그놈이 제 아버지 몰래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사람 피를 말렸다니까.”
“또 돈 뜯어 갔어요?”
“아니, 이발하러 왔다면서 눈치 주고 괜히 어슬렁거리면서 다른 손님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어찌나 사람을 괴롭히던지 결국 못 이기고 나갔잖아요.”
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도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장은 실컷 다 얘기해 놓고 수연의 굳은 표정에 머쓱한 듯 웃었다.
“아이고, 내가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한테 괜한 말을 했나 싶긴 한데 걱정이 되어서. 알고는 있어야 하지 않나싶어서. 혹시 결혼했어요?”
수연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럼 애인이나 남동생은?”
“없어요. 저 혼자거든요. 부모님도 지방에 계시고.”
원장은 혀를 끌끌 찼다.
“저런, 그럼 진짜 더 조심해야겠다. 늦게까지 여기 있지 말고 바로바로 들어가요.”
“네, 그럴게요.”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답하자 그녀는 머뭇거리다 벌떡 일어섰다.
“그럼 나 이만 가 볼게요. 나 나가기 전까진 종종 차 마셔요.”
“네, 그래요. 그리고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에이, 감사할 것까진 아니지. 암튼 나 가요.”
수연은 그녀가 가자마자 안에서 문을 잠갔다. 괜히 불안하고 마음이 급해 꼼꼼히 하던 청소도 대충 마무리 짓고 쏜살같이 학원을 나왔다.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려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제 웃으며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조폭이라니. 아니, 그런 것들은 양아치라 하나?
수연은 제 어깨를 잡고 몸을 부르르 떨며 걸음을 재촉했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원장의 말이 신경 쓰여 하루 종일 긴장 상태였다.
학원 운영엔 문제가 없었다. 매일 몇 번씩 상담이 들어오고, 첫 수업을 함께했던 아이들도 조금씩 적응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