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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밖이 시끌벅적한 걸 보니 속셈 학원이 나가려는 모양이다. 수연은 아쉬운 마음에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짐을 다 실었는지 차에 시동이 걸려 있었다. 인사라도 할 겸 원장을 찾아보니 마침 학원 앞을 지나고 있었다.
“원장님!”
수연의 부름에 원장은 시선을 돌렸다.
“어? 너무 시끄러웠죠? 괜히 방해한 거 아닌가 몰라.”
수연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에요. 짐은 벌써 다 빼셨어요?”
“그럼요. 다 정리했지. 그나저나 만나자마자 헤어져서 아쉽다.”
수연은 설핏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종종 차 마시러 오세요.”
“그래요. 이쪽에 올 때마다 들를게. 참, 나 나가고 나면 여기 태권도 도장이 들어올 거라네? 차라리 잘 되지 않았어?”
“뭐, 저랑 상관이 있나요.”
“왜, 그래도 남자가 들어오는 게 낫지. 게다가 운동한 사람이니까 그 망나니도 함부로 못 할 거 아니야.”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아무튼 건강하시고요. 꼭 한 번 놀러 오세요.”
“알았어요. 잘 지내요.”
수연은 원장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문득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니 태권도 도장이 들어오는 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요즘 들어 생각이 많아진 기분이었다.
***
“벌써 들어오나 보네.”
속셈 학원이 나가고 난 후 한동안 조용했던 위층이 공사를 하는 건지 온갖 소음이 들려왔다. 다행히 오전 수업은 많지 않았지만 소리에 예민했던 수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한동안은 소음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후 학원 앞에 도착한 수연은 웬 남자의 서성거림에 흠칫했다. 전체적으로 까만 복장을 하고 학원 앞을 서성거리던 남자는 한눈에 딱 보아도 다부진 체격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속셈 원장이 말했던 그 망나니가 아닐까싶어 잔뜩 긴장한 것이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조심스레 학원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걸리적거리는 공사 잔해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상가는 왜 왔을까? 똘마니 몇몇을 데리고 다닌다더니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오만가지 잡생각에 몸이 덜덜 떨렸다. 수연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기요!”
수연은 몸을 움찔했다. 남자를 지나쳐 학원 문 앞에 다다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수연을 불렀던 것이다. 수연은 흠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어떡하지? 그냥 도망칠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 결국은 그를 무시해 버렸다.
재빨리 학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가방 안에 넣어 둔 열쇠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남자는 점점 수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에 수연은 소름이 끼쳤다.
찾았다! 수연은 열쇠를 찾자마자 허겁지겁 문을 열고 다가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 곧장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책상 밑에 쪼그려 앉아 호흡을 가다듬는데 밖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뭣 좀 물어볼라 했는데…….”
남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쌩하니 들어가는 그녀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잔해들을 마저 치웠다. 그러다 걸려 온 전화에 다급한 듯 유유히 사라졌다.
그 후로도 수연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주춤주춤 다리를 앞으로 뻗고 나니 찌르르한 통증이 얼굴을 구겼다.
오만인상을 구기며 저릿한 다리를 주물렀다. 밖에 남자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섣불리 일어서지도 못했다. 입술을 잘근 씹고 저릿해진 다리부터 해결했다.
다리를 주무르다 보니 겁에 질린 저의 모습이 참 한심해 보였다. 게다가 잘못도 없는 자신이 그런 망나니 때문에 아침부터 왜 이런 꼴로 있어야 하는 건지 불쾌했다.
수연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맛살을 잔뜩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할 수 없는 거라면 당당하게 맞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원장실을 나와 잠궜던 문을 열었다.
갔나? 안 보이는 거 같은데.
밖을 살펴보니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수연은 실소를 머금으며 가슴을 들썩였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들어가야 하나 보다.
“안녕히 계세요.”
“어, 그래. 잘 가.”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마친 수연은 아이들을 보내고 청소를 했다. 아침에 만난 남자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한번을 쉬지 않고 청소에 집중했다. 긴장한 탓에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지만 빨리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계십니까?”
걸레를 빨고 있을 무렵 낮은 톤의 남자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물소리 덕에 제대로 듣지 못한 수연은 잘못 들었나 싶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걸레를 다 빨고 나와 뻐근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 했다.
“으아악!”
문득 고개를 돌린 수연은 마주친 시선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분명 아침에 봤던 남자의 복장과 같았다. 블랙 슈트 차림인 그는 사색이 된 수연을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정신 차려, 차수연. 겁먹지 말라고.
수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들고 있던 걸레를 꽉 쥐었다. 긴장한 탓에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주춤주춤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잘못 본 건진 모르지만 남자는 민망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수연은 겁에 질려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정중하게 자세를 바로 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응? 인사를 한다? 요즘은 양아치들도 이렇게 예의가 바른 건가? 그럴 리가…….
수연은 더 겁에 질렸다. 정중히 인사하며 저를 안심시키려는 수작이라 생각했다. 경계를 풀지 않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한 걸음 발을 떼었다.
“아악! 왜, 왜 이러세요! 경, 경찰 부를 거예요!”
“……?”
수연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걸레를 남자를 향해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큰일 났다.
수연은 오만상을 구겼다. 겁에 질려 던진 걸레가 남자의 얼굴을 정통으로 과격했다. 남자는 제 손에 걸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수연은 어쩔 줄 몰라 몸을 움츠리고 울상을 지었다.
“후…….”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도망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던 수연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저기…….”
“왜, 왜요? 그, 그건 실, 실수예요. 고의가 아니라고요.”
“…….”
수연은 눈을 크게 추켜세우며 남자의 말을 끊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아침에도 그러더니, 혹시 저 아세요?”
“…….”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화가 났다기보단 궁금하다는 어투였다. 수연은 알은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고민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수연을 기막힌 듯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며 조곤조곤 말했다.
“아니,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제가 여길 오늘 처음 왔거든요? 근데 그쪽은 저를 잘 알고 계신 것처럼 구시네요? 혹시 채무 관계라든지 뭐, 복잡한 일이 있으십니까? 뭘 좀 물어보려고 왔다가 이건 뭐,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
에? 오늘 처음 왔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진짜 오해를 한 건가?
수연은 눈만 깜빡거리며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속셈 원장이 말한 망나니라면 제 얼굴에 걸레를 던진 저한테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수연은 남자를 향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처, 처음이시라고요? 그럼 누구신데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여기 위층 새로 들어온 태권도 도장 관장입니다.”
“……!”
그런 거였어? 아니, 근데 스타일이 왜 저래? 꼭 조폭들 같이 입었잖아.
수연은 굉장히 난처했다. 너무 민망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 하하, 그, 그러시구나.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오해를 했어요.”
수연이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자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대체 어떤 오해를 하셨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러세요.”
“여기 쓰레기는 어떻게 버려야 합니까? 관리 사무실 아저씨를 도통 만날 수가 없어요. 매번 안 계시니…….”
수연은 조금 당황했다. 그저 쓰레기 버리는 것 때문에 저를 부른 거였다니. 수연은 애써 태연한 척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아, 그게요. 음식물 쓰레기는 월요일, 금요일만 수거하고요. 일반 쓰레기는 매일 버리셔도 돼요.”
“흠,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이 따로 있습니까? 어떻게 버려야 하죠?”
뭐야, 이 남자. 별걸 다 물어봐. 진짜 몰라서 묻나?
수연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인사가 어찌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겠다는 건지. 혹시 금수저인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거야 음식물 쓰레기통 있잖아요. 요즘은 음식물 종량제 봉투도 나오는데.”
남자는 알은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근데 어디다 버립니까?”
“네? 여기 건물 뒤쪽에…….”
“아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뭐.”
남자는 다시 정중히 인사했다. 수연은 멋쩍어 어색하게 웃었다. 돌아서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닥에 놓인 걸레를 집었다.
“아! 그리고…….”
“으악!”
수연은 다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놀랐다.
“왜, 왜요?”
수연이 가슴을 들썩이며 작게 웅얼거리자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수연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아까부터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무슨 죄 지었어요?”
가만히 듣다 보니 남자의 말투가 거슬렸다.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나빴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죄 짓고 여기서 학원을 어떻게 운영해요? 말이 좀 이상하시다.”
높아진 수연의 목소리에 남자는 당황했다. 한데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그도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니면 아니지, 그쪽 말투도 좀 많이 사납네요. 제 얼굴에 걸레까지 던지셔 놓고.”
“…….”
결국 그거였어? 너 지금 그거 따지고 싶은 거니? 그래서 사과하라고?
수연은 어이없었다. 물론 저가 잘못한 건 맞지만 실수였던 것을 굳이 끄집어내는 그가 쪼잔해 보였다. 저런 사람을 구세주라고 생각했다니…….
수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 네에. 사과 받고 싶으신 거구나. 아까는 고의가 아니었어요. 실수였습니다. 미안해요.”
“…….”
남자는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괜히 지고 싶지 않았던 수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저기, 할 말 다 하셨으면 그만 가 주시죠? 전 이제 정리하고 들어가려던 참인데.”
남자는 인내하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예, 그러죠. 그럼.”
쾅!
“하, 뭐야 진짜. 기가 막혀.”
보란 듯이 문을 세게 닫고 나가 버린 남자의 모습에 수연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위층 관장과는 잘 지내긴 틀린 것 같았다. 꽤나 성깔이 있어 보이는 그의 첫인상은 완전히 별로였다. 수연은 고개를 저으며 걸레를 집었다.
“나 참. 저렇게 뾰족해선 애들은 어떻게 상대한대?”
한편 밖으로 나온 준서는 피아노 학원 간판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도 사람을 나 몰라라 하더니 치한 취급도 모자라 걸레까지 집어던지고 불친절하기까지 한 그녀가 기막혔다.
준서는 갑자기 지인이 상을 당해 새로 오픈할 도장에 신경을 못 썼다. 하필 오늘이 발인이라 불편했지만 슈트를 그대로 입고 도장을 찾았다. 공사가 마무리되었단 소식에 확인도 하고 쓰레기도 치울 겸 시간을 쪼갠 것이다. 그러다 마침 밑의 층 피아노 학원에 사람이 온 것 같아 예의상 인사를 하려 했다.
한데 그녀는 저를 모른 척 들어가 버렸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나? 그때부터 그녀에 대한 인상이 별로였다. 하나 요즘 같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준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방금과 같은 일을 당하기 전까진 말이다. 분명 여자에겐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처음 본 저를 기겁하며 대할 순 없었다.
여러모로 기분이 가라앉는 하루였다. 준서는 혀를 끌끌 차며 이맛살을 잔뜩 구긴 채 걸음을 옮겼다.
***
위층 태권도 도장이 오픈했다. 오며 가며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도장을 넓히려 이곳으로 이전을 했다고 하더니 원생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능력은 좀 되나 보지?”
수연은 소란스러운 태권도 도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권도 관장과의 첫 만남부터 별로였던 그녀는 요란하게 오픈하는 도장이 괜히 진상으로 보였다.
소박하고 조용하게 학원을 운영하고 싶었던 수연으로선 태권도 도장이 반갑지 않았다. 아주 잠깐 건물주 망나니 아들이 찾아오면 구세주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이미 그런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벌써부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에 골이 흔들리고 점차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생님, 위층에 태권도 학원이에요?”
수연은 구겨졌던 얼굴을 피며 여학생을 향해 난처한 듯 웃었다.
“응, 오늘 오픈했나봐. 신경 쓰여?”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좀 시끄러워서요.”
수연은 난감했다. 별일 아닌 듯 얘기했지만 여학생은 도통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이론 수업을 중단했다. 건반이라도 쳐야 그나마 나을 것 같아 수업 계획을 변경했다. 여학생은 변경된 수업에 반가워했지만 수연은 울화가 치밀었다. 피아노 이론은 실기만큼이나 중요했기에 계획대로 수업 진행을 못 한 것이 찝찝하고 마음에 걸렸다.
하나 수연이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건물도 아니고 도장의 특성상 분주하고 시끄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최 뭐 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눈치가 보이고 예민해지기까지 했다.
“원장님!”
수연의 부름에 원장은 시선을 돌렸다.
“어? 너무 시끄러웠죠? 괜히 방해한 거 아닌가 몰라.”
수연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에요. 짐은 벌써 다 빼셨어요?”
“그럼요. 다 정리했지. 그나저나 만나자마자 헤어져서 아쉽다.”
수연은 설핏 미소 지었다.
“그러게요. 종종 차 마시러 오세요.”
“그래요. 이쪽에 올 때마다 들를게. 참, 나 나가고 나면 여기 태권도 도장이 들어올 거라네? 차라리 잘 되지 않았어?”
“뭐, 저랑 상관이 있나요.”
“왜, 그래도 남자가 들어오는 게 낫지. 게다가 운동한 사람이니까 그 망나니도 함부로 못 할 거 아니야.”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아무튼 건강하시고요. 꼭 한 번 놀러 오세요.”
“알았어요. 잘 지내요.”
수연은 원장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문득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니 태권도 도장이 들어오는 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요즘 들어 생각이 많아진 기분이었다.
***
“벌써 들어오나 보네.”
속셈 학원이 나가고 난 후 한동안 조용했던 위층이 공사를 하는 건지 온갖 소음이 들려왔다. 다행히 오전 수업은 많지 않았지만 소리에 예민했던 수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한동안은 소음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수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후 학원 앞에 도착한 수연은 웬 남자의 서성거림에 흠칫했다. 전체적으로 까만 복장을 하고 학원 앞을 서성거리던 남자는 한눈에 딱 보아도 다부진 체격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속셈 원장이 말했던 그 망나니가 아닐까싶어 잔뜩 긴장한 것이다.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조심스레 학원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걸리적거리는 공사 잔해들을 한쪽으로 치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상가는 왜 왔을까? 똘마니 몇몇을 데리고 다닌다더니 꼭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오만가지 잡생각에 몸이 덜덜 떨렸다. 수연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기요!”
수연은 몸을 움찔했다. 남자를 지나쳐 학원 문 앞에 다다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수연을 불렀던 것이다. 수연은 흠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어떡하지? 그냥 도망칠까? 별의별 생각을 하다 결국은 그를 무시해 버렸다.
재빨리 학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가방 안에 넣어 둔 열쇠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남자는 점점 수연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에 수연은 소름이 끼쳤다.
찾았다! 수연은 열쇠를 찾자마자 허겁지겁 문을 열고 다가오는 남자를 무시한 채 곧장 학원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책상 밑에 쪼그려 앉아 호흡을 가다듬는데 밖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뭣 좀 물어볼라 했는데…….”
남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쌩하니 들어가는 그녀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잔해들을 마저 치웠다. 그러다 걸려 온 전화에 다급한 듯 유유히 사라졌다.
그 후로도 수연은 한참을 쪼그려 앉아 있었다. 주춤주춤 다리를 앞으로 뻗고 나니 찌르르한 통증이 얼굴을 구겼다.
오만인상을 구기며 저릿한 다리를 주물렀다. 밖에 남자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섣불리 일어서지도 못했다. 입술을 잘근 씹고 저릿해진 다리부터 해결했다.
다리를 주무르다 보니 겁에 질린 저의 모습이 참 한심해 보였다. 게다가 잘못도 없는 자신이 그런 망나니 때문에 아침부터 왜 이런 꼴로 있어야 하는 건지 불쾌했다.
수연은 주먹을 그러쥐었다. 이맛살을 잔뜩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할 수 없는 거라면 당당하게 맞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원장실을 나와 잠궜던 문을 열었다.
갔나? 안 보이는 거 같은데.
밖을 살펴보니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수연은 실소를 머금으며 가슴을 들썩였다. 오늘은 조금 더 일찍 들어가야 하나 보다.
“안녕히 계세요.”
“어, 그래. 잘 가.”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마친 수연은 아이들을 보내고 청소를 했다. 아침에 만난 남자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한번을 쉬지 않고 청소에 집중했다. 긴장한 탓에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지만 빨리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계십니까?”
걸레를 빨고 있을 무렵 낮은 톤의 남자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물소리 덕에 제대로 듣지 못한 수연은 잘못 들었나 싶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걸레를 다 빨고 나와 뻐근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 했다.
“으아악!”
문득 고개를 돌린 수연은 마주친 시선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분명 아침에 봤던 남자의 복장과 같았다. 블랙 슈트 차림인 그는 사색이 된 수연을 보며 당황한 얼굴을 했다.
정신 차려, 차수연. 겁먹지 말라고.
수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들고 있던 걸레를 꽉 쥐었다. 긴장한 탓에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
주춤주춤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잘못 본 건진 모르지만 남자는 민망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수연은 겁에 질려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정중하게 자세를 바로 하더니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응? 인사를 한다? 요즘은 양아치들도 이렇게 예의가 바른 건가? 그럴 리가…….
수연은 더 겁에 질렸다. 정중히 인사하며 저를 안심시키려는 수작이라 생각했다. 경계를 풀지 않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는 몸을 움찔하며 한 걸음 발을 떼었다.
“아악! 왜, 왜 이러세요! 경, 경찰 부를 거예요!”
“……?”
수연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걸레를 남자를 향해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 큰일 났다.
수연은 오만상을 구겼다. 겁에 질려 던진 걸레가 남자의 얼굴을 정통으로 과격했다. 남자는 제 손에 걸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닦았다. 수연은 어쩔 줄 몰라 몸을 움츠리고 울상을 지었다.
“후…….”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도망갈 곳도 없고, 그렇다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던 수연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저기…….”
“왜, 왜요? 그, 그건 실, 실수예요. 고의가 아니라고요.”
“…….”
수연은 눈을 크게 추켜세우며 남자의 말을 끊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아침에도 그러더니, 혹시 저 아세요?”
“…….”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화가 났다기보단 궁금하다는 어투였다. 수연은 알은체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고민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수연을 기막힌 듯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며 조곤조곤 말했다.
“아니, 뭔가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제가 여길 오늘 처음 왔거든요? 근데 그쪽은 저를 잘 알고 계신 것처럼 구시네요? 혹시 채무 관계라든지 뭐, 복잡한 일이 있으십니까? 뭘 좀 물어보려고 왔다가 이건 뭐, 굉장히 당황스럽네요.”
“…….”
에? 오늘 처음 왔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진짜 오해를 한 건가?
수연은 눈만 깜빡거리며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속셈 원장이 말한 망나니라면 제 얼굴에 걸레를 던진 저한테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수연은 남자를 향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처, 처음이시라고요? 그럼 누구신데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여기 위층 새로 들어온 태권도 도장 관장입니다.”
“……!”
그런 거였어? 아니, 근데 스타일이 왜 저래? 꼭 조폭들 같이 입었잖아.
수연은 굉장히 난처했다. 너무 민망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 하하, 그, 그러시구나.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오해를 했어요.”
수연이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자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대체 어떤 오해를 하셨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러세요.”
“여기 쓰레기는 어떻게 버려야 합니까? 관리 사무실 아저씨를 도통 만날 수가 없어요. 매번 안 계시니…….”
수연은 조금 당황했다. 그저 쓰레기 버리는 것 때문에 저를 부른 거였다니. 수연은 애써 태연한 척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아, 그게요. 음식물 쓰레기는 월요일, 금요일만 수거하고요. 일반 쓰레기는 매일 버리셔도 돼요.”
“흠,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이 따로 있습니까? 어떻게 버려야 하죠?”
뭐야, 이 남자. 별걸 다 물어봐. 진짜 몰라서 묻나?
수연은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인사가 어찌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겠다는 건지. 혹시 금수저인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거야 음식물 쓰레기통 있잖아요. 요즘은 음식물 종량제 봉투도 나오는데.”
남자는 알은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근데 어디다 버립니까?”
“네? 여기 건물 뒤쪽에…….”
“아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뭐.”
남자는 다시 정중히 인사했다. 수연은 멋쩍어 어색하게 웃었다. 돌아서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닥에 놓인 걸레를 집었다.
“아! 그리고…….”
“으악!”
수연은 다시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놀랐다.
“왜, 왜요?”
수연이 가슴을 들썩이며 작게 웅얼거리자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수연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는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아까부터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무슨 죄 지었어요?”
가만히 듣다 보니 남자의 말투가 거슬렸다.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나빴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죄 짓고 여기서 학원을 어떻게 운영해요? 말이 좀 이상하시다.”
높아진 수연의 목소리에 남자는 당황했다. 한데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그도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니면 아니지, 그쪽 말투도 좀 많이 사납네요. 제 얼굴에 걸레까지 던지셔 놓고.”
“…….”
결국 그거였어? 너 지금 그거 따지고 싶은 거니? 그래서 사과하라고?
수연은 어이없었다. 물론 저가 잘못한 건 맞지만 실수였던 것을 굳이 끄집어내는 그가 쪼잔해 보였다. 저런 사람을 구세주라고 생각했다니…….
수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 네에. 사과 받고 싶으신 거구나. 아까는 고의가 아니었어요. 실수였습니다. 미안해요.”
“…….”
남자는 기막히다는 표정이었다. 괜히 지고 싶지 않았던 수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저기, 할 말 다 하셨으면 그만 가 주시죠? 전 이제 정리하고 들어가려던 참인데.”
남자는 인내하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예, 그러죠. 그럼.”
쾅!
“하, 뭐야 진짜. 기가 막혀.”
보란 듯이 문을 세게 닫고 나가 버린 남자의 모습에 수연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위층 관장과는 잘 지내긴 틀린 것 같았다. 꽤나 성깔이 있어 보이는 그의 첫인상은 완전히 별로였다. 수연은 고개를 저으며 걸레를 집었다.
“나 참. 저렇게 뾰족해선 애들은 어떻게 상대한대?”
한편 밖으로 나온 준서는 피아노 학원 간판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침에도 사람을 나 몰라라 하더니 치한 취급도 모자라 걸레까지 집어던지고 불친절하기까지 한 그녀가 기막혔다.
준서는 갑자기 지인이 상을 당해 새로 오픈할 도장에 신경을 못 썼다. 하필 오늘이 발인이라 불편했지만 슈트를 그대로 입고 도장을 찾았다. 공사가 마무리되었단 소식에 확인도 하고 쓰레기도 치울 겸 시간을 쪼갠 것이다. 그러다 마침 밑의 층 피아노 학원에 사람이 온 것 같아 예의상 인사를 하려 했다.
한데 그녀는 저를 모른 척 들어가 버렸다.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나? 그때부터 그녀에 대한 인상이 별로였다. 하나 요즘 같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준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방금과 같은 일을 당하기 전까진 말이다. 분명 여자에겐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선 처음 본 저를 기겁하며 대할 순 없었다.
여러모로 기분이 가라앉는 하루였다. 준서는 혀를 끌끌 차며 이맛살을 잔뜩 구긴 채 걸음을 옮겼다.
***
위층 태권도 도장이 오픈했다. 오며 가며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도장을 넓히려 이곳으로 이전을 했다고 하더니 원생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능력은 좀 되나 보지?”
수연은 소란스러운 태권도 도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권도 관장과의 첫 만남부터 별로였던 그녀는 요란하게 오픈하는 도장이 괜히 진상으로 보였다.
소박하고 조용하게 학원을 운영하고 싶었던 수연으로선 태권도 도장이 반갑지 않았다. 아주 잠깐 건물주 망나니 아들이 찾아오면 구세주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이미 그런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벌써부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에 골이 흔들리고 점차 얼굴이 일그러졌다.
“선생님, 위층에 태권도 학원이에요?”
수연은 구겨졌던 얼굴을 피며 여학생을 향해 난처한 듯 웃었다.
“응, 오늘 오픈했나봐. 신경 쓰여?”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그냥 좀 시끄러워서요.”
수연은 난감했다. 별일 아닌 듯 얘기했지만 여학생은 도통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이론 수업을 중단했다. 건반이라도 쳐야 그나마 나을 것 같아 수업 계획을 변경했다. 여학생은 변경된 수업에 반가워했지만 수연은 울화가 치밀었다. 피아노 이론은 실기만큼이나 중요했기에 계획대로 수업 진행을 못 한 것이 찝찝하고 마음에 걸렸다.
하나 수연이 당장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건물도 아니고 도장의 특성상 분주하고 시끄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최 뭐 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었다. 수업하는 학생들에게 눈치가 보이고 예민해지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