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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다시 한번
-산유화
기억, 다시 한번 1화
1. 재회 (1)
숨이 막히도록 푸른 가을 하늘이 어둠을 찢고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검은 점이 번지듯 생겨났다. 얼룩은 점차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검은 코트와 까만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돌아선 그 누군가의 목 언저리에 붉은 물감이 번지듯 목도리가 그려졌다. 장갑을 낀 하얀 손이 주저하듯 머뭇거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흰 뺨과 붉은 입술, 곧게 뻗은 코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천사.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그 사람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무어라 말한 것은 분명했지만 소리가 지워진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짤막한 한마디를 끝낸 그 누군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사는 하늘 속으로 뛰어들었다.
붉은 목도리가 새파란 하늘을 베어 내듯 휘날렸다.
기억, 다시 한번.
언제나 그렇듯 꿈은 갑작스럽게 부서진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새파란 하늘은 미색 벽지를 바른 자취방 천장으로 바뀌고 천사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차가운 공기만 코끝에 맴돈다.
자면서 걷어찬 이불이 발치로 밀려가 있었다. 어쩐지 춥다 했다. 남자는 혀를 차며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종 꾸는 꿈이라 특별할 것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푸른 하늘 속으로 뛰어들 듯 날아가는 천사의 뒷모습. 하늘을 찢는 빨간 선.
천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은 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신기하게도 어느 날 꿈에서 본 순간부터 그 누군가가 천사나 뭐 그런 것이리라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흰 뺨과 도톰한 입술, 긴 속눈썹. 생판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선하고 부드러울 것만 같은 인상.
그러나 꿈은 늘 천사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다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그 순간에서 끝난다. 매번 같은 꿈을 꾼다면 다가가서 한 번쯤 얼굴을 볼 법도 하건만, 꿈속 자신은 다리가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잔뜩 눌린 머리가 제멋대로 뻗쳐 하늘을 찔렀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낸 남자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좀 돌아온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저녁 7시 반이었다.
“아…… 늦었네.”
만나기로 했던 시각이 7시 반이었으니 꼼짝없이 늦었다. 중요한 약속이라기보다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저녁 식사에 반주만 곁들이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었으니 늦는다고 해서 큰일 날 정도는 아니지만 친구 서찬의 잔소리를 감당해야 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런 몰골로 밖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남자는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편한 친구들만 만나는 자리라 해도 낮잠을 너무 푹 자느라 엉망이 된 얼굴에 눈곱 정도는 떼어 줘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씻고 대충 사람의 몰골이 된 그가 자취방을 나선 것은 8시쯤 되어서였다.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 많은 번화가를 걷는데 거지꼴을 하고 다닐 수는 없다.
자신 외의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어쩌다 한 번씩 늦은 적이 있었고, 사정은 거기서 거기였기에 30분 늦은 정도로는 어서 오라고 전화로 쪼아 대지도 않았다.
장소를 일러 주며 거기로 오라고 요한이 보낸 문자 한 통이 전부였다. 그래도 늦은 건 늦은 거고 신경이 쓰이긴 해서, 남자는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대학교 앞은 저녁에 외려 더 사람이 많았다. 차가운 늦가을, 사실상 초겨울에 가까운 한파를 흩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제 갈 길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얀 입김이 곳곳에서 번지고 메마른 겨울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인파를 헤치며 걷던 그의 눈에 빨간 목도리가 들어왔다. 어두운 무채색의 향연 속 선명한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목도리를 두른 누군가의 뒷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잘라 동그랗게 드러나는 뒤통수와 까만 코트, 그리고 그 사이를 구분 짓듯 두른 목도리까지. 늘 꿈에서 봐 오던 그 모습, 방금 전에도 보았던 바로 그 천사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 천사의 모습을 쫓았다. 인파에 섞여 언뜻 사라졌던 천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얼핏 고개를 돌리자 옆모습이 보였다. 늘 눈이 부시도록 빛나 알아볼 수 없었던 꿈과는 달리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천사를 알아보았다.
“그럴…… 리가.”
분명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같다. 무채색의 세상 속,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선명하게 보이던 붉은색 목도리. 그리고 그 목도리의 주인.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 아련한 기억 속 그 누군가는 몇 걸음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멈춰 서 있던 천사, 그러니까 남자의 옛 지인은 다시 걸음을 옮겨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억날 듯 말 듯 애타는 상황에 이렇게 놓쳐 버릴 수는 없다. 약속도 약속이지만 지금은 이쪽이 더 급했다. 더 재 볼 것도 없이 그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옛 지인이 사라진 길을 뒤쫓았다.
“잠깐만요, 비켜 주세요.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잠깐!”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부를 수가 없었다. 칙칙한 군중 틈으로 얼핏 사라졌던 옛 지인은 언뜻 또 나타났다 파묻혔다. 빨간 목도리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름이, 이름이 뭐였더라.
어느 겨울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온통 까만 패딩뿐이었던 고등학교 예비 소집일. 빨간 목도리를 두른 하얀 아이는 시커먼 소년들 사이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게 처음이었다. 처음 그가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벽면에 붙은 이름을 확인하던 그를 기억한다. 같은 반으로 배정되었었고 이름도 알 수 있었다. 비록 금방 친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기억 저편에 숨어 꿈틀대는 이름 세 글자를 필사적으로 더듬으며 그는 옛 지인의 뒤를 쫓았다. 이름, 이름. 흔한 성에 비해 흔치 않은 이름이었다. 성은 이 씨였고 이름, 이름은? 입술이 달싹였다.
빨간 목도리가 어두운 골목 한쪽 샛길로 막 접어들었다. 놓칠 수는 없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뛰어든 순간 남자의 입에서 이름이 제 형태를 갖춰 튀어나왔다.
“이기현!”
걸음이 멈췄다. 사람이 없는 골목길,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자그마한 등이 보였다. 기현이라 불린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얼굴이 남자의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차갑게 얼어붙어 매서워 보이던 얼굴이 금세 풀리며 환한 미소로 채워졌다.
“오랜만이야, 주혁아.”
기현의 말대로 오랜만이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났던가.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06년 말에 주혁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주혁이 전학을 가 버린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의 기억을 죄다 날려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렴풋하게 남아 꿈으로 비치다가 얼굴을 보니 이름이 떠올랐다.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지? 이게 몇 년 만이냐, 진짜. 잘 지냈어?”
“나야 뭐…… 알잖아.”
기현의 말에 주혁은 미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주혁이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그…… 미안. 내가 사정이 좀 있어서 연락할 수가 없었어.”
“괜찮아. 너는 요즘 어때?”
“나는…….”
주혁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요한이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8시 반이다.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을 넘겼으니 이제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되긴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이야기 중에 전화를 하다니.
전화를 받자마자 좀 있다 전화할게, 하고 곧장 끊어 버린 주혁은 기현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대로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 약속에 늦어서 가 봐야 될 거 같은데, 폰 번호 좀 찍어 줘. 내가 나중에 밥 한 끼 살게.”
“으응…… 많이 바쁜가 보네. 친구야?”
“어. 한 시간이나 늦어서 큰일 났다, 아주. 가면 엄청 쪼아 댈 거야.”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주혁을 보며 푸후, 웃은 기현은 핸드폰 번호를 찍어 주었다. 통화 버튼을 눌러 기현의 주머니 한쪽에서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확인한 주혁은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진짜 꼭, 꼭 보자.”
“내가 연락해도 돼?”
“당연히 되지! 아, 얘 또 전화 왔네. 그럼 나중에 보자, 기현아. 진짜 미안!”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기현은 웃으며 주혁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선약은 선약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묻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의 필름이 끊긴 구간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 절친한 친구였을 기현과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꿈으로 어렴풋하게 기억할 정도라면 그 누구보다 가까웠던 것이 분명하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며 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의 전화를 받자마자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충대충 대꾸하는 주혁의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흘렀다.
11월 말, 추운 날씨였지만 묘하게 그리 춥지 않은 것만 같았다. 막 운동을 마치고 나왔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혁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덕분에 2년간의 기억이 홀랑 날아가 버렸고, 그런저런 이유가 겹치면서 학교를 옮겨 졸업한 덕분에 고등학생 시절의 추억이라고는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코피를 쏟을 정도로 고생해야 했던 고3 시절 딱 1년뿐이라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점이긴 했다.
그러나 다행히 공부했던 것은 그렇게 다 날아가 버리지 않은 모양인지 어찌어찌 서울에 있는 대학의 사회 체육 관련 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성격 덕분에 대학 생활도 무난했고, 군대도 별 탈 없이 다녀왔다. 음악 동아리에서 취미 생활도 하고 있고 학점이 괜찮은 덕분에 교직 이수 후에 체육 교사 임용시험을 치는 쪽으로 진로도 생각하고 있다.
평범하고 무난하고, 오히려 별문제 없이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래서인지 주혁은 사는 데 별 재미를 못 느꼈다.
체육 교사는 부모님의 추천이었다. 축구 선수 생활은 그만뒀지만 운동하는 건 좋아하니 안정적인 직업으로 효도하며 인생 챙기는 차원에서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 선택한 거지, 딱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사명감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지만 뭔가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친구가 많아 늘 즐거워 보이는 그였지만 그리 즐겁게 느끼는 경우가 별로 없었고, 고3 때부터 지금까지 여자도 몇 번 만나 봤지만 좋아함에서 그쳤지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먼저 고백해 왔던 여자들은 결국 먼저 이별을 고했다. 아직까지 친구로 지낼 만큼 쿨한 사이도 있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게 된 사이도 있었지만 그녀들의 이별 이유는 대체로 같았다.
친구일 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헤어진다고 해서 절절하게 아팠던 적도 없었다. 그저 그녀들의 말에 내가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해 보며 이별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주혁 역시 그런 자신의 태도에 어느 정도 의아함을 느끼고는 있었다. 매일같이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인생이 무상함을 깨닫는 학자 타입도 아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이런 경험, 저런 경험 다 해 봐서 이제 삶에 별 흥미가 없는 경우도 아니건만 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게 재미가 없을까.
얌전한 성격은커녕 다른 사람이 보기에 활발하고 유쾌한 청년 그 자체인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어느 정도 원인을 추리해 보았다. 사라진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주혁이 내린 결론이었다.
중학생 때보다 쑥 자라 버린 덩치에 스스로가 다 큰 어른인 것만 같아 마음이 한껏 들뜬, 그러면서도 고3보다 입시에 대한 부담감도 상대적으로 덜해 진짜 인생에 깊이 남을 추억을 만들 만한 시기인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시기.
가장 찬란하고 즐거웠을 그 시간이 스쿱으로 푹 퍼낸 아이스크림 통의 흔적인 양 비어 있으니 사는 게 그다지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만날 만한 고등학교 친구도 고3 시절 같이 입시 생활을 했던 녀석들이 전부이고, 술 한잔하면서 곱씹을 추억도 대학 진학 후 시작한 동아리 활동이며 군 생활 정도가 다였기에.
학창 시절 풋풋한 첫 마음을 주었던 누군가의 추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세상이 또 다르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기현이 더욱 반가웠다. 기억나는 거라곤 이름과 얼굴, 아마도 친했을 것이라는 느낌 정도뿐이었지만 어쩌면 기현을 통해 자신이 모르는 스스로의 과거를 전해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절, 가슴이 뛰던 나날의 이야기를.
끼익―
영국식 펍(Pub) 분위기가 나도록 나무로 만든 문이 불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음은 이내 가게 안의 왁자한 소리들에 묻혀 사라졌다.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과 그 밑에 깔린 음악 소리 사이로 곳곳에서 담배 연기와 맥주 냄새가 피어올랐다.
주혁과 함께 문틈으로 슬쩍 들어온 찬 공기는 이내 맥을 못 추고 바닥으로 흩어졌다. 몇 개의 테이블을 휘 둘러본 주혁은 안쪽 테이블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와글와글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네 남자의 눈이 주혁에게 꽂혔다.
“야, 윤주혁 이제 오셨다.”
잔뜩 골이 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혁은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혁 역시 누가 약속 시각을 어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긴 했지만, 내가 하는 것과 남이 하는 건 또 좀 이야기가 다르다.
어찌 됐건 오늘은 잘못한 게 있으니 알아서 기는 게 최선이다. 특히 짜증을 내는 대상이 저 연요한이라면 더욱 그렇다.
키도 작고 귀여운 얼굴이라 그저 애교 많은 어린애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무리 내에서 제일 무서운 게 바로 요한이었다. 가뜩이나 섬세한 편이라 은근히 이런 거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방금 전화가 오자마자 끊어 버렸으니 더 화가 나 있을 터다.
“진짜 미안. 내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에 오려고 했는데…….”
“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는 게 중요한 거 아냐?”
예리한 놈. 하여간 그냥 어물쩍 넘어가 주는 적이 없다. 하긴 이런 일이 있을 때 별말 없이 적당히 넘어가 주는 건 가족과 관련된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을 경우 정도였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주혁은 재차 사과했다.
“어, 그렇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
“우리랑 약속이 먼저잖아. 아무리 자주 봐도 약속 시간은 지켜야지.”
“그게…… 길에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연락이 아예 안 되던 애라서 잠깐 얘기 좀 하느라 그랬어. 아, 미안. 진짜 미안.”
“여자냐?”
동창이라는 말을 듣자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던 서찬의 눈빛이 바뀌었다. 딱히 여자를 못 만나서 아쉬울 것도 없는 놈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 서찬의 질문이 튀어나오자 다행히 자신에게 퍼부어지던 요한의 짜증이 멈췄다.
“아…… 그거였냐? 여자?”
알 만하다는 표정이다. 이미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끝냈는지 짓궂게 웃는 것이, 오늘의 몰이감은 윤주혁으로 확정된 모양이다. 신나게 몰아가면서 뭐 하나 재밌는 정보라도 얻어 낼 심산인 것이 눈에 보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그게.”
“길에서 그렇게 오래 얘기하다 온 거면 딱 그거네.”
가만히 분위기를 보던 승현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질세라 술자리 막내, 정운도 얼른 한마디를 거들었다.
“주혁이 형도 연애할 때 됐죠. 예전 여친이랑 깨진 지 좀 됐잖아요.”
“야, 나는…….”
“너 졸업한 데가 공학이랬지? 좋긴 좋네. 난 무슨 시커먼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데를 나와서.”
“근데 어떤 앤데? 예쁘냐?”
“걔는 그러니까…….”
“예쁘냐? 어? 예쁘냐고.”
“엄청 예쁘겠죠? 주혁이 형 눈 높잖아요. 처음 봤을 때 이렇게 딱! 꽂히는 여자 아니면 안 만난다면서요.”
이미 주혁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야 길게 이런저런 사정 설명할 틈도 없다. 고3 시절을 지내고 졸업한 곳은 확실히 남녀 공학이었다.
그러나 1학년과 2학년은 백서찬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커먼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남고에서 다녔고, 방금 길에서 마주친 동창 역시 그 남고 동창, 그러니까 남자 동창이라고 설명을…… 해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안 들릴 분위기다.
아니, 들어도 안 믿을 게 분명하다.
‘뻥치시네. 숨기는 거 보니까 진짜 뭔가 있구만?’ 하고 연애사를 캐내기 위해 자신을 더 열심히 몰아갈 짐승들이 눈에 선해 주혁은 손을 내저었다.
“어어, 엄청 이쁘지. 지상 최고의 미인이다 아주.”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 잘되면…….”
“아유, 됐어. 뭘.”
씩 웃으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요한이 어쩐지 얄미워져 주혁은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평소 같으면 이것보다 더한 농담도 같이 낄낄대며 주고받았을 텐데 오늘따라 썩 기분이 좋지가 않다.
전화 때문에 그런가. 요한이 전화로 재촉하지만 않았어도 기현과 좀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바로 몇 가지 알 수 있었을지 모를 옛일은 여전히 박스 속에 차곡차곡 포장되어 있다. 기껏 받은 택배를 아직도 못 뜯어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짜증이 자꾸만 혀끝을 간지럽혔다.
불편하게 실룩거리는 입술을 틀어막기 위해 주혁은 맥주를 들이켰다. 관심 있는 여자 이야기며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나타난 진상 이야기, 향후 진로 이야기 등을 한참 주고받던 그들은 마침내 최근 이야깃거리가 슬슬 바닥을 보이자 TV로 눈을 돌렸다.
야구나 축구 중계를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경기가 없는 날인지 뉴스만 지루하게 흘러나왔다. 언제 어떻게 봐도 헛소리만 가득한 내용들이 막 끝나고 사건 사고 뉴스가 나오는 참이었다.
“……학교 폭력이 나날이 심해지는 가운데,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 김 모 군은…….”
왕따 관련 뉴스였다. 그 수법이 잔혹하고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려왔지만 그뿐이었다. 이제는 너무 잦아진 일들. 사람들은 반복되는 뉴스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늘 그렇다. 피해자에게만 안된 일.
“왕따시키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짓을 할까?”
“생각이랄 것까지 있겠어? 그냥 마음에 안 든다 이거겠지. 이상한 놈들 많잖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관심을 끄면 그만인데 굳이 걸고 넘어져서 어떻게든 문제 삼는.”
하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괴롭힘에 정당한 이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파고들다 보면 결국에 남는 것은 아주 단순한 계기, 단순한 감정뿐이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그런 점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핵심은 같다.
뉴스는 사건 보도에 이어 ‘학교 폭력, 이대로 괜찮은가?’ 같은 제목을 내건 채 미니 토론 코너를 내보내고 있었다. 피해자가 도망치듯 전학을 가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을 보여 주면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이야기하던 패널은 점점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해자가 과연 교화될 수 있느냐, 혹은 제2의 피해자가 나오는 거 아니겠느냐 하는 이야기들이 지루하게 오갔다. 누가 봐도 대책이 될 수 없을 탁상공론들만 공허하게 전파를 타고 흘렀다.
“가해자가 뉘우치는 게 가능할까요?”
“글쎄……?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 뉘우치는 놈도 있긴 있을 거고, 안 뉘우치는 놈이 태반일 거고.”
진지하게 패널의 발언을 경청하던 정운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긴 하다. 가해자는 과연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기나 할까. 죄책감이라는 걸 느끼고는 있을까.
애초에 죄책감을 느낄 놈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더 크게 들기는 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정말로 뉘우치는 놈이 ‘절대로’ 없을 거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저 중에 잠들어 있던 최소한의 양심이 뒤늦게나마 깨어나는 놈이 정말 하나도 없을까.
아니, 어쩌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놈은 정말 없었을까. 도대체 왜 멈추지 않고 잔인하게 다른 사람을 부수는 데 열중했을까.
적당히 답을 던진 주혁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달리 제법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요한이었다.
“뉘우치든 안 뉘우치든 죗값은 치러야지. 저지른 게 있는데 과거 세탁하고 멀쩡하게 잘 살면 문제 있는 거야.”
“가해자가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걔도 그냥 애잖아. 걔 인생은 어쩌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서찬이 슬쩍 한마디를 보탰다. 그러나 요한이 바로 인상을 그었다.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밝고 활발해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는 요한이었지만 생각은 상당히 깊었다. 그래서 때로 어떤 화제들에 대해서 그 깊은 생각이 드러날 때면 낯설다 싶을 정도로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요한에게 토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른 사람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고 자기 인생 챙기는 것도 좀 웃기지 않냐?”
뭐라 대꾸하려던 서찬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요한의 말이 맞다. 피해자는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하겠지.
그러면 가해자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
현재 학교 폭력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어서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었지만 누구도 명확한 대가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단순히 법적인 대가를 넘어서서 정말 한 사람을 희생시킨 것에 대한 속죄라면, 글쎄 무엇이 있을까.
“어떤 게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생각 안 해 봤지만.”
있는 대로 날을 세우고 진지하게 제 의견을 피력하던 요한은 주혁의 질문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수그러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끝에 요한이 그나마 내린 결론은 ‘그냥 잊고 떵떵거리면서 잘사는 건 어쨌든 아닌 것 같다.’ 정도였다. 다시 살아난 분위기는 그럭저럭 화기애애했다.
-산유화
기억, 다시 한번 1화
1. 재회 (1)
숨이 막히도록 푸른 가을 하늘이 어둠을 찢고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검은 점이 번지듯 생겨났다. 얼룩은 점차 사람의 형상이 되었다. 검은 코트와 까만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돌아선 그 누군가의 목 언저리에 붉은 물감이 번지듯 목도리가 그려졌다. 장갑을 낀 하얀 손이 주저하듯 머뭇거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흰 뺨과 붉은 입술, 곧게 뻗은 코가 어렴풋이 그려졌다.
천사.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그 사람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무어라 말한 것은 분명했지만 소리가 지워진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짤막한 한마디를 끝낸 그 누군가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천사는 하늘 속으로 뛰어들었다.
붉은 목도리가 새파란 하늘을 베어 내듯 휘날렸다.
기억, 다시 한번.
언제나 그렇듯 꿈은 갑작스럽게 부서진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새파란 하늘은 미색 벽지를 바른 자취방 천장으로 바뀌고 천사는커녕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차가운 공기만 코끝에 맴돈다.
자면서 걷어찬 이불이 발치로 밀려가 있었다. 어쩐지 춥다 했다. 남자는 혀를 차며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종 꾸는 꿈이라 특별할 것은 없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푸른 하늘 속으로 뛰어들 듯 날아가는 천사의 뒷모습. 하늘을 찢는 빨간 선.
천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은 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신기하게도 어느 날 꿈에서 본 순간부터 그 누군가가 천사나 뭐 그런 것이리라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흰 뺨과 도톰한 입술, 긴 속눈썹. 생판 모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선하고 부드러울 것만 같은 인상.
그러나 꿈은 늘 천사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다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그 순간에서 끝난다. 매번 같은 꿈을 꾼다면 다가가서 한 번쯤 얼굴을 볼 법도 하건만, 꿈속 자신은 다리가 땅에 붙은 듯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잔뜩 눌린 머리가 제멋대로 뻗쳐 하늘을 찔렀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꺼낸 남자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좀 돌아온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시각을 확인했다. 저녁 7시 반이었다.
“아…… 늦었네.”
만나기로 했던 시각이 7시 반이었으니 꼼짝없이 늦었다. 중요한 약속이라기보다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저녁 식사에 반주만 곁들이는 정도의 가벼운 일이었으니 늦는다고 해서 큰일 날 정도는 아니지만 친구 서찬의 잔소리를 감당해야 하는 건 귀찮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런 몰골로 밖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남자는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편한 친구들만 만나는 자리라 해도 낮잠을 너무 푹 자느라 엉망이 된 얼굴에 눈곱 정도는 떼어 줘야 예의가 아니겠는가.
씻고 대충 사람의 몰골이 된 그가 자취방을 나선 것은 8시쯤 되어서였다.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니 크게 신경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 많은 번화가를 걷는데 거지꼴을 하고 다닐 수는 없다.
자신 외의 다른 친구들도 이렇게 어쩌다 한 번씩 늦은 적이 있었고, 사정은 거기서 거기였기에 30분 늦은 정도로는 어서 오라고 전화로 쪼아 대지도 않았다.
장소를 일러 주며 거기로 오라고 요한이 보낸 문자 한 통이 전부였다. 그래도 늦은 건 늦은 거고 신경이 쓰이긴 해서, 남자는 성큼성큼 거리를 걸었다.
대학교 앞은 저녁에 외려 더 사람이 많았다. 차가운 늦가을, 사실상 초겨울에 가까운 한파를 흩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제 갈 길로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얀 입김이 곳곳에서 번지고 메마른 겨울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
인파를 헤치며 걷던 그의 눈에 빨간 목도리가 들어왔다. 어두운 무채색의 향연 속 선명한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목도리를 두른 누군가의 뒷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까만 머리를 단정하게 잘라 동그랗게 드러나는 뒤통수와 까만 코트, 그리고 그 사이를 구분 짓듯 두른 목도리까지. 늘 꿈에서 봐 오던 그 모습, 방금 전에도 보았던 바로 그 천사였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 천사의 모습을 쫓았다. 인파에 섞여 언뜻 사라졌던 천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얼핏 고개를 돌리자 옆모습이 보였다. 늘 눈이 부시도록 빛나 알아볼 수 없었던 꿈과는 달리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천사를 알아보았다.
“그럴…… 리가.”
분명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같다. 무채색의 세상 속,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선명하게 보이던 붉은색 목도리. 그리고 그 목도리의 주인.
금방이라도 떠오를 듯 아련한 기억 속 그 누군가는 몇 걸음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멈춰 서 있던 천사, 그러니까 남자의 옛 지인은 다시 걸음을 옮겨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억날 듯 말 듯 애타는 상황에 이렇게 놓쳐 버릴 수는 없다. 약속도 약속이지만 지금은 이쪽이 더 급했다. 더 재 볼 것도 없이 그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옛 지인이 사라진 길을 뒤쫓았다.
“잠깐만요, 비켜 주세요.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잠깐!”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부를 수가 없었다. 칙칙한 군중 틈으로 얼핏 사라졌던 옛 지인은 언뜻 또 나타났다 파묻혔다. 빨간 목도리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름이, 이름이 뭐였더라.
어느 겨울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온통 까만 패딩뿐이었던 고등학교 예비 소집일. 빨간 목도리를 두른 하얀 아이는 시커먼 소년들 사이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게 처음이었다. 처음 그가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벽면에 붙은 이름을 확인하던 그를 기억한다. 같은 반으로 배정되었었고 이름도 알 수 있었다. 비록 금방 친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기억 저편에 숨어 꿈틀대는 이름 세 글자를 필사적으로 더듬으며 그는 옛 지인의 뒤를 쫓았다. 이름, 이름. 흔한 성에 비해 흔치 않은 이름이었다. 성은 이 씨였고 이름, 이름은? 입술이 달싹였다.
빨간 목도리가 어두운 골목 한쪽 샛길로 막 접어들었다. 놓칠 수는 없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그의 뒤를 따라 골목으로 뛰어든 순간 남자의 입에서 이름이 제 형태를 갖춰 튀어나왔다.
“이기현!”
걸음이 멈췄다. 사람이 없는 골목길,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자그마한 등이 보였다. 기현이라 불린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얀 얼굴이 남자의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차갑게 얼어붙어 매서워 보이던 얼굴이 금세 풀리며 환한 미소로 채워졌다.
“오랜만이야, 주혁아.”
기현의 말대로 오랜만이었다. 벌써 몇 년이 지났던가. 고등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06년 말에 주혁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주혁이 전학을 가 버린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의 기억을 죄다 날려 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렴풋하게 남아 꿈으로 비치다가 얼굴을 보니 이름이 떠올랐다.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다.
“그렇지? 이게 몇 년 만이냐, 진짜. 잘 지냈어?”
“나야 뭐…… 알잖아.”
기현의 말에 주혁은 미안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주혁이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그…… 미안. 내가 사정이 좀 있어서 연락할 수가 없었어.”
“괜찮아. 너는 요즘 어때?”
“나는…….”
주혁이 막 대답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요한이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8시 반이다.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을 넘겼으니 이제 슬슬 연락이 올 때가 되긴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이야기 중에 전화를 하다니.
전화를 받자마자 좀 있다 전화할게, 하고 곧장 끊어 버린 주혁은 기현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대로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 약속에 늦어서 가 봐야 될 거 같은데, 폰 번호 좀 찍어 줘. 내가 나중에 밥 한 끼 살게.”
“으응…… 많이 바쁜가 보네. 친구야?”
“어. 한 시간이나 늦어서 큰일 났다, 아주. 가면 엄청 쪼아 댈 거야.”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주혁을 보며 푸후, 웃은 기현은 핸드폰 번호를 찍어 주었다. 통화 버튼을 눌러 기현의 주머니 한쪽에서 벨소리가 울리는 것을 확인한 주혁은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연락할게. 진짜 꼭, 꼭 보자.”
“내가 연락해도 돼?”
“당연히 되지! 아, 얘 또 전화 왔네. 그럼 나중에 보자, 기현아. 진짜 미안!”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기현은 웃으며 주혁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선약은 선약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묻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의 필름이 끊긴 구간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명 절친한 친구였을 기현과 좀 더 함께 있고 싶었다. 꿈으로 어렴풋하게 기억할 정도라면 그 누구보다 가까웠던 것이 분명하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며 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한의 전화를 받자마자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충대충 대꾸하는 주혁의 입에서 하얗게 입김이 흘렀다.
11월 말, 추운 날씨였지만 묘하게 그리 춥지 않은 것만 같았다. 막 운동을 마치고 나왔을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혁은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덕분에 2년간의 기억이 홀랑 날아가 버렸고, 그런저런 이유가 겹치면서 학교를 옮겨 졸업한 덕분에 고등학생 시절의 추억이라고는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코피를 쏟을 정도로 고생해야 했던 고3 시절 딱 1년뿐이라는 게 특별하다면 특별한 점이긴 했다.
그러나 다행히 공부했던 것은 그렇게 다 날아가 버리지 않은 모양인지 어찌어찌 서울에 있는 대학의 사회 체육 관련 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성격 덕분에 대학 생활도 무난했고, 군대도 별 탈 없이 다녀왔다. 음악 동아리에서 취미 생활도 하고 있고 학점이 괜찮은 덕분에 교직 이수 후에 체육 교사 임용시험을 치는 쪽으로 진로도 생각하고 있다.
평범하고 무난하고, 오히려 별문제 없이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래서인지 주혁은 사는 데 별 재미를 못 느꼈다.
체육 교사는 부모님의 추천이었다. 축구 선수 생활은 그만뒀지만 운동하는 건 좋아하니 안정적인 직업으로 효도하며 인생 챙기는 차원에서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 선택한 거지, 딱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사명감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지만 뭔가가 빠진 것처럼 허전했다. 친구가 많아 늘 즐거워 보이는 그였지만 그리 즐겁게 느끼는 경우가 별로 없었고, 고3 때부터 지금까지 여자도 몇 번 만나 봤지만 좋아함에서 그쳤지 그보다 더 깊은 감정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먼저 고백해 왔던 여자들은 결국 먼저 이별을 고했다. 아직까지 친구로 지낼 만큼 쿨한 사이도 있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게 된 사이도 있었지만 그녀들의 이별 이유는 대체로 같았다.
친구일 때랑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헤어진다고 해서 절절하게 아팠던 적도 없었다. 그저 그녀들의 말에 내가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해 보며 이별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주혁 역시 그런 자신의 태도에 어느 정도 의아함을 느끼고는 있었다. 매일같이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인생이 무상함을 깨닫는 학자 타입도 아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이런 경험, 저런 경험 다 해 봐서 이제 삶에 별 흥미가 없는 경우도 아니건만 대체 왜 이렇게 사는 게 재미가 없을까.
얌전한 성격은커녕 다른 사람이 보기에 활발하고 유쾌한 청년 그 자체인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어느 정도 원인을 추리해 보았다. 사라진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주혁이 내린 결론이었다.
중학생 때보다 쑥 자라 버린 덩치에 스스로가 다 큰 어른인 것만 같아 마음이 한껏 들뜬, 그러면서도 고3보다 입시에 대한 부담감도 상대적으로 덜해 진짜 인생에 깊이 남을 추억을 만들 만한 시기인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시기.
가장 찬란하고 즐거웠을 그 시간이 스쿱으로 푹 퍼낸 아이스크림 통의 흔적인 양 비어 있으니 사는 게 그다지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만날 만한 고등학교 친구도 고3 시절 같이 입시 생활을 했던 녀석들이 전부이고, 술 한잔하면서 곱씹을 추억도 대학 진학 후 시작한 동아리 활동이며 군 생활 정도가 다였기에.
학창 시절 풋풋한 첫 마음을 주었던 누군가의 추억이라도 남아 있다면 세상이 또 다르게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기현이 더욱 반가웠다. 기억나는 거라곤 이름과 얼굴, 아마도 친했을 것이라는 느낌 정도뿐이었지만 어쩌면 기현을 통해 자신이 모르는 스스로의 과거를 전해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절, 가슴이 뛰던 나날의 이야기를.
끼익―
영국식 펍(Pub) 분위기가 나도록 나무로 만든 문이 불편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음은 이내 가게 안의 왁자한 소리들에 묻혀 사라졌다.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과 그 밑에 깔린 음악 소리 사이로 곳곳에서 담배 연기와 맥주 냄새가 피어올랐다.
주혁과 함께 문틈으로 슬쩍 들어온 찬 공기는 이내 맥을 못 추고 바닥으로 흩어졌다. 몇 개의 테이블을 휘 둘러본 주혁은 안쪽 테이블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와글와글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네 남자의 눈이 주혁에게 꽂혔다.
“야, 윤주혁 이제 오셨다.”
잔뜩 골이 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혁은 한껏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혁 역시 누가 약속 시각을 어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긴 했지만, 내가 하는 것과 남이 하는 건 또 좀 이야기가 다르다.
어찌 됐건 오늘은 잘못한 게 있으니 알아서 기는 게 최선이다. 특히 짜증을 내는 대상이 저 연요한이라면 더욱 그렇다.
키도 작고 귀여운 얼굴이라 그저 애교 많은 어린애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무리 내에서 제일 무서운 게 바로 요한이었다. 가뜩이나 섬세한 편이라 은근히 이런 거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방금 전화가 오자마자 끊어 버렸으니 더 화가 나 있을 터다.
“진짜 미안. 내가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시간에 오려고 했는데…….”
“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는 게 중요한 거 아냐?”
예리한 놈. 하여간 그냥 어물쩍 넘어가 주는 적이 없다. 하긴 이런 일이 있을 때 별말 없이 적당히 넘어가 주는 건 가족과 관련된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을 경우 정도였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주혁은 재차 사과했다.
“어, 그렇지.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만.”
“우리랑 약속이 먼저잖아. 아무리 자주 봐도 약속 시간은 지켜야지.”
“그게…… 길에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서. 연락이 아예 안 되던 애라서 잠깐 얘기 좀 하느라 그랬어. 아, 미안. 진짜 미안.”
“여자냐?”
동창이라는 말을 듣자 묵묵히 술을 마시고 있던 서찬의 눈빛이 바뀌었다. 딱히 여자를 못 만나서 아쉬울 것도 없는 놈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 서찬의 질문이 튀어나오자 다행히 자신에게 퍼부어지던 요한의 짜증이 멈췄다.
“아…… 그거였냐? 여자?”
알 만하다는 표정이다. 이미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끝냈는지 짓궂게 웃는 것이, 오늘의 몰이감은 윤주혁으로 확정된 모양이다. 신나게 몰아가면서 뭐 하나 재밌는 정보라도 얻어 낼 심산인 것이 눈에 보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그게.”
“길에서 그렇게 오래 얘기하다 온 거면 딱 그거네.”
가만히 분위기를 보던 승현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질세라 술자리 막내, 정운도 얼른 한마디를 거들었다.
“주혁이 형도 연애할 때 됐죠. 예전 여친이랑 깨진 지 좀 됐잖아요.”
“야, 나는…….”
“너 졸업한 데가 공학이랬지? 좋긴 좋네. 난 무슨 시커먼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데를 나와서.”
“근데 어떤 앤데? 예쁘냐?”
“걔는 그러니까…….”
“예쁘냐? 어? 예쁘냐고.”
“엄청 예쁘겠죠? 주혁이 형 눈 높잖아요. 처음 봤을 때 이렇게 딱! 꽂히는 여자 아니면 안 만난다면서요.”
이미 주혁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야 길게 이런저런 사정 설명할 틈도 없다. 고3 시절을 지내고 졸업한 곳은 확실히 남녀 공학이었다.
그러나 1학년과 2학년은 백서찬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커먼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남고에서 다녔고, 방금 길에서 마주친 동창 역시 그 남고 동창, 그러니까 남자 동창이라고 설명을…… 해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안 들릴 분위기다.
아니, 들어도 안 믿을 게 분명하다.
‘뻥치시네. 숨기는 거 보니까 진짜 뭔가 있구만?’ 하고 연애사를 캐내기 위해 자신을 더 열심히 몰아갈 짐승들이 눈에 선해 주혁은 손을 내저었다.
“어어, 엄청 이쁘지. 지상 최고의 미인이다 아주.”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 잘되면…….”
“아유, 됐어. 뭘.”
씩 웃으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요한이 어쩐지 얄미워져 주혁은 슬쩍 고개를 돌려 버렸다. 평소 같으면 이것보다 더한 농담도 같이 낄낄대며 주고받았을 텐데 오늘따라 썩 기분이 좋지가 않다.
전화 때문에 그런가. 요한이 전화로 재촉하지만 않았어도 기현과 좀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바로 몇 가지 알 수 있었을지 모를 옛일은 여전히 박스 속에 차곡차곡 포장되어 있다. 기껏 받은 택배를 아직도 못 뜯어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짜증이 자꾸만 혀끝을 간지럽혔다.
불편하게 실룩거리는 입술을 틀어막기 위해 주혁은 맥주를 들이켰다. 관심 있는 여자 이야기며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나타난 진상 이야기, 향후 진로 이야기 등을 한참 주고받던 그들은 마침내 최근 이야깃거리가 슬슬 바닥을 보이자 TV로 눈을 돌렸다.
야구나 축구 중계를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경기가 없는 날인지 뉴스만 지루하게 흘러나왔다. 언제 어떻게 봐도 헛소리만 가득한 내용들이 막 끝나고 사건 사고 뉴스가 나오는 참이었다.
“……학교 폭력이 나날이 심해지는 가운데,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 김 모 군은…….”
왕따 관련 뉴스였다. 그 수법이 잔혹하고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려왔지만 그뿐이었다. 이제는 너무 잦아진 일들. 사람들은 반복되는 뉴스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늘 그렇다. 피해자에게만 안된 일.
“왕따시키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짓을 할까?”
“생각이랄 것까지 있겠어? 그냥 마음에 안 든다 이거겠지. 이상한 놈들 많잖아. 마음에 안 들면 그냥 관심을 끄면 그만인데 굳이 걸고 넘어져서 어떻게든 문제 삼는.”
하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괴롭힘에 정당한 이유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파고들다 보면 결국에 남는 것은 아주 단순한 계기, 단순한 감정뿐이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그런 점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핵심은 같다.
뉴스는 사건 보도에 이어 ‘학교 폭력, 이대로 괜찮은가?’ 같은 제목을 내건 채 미니 토론 코너를 내보내고 있었다. 피해자가 도망치듯 전학을 가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을 보여 주면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이야기하던 패널은 점점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해자가 과연 교화될 수 있느냐, 혹은 제2의 피해자가 나오는 거 아니겠느냐 하는 이야기들이 지루하게 오갔다. 누가 봐도 대책이 될 수 없을 탁상공론들만 공허하게 전파를 타고 흘렀다.
“가해자가 뉘우치는 게 가능할까요?”
“글쎄……?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 뉘우치는 놈도 있긴 있을 거고, 안 뉘우치는 놈이 태반일 거고.”
진지하게 패널의 발언을 경청하던 정운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생각해 볼 만한 문제이긴 하다. 가해자는 과연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알기나 할까. 죄책감이라는 걸 느끼고는 있을까.
애초에 죄책감을 느낄 놈이라면 그런 짓을 저지르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 더 크게 들기는 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정말로 뉘우치는 놈이 ‘절대로’ 없을 거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저 중에 잠들어 있던 최소한의 양심이 뒤늦게나마 깨어나는 놈이 정말 하나도 없을까.
아니, 어쩌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놈은 정말 없었을까. 도대체 왜 멈추지 않고 잔인하게 다른 사람을 부수는 데 열중했을까.
적당히 답을 던진 주혁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달리 제법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은 요한이었다.
“뉘우치든 안 뉘우치든 죗값은 치러야지. 저지른 게 있는데 과거 세탁하고 멀쩡하게 잘 살면 문제 있는 거야.”
“가해자가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걔도 그냥 애잖아. 걔 인생은 어쩌고.”
조용히 듣고만 있던 서찬이 슬쩍 한마디를 보탰다. 그러나 요한이 바로 인상을 그었다.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밝고 활발해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는 요한이었지만 생각은 상당히 깊었다. 그래서 때로 어떤 화제들에 대해서 그 깊은 생각이 드러날 때면 낯설다 싶을 정도로 진지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요한에게 토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른 사람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고 자기 인생 챙기는 것도 좀 웃기지 않냐?”
뭐라 대꾸하려던 서찬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요한의 말이 맞다. 피해자는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하겠지.
그러면 가해자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
현재 학교 폭력에 대한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이어서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었지만 누구도 명확한 대가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단순히 법적인 대가를 넘어서서 정말 한 사람을 희생시킨 것에 대한 속죄라면, 글쎄 무엇이 있을까.
“어떤 게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생각 안 해 봤지만.”
있는 대로 날을 세우고 진지하게 제 의견을 피력하던 요한은 주혁의 질문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수그러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끝에 요한이 그나마 내린 결론은 ‘그냥 잊고 떵떵거리면서 잘사는 건 어쨌든 아닌 것 같다.’ 정도였다. 다시 살아난 분위기는 그럭저럭 화기애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