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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다시 한번 2화
1. 재회 (2)
“나 가 봐야겠다.”
승현이 일어난 것은 문제의 뉴스가 끝난 지 겨우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직 밤은커녕 저녁 시간인데 벌써 일어나다니.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아도 보통 늦게까지 어울려 다 같이 노는 편이라 지금 이 시각에 간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무슨 일 있어?”
“과제.”
네 사람의 입에서 아,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패션디자인학과에 재학 중인 승현은 다섯 중에서 유독 어마어마한 양의 과제폭탄을 맞는 편이었다. 전공에서 주어지는 작업의 양도 엄청났지만, 학점을 채우기 위해 듣는 교양 과목까지도 신기하게 승현이 들으면 꼭 과제를 한가득 내어 주곤 했다.
덕분에 평소에 틈틈이 과제며 작업들을 해 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정승현을 찾으려면 작업실로 가 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작업실 붙박이가 되어 버렸다.
승현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나자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애초에 동아리 내에서도 유독 ‘술 잘 마실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안 마시는’ 그룹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술을 마시기 위해 만난 게 아니라 만나기 위해 술자리를 일단 잡은 거니 굳이 더 앉아 있을 필요도 없다.
넷은 가게를 나왔다. 늦가을 밤의 찬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유독 추위에 약한 요한이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추우니까 뭐 국물 있는 거 먹고 싶다.”
“어, 형. 저두요.”
“유부오뎅 먹으러 갈래?”
“완전 좋죠.”
요한의 제안에 막내 정운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체 먹는 것을 좋아하는 둘이라 이렇게 술자리가 끝난 뒤에도 야식을 먹으러 2차, 3차까지 가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하여간 야식쟁이들.”
“안 가?”
“난 됐어. 별로 배도 안 고프고.”
“서찬이 넌?”
요한이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서찬을 쳐다보았다. 요한에게 약한 서찬이었기에 과제가 심하게 많거나 시험 전날이거나 혹은 뭔가 다른 약속이 있지 않는 한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식도락 여행에 끌려다니곤 했다.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려고.”
그러나 웬일인지 서찬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 별다른 일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의외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시선들을 느꼈는지 서찬이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거 같아서.”
그제야 나머지 셋은 납득하듯 아―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요한이 얼른 손을 뻗어 서찬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없는데. 있다가 들어가면서 약 사다 줄까?”
“약국 다 닫았을걸.”
“요새 감기약 편의점에서도 팔아. 너 자취방으로 갖다 줄게.”
“에이, 됐어. 저번에 먹다 남은 거 있을 거야 아마.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고.”
서찬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몇 번이고 더 ‘진짜? 약 안 사다 줘도 돼?’ 하며 서찬을 걱정하던 요한은 결국 정운과 함께 길 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술집 앞에 남은 것은 서찬과 주혁, 둘 뿐이었다.
“너 진짜 괜찮겠어?”
“아, 괜찮다니까…… 푹 자면 나아. 어차피 내일 아침 수업도 없고.”
두 사람은 원룸이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다섯 명 중 이쪽에서 자취하는 건 서찬과 주혁 둘뿐이었다. 승현은 패디과 건물과 좀 더 가까운 후문 근처에 원룸을 얻었고 요한과 정운은 집에서 통학 생활을 했다.
그런데 정작 자취하는 놈 둘이 일찌감치 술자리를 접고 집에 들어가다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괜히 혼자 앓지 말고.”
“어…….”
서찬은 대충 주혁의 말에 답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메시지가 왔거나 뭔가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몇 번이고 잠금을 풀었다가 껐다가를 반복한다. 이상하리만치 불안해 보이는 태도였다.
“뭐 연락 올 데 있어?”
“어어…….”
“여자냐? 썸 타는 중?”
“어어…… 어?”
넋이 나간 듯 대충대충 대답하던 서찬은 화들짝 놀라며 주혁을 쳐다보았다. 빤히 보니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정신이 없네.”
진짜 그래 보인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건 그냥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러다 정말 내일 백서찬네 원룸 현관문 따고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너 아까 저녁에 늦은 거.”
“응?”
주혁은 움찔하며 서찬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아무 정신없어 보이는 애가 갑자기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는 걸까. 그 정도로 몰아갔으면 됐지 아직도 뭐가 더 남았나?
“동창…… 만났다고 했잖아.”
“어어, 그렇지. 동창. 진짜로 얘기하느라 늦었어.”
화내면 무서운 요한에 가려져서 그렇지 약속 시간 같은 거에 예민한 건 서찬도 만만치 않다. 아직도 기분이 상해 있었나? 잘못한 게 있으니 머쓱해진 주혁은 흘끔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서찬이 딱히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반쯤 정신이 빠져 있다고 해야 할까, 정서 불안을 겪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그 동창 말인데…….”
뭔가를 물으려는 듯 입을 벌리던 서찬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 뭐가?”
“아니…… 그냥, 별거 아니라고. 나 간다.”
주혁 쪽으로 휘 손을 내저은 서찬은 몇 걸음을 더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혁은 그 자리에 선 채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속도를 내어 걷던 서찬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춰 늘어선 원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흠칫 놀란 그는 몸을 돌렸다. 다시 몇 걸음을 걸어 되돌아온 서찬은 민망한 듯 주혁 쪽을 애써 외면하며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쓱 사라졌다.
대체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기에 자기 집을 지나친 것도 몰랐을까.
걱정은 되지만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너무 신경 쓰는 것도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일단은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연락이 오겠지.
주혁과 서찬의 자취방은 꽤 가까운 편이어서 여차하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 워낙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성격이라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서찬의 자취방 창문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한 주혁은 그제야 걸음을 다시 옮겼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친다. 가로등이 줄줄이 켜진 주택가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길 가로등 아래 언젠가 자신의 앞에서 걸었던 것 같은 까만 뒤통수가 떠올라 주혁은 문득 웃었다.
이기현. 몇 년 만에 만난, 어쩌면 아주 절친한 친구였을 고등학교 동창. 사라진 기억의 조각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열쇠.
분명 처음 만났던 날에도 그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던 것 같다. 까만 머리칼과 코트, 겨울바람에 얼어 발갛게 된 뺨과 정말로 빨갛던 그 목도리.
어렴풋하게나마 기억 한구석에 떠오른 모습은 오늘 다시 만난 그것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기현이라면, 어쩌면 변해 버린 것일지도 모를 자신을 옛날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주혁은 어두운 길 저편으로 걸어갔다.
* * *
기다림은 언제나 설렘을 동반한다. 그 대상이 단순히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한 택배 박스여도 그럴진대 하물며 완전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과거와의 연결 고리라면 오죽할까.
게다가 절친한 친구였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 정도니 모처럼 생긴 사건에 대한 흥미까지 더해져, 설렘은 조급함까지 함께 몰고 왔다.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일찍 나와서 기다리는데 불만은커녕 기대만이 한껏 머릿속을 채웠다.
테이블에 놓인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주혁은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이미 잘 손질하고 나왔던 머리칼을 몇 번 다시 매만진 그는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곧 저녁 7시, 기현과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 저번처럼 방해받는 일이 생길까 핸드폰을 매너 모드로 전환한 뒤 재킷 주머니 속 깊이 꼭꼭 넣어 버린 주혁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짧아진 낮의 길이만큼 밤이 일찍 다가와 거리를 덮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스며든 어둠은 밤을 밝히는 불빛들에 밀려 구석진 데로 숨었다. 땅 위의 별들이 검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짝을 지어 걸어간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남녀, 사이좋은 여고생 무리. 중년의 부부와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 어딘가를 향해 걷는다.
주혁은 컵을 살짝 기울였다. 점차 미지근해져 가는 아메리카노가 어쩐지 쓰다. 연애 따위 개나 주라지. 그다지 아쉽지도 않고, 연애하는 데 목을 매는 성향도 아니다.
그러나 겨울이 찾아오고 여럿이 제 짝을 찾아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뭔가 걸린 것처럼 불편한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꼭 아쉽거나 질투심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니다. 뭐, 만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약속이 있으니까. 오늘은 괜찮다.
기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길에서 재회한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연락처는 받았지만 곧장 만나자고 하기가 어쩐지 좀 찜찜해서 망설이고 있던 주혁에게 기현의 전화가 먼저 걸려 왔다.
과 사무실에서 조교 형과 노닥거리며 커피를 얻어 마시고 있던 주혁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허둥대는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는지 전화 너머 기현에게서는 웃음기가 가득 배어 나왔다.
-다른 건 아니구,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
“별다른 약속은 없는데…… 왜?”
그냥 가볍게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얼굴 봤으면 해서, 하는 기현의 말이 채 이해되기도 전 주혁은 ‘당연하지, 어디서 볼까?’ 하고 대답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정문 근처 카페로 약속 장소를 잡고 전화를 끊은 뒤 지금까지 내내 그 웃음기 밴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이기현, 고등학생 시절의 추억. 어쩌면 가장 절친했을 친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가 좀 더 생생하게 들려왔다. 주혁은 창에서 눈을 떼었다.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것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 기현이었다.
카키색 야상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은 여느 평범한 대학생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눈을 끌었던 빨간 목도리는 여전히 기현의 목에 곱게 감긴 채 작은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곱게 휜 눈이 살짝 위로 드러나 주혁을 향해 웃고 있을 뿐이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것처럼 가뜩이나 흰 피부가 붉은 목도리에 대비되어 창백하게 비쳤다.
“그냥 뭐, 사람 구경 좀 하고 있었어.”
“그렇구나. 사람, 진짜 많다…….”
배시시 웃는 기현을 보며 주혁은 피식 웃었다. 저 인파를 헤치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낑낑대면서 사람 틈새로 걸어 다녔을 기현을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머니클립을 들고 일어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기현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앉아 있어. 커피 내가 살게.”
기현이야 옛 친구를 만나는 정도로 생각하고 나왔겠지만 주혁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기회였다.
사고를 당하면서 기억도 잃어버리고 핸드폰도 부서져 버린 데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곧장 전학과 이사를 가게 되면서 예전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연결 고리는 그대로 죄다 끊어져 버렸다. 주혁 자신의 전화번호며 집 전화 같은 게 전부 그때쯤 바뀌면서 연락할 방법이 없어져 버린 탓이 제일 컸다.
고3 때는 3년 치 입시를 1년 만에 다 따라잡아야 된다는 상황의 압박 탓에 친구 찾기에 쓸 시간이 없었고, 대학 진학 직후에는 곧 군대를 가야 된다는 생각에 내일 죽을 것처럼 마시자는 생활 패턴이 계속 반복되었으니 찾아보지 못한 자기 책임도 있다.
어찌 되었건 아쉬운 건 주혁이니 이렇게 커피라도 사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가능한 한 길게 들려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주문하시겠어요?”
“바닐라 라떼 한 잔요.”
손님이 없어서인지 계산을 마치고 잠깐 서서 기다리자 금세 커피가 나왔다. 자리로 돌아간 주혁은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기현 앞에 내려놓았다. 기현은 얼른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쌌다. 차가운 손끝이 머그컵을 잡은 주혁의 손을 함께 감쌌다.
눈이 마주치자 기현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혁은 기현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손을 빼내며 말을 돌렸다.
“넌 더, 덥지도 않냐? 아직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고 그래.”
이상하게 얼굴로 열이 몰린다. 새삼 친구끼리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라고 이렇게 깜짝 놀라는 걸까. 백서찬이 감기 몸살로 하루 골골대는 걸 옆에서 봤더니 옮기라도 했나, 그날부터 뭐가 좀 이상한 것 같다.
얼른 손을 뻗은 주혁은 기현의 목도리를 풀어 개었다.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던 빨간 목도리는 얌전히 테이블 위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깜빡하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마시는 커피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
그러고 보니 그렇다. 기현에게 뭘 마실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로 자연스럽게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
주혁 자신은 늘 아메리카노만 마셨고, 옛 여친들은 카라멜 마키아또나 휘핑크림이 가득 올라간 카페 모카처럼 좀 더 달콤한 것들을 좋아했기에 적어도 기억이 있는 한은 따로 주문해 본 적이 없는 메뉴였다.
주혁에게 있어서 바닐라 라떼는 이기현이었다.
“이거 좋아했었나?”
“응. 늘 이것만 마셨는데…… 전에도 물어봤었잖아. 맛있냐구.”
따뜻한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기현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머그컵의 손잡이를 잡고 호호 불더니 이내 한 모금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기현의 입술에는 옅은 크림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살짝 남은 액체를 핥은 기현은 멋쩍은 듯 웃었다.
“막 심하게 달지는 않고, 근데 달달한 향기는 나서 되게 좋아. 먹어 볼래?”
기현이 잔을 내밀었다. 주혁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 컵을 당겼다. 한 모금 홀짝이니 달콤한 향기가 입 안에 퍼진다. 그러고 보면 그랬던 것도 같다.
함께 있었던 순간이 어렴풋이 코끝에 맴돌았다. 어쩌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은 그러나 아직 너무 멀었다. 주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입맛에 안 맞아?”
걱정스러운 표정이 눈에 비친다. 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기현이 자신의 이야기를 수긍해 줄지가 문제였다.
기억 상실이라는 소재가 워낙 여기저기서 상습적으로 나오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농담 정도로만 받아들일 뿐이었고, 그나마 진지하게 그걸 믿어 주는 게 친한 친구인 네 명이었다.
기현에게도 자기가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좀 불안하긴 했지만, 이야기하지 않고 버티다가 오히려 더 난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주혁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 너랑 있었던 일들이 잘 기억이 안 나.”
“응? 에이, 몇 년 지났다고 그걸 잊어버리고 그래! 주혁이 기억력 엄청 나빠졌구나!”
“그게 아니라.”
역시나 첫마디부터 바로 진지하게 받아 주길 바랐던 건 좀 무리였던 모양이다. 기현은 단순한 건망증 정도로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그랬다면 애초에 걱정할 일이 아니다.
“고2 11월 말쯤에 교통사고가 났어.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 혹시 알아?”
“……사고가 난 건 알고 있었어. 몇 번 찾아갔지만 못 만났고. 그 뒤로 너랑 연락할 수가 없었어.”
기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의식 불명이었던 때 병문안을 왔었던 모양이다. 그 뒤로는 이사며 전학, 전화번호가 바뀌는 일이 생기면서 아예 연락할 방법이 없어진 것 같다.
부모님이나 누나가 예전 학교 이야기를 꺼렸으니 어쩌면 연락처를 일부러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사고 자체가 친구들과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이 있었으니 미워서 더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난치다가 차도로 떠밀렸다거나, 축구하다 공을 쫓아 생각 없이 불쑥 달려갔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사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같이 놀았던 예전 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다시 하는 게 그리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고.
“실은 그때 다친 거 때문에 고등학교 때 기억이 거의 안 나. 집안 사정 때문에 이사하면서 전학까지 가게 돼서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길에서 봤을 때도 네 이름이 바로 안 떠올라서 애먹었어.”
절친한 친구였는데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고, 사실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이유는 내가 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자니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주혁은 복잡한 심경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 아까 바닐라 라떼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는데…… 오랜만에 너 만나서 기억이 좀 돌아온 건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동그란 눈이 도록도록 구른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기현은 이내 고개를 들고 주혁을 빤히 보았다.
“자주 만나면 기억날까?”
“응?”
“길에서 나 보고 이름 기억났잖아. 방금 바닐라 라떼도 그렇고. 그럼 만날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기억나지 않을까?”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비록 기현과 관계된 일뿐이긴 했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돌아온 것은 그를 만나고 나서 떠오른 그 두어 가지가 처음이었다. 정말 어렴풋한 그 느낌처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면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주 만나자.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괜찮겠어?”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 친구인데.”
나도 너 다시 만나서 반갑고. 기현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포기하고 있었던 기억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가장 가까웠을 친구와 다시 만났다. 어쩌면…… 사는 게 다시 즐거워질 수 있다.
“기현아, 진짜…… 진짜 고마워!”
주혁은 기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설레는 마음에 자꾸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마주 웃어 주는 기현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둠이 검게 번진 창으로 별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둘이 카페를 나온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밤이 깊어 조금 한산해진, 그러나 여전히 사람의 물결이 흐르고 있는 거리를 걸으며 주혁과 기현은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그때 네가 성대모사 했잖아. 애들 다 엄청 웃고.”
“성대모사? 아, 혹시…… 나, 지금 떨고 있니?”
오래된 드라마의 명대사를 흉내 내자 바로 기현의 웃음이 터진다. 가을의 끝자락에 초여름처럼 청명한 공기가 시원하게 흩어졌다.
온 눈을 예쁘게 휘는 그 웃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웃는 사람도 세상에 있었지. 그래, 그게 이기현이었다. 웃는 얼굴이 한없이 좋아서 늘 바라보았던, 그러나 쉽게 보여 주지는 않았던 소년.
“맞아, 그거! 그거랑 그 뒤에 궁예도 했었어.”
“짐이 관심법으로 보았느니라.”
다시 흉내를 내 주니 또 한 번 웃음이 뒤를 따른다. 기현이 이것저것 이야기해 준 덕분에 처음 1학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들을 몇 가지 알 수 있었다.
생생하게 문득 기억이 떠오른 부분도, 그저 남의 일인 것만 같은 것도 있었지만 기현의 입으로 듣는 자신의 옛일이 좋았다.
다른 1학년 교실과는 달리 3학년들이 있는 구교사에 뚝 떨어져 있어 매점에 가기도 힘들었던 교실. 예체능 계열로 진학할 예정이어서 야자나 보충 대신 정규 수업을 마치면 학원으로 향했던 두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반장 역할을 맡았던, 1학년 12반 반장 윤주혁.
“내가 진짜 반장이었다고?”
“응, 애들이 다 만장일치로 뽑은 거였어. 반장감은 너밖에 없다고.”
기억도 안 나는 일인데 이렇게 칭찬을 들으니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기현이 말해 주는 자신은 꽤 듬직하고 그러면서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는, 말하자면 반의 핵심이었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
“아…… 부끄러운데.”
“그래서 나도 첨에 너보고 반장이라고 부르고 그랬는데. 그거 알아? 그때 내 생일 챙겨 준 사람, 학교에서 너밖에 없었어.”
“어? 정말?”
“학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서 아무도 몰랐거든. 근데 네가 그때, 출석부 보고 알았다면서 축하한다고 해 줘서. 진짜 고마웠어.”
전교에서 유일하게 생일을 축하해 줬단 말인가.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굉장히 절친한 사이였던 모양인데 왜 이런 게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걸까. 조금 답답하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기현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주혁이 입을 열었다.
“기현아. 내가…….”
“주혁이 형!”
누군가가 뒤에서 주혁의 어깨를 짚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그는 아 하고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동아리 후배이자 절친한 동생 민정운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길거리에서 혼자 뭐 해요? 누구 기다려요?”
“혼자는 누가 혼자라 그래. 친구랑 있었어.”
“친구요?”
“어. 인사해. 여기 내 친구…… 어?”
막 정운에게 기현을 소개시켜 주려던 주혁은 옆을 돌아본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서 있던 기현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1. 재회 (2)
“나 가 봐야겠다.”
승현이 일어난 것은 문제의 뉴스가 끝난 지 겨우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직 밤은커녕 저녁 시간인데 벌써 일어나다니.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아도 보통 늦게까지 어울려 다 같이 노는 편이라 지금 이 시각에 간다는 것은 좀 의외였다.
“무슨 일 있어?”
“과제.”
네 사람의 입에서 아,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패션디자인학과에 재학 중인 승현은 다섯 중에서 유독 어마어마한 양의 과제폭탄을 맞는 편이었다. 전공에서 주어지는 작업의 양도 엄청났지만, 학점을 채우기 위해 듣는 교양 과목까지도 신기하게 승현이 들으면 꼭 과제를 한가득 내어 주곤 했다.
덕분에 평소에 틈틈이 과제며 작업들을 해 두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정승현을 찾으려면 작업실로 가 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작업실 붙박이가 되어 버렸다.
승현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나자 술자리도 자연스럽게 파장 분위기로 접어들었다.
애초에 동아리 내에서도 유독 ‘술 잘 마실 것 같은데 이상하게 안 마시는’ 그룹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술을 마시기 위해 만난 게 아니라 만나기 위해 술자리를 일단 잡은 거니 굳이 더 앉아 있을 필요도 없다.
넷은 가게를 나왔다. 늦가을 밤의 찬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유독 추위에 약한 요한이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며 부르르 떨었다.
“추우니까 뭐 국물 있는 거 먹고 싶다.”
“어, 형. 저두요.”
“유부오뎅 먹으러 갈래?”
“완전 좋죠.”
요한의 제안에 막내 정운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체 먹는 것을 좋아하는 둘이라 이렇게 술자리가 끝난 뒤에도 야식을 먹으러 2차, 3차까지 가는 일이 종종 있곤 했다.
“하여간 야식쟁이들.”
“안 가?”
“난 됐어. 별로 배도 안 고프고.”
“서찬이 넌?”
요한이 한껏 불쌍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서찬을 쳐다보았다. 요한에게 약한 서찬이었기에 과제가 심하게 많거나 시험 전날이거나 혹은 뭔가 다른 약속이 있지 않는 한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식도락 여행에 끌려다니곤 했다.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려고.”
그러나 웬일인지 서찬은 고개를 저었다. 내일 별다른 일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의외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시선들을 느꼈는지 서찬이 얼른 한마디를 덧붙였다.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거 같아서.”
그제야 나머지 셋은 납득하듯 아―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요한이 얼른 손을 뻗어 서찬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열은 없는데. 있다가 들어가면서 약 사다 줄까?”
“약국 다 닫았을걸.”
“요새 감기약 편의점에서도 팔아. 너 자취방으로 갖다 줄게.”
“에이, 됐어. 저번에 먹다 남은 거 있을 거야 아마.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고.”
서찬은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몇 번이고 더 ‘진짜? 약 안 사다 줘도 돼?’ 하며 서찬을 걱정하던 요한은 결국 정운과 함께 길 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술집 앞에 남은 것은 서찬과 주혁, 둘 뿐이었다.
“너 진짜 괜찮겠어?”
“아, 괜찮다니까…… 푹 자면 나아. 어차피 내일 아침 수업도 없고.”
두 사람은 원룸이 빽빽이 들어선 주택가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다섯 명 중 이쪽에서 자취하는 건 서찬과 주혁 둘뿐이었다. 승현은 패디과 건물과 좀 더 가까운 후문 근처에 원룸을 얻었고 요한과 정운은 집에서 통학 생활을 했다.
그런데 정작 자취하는 놈 둘이 일찌감치 술자리를 접고 집에 들어가다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괜히 혼자 앓지 말고.”
“어…….”
서찬은 대충 주혁의 말에 답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메시지가 왔거나 뭔가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몇 번이고 잠금을 풀었다가 껐다가를 반복한다. 이상하리만치 불안해 보이는 태도였다.
“뭐 연락 올 데 있어?”
“어어…….”
“여자냐? 썸 타는 중?”
“어어…… 어?”
넋이 나간 듯 대충대충 대답하던 서찬은 화들짝 놀라며 주혁을 쳐다보았다. 빤히 보니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좀 정신이 없네.”
진짜 그래 보인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건 그냥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러다 정말 내일 백서찬네 원룸 현관문 따고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너 아까 저녁에 늦은 거.”
“응?”
주혁은 움찔하며 서찬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아무 정신없어 보이는 애가 갑자기 그 이야기는 또 왜 꺼내는 걸까. 그 정도로 몰아갔으면 됐지 아직도 뭐가 더 남았나?
“동창…… 만났다고 했잖아.”
“어어, 그렇지. 동창. 진짜로 얘기하느라 늦었어.”
화내면 무서운 요한에 가려져서 그렇지 약속 시간 같은 거에 예민한 건 서찬도 만만치 않다. 아직도 기분이 상해 있었나? 잘못한 게 있으니 머쓱해진 주혁은 흘끔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서찬이 딱히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 오히려 반쯤 정신이 빠져 있다고 해야 할까, 정서 불안을 겪는 사람 같다고 해야 할까.
“그 동창 말인데…….”
뭔가를 물으려는 듯 입을 벌리던 서찬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 뭐가?”
“아니…… 그냥, 별거 아니라고. 나 간다.”
주혁 쪽으로 휘 손을 내저은 서찬은 몇 걸음을 더 빠르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혁은 그 자리에 선 채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속도를 내어 걷던 서찬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춰 늘어선 원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흠칫 놀란 그는 몸을 돌렸다. 다시 몇 걸음을 걸어 되돌아온 서찬은 민망한 듯 주혁 쪽을 애써 외면하며 공동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쓱 사라졌다.
대체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기에 자기 집을 지나친 것도 몰랐을까.
걱정은 되지만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너무 신경 쓰는 것도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일단은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연락이 오겠지.
주혁과 서찬의 자취방은 꽤 가까운 편이어서 여차하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 워낙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는 성격이라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서찬의 자취방 창문에 불이 켜지는 것까지 확인한 주혁은 그제야 걸음을 다시 옮겼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친다. 가로등이 줄줄이 켜진 주택가 길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길 가로등 아래 언젠가 자신의 앞에서 걸었던 것 같은 까만 뒤통수가 떠올라 주혁은 문득 웃었다.
이기현. 몇 년 만에 만난, 어쩌면 아주 절친한 친구였을 고등학교 동창. 사라진 기억의 조각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열쇠.
분명 처음 만났던 날에도 그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던 것 같다. 까만 머리칼과 코트, 겨울바람에 얼어 발갛게 된 뺨과 정말로 빨갛던 그 목도리.
어렴풋하게나마 기억 한구석에 떠오른 모습은 오늘 다시 만난 그것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기현이라면, 어쩌면 변해 버린 것일지도 모를 자신을 옛날로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설렘을 느끼며, 주혁은 어두운 길 저편으로 걸어갔다.
* * *
기다림은 언제나 설렘을 동반한다. 그 대상이 단순히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한 택배 박스여도 그럴진대 하물며 완전히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과거와의 연결 고리라면 오죽할까.
게다가 절친한 친구였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 정도니 모처럼 생긴 사건에 대한 흥미까지 더해져, 설렘은 조급함까지 함께 몰고 왔다.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일찍 나와서 기다리는데 불만은커녕 기대만이 한껏 머릿속을 채웠다.
테이블에 놓인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주혁은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이미 잘 손질하고 나왔던 머리칼을 몇 번 다시 매만진 그는 시각을 확인했다. 이제 곧 저녁 7시, 기현과 약속한 시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혹 저번처럼 방해받는 일이 생길까 핸드폰을 매너 모드로 전환한 뒤 재킷 주머니 속 깊이 꼭꼭 넣어 버린 주혁은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짧아진 낮의 길이만큼 밤이 일찍 다가와 거리를 덮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스며든 어둠은 밤을 밝히는 불빛들에 밀려 구석진 데로 숨었다. 땅 위의 별들이 검은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가운데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짝을 지어 걸어간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남녀, 사이좋은 여고생 무리. 중년의 부부와 어린아이까지. 모두가 누군가와 함께 어딘가를 향해 걷는다.
주혁은 컵을 살짝 기울였다. 점차 미지근해져 가는 아메리카노가 어쩐지 쓰다. 연애 따위 개나 주라지. 그다지 아쉽지도 않고, 연애하는 데 목을 매는 성향도 아니다.
그러나 겨울이 찾아오고 여럿이 제 짝을 찾아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뭔가 걸린 것처럼 불편한 건 어쩔 도리가 없다. 꼭 아쉽거나 질투심이 생겨서 그런 건 아니다. 뭐, 만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약속이 있으니까. 오늘은 괜찮다.
기현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길에서 재회한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연락처는 받았지만 곧장 만나자고 하기가 어쩐지 좀 찜찜해서 망설이고 있던 주혁에게 기현의 전화가 먼저 걸려 왔다.
과 사무실에서 조교 형과 노닥거리며 커피를 얻어 마시고 있던 주혁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허둥대는 목소리가 그대로 전해졌는지 전화 너머 기현에게서는 웃음기가 가득 배어 나왔다.
-다른 건 아니구,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
“별다른 약속은 없는데…… 왜?”
그냥 가볍게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얼굴 봤으면 해서, 하는 기현의 말이 채 이해되기도 전 주혁은 ‘당연하지, 어디서 볼까?’ 하고 대답하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정문 근처 카페로 약속 장소를 잡고 전화를 끊은 뒤 지금까지 내내 그 웃음기 밴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이기현, 고등학생 시절의 추억. 어쩌면 가장 절친했을 친구.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가 좀 더 생생하게 들려왔다. 주혁은 창에서 눈을 떼었다.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것은 바로 그 목소리의 주인, 기현이었다.
카키색 야상에 청바지를 입은 모습은 여느 평범한 대학생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눈을 끌었던 빨간 목도리는 여전히 기현의 목에 곱게 감긴 채 작은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었다. 곱게 휜 눈이 살짝 위로 드러나 주혁을 향해 웃고 있을 뿐이었다.
햇빛을 받지 못한 것처럼 가뜩이나 흰 피부가 붉은 목도리에 대비되어 창백하게 비쳤다.
“그냥 뭐, 사람 구경 좀 하고 있었어.”
“그렇구나. 사람, 진짜 많다…….”
배시시 웃는 기현을 보며 주혁은 피식 웃었다. 저 인파를 헤치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낑낑대면서 사람 틈새로 걸어 다녔을 기현을 생각하니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머니클립을 들고 일어난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는 기현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앉아 있어. 커피 내가 살게.”
기현이야 옛 친구를 만나는 정도로 생각하고 나왔겠지만 주혁 입장에서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기회였다.
사고를 당하면서 기억도 잃어버리고 핸드폰도 부서져 버린 데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곧장 전학과 이사를 가게 되면서 예전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연결 고리는 그대로 죄다 끊어져 버렸다. 주혁 자신의 전화번호며 집 전화 같은 게 전부 그때쯤 바뀌면서 연락할 방법이 없어져 버린 탓이 제일 컸다.
고3 때는 3년 치 입시를 1년 만에 다 따라잡아야 된다는 상황의 압박 탓에 친구 찾기에 쓸 시간이 없었고, 대학 진학 직후에는 곧 군대를 가야 된다는 생각에 내일 죽을 것처럼 마시자는 생활 패턴이 계속 반복되었으니 찾아보지 못한 자기 책임도 있다.
어찌 되었건 아쉬운 건 주혁이니 이렇게 커피라도 사면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가능한 한 길게 들려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주문하시겠어요?”
“바닐라 라떼 한 잔요.”
손님이 없어서인지 계산을 마치고 잠깐 서서 기다리자 금세 커피가 나왔다. 자리로 돌아간 주혁은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기현 앞에 내려놓았다. 기현은 얼른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쌌다. 차가운 손끝이 머그컵을 잡은 주혁의 손을 함께 감쌌다.
눈이 마주치자 기현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혁은 기현이 기분 나빠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손을 빼내며 말을 돌렸다.
“넌 더, 덥지도 않냐? 아직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고 그래.”
이상하게 얼굴로 열이 몰린다. 새삼 친구끼리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라고 이렇게 깜짝 놀라는 걸까. 백서찬이 감기 몸살로 하루 골골대는 걸 옆에서 봤더니 옮기라도 했나, 그날부터 뭐가 좀 이상한 것 같다.
얼른 손을 뻗은 주혁은 기현의 목도리를 풀어 개었다.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던 빨간 목도리는 얌전히 테이블 위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깜빡하고 있었어. 그런데 내가 마시는 커피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
그러고 보니 그렇다. 기현에게 뭘 마실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로 자연스럽게 바닐라 라떼를 주문했다.
주혁 자신은 늘 아메리카노만 마셨고, 옛 여친들은 카라멜 마키아또나 휘핑크림이 가득 올라간 카페 모카처럼 좀 더 달콤한 것들을 좋아했기에 적어도 기억이 있는 한은 따로 주문해 본 적이 없는 메뉴였다.
주혁에게 있어서 바닐라 라떼는 이기현이었다.
“이거 좋아했었나?”
“응. 늘 이것만 마셨는데…… 전에도 물어봤었잖아. 맛있냐구.”
따뜻한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던 기현은 오른손으로 조심스럽게 머그컵의 손잡이를 잡고 호호 불더니 이내 한 모금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기현의 입술에는 옅은 크림색 액체가 묻어 있었다. 살짝 남은 액체를 핥은 기현은 멋쩍은 듯 웃었다.
“막 심하게 달지는 않고, 근데 달달한 향기는 나서 되게 좋아. 먹어 볼래?”
기현이 잔을 내밀었다. 주혁은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 컵을 당겼다. 한 모금 홀짝이니 달콤한 향기가 입 안에 퍼진다. 그러고 보면 그랬던 것도 같다.
함께 있었던 순간이 어렴풋이 코끝에 맴돌았다. 어쩌면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은 그러나 아직 너무 멀었다. 주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입맛에 안 맞아?”
걱정스러운 표정이 눈에 비친다. 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기현이 자신의 이야기를 수긍해 줄지가 문제였다.
기억 상실이라는 소재가 워낙 여기저기서 상습적으로 나오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농담 정도로만 받아들일 뿐이었고, 그나마 진지하게 그걸 믿어 주는 게 친한 친구인 네 명이었다.
기현에게도 자기가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싶어 좀 불안하긴 했지만, 이야기하지 않고 버티다가 오히려 더 난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주혁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 너랑 있었던 일들이 잘 기억이 안 나.”
“응? 에이, 몇 년 지났다고 그걸 잊어버리고 그래! 주혁이 기억력 엄청 나빠졌구나!”
“그게 아니라.”
역시나 첫마디부터 바로 진지하게 받아 주길 바랐던 건 좀 무리였던 모양이다. 기현은 단순한 건망증 정도로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그랬다면 애초에 걱정할 일이 아니다.
“고2 11월 말쯤에 교통사고가 났어.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 혹시 알아?”
“……사고가 난 건 알고 있었어. 몇 번 찾아갔지만 못 만났고. 그 뒤로 너랑 연락할 수가 없었어.”
기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의식 불명이었던 때 병문안을 왔었던 모양이다. 그 뒤로는 이사며 전학, 전화번호가 바뀌는 일이 생기면서 아예 연락할 방법이 없어진 것 같다.
부모님이나 누나가 예전 학교 이야기를 꺼렸으니 어쩌면 연락처를 일부러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지만, 사고 자체가 친구들과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는 말이 있었으니 미워서 더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장난치다가 차도로 떠밀렸다거나, 축구하다 공을 쫓아 생각 없이 불쑥 달려갔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사고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같이 놀았던 예전 학교 친구들과 연락을 다시 하는 게 그리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고.
“실은 그때 다친 거 때문에 고등학교 때 기억이 거의 안 나. 집안 사정 때문에 이사하면서 전학까지 가게 돼서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길에서 봤을 때도 네 이름이 바로 안 떠올라서 애먹었어.”
절친한 친구였는데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고, 사실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이유는 내가 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자니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주혁은 복잡한 심경에 마른세수를 했다.
“그럼 아까 바닐라 라떼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는데…… 오랜만에 너 만나서 기억이 좀 돌아온 건지.”
뭔가를 생각하는 듯 동그란 눈이 도록도록 구른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몇 번 눈을 깜빡이던 기현은 이내 고개를 들고 주혁을 빤히 보았다.
“자주 만나면 기억날까?”
“응?”
“길에서 나 보고 이름 기억났잖아. 방금 바닐라 라떼도 그렇고. 그럼 만날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기억나지 않을까?”
확실히 그럴지도 몰랐다. 비록 기현과 관계된 일뿐이긴 했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 돌아온 것은 그를 만나고 나서 떠오른 그 두어 가지가 처음이었다. 정말 어렴풋한 그 느낌처럼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면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주 만나자. 기억날지도 모르잖아.”
“괜찮겠어?”
“괜찮고 말고가 어딨어, 친구인데.”
나도 너 다시 만나서 반갑고. 기현은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포기하고 있었던 기억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가장 가까웠을 친구와 다시 만났다. 어쩌면…… 사는 게 다시 즐거워질 수 있다.
“기현아, 진짜…… 진짜 고마워!”
주혁은 기현의 손을 꽉 붙잡았다.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설레는 마음에 자꾸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마주 웃어 주는 기현이 너무나 고마웠다.
어둠이 검게 번진 창으로 별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둘이 카페를 나온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밤이 깊어 조금 한산해진, 그러나 여전히 사람의 물결이 흐르고 있는 거리를 걸으며 주혁과 기현은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서 그때 네가 성대모사 했잖아. 애들 다 엄청 웃고.”
“성대모사? 아, 혹시…… 나, 지금 떨고 있니?”
오래된 드라마의 명대사를 흉내 내자 바로 기현의 웃음이 터진다. 가을의 끝자락에 초여름처럼 청명한 공기가 시원하게 흩어졌다.
온 눈을 예쁘게 휘는 그 웃음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렇게 웃는 사람도 세상에 있었지. 그래, 그게 이기현이었다. 웃는 얼굴이 한없이 좋아서 늘 바라보았던, 그러나 쉽게 보여 주지는 않았던 소년.
“맞아, 그거! 그거랑 그 뒤에 궁예도 했었어.”
“짐이 관심법으로 보았느니라.”
다시 흉내를 내 주니 또 한 번 웃음이 뒤를 따른다. 기현이 이것저것 이야기해 준 덕분에 처음 1학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들을 몇 가지 알 수 있었다.
생생하게 문득 기억이 떠오른 부분도, 그저 남의 일인 것만 같은 것도 있었지만 기현의 입으로 듣는 자신의 옛일이 좋았다.
다른 1학년 교실과는 달리 3학년들이 있는 구교사에 뚝 떨어져 있어 매점에 가기도 힘들었던 교실. 예체능 계열로 진학할 예정이어서 야자나 보충 대신 정규 수업을 마치면 학원으로 향했던 두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반장 역할을 맡았던, 1학년 12반 반장 윤주혁.
“내가 진짜 반장이었다고?”
“응, 애들이 다 만장일치로 뽑은 거였어. 반장감은 너밖에 없다고.”
기억도 안 나는 일인데 이렇게 칭찬을 들으니 조금 쑥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기현이 말해 주는 자신은 꽤 듬직하고 그러면서도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도맡는, 말하자면 반의 핵심이었다.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
“아…… 부끄러운데.”
“그래서 나도 첨에 너보고 반장이라고 부르고 그랬는데. 그거 알아? 그때 내 생일 챙겨 준 사람, 학교에서 너밖에 없었어.”
“어? 정말?”
“학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서 아무도 몰랐거든. 근데 네가 그때, 출석부 보고 알았다면서 축하한다고 해 줘서. 진짜 고마웠어.”
전교에서 유일하게 생일을 축하해 줬단 말인가.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굉장히 절친한 사이였던 모양인데 왜 이런 게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걸까. 조금 답답하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기현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주혁이 입을 열었다.
“기현아. 내가…….”
“주혁이 형!”
누군가가 뒤에서 주혁의 어깨를 짚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그는 아 하고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동아리 후배이자 절친한 동생 민정운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길거리에서 혼자 뭐 해요? 누구 기다려요?”
“혼자는 누가 혼자라 그래. 친구랑 있었어.”
“친구요?”
“어. 인사해. 여기 내 친구…… 어?”
막 정운에게 기현을 소개시켜 주려던 주혁은 옆을 돌아본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 서 있던 기현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