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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다시 한번 3화
1. 재회 (3)
“거기 아무도 없는데요. 형, 설마…….”
“아니,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애가 왜 하필 지금…… 야, 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줄래? 어? 진짜 친구랑 있었던 거 맞거든?”
“형 친구라는 게 그, 눈으로는 안 보이고 마음으로만 보이는 그런 친구예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게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못해 가상의 친구라도 만들어 낸 사람을 보는 눈빛이 분명하다. 물론 반은 농담 삼아 하는 소리니 그리 심각할 건 없지만, 그래도 찜찜했다. 형의 위엄이 사정없이 실추되는 느낌이라니.
“있어 봐. 전화해서 부를 테니까.”
“에이, 뭐 하러 그래요. 놔두세요.”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흐른다. 쩝, 입맛을 다시며 주혁은 거의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보니까 잠깐 한눈판 사이 인파에 휩쓸려 간 모양인데, 가다가 일행이랑 떨어졌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겠지. 정운이 본 것처럼, 이번에는 진짜로 혼자 서서 기다려야 되게 생겼다.
“애가 길을 잃어버렸나 본데.”
“여기서 길을 잃어요? 몇 살인데?”
“친구라니까. 여기 자주 안 나와서 그래.”
카페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같다.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학교를 안 다니고 있다고, 이 근처는 자주 안 나오는데 그날 우연히 일이 있어 나왔다가 주혁과 마주친 거였다고 기현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니 지리를 잘 모를 수밖에. 젊은 사람들 모이는 곳이 거기서 거기라지만, 낯선 곳이라면 좀 헤맬 수도 있는 거다.
“애 돌아올 때까지 좀 있다 가라. 심심해.”
“집에 가야 되는데. 멀리 갔다 와서 피곤해요, 저. 사물함에 책만 안 두고 갔어도 학교로 안 돌아왔을 건데.”
꿍얼대면서도 얌전히 옆에 서서 말 상대를 해 준다. 정운은 늘 예의 바른 막내였다.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온 덕분에 남자라기보다 소년에 가까운 성향을 보여 가끔 응석을 부리긴 하지만 그 정도는 그냥 귀여운 애교인 거고.
“어딜 갔다 왔는데?”
“아는 분한테 좀 다녀왔어요. 이달 말쯤 기일인데, 그때는 못 갈 것 같아서.”
그제야 정운의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 정장에 코트를 신경 써서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나이가 어리니 아는 분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은사쯤 되는 모양이다. 어쩐지 눈이 좀 빨간 것이, 가서 꽤 울고 오기라도 한 것 같다.
“많이 좋아하던 사람인가 보네.”
“네?”
“아니, 눈이 빨개서.”
정운은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른 눈가를 닦았다. 애는 애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걸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걸 들켜 부끄러워서 허둥대는 것도.
주혁은 얼마 전 친척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딱히 큰 감흥이 없었던 자신을 돌아보았다. 꽤 메마르긴 한 모양이다.
“운 거 알면 엄마가 속상해하실 건데…… 티 나요?”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집에 가자마자 바로 씻으면 되겠는데?”
그 말에 정운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는 뺨을 가볍게 긁적이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거기 다녀오면 좀 그래요. 부모님이 걱정되니까 가지 말라고도 하시고, 그래서 최대한 티 안 내려고 하는데.”
“오래 됐는데도 그래?”
“그때가 2006년도였나? 그랬으니까 올해 한 7년 됐죠.”
손가락으로 해를 세며 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7년이라면 초등학교 6학년 꼬마가 대학생이 될 만큼의 시간이다. 꽤 지났는데 아직도 생각하면 슬프고 안타깝다니, 감수성이 정말 풍부하긴 하다.
하긴 그래서 유독 연애를 한 뒤에도 상처를 많이 받고, 빠르고 신나는 노래보다 조용하고 다정한 노래를 더 잘 부르는 건지도 몰랐다.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정운이 주로 부르는 노래는 발라드 계열이었다.
“그 정도면 괜찮아질 때도 됐는데.”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안 그렇더라고요. 보통 때는 그냥 그렇게 잊어버리고 사는데, 이맘때쯤만 되면 꼭 이래요. 확 추워져서 더 그런가 싶기도 하고. 형 그거 알아요? 날씨가 사람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대요. 특히나 올해는 여름이 더워서 겨울엔 사상 최악의 한파가 몰려올 거라고 하는데, 그게…….”
“야, 야, 됐어. 너 얼른 집에 들어가 봐라.”
주혁은 손사래를 치며 정운의 말을 멈췄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어려운 이야기를 한껏 쏟아 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도 사실 그저 뭐든 말하는 걸 멈추고 싶지 않아서 계속 이어 내는 것일 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런 이야기를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쏟아 낼 애도 아니고.
언젠가 정말 힘들어서 도움을 요청할 때 조용히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들어 줄 수는 있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에이…… 형이 붙잡아 놔서 서 있었잖아요.”
“어휴, 진짜! 혼날래?”
손을 치켜들며 한 대 치는 시늉을 하니 어이쿠, 하며 뒤로 휙 물러난다. 방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또 울 것 같은 표정이던 정운은 어느새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요, 형.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정운은 지하철역 쪽으로 성큼성큼 사라져 갔다.
“나 참…….”
“누구야?”
손끝에 차가운 것이 확 닿았다. 흠칫 놀라 몸을 돌린 주혁은 자신의 손에 닿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현이 내민 바나나 단지우유가 주혁의 손을 톡, 톡 치고 있었다.
“이기현!”
“어어, 나 맞아. 방금 누구야? 친구?”
방싯방싯 웃는 얼굴을 보니 화도 짜증도 낼 수가 없어 주혁은 입을 닫았다. 얘는 그 잠깐 사이 사라진 덕분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뭐 그런 생각은 있을까?
“아는 동생이야. 너 어디 갔었어?”
“응?”
우유에 톡 꽂은 빨대를 문 기현은 한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처럼 사라진 이유는 고작 이 우유 한 개를 사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바나나 우유 사려고?”
“응.”
주혁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는 대신 기현이 내민 우유를 받았다. 빨대를 꽂는 대신 윗부분 껍질을 벗기고 입을 댄다. 이쪽이 훨씬 마시기가 편하다. 기현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빨대를 쪽쪽 빠는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 자신은 그런 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좋냐? 어휴…… 어디 갈 거면 말을 좀 하고 가. 놀랐잖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기현은 몸을 살짝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여간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참 잘 들어맞는다.
천천히 기현의 뒤를 따라 걸으며 주혁은 기현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칼과 대비되는 빨간 목도리가 기현의 목에 매달린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차가운 늦가을 공기를 맞는 손끝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그때 바람이 가로수를 흔들었다. 추위에 노랗게 질린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곳곳에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비명을 지르던 은행잎 중 하나가 동그란 머리 위에 팔랑, 내려앉았다.
“낙엽 붙었어.”
바스락.
기현의 걸음이 멈췄다. 떼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 모습에 주혁은 기현에게 성큼 다가섰다. 손을 뻗어 머리에 붙은 낙엽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자, 기현은 고개를 들었다.
낙엽 비를 떨어뜨리는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기현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유독 길었다. 가로등 불빛이 기현을 타고 부서져 흘러내렸다. 하얀 얼굴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미안, 꼴사납지.”
길게 늘어섰던 찰나가 끊겼다. 기현은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 처음 친해졌을 때도 이랬다.
기현은 흔히 보는 남자아이들과 달리 묘한 조용함을 지닌 아이였다. 어느 순간 문득 말이 없어 바라보면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고, 날씨가 좋다며 문자를 보내는 소녀 감성을 보이기도 하는 그런.
수줍음을 은근히 타서 주말에 같이 옷 사러 가자는 이야기도 선뜻 꺼내질 못하던 아이. 하지만 자신과 전날 축구 경기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취향도 제법 비슷했고 같이 운동을 하기도 했던, 마냥 조용하지만은 않았던 아이.
“주혁아.”
“응?”
물끄러미 기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주혁은 기현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손에 든 바나나 우유를 만지작거리던 기현이 우물거렸다.
“나는 콜라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 커피나 콜라보다는 우유가 좋아.”
“흐음.”
“그리고 흰 우유보다는 바나나 우유나 딸기 우유가 더 좋은 거 같아.”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주혁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긴,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불쑥 편의점으로 사라졌겠지.
“내 생각에도 콜라보다는 바나나 우유가 너랑 더 맞는 거 같아.”
“그치?”
주혁이 동의하자 기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현이 바나나 우유를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모습에 주혁은 은근한 뿌듯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흙 속에 파묻힌 뭔가를 발굴하는 것처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둘은 어느새 갈림길에 도착했다. 한쪽은 주혁이 사는 원룸 쪽으로 가는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길이 제법 어두웠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응? 아니야,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주혁이 너도 들어가야지.”
기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여자애도 아닌데 데려다주겠다고 우기는 것도 좀 우습다. 그래 그럼, 하고 돌아서려는데 기현이 주혁을 불러 세웠다.
“저기 주혁아. 다음번에 보는 거 말인데.”
“응, 왜?”
“내가 일이 좀 있어서 언제 시간이 날지 정확하게 잘 몰라. 낮에는 좀 곤란하고, 아마 저녁때 될 거 같긴 한데…… 내가 전화해도 될까?”
“당연하지. 너 스케줄 정해지면 전화해. 그때 결정하면 되지, 뭐.”
“다행이다. 안 된다 그러면 어쩌나 하고 좀 걱정했어.”
“별게 다 걱정이네요, 이기현 씨.”
혹시 기분 상하지 않을까 걱정한 모양이다. 심각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펴졌다. 밝게 웃는 기현의 모습이 고마웠다. 사실은 자신 쪽에서 만나 달라고 부탁해야 할 입장인데 오히려 먼저 나서서 다음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그렇다.
기억에 없을 정도로 몇 년을 잊고 살았는데 다시 만나서 몇 마디 주고받으니 금세 편안해지는 걸 보면, 분명 주혁의 희미한 기억대로 절친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챙겨 주는 것일 테고.
“그럼 다음에 보자.”
“응, 연락할게!”
기현은 주혁에게 손을 흔들며 어두운 길 쪽으로 총총 사라졌다. 갈림길에 서 있던 주혁은 기현의 모습이 완전히 길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자취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우 두 번의 만남으로 많은 것이 떠올랐다.
절친한 친구를 되찾았다는 생각에 이미 고등학교 시절 기억을 전부 찾은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손에 든 빈 바나나 우유갑을 내려다보던 주혁은 이내 피식 웃었다. 서늘한 밤공기 속으로 입김이 하얗게 흘렀다.
* * *
겨울이 매섭게 내려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다. 세찬 바람에 떠밀려 곧 쫓겨날 듯 불안했지만 그래도 가을은 간신히 문턱에 발을 걸친 채 겨울과 싸우고 있었다.
낮과 밤의 기온 차는 빠른 속도로 좁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큰 폭이었다. 아직은 환절기다. 두꺼운 패딩 점퍼를 꺼내 입기에는 낮 시간이 조금 덥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밤에는 차가운 바람이 조금씩 뺨을 얼리기 시작하는 그런 날씨.
수업이 없는 오후에 모처럼 신나게 과 대항 풋살을 즐겼던 주혁은, 갑작스럽게 도착한 문자 한 통 덕분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녁에 만나자는 기현의 연락이었다.
자취방까지 가서 옷을 갈아입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이, 축구부 샤워실에서 급하게 씻은 주혁은 아침에 입고 나온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운동할 때는 어차피 운동복을 따로 입었으니 땀에 젖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딱히 신경 써서 입은 게 아닌 귀찮아서 대충 걸쳐 입은 거라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츄리닝 바지에 패딩 점퍼라니, 누가 보면 체대 입시 준비하는 고등학생으로 볼 복장이다.
물론 이미 주혁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군대도 다녀와서 아저씨 소리를 들을 복학생 나이였지만. 그나마 추운 밤 기온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필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탓에 옷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초라해 보이면 어쩌나.
같은 성별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거니 사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성의 없어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주혁은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리 좀 늦는다고 하고 갈아입고 올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자취방에 다녀올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끝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
기현이었다. 오는 중이라 마음이 급한 것일까. 굳이 이렇게 꼬박꼬박 문자를 보내지 않아도 몇 분 늦는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릴 텐데. 주혁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생각과 달리 이리저리 서성이는 주혁의 앞을 한 무리의 여고생 떼가 지나갔다. 뭘 먹을까 하고 떠들어 대다 이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곱디 고운 여학생들이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 또래의 아이들.
흘끔 주혁을 쳐다보고는 저들끼리 또 뭐라 소곤대기 시작한다. 문득 그 틈으로 훈남 어쩌고 하는 단어가 들렸다. 초조하던 마음이 단번에 붕 뜬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어도 역시 난리가 난단 말이지.
흐뭇함에 씩 웃고 있는 주혁의 팔을 누군가 뒤에서 톡톡 쳤다. 주혁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주, 주혁아! 미안, 많이 기다렸어?”
갑자기 돌아봐서 깜짝 놀란 건지, 그러잖아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뜬 기현이 움찔했다. 주혁은 얼굴 가득 자꾸 걸리는 웃음을 지우려고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별로.”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진짜 미안.”
그리 많이 늦은 것도 아닌데 엄청나게 미안해한다. 미안해하기 순위를 매길 수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미안해하는 모습 랭킹 상위권에 들 수 있을 정도다. 사과받는 쪽이 더 미안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낯이 간지럽다.
“괜찮아.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같이 먹자.”
그러자 걱정으로 가득하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진다. 웃는 얼굴 하나만으로 불을 켜 놓은 것처럼 주변까지 빛난다.
그래, 이게 이기현이었다.
이 웃는 얼굴을 그렇게 보고 싶어 했었던 고등학생 시절의 자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기현이 웃으면 덩달아 자신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주혁아, 뭐 먹을까?”
“글쎄. 뭐 먹고 싶은데?”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메뉴를 정할 때 제일 난감한 대답이 기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다. 기현은 좀 우유부단한 편이어서 둘이 뭔가를 하면 결정은 자신이 내리곤 했다.
그래도 그런 면이 싫지는 않았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을 얌전히 잘 따라 주는 기현. 무엇을 먹는 것도, 어딘가 가는 것도 늘 먼저 시작하는 것은 주혁이었고 기현은 싫은 소리 없이 자신과 함께했다.
“너 못 먹는 게…… 있었……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헤집으며 주혁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그랬다. 기현은 자신과 식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먹을 수 없는 게 있었다. 싫어하는 음식이 아니라 먹을 수 없는,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순간적으로 불쾌한 느낌이 머릿속을 확 채웠다. 날카로운 두통에 주혁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애매한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그것의 형체가 떠올랐다. 뭔가가 가득 찬 그릇과 그것을 들고 있는 손들.
전체가 그려지도록 놔두기보다 그것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더 나았다. 얼어붙어 버벅대는 혀를 힘겹게 움직이며 주혁은 기현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의 이름을 뱉았다.
“……해산물. 해산물을 못 먹었어, 너.”
“맞아.”
“그리고 좋아하는 건…… 고기나 햄 같은 거. 맞지?”
“응, 기억했구나.”
기현의 웃는 얼굴을 보니 그제야 머릿속에 가득 찼던 불편한 통증이 조금씩 사라졌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행이다.
무엇에 대한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주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돈가스 전문점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맛집이라고 해서 후배 여자애들에게 몇 번 지갑을 털린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럼 돈가스 먹을래?”
“돈가스? 그러자! 맛있겠다.”
주혁이 제안하자 거절하는 법 없이 냉큼 따라나선다. 두 사람이 들어선 시각이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을 살짝 넘긴 때여서 그런지 가게 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대충 구석 자리를 잡고 앉은 주혁은 돈가스 2인분을 주문했다.
“두 개요? 곱빼기 말고 2인분 맞으세요?”
“네.”
주문을 재차 확인한 아르바이트생은 옆 테이블 주문까지 마저 받은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지 하는 행동이 영 서툴다.
아니나 다를까 밑반찬을 내오던 알바는 결국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김치며 단무지를 담은 그릇이 바닥에 엎어졌다.
“아프겠다.”
기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넘어진 알바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님들은 소리의 원인을 확인한 뒤 금세 자기 이야기로 돌아갔고, 사장은 주방에서 돈가스를 튀기느라 바빴다.
다행히 잠시 후 서빙을 마친 다른 알바생 한 명이 뛰어와 같이 그릇을 치웠다. 넘어진 사람은 제 다리가 멀쩡한지를 돌아볼 틈도 없이 얼른 바닥을 치우고 다시 김치와 단무지를 내왔다.
주혁과 기현이 앉은 테이블에 밑반찬을 가져다준 알바는 얼른 주방과 카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마 카운터 뒤편에서 겨우 다리를 확인하고 있겠지.
“그러게. 많이 다쳤으면 소독하고 약 발라야 되는데.”
“전에 나 다친 거 봐준 것처럼?”
“응?”
그랬던 적도 있었나? 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현은 옛 상처를 쓸듯 왼쪽 무릎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놓았다. 가는 다리가 피와 모래로 범벅된 모습이 어렴풋이 그 위에 덧그려져 보이는 듯했다.
“체육 대회 때, 내가 넘어져서 다쳤었잖아. 그때 양호실에 선생님 안 계셔서 네가 치료해 줬었는데. 기억 안 나?”
“아…… 그래, 기억에…… 있는 거 같아.”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어서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낯설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주혁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잘 모르는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주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떠 올게.”
기본 반찬은 서빙해 주지만 물은 셀프였다. 컵 두 개를 들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며 주혁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기현이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정말 사소한 일상의 기억이었다. 늘 함께 있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가 없는 둘 사이의 이야기들. 자신이 원했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갑작스레 정보가 들어와 뒤엉킨 머리를 풀기라도 하듯 몇 번 휘휘 내저은 주혁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새 나온 왕돈가스 두 개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메뉴가 몇 개 없어서 그런지 역시 음식이 빨리 나온다.
돈가스에 손도 안 대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기현은 주혁이 앉자 얼른 말을 이었다.
“네가 되게 그런 거 잘해서 놀랐었어. 막 상처 치료도 해 주고, 신기해서.”
“축구하면서 자주 다쳐서 그래. 양호실 자주 들락날락했어.”
“으응, 맞아. 그랬었지. 넌 축구 진짜 잘했으니까.”
“그랬어?”
적당히 대꾸하던 주혁은 돈가스를 빠른 속도로 슥슥 자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축구 이야기가 나오니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런 주혁을 보며 기현은 다시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주혁이 관심을 가지는 게 기쁜 눈치였다.
“맨날 점심시간마다 애들이랑 나가서 축구하구, 체육 대회 때도 반 대표로 나갔잖아! 그래서 1학년 때랑 2학년 때, 다 우승하구.”
“진짜? 하긴, 내가 좀. 다른 건 몰라도 축구 하나는 끝장이지.”
“응! 너 축구하는 거 완전 멋있었어. 짱이야.”
기현의 입에서는 주혁이 체육 대회 때 어떤 식으로 경기를 풀어 갔으며, 그래서 몇 골을 넣었는지가 즐겁게 흘러나왔다. 주혁의 학창 시절 무용담을 이야기하면서 외려 자기가 더 신난 것 같았다. 주혁 역시 어깨가 으쓱해졌다. 역시 축구 하면 윤주혁 아닌가.
“그래서, 네가 그때 바로 슛을 날렸는데…… 그게 이렇게 딱! 골키퍼 손을 스치면서…….”
신나게 이야기하는 기현의 속도가 어쩐지 좀 느려졌다. 기현의 접시를 흘긋 본 주혁은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기껏 잘 튀겨 놓은 돈가스가 엉망이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바꿔 들고 어설프게 잘라 보겠다고 건드리고는 있는데 오히려 튀김옷이 죄다 벗겨질 지경이었다.
“일단 그거 내려놓고 얘기부터 마저 해 봐.”
마침 돈가스를 다 썬 주혁은 기현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자마자 얼른 자신의 것과 접시를 바꿨다. 주혁의 행동에 놀란 건지 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왜 바꿔?”
“너 그냥 놔두면 고기 해체하느라 먹지도 못할 거 같아서. 내가 또 돈가스 써는 데는 일가견이 있거든?”
장난스런 말투로 덧붙였더니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눈이 금방 곱게 호선을 그린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현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포크를 들었다.
“고마워, 주혁아.”
“뭘 그런 걸 가지고…… 얼른 먹자. 식으면 맛없어.”
천천히 돈가스를 먹으며 기현은 주혁의 무용담을 계속 이어 갔다. 기현의 이야기를 듣자 그 순간만큼은 손에 잡힐 듯 명확하게 그려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경기.
상대 팀으로 뛰었던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를 꼭 누르고 싶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현에게 자신이 이기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자신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기현에게.
1. 재회 (3)
“거기 아무도 없는데요. 형, 설마…….”
“아니, 방금 전까지 여기 있던 애가 왜 하필 지금…… 야, 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 줄래? 어? 진짜 친구랑 있었던 거 맞거든?”
“형 친구라는 게 그, 눈으로는 안 보이고 마음으로만 보이는 그런 친구예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게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못해 가상의 친구라도 만들어 낸 사람을 보는 눈빛이 분명하다. 물론 반은 농담 삼아 하는 소리니 그리 심각할 건 없지만, 그래도 찜찜했다. 형의 위엄이 사정없이 실추되는 느낌이라니.
“있어 봐. 전화해서 부를 테니까.”
“에이, 뭐 하러 그래요. 놔두세요.”
말을 할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흐른다. 쩝, 입맛을 다시며 주혁은 거의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보니까 잠깐 한눈판 사이 인파에 휩쓸려 간 모양인데, 가다가 일행이랑 떨어졌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겠지. 정운이 본 것처럼, 이번에는 진짜로 혼자 서서 기다려야 되게 생겼다.
“애가 길을 잃어버렸나 본데.”
“여기서 길을 잃어요? 몇 살인데?”
“친구라니까. 여기 자주 안 나와서 그래.”
카페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같다.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학교를 안 다니고 있다고, 이 근처는 자주 안 나오는데 그날 우연히 일이 있어 나왔다가 주혁과 마주친 거였다고 기현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러니 지리를 잘 모를 수밖에. 젊은 사람들 모이는 곳이 거기서 거기라지만, 낯선 곳이라면 좀 헤맬 수도 있는 거다.
“애 돌아올 때까지 좀 있다 가라. 심심해.”
“집에 가야 되는데. 멀리 갔다 와서 피곤해요, 저. 사물함에 책만 안 두고 갔어도 학교로 안 돌아왔을 건데.”
꿍얼대면서도 얌전히 옆에 서서 말 상대를 해 준다. 정운은 늘 예의 바른 막내였다.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온 덕분에 남자라기보다 소년에 가까운 성향을 보여 가끔 응석을 부리긴 하지만 그 정도는 그냥 귀여운 애교인 거고.
“어딜 갔다 왔는데?”
“아는 분한테 좀 다녀왔어요. 이달 말쯤 기일인데, 그때는 못 갈 것 같아서.”
그제야 정운의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까만 정장에 코트를 신경 써서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나이가 어리니 아는 분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은사쯤 되는 모양이다. 어쩐지 눈이 좀 빨간 것이, 가서 꽤 울고 오기라도 한 것 같다.
“많이 좋아하던 사람인가 보네.”
“네?”
“아니, 눈이 빨개서.”
정운은 당황하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른 눈가를 닦았다. 애는 애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걸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걸 들켜 부끄러워서 허둥대는 것도.
주혁은 얼마 전 친척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딱히 큰 감흥이 없었던 자신을 돌아보았다. 꽤 메마르긴 한 모양이다.
“운 거 알면 엄마가 속상해하실 건데…… 티 나요?”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그냥 집에 가자마자 바로 씻으면 되겠는데?”
그 말에 정운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는 뺨을 가볍게 긁적이며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거기 다녀오면 좀 그래요. 부모님이 걱정되니까 가지 말라고도 하시고, 그래서 최대한 티 안 내려고 하는데.”
“오래 됐는데도 그래?”
“그때가 2006년도였나? 그랬으니까 올해 한 7년 됐죠.”
손가락으로 해를 세며 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7년이라면 초등학교 6학년 꼬마가 대학생이 될 만큼의 시간이다. 꽤 지났는데 아직도 생각하면 슬프고 안타깝다니, 감수성이 정말 풍부하긴 하다.
하긴 그래서 유독 연애를 한 뒤에도 상처를 많이 받고, 빠르고 신나는 노래보다 조용하고 다정한 노래를 더 잘 부르는 건지도 몰랐다. 음악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정운이 주로 부르는 노래는 발라드 계열이었다.
“그 정도면 괜찮아질 때도 됐는데.”
“그쵸?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안 그렇더라고요. 보통 때는 그냥 그렇게 잊어버리고 사는데, 이맘때쯤만 되면 꼭 이래요. 확 추워져서 더 그런가 싶기도 하고. 형 그거 알아요? 날씨가 사람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어마어마하대요. 특히나 올해는 여름이 더워서 겨울엔 사상 최악의 한파가 몰려올 거라고 하는데, 그게…….”
“야, 야, 됐어. 너 얼른 집에 들어가 봐라.”
주혁은 손사래를 치며 정운의 말을 멈췄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어려운 이야기를 한껏 쏟아 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도 사실 그저 뭐든 말하는 걸 멈추고 싶지 않아서 계속 이어 내는 것일 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런 이야기를 길에서 아무렇지 않게 쏟아 낼 애도 아니고.
언젠가 정말 힘들어서 도움을 요청할 때 조용히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들어 줄 수는 있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에이…… 형이 붙잡아 놔서 서 있었잖아요.”
“어휴, 진짜! 혼날래?”
손을 치켜들며 한 대 치는 시늉을 하니 어이쿠, 하며 뒤로 휙 물러난다. 방금 전까지 금방이라도 또 울 것 같은 표정이던 정운은 어느새 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일 봐요, 형.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정운은 지하철역 쪽으로 성큼성큼 사라져 갔다.
“나 참…….”
“누구야?”
손끝에 차가운 것이 확 닿았다. 흠칫 놀라 몸을 돌린 주혁은 자신의 손에 닿은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현이 내민 바나나 단지우유가 주혁의 손을 톡, 톡 치고 있었다.
“이기현!”
“어어, 나 맞아. 방금 누구야? 친구?”
방싯방싯 웃는 얼굴을 보니 화도 짜증도 낼 수가 없어 주혁은 입을 닫았다. 얘는 그 잠깐 사이 사라진 덕분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뭐 그런 생각은 있을까?
“아는 동생이야. 너 어디 갔었어?”
“응?”
우유에 톡 꽂은 빨대를 문 기현은 한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편의점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처럼 사라진 이유는 고작 이 우유 한 개를 사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바나나 우유 사려고?”
“응.”
주혁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는 대신 기현이 내민 우유를 받았다. 빨대를 꽂는 대신 윗부분 껍질을 벗기고 입을 댄다. 이쪽이 훨씬 마시기가 편하다. 기현이야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빨대를 쪽쪽 빠는 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 자신은 그런 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그게 그렇게 좋냐? 어휴…… 어디 갈 거면 말을 좀 하고 가. 놀랐잖아.”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기현은 몸을 살짝 돌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여간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참 잘 들어맞는다.
천천히 기현의 뒤를 따라 걸으며 주혁은 기현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칼과 대비되는 빨간 목도리가 기현의 목에 매달린 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렸다. 차가운 늦가을 공기를 맞는 손끝이 발갛게 얼어 있었다.
그때 바람이 가로수를 흔들었다. 추위에 노랗게 질린 은행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곳곳에 부딪치며 바스락거리는 비명을 지르던 은행잎 중 하나가 동그란 머리 위에 팔랑, 내려앉았다.
“낙엽 붙었어.”
바스락.
기현의 걸음이 멈췄다. 떼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 모습에 주혁은 기현에게 성큼 다가섰다. 손을 뻗어 머리에 붙은 낙엽을 조심스럽게 걷어 내자, 기현은 고개를 들었다.
낙엽 비를 떨어뜨리는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기현은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유독 길었다. 가로등 불빛이 기현을 타고 부서져 흘러내렸다. 하얀 얼굴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언젠가, 이런 적이 있었던가.
“미안, 꼴사납지.”
길게 늘어섰던 찰나가 끊겼다. 기현은 부끄러운 듯 수줍게 웃었다. 처음 친해졌을 때도 이랬다.
기현은 흔히 보는 남자아이들과 달리 묘한 조용함을 지닌 아이였다. 어느 순간 문득 말이 없어 바라보면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고, 날씨가 좋다며 문자를 보내는 소녀 감성을 보이기도 하는 그런.
수줍음을 은근히 타서 주말에 같이 옷 사러 가자는 이야기도 선뜻 꺼내질 못하던 아이. 하지만 자신과 전날 축구 경기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취향도 제법 비슷했고 같이 운동을 하기도 했던, 마냥 조용하지만은 않았던 아이.
“주혁아.”
“응?”
물끄러미 기현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주혁은 기현의 부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손에 든 바나나 우유를 만지작거리던 기현이 우물거렸다.
“나는 콜라를 싫어하는 건 아닌데, 커피나 콜라보다는 우유가 좋아.”
“흐음.”
“그리고 흰 우유보다는 바나나 우유나 딸기 우유가 더 좋은 거 같아.”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주혁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긴,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불쑥 편의점으로 사라졌겠지.
“내 생각에도 콜라보다는 바나나 우유가 너랑 더 맞는 거 같아.”
“그치?”
주혁이 동의하자 기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현이 바나나 우유를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모습에 주혁은 은근한 뿌듯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흙 속에 파묻힌 뭔가를 발굴하는 것처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둘은 어느새 갈림길에 도착했다. 한쪽은 주혁이 사는 원룸 쪽으로 가는 길이었고 다른 한쪽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가로등이 고장 났는지 길이 제법 어두웠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응? 아니야,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주혁이 너도 들어가야지.”
기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여자애도 아닌데 데려다주겠다고 우기는 것도 좀 우습다. 그래 그럼, 하고 돌아서려는데 기현이 주혁을 불러 세웠다.
“저기 주혁아. 다음번에 보는 거 말인데.”
“응, 왜?”
“내가 일이 좀 있어서 언제 시간이 날지 정확하게 잘 몰라. 낮에는 좀 곤란하고, 아마 저녁때 될 거 같긴 한데…… 내가 전화해도 될까?”
“당연하지. 너 스케줄 정해지면 전화해. 그때 결정하면 되지, 뭐.”
“다행이다. 안 된다 그러면 어쩌나 하고 좀 걱정했어.”
“별게 다 걱정이네요, 이기현 씨.”
혹시 기분 상하지 않을까 걱정한 모양이다. 심각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펴졌다. 밝게 웃는 기현의 모습이 고마웠다. 사실은 자신 쪽에서 만나 달라고 부탁해야 할 입장인데 오히려 먼저 나서서 다음 약속을 잡으려고 하는 것도 그렇다.
기억에 없을 정도로 몇 년을 잊고 살았는데 다시 만나서 몇 마디 주고받으니 금세 편안해지는 걸 보면, 분명 주혁의 희미한 기억대로 절친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챙겨 주는 것일 테고.
“그럼 다음에 보자.”
“응, 연락할게!”
기현은 주혁에게 손을 흔들며 어두운 길 쪽으로 총총 사라졌다. 갈림길에 서 있던 주혁은 기현의 모습이 완전히 길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자취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우 두 번의 만남으로 많은 것이 떠올랐다.
절친한 친구를 되찾았다는 생각에 이미 고등학교 시절 기억을 전부 찾은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손에 든 빈 바나나 우유갑을 내려다보던 주혁은 이내 피식 웃었다. 서늘한 밤공기 속으로 입김이 하얗게 흘렀다.
* * *
겨울이 매섭게 내려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다. 세찬 바람에 떠밀려 곧 쫓겨날 듯 불안했지만 그래도 가을은 간신히 문턱에 발을 걸친 채 겨울과 싸우고 있었다.
낮과 밤의 기온 차는 빠른 속도로 좁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큰 폭이었다. 아직은 환절기다. 두꺼운 패딩 점퍼를 꺼내 입기에는 낮 시간이 조금 덥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밤에는 차가운 바람이 조금씩 뺨을 얼리기 시작하는 그런 날씨.
수업이 없는 오후에 모처럼 신나게 과 대항 풋살을 즐겼던 주혁은, 갑작스럽게 도착한 문자 한 통 덕분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저녁에 만나자는 기현의 연락이었다.
자취방까지 가서 옷을 갈아입고 어쩌고 할 시간도 없이, 축구부 샤워실에서 급하게 씻은 주혁은 아침에 입고 나온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운동할 때는 어차피 운동복을 따로 입었으니 땀에 젖어 있진 않았지만 그래도 딱히 신경 써서 입은 게 아닌 귀찮아서 대충 걸쳐 입은 거라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츄리닝 바지에 패딩 점퍼라니, 누가 보면 체대 입시 준비하는 고등학생으로 볼 복장이다.
물론 이미 주혁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군대도 다녀와서 아저씨 소리를 들을 복학생 나이였지만. 그나마 추운 밤 기온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필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탓에 옷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초라해 보이면 어쩌나.
같은 성별의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거니 사실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성의 없어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주혁은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리 좀 늦는다고 하고 갈아입고 올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자취방에 다녀올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끝에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
기현이었다. 오는 중이라 마음이 급한 것일까. 굳이 이렇게 꼬박꼬박 문자를 보내지 않아도 몇 분 늦는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릴 텐데. 주혁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생각과 달리 이리저리 서성이는 주혁의 앞을 한 무리의 여고생 떼가 지나갔다. 뭘 먹을까 하고 떠들어 대다 이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곱디 고운 여학생들이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제 또래의 아이들.
흘끔 주혁을 쳐다보고는 저들끼리 또 뭐라 소곤대기 시작한다. 문득 그 틈으로 훈남 어쩌고 하는 단어가 들렸다. 초조하던 마음이 단번에 붕 뜬다.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어도 역시 난리가 난단 말이지.
흐뭇함에 씩 웃고 있는 주혁의 팔을 누군가 뒤에서 톡톡 쳤다. 주혁은 홱 뒤를 돌아보았다.
“주, 주혁아! 미안, 많이 기다렸어?”
갑자기 돌아봐서 깜짝 놀란 건지, 그러잖아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뜬 기현이 움찔했다. 주혁은 얼굴 가득 자꾸 걸리는 웃음을 지우려고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별로.”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진짜 미안.”
그리 많이 늦은 것도 아닌데 엄청나게 미안해한다. 미안해하기 순위를 매길 수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미안해하는 모습 랭킹 상위권에 들 수 있을 정도다. 사과받는 쪽이 더 미안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낯이 간지럽다.
“괜찮아.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같이 먹자.”
그러자 걱정으로 가득하던 얼굴이 금세 환하게 밝아진다. 웃는 얼굴 하나만으로 불을 켜 놓은 것처럼 주변까지 빛난다.
그래, 이게 이기현이었다.
이 웃는 얼굴을 그렇게 보고 싶어 했었던 고등학생 시절의 자신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기현이 웃으면 덩달아 자신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주혁아, 뭐 먹을까?”
“글쎄. 뭐 먹고 싶은데?”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
메뉴를 정할 때 제일 난감한 대답이 기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예전에도 이런 식이었다. 기현은 좀 우유부단한 편이어서 둘이 뭔가를 하면 결정은 자신이 내리곤 했다.
그래도 그런 면이 싫지는 않았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의 자신, 그리고 그런 자신을 얌전히 잘 따라 주는 기현. 무엇을 먹는 것도, 어딘가 가는 것도 늘 먼저 시작하는 것은 주혁이었고 기현은 싫은 소리 없이 자신과 함께했다.
“너 못 먹는 게…… 있었……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헤집으며 주혁이 중얼거렸다. 분명히 그랬다. 기현은 자신과 식성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먹을 수 없는 게 있었다. 싫어하는 음식이 아니라 먹을 수 없는,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순간적으로 불쾌한 느낌이 머릿속을 확 채웠다. 날카로운 두통에 주혁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었다. 애매한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그것의 형체가 떠올랐다. 뭔가가 가득 찬 그릇과 그것을 들고 있는 손들.
전체가 그려지도록 놔두기보다 그것의 이름을 꺼내는 것이 더 나았다. 얼어붙어 버벅대는 혀를 힘겹게 움직이며 주혁은 기현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의 이름을 뱉았다.
“……해산물. 해산물을 못 먹었어, 너.”
“맞아.”
“그리고 좋아하는 건…… 고기나 햄 같은 거. 맞지?”
“응, 기억했구나.”
기현의 웃는 얼굴을 보니 그제야 머릿속에 가득 찼던 불편한 통증이 조금씩 사라졌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행이다.
무엇에 대한 안도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주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돈가스 전문점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맛집이라고 해서 후배 여자애들에게 몇 번 지갑을 털린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럼 돈가스 먹을래?”
“돈가스? 그러자! 맛있겠다.”
주혁이 제안하자 거절하는 법 없이 냉큼 따라나선다. 두 사람이 들어선 시각이 이미 저녁 식사 시간을 살짝 넘긴 때여서 그런지 가게 안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대충 구석 자리를 잡고 앉은 주혁은 돈가스 2인분을 주문했다.
“두 개요? 곱빼기 말고 2인분 맞으세요?”
“네.”
주문을 재차 확인한 아르바이트생은 옆 테이블 주문까지 마저 받은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방 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지 하는 행동이 영 서툴다.
아니나 다를까 밑반찬을 내오던 알바는 결국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김치며 단무지를 담은 그릇이 바닥에 엎어졌다.
“아프겠다.”
기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넘어진 알바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님들은 소리의 원인을 확인한 뒤 금세 자기 이야기로 돌아갔고, 사장은 주방에서 돈가스를 튀기느라 바빴다.
다행히 잠시 후 서빙을 마친 다른 알바생 한 명이 뛰어와 같이 그릇을 치웠다. 넘어진 사람은 제 다리가 멀쩡한지를 돌아볼 틈도 없이 얼른 바닥을 치우고 다시 김치와 단무지를 내왔다.
주혁과 기현이 앉은 테이블에 밑반찬을 가져다준 알바는 얼른 주방과 카운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마 카운터 뒤편에서 겨우 다리를 확인하고 있겠지.
“그러게. 많이 다쳤으면 소독하고 약 발라야 되는데.”
“전에 나 다친 거 봐준 것처럼?”
“응?”
그랬던 적도 있었나? 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기현은 옛 상처를 쓸듯 왼쪽 무릎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놓았다. 가는 다리가 피와 모래로 범벅된 모습이 어렴풋이 그 위에 덧그려져 보이는 듯했다.
“체육 대회 때, 내가 넘어져서 다쳤었잖아. 그때 양호실에 선생님 안 계셔서 네가 치료해 줬었는데. 기억 안 나?”
“아…… 그래, 기억에…… 있는 거 같아.”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어서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낯설지는 않은 이야기였다. 주혁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잘 모르는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주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 떠 올게.”
기본 반찬은 서빙해 주지만 물은 셀프였다. 컵 두 개를 들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며 주혁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기현이 늘어놓는 이야기들은 정말 사소한 일상의 기억이었다. 늘 함께 있지 않았다면 존재할 수가 없는 둘 사이의 이야기들. 자신이 원했던 학창 시절의 이야기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갑작스레 정보가 들어와 뒤엉킨 머리를 풀기라도 하듯 몇 번 휘휘 내저은 주혁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새 나온 왕돈가스 두 개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메뉴가 몇 개 없어서 그런지 역시 음식이 빨리 나온다.
돈가스에 손도 안 대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기현은 주혁이 앉자 얼른 말을 이었다.
“네가 되게 그런 거 잘해서 놀랐었어. 막 상처 치료도 해 주고, 신기해서.”
“축구하면서 자주 다쳐서 그래. 양호실 자주 들락날락했어.”
“으응, 맞아. 그랬었지. 넌 축구 진짜 잘했으니까.”
“그랬어?”
적당히 대꾸하던 주혁은 돈가스를 빠른 속도로 슥슥 자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축구 이야기가 나오니 금세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런 주혁을 보며 기현은 다시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이야기에 주혁이 관심을 가지는 게 기쁜 눈치였다.
“맨날 점심시간마다 애들이랑 나가서 축구하구, 체육 대회 때도 반 대표로 나갔잖아! 그래서 1학년 때랑 2학년 때, 다 우승하구.”
“진짜? 하긴, 내가 좀. 다른 건 몰라도 축구 하나는 끝장이지.”
“응! 너 축구하는 거 완전 멋있었어. 짱이야.”
기현의 입에서는 주혁이 체육 대회 때 어떤 식으로 경기를 풀어 갔으며, 그래서 몇 골을 넣었는지가 즐겁게 흘러나왔다. 주혁의 학창 시절 무용담을 이야기하면서 외려 자기가 더 신난 것 같았다. 주혁 역시 어깨가 으쓱해졌다. 역시 축구 하면 윤주혁 아닌가.
“그래서, 네가 그때 바로 슛을 날렸는데…… 그게 이렇게 딱! 골키퍼 손을 스치면서…….”
신나게 이야기하는 기현의 속도가 어쩐지 좀 느려졌다. 기현의 접시를 흘긋 본 주혁은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기껏 잘 튀겨 놓은 돈가스가 엉망이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바꿔 들고 어설프게 잘라 보겠다고 건드리고는 있는데 오히려 튀김옷이 죄다 벗겨질 지경이었다.
“일단 그거 내려놓고 얘기부터 마저 해 봐.”
마침 돈가스를 다 썬 주혁은 기현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자마자 얼른 자신의 것과 접시를 바꿨다. 주혁의 행동에 놀란 건지 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왜 바꿔?”
“너 그냥 놔두면 고기 해체하느라 먹지도 못할 거 같아서. 내가 또 돈가스 써는 데는 일가견이 있거든?”
장난스런 말투로 덧붙였더니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눈이 금방 곱게 호선을 그린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현은 사양하지 않고 냉큼 포크를 들었다.
“고마워, 주혁아.”
“뭘 그런 걸 가지고…… 얼른 먹자. 식으면 맛없어.”
천천히 돈가스를 먹으며 기현은 주혁의 무용담을 계속 이어 갔다. 기현의 이야기를 듣자 그 순간만큼은 손에 잡힐 듯 명확하게 그려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경기.
상대 팀으로 뛰었던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를 꼭 누르고 싶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현에게 자신이 이기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직접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자신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기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