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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호협 1권
사부님과 함께한 세월들
도천호협 1권(1화)
서(序)
포양호(我陽湖), 영봉장(靈鳳莊).
십 년 만이다. 청아한 꽃과 유수한 물결이 곱게 흐르는, 마음마저 푸근해지는 이곳에 오기까지 십 년이 걸렸다.
무학을 겨루는 일에선 서로 적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벗, 그가 사는 곳이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착.’
술병이 날아왔다. 손에 잡고 죽 들이켰다. 향기가 풀풀 나는 것이 그윽한 술이다. 오랜만에 마시는 좋은 술이었다.
“고마우이.”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미안했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자면 후회막급이다. 억지로 이기기 위해 검중검(劍中劍)의 비수를 들이댔다. 검속에 또 다른 검이 든 검.
친구는 당황하여 왼팔을 잃고야 말았다. 그가 피를 흘리며 왼팔을 잃자 몰입감이 풀렸다. 끔찍한 일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를…….
“날 보기가 그리도 미안했나? 이제야 오게.”
“자네는 내가 밉지 않은가?”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시킨 일. 그 마음이 너무 과했지.”
“불쑥 찾아와 자네 심사를 건드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
“허허, 무슨 소리. 십 년간 기다렸지.”
“십 년간? 무슨 이유로…….”
친구의 표정을 보니 원망하진 않는 것 같았다. 십 년이 지났으니 왼팔은 없었지만, 여전히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있었다.
십 년 전보다 무공이 더욱 깊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평생 기행과 협행을 하며 무림을 주유했던 당당한 천지괴협이다.
그 일로 원망에 젖어 지낼 사람은 분명 아니다. 궁금했다, 친구의 기다림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생각이 많은가 보이.”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갑자기 술을 던져 주고선 기다렸다고 하니까. 대체 자네의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이.”
“새로운 대결을 생각해 봤지.”
“새로운 대결?”
밑도 끝도 없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강한 독고검성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멀뚱거렸다.
의문에 젖은 독고검성에게 장학선은 털털한 웃음으로 답했다.
“헤헤. 뭐긴, 누가 더 제자를 잘 키우나 대결해 보자는 게지.”
“뭐라고?”
머리를 망치로 맞은 느낌, 이 친구의 정신세계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십 년 만에 온 친구에게 새로운 대결을 하자고 하니.
장학선은 술을 마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자네와 나는 각자의 장기가 비범하다네. 우리끼린 평생을 가도 승부를 내지 못할 것이네. 내가 자넬 이기려고 머리를 쓰다간 자네 다리가 없어질지 어찌 아나.”
“일리가 있군. 자네의 머리로 아는 독수를 쓴다면, 내 다리가 없어질지 모르는 일. 그래서 날 용서했구만.”
“미련한 집착은 화를 부르는 게야.”
“맞는 말일세. 해서 누가 더 훌륭한 제자를 잘 키우나 대결을 하자고? 자넨 이미 사문의 손자들이 있고, 제자도 있었지 않은가?”
“에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필생을 걸고 누가 더 훌륭한 수제자를 키우나 대결을 하자는 것이지.”
“그런 뜻이었군!”
자신들은 무림의 최고 고인이 된 지 오래였다.
그동안 숱한 제자와 사문의 손자들이 있었다. 새삼 새로운 제자를 누가 잘 키우나 대결하자는 것은 어폐가 있어 보였다.
친구의 말을 듣고 보니 참으로 일리가 있었다. 필생의 신공과 모든 절학을 완벽하게 전수받아 이을 수 있는 확실한 수제자를 키우는 것이다.
“구미가 당기지?”
“참으로 당기는군. 자네 말대로 우리의 장기는 비범하여 너무 이기려고 하다간 사고가 나고 말겠지. 그럼 누가 더 확실한 수제자를 키워 내는지 경합하여, 스승의 위대함을 가리자는 것이군.”
“그렇지, 바로 그거야. 하나 이 일은 일이 년 사이에 끝나는 일이 아닐세. 앞으로 오십 년은 봐야 하는 일.”
“맞아. 확실한 수제자를 훈육하는 것이 어디 일이 년 안에 되겠나. 아무리 무학 기재를 수제자로 고른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닐 터. 이 승부는 우리가 저승에 가서야 알 수 있겠군.”
“바로 봤어. 역시 자네는 척하면 척이야. 우리 나이가 있으니 아마도 이 승부는 저승에서 가서야 그 결과를 알 수 있겠지.”
생전에는 결과를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구미는 당겼다.
자신의 완벽한 절기와 신공을 제대로 이어 받는 훌륭한 수제자를 키운다. 승패를 떠나 생각만 해도 절로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자기의 문하도 참으로 많지만 진정으로 자신의 필생 절기와 신공을 제대로 가르친 문하는 없었다. 수제자는 없는 셈.
“자넨 정말 기인이야, 기인. 어찌 그런 생각을 다했는고. 하나 이건 누가 더 훌륭한 무학 기재를 선발하느냐에 달리지 않았는가? 아주 머리가 잘 돌아가고 무학에 재능이 특출한. 바로 그런 천재적인 수재를 누가 먼저 발견하느냐의 대결 아닌가?”
“에이, 자네는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어. 천재적인 수재를 발굴하여 절세고수로 만드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 좀 더 참신하게 생각해 보게나.”
“응?”
고개가 갸우뚱했다. 대체 무슨 참신한 생각을 하라는 것인가? 제 정신이 아니다. 천재적인 수재를 발굴하여 절세고수로 만드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니.
장학선 이 친구의 생각은 참으로 기이하여 헤아릴 수 없었다.
갸우뚱거리며 깊은 의문에 젖은 그에게 말했다.
“진정으로 훌륭한 스승은 머리가 잘 돌아가고, 능력이 우수한 천재적인 수재를 절세고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네. 아주 볼품없고, 무가치한 인간을 아주 제대로 세웠을 때 비로소 그때가 가장 훌륭한 스승이 되는 게야.”
“뭐, 뭐라고? 그래서 자네 말은 질질 짜는 시정잡배를 제자로 삼겠다고? 허허, 제정신이 아니로세.”
“하하. 그냥 시정잡배는 안 되지. 시정잡배들이 의외로 머리가 잘 돌아가고 교활하다네. 머리가 돌아가니 자질이 없어도 두들겨 잡아 키우면 그것도 쉽지. 난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심히 모자라고 심신이 매우 병약한데다 무학의 자질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런 친구를 제자로 삼을 거라네. 하하하!”
웃음이 나오려다가 기가 막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정신도 온전치 못하고 심신은 병약하며 무학의 자질은 눈곱만큼도 없는, 심지어 심히 모자란, 완전히 최악이다.
지나가는 개도 안 들여다보는, 하다못해 강호의 하수들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그런 친구를 제자로 삼겠다니 경외심이 들 지경이다.
적어도 그가 가진 생각은 존경스럽다.
“현실성이 없는 선택이로세. 아니지, 자네가 그런 말을 할 때는 의외로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 내가 복장이 다 뒤집어지는 줄 알았네. 만약에라도 그런 사람을 평범한 고수로라도 만들 수 있다면 진정으로 탄복하겠네.”
장학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독고검성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내심 비웃음이기도 했다.
장학선은 그런 친구의 표정을 읽으면서도 재밌었다.
서로 웃음의 대답을 한 후 술판을 크게 벌였다. 묵은 감정도 풀고 앞으로 벌일 새로운 대결은 위한 축배였다.
제一장 사부님과의 인연(1)
<1>
나의 사부님과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다. 오랜 적수이자 친구이신 검신 독고검성할아버지와 스승의 능력을 놓고 경합했다.
사부님은 공교롭게도 나를 선택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솔직히 난 최악이다. 사부님은 왜 날 선택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나이 올해 서른. 사부님을 세상에서 떠나보낸 지 칠 년째.
무림에선 날 두고 도천호협(刀天豪俠)이라 불렀다.
과분한 별칭이다. 내가 왜 그런 별칭을 받았는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멍청한 머리로는 이해 못하겠다. 무림에 나와 한 일도 그리 없었는데…….
나의 기억 속에 사부님의 모습이 들어온 것은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이십 년 전.
어느 초라한 길가.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흙탕물이 흘러 바닥에 고였다. 그 흙탕물을 혀로 핥으며 목마름을 달랬다. 눈물만 하염없이 났다. 눈앞에서 붉은 물을 흘리며 일어나지 않았다. 흔들어도 말없고, 울어도 말없다. 지치고 있었다.
“음, 요 녀석이다. 옳거니!”
귀에 뭔가 소리는 들렸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지만 수염은 하얗고, 얼굴은 울긋불긋한 것 같고.
눈물만 줄줄 떨어지고 머리는 멍하다.
온 세상이 하얗고, 빨갛고, 검기만 하다.
침이 질질 흘려졌다. 뭐가 흘려지는 것은 같은데 그냥 흘리나 보다.
“아주 갔군, 갔어.”
천지괴협 장학선은 주변의 물건을 챙겨 뒀다.
이 아이는 제자로 삼기 아주 좋았다.
근골을 만져 보았다. 무공에 대한 자질도 없고, 익힐 만한 근골도 아니었다.
열 살은 되어 보이는 이 아이는 백치에 가까웠다. 머리가 온전치 않은 듯했다. 눈의 흰자위가 여실히 드러났다. 반은 정신병자에 가까운.
그는 손가락으로 바윗돌을 가리키며 이 아이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
“덜.”
“아, 덜. 역시 낙점이야, 낙점.”
“…….”
아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뭐 가리키며 묻기에 ‘덜’이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그는 대단히 흡족했다. 그날로 영봉장으로 데려왔다.
영봉장의 어느 아담한 방에 눕히자 아이는 갑자기 장학선의 오른팔을 잡았다.
“바. 바. 저.”
“바저?”
침을 질질 흘리며 장학선의 오른팔을 잡은 아이의 근력은 정상이 아니었다.
‘꼬르륵.’
그는 웃음을 지었다.
“밥 달라는 말도 못할 정도군.”
열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데도, 말을 못한다면 선천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일 것이다.
그는 죽을 쒀서 아이에게 줬다.
아이는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죽 앞에서는 아이가 사족을 쓰지 못했다.
오물오물.
몹시 굶주렸는지 참으로 맛있게도 먹는다.
하긴 그곳의 상황이 험악했으니 꽤나 많이 굶었을 것이다.
아이는 누군가가 돌봐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대로 뒀다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여리고 연약한 아이였다.
“불쌍한 아이야.”
신세 참 처량하다. 아이는 그런 자신의 신세마저도 모르고 죽만 찾는 바보였다. 어쩌면 저것이 축복인지도 모를 일.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 되기도 하지.”
죽을 다 먹은 아이가 또 팔을 잡아당겼다.
“바저. 바저.”
“앞으론 말이다. 밥을 주세요, 그리 말해 봐.”
“바저. 바저.”
진짜 최악은 최악이다. 한마디 해서는 알아듣지를 못한다. 밥을 주세요가 아니라 ‘바저바저’ 이러고 있었다.
하나 이 아이를 제대로 일으켜 세운다면 정말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하.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구나. 그래, 바저.”
어느새 아이의 세계를 인정했다.
이 아이는 밥밖에 몰랐다. 배고프면 더 아프고, 지치고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밥을 찾았다.
장학선은 죽을 하나 더 쒀서 줬다.
오물오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다.
먹성은 생각보다 좋았다. 그는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마디 더했다.
“얘야, 앞으로 배가 고프면 밥 주세요, 그렇게 말해, 알았지?”
“바저…….”
“미안하구나. 이 미련한 사부가 너에게 너무 많이 바랐구나.”
장학선은 이 아이에게 더는 바라지 않기로 했다.
사실, 자신은 이 아이에게 오히려 배웠다. 되지 않는 것을 집착하여 강요한다면… 아이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바라지 않는 것, 아이가 바라지 않아도 스스로가 길을 찾아 자란다면 참으로 좋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