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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어필 드라마(15세 개정판) 1화
프롤로그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 잠에 빠져 기능을 잃은 뇌가 분간을 하지 못한다.
쾅쾅, 손으로 하는 노크가 발차기로 변질되어 문을 부술 듯 두드린다. 소리가 달라지자 뇌가 반응을 보이며 깨어난다. 아득했던 소리가 점차적으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으음.”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든 인형(人形)이 오랜 뒤척임 끝에 짜증이 가득한 손놀림으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이불을 쥔 손은 크고 다부졌다. 솟아오른 시퍼런 핏줄을 따라 올라가자, 잔뜩 힘이 들어간 팔뚝이 불끈거렸다.
여섯 개로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과 단단한 가슴. 근사한 몸을 가진 남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한 바퀴 돌리자 우드득 소리가 난다. 그의 몸이 깨어났다.
“형님! 일어나 봐요!”
쾅쾅, 뇌를 울리는 소리에 아직 감겨 있는 남자의 눈꺼풀 사이가 깊게 팼다. 마른침을 삼키자 울대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새하얀 얼굴에 잡티 하나 없는 피부. 매끈한 이마 아래의 짙은 눈썹과 가늘고 긴 눈매. 높게 솟은 코와 또렷한 인중 밑의 붉은 입술.
“형님!”
번쩍, 남자의 눈이 뜨였다. 깊은 눈매에 보일 듯 말듯 가느다란 속쌍꺼풀과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몇 차례의 깜빡임에 흐렸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었다.
쾅쾅, 거센 두드림에 문이 흔들리는 걸 보고 나서야 남자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벌컥 문이 열리자 남자의 양손과 한 발이 허공에 멈췄다. 한 발로 몸을 지탱하던 거구의 남자가 기우뚱거렸다.
간신히 양발로 땅을 딛고 선 거구의 남자는 눈을 위로 치켜뜨고, 문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반라의 남자와 눈을 맞췄다.
두 남자 모두 꽤 장신을 자랑했는데, 반라의 남자가 188cm의 키로 거구의 남자보다는 5cm가량 더 컸다.
“뭐야. 오늘 일 없잖아.”
낮게 가라앉은 태평한 목소리에 거구의 남자는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형님! 지금 일이 문제예요? 난리 났어요, 아주!”
형님이라 불린 사내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매니저인 재민이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이유가 무엇일지 가늠하느라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하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뇌는 재민이 날뛰는 속도만큼 빠르게 회전하지 못했다.
“뭔데.”
“이거 봐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재민은 인터넷 신문의 연예면으로 접속했다. 그리고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기사를 누른 뒤 남자에게 건넸다.
특종! 배우 정인하(30세)와 배우 신혜원(27세) 전격 결혼 발표!
타이틀을 읽은 남자의 입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세한 내용은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재민에게 스마트폰을 건넨 그는 뒤돌아 다시 침대로 향했다.
“아! 형님! 지금 형님 결혼 기사가 났다고요!”
“스캔들이 처음도 아니고. 뭐, 이번 거는 세긴 세네. 결혼. 크큭. 빨리 기사 내리라고 해.”
막 이불을 들추고 그 속으로 몸을 넣는 인하에게 성큼성큼 걸어간 재민은 기사를 쭉 내려 찍힌 사진을 들이밀었다.
“사진이 호텔 앞에서 찍혔어요! 버젓이! 호텔 이름까지 찍혔다고요! 아니, 푸르스름한 새벽에 호텔 앞에서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찍혔으니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이미 신혜원이 형님 아이 가졌다는 기사까지 떴다고요!”
재민의 장황한 말에 인하는 그제야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인기 여자 가수와 남자 배우 역시 비슷한 기사가 터졌는데, 그 여자 가수가 낙태를 했다는 기사까지 연이어 터지면서 두 사람은 매장 당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중의 질타를 받았다.
“어디까지 기사 나갔어.”
남자의 목소리가 짙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이미지와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해 왔던 노력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짧은 무명 시절에 갖은 무시와 멸시를 받았고, 인기를 얻은 초기에는 얼굴만 반반하다는 비웃음을 샀다. 연이은 작품 성공으로 연기파 배우, 그것도 톱 배우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남자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노력을 했다.
“아마 지나가는 초등학생도 알걸요. 신혜원 씨 뱃속의 아이가 12주라는 말까지…….”
재민의 말은 방 안을 가로지르는 핸드폰 벨소리로 인해 끊겼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고 발신자를 확인한 인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어머니.”
─인하야, 어디니? 그러니까…… 집으로 와야 할 것 같구나. 지금 집에…… 아니다, 일단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더 해 보고…… 아니, 너희 의견도…… 그보다 언제 네가 연애를…….
인하는 인내심 있게 횡설수설하는 모친의 말을 듣다가 재민이 빨리 나가야 한다는 듯 발을 동동 굴리자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어머니, 지금 제가 나가 봐야 해요. 급한 일 아니면 제가 다시 연락 드릴게요.”
─많이 바쁘니? 그래, 그럼 우선 우리가 혜원 양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마. 일 마무리되면 집으로 오렴.
“……어머니, 누구라고요? 집에 누가 왔어요?”
─혜원 양의 어머니가 집에 오셨단다.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지. 우리가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아들의 연애와 결혼 소식을 사돈에게서 들어야겠니?
“아니, 왜 집에 그 여자의…… 잠깐! 결혼이라고요? 사돈?”
─그래. 그보다 너는 사진을 찍혀도 그런 곳에서 찍히니. 남들은 차 안에서 데이트하는 게 찍히던데. 내가 사돈 보기가 민망해서.
“어머니, 제가 지금 갈게요.”
인하의 얼굴에 혼란스러움과 의문, 짜증과 분노가 섞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움이 깃들었고, 그의 눈매는 의문에 찌푸려졌으며, 그의 입매는 짜증에 비틀렸고, 그의 턱은 분노로 힘이 실렸다.
“형님?”
“밑에 기자들 있어?”
“당연하죠. 그런데 제가 아버지 차를 끌고 와서 몰래 나갈 수 있어요.”
이럴 줄 알았다고,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을 줄 예상하고 아버지 차를 가지고 온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재민에게 인하는 손을 내밀었다.
“차 키요?”
“핸드폰 줘 봐.”
기사에 같이 실린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진은 그저께 찍힌 것으로, 우연히 신혜원을 만났고 인사 정도만 나눴다.
신혜원은 CF 촬영을 마치고 지나가던 길이라 했다. 매니저가 편의점에 들른다고 잠깐 정차했을 때, 그녀는 막 호텔에서 나오는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려 차에서 내렸다. 갑작스런 만남에 당황했지만, 딱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근데 형님, 거기는 왜 갔어요?”
인하는 재민을 흘끗 보고는 열려던 입을 닫았다. 자신의 사생활을 떠벌리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차마 여자를 만나느라 이 사달이 벌어졌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 자주 가던 지인이 운영하는 바에서 예전 연인인 소하를 만났다. 모델 출신답게 앞뒤로 깊게 파이고 딱 달라붙어 늘씬한 몸매를 뽐내는 옷을 입은 소하가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합석을 하자고 했다.
그렇게 같이 술을 마시다가 서로 목적이 맞아 호텔로 직행하게 됐다. 헤어졌어도 가끔 만나 잠자리를 한 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당히 서로의 욕구를 채우고 바로 호텔을 나섰다. 술을 마셨기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으려고 밖으로 나왔다.
“형님? 거기는 왜 갔냐고요. 그보다 작정하고 찍은 사진 같은데 기자가 따라붙는 거 못 느꼈어요?”
“일이 있어서 갔고, 신혜원은 우연히 만났다. 기자가 따라붙지는 않았어. 거기 있다는 걸 누가 이야기했다면 모를까.”
말을 내뱉고 난 뒤 인하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스산한 느낌이 등줄기를 따라 타고 올라왔다.
“젠장, 진소하.”
“네? 누구요? 어떤 기자인지 알겠어요?”
목소리가 워낙 낮았던 탓에 재민은 인하가 내뱉은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인하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셔츠 하나를 꺼내 몸에 걸쳤다.
생각해 보니, 소하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씻고 나오자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베개 밑으로 감추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자신이 옷을 입는 걸 보고, 같이 나가자고 씻지 않은 몸 위로 빠르게 옷을 걸치는 소하를 두고 먼저 호텔 밖으로 나왔다.
진소하, 네가 저지른 일이다 이거지.
소하와 일을 계획한 기자는 호텔 앞에 미리 와서 대기를 하던 중이었을 테고, 소하의 문자를 받고 사진 찍을 준비를 했을 거다. 그러다 소하가 아닌 우연히 만난 신혜원과 인사를 나누는 사진을 찍었을 테고.
소하가 자신을 따라 나오기 전 호텔을 떴다. 그러니 기자는 계획대로 소하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지는 못했을 거다.
소하와 짠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대신 신혜원과의 사진을 매체에 큰돈을 받고 팔았을 거다. 그러니 기사가 어제가 아닌 오늘 터진 것이고.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기승전결을 이어 나간 인하는 옷을 다 갈아입은 뒤 짜증 섞인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드레스 룸에서 나온 그는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말끔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전투적인 표정을 지으며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본가로 가자.”
“회사가 아니라요?”
그가 속해 있는 ‘Pure’ 기획사 대표 안호형이 기다리고 있다고 재민이 뒤따라 걸으며 이야기했다. 뻔히 그걸 알 텐데도 인하는 본가로 가자고 한다.
“집에 신혜원 모친이 와 있단다.”
“네? 신혜원 모친이요? 왜요?”
빨리 아니라는 정정 기사를 내보내도 모자랄 판에. 재민의 눈이 의혹으로 가득 찼다. 혹시, 이 기사가 신혜원 쪽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하는 재민에게 인하는 아니라는 확신이 섞인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신혜원 모친이 임신이라는 자극적인 내용에 열이 받아서 쫓아온 건 아니냐고 걱정을 하는 재민의 뒤에 앉은 인하는, 가는 내내 홀로 신혜원의 모친이 왜 온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본가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부친인 정인혁과 모친인 박은정은 아들의 기사와, 같이 기사가 난 여배우 모친의 방문으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따로 이야기할 것을 요구한 신혜원의 모친, 민지영이 내뱉은 말에 인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 딸과 결혼해요. 이미 기사도 다 나갔고, 임신이라는 말까지 나돌아요. 알죠? 여배우에게 이런 스캔들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리고 지금 시기가 많이 안 좋다는 것 또한 저보다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 해도 대중들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어요. 난 내 딸이 이대로 무너지는 꼴 못 봐요. 만에 하나 내 딸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라도 돈다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최근에 터진 여자 가수의 낙태 루머와, 그 여자 가수와 남자 배우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지영은 인하에게 그녀의 딸을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지영이 떠나고 인하의 부친과 모친은 그에게 둘이 사귄 지 얼마나 됐는지, 조심성 없게 왜 호텔 앞에 서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가 오기 전 지영이 무슨 말을 했는지, 부모님은 당연하게 그와 신혜원이 특별한 사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하는 그런 부모님께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소속사 사장인 호형의 부름으로 집을 나섰다.
하루. 단 하루 만에 인하의 일상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정인하, 듣고 있어?”
호형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매캐한 연기를 내뱉었다. 그의 앞에 있는 재떨이에는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그 틈을 비집고 물고 있던 담배를 짓이긴 호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하겠냐. 기사 낸다, 그럼.”
정말이지 웃기게도 신혜원 측에서는 반박 기사도, 정정 기사도 내고 있지 않았다. 본인에게 확인 중이라는 뻔한 멘트만 날렸다. 그게 더 대중들을 끓게 만든다는 걸 알 텐데도.
“‘Lune’은 뭐야? 응? 자기네 배우가 지금 임신 스캔들까지 났는데 가만히 있어? 본인 확인? 웃기고 있네. 아니라는 거 알면서 말이야!”
호형이 왈칵 화를 내더니 빨리 매체에 기사를 뿌리라고 했다.
“대표님!”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던 재민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꺽꺽대며 손가락으로 인하를 가리키는 재민의 숨이 넘어갈 듯 끊어졌다.
“뭐야?”
“그게…… ‘Lune’에서 결혼 기사가…….”
순식간에 사무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파드득, 모두가 동시에 움직이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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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실제로 들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 잠에 빠져 기능을 잃은 뇌가 분간을 하지 못한다.
쾅쾅, 손으로 하는 노크가 발차기로 변질되어 문을 부술 듯 두드린다. 소리가 달라지자 뇌가 반응을 보이며 깨어난다. 아득했던 소리가 점차적으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으음.”
침대 위에서 죽은 듯이 잠든 인형(人形)이 오랜 뒤척임 끝에 짜증이 가득한 손놀림으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이불을 쥔 손은 크고 다부졌다. 솟아오른 시퍼런 핏줄을 따라 올라가자, 잔뜩 힘이 들어간 팔뚝이 불끈거렸다.
여섯 개로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과 단단한 가슴. 근사한 몸을 가진 남자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한 바퀴 돌리자 우드득 소리가 난다. 그의 몸이 깨어났다.
“형님! 일어나 봐요!”
쾅쾅, 뇌를 울리는 소리에 아직 감겨 있는 남자의 눈꺼풀 사이가 깊게 팼다. 마른침을 삼키자 울대가 크게 위아래로 움직인다.
새하얀 얼굴에 잡티 하나 없는 피부. 매끈한 이마 아래의 짙은 눈썹과 가늘고 긴 눈매. 높게 솟은 코와 또렷한 인중 밑의 붉은 입술.
“형님!”
번쩍, 남자의 눈이 뜨였다. 깊은 눈매에 보일 듯 말듯 가느다란 속쌍꺼풀과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 몇 차례의 깜빡임에 흐렸던 눈동자에 서서히 빛이 스며들었다.
쾅쾅, 거센 두드림에 문이 흔들리는 걸 보고 나서야 남자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벌컥 문이 열리자 남자의 양손과 한 발이 허공에 멈췄다. 한 발로 몸을 지탱하던 거구의 남자가 기우뚱거렸다.
간신히 양발로 땅을 딛고 선 거구의 남자는 눈을 위로 치켜뜨고, 문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반라의 남자와 눈을 맞췄다.
두 남자 모두 꽤 장신을 자랑했는데, 반라의 남자가 188cm의 키로 거구의 남자보다는 5cm가량 더 컸다.
“뭐야. 오늘 일 없잖아.”
낮게 가라앉은 태평한 목소리에 거구의 남자는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형님! 지금 일이 문제예요? 난리 났어요, 아주!”
형님이라 불린 사내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매니저인 재민이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이유가 무엇일지 가늠하느라 여러 생각들이 오갔다. 하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뇌는 재민이 날뛰는 속도만큼 빠르게 회전하지 못했다.
“뭔데.”
“이거 봐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재민은 인터넷 신문의 연예면으로 접속했다. 그리고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기사를 누른 뒤 남자에게 건넸다.
특종! 배우 정인하(30세)와 배우 신혜원(27세) 전격 결혼 발표!
타이틀을 읽은 남자의 입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세한 내용은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재민에게 스마트폰을 건넨 그는 뒤돌아 다시 침대로 향했다.
“아! 형님! 지금 형님 결혼 기사가 났다고요!”
“스캔들이 처음도 아니고. 뭐, 이번 거는 세긴 세네. 결혼. 크큭. 빨리 기사 내리라고 해.”
막 이불을 들추고 그 속으로 몸을 넣는 인하에게 성큼성큼 걸어간 재민은 기사를 쭉 내려 찍힌 사진을 들이밀었다.
“사진이 호텔 앞에서 찍혔어요! 버젓이! 호텔 이름까지 찍혔다고요! 아니, 푸르스름한 새벽에 호텔 앞에서 두 사람이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찍혔으니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이미 신혜원이 형님 아이 가졌다는 기사까지 떴다고요!”
재민의 장황한 말에 인하는 그제야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인기 여자 가수와 남자 배우 역시 비슷한 기사가 터졌는데, 그 여자 가수가 낙태를 했다는 기사까지 연이어 터지면서 두 사람은 매장 당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중의 질타를 받았다.
“어디까지 기사 나갔어.”
남자의 목소리가 짙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이미지와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해 왔던 노력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짧은 무명 시절에 갖은 무시와 멸시를 받았고, 인기를 얻은 초기에는 얼굴만 반반하다는 비웃음을 샀다. 연이은 작품 성공으로 연기파 배우, 그것도 톱 배우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남자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는 노력을 했다.
“아마 지나가는 초등학생도 알걸요. 신혜원 씨 뱃속의 아이가 12주라는 말까지…….”
재민의 말은 방 안을 가로지르는 핸드폰 벨소리로 인해 끊겼다.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들고 발신자를 확인한 인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어머니.”
─인하야, 어디니? 그러니까…… 집으로 와야 할 것 같구나. 지금 집에…… 아니다, 일단 어른들끼리 이야기를 더 해 보고…… 아니, 너희 의견도…… 그보다 언제 네가 연애를…….
인하는 인내심 있게 횡설수설하는 모친의 말을 듣다가 재민이 빨리 나가야 한다는 듯 발을 동동 굴리자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어머니, 지금 제가 나가 봐야 해요. 급한 일 아니면 제가 다시 연락 드릴게요.”
─많이 바쁘니? 그래, 그럼 우선 우리가 혜원 양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마. 일 마무리되면 집으로 오렴.
“……어머니, 누구라고요? 집에 누가 왔어요?”
─혜원 양의 어머니가 집에 오셨단다.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지. 우리가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아들의 연애와 결혼 소식을 사돈에게서 들어야겠니?
“아니, 왜 집에 그 여자의…… 잠깐! 결혼이라고요? 사돈?”
─그래. 그보다 너는 사진을 찍혀도 그런 곳에서 찍히니. 남들은 차 안에서 데이트하는 게 찍히던데. 내가 사돈 보기가 민망해서.
“어머니, 제가 지금 갈게요.”
인하의 얼굴에 혼란스러움과 의문, 짜증과 분노가 섞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스러움이 깃들었고, 그의 눈매는 의문에 찌푸려졌으며, 그의 입매는 짜증에 비틀렸고, 그의 턱은 분노로 힘이 실렸다.
“형님?”
“밑에 기자들 있어?”
“당연하죠. 그런데 제가 아버지 차를 끌고 와서 몰래 나갈 수 있어요.”
이럴 줄 알았다고,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을 줄 예상하고 아버지 차를 가지고 온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는 재민에게 인하는 손을 내밀었다.
“차 키요?”
“핸드폰 줘 봐.”
기사에 같이 실린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진은 그저께 찍힌 것으로, 우연히 신혜원을 만났고 인사 정도만 나눴다.
신혜원은 CF 촬영을 마치고 지나가던 길이라 했다. 매니저가 편의점에 들른다고 잠깐 정차했을 때, 그녀는 막 호텔에서 나오는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려 차에서 내렸다. 갑작스런 만남에 당황했지만, 딱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근데 형님, 거기는 왜 갔어요?”
인하는 재민을 흘끗 보고는 열려던 입을 닫았다. 자신의 사생활을 떠벌리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차마 여자를 만나느라 이 사달이 벌어졌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 자주 가던 지인이 운영하는 바에서 예전 연인인 소하를 만났다. 모델 출신답게 앞뒤로 깊게 파이고 딱 달라붙어 늘씬한 몸매를 뽐내는 옷을 입은 소하가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합석을 하자고 했다.
그렇게 같이 술을 마시다가 서로 목적이 맞아 호텔로 직행하게 됐다. 헤어졌어도 가끔 만나 잠자리를 한 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당히 서로의 욕구를 채우고 바로 호텔을 나섰다. 술을 마셨기에 어쩔 수 없이 택시를 잡으려고 밖으로 나왔다.
“형님? 거기는 왜 갔냐고요. 그보다 작정하고 찍은 사진 같은데 기자가 따라붙는 거 못 느꼈어요?”
“일이 있어서 갔고, 신혜원은 우연히 만났다. 기자가 따라붙지는 않았어. 거기 있다는 걸 누가 이야기했다면 모를까.”
말을 내뱉고 난 뒤 인하는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스산한 느낌이 등줄기를 따라 타고 올라왔다.
“젠장, 진소하.”
“네? 누구요? 어떤 기자인지 알겠어요?”
목소리가 워낙 낮았던 탓에 재민은 인하가 내뱉은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인하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셔츠 하나를 꺼내 몸에 걸쳤다.
생각해 보니, 소하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씻고 나오자 화들짝 놀라며 핸드폰을 베개 밑으로 감추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자신이 옷을 입는 걸 보고, 같이 나가자고 씻지 않은 몸 위로 빠르게 옷을 걸치는 소하를 두고 먼저 호텔 밖으로 나왔다.
진소하, 네가 저지른 일이다 이거지.
소하와 일을 계획한 기자는 호텔 앞에 미리 와서 대기를 하던 중이었을 테고, 소하의 문자를 받고 사진 찍을 준비를 했을 거다. 그러다 소하가 아닌 우연히 만난 신혜원과 인사를 나누는 사진을 찍었을 테고.
소하가 자신을 따라 나오기 전 호텔을 떴다. 그러니 기자는 계획대로 소하와 함께 있는 사진을 찍지는 못했을 거다.
소하와 짠 계획이 물거품이 되자, 대신 신혜원과의 사진을 매체에 큰돈을 받고 팔았을 거다. 그러니 기사가 어제가 아닌 오늘 터진 것이고.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기승전결을 이어 나간 인하는 옷을 다 갈아입은 뒤 짜증 섞인 손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드레스 룸에서 나온 그는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말끔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전투적인 표정을 지으며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욕실에서 나왔다.
“본가로 가자.”
“회사가 아니라요?”
그가 속해 있는 ‘Pure’ 기획사 대표 안호형이 기다리고 있다고 재민이 뒤따라 걸으며 이야기했다. 뻔히 그걸 알 텐데도 인하는 본가로 가자고 한다.
“집에 신혜원 모친이 와 있단다.”
“네? 신혜원 모친이요? 왜요?”
빨리 아니라는 정정 기사를 내보내도 모자랄 판에. 재민의 눈이 의혹으로 가득 찼다. 혹시, 이 기사가 신혜원 쪽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하는 재민에게 인하는 아니라는 확신이 섞인 눈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신혜원 모친이 임신이라는 자극적인 내용에 열이 받아서 쫓아온 건 아니냐고 걱정을 하는 재민의 뒤에 앉은 인하는, 가는 내내 홀로 신혜원의 모친이 왜 온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본가에 도착했을 때 그의 부친인 정인혁과 모친인 박은정은 아들의 기사와, 같이 기사가 난 여배우 모친의 방문으로 넋이 나간 상태였다.
따로 이야기할 것을 요구한 신혜원의 모친, 민지영이 내뱉은 말에 인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리 딸과 결혼해요. 이미 기사도 다 나갔고, 임신이라는 말까지 나돌아요. 알죠? 여배우에게 이런 스캔들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리고 지금 시기가 많이 안 좋다는 것 또한 저보다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 해도 대중들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어요. 난 내 딸이 이대로 무너지는 꼴 못 봐요. 만에 하나 내 딸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라도 돈다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최근에 터진 여자 가수의 낙태 루머와, 그 여자 가수와 남자 배우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지영은 인하에게 그녀의 딸을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지영이 떠나고 인하의 부친과 모친은 그에게 둘이 사귄 지 얼마나 됐는지, 조심성 없게 왜 호텔 앞에 서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가 오기 전 지영이 무슨 말을 했는지, 부모님은 당연하게 그와 신혜원이 특별한 사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하는 그런 부모님께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소속사 사장인 호형의 부름으로 집을 나섰다.
하루. 단 하루 만에 인하의 일상이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정인하, 듣고 있어?”
호형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 매캐한 연기를 내뱉었다. 그의 앞에 있는 재떨이에는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가 가득했다. 그 틈을 비집고 물고 있던 담배를 짓이긴 호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래? 뭘 어떻게 하겠냐. 기사 낸다, 그럼.”
정말이지 웃기게도 신혜원 측에서는 반박 기사도, 정정 기사도 내고 있지 않았다. 본인에게 확인 중이라는 뻔한 멘트만 날렸다. 그게 더 대중들을 끓게 만든다는 걸 알 텐데도.
“‘Lune’은 뭐야? 응? 자기네 배우가 지금 임신 스캔들까지 났는데 가만히 있어? 본인 확인? 웃기고 있네. 아니라는 거 알면서 말이야!”
호형이 왈칵 화를 내더니 빨리 매체에 기사를 뿌리라고 했다.
“대표님!”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던 재민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소리를 질렀다. 꺽꺽대며 손가락으로 인하를 가리키는 재민의 숨이 넘어갈 듯 끊어졌다.
“뭐야?”
“그게…… ‘Lune’에서 결혼 기사가…….”
순식간에 사무실이 정적에 휩싸였다. 파드득, 모두가 동시에 움직이며 스마트폰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