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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어필 드라마(15세 개정판) 2화
“미치겠네. 야! 너 신혜원 모친 만났다며!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왜 그쪽에서 결혼 기사를 내는 건데!”
내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인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영의 행동이 이리도 빠를 줄이야. 아니, 설마 하니 정말 결혼을 바랄 줄은 몰랐다. 아차 하는 순간에 자신의 인생이 남의 손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이.
“신혜원 좀 만나고 올게요. 재민아, 이쪽에 연락해 봐. 만나야겠다. 아직 반박 기사는 내지 말아요.”
인하는 지영이 주었던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내 재민에게 건네줬다.
지영과 연락을 한 재민이 인하를 데리고 간 곳은 한 아파트였다.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 인하에게 재민은 혜원이 모친과 같이 사는 아파트라고 알려 줬다.
“넌 기다려.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차에서 내리기 전 깊은 한숨을 내쉰 인하는 내리자마자 빠르게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난 후, 두 차례 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한 것인지, 아니면 달리 올 사람이 없어 확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 현관문이 바로 열렸다.
현관문을 연 지영은 인하에게 들어오라고 짧게 말을 한 뒤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인하가 막 신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다소곳하게 서 있는 여인이 그를 맞이했다.
여자의 평균을 살짝 웃도는 키에 검은 긴 생머리. 발목 부근에서 살랑거리는 롱 원피스에 노란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여자는 전체적으로 여리여리한 느낌이다.
직업 특성상 수많은 미인들을 보아 온 인하였지만 그런 그도 혜원을 보며 손에 꼽을 정도로 미인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이 본 여자들 중 단언컨대 가장 아름다운 외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어서인지 옅은 화장조차 하지 않은 맨얼굴이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작은 얼굴에 비해 큰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 새하얀 피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이 난다. 마치 전시된 인형을 보는 듯하다.
“인하 선배님?”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가는 미성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입술을 물끄러미 보던 인하가 시선을 올려 혜원과 눈을 맞췄다. 커다란 눈에는 옅은 의문이 서려 있다.
온전히 자신에게 떨어지는 인하의 시선에 혜원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감기듯 반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간다.
“선배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기사 때문에. 그리고 그쪽 어머니 때문에.”
“기사요? 어머니 만나러 오신 거예요?”
혜원은 인하가 자신의 모친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놀란 기색을 지운 혜원이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이봐, 어딜 가.”
자리를 비켜 주듯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혜원의 팔을 인하가 붙잡았다. 왜 그러시냐는 순진한 물음에 인하가 짜증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냉담하게 쳐다봤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혜원이 너도 앉아라.”
차를 내온 지영이 두 사람을 거실 소파로 불렀다. 인하가 잡은 팔을 놓자 혜원이 사뿐사뿐 걸어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기 전 인하를 돌아봤다.
느릿한 걸음으로 인하가 뒤따라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도 소파에 앉았다.
인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지영에게 결혼 기사에 대해 물었다.
정말 자신이 혜원과 결혼을 하기를 원하는 것인지, 겨우 인사만 나누는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이 우연히 찍힌 사진으로 결혼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지 묻는 인하의 말에 혜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님. 결혼이라니요? 제가 선배님과 결혼을 하나요?”
“……설마 몰라? 우리 둘이 호텔 앞에서 사진 찍힌 거랑 그쪽 소속사에서 결혼 기사 낸 거? 당신 어머니가 우리 부모님까지 찾아오셨던 거 몰라?”
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전혀 몰랐다는 반응에 오히려 인하가 더 놀랐다.
그런 딸에게 지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기사가 났고, 임신을 비롯한 여러 루머 때문에 인하와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 말도 안 돼요! 지금이라도 정정 기사를……. 어떡해.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그때 괜히 인사를 드려서. 사진이 찍힌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가며 저 때문이라고 사과를 하는 혜원을 보고 양심이 찔린 인하는 고개를 돌리며 이맛살을 구겼다.
소하가 저지른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보면 사생활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저 때문이기에 약간의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혜원은 당장 정정 기사를 내자고 말했지만, 지영은 차갑게 혜원의 말문을 막았다. 인하에게도 말했던, 최근에 일어났던 여자 가수와 남자 배우의 스캔들을 들먹거리며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영의 단호한 말에 혜원은 입술을 짓이겼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혜원을 외면했던 인하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 움찔했다.
커다란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미안함이 잔뜩 서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옷자락을 쥔 손이 떨렸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의 모습은 겁에 질려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닌 것…….”
“시끄럽다. 지금 네가 나설 게 아니야!”
당사자인 혜원의 의견을 묵살한 지영은 다시 한 번 왜 두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마치 혜원에게 세뇌를 시키려는 듯이. 혜원이 인하를 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이.
강압적인 모친에게 기가 팍 죽은 모습과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이라는 태도가 인하의 목을 죄었다. 그는 지영에게 모든 게 다 제 탓이니 딸을 그만 잡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는 눈을 감고 차분하게 생각을 했다.
여기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혜원은 그 스캔들에 크나큰 영향을 받을 테고, 한동안 활동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친에게…… 젠장. 자신 때문에 모든 피해가 혜원에게로 간다.
눈을 뜬 인하의 시야에 혜원의 가는 어깨가 들어왔다. 작게 떨리는 가는 어깨가.
애써 혜원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건 당사자들끼리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잔뜩 날이 선 눈을 본 지영은 그를 더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딸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점에서는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각자가 신중하게 생각을 한 뒤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자는 말을 남기고 인하는 집을 나섰다.
‘Lune’에서 오전에 보도된 결혼 기사는 오보이며, 확인 중이라는 기사를 다시 내보냈다.
두 기획사 모두가 당사자에게 확인 중이라는 말로 시간을 버는 사이, 집으로 돌아온 인하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결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자꾸만 혜원의 모습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조용히 혼자 생각할 테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핸드폰이 울렸다. 눈을 뜨고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정말로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목을 매만졌다.
전화를 받지 않자 벨소리가 뚝 끊기더니 문자가 왔다.
계속해서 루머가 퍼지고 있으니 빨리 기사를 내자는 호형의 문자를 읽은 인하는 더 시간을 달라고 답장을 보낸 뒤 아예 핸드폰을 꺼 버렸다.
“답답하네.”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문을 활짝 열자, 집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한꺼번에 들어찼다. 베란다 문을 열어 둔 그는 소파로 가 털썩 누웠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소파에 누워 있던 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현관문을 열었다.
“뭐야, 왜?”
“핸드폰은 왜 꺼 놓으셨어요?”
퉁퉁 말을 내뱉은 재민이 슬쩍 몸을 옆으로 뺐다. 재민에게 가려져 있던 여리여리한 몸이 반쯤 드러났다.
“……신혜원?”
혜원이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재민은 인하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이다가 냉담한 그의 눈빛에 시선을 피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아서요.”
“들어와. 재민이 넌 밖에서 기다리고.”
머뭇거리던 혜원이 재민에게 인사를 한 뒤 인하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는 인하와 달리 혜원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멀찍이 섰다.
눈치를 보며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는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인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 그 역시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재민 씨에게 부탁해서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핸드폰을 꺼 놓았던 걸 상기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할 수 없다고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인하에게 혜원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은 선후배 사이일 뿐,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정정 기사를 내자는 말에 인하는 안심했다.
그러나 사진이 찍힌 것과 모친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사과에는 난감함을 표했다.
“사진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어머님의 행동도 신경 쓰지 마.”
지영의 행동은 화가 났지만 혜원의 잘못이 아니었고, 사진은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기에 양심이 찔린 그는 혜원의 사과를 물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날이 밝는 대로 저희 측에서 먼저 기사를 낼게요. 저기, 그런데 괜찮으세요?”
“뭐가?”
“얼굴이 빨개요.”
혜원의 말에 인하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체온이 높아진 것 같기는 하다.
인하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하도 그녀를 따라 일어나다가 갑자기 드는 어지럼증에 눈을 질끈 감고 도로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놀라서 다가와 부축을 하던 혜원은 그의 높은 체온에 눈을 크게 떴다.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밖에 있던 재민에게 알리자 그가 급히 들어와 인하를 부축해 안방 침대에 눕혔다. 갑작스럽게 오른 고열로 인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
분명 눈을 떴는데 깜깜하다. 인하는 눈으로 손을 가져갔다가 무언가가 덮여 있다는 걸 깨닫고 그 무언가를 쥐었다.
축축한 수건이 손에 잡혔다. 이마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이 잠결에 뒤척여서인지 눈을 가린 것이었다.
“재민이가 올려놓았나.”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몸이 한결 가볍다. 인하는 침대에서 벗어나 거실로 나갔다.
“일어나셨어요?”
갑작스런 여자의 목소리에 놀란 그가 몸을 홱 돌렸다. 혜원이 그를 보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떻게…… 아직 안 갔어?”
인하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찾았다. 4시가 넘어가는 시각.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냥 가요. 혹시나 해서 죽을 만들었어요. 재민 씨는 저쪽 방에서 자고 있어요.”
인하는 인상을 쓰며 재민이 자고 있다는 방을 노려봤다. 그의 사나운 얼굴을 본 혜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집이 춥더니.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더라고요. 감기 걸리신 것 같은데, 죽 드시고 약 드세요.”
“나 간호하느라 지금까지 못 간 거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원을 보고 인하가 묘한 얼굴을 했다.
아픈 적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아프다고 한들 이런 간호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재민이 죽을 사 놓거나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전부였다.
물수건을 이마 위에 올려놓은 것도 혜원이 한 일임을 눈치챈 그는 부엌으로 향하는 혜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부엌을 좀 사용했어요. 드세요.”
죽이 담긴 그릇과 간장이 따라진 종자. 물끄러미 그것을 보던 인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뒤 숟가락을 들었다. 혜원은 그의 앞에 앉아 조용히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같이하는 식사가 아닌, 혼자서 하는 식사를 누군가 기다려 주고 바라봐 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죽 그릇을 다 비워 내자 물을 따라 앞으로 놓아 주는 혜원을 보며 인하는 ‘결혼을 하면 이렇게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
“약도 드세요.”
혜원이 포장된 약을 툭, 그의 손에 떨어트렸다. 약까지 챙겨 받은 인하는 식탁을 치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시간까지 집에도 못 가고. 미안하네.”
“괜찮아요. 선배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어요. 혹시 또 열이 오를지 모르니 약 꼭 챙겨 드세요.”
“미치겠네. 야! 너 신혜원 모친 만났다며!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왜 그쪽에서 결혼 기사를 내는 건데!”
내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인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영의 행동이 이리도 빠를 줄이야. 아니, 설마 하니 정말 결혼을 바랄 줄은 몰랐다. 아차 하는 순간에 자신의 인생이 남의 손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이.
“신혜원 좀 만나고 올게요. 재민아, 이쪽에 연락해 봐. 만나야겠다. 아직 반박 기사는 내지 말아요.”
인하는 지영이 주었던 명함을 주머니에서 꺼내 재민에게 건네줬다.
지영과 연락을 한 재민이 인하를 데리고 간 곳은 한 아파트였다.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 인하에게 재민은 혜원이 모친과 같이 사는 아파트라고 알려 줬다.
“넌 기다려. 나 혼자 갔다 올 테니.”
차에서 내리기 전 깊은 한숨을 내쉰 인하는 내리자마자 빠르게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난 후, 두 차례 더 깊은 한숨을 내뱉고 초인종을 눌렀다.
인터폰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한 것인지, 아니면 달리 올 사람이 없어 확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 현관문이 바로 열렸다.
현관문을 연 지영은 인하에게 들어오라고 짧게 말을 한 뒤 돌아서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인하가 막 신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다소곳하게 서 있는 여인이 그를 맞이했다.
여자의 평균을 살짝 웃도는 키에 검은 긴 생머리. 발목 부근에서 살랑거리는 롱 원피스에 노란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는 여자는 전체적으로 여리여리한 느낌이다.
직업 특성상 수많은 미인들을 보아 온 인하였지만 그런 그도 혜원을 보며 손에 꼽을 정도로 미인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이 본 여자들 중 단언컨대 가장 아름다운 외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어서인지 옅은 화장조차 하지 않은 맨얼굴이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작은 얼굴에 비해 큰 눈과 오뚝한 코, 그리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 새하얀 피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매끄럽게 빛이 난다. 마치 전시된 인형을 보는 듯하다.
“인하 선배님?”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가는 미성의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 입술을 물끄러미 보던 인하가 시선을 올려 혜원과 눈을 맞췄다. 커다란 눈에는 옅은 의문이 서려 있다.
온전히 자신에게 떨어지는 인하의 시선에 혜원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감기듯 반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간다.
“선배님이 여기는 어쩐 일로…….”
“기사 때문에. 그리고 그쪽 어머니 때문에.”
“기사요? 어머니 만나러 오신 거예요?”
혜원은 인하가 자신의 모친과 아는 사이라는 것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놀란 기색을 지운 혜원이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이봐, 어딜 가.”
자리를 비켜 주듯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혜원의 팔을 인하가 붙잡았다. 왜 그러시냐는 순진한 물음에 인하가 짜증이 서린 눈으로 그녀를 냉담하게 쳐다봤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혜원이 너도 앉아라.”
차를 내온 지영이 두 사람을 거실 소파로 불렀다. 인하가 잡은 팔을 놓자 혜원이 사뿐사뿐 걸어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기 전 인하를 돌아봤다.
느릿한 걸음으로 인하가 뒤따라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도 소파에 앉았다.
인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지영에게 결혼 기사에 대해 물었다.
정말 자신이 혜원과 결혼을 하기를 원하는 것인지, 겨우 인사만 나누는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이 우연히 찍힌 사진으로 결혼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한 것인지 묻는 인하의 말에 혜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선배님. 결혼이라니요? 제가 선배님과 결혼을 하나요?”
“……설마 몰라? 우리 둘이 호텔 앞에서 사진 찍힌 거랑 그쪽 소속사에서 결혼 기사 낸 거? 당신 어머니가 우리 부모님까지 찾아오셨던 거 몰라?”
혜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헉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전혀 몰랐다는 반응에 오히려 인하가 더 놀랐다.
그런 딸에게 지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기사가 났고, 임신을 비롯한 여러 루머 때문에 인하와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 말도 안 돼요! 지금이라도 정정 기사를……. 어떡해.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그때 괜히 인사를 드려서. 사진이 찍힌 줄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가며 저 때문이라고 사과를 하는 혜원을 보고 양심이 찔린 인하는 고개를 돌리며 이맛살을 구겼다.
소하가 저지른 일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보면 사생활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저 때문이기에 약간의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혜원은 당장 정정 기사를 내자고 말했지만, 지영은 차갑게 혜원의 말문을 막았다. 인하에게도 말했던, 최근에 일어났던 여자 가수와 남자 배우의 스캔들을 들먹거리며 결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영의 단호한 말에 혜원은 입술을 짓이겼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혜원을 외면했던 인하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 움찔했다.
커다란 눈망울이 일렁거렸다. 미안함이 잔뜩 서린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옷자락을 쥔 손이 떨렸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의 모습은 겁에 질려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닌 것…….”
“시끄럽다. 지금 네가 나설 게 아니야!”
당사자인 혜원의 의견을 묵살한 지영은 다시 한 번 왜 두 사람이 결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마치 혜원에게 세뇌를 시키려는 듯이. 혜원이 인하를 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이.
강압적인 모친에게 기가 팍 죽은 모습과 모든 게 다 자신의 잘못이라는 태도가 인하의 목을 죄었다. 그는 지영에게 모든 게 다 제 탓이니 딸을 그만 잡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는 눈을 감고 차분하게 생각을 했다.
여기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혜원은 그 스캔들에 크나큰 영향을 받을 테고, 한동안 활동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친에게…… 젠장. 자신 때문에 모든 피해가 혜원에게로 간다.
눈을 뜬 인하의 시야에 혜원의 가는 어깨가 들어왔다. 작게 떨리는 가는 어깨가.
애써 혜원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건 당사자들끼리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잔뜩 날이 선 눈을 본 지영은 그를 더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딸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점에서는 못마땅함을 드러냈다.
각자가 신중하게 생각을 한 뒤에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자는 말을 남기고 인하는 집을 나섰다.
‘Lune’에서 오전에 보도된 결혼 기사는 오보이며, 확인 중이라는 기사를 다시 내보냈다.
두 기획사 모두가 당사자에게 확인 중이라는 말로 시간을 버는 사이, 집으로 돌아온 인하는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결혼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결혼을 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자꾸만 혜원의 모습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조용히 혼자 생각할 테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핸드폰이 울렸다. 눈을 뜨고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정말로 가시가 걸린 것 같은 기분에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목을 매만졌다.
전화를 받지 않자 벨소리가 뚝 끊기더니 문자가 왔다.
계속해서 루머가 퍼지고 있으니 빨리 기사를 내자는 호형의 문자를 읽은 인하는 더 시간을 달라고 답장을 보낸 뒤 아예 핸드폰을 꺼 버렸다.
“답답하네.”
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 문을 활짝 열자, 집 안으로 서늘한 바람이 한꺼번에 들어찼다. 베란다 문을 열어 둔 그는 소파로 가 털썩 누웠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소파에 누워 있던 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현관문을 열었다.
“뭐야, 왜?”
“핸드폰은 왜 꺼 놓으셨어요?”
퉁퉁 말을 내뱉은 재민이 슬쩍 몸을 옆으로 뺐다. 재민에게 가려져 있던 여리여리한 몸이 반쯤 드러났다.
“……신혜원?”
혜원이 허리를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재민은 인하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이다가 냉담한 그의 눈빛에 시선을 피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아서요.”
“들어와. 재민이 넌 밖에서 기다리고.”
머뭇거리던 혜원이 재민에게 인사를 한 뒤 인하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앉는 인하와 달리 혜원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멀찍이 섰다.
눈치를 보며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는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인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 그 역시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재민 씨에게 부탁해서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어요.”
핸드폰을 꺼 놓았던 걸 상기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은 할 수 없다고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인하에게 혜원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은 선후배 사이일 뿐, 연인 관계가 아니라는 정정 기사를 내자는 말에 인하는 안심했다.
그러나 사진이 찍힌 것과 모친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사과에는 난감함을 표했다.
“사진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어머님의 행동도 신경 쓰지 마.”
지영의 행동은 화가 났지만 혜원의 잘못이 아니었고, 사진은 원인 제공자가 자신이기에 양심이 찔린 그는 혜원의 사과를 물렸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날이 밝는 대로 저희 측에서 먼저 기사를 낼게요. 저기, 그런데 괜찮으세요?”
“뭐가?”
“얼굴이 빨개요.”
혜원의 말에 인하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체온이 높아진 것 같기는 하다.
인하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혜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하도 그녀를 따라 일어나다가 갑자기 드는 어지럼증에 눈을 질끈 감고 도로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놀라서 다가와 부축을 하던 혜원은 그의 높은 체온에 눈을 크게 떴다.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밖에 있던 재민에게 알리자 그가 급히 들어와 인하를 부축해 안방 침대에 눕혔다. 갑작스럽게 오른 고열로 인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렸다.
분명 눈을 떴는데 깜깜하다. 인하는 눈으로 손을 가져갔다가 무언가가 덮여 있다는 걸 깨닫고 그 무언가를 쥐었다.
축축한 수건이 손에 잡혔다. 이마에 올려져 있던 물수건이 잠결에 뒤척여서인지 눈을 가린 것이었다.
“재민이가 올려놓았나.”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몸이 한결 가볍다. 인하는 침대에서 벗어나 거실로 나갔다.
“일어나셨어요?”
갑작스런 여자의 목소리에 놀란 그가 몸을 홱 돌렸다. 혜원이 그를 보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떻게…… 아직 안 갔어?”
인하가 고개를 돌려 시계를 찾았다. 4시가 넘어가는 시각.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그냥 가요. 혹시나 해서 죽을 만들었어요. 재민 씨는 저쪽 방에서 자고 있어요.”
인하는 인상을 쓰며 재민이 자고 있다는 방을 노려봤다. 그의 사나운 얼굴을 본 혜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집이 춥더니.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더라고요. 감기 걸리신 것 같은데, 죽 드시고 약 드세요.”
“나 간호하느라 지금까지 못 간 거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혜원을 보고 인하가 묘한 얼굴을 했다.
아픈 적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아프다고 한들 이런 간호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재민이 죽을 사 놓거나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게 전부였다.
물수건을 이마 위에 올려놓은 것도 혜원이 한 일임을 눈치챈 그는 부엌으로 향하는 혜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부엌을 좀 사용했어요. 드세요.”
죽이 담긴 그릇과 간장이 따라진 종자. 물끄러미 그것을 보던 인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뒤 숟가락을 들었다. 혜원은 그의 앞에 앉아 조용히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같이하는 식사가 아닌, 혼자서 하는 식사를 누군가 기다려 주고 바라봐 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죽 그릇을 다 비워 내자 물을 따라 앞으로 놓아 주는 혜원을 보며 인하는 ‘결혼을 하면 이렇게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
“약도 드세요.”
혜원이 포장된 약을 툭, 그의 손에 떨어트렸다. 약까지 챙겨 받은 인하는 식탁을 치우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 시간까지 집에도 못 가고. 미안하네.”
“괜찮아요. 선배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어요. 혹시 또 열이 오를지 모르니 약 꼭 챙겨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