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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싶어서 (1화)



돈도, 지위도, 권력도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



prologue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믿는 이가 얼마나 될까.
다들 꿈꾸고, 로망이라 외치면서도 정작 그 말을 믿는 이는 세상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것에 로망조차 없는, 말 그대로 삶의 희망도 없는 여자였다.
그런 자신이 그 말을 믿고 있을까? 누구라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먼저 자신 있게 미쳤냐는 대답을 들려줄 것이다.
오래전에 그 말에 크게 데여 지금까지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까. 그 어처구니없는 말을 핑계 삼아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이에게 아직까지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런 자신이 저 말을 믿을 리 없었다. 믿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자신에 관한 소문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이미 감정이란 것은 사치스러운 것이었고, 불필요한 존재로 전락한 지 오래였으니까. 사랑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었고, 가장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것을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그 순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이 코웃음을 치던 그 말이 현실로 닥친 그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데는 0.2초면 충분하다 했는가.
그 말을 처음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시간도 필요 없었으니까. 한순간에 시선을 빼앗겼다. 얼굴을 본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자신의 얼굴조차 보지 않은 채, 한순간의 변덕으로 떨어진 지갑을 주워 준 그가 할 일을 끝내고 자신의 인사에 살짝 고개를 까딱이며 유유히 자신을 지나쳐 갔음에도.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다면 아마 숨이 넘어갈 정도로 비웃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본인조차 믿기지 않는 일이었는데 오죽했을까.
또 누구는 얼굴 보고 반했냐며 비난할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심지어 이름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어찌해 보기도 전에 사랑에 빠져 버렸으니.
의외로 자신은 상대의 얼굴이 중요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자신도 왜 그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연했다.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아는 것은 고작 얼굴 하나였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을 만큼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이 생긴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 어떤 남자에게도 뛰지 않던 심장이 반응했으니까. 그날 유유히 자신을 스쳐 지나가던 그 남자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친구에게조차.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것이 퍼져 나간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될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이 마음을 고백할 마음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럴 정도로 자신은 열정이 넘치지도, 자신에게 애착이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그가 자신의 일에 말려드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정작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 테니.
아마 그는 자신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무슨 대단한 인연이었다고, 무슨 큰일이 있었다고 얼굴을 기억하겠는가. 아무리 스스로의 얼굴이 괜찮다고 해도 한순간에 이성에게 관심 없어 보이는 사람의 뇌리에 기억될 것이라 생각할 정도의 수준은 못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이 마음만이 소중했다. 이 마음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망가지기밖에 않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둘 용기는 자신에게 없었다.
비겁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좋은 것이라면.
“야! 오늘 모일 거지?”
“귀찮아.”
“어이. 이러기야?”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런 자신이 단 한 순간, 어처구니없는 변덕을 부리고 만다.
인생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만행이었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첫 번째


“어. 저런 여자도 이곳에서 받던가?”
“확실히 옷이 좀 그렇긴 하네.”
리셋.
강남 최고의 바이자, 라이브하우스였다. 고급 바의 철저한 수질 관리에 누구라도 들어가고 싶어 안달하는 리셋은 회원제인 데다가 웬만한 수준이 아니면 회원이 아닌 이는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제집처럼 쉽게 드나드는 강현은 늘 본의 아니게 붙어 다니는 서진과 윤서와 함께 리셋에서 여느 때와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강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술을 마시고 있어도 알아서 여자들이 달라붙는다. 연예인보다 훤칠한 외모와 특유의 다가갈 수 없는 차가운 분위기는 가만히 있어도 여자를 매혹시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여자들이 기회를 봐서 강현에게 다가가려 눈에 불을 켜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흔치 않게도 리셋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었다. 리셋에 있는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옷차림으로.
“……이 리셋이 다 죽었나. 아니면, 저 여자가 이상한 건가.”
이 리셋과 정말 어울리지 않게도 여자는 평범한 검은색 바지에 흰색 셔츠, 그리고 빨간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길 가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이 리셋에 그런 차림으로 오니 당연히 시선이 쏠릴 수밖에. 그러면서도 그것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차림에 서진이 머리를 갸웃거리는데 그런 서진을 보며 윤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정말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며. 그 모습에 서진이 의아한 얼굴로 윤서를 돌아보자 윤서는 손가락으로 여자를 가리키며 서진의 궁금증에 친절하게 답을 해 주었다.
“저 여자 얼굴 보고 얘기해.”
“뭐? 얼굴이 뭐. 여기서 그런 게 왜……!”
그 말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윤서의 말대로 고개를 돌려 여자의 얼굴을 본 서진은 이내 하던 말도 멈추고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란 상식은 이 리셋에서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고급 회원제 바인 만큼 신나게 돈을 들여 외모를 가꾼 여자들이 수두룩했으니 얼굴을 따질 가치가 없었다. 그냥 조금 더 취향인 여자를 고를 뿐. 이곳에서는 누가 더 예쁘고 안 예쁘고는 구별할 수도 없을뿐더러 따져 봤자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인지 모를 돈을 쏟아부어 남들은 쉽게 가지지 못할 황홀한 몸매와 얼굴을 가진 이들이 수두룩한 이곳에서 여자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빛이 났다. 화장은 매너라고 하는 이 시대에서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성형을 했는지 의심스러운 것을 넘어서 자연임을 확연히 보여 주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그 외모는 모든 이들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가게에 들어온 여자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가게 직원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저, 줄리안 사장님 부탁으로 왔는데요.”
“……네? 줄리……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모든 이들의 귀를 황홀하게 할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그저 말을 한 것뿐이었는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자장가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너무나 예쁜 목소리였다.
다들 그 목소리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여자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리셋 가운데에 있는 작은 라이브 무대에 올라섰다. 여자가 라이브 무대 중앙에 있는 의자에 앉자 직원들이 서둘러 여자의 앞에 있는 마이크를 조정해 주었다. 언제 왔는지 뒤에는 리셋에서 항시 대기하는 백밴드가 있었고 말이다.
조명까지 그녀의 위로 쏟아지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여자는 태연한 얼굴로 백밴드를 향해 시선을 주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당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의 소음이라도 낼까 봐 모두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이조차 없었다.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서.

거리를 걸어도 어느 순간부터 당신을 그리게 되고
눈을 뜨면 당신을 찾게 되었어.
스스로가 믿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이 큰 가게에서 여자의 목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이 주목적인 바에서 이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사랑해. 하지만 이 말을 할 용기가 없는 나는 이 마음을 홀로 삼키고 말아.
망가질 당신을 위해서. 상처받을 나를 위해서. 그래도 나는…….

듣는 사람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노래였다. 이 큰 가게에서 고요히 여자의 노랫소리만 들렸기에 그 효과는 극에 달했다. 실제로 벌써부터 눈물을 흘리는 이까지 있었다.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말아.
포기할 법한데도 계속해서 당신을 사랑하고 말아.

가사가 애절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명했다. 세상에 애절한 가사가 얼마나 많은데. 그저 이 여자의 노래가 진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여자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서글프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사랑해. 너에게 전하지 못할 이 마음을.
지금 이 노래를 듣고 있지 않을…….
너에게 노래해.

노래가 끝나고 여자가 무대에서 내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는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노래의 여운에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여자가 화장실로 사라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바텐더가 아직도 무언가에 홀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진짜 있었잖아.”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바텐더의 바로 앞에 있던 서진과 윤서가 바텐더의 중얼거림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득달같이 되묻자 바텐더가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두 사람의 물음에 답을 해 주었다.
“로렐라이요. 모르세요? 이쪽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설마 그 라이브하우스의 로렐라이?”
“예.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무지 촌스럽다고 욕했는데 그 심정이 이해가 갈 지경이에요. 누군지 이름 하나는 진짜 잘 지었네요.”
“로렐라이가 진짜 있는 거였어? 소문이 아니라?!”
바텐더의 말에 서진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라이브하우스의 로렐라이. 그건 서울에 있는 라이브하우스를 겸한 바와 클럽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었다. 사람의 혼을 빼놓는 로렐라이가 존재한다는.
어쩌다 한번 바람처럼 나타나 사람들의 혼을 빼놓고 간다는, 말 그대로 소문의 여자였다. 로렐라이를 본 사람들은 얼굴까지 끝내준다고 그녀를 찬양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는 정말 손에 꼽았다. 저 정도의 외모라면 뜨자마자 바로 누구라며 소리칠 이가 있을 법한데도 말이다.
때문에 그것은 말 그대로 소문이 되었다. 사람들의 환상이나 다름없는.
“한순간에 바보가 된 기분이야.”
“나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윤서가 넋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서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그런 두 사람과는 다르게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인 강현은 여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