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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하시겠습니까?
3화
챕터 1
“유나야, 나 출근할 건데 도시락 다 됐어?”
“어 응, 여기.”
박진천은 받아 든 도시락 가방을 뒤적이며 물과 수저는 제대로 들었는지, 디저트로 먹을 과일은 어떤 종류인지, 오늘의 반찬은 무엇인지 등을 살폈다. 도시락을 싸느라 새벽부터 일어난 탓에 눈 밑에 거멓게 다크서클이 올라온 유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이내 확인을 마친 건지 박진천이 고개를 드는데, 표정이 어째 조금 불만스럽다.
“오늘은 키위가 없네?”
“응? 키위……?”
“나 후식으로 키위랑 오렌지 없으면 입가심 안 되는데.”
얼굴을 구기며 불평하는 모양새에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온다. 그래도 유나는 꾸욱 참았다. 진천도 일하러 가는 거니까, 그래.
“아, 어제 장 보러 갔는데 키위값이 너무 비싸서 못 샀어. 다음에 세일하면 넣어 줄게.”
“유나야. 그 키위값 얼마나 한다고 그걸 못 사? 오빠가 그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미안해.”
진천은 그렇게 한참을 투덜거리다 겨우 출근했다. 그가 나가고 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천은 나를 여자 친구가 아니라 이 집 가정부로 아는 걸까.
유나와 진천은 3년을 사귄 애인 사이였다.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둘은 고등학교 때 서로를 알게 됐다. 유나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진천은 두 살이 더 많았다. 처음 만난 그날은 체육 수업이 있었다.
‘여자애들은 피구 하고 남자애들은 알아서 축구공 가져와서 축구나 해라.’
만사가 귀찮은 체육 선생님 덕분에 반 아이들은 체육 시간마다 공놀이에 열중할 수 있었다. 유나는 나름 피 터지는 피구 경기 한 판을 끝내고 더위를 식힐 겸 친구들과 등나무 아래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주제는 시시콜콜한 학교 얘기, 성적 얘기 등 잡다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여고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남자 친구였다.
유나는 그때까진 남자 친구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 이성 친구들은 많았지만 그녀의 마음에 꽂힐 만큼 맘에 든 남학생은 없었다. 딱히 대쉬하는 남학생도 없고 맘에 든 이도 없으니 열일곱 살까지의 솔로 인생은 지나치게 평화롭다 못해 별 얘깃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등나무 아래에서 유나는 진천을 보고 말았다. 3학년 학생들과 우연찮게 체육 시간이 겹쳐 그들이 농구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 것이다.
적당한 키에 긴 팔,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 유나는 그렇게 첫사랑에 빠졌다. 유나가 넋 놓고 3학년 학생을 구경하고 있는 걸 알고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저기, 저 오빠. 너무 잘 생기지 않았어?’
‘방금 골 넣은 사람 말하는 거야?’
‘응! 와 어떡해. 진짜 멋있다. 조각상 같아……!’
그렇게 말하는 유나를 보는 친구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멋……있어? 저 사람이?’
‘몰랐는데 김유나 눈이 좀 낮네. 조각상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 굳힌 것처럼 생겼는데.’
친구들은 그 의견에 반대했지만 유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외모라는 건 어차피 주관적인 기준이니까.
3학년생이 농구를 하고 있는 곳과 등나무 아래 벤치는 아주 가까웠다. 한창 이성의 눈을 신경 쓸 그 나이 때 남학생들은 1학년 여학생들이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단 걸 알고는 더욱 멋진 척하며 골을 넣으려 애썼다.
유나는 그중에서도 진천만 보였다. 우연히도 그와 그녀의 시선은 체육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마주쳤고, 진천이 자판기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하나 사 주는 것으로 그들의 만남이 시작됐다.
첫사랑과 첫 연애를 하게 된 유나는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그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진 둘은 자주 만나 놀았다.
한참 공부해야 할 고3이라 그런가, 시간마다 배고프다 칭얼대는 진천을 위해 떡볶이도 김밥도 사다 줬고, 참고서가 필요하다 하면 부리나케 서점으로 달려가 용돈을 탈탈 털어 책을 선물했다. 그땐 뭘 해도 다 좋았다.
문제는 진천이 스무 살이 되고 군대에 입대하면서부터였다. 원래 그다지 좋은 성적은 못 되었던 진천은 대학 진학에 실패했고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군대부터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유나는 눈물로 그를 배웅했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고무신이 된 유나는 꼬박꼬박 손편지도 썼고 선물도 보냈다. 그가 휴가를 나오거나 그를 면회하러 가는 날이 되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곤 했다.
유나는 면회실에서 진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밀린 대화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진천은 그녀가 싸 온 도시락에 더 관심 있을 때가 많았다. 유나는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진천을 만나는 게 어디냐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2년이 흘러 진천은 제대했고 유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유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하게 됐다. 그건 사실 남자 친구인 진천의 영향이 컸다.
‘유나야. 있지, 나 전역하면 서울 살고 싶다.’
‘서울? 거긴 갑자기 왜……?’
‘뭔가 우리 고향은 답답하고 좀 그래. 내가 가끔 휴가 나올 때 서울 거리 둘러보니까 와, 번쩍번쩍하고 화려하고 진짜 비교가 안 되더라.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랄까?’
대체 뭐가 답답하단 건지 유나는 이해가 안 됐다. 우리 살던 곳이 뭐 어때서? 게다가 진천이 하는 말이 유나에겐 상당히 서운하게 들렸다. 여태까지도 장거리 연애였는데 서울로 가겠다니. 그럼 또 장거리 연애를 하자, 이 말 아닌가.
‘그럼 우린 어떻게 만나? 서울은 너무 멀잖아.’
‘너도 서울에서 나랑 같이 살면 되지.’
뭐? 동거하자고? 유나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동거를!
“오빠 전역하면 결혼하면 되잖아. 우리 같이 한 집에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자. 어때?”
이게 말로만 듣던 프러포즈인가. 유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진천이 풀어놓는 꿈같이 아름다운 결혼 생활 이야기에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같이 살면 이것저것 함께할 수 있고, 헤어질 때 아쉬워할 필요도 없이 항상 함께 있는 거고……. 유나는 가슴이 들떴다.
결국 부모님께는 서울에서 공부하겠단 말로 둘러대고 유나 혼자 미리 서울로 올라와 그와 함께 살 집을 구했다. 유나의 집은 가난한 편에 속했기에 지원을 바라기는 힘들었다. 덕분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작디작은 자취방밖에 구하지 못했지만 그녀 손에 쥔 돈으로는 이정도가 한계였다. 보증금은 유나가 알바를 해 모아 뒀던 돈으로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나는 진천이 전역하고 나면 마냥 행복하고 좋은 시간이 시작될 거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달랐다.
‘유나야! 오빠 어깨가 결리는데 어깨 좀 주물러 줄래?’
‘응…….’
‘아, 그리고 골목 쪽 거기 곱창 잘하는 집 있잖아. 오빠가 거기 곱창 먹고 싶은데 좀 포장해서 갖고 와 줄 수 있어?’
‘거기…… 배달도 안 되고 너무 먼데…….’
‘오빠가 오랜만에 그 집 곱창이 먹고 싶어서 그래. 우리 유나 착하지? 한 번만 갔다 와 주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역한 뒤 한집에서 살게 된 진천은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유나를 부려 먹곤 했다. 유나는 그럴 때마다 결국 떨떠름한 얼굴로 심부름을 다녀왔다.
‘크으, 소주랑 같이 마시니까 진짜 맛나다.’
‘……오빠. 그런데 있잖아……. 다음부턴 여기 곱창 먹지 말자.’
‘뭐? 왜?’
‘너무 비싸.’
진천이 인상을 팍 썼다.
‘야, 너 지금 내가 돈 안 번다고 이런 식으로 눈치 주는 거냐?’
이야기가 왜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아닌 게 아니라 이 자취방 보증금도 그렇고 월세도 수도세도 전기세도 생활비까지 모두 유나가 서울로 올라와 알바를 한 돈으로 충당하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지금 얘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돈을 버는 건 유나 한 명이고 생활비는 한정돼 있으니 되도록 아껴 쓰자는 말이었건만 진천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결국 진천은 그날 유나가 계속 아니라고 해명했음에도 잠들기 직전까지 화를 냈다. 그날의 일이 신경 쓰였는지 진천은 며칠 뒤 일자리를 얻긴 했다. 아침 느지막이 출근하여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었다. 무슨 부동산 일이랬는데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다.
여하튼 그 일을 하느라 밤이면 거래처 사람들과 회식을 한다며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왔다. 외박하는 일도 잦았다. 직장에 다니며 사회생활을 하니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든다며 유나에게 용돈을 달라 조르기도 했다.
‘오빠가 월급 타면 너한테 배로 돌려줄게. 우리 어차피 결혼할 거잖아.’
틀린 말이 아니라 용돈을 주긴 했는데 어쩐지 영 찜찜한 느낌이 남았다. 그래도 유나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가 돈 벌려고 직장 다니며 애쓰는 게 기특해서 도시락도 싸 주고 퇴근하면 다리도 주물러 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나가 싸 주는 도시락이나 안마를 너무 당연한 듯 요구해서 아주 약간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유나 역시 온종일 알바를 하느라 힘들었지만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진천이 직장을 다닌 지 3개월도 넘었건만 한 번도 집에 돈을 들고 오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월급일이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유나가 진천에게 조심스럽게 월급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는 당황해하며 변명했다.
3화
챕터 1
“유나야, 나 출근할 건데 도시락 다 됐어?”
“어 응, 여기.”
박진천은 받아 든 도시락 가방을 뒤적이며 물과 수저는 제대로 들었는지, 디저트로 먹을 과일은 어떤 종류인지, 오늘의 반찬은 무엇인지 등을 살폈다. 도시락을 싸느라 새벽부터 일어난 탓에 눈 밑에 거멓게 다크서클이 올라온 유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이내 확인을 마친 건지 박진천이 고개를 드는데, 표정이 어째 조금 불만스럽다.
“오늘은 키위가 없네?”
“응? 키위……?”
“나 후식으로 키위랑 오렌지 없으면 입가심 안 되는데.”
얼굴을 구기며 불평하는 모양새에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온다. 그래도 유나는 꾸욱 참았다. 진천도 일하러 가는 거니까, 그래.
“아, 어제 장 보러 갔는데 키위값이 너무 비싸서 못 샀어. 다음에 세일하면 넣어 줄게.”
“유나야. 그 키위값 얼마나 한다고 그걸 못 사? 오빠가 그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미안해.”
진천은 그렇게 한참을 투덜거리다 겨우 출근했다. 그가 나가고 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천은 나를 여자 친구가 아니라 이 집 가정부로 아는 걸까.
유나와 진천은 3년을 사귄 애인 사이였다.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란 둘은 고등학교 때 서로를 알게 됐다. 유나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진천은 두 살이 더 많았다. 처음 만난 그날은 체육 수업이 있었다.
‘여자애들은 피구 하고 남자애들은 알아서 축구공 가져와서 축구나 해라.’
만사가 귀찮은 체육 선생님 덕분에 반 아이들은 체육 시간마다 공놀이에 열중할 수 있었다. 유나는 나름 피 터지는 피구 경기 한 판을 끝내고 더위를 식힐 겸 친구들과 등나무 아래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주제는 시시콜콜한 학교 얘기, 성적 얘기 등 잡다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여고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남자 친구였다.
유나는 그때까진 남자 친구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 이성 친구들은 많았지만 그녀의 마음에 꽂힐 만큼 맘에 든 남학생은 없었다. 딱히 대쉬하는 남학생도 없고 맘에 든 이도 없으니 열일곱 살까지의 솔로 인생은 지나치게 평화롭다 못해 별 얘깃거리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등나무 아래에서 유나는 진천을 보고 말았다. 3학년 학생들과 우연찮게 체육 시간이 겹쳐 그들이 농구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 것이다.
적당한 키에 긴 팔,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 유나는 그렇게 첫사랑에 빠졌다. 유나가 넋 놓고 3학년 학생을 구경하고 있는 걸 알고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저기, 저 오빠. 너무 잘 생기지 않았어?’
‘방금 골 넣은 사람 말하는 거야?’
‘응! 와 어떡해. 진짜 멋있다. 조각상 같아……!’
그렇게 말하는 유나를 보는 친구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멋……있어? 저 사람이?’
‘몰랐는데 김유나 눈이 좀 낮네. 조각상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 굳힌 것처럼 생겼는데.’
친구들은 그 의견에 반대했지만 유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외모라는 건 어차피 주관적인 기준이니까.
3학년생이 농구를 하고 있는 곳과 등나무 아래 벤치는 아주 가까웠다. 한창 이성의 눈을 신경 쓸 그 나이 때 남학생들은 1학년 여학생들이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단 걸 알고는 더욱 멋진 척하며 골을 넣으려 애썼다.
유나는 그중에서도 진천만 보였다. 우연히도 그와 그녀의 시선은 체육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마주쳤고, 진천이 자판기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하나 사 주는 것으로 그들의 만남이 시작됐다.
첫사랑과 첫 연애를 하게 된 유나는 너무 좋아서 하루 종일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그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진 둘은 자주 만나 놀았다.
한참 공부해야 할 고3이라 그런가, 시간마다 배고프다 칭얼대는 진천을 위해 떡볶이도 김밥도 사다 줬고, 참고서가 필요하다 하면 부리나케 서점으로 달려가 용돈을 탈탈 털어 책을 선물했다. 그땐 뭘 해도 다 좋았다.
문제는 진천이 스무 살이 되고 군대에 입대하면서부터였다. 원래 그다지 좋은 성적은 못 되었던 진천은 대학 진학에 실패했고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군대부터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유나는 눈물로 그를 배웅했다.
열여덟 살의 나이에 고무신이 된 유나는 꼬박꼬박 손편지도 썼고 선물도 보냈다. 그가 휴가를 나오거나 그를 면회하러 가는 날이 되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시락을 싸곤 했다.
유나는 면회실에서 진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밀린 대화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지만 진천은 그녀가 싸 온 도시락에 더 관심 있을 때가 많았다. 유나는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진천을 만나는 게 어디냐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2년이 흘러 진천은 제대했고 유나는 스무 살이 되었다. 유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자취하게 됐다. 그건 사실 남자 친구인 진천의 영향이 컸다.
‘유나야. 있지, 나 전역하면 서울 살고 싶다.’
‘서울? 거긴 갑자기 왜……?’
‘뭔가 우리 고향은 답답하고 좀 그래. 내가 가끔 휴가 나올 때 서울 거리 둘러보니까 와, 번쩍번쩍하고 화려하고 진짜 비교가 안 되더라.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랄까?’
대체 뭐가 답답하단 건지 유나는 이해가 안 됐다. 우리 살던 곳이 뭐 어때서? 게다가 진천이 하는 말이 유나에겐 상당히 서운하게 들렸다. 여태까지도 장거리 연애였는데 서울로 가겠다니. 그럼 또 장거리 연애를 하자, 이 말 아닌가.
‘그럼 우린 어떻게 만나? 서울은 너무 멀잖아.’
‘너도 서울에서 나랑 같이 살면 되지.’
뭐? 동거하자고? 유나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동거를!
“오빠 전역하면 결혼하면 되잖아. 우리 같이 한 집에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자. 어때?”
이게 말로만 듣던 프러포즈인가. 유나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진천이 풀어놓는 꿈같이 아름다운 결혼 생활 이야기에 홀딱 반해 버리고 말았다.
같이 살면 이것저것 함께할 수 있고, 헤어질 때 아쉬워할 필요도 없이 항상 함께 있는 거고……. 유나는 가슴이 들떴다.
결국 부모님께는 서울에서 공부하겠단 말로 둘러대고 유나 혼자 미리 서울로 올라와 그와 함께 살 집을 구했다. 유나의 집은 가난한 편에 속했기에 지원을 바라기는 힘들었다. 덕분에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작디작은 자취방밖에 구하지 못했지만 그녀 손에 쥔 돈으로는 이정도가 한계였다. 보증금은 유나가 알바를 해 모아 뒀던 돈으로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나는 진천이 전역하고 나면 마냥 행복하고 좋은 시간이 시작될 거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달랐다.
‘유나야! 오빠 어깨가 결리는데 어깨 좀 주물러 줄래?’
‘응…….’
‘아, 그리고 골목 쪽 거기 곱창 잘하는 집 있잖아. 오빠가 거기 곱창 먹고 싶은데 좀 포장해서 갖고 와 줄 수 있어?’
‘거기…… 배달도 안 되고 너무 먼데…….’
‘오빠가 오랜만에 그 집 곱창이 먹고 싶어서 그래. 우리 유나 착하지? 한 번만 갔다 와 주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런 식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역한 뒤 한집에서 살게 된 진천은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유나를 부려 먹곤 했다. 유나는 그럴 때마다 결국 떨떠름한 얼굴로 심부름을 다녀왔다.
‘크으, 소주랑 같이 마시니까 진짜 맛나다.’
‘……오빠. 그런데 있잖아……. 다음부턴 여기 곱창 먹지 말자.’
‘뭐? 왜?’
‘너무 비싸.’
진천이 인상을 팍 썼다.
‘야, 너 지금 내가 돈 안 번다고 이런 식으로 눈치 주는 거냐?’
이야기가 왜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아닌 게 아니라 이 자취방 보증금도 그렇고 월세도 수도세도 전기세도 생활비까지 모두 유나가 서울로 올라와 알바를 한 돈으로 충당하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지금 얘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돈을 버는 건 유나 한 명이고 생활비는 한정돼 있으니 되도록 아껴 쓰자는 말이었건만 진천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결국 진천은 그날 유나가 계속 아니라고 해명했음에도 잠들기 직전까지 화를 냈다. 그날의 일이 신경 쓰였는지 진천은 며칠 뒤 일자리를 얻긴 했다. 아침 느지막이 출근하여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었다. 무슨 부동산 일이랬는데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다.
여하튼 그 일을 하느라 밤이면 거래처 사람들과 회식을 한다며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왔다. 외박하는 일도 잦았다. 직장에 다니며 사회생활을 하니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든다며 유나에게 용돈을 달라 조르기도 했다.
‘오빠가 월급 타면 너한테 배로 돌려줄게. 우리 어차피 결혼할 거잖아.’
틀린 말이 아니라 용돈을 주긴 했는데 어쩐지 영 찜찜한 느낌이 남았다. 그래도 유나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가 돈 벌려고 직장 다니며 애쓰는 게 기특해서 도시락도 싸 주고 퇴근하면 다리도 주물러 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나가 싸 주는 도시락이나 안마를 너무 당연한 듯 요구해서 아주 약간 섭섭하기는 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유나 역시 온종일 알바를 하느라 힘들었지만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진천이 직장을 다닌 지 3개월도 넘었건만 한 번도 집에 돈을 들고 오지 않는 것이었다.
분명 월급일이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유나가 진천에게 조심스럽게 월급의 행방을 물었을 때 그는 당황해하며 변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