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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고도 특별한 1화
1. 흔한 취업 준비생 서연주
떨리는 마음으로 평소엔 믿지 않던 온갖 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함과 동시에 두 손을 기도하듯 가지런히 모았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떠 가며 노트북 화면을 조심스레 쳐다보던 연주.
하지만 10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갓난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레 다루던 노트북을 과격하게 탁 닫아 버리고 우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서정의 옆에 앉았다.
열심히 라면을 먹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주를 외면하던 서정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끈질긴 시선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나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이미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우울한 빛을 띤 그녀의 눈을 보았을 때, 답은 뻔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야?”
연주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향해 말했다.
“또 떨어졌다에 내 전 재산과 앞으로 남은 인생의 모든 남자들을 건다.”
연주가 떨어졌음을 100% 확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서정의 단호한 말은 가뜩이나 착잡한 연주의 기분에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붙이는 꼴이 되었다.
“어떻게 친구라는 애가 위로 한마디 없이 냉정한 말만 골라서 하냐? 네 남친한테 하는 거 나한테 반만이라도 했어 봐. 내가 너 업고 다닌다!”
“이거, 이거 진짜 웃기는 친구일세. 남친이랑 친구를 어떻게 비교하냐? 성별부터가 다른데. 너 지금 이래 놓고 나중에 남친 생겼다고 나 몰라라 하기만 해 봐. 진짜 죽는다.”
그러나 연주는 서정의 위협적인 말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취업도 못 하고 있는데 남친은 무슨 얼어 죽을…….”
“어이구, 오죽하시겠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하느라 바쁘네, 어쩌네 하더니 이럴 줄 알았다. 무슨 여자애가 이 나이까지 연애 한 번 못 해 보냐?”
“여유가 있어야 하지. 농담이 아니라 난 정말 여유가 없거든.”
연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나 여유가 없네, 뭐네 하면서도 다들 잘만 연애하고 다니는 거지 현실 속의 연주 같은 경우에는 연애를 할 만한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연애는 어느 정도 심적인 여유나, 금전적인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연주는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둘 중 그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 마음 편하게 연애나 하자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녀의 위치는 여러 가지로 불안했다. 돈이 없으니 마음의 여유를 가질 기회도 없는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난했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살기 힘들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남들만큼 그냥저냥 먹고살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말고 짬 내서 연애 좀 해! 안 그러면 너 진짜 평생 일만 죽어라 하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수가 있다?”
서정은 조금 쉬어 가며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나, 연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그게 내 꿈이다. 일만 하다가 죽는다니 참 행복한 인생일세. 제발 그래도 좋으니까 취직 좀 하고 싶다.”
할 말을 잃은 서정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젓더니 이내 먹다 만 라면을 다시 흡입하기 시작했다.
연주는 서정의 반응을 크게 쓰지 않은 채 TV에 집중했다.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연주는 금세 드라마 속에 들어갈 듯한 기세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TV에 집중했다.
기집애, 연애할 여유는 없다더니. 방금 전까지 그렇게 열변을 토했으면서 드라마는 열심히 챙겨 보는 연주가 어이없었다.
“연애할 시간은 없다면서 드라마 볼 시간은 있냐?”
서정의 핀잔에 연주는 끄떡도 하지 않고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이건 회사원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그린 드라마라고. 다 공부하는 거란 말이야. 직장 공부.”
“직장 공부 좋아하시네. 그냥 재밌으니까 보는 거면서!”
서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마디 하자 연주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조용히 해. 대사 안 들려.”
지금은 아무것도 안 들리니 입 닫고 조용히 드라마나 보자는 의미였다.
서정도 하는 수 없이 드라마로 시선을 돌렸다.
비밀 연애를 시작한 두 남녀가 회사 사람들 몰래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서정은 두 눈을 반짝이며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나 연주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시큰둥해져 있었다.
“야! 저거 봐 봐! 진짜 달달하다.”
“그러네.”
서정은 연주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흔들며 신나게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연주의 대답은 건조하기만 했다.
“연애 초기엔 둘이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을 텐데. 와, 진짜 인기 있는 이유가 있네. 아주 케미가 장난이 아니야.”
서정은 마치 자신이 드라마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연주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그녀의 호들갑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 줬을 연주였기에 서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반응이 왜 이리 건조해? 이런 달달한 장면을 딱딱하게 보는 여자는 너밖에 없을 거다.”
“그냥 뭐, 딱히 공감이 안 된다고나 할까?”
서정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드라마는 판타지야, 판타지. 내가 저런 잘난 놈들이랑 못하는 연애를 여주인공이 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하는 거라고! 판타지에 공감은 무슨…….”
“어느 정도 이해는 되어야 할 거 아냐. 요즘 드라마 보면 회사에서 죄다 연애만 하잖아. 진짜 저러는 것도 아닌데 괜히 이상한 기대감만 안겨 주고.”
“야, 회사 생활하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TV로까지 힘겨운 현실을 마주해야겠냐? 너 원래 드라마 나보다 훨씬 더 좋아했잖아. 갑자기 왜 이래?”
그녀 역시 서정의 말에 공감하는 것인지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대답했다.
“원래는 나도 그냥 판타지려니 하고 봤지. 근데 요즘 취직도 안 되고, 남들 다 통과한다는 서류 전형 한 번 못 붙으니까 자괴감도 들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다.”
“하긴, 네가 계속 떨어지긴 했으니 좀 착잡하긴 하겠다. 우리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기분 전환이나 하러 나갈까?”
연주는 왜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계속 집에만 있어 봤자 더 우울한 생각만 들 것 같았기에 묵묵히 서정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흐윽. 야, 이 나쁜 자식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냐! 흐엉.”
연주의 집 근처에 있는 한 포장마차 안. 서정이 술에 취해 반쯤 맛이 간 눈빛으로 휴대폰을 붙잡고는 연신 징징대고 있었다.
연주는 서정을 따라나선 것을 깊이 후회했다. 분명 자신의 기분 전환을 위해 나온 것이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서정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야, 민서정. 정신 차려!”
연주는 취하다 못해 술에 쩔어 버린 서정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그녀의 눈은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야, 너! 내가 이렇게 취했는데, 취했는데에! 전화도 없고! 너무한 거 아니냐?!”
서정의 목소리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너 변했어어! 변했다고!”
연주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 있던 소주 한 잔을 원샷한 뒤 서정이 이리저리 헤집어 놓은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연주가 그러는 동안에도 서정의 진상은 멈출 줄 몰랐지만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얼마간 혼자 안주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자 서정의 남자 친구가 와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들을 따라 연주 역시 포장마차를 나섰다.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니었기에 자취방으로 향하는 연주의 발걸음은 느긋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밤공기를 느껴 보기까지 했다. 겨울이 가고 슬슬 봄이 올 시기였기에 청량한 겨울의 냄새와 포근한 봄의 기운이 함께 느껴지는 듯했다.
한가롭게 계절을 만끽하고 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목이 쩍쩍 갈라지는 갈증이 느껴졌다.
자취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춘 연주는 잠시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연주는 늘 마시던 커피 우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 딱 하나 남은 우유를 잡은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낯선 이의 손이 연주의 손 위로 포개어졌다.
그녀는 움찔하며 낯선 손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을 가진 웬 미남이 연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외모는 썩 중요하지 않았다. 우유를 마셔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우유 사실 거예요?”
남자는 연주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잡은 우유를 살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한 질문이었는데 무시를 당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요? 우유 사실 거냐고요.”
“어, 살 거야.”
두 번째로 던진 그녀의 질문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매우 성의 없었고, 초면에 다짜고짜 말을 놓는 무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연주는 남자의 그럴듯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 이상한 오기로 똘똘 뭉치고 말았다.
“저도 이걸 꼭 마셔야겠는데요.”
평소 같았더라면 포기하고 가 버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초면부터 반말을 하며 무례하게 군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승부욕 때문이었다.
“이 우유가 그렇게 필요해?”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연주의 귓가를 울렸다.
연주는 당연한 것을 물어봤다는 듯 열심히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전 이걸 꼭 마셔야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보통은 양보하겠다며 손을 놔줄 법도 한데, 남자의 손은 조금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놓지 않겠다는 듯 더욱 강하게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나도 그래.”
인심 쓸 것처럼 물어보더니 자신도 그렇다는 대답을 던지는 남자를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연주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갚아.”
남자는 또 한 번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연주의 손에서 우유를 빼앗아 거침없이 카운터로 향하더니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것이다. 연주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편의점 밖으로 향하는 남자를 서둘러 쫓아갔다.
남자는 연주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 계산한 커피 우유를 들고 서 있었다.
이윽고 남자의 손에 들려져 있던 커피 우유는 자연스럽게 연주의 손에 쥐어졌다.
“이 우유…….”
“나도 꼭 필요했는데 양보해 줄게.”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우유를 건네받은 탓에 잠시 얼떨떨했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커피 우유는 획득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주는 거 아냐. 갚으라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연주는 뭘 갚기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피곤하고 귀찮았던 탓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럴게요.”
의외로 쿨하게 연주가 대답하자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연주에게 내밀었다.
1. 흔한 취업 준비생 서연주
떨리는 마음으로 평소엔 믿지 않던 온갖 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함과 동시에 두 손을 기도하듯 가지런히 모았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떠 가며 노트북 화면을 조심스레 쳐다보던 연주.
하지만 10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갓난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레 다루던 노트북을 과격하게 탁 닫아 버리고 우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서정의 옆에 앉았다.
열심히 라면을 먹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주를 외면하던 서정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끈질긴 시선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왜!”
“나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이미 딱딱하게 굳은 표정과 우울한 빛을 띤 그녀의 눈을 보았을 때, 답은 뻔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야?”
연주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긴장된 표정으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정은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향해 말했다.
“또 떨어졌다에 내 전 재산과 앞으로 남은 인생의 모든 남자들을 건다.”
연주가 떨어졌음을 100% 확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서정의 단호한 말은 가뜩이나 착잡한 연주의 기분에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붙이는 꼴이 되었다.
“어떻게 친구라는 애가 위로 한마디 없이 냉정한 말만 골라서 하냐? 네 남친한테 하는 거 나한테 반만이라도 했어 봐. 내가 너 업고 다닌다!”
“이거, 이거 진짜 웃기는 친구일세. 남친이랑 친구를 어떻게 비교하냐? 성별부터가 다른데. 너 지금 이래 놓고 나중에 남친 생겼다고 나 몰라라 하기만 해 봐. 진짜 죽는다.”
그러나 연주는 서정의 위협적인 말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취업도 못 하고 있는데 남친은 무슨 얼어 죽을…….”
“어이구, 오죽하시겠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하느라 바쁘네, 어쩌네 하더니 이럴 줄 알았다. 무슨 여자애가 이 나이까지 연애 한 번 못 해 보냐?”
“여유가 있어야 하지. 농담이 아니라 난 정말 여유가 없거든.”
연주의 말은 사실이었다. 드라마 같은 곳에서나 여유가 없네, 뭐네 하면서도 다들 잘만 연애하고 다니는 거지 현실 속의 연주 같은 경우에는 연애를 할 만한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연애는 어느 정도 심적인 여유나, 금전적인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연주는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둘 중 그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 마음 편하게 연애나 하자고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녀의 위치는 여러 가지로 불안했다. 돈이 없으니 마음의 여유를 가질 기회도 없는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난했던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살기 힘들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저 남들만큼 그냥저냥 먹고살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말고 짬 내서 연애 좀 해! 안 그러면 너 진짜 평생 일만 죽어라 하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수가 있다?”
서정은 조금 쉬어 가며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으나, 연주는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그게 내 꿈이다. 일만 하다가 죽는다니 참 행복한 인생일세. 제발 그래도 좋으니까 취직 좀 하고 싶다.”
할 말을 잃은 서정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젓더니 이내 먹다 만 라면을 다시 흡입하기 시작했다.
연주는 서정의 반응을 크게 쓰지 않은 채 TV에 집중했다. 요즘 한창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연주는 금세 드라마 속에 들어갈 듯한 기세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TV에 집중했다.
기집애, 연애할 여유는 없다더니. 방금 전까지 그렇게 열변을 토했으면서 드라마는 열심히 챙겨 보는 연주가 어이없었다.
“연애할 시간은 없다면서 드라마 볼 시간은 있냐?”
서정의 핀잔에 연주는 끄떡도 하지 않고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이건 회사원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그린 드라마라고. 다 공부하는 거란 말이야. 직장 공부.”
“직장 공부 좋아하시네. 그냥 재밌으니까 보는 거면서!”
서정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마디 하자 연주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조용히 해. 대사 안 들려.”
지금은 아무것도 안 들리니 입 닫고 조용히 드라마나 보자는 의미였다.
서정도 하는 수 없이 드라마로 시선을 돌렸다.
비밀 연애를 시작한 두 남녀가 회사 사람들 몰래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서정은 두 눈을 반짝이며 드라마에 집중하기 시작했으나 연주의 표정은 아까와 달리 시큰둥해져 있었다.
“야! 저거 봐 봐! 진짜 달달하다.”
“그러네.”
서정은 연주의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흔들며 신나게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연주의 대답은 건조하기만 했다.
“연애 초기엔 둘이 같이 있기만 해도 좋을 텐데. 와, 진짜 인기 있는 이유가 있네. 아주 케미가 장난이 아니야.”
서정은 마치 자신이 드라마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연주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그녀의 호들갑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여 줬을 연주였기에 서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반응이 왜 이리 건조해? 이런 달달한 장면을 딱딱하게 보는 여자는 너밖에 없을 거다.”
“그냥 뭐, 딱히 공감이 안 된다고나 할까?”
서정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드라마는 판타지야, 판타지. 내가 저런 잘난 놈들이랑 못하는 연애를 여주인공이 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하는 거라고! 판타지에 공감은 무슨…….”
“어느 정도 이해는 되어야 할 거 아냐. 요즘 드라마 보면 회사에서 죄다 연애만 하잖아. 진짜 저러는 것도 아닌데 괜히 이상한 기대감만 안겨 주고.”
“야, 회사 생활하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TV로까지 힘겨운 현실을 마주해야겠냐? 너 원래 드라마 나보다 훨씬 더 좋아했잖아. 갑자기 왜 이래?”
그녀 역시 서정의 말에 공감하는 것인지 우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대답했다.
“원래는 나도 그냥 판타지려니 하고 봤지. 근데 요즘 취직도 안 되고, 남들 다 통과한다는 서류 전형 한 번 못 붙으니까 자괴감도 들고.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다.”
“하긴, 네가 계속 떨어지긴 했으니 좀 착잡하긴 하겠다. 우리 그런 의미에서 오랜만에 기분 전환이나 하러 나갈까?”
연주는 왜 이야기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계속 집에만 있어 봤자 더 우울한 생각만 들 것 같았기에 묵묵히 서정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흐윽. 야, 이 나쁜 자식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냐! 흐엉.”
연주의 집 근처에 있는 한 포장마차 안. 서정이 술에 취해 반쯤 맛이 간 눈빛으로 휴대폰을 붙잡고는 연신 징징대고 있었다.
연주는 서정을 따라나선 것을 깊이 후회했다. 분명 자신의 기분 전환을 위해 나온 것이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서정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다.
“야, 민서정. 정신 차려!”
연주는 취하다 못해 술에 쩔어 버린 서정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보았지만 그녀의 눈은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다.
“야, 너! 내가 이렇게 취했는데, 취했는데에! 전화도 없고! 너무한 거 아니냐?!”
서정의 목소리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너 변했어어! 변했다고!”
연주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 있던 소주 한 잔을 원샷한 뒤 서정이 이리저리 헤집어 놓은 안주를 먹기 시작했다. 연주가 그러는 동안에도 서정의 진상은 멈출 줄 몰랐지만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얼마간 혼자 안주를 먹으며 시간을 보내자 서정의 남자 친구가 와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들을 따라 연주 역시 포장마차를 나섰다.
그리 늦은 시각이 아니었기에 자취방으로 향하는 연주의 발걸음은 느긋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밤공기를 느껴 보기까지 했다. 겨울이 가고 슬슬 봄이 올 시기였기에 청량한 겨울의 냄새와 포근한 봄의 기운이 함께 느껴지는 듯했다.
한가롭게 계절을 만끽하고 있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목이 쩍쩍 갈라지는 갈증이 느껴졌다.
자취방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춘 연주는 잠시 근처에 있던 편의점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선 연주는 늘 마시던 커피 우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침 딱 하나 남은 우유를 잡은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낯선 이의 손이 연주의 손 위로 포개어졌다.
그녀는 움찔하며 낯선 손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얼굴을 가진 웬 미남이 연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외모는 썩 중요하지 않았다. 우유를 마셔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우유 사실 거예요?”
남자는 연주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잡은 우유를 살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녀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한 질문이었는데 무시를 당하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저기요? 우유 사실 거냐고요.”
“어, 살 거야.”
두 번째로 던진 그녀의 질문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매우 성의 없었고, 초면에 다짜고짜 말을 놓는 무례함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연주는 남자의 그럴듯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 이상한 오기로 똘똘 뭉치고 말았다.
“저도 이걸 꼭 마셔야겠는데요.”
평소 같았더라면 포기하고 가 버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초면부터 반말을 하며 무례하게 군 남자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승부욕 때문이었다.
“이 우유가 그렇게 필요해?”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연주의 귓가를 울렸다.
연주는 당연한 것을 물어봤다는 듯 열심히 고개까지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전 이걸 꼭 마셔야겠어요.”
이렇게까지 말하면 보통은 양보하겠다며 손을 놔줄 법도 한데, 남자의 손은 조금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놓지 않겠다는 듯 더욱 강하게 조여 오는 것만 같았다.
“나도 그래.”
인심 쓸 것처럼 물어보더니 자신도 그렇다는 대답을 던지는 남자를 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까.
연주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갚아.”
남자는 또 한 번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연주의 손에서 우유를 빼앗아 거침없이 카운터로 향하더니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것이다. 연주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편의점 밖으로 향하는 남자를 서둘러 쫓아갔다.
남자는 연주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 계산한 커피 우유를 들고 서 있었다.
이윽고 남자의 손에 들려져 있던 커피 우유는 자연스럽게 연주의 손에 쥐어졌다.
“이 우유…….”
“나도 꼭 필요했는데 양보해 줄게.”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우유를 건네받은 탓에 잠시 얼떨떨했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커피 우유는 획득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주는 거 아냐. 갚으라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연주는 뭘 갚기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피곤하고 귀찮았던 탓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럴게요.”
의외로 쿨하게 연주가 대답하자 남자는 조금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주머니 속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어 연주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