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사소하고도 특별한 2화


연주가 이건 또 뭐하자는 건가 싶어 멀뚱멀뚱 쳐다보자 남자는 답답하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번호 입력해. 나중에 갚는다며?”
“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 갚지 않을 생각이었다고 말하기도 뭐했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의 번호가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곧바로 전화를 걸었고, 연주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연주의 번호를 저장했다. 이젠 정말 된 건가 싶어 연주가 몸을 돌리려는데 남자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름.”
상당히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연주는 이번에도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당연한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이름이 뭐냐고. 번호 저장은 해야 할 거 아니야.”
“아, 서연주요.”
연주의 대답이 들려오기 무섭게 번호를 저장한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무것도 아냐.”
“네, 뭐 그럼.”
그제야 자유를 찾은 연주는 남자에게 인사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자취방으로 가는 길. 연주는 얼결에 받아 낸 커피 우유를 마시며 조금 전의 상황을 천천히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커피 우유 하나 때문이라기엔 갚으라는 남자의 말도 이상하고, 번호를 달라는 것도 이상했다.
그냥 그 남자 자체가 이상한 걸지도 몰랐다. 고급스러운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테이크아웃 커피가 아닌 편의점 커피 우유에 집착하다니.
말끔한 옷차림과 달리 특이한 행동 때문인지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심은 별로 생기지 않았다.
다소 이상했던 남자의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주머니에서 익숙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시간에 전화할 만한 사람은 없을 텐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혹시 지원했던 회사 중 한 곳이 아닐까 싶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잘 들어갔나?
전화를 받음과 동시에 방금 만났던 이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연주는 밀려오는 실망감에 허탈해졌다. 오늘 처음 본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네, 가는 중이에요.”
─길도 어두운데 별일 없다니 다행이군.
방금 처음 만난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뭣 때문에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걸까?
“그런데 왜 전화하셨어요?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안부나 묻자고 하신 건 아닐 테고.”
그녀의 직설적인 말에 휴대폰 속 남자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약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언제 갚을 거야?
남자의 대답은 연주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독촉을 하는 건지. 그 커피 우유를 순순히 받아먹는 게 아니었다. 갈증 때문에 미쳐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무시하고 갔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휴대폰 번호까지 준 마당에 없던 일로 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연주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간단히 대꾸했다.
“언제가 좋을까요?”
─그쪽 좋을 대로.
연주는 주관이 뚜렷하지 않은 남자의 대답에 약간 짜증이 올라오려 했으나 선택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럼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좋을 대로 해.
연주는 남자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럼 이만’ 이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대체 전화는 왜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며 연주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온 후 화장실로 향한 연주는 술기운 때문에 올라오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찬물로 샤워를 했다.
그 후 여러 가지로 피곤했던 터라 곧바로 침대에 몸을 뉘이고 그대로 잠들었다.

비슷한 시각.
주원은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조금 전 연주를 만났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것인지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얇은 패딩을 입고 편의점을 배회하던 그녀.
거기다가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간 두 볼과 살짝 풍기는 술 냄새로 자신이 조금 전까지 술을 마시다가 왔다는 것을 사방에 광고하던 그녀.
그와 더불어 겨우 커피 우유 하나에 집착하던 모습은 연주에 대한 주원의 환상을 부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원은 그녀를 떠올리며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자신을 발견했다.
주원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자 룸미러로 지켜보던 운전석의 남자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티 났어요?”
“네, 웃음이 끊이질 않으시네요.”
그런 주원의 모습은 처음 보았기에 진심으로 기쁘다고 말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을 만났거든요.”
“꼭 다시 만나고 싶었던 분이었나 봐요?”
“네, 오늘 우연히 만났네요.”
“혹시 첫사랑이나 옛 애인?”
운전기사의 장난스러운 질문에 주원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조금 반가운 사람?”
그렇게 말하는 주원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세상이 좁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처음 편의점에서 연주를 마주했을 때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커피 우유에 끈질기게 매달렸고 덕분에 연주의 이름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그의 짐작대로 그녀는 서연주가 맞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주원의 마음속에는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어섰다.
오랜만의 재회를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반갑기는 했다.
물론 조금 다른 의미로.

* * *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어제 갑작스럽게 들이부은 술 때문에 햇살이 눈부시다 못해 따가울 정도이건만, 연주의 몸은 움직여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끊임없이 울려 대는 휴대폰 벨소리 때문에 정말이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연주가 힘겹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목이 상당히 까끌까끌한데다 숙취까지 겹쳐 연주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나 연주가 받은 전화는 이 모든 걸 한 방에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저, 정말요? 아, 알겠습니다. 네, 네!”
공손하게 전화를 끊은 연주는 잠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약 30초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볼을 꼬집고, 양 뺨을 가볍게 때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누군가가 목격했더라면 미친 게 아니냐고 수군댔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행동을 멈추고 멍하게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야…….”
연주는 다시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전에 했던 통화 기록이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한참 동안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조금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붙었어. 내가 정말 붙었다고.”
연주는 그저 흔한 취업 준비생에 불과한 자신이 비록 서류 전형이지만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인 주환그룹의 계열사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연주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서정아, 나 붙었어. 합격했다고.”
비록 서류 전형이었지만 첫 합격 소식을 서정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고 싶었다.
─야, 잠깐만. 주어 다 빼먹고, 무작정 소리만 지르지 말고 천천히 자세하게 얘기해 봐.
“저번에 서류 넣었던 거 통과했다고 방금 연락 왔어.”
─마구잡이로 이력서 뿌렸던 그거? 그중에 합격한 게 있다고?
한층 차분해진 연주의 말을 듣던 서정이 놀랍다는 듯 그녀에게 물었다.
“응. 다른 곳은 다 떨어진 것 같은데 방금 주환에서 연락 왔어. 면접 보러 오래.”
─와, 진짜 대박이다. 어쨌든 축하해! 주환에 들어가면 돈 많이 벌 테니까 밥 자주 사라! 알았지?
서정은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몇 마디 말을 덧붙인 뒤 전화를 끊었다.
서정과의 통화를 마친 연주는 혹시나 착각한 것은 아닌지, 잘못된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홈페이지에 다시 들어가 보고, 통화 내역을 다시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사라질 신기루를 잡은 기분이었다. 그만큼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설레고 행복했다.
수십 번을 확인하는 동안 어느새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시간이 다가왔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항상 생활비나 학원비는 전부 아르바이트를 통해 마련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원에 가는 날이 아니었기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푹 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엔 제발 잘 돼야 할 텐데…….
사실 대기업 입사는 연주에게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꿈이었다. 학점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렇게 좋은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 남들 다 간다는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지 못했다.
게다가 특별한 자격증이나 수상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대기업 주환의 서류 전형을 통과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기적과도 같았다.
연주도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분수에 맞는 적당한 규모의 회사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 형편과 학자금 대출을 생각하면 보수가 적은 곳은 가고 싶어도 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녀에겐 남동생도 있었다.
잠시 한숨을 쉬던 연주는 가볍게 기합을 넣고 의지를 다지듯 머리를 높게 올려 묶었다. 간단하게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우유와 함께 먹은 후 옷을 갈아입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알바는 시급은 높지 않았지만 틈틈이 다른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혼자서 일하기 때문에 타인의 눈치를 크게 볼 필요도 없었다.
물론 CCTV가 설치되어 있는 만큼 완벽한 땡땡이는 무리였지만 꽤 괜찮은 알바였다.
“안녕하세요.”
“어, 연주 왔구나.”
연주의 앞 타임을 담당하고 있는 해진은 언제나처럼 그녀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는 연주보다 2살 연상으로 순하게 생기고 착한데다가 주변 사람을 잘 챙기는 타입이었다.
“오빠, 오늘 오랜만에 데이트 약속 있으시다면서요. 얼른 가 보세요. 여긴 제가 정리할게요.”
“아냐, 정리는 하고 갈게. 혼자 하면 오래 걸리잖아.”
“진짜 괜찮아요. 빨리 멋지게 하고 여자 친구 만나러 가셔야죠.”
해진의 여자 친구는 가끔 그를 보기 위해 편의점에 들르곤 했는데 워낙 붙임성이 좋아 연주와도 금세 말을 텄다. 사실 해진은 여자 친구라면 껌뻑 죽는 여친 바보였다. 팔불출계의 꿈나무라고나 할까?
“여자 친구께서 기다리시면 어쩌려고요?”
확실히 여자 친구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오자 해진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친한 동생과의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대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미안하지만 오늘은 좀 수고해 줘. 다음번엔 꼭 도와줄게.”
“원래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뭐.”
그는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로 몇 번이나 연주에게 인사를 한 뒤 편의점을 떠났다.
사람이 너무 착해서 탈이라는 생각을 하던 연주는 들어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손님들을 상대했다.

일하다 보니 어느새 손님이 거의 없는 시간대가 되었다. 연주는 코앞으로 다가온 교대 시간을 확인하며 천천히 짐을 정리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문이 열렸다.
“연주야.”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