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오늘까지 영하
1화

프롤로그


“하아, 하아.”
달려서 겨우 도착한 버스 정류장 너머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눈에 비쳤다. 분주한 시선으로 남자의 뒷모습을 샅샅이 살핀 가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넓은 어깨와 가현과 머리 하나 차이가 날 정도로 큰 키. 까만 코트를 걸친 뒷모습은 기억 속 짓궂던 그 애와는 달리 완연한 남자에 가까웠다.
‘낯설다.’
우습게도 가현은 익숙한 느낌조차 들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 앞에서 약해졌다.
남자는 가만히 선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윤손찬과 남가현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남겨 놓고 온 기억. 그들만이 공유한 시간의 목소리들. 같이 울고 웃고 싸우던 사소하지만 아팠던 나날들. 지금 저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 시간들일까.
‘너 맞아? 정말 너야? 진짜로…… 윤손찬, 너야?’
그 시절의 기억을 가슴속 한구석에 처박아 버리고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던 너. 한때는 귀찮고 짜증 나는 애였다가 또 어느 날엔 비밀을 공유하고, 또 언젠가는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 버렸던 너.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말없이 증발해 버린 너. 어젯밤 내가 만났던 남자가 정말로 너였을까?
버스 정류장 쪽으로 다가서려는 가현에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안 잊는다더니.”
투정 부리는 말투. 미성에 가깝던 그의 목소리가 아닌데도 가현은 알 수 있었다. 저 남자가 수년간 가현이 찾아 헤매던 사람이라는 걸.
윤손찬, 너라는 걸.
돌아선 그는 성큼성큼 가현에게로 다가섰다. 고작 네 발자국. 그의 걸음으로 두 사람의 사이는 고작 네 발자국의 거리였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간격에 당황한 가현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얼굴도 가리고 이름도 말 안 하는데 너라고 생각했겠냐, 이 나쁜 새끼야.”
못나고 투박한 말투에도 윤손찬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늘 그랬듯이. 웃으며 넘겨 버리고 만다.
“와, 진짜 우리 자기네.”
“누구 멋대로 자기래. 넌 나한테 욕먹을 준비나 해. 내가 그날 너 기다리다가 눈 맞고 아주 한 달을 내리 앓았거든. 못 오면 못 온다고 연락 한 번 해 주면 될 걸 감감무소식에. 4년간 연락 두절 하다가 갑자기 나타나면 반가워할 줄 알았어? 이, 이…….”
더 욕해 줘야 하는데.
울컥. 울음 같은 것이 쏟아지려 했다. 울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치켜들고 숨을 삼킨 순간, 예전 이 자리에 남아 있던 바람이 두 사람에게로 불어왔다. 친구, 선후배, 연인, 그 어떤 단어로도 정의되지 못한 채 내리 4년을 멎어 있던 두 사람. 낯익은 바람이 멈춰 있던 그들의 시간을 위로했다.
“가현아.”
그 물기 서린 환영에 윤손찬이 화답해 왔다. 시간의 무게를 덜어 내는 미소와 함께.
“정말 보고 싶었어.”
다정한 포옹으로.
#1
스치다


막 버스에서 내린 남자가 몸을 움츠렸다.
10월의 중순에서 하순으로 넘어갈 무렵. 머잖아 입동이지만 절기는 여전히 여름에 가깝다고 생각하던 그였는데, 2년 만에 맞닥뜨리게 된 서울은 그의 기억 속보다 더 차갑고 낯설었다. 남자는 입고 있던 얇은 재킷의 지퍼를 끝까지 단단히 채웠다. 그러곤 아까부터 주머니 속에서 지긋지긋하게 울리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 아저씨.”
― 5시간 동안 어디서 뭘 하고 계셨습니까? 사모님께서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밤늦도록 집으로 오지도 않고 연락도 받지 않는 그 때문에 비서는 꽤 애를 태운 듯했다.
그걸 알고도 도련님이라 불린 남자는 짓궂게 응수했다.
“하긴 서울이 좀 위험하긴 하죠. 언제 무슨 사고가 생길지 모르잖아요.”
일부러 비서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는 말투였다.
― 도련님.
“농담이었어요.”
― 역시 제가 나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기념으로 두부라도 들고 나오시려고요? 전 두부 별로 안 좋아하는데.”
거침없이 던진 가시 박힌 말이 갑작스러운 침묵을 불러왔다.
― …….
아마 비서는 그를 달래면서 자신의 고용주들을 변호할 최적의 말을 고르는 중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예의상 잠시 입을 다물었든가.
― 도련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쓸모없는 대화라는 생각에 남자는 말투를 고쳤다.
“그냥 조금 걷다 보니 늦어졌어요. 두 분께는 길만 건너면 도착이라고 전해 주세요.”
―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겨우 전화를 끊고서야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2년 동안 눈에 띄게 변한 점이라면 꽃잎 대신 낙엽이 바닥을 구른다는 것 정도였다.
‘꽃이 하나도 없네.’
쌀쌀한 날씨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꽤 아쉬워했다. 봄철이 되면 이 길을 가득 메우던 목련과 벚꽃을 무척 좋아했었으니까. 부산으로 떠나기 전에도 그는 그렇게 고운 길을 걸었었고,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하필이면 잊기 어려울 만큼 딱 예쁜 계절이기도 했었다. 바람이 불 때면 가루눈처럼 휘날리던 벚꽃, 사뿐히 밟히던 목련 꽃잎의 감촉과 봄처럼 맑게 웃던 그 사람까지.
모든 것이 잔혹할 만큼 아름다웠었다.
‘다신 돌아오지 마, 윤손찬. 네가 돌아오면 그땐…….’
기억들. 그리고 잊으려던 시간들이 불어온다. 그 사람의 결연한 목소리와 눈빛이 이처럼 생생한데 정말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티켓을 받은 순간부터 밤이 다 되도록 고민했지만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도 정말…… 돌아가도 될까.
“잘 지냈어?”
“어?”
갑작스러운 인사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 아픈 데는 없었고?”
형체 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나?”
“응, 잠깐 산책 중인데…….”
그 순간, 그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전화 통화를 하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웬 미친놈인가 싶어 잔뜩 경계한 여자의 표정을 보고서야 손찬은 정신을 차렸다.
‘절대로 마중을 나올 사람이 아닌데 무슨 착각을 한 거야?’
얼결에 손찬이 고갯짓으로 인사했지만 여자는 무시하고 통화를 계속했다.
“여기 동네는 밤에도 다 밝아. 걱정하지 마.”
괜찮아. 걱정하지 마.
까칠한 표정과 상반된 여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자리를 피하려던 그의 걸음을 붙들었다. 그에게 하는 말도 아닌데 바보처럼.
손찬이 멈춰 선 사이 그녀는 통화를 계속했다.
“저번에 그 팔은? 그거 산재잖아. 그러니까 내가 돈 아까워도 보험은 다 떼라고 했잖아. 아, 알았어. 남현우는 학교에서 몇 등 했대? 뭐? 반에서 15등? 아, 그놈 진짜. 제발 공부 좀 하라고 그래. 중학교 때 전교 1등 하던 애들도 고등학교 오면 바닥 치는 판에.”
“풉.”
가만히 듣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어쨌거나 쨍쨍한 목소리 덕분에 민망함이 가시고 정신이 들었다.
‘똑 부러진 누나와 동생이라…….’
그때 넋을 놓고 있던 그를 재촉하듯 다시 핸드폰이 울어 대기 시작했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늘 차들로 가득하던 오르막길. 사람 냄새보다 매연 냄새가, 철없이 뛰노는 어린아이들보다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언덕을 오르는 가정 교사들이 더 많던 동네. 그러나 손찬은 이곳에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기억이 없었다. 가족이 그를 자랑으로 여긴 적이 없던 것과 마찬가지로.
“도련님!”
집 밖을 서성이던 비서가 얼른 달려왔다.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셨어요? 다시 전화 안 하셨어도 알아서 찾아왔을 텐데.”
“죄송합니다.”
가까이서 본 비서 김민중의 코끝이 빨갰다.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손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련님 짐은 내일 전부 올라올 예정이고 방은 정리해 놨는데 아마 당장 지내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을 겁니다. 아, 가방은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손찬은 김민중이 내민 손을 무시하고 물었다.
“아버지는요?”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저씨.”
“예.”
“아깐 죄송했어요. 절 걱정해 주셨는데.”
진심 어린 목소리로 건넨 사과에 김민중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겨우 2년이었으니까. 적어도 몇 년은 더 부산에 있을 줄 알았거든요. 설마 이렇게 빨리 다시 부르실 거라곤 전혀…….”
“도련님이 부산에서 보낸 시간은 절대 짧지 않습니다.”
김민중의 단호한 말에도 손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고작 2년이었어요. 모두에게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세요?”
“언제까지고 충분하기만 기다릴 순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이 집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 도통 예고편을 보내 주는 법이 없어서 스스로 캐내는 버릇이 들고 말았다.
“그만 들어가시죠.”
무자비한 재촉에 손찬은 정원을 지나 현관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잡을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세상에, 우리 아들!”
그와 동시에 달려 나온 여자는 두 팔을 벌려 손찬을 끌어안았다. 한때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 주던 커다란 품이 이제는 작고 약하게만 느껴져 마음이 아팠다. 계절 말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왜 이리 야속하게 흘러 버렸을까.
한참 후에야 손찬을 놔 준 김여정의 두 눈은 회한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디, 얼굴도 좀 보자, 응?”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김여정은 두 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감싸 왔다.
“이제 남자 티가 나네. 키도 많이 크고, 멋있어졌다.”
애써 웃어 보이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손찬은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응수했다.
“알아요. 거울은 매일 봤으니까.”
“우리 아들. 앞으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아버지도 너 여기서 착실히 공부하라고 했고, 어디 보낸다는 말 없으셨어. 겁먹지 않아도 돼. 알겠지?”
“…….”
그가 집을 떠나 있던 지난 2년이 어머니에겐 어떤 의미였을까. 편을 들어 주거나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는 사람 한 명 없는 집에서 혼자 버티셨을 시간들이 문득 눈으로 본 것처럼 가슴에 무겁게 와 닿았다. 이젠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까지도.
“아버지께 가 볼게요.”
“응. 식사 준비 해 놓을게. 갔다 와.”
손찬은 여전히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서 서재로 향했다.
똑똑. 규칙대로 두 번의 노크.
“아버지, 들어가겠습니다.”
2년의 시간이 비껴간 것처럼 서재 안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한 치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제목의 책들이 책장에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고, 책상 앞에 앉은 아버지는 손찬이 들어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후에도 한 번의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늘 그랬듯 손찬 혼자서만 동동거리며 아버지의 안색을 살필 뿐이었다.
“건강하셨…….”
인사를 마치기도 전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손가락을 주무르고 있던 윤성철 회장의 대답에 가정부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동시에 알싸한 향이 방을 메웠다.
“저번에 주문하라고 하신 차입니다.”
“수고했네.”
차를 받아 든 윤성철 회장은 손찬에게 물을 건네려는 가정부를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바깥에서 여직까지 돌아다녔으면 목은 알아서 축이고 왔겠지. 안 그러냐?”
돌려서 말씀하시는 버릇까지, 참 여전하시다.
“……네. 전 괜찮아요.”
“자넨 그거 가지고 나가 봐.”
“예. 회장님.”
연신 고개를 숙인 가정부가 나가고서야 윤 회장이 느릿느릿한 말투로 본론을 꺼냈다.
“네 엄마가 널 아주 아껴. 얼마나 날 들들 볶던지. 선아는 늦기 전에 아예 너 외국 보내라고 해. 그래도 난 네게 기회는 한 번 더 주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처럼은 살 기회. 앞으론 다 너 하기에 달렸다.”
“누나는 지금 어디에…….”
“선아가 널 보고 싶어 할 것 같니.”
항상 가쁘게 느껴지던 서재 안의 공기가 부피를 더한다. 얼른 떠오르는 생각들을 입술에 담기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기에. 결국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실력으로 의대 가 봐. 부대 비용은 걱정 말고.”
“전…….”
“개원 비즈니스 생각보다 까다로워. 감 없는 너한테 경영인까지 붙여서 투자하기엔 가치가 낮고. 펠로우까지 마치면 지방 쪽으로 자리 마련해 줄 테니까. 그 정도면 네 인생 꾸려 나가기에 부족하지 않겠지.”
입술을 깨물지 않았다면 실소가 새어 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집을 떠나 있던 지난 2년. 손찬은 아버지를 만족시킬 성적을 지키는 일에만 최선을 다해 왔는데, 역시나 윤성철 회장은 같은 시간을 활용하는 클래스조차 남달랐다. 고작 2년 사이에 아들의 수십 년 후의 모습까지 촘촘히 설계해 놓으셨다니.
‘시간 참 효율적으로 쓰셨구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원대한 계획에는 쓸데없는 욕심은 부리지 말고 주제를 알라는 직설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이건 선택이 가능한 거래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 자리에 남기 위해 반드시 순응해야 할 명령.
손찬은 새삼 이것을 부당하게 여길 처지가 못 됐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래.”
“말씀 다 하셨으면 올라가 보겠습니다.”
윤성철 회장은 인사하는 아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물어 왔다.
“못된 버릇은 좀 잦아들었니.”
한 글자 한 글자가 불로 지지듯 아프게 새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이 집에 머물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또 하나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손찬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네.”
“그럼 올라가 봐.”
뒤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방을 나설 때만큼은 감정 없는 미소라도 꾸며 낼 여유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

❆ ❆ ❆

― 이번 달에는 집에 와?
“못 가. 모의고사에서 생각보다 점수가 덜 나와서 공부해야 돼. 수능이 코앞이잖아.”
― 그래, 그렇지. 어디 아픈 데는 없지?
“엄마야말로 일하다가 다치지 말고. 다음 달에 수능 끝나고 봐. 끊을게.”
통화를 마치자마자 주변을 살펴보니 아까 눈이 마주쳤던 미친놈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직까지 남의 통화를 엿듣고 있었으면 가서 한마디 해 주려고 했는데.
‘아닌가? 아직까지 있을 미친 새끼면 상대도 안 하는 편이 나은가?’
머리가 어지러워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해열제도 가지고 나올걸.”
나지막하게 읊조린 가현은 겉옷을 벗고 티셔츠 팔 부분을 걷어 올렸다. 구태여 핸드폰 라이트를 켤 필요도 없었다. 환한 가로등 불빛이 찢어지고 멍든 상처들을 선명히 비춰 주었으니까.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쓰레기 뒷정리까지 마친 그녀는 정류장 벽에 뒷머리를 기댔다. 감긴 두 눈과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가 마치 제집 안방에 누워 있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바람 차네. 좋다.’
뺨을 스치는 찬바람이 싫지 않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가현은 남들은 춥다고 불평하는 계절을 유독 좋아하던 아이였다. 눈이 오면 눈사람을 만들어 냉동고에 넣어 두기도 하고, 동생과 동네 애들이랑 같이 코를 훌쩍일 때까지 밖에서 눈싸움도 했었다. 그런 날이면 엄마는 언제나 라면을 끓여 주곤 했다. 몸이 찰 땐 속이라도 따뜻해야 한다고.
하지만 눈이 오면 삽살개처럼 신나라 뛰놀던 시절은 지났다.
가현이 여전히 겨울을 반긴다면 더운 것보단 추운 쪽이 편해서일 것이다. 붕대를 칭칭 감고 지내야 한다면 여름보다 겨울이 백번 나으니까.
‘더 늦기 전에 가야 하는데…….’
그러나 생각과 달리 걸음은 달팽이처럼 느릿느릿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