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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처음 이 길을 올라왔을 땐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성벽처럼 높은 담장, 당연하다는 듯 집집마다 있는 차고, 어두운 곳 없이 빽빽하게 거리를 빛내는 등불들이 참 신기했었다. 그리고 갈색 벽돌로 쌓은 담장 옆 나무 문 앞에 섰을 땐.
어땠더라. 앞으로 이 대궐 같은 저택에서 산다는 사실에 조금은 설레었던가. 바보같이.
“아가씨. 곧 사장님 들어오실 텐데 또 이렇게 간당간당하게 오시면…….”
“집 앞에 있었어요.”
“아, 지금 현관문 앞에!”
‘있겠지.’
가현은 돌계단을 오르자마자 보이는 현관문 앞에 선 여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날도 추운데 풀 메이크업을 하고 현관 앞까지 마중 나오는 정성이라니. 사랑받는 직업도 참 쉽지 않다.
“얘, 넌 인사도 안 하니?”
새된 목소리가 날아와 뒷문으로 가려던 가현의 발길을 붙잡았다. 가현은 겉옷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뒤돌아 고개만 까딱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성의한 인사에 기가 차서 웃는 소리가 잡지의 별책 부록처럼 따라붙었다.
“넌 지금 그걸 인사라고 하니? 니 엄만 너 여기 보내기 전에 인사법도 안 가르쳐서 보내셨나 보다. 아주 예의를 밥 말아 먹어선. 하긴, 뭐 아는 게 있어야 가르치지.”
아. 기어이 또 전쟁의 서막을 열고야 만다. 저 멍청한 여자가.
“나가기 전에 어딜 간다, 언제 들어온다, 말은 해야지. 오빠가 자꾸 나한테 물어보잖아. 짜증 나게. 내가 너한테까지 일일이 관심 쏟아야겠어?”
서예리는 가현이 세어 보기를 포기한 아빠의 동거녀로, 밖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이 집까지 굴러들어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미인이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그 자리의 다른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주제를 잘 모른다는 점 정도랄까.
“섭섭하네.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되지 않나.”
가현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더니 뒷말을 이어 붙였다.
“난 늘 아줌마 걱정 하거든요. 워낙 인사 변동이 잦은 위치잖아요, 거기가.”
“그건 니가 알 거 없고. 넌 대체 언제까지 날 가정부 아줌마처럼 불러 댈 거니? 슬슬 호칭 정리는 해야지. 안 그래?”
애피타이저는 끝났는지 메인 디시가 치고 나왔다.
“똑바로 어머니라고 불러.”
“어머니? 어머니요?”
가현이 웃음을 터뜨리자 서예리의 얼굴이 더 무섭게 일그러졌다.
“아니, 아빠랑 잔다고 다 엄마, 엄마 불러 대면 난 대체 엄마가 몇 명인지 헷갈리잖아. 그래서 스쳐 갈 여자들은 엄마라고 안 부를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아줌마. 쓸데없는 기대 버려요. 마음에 안 들면 혼인 신고는 둘째 치고 결혼식이라도 하고 오든가. 물론 쉽진 않을 거예요. 우리 아빠, 알잖아요?”
서예리는 마치 방금 자신의 버킨백이 짝퉁 판정이라도 받은 것마냥 숨을 몰아쉬었다.
“너, 너, 니가 감히 나한테 이렇게 대하고도 괜찮을 것 같니?”
격앙된 목소리로 내뱉는 협박은 화자만 바뀔 뿐 6년째 똑같아 가현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용서를 빌면 무마시켜 줄까 싶은 비참함도, 그 남자의 동거녀를 조금이나마 비참하게 만들었다는 희열도, 만족도 전부 닳고 닳을 만큼 느껴 버려서. 풀벌레가 갉아먹은 잎사귀처럼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아 버렸다.
그래서 가현의 목소리는 교과서를 읽는 학생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안 괜찮겠죠. 잘 알면서도 이래요, 내가. 아직 철없는 고등학생이잖아요.”
“넌 니 아빠 원망만 하면서 권리는 다 챙기려고 들지?”
“그럼요. 자기 권리도 못 챙기는 애면 내가 여기서 6년이나 살아서 버텼겠어요? 그러니까 나보단 아줌마 걱정부터 해요. 갑자기 쫓겨나면 갈 데는 있어요? 창피해서 집에는 갈 수 있으려나? 호텔도 하루 이틀이지. 여자 혼자 모텔 방 전전하는 것도 남들 보기 창피해서…….”
짜악!
“넌 니 아빠 딸로 태어난 게 그렇게 자랑거리니? 좋겠다. 허구한 날 친딸만 쥐 잡듯이 패는 인간을 아버지로 둬서?”
손으로 뺨을 감싸며 가현이 웃었다. 고작 한 대로는 기별도 안 오는 걸 알면서 배포도 참 작다.
“자랑스럽죠. 보상으로 챙길 돈이라도 많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제가 보기보다 정이 많아서 해 주는 말인데, 압구정 아파트랑 아웃도어 가게 하나씩 받아 나간 여자가 역대 최고였어요. 현금까진 잘 모르겠고요. 협상할 때 참고하세요.”
“너 내가 그렇게 쉽게 여기서 나가 줄 거라고 생각하니? 나, 절대 죽어도 여기서 안 나가. 내가 왜 나가겠어? 모든 게 다 있는데. 이렇게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또 없는데!”
“알아요.”
가현이 미소를 머금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동거녀들을 엿 먹여 온 미소는 정교하게 조작된 기계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순수하게 웃겨 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이 상황이 정말 황당할 정도로 웃긴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정통 코미디보다는 블랙 코미디에 더 가까운 게 흠이라서 그렇지.
“피차일반이잖아요, 우리. 그러니까 계속 잘해 봐요. 더 나이 먹기 전에 여기서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기라구요. 재수 없으면 빈손으로 쫓겨나는 수도 있으니까.”
“너…….”
“날이 춥네요. 아부 덜 떨어도 되는 친딸은 먼저 들어갈게요.”
가현은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을 끝맺었다.
쾅.
닫힌 문 앞에서 서예리가 뭐라 뭐라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가현은 못 들은 척 두 눈을 꼭 감았다. 한두 번 치르는 일도 아닌데 심장은 왜 이리 뛰는지. 방으로 가기 전까지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데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기서 주저앉아 울어 봤자 더 우습게만 보일 뿐인데.
“얼음주머니 준비해서 가져다 드릴게요.”
조용히 다가온 가정부가 어깨를 토닥였다. 가현은 단호하게 그 손을 밀어 냈다.
“필요 없어요.”
“아가씨…….”
안쓰러워하는 목소리. 하지만 가정부가 내보이는 동정심보다 아버지가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이라는 점이 먼저 떠오르고 마는 그녀다. 그런 이유로 사람을 경멸하는 자신이 지긋지긋했지만 타인을 믿는 것보다는 월등히 낫다고, 가현은 이미 오래전에 결론을 내 버렸다.
“그냥 가라고 했잖아요.”
“식사는…….”
“필요 없어요.”
더 말을 걸 틈을 주지 않고 그녀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뒤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며 두 손으로 난간을 꽉 잡고 계단을 오르는 습관마저 이 집에서 보낸 6년이라는 시간이 남긴 것이었다. 갑자기 떠밀려 굴러떨어지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경험에서 누적된 습관들이 말해 주는 집이라는 공간은 가현에게 그런 곳이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곳.
‘나도 다 썩은 거지.’
가현이 웃었다. 울어야 할 때도, 화내야 할 때도, 체념할 때도 그랬듯이.
몸에는 흉터들을 남기고, 웃기지도 않는 갖은 습관들을 남기고, 가슴에는 상처가 남았는데, 이곳에서의 생활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가현은 아버지 남영호 사장이 질려서 내쫓아 버린 여자들이 부러웠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넘치는 보상과 함께 자유까지 가져갔으니까.
‘치사하게…… 부럽게.’
방으로 올라온 가현은 지친 몸을 누일 생각은 않고 창가에 선 채로 벤츠 한 대가 차고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왔다.’
더 물어뜯을 것도 없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제야 가현은 침대에 앉았다.
5분, 30분, 그리고 1시간.
‘밥은 먹었을 거고. 씻었을 거고. 서예리가 다 말했겠지.’
방 밖의 상황을 유추하며 가현은 또다시 1시간 동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십여 분이 더 지나고서야 그녀는 누구도 방으로 올라오지 않으리란 걸 깨닫고 안도했다.
‘그래, 어제 한바탕했잖아.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어. 괜찮은 거야. 그렇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묻고 나서야 가현은 기지개를 켰다.
“아으, 아으.”
한참 굳어 있던 목과 어깨, 허리 등등 온몸이 찌뿌드드하고 아팠다.
가현은 열이 오른 얼굴을 창문에 기댔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색색의 빛깔들. 그중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언제나처럼 십자가들이었다. 교회 지붕 위로 올라온 빨간색, 주황색, 하얀색 등 갖은 색으로 알록달록 빛을 내는 예쁜 십자가들. 세상을 구원할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를 알리려는 신호들.
하지만 가현은 신을 믿지 않았다.
‘살기 힘드니까 그냥 아무거나 믿고 싶을 뿐인 거야. 의지만 된다면 뭐라도 좋은 거지.’
이 세상에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정말 신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진즉 벌을 받았어야 하니까. 그녀가 벌써 집으로 돌아갔어야 하니까.
‘혼자 키우기 힘들면 다 고아원에 갖다 버려.’
합의 이혼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던 그 남자가 엄마에게 외친 말을 가현은 똑똑히 들었었다. 엄마 주희수는 버티고 버텼으나 남영호의 손찌검이 아이들에게로 향하자 결국 이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막상 이혼이 끝나고 1년이 채 안 돼서 남영호는 양육비를 두고 아이들을 자신에게 보내라는 협박을 해 왔다. 이혼하고 혼자 나와 사는 꼴을 보니 남편 쪽이 잘못한 거 아니겠냐며 남들이 수군대는 게 분명하다고,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니 저러는 거라고 이모는 욕을 했다. 양육비 강제 집행을 위해선 소송을 해야 했지만, 엄마는 법 앞에서 아빠와 싸울 여력이 없었다. 어렸던 가현이 그런 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독 춥게 느껴졌던 그 겨울.
엄마는 찬 부엌 바닥에 누워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난 이틀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가현은 현우와 눈치껏 집에서 아무 음식이나 챙겨 먹었다. 전부 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집 안에 흐르는 공기는 낯설고 무거웠다. 모든 것이 차갑고 딱딱했다. 담요 한 장 없이 바닥에 누워 있는 엄마처럼.
가현의 눈에 비친 엄마는 꼭 죽은 것만 같았다.
그날, 가현은 차마 엄마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아 이불을 든 채로 거실에 서 있었다. 찬 바닥에 한참을 서 있자 맨발이 얼어붙어 갔지만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가 없었다. 적막을 깨뜨리기가 무서웠다.
‘괜찮아.’
한참 만에 엄마가 읊조렸다. 하지만 엄마는 가현을 보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누운 채 식탁 다리 쪽을 응시하고 있던 엄마의 시선은 더없이 공허했다.
‘금방 정신 차릴게…….’
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었다. 그녀에게만 매달리고 있는 두 아이들을 잊어버린 목소리. 어쩌면 잊고 싶어 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 가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덜컥, 무언가가 무너졌다. 무엇이라 명명해야 할지도 모를 그것은 어린 동생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무서운 상황에서도 가현이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 준 기둥이자 등대였다.
까만 바다 위에서 빛을 잃은 배는 나아갈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아빠한테 갈게.’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남영호가 난동을 부릴 때마다 어린 동생이 울지 못하도록 막는 일밖엔 할 수 없던 가현이였다. 그러니 꼭 누군가 가야 한다면 어린 동생과 함께 가느니 혼자 남영호에게로 가는 편이 나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는 말렸지만 가현의 뜻은 확고했다.
‘잘 지낼 수 있어, 괜찮아. 성공해서 돌아오면 돼.’
마치 시골 마을을 떠나는 포부 넘치는 청년처럼 자잘한 결심들을 작은 가슴에 품고 가현은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에 최선의 선택을 했다.
‘걱정하지 마. 가자마자 전화할게. 매주 주말마다 버스 타고 집으로 올게.’
집 앞에 도착한 벤츠에 오르면서 가현은 마지막까지 웃어 보였다. 가족들을 남겨 두고 차가 출발할 때도 가현은 울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봐도, 처음 탄 차가 낯선 도로 위를 달리고 있어도 가현은 정말 괜찮았다. 반드시 잘해 내고야 말 테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진솔해지자면 어린 마음에 돈에 쪼들리지 않는 생활에 대한 약간의 환상도 품고 있긴 했었다. 생활비를 협박받지 않고 편히 지낼 수 있는 삶은 어떨까.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는 일상은 어떤 걸까. 순진하면서도 순수하지 못한 환상. 그런 기대감은 가족과 떨어져 지낼 생활의 유일한 지지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집에 입성한 순간, 모든 환상과 기대는 산산조각 나 버렸다.
‘안녕? 네가 가현이구나. 어쩜, 자기랑 똑 닮았다.’
낯선 도시. 낯선 집. 낯선 여자. 모든 낯선 것들.
쉽사리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에게 둘러싸인 가현에게 쏟아지는 요구들은 빠르게 숨통을 조여 왔다. 순종적인 태도, 자주 바뀌는 그 자리의 여자들에게 차려야 할 예의, 높은 성적과 번듯한 취미, 그리고 다른 요구, 요구, 요구들. 집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어린 가현이 혼자 감당하기엔 벅찼다.
버틴다는 생각으로 지내는 하루하루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의 생활비를 포함한 모든 돈은 남영호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현은 도망칠 곳이 없었다.
물 밖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을 이어 가기 위해 발버둥 칠 뿐.
‘대학 졸업 하고 돈 벌 때까지만 참으면 돼. 월급으로 우리 세 가족 생활비 정도야 충당되겠지. 현우 학비는 부족하면 일단 학자금 대출 받고. 다 같이 일하면서 갚아 나가면 돼. 그러면 앞으로 길어야 5년이야. 지금까지 버틴 시간만큼만 더 견디면 끝나. 나만 잘하면 돼. 나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말을 끝없이 되뇌며.
가현은 이 저주스러운 시간이 어서 흘러가기만을 빌고 있을 뿐이었다.
#2
악연처럼 운명처럼


날이 밝고도 손찬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새벽마다 꼬박꼬박 식탁 앞으로 불려 갔겠지만 오늘은 누구도 그를 호출하지 않았다. 이윽고 가정부가 방문을 두드린 것은 오전 10시에 다다라서였다. 윤 회장이 한창 회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시간이었다.
“잘 잤니?”
아래로 내려오자 어쩐 일로 아직까지 출근하지 않은 김여정이 식탁으로 반찬을 나르고 있었다.
손찬은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른 낯선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 물었다.
“회사는요?”
“오후에 가도 괜찮아. 배 안 고팠니? 아침에 왜 안 내려왔어?”
“늦게 일어났어요. 어제 조금 피곤했나 봐요.”
“그래? 얼른 앉아. 밥 식겠다.”
김여정에게 이끌려 식탁 앞에 앉자마자 청문회가 시작됐다.
“어제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니?”
곧이곧대로 대답하면 진짜로 밥이 다 식을 질문이다.
‘여기서 의대 얘길 꺼내면 괜히 집안만 시끄러워지겠지.’
오래전부터 김여정은 자신이 별도로 상속받은 외가의 사업체를 손찬에게 물려주고자 했었다. 실제로 그녀는 꿋꿋하게 손찬의 생일마다 일정 비율의 주식을 선물로 보내왔다. 윤 회장의 뜻에 명확히 반기를 드는 행보였다. 손찬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한편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분란의 소지가 되지 않길 바랐다.
그가 거짓말을 택한 이유였다.
“별말은 없으셨어요. 학교 애들한테 뒤처지지 않게 열심히 하라는 정도?”
“하긴. 너 처음 부산 내려가라고 하실 때부터 엄만 차라리 보딩스쿨 편입 알아보자고 했는데, 네 아버지가 일단 기다려 보라고 하셨었어. 시간 두고 천천히 받아들일 생각이셨는지 몰라도 잘된 일이지. 결국 우리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까.”
그녀는 잠시간 그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말했다.
“참, 배정은 부영고로 났어.”
밥을 떠서 입으로 가져가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부영사립고등학교? 어떻게 배정이 그렇게 됐어요?”
김여정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새삼스럽게 뭘. 여기 애들 가는 데가 거기서 거기지. 고정 관념이니 뭐니 해도 아직 우리나라에선 부영재단만 한 곳이 없잖니. 이번 겨울 지나면 3학년으로 올라갈 텐데 아는 친구 하나라도 더 있어야 빨리 적응할 거고.”
어쩌면 서울행 티켓을 받아 든 순간부터 손찬은 예정된 경기에 등판했는지도 모르겠다.
“오후에 김 비서가 등록하러 학교 가 본다고 했는데 같이 다녀와 볼래? 이사장님께 미리 말 넣어 놨거든. 수영이네 아저씨가 이사장님인 건 안 잊어버렸지? 반 배정부터 해서 다 신경 써 주실 거야. 아무 애들하고나 섞여서 같이 수업 들을 순 없잖니.”
“오늘 가 볼게요. 근데 꼭 등록을 바로 해야…….”
그때 김여정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깐만 아들. 여보세요? 응, 아니 집이야. 뭐? 그런 말 없었잖아. 비행기 시간 제대로 확인했어? 월급 꼬박꼬박 받아먹으면서 일을 그따위로 처리하면 어쩌라는 거야? 선약? 그게 무슨 소리야? 애초에 선약은 우리 쪽이랑 되어 있었는데. 가만히 두고 보다가 계약 다 놓치자는 거야?”
통화가 길어지자 김여정이 입 모양으로 사과를 하고 먼저 일어났다. 통화하는 내용을 대충 들어 보니 짧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아.”
하긴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도 이미 배정이 난 이상 손찬의 뜻이 개입될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찬이 학교로 갈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내려왔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은 김 비서였다.
“학교로 가신다고요?”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네.”
손찬은 힘없이 대답하곤 김민중과 함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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