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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너 오늘 늦게 왔지? 아침에 조회했는데 남가현 걔 저번에 교명대 논술 대회 나간 거 대상 못 탔더라? 트로피 받는 표정 졸라 구리던데?”
“그렇게 바득바득 나가더니 최우수상밖에 못 받았어? 진짜 완전 쌤통이다.”
“뭔 뜻이야?”
“몰랐어? 쌤들은 3반 박은주가 더 낫다고 했대. 근데 학교에서 남가현 뽑은 거라잖아. 솔직히 박은주가 날고 기어 봤자 인서울이 고작일 거 아니야. 될 만한 애 밀어주자 이거지.”
“이사장 버프인가요. 빤하지 뭐. 역시 돈이 좋긴 좋아.”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입술에 틴트를 바르던 여학생 둘이 화들짝 놀랐다. 뒤돌아볼 필요도 없이 거울이 비춰 주는 가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학생 둘은 합죽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쏴아아.
가현은 손을 씻으며 가만히 두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머리끝부터 치마에 가려진 허벅지 중간까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무시와 경멸이 가감 없이 담긴 눈빛과 지나치게 느릿한 시선 처리는 열아홉 살 여학생 둘이 수험 생활로 살찐 제 몸과 화장으로 떡 진 피부를 스스로 가현과 비교하며 부끄러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뭐!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마지막으로 가현의 시선은 여학생들이 들고 있는 틴트로 향했다. 가현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음에도 사과처럼 예쁜 색을 자랑하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말 없는 비아냥을 마무리했다.
“너!”
끼익, 쿵.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안쪽에서 다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현은 들개들의 합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험지를 미리 받아서 풀었다는 소문부터 학교 선생들한테 뇌물을 다 돌렸다는 설, 거기에 이사장 친척이라는 헛소문까지 만연하게 된 건 그녀의 침묵도 한몫했으니 말이다.
‘멋대로 떠들라지. 어차피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애들이야.’
입 아프게 해명해 봐야 상황은 더 지저분해질 뿐이다. 스스로 구차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부영사립고등학교는 매스컴의 계속되는 겨냥에도 굴하지 않고 클래스 운영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각 학년에 단 한 반, 세 학년을 다 합쳐 봐야 100명도 되지 않는 소수의 최우수 학생들을 위해 학교는 대놓고 특혜를 제공했다. 생활하는 건물부터가 세 학년의 A반 학생들은 신관, 나머지 학생들은 구관으로 확실히 나뉘어져 있는 만큼 시기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애들의 눈살을 받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가현이 일부러 구관으로 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저기, 박은주 좀 불러 줄래?”
마침 3반으로 들어가려는 학생에게 부탁하자 교실 안에서 한 여학생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학생은 가현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얼른 뛰어나왔다.
“남가! 구관에는 왜 왔어?”
“잠깐 얘기 좀 하자.”
“매점 갈까? 안 그래도 좀 출출했는데.”
은주가 냉큼 가현에게 팔짱을 껴 왔다.
“읏!”
가현이 얼른 은주를 밀쳐 냈다. 순간적인 통증을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튀어나오려 하는 걸 가현은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이유도 모르고 밀려난 은주가 어리둥절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왜? 팔 아파?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아니 조금, 저려서. 매일 앉아만 있으니까 혈액 순환이 안 돼서 그런가 봐. 집에 가면 파스라도 붙여야겠다.”
고개를 든 가현은 태연하게 두 팔을 공중에 휘저으며 스트레칭하는 척했다.
“야! 나 진심 놀랐잖아!”
“미안, 미안.”
“너 그러니까 공부 좀 작작해. 수능까지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몸 관리 잘해야지. 당일에 망치면……. 아니지. 너한테 내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야. 그치?”
은주는 팔짱을 끼는 대신 가현의 손을 잡고 매점으로 향했다.
“어제 치마 수선 하러 갔는데 더 이상 허리를 못 늘린다는 거야. 나 지금도 치마 때문에 숨이 잘 안 쉬어진다니까. 이 나라는 뭔가 시스템이 잘못됐어. 가장 예쁠 나이를 살에 허덕여서 보내게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너 정도면 말랐는데 뭘.”
“겨울이라 그렇지 여름이었어 봐. 지금 몸무게에 하복 입으면 으, 끔찍하다. 남가 너는 좋겠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은 다 비슷할 텐데, 넌 도무지 살이 안 쪄. 집에 가면 공부 안 하고 러닝머신 뛰지 너? 솔직하게 말해도 돼.”
“풉. 아니라니까.”
가는 내내 시답지 않은 얘기에 맞장구만 쳐 주던 가현은 매점 근처에 다다르자 학생들이 적은 계단 쪽으로 은주를 잡아끌었다.
“왜?”
“저기, 은주야.”
“응?”
자, 이제 뭐라고 말하면 될까. 맞서 싸우는 짓은 익숙할지언정 해명에는 쥐약이라 막상 얼굴을 보니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근거 없는 헛소문 때문에 너랑 서먹해지고 싶지 않다고 하면 될까? 아니면 지저분한 내 소문에 너까지 엮이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될까. 뭐라고 말해야 너에게 상처 주지 않고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너 무슨 일 있어?”
“이번 논술 말인데.”
“야!”
갑자기 은주가 큰 소리를 내며 내처 물어 왔다.
“너 설마 그 소문 때문에 그래?”
“어?”
“나도 벌써 다 들었거든! 당연히 네가 나보다 잘하니까 뽑힌 거지. 너랑 나랑 교외 수상 내역부터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널 두고 날 뽑겠어. 안 그래?”
미안한 마음에 가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은주 너니까.’
어느 날 갑자기 혼자 낯선 도시에 뚝 떨어진 가현은 너무 바쁜 학생이었다.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없이 놀기만 하다 갑자기 명문사립중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고, 가현 역시 변해야만 했다.
덕분에 학교에서는 죽은 듯이 앉아서 공부만 했다. 수업 시간, 쉬는 시간, 하교 이후에도 가현의 친구는 문제집뿐이었다. 학교는 갖은 과외에 시달리느라 체력도 의욕도 없는 아이에게 절로 친한 친구가 생길 만큼 호락호락 곳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낮은 성적표를 들고 돌아가 매를 맞는 일보단 조금 외로운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렇게 천천히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고 있을 무렵, 반으로 전학 온 아이가 바로 은주였다. 서울은 처음이라며 활짝 웃는 은주를 처음 본 순간, 가현은 그 아이가 자신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머잖아 예상대로 은주의 자리는 반에서 가장 웃음소리가 많이 나는 곳이 됐지만 가현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너 노트 필기 되게 잘한다! 엄청 꼼꼼하네. 이런 내용도 학원에서 배우는 거야?’
‘집에 가는 거야? 저번에 보니까 너 사거리 쪽으로 가는 거 같던데. 오늘은 나랑 같이 가자! 나도 오늘은 그쪽에 볼일 있거든. 너랑 더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고등학교 1지망 어디 썼어? 나도 거기로 쓸까? 같이 다니면 좋잖아.’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고 되뇌곤 했지만 역시 혼자보단 둘이 좋았고, 은주는 늘 제자리에서 썰렁한 분위기만 내뿜는 가현에게 먼저 다가와 준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더더욱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으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한참 만에 겨우 내뱉은 사과는 가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뭐가 미안한데? 설마 내가 너보다 월등히 더 잘해서 미안해, 뭐 이런 건 아니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야, 농담이야. 우리 학교 애들이 A반 욕하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이야? 지들이 공부해서 신관 가면 될 걸 꼭 남을 깎아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들이 있다니깐.”
“하지만.”
“정 미안하면 나 이번 모의고사 오답 좀 같이 봐 주든가.”
“……그거면 돼?”
“당근 안 되지. 빵도 사 주고 교복 치마도 사 주고 매일 가방도 들어 주고, 용돈도 나눠 주고, 어때?”
하여간 장난은. 하지만 덕분에 가현도 장난으로 맞받아칠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왜 이참에 대학도 붙여 달라 그러지.”
“그럴까? 기왕이면 S대 경영학과로 부탁할게.”
“와 박은주 욕심도 많다.”
“내가 또 한 욕심 하잖아.”
은주는 잠시간 뽐내듯 거들먹거리더니 이내 웃어 버렸다. 이제 이 일은 그만 언급하자는 태도였다. 서운하다면 서운하다 말할 수 있고, 그 감정이 몰래 자라 싸움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은주는 늘 못난 감정들이 몸집을 불리기 전에 장난과 웃음으로 싹을 잘라 버리곤 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더 미안했다.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게. 진짜로.”
“그래! 아, 아니다. 나 이러다 수능 날 체육복 입고 가야 할지도 몰라.”
“고3이 그 정도면 마른 거지. 그리고 대학 가면 살 다 빠진다잖아.”
“없던 쌍꺼풀도 생기고 잘난 남자 친구도 생기고?”
“아마도? 고생 좀 하면?”
“뭐야! 고생 없이 자고 일어나면 딱 생겨야 되는 거 아니야?”
서로 지지 않고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잠시 후 매점에서 사이좋게 초코우유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남가.”
매점에서도 내내 장난만 치던 은주가 갑자기 가현의 손을 잡아 왔다.
“소문 같은 거 마음 쓰지 마. 아예 듣지도 마. 전부 무시해 버려. 최우수상이 어디야. 발표가 연기돼서 그렇지 9월 모의고사 준비하면서 그 정도 했으면 된 거야.”
“고마워.”
“너 오늘 야자 안 하지? 집에 갈 때 같이 가자.”
“응. 내가 구관 쪽으로 갈게.”
“그럼 먼저 간다!”
내내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던 가현은 은주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굳은 얼굴로 신관을 향해 달렸다.
❆ ❆ ❆
“도련님, 회사에 일이 생겨서 통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비서의 말에 먼저 차에서 내린 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저씨보다 제 쪽이 더 오래 걸릴 테니까 먼저 출발할게요.”
“신관 1층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네.”
손찬은 성큼성큼 학교를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학교 참 쓸데없이 넓네.’
길을 잘못 들었는지 하필 가장 먼저 도착한 장소가 소각장이었다. 손찬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냥 왔던 방향대로 계속 걷기로 했다.
‘어차피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르는 길인 건 똑같지, 뭐.’
조금 더 가 보니 두 개의 건물과 그 사이를 이은 연결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신관과 구관으로 나누어 부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양쪽 건물 다 훌륭했다. 마치 둘 다 신관인 것처럼.
‘뒤에 있는 건물은 박물관처럼 생겼는데. 아니면 강당인가? 대학교도 아니고 무슨 건물이 이렇게 많아? 대체 신관이 어디야? 신관이 신관이라고 써져 있을 리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손찬은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보기로 하고 가까운 출입구로 향했다.
휙! 계단을 올라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어?”
자동문은 아닌데, 하는 순간 안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얼른 뒷걸음질 쳤지만 상대가 워낙 빨리 달려 나와서 피할 수가 없었다.
“으악!”
“아!”
쿠당탕탕탕탕! 두 사람이 부딪친 순간 시끄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려 왔다.
‘아 시끄러워. 뭐야, 이 소리는?’
그는 살짝 휘청거린 정도였지만 상대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끄러운 소리의 출처는 출입구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트로피인 듯했다.
금방 중심을 잡은 손찬이 넘어진 여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
“으읏…….”
넘어진 채 팔을 움켜쥐고 신음하던 여학생이 퍼뜩 고개를 들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눈빛과 더불어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에 손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 저기 갑자기 문이 열려서 안에서 나오는 걸 못 봤어. 정말 미안해.”
그는 재차 사과하며 여학생을 부축해 일으켰다.
“으윽! 이거 놔!”
여학생은 기겁하며 거칠게 그를 밀쳐 냈다.
“하.”
아니, 넘어져서 짜증 난 건 알겠는데 누가 보면 그가 파렴치한 짓이라도 하려고 한 줄 알겠다.
“어디 봐 봐.”
자기가 달려와 부딪쳐 놓곤 피해자인 척 구는 태도에 짜증이 난 손찬이 억지로 여학생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그의 코앞까지 끌려오고 만 여학생이 기겁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얼마나 다쳤는지 보려고. 손해 배상 해 주려면 견적부터 제대로 내야지. 안 그래?”
“뭐?”
손찬은 태연히 여학생의 마이를 걷어 올리고 손목 쪽의 셔츠 단추까지 척척 풀었다. 멍하니 당하고 있던 여학생은 뒤늦게 기겁하며 얼른 그의 손을 뿌리쳤다. 동시에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이 날카롭게 날아와 꽂혔다.
근데 그 눈빛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본 적 있나? 노란 명찰. 남가현. 남가현, 남가현?’
교복이 조금 헐렁해 보일 정보로 빼빼 마른 체형, 창백해 보이는 피부에 싸늘한 눈빛까지. 아무리 예뻐도 목석같은 여자는 질색하는 그인데. 구면이라고 치기에 여학생은 그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전학 가기 전에 중학교에서 마주쳤었나 보지.’
그 정도 안면이라면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손찬이 생각에 잠긴 사이 여학생은 얼른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조금쯤 겁먹은 줄 알았는데 아래에서 쏘아보는 시선이 제법 독했다.
“야, 너! 앞으론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다신 마주치는 일 없게. 알겠어?”
“뭐?”
“진짜 별게 다 꼬여.”
날 선 경고를 날린 여학생은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트로피를 주워 그가 왔던 길 쪽으로 가 버렸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경고하는 거야?
“와! 무슨 저런 게! 내가 더 짜증 난다, 내가! 재수가 없어도 내가 더 없지! 어우!”
잠시간 열불을 토해 내던 손찬은 잠시 소각장 쪽을 쳐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두자. 시간이 아깝다.’
그는 애써 짜증을 억누르며 건물로 들어갔다.
이사장 최건후가 책상에서 서류를 뒤적이는 사이 손찬은 소파에 앉아 이사장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값비싼 가구도 가구지만 여기저기 장식된 트로피며 상패가 쓸데없이 번쩍거려서 분위기만 보면 무슨 전시관 같았다.
“많이 컸구나.”
드디어 일 처리를 마쳤는지 최건후가 맞은편 자리로 와서 앉았다.
“부산에서도 공부를 꽤 잘했던데.”
“어차피 전국으로 보실 거잖아요.”
“내신은 학교별 편차가 크니까. 이 성적이면 무리 없이 A반으로 갈 수 있겠구나.”
최건후는 들고 있던 종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전체적인 시스템은 중학교 때랑 비슷해. 당연히 반 배정도 성적순이니까 엄한 애들이랑 섞일 일은 없을 거다.”
당연하겠지.
남들이 자음 모음 공부할 때 이미 알파벳 떼고 발음 기호까지 암기한 아이들이 시험 치고 들어오는 곳이 부영재단이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1지망, 2지망 써서 운 좋게 들어온 바깥 애들이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쉽게 적응할 턱이 없다.
“그런 건 어머니나 걱정하시지 전 별로 상관없어요. 인맥으로 장사할 것도 아니고.”
“하하. 너무 순진한 것도 안 좋다.”
“아직은 순진해도 될 나이죠.”
“아 참, 몸은 좀 어떠냐. 그거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깜빡했구나.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그렇지 무슨 요양을 부산까지 내려가서 해. 인사도 없이.”
‘참 그랬었지.’
“어디 수술이라도 받았었니? 아니면…….”
어려운 질문을 앞두고 고민하는 최건후 대신 손찬이 불쑥 정답을 말해 버렸다.
“건강은 핑계고요. 실은 눈치 안 보고 편하게 놀아 보고 싶어서 갔어요. 꾀병 좀 부려 봤죠. 제가 또 추위는 딱 질색인데 거긴 따뜻하고 좋잖아요. 눈도 잘 안 온다고 하고. 그래서 갔는데 와, 부산 애들 예쁘던데요?”
“어이고. 연애는 대학 가서 해. 괜히 우리 학교 물 흐리지 말고.”
“연애한다고 공부 못할 애들도 아니잖아요. 다음 달에 수능 끝나면 바로 고3인데 그 전에 여자 친구는 만들어 놔야 학교 다닐 맛이 나죠.”
“학교가 뷔페냐? 맛 따져서 다니게.”
지지도 않고 잘만 응수하던 손찬이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분위기 환기는 이만하면 충분히 했다. 최건후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슬슬 본업에 충실한 질문을 시작해 왔다.
“너 오늘 늦게 왔지? 아침에 조회했는데 남가현 걔 저번에 교명대 논술 대회 나간 거 대상 못 탔더라? 트로피 받는 표정 졸라 구리던데?”
“그렇게 바득바득 나가더니 최우수상밖에 못 받았어? 진짜 완전 쌤통이다.”
“뭔 뜻이야?”
“몰랐어? 쌤들은 3반 박은주가 더 낫다고 했대. 근데 학교에서 남가현 뽑은 거라잖아. 솔직히 박은주가 날고 기어 봤자 인서울이 고작일 거 아니야. 될 만한 애 밀어주자 이거지.”
“이사장 버프인가요. 빤하지 뭐. 역시 돈이 좋긴 좋아.”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입술에 틴트를 바르던 여학생 둘이 화들짝 놀랐다. 뒤돌아볼 필요도 없이 거울이 비춰 주는 가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여학생 둘은 합죽이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쏴아아.
가현은 손을 씻으며 가만히 두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거울에 비치는 머리끝부터 치마에 가려진 허벅지 중간까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무시와 경멸이 가감 없이 담긴 눈빛과 지나치게 느릿한 시선 처리는 열아홉 살 여학생 둘이 수험 생활로 살찐 제 몸과 화장으로 떡 진 피부를 스스로 가현과 비교하며 부끄러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뭐, 뭐!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마지막으로 가현의 시선은 여학생들이 들고 있는 틴트로 향했다. 가현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음에도 사과처럼 예쁜 색을 자랑하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말 없는 비아냥을 마무리했다.
“너!”
끼익, 쿵.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안쪽에서 다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현은 들개들의 합창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시험지를 미리 받아서 풀었다는 소문부터 학교 선생들한테 뇌물을 다 돌렸다는 설, 거기에 이사장 친척이라는 헛소문까지 만연하게 된 건 그녀의 침묵도 한몫했으니 말이다.
‘멋대로 떠들라지. 어차피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애들이야.’
입 아프게 해명해 봐야 상황은 더 지저분해질 뿐이다. 스스로 구차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부영사립고등학교는 매스컴의 계속되는 겨냥에도 굴하지 않고 클래스 운영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각 학년에 단 한 반, 세 학년을 다 합쳐 봐야 100명도 되지 않는 소수의 최우수 학생들을 위해 학교는 대놓고 특혜를 제공했다. 생활하는 건물부터가 세 학년의 A반 학생들은 신관, 나머지 학생들은 구관으로 확실히 나뉘어져 있는 만큼 시기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애들의 눈살을 받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가현이 일부러 구관으로 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저기, 박은주 좀 불러 줄래?”
마침 3반으로 들어가려는 학생에게 부탁하자 교실 안에서 한 여학생이 고개를 내밀었다. 여학생은 가현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얼른 뛰어나왔다.
“남가! 구관에는 왜 왔어?”
“잠깐 얘기 좀 하자.”
“매점 갈까? 안 그래도 좀 출출했는데.”
은주가 냉큼 가현에게 팔짱을 껴 왔다.
“읏!”
가현이 얼른 은주를 밀쳐 냈다. 순간적인 통증을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튀어나오려 하는 걸 가현은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이유도 모르고 밀려난 은주가 어리둥절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왜? 팔 아파? 내가 너무 세게 잡았나?”
“아니 조금, 저려서. 매일 앉아만 있으니까 혈액 순환이 안 돼서 그런가 봐. 집에 가면 파스라도 붙여야겠다.”
고개를 든 가현은 태연하게 두 팔을 공중에 휘저으며 스트레칭하는 척했다.
“야! 나 진심 놀랐잖아!”
“미안, 미안.”
“너 그러니까 공부 좀 작작해. 수능까지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몸 관리 잘해야지. 당일에 망치면……. 아니지. 너한테 내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니야. 그치?”
은주는 팔짱을 끼는 대신 가현의 손을 잡고 매점으로 향했다.
“어제 치마 수선 하러 갔는데 더 이상 허리를 못 늘린다는 거야. 나 지금도 치마 때문에 숨이 잘 안 쉬어진다니까. 이 나라는 뭔가 시스템이 잘못됐어. 가장 예쁠 나이를 살에 허덕여서 보내게 하는 게 말이 되냐고.”
“너 정도면 말랐는데 뭘.”
“겨울이라 그렇지 여름이었어 봐. 지금 몸무게에 하복 입으면 으, 끔찍하다. 남가 너는 좋겠다.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은 다 비슷할 텐데, 넌 도무지 살이 안 쪄. 집에 가면 공부 안 하고 러닝머신 뛰지 너? 솔직하게 말해도 돼.”
“풉. 아니라니까.”
가는 내내 시답지 않은 얘기에 맞장구만 쳐 주던 가현은 매점 근처에 다다르자 학생들이 적은 계단 쪽으로 은주를 잡아끌었다.
“왜?”
“저기, 은주야.”
“응?”
자, 이제 뭐라고 말하면 될까. 맞서 싸우는 짓은 익숙할지언정 해명에는 쥐약이라 막상 얼굴을 보니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근거 없는 헛소문 때문에 너랑 서먹해지고 싶지 않다고 하면 될까? 아니면 지저분한 내 소문에 너까지 엮이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될까. 뭐라고 말해야 너에게 상처 주지 않고 진심을 전할 수 있을까.
“너 무슨 일 있어?”
“이번 논술 말인데.”
“야!”
갑자기 은주가 큰 소리를 내며 내처 물어 왔다.
“너 설마 그 소문 때문에 그래?”
“어?”
“나도 벌써 다 들었거든! 당연히 네가 나보다 잘하니까 뽑힌 거지. 너랑 나랑 교외 수상 내역부터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널 두고 날 뽑겠어. 안 그래?”
미안한 마음에 가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은주 너니까.’
어느 날 갑자기 혼자 낯선 도시에 뚝 떨어진 가현은 너무 바쁜 학생이었다.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없이 놀기만 하다 갑자기 명문사립중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고, 가현 역시 변해야만 했다.
덕분에 학교에서는 죽은 듯이 앉아서 공부만 했다. 수업 시간, 쉬는 시간, 하교 이후에도 가현의 친구는 문제집뿐이었다. 학교는 갖은 과외에 시달리느라 체력도 의욕도 없는 아이에게 절로 친한 친구가 생길 만큼 호락호락 곳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낮은 성적표를 들고 돌아가 매를 맞는 일보단 조금 외로운 편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렇게 천천히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고 있을 무렵, 반으로 전학 온 아이가 바로 은주였다. 서울은 처음이라며 활짝 웃는 은주를 처음 본 순간, 가현은 그 아이가 자신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머잖아 예상대로 은주의 자리는 반에서 가장 웃음소리가 많이 나는 곳이 됐지만 가현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너 노트 필기 되게 잘한다! 엄청 꼼꼼하네. 이런 내용도 학원에서 배우는 거야?’
‘집에 가는 거야? 저번에 보니까 너 사거리 쪽으로 가는 거 같던데. 오늘은 나랑 같이 가자! 나도 오늘은 그쪽에 볼일 있거든. 너랑 더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고등학교 1지망 어디 썼어? 나도 거기로 쓸까? 같이 다니면 좋잖아.’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고 되뇌곤 했지만 역시 혼자보단 둘이 좋았고, 은주는 늘 제자리에서 썰렁한 분위기만 내뿜는 가현에게 먼저 다가와 준 유일한 친구였다. 그래서 더더욱 얼토당토않은 헛소문으로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한참 만에 겨우 내뱉은 사과는 가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뭐가 미안한데? 설마 내가 너보다 월등히 더 잘해서 미안해, 뭐 이런 건 아니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야, 농담이야. 우리 학교 애들이 A반 욕하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이야? 지들이 공부해서 신관 가면 될 걸 꼭 남을 깎아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것들이 있다니깐.”
“하지만.”
“정 미안하면 나 이번 모의고사 오답 좀 같이 봐 주든가.”
“……그거면 돼?”
“당근 안 되지. 빵도 사 주고 교복 치마도 사 주고 매일 가방도 들어 주고, 용돈도 나눠 주고, 어때?”
하여간 장난은. 하지만 덕분에 가현도 장난으로 맞받아칠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왜 이참에 대학도 붙여 달라 그러지.”
“그럴까? 기왕이면 S대 경영학과로 부탁할게.”
“와 박은주 욕심도 많다.”
“내가 또 한 욕심 하잖아.”
은주는 잠시간 뽐내듯 거들먹거리더니 이내 웃어 버렸다. 이제 이 일은 그만 언급하자는 태도였다. 서운하다면 서운하다 말할 수 있고, 그 감정이 몰래 자라 싸움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은주는 늘 못난 감정들이 몸집을 불리기 전에 장난과 웃음으로 싹을 잘라 버리곤 했다. 그래서 더 고맙고 더 미안했다.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게. 진짜로.”
“그래! 아, 아니다. 나 이러다 수능 날 체육복 입고 가야 할지도 몰라.”
“고3이 그 정도면 마른 거지. 그리고 대학 가면 살 다 빠진다잖아.”
“없던 쌍꺼풀도 생기고 잘난 남자 친구도 생기고?”
“아마도? 고생 좀 하면?”
“뭐야! 고생 없이 자고 일어나면 딱 생겨야 되는 거 아니야?”
서로 지지 않고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잠시 후 매점에서 사이좋게 초코우유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남가.”
매점에서도 내내 장난만 치던 은주가 갑자기 가현의 손을 잡아 왔다.
“소문 같은 거 마음 쓰지 마. 아예 듣지도 마. 전부 무시해 버려. 최우수상이 어디야. 발표가 연기돼서 그렇지 9월 모의고사 준비하면서 그 정도 했으면 된 거야.”
“고마워.”
“너 오늘 야자 안 하지? 집에 갈 때 같이 가자.”
“응. 내가 구관 쪽으로 갈게.”
“그럼 먼저 간다!”
내내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던 가현은 은주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굳은 얼굴로 신관을 향해 달렸다.
❆ ❆ ❆
“도련님, 회사에 일이 생겨서 통화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비서의 말에 먼저 차에서 내린 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저씨보다 제 쪽이 더 오래 걸릴 테니까 먼저 출발할게요.”
“신관 1층으로 가시면 될 겁니다.”
“네.”
손찬은 성큼성큼 학교를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학교 참 쓸데없이 넓네.’
길을 잘못 들었는지 하필 가장 먼저 도착한 장소가 소각장이었다. 손찬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냥 왔던 방향대로 계속 걷기로 했다.
‘어차피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르는 길인 건 똑같지, 뭐.’
조금 더 가 보니 두 개의 건물과 그 사이를 이은 연결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신관과 구관으로 나누어 부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양쪽 건물 다 훌륭했다. 마치 둘 다 신관인 것처럼.
‘뒤에 있는 건물은 박물관처럼 생겼는데. 아니면 강당인가? 대학교도 아니고 무슨 건물이 이렇게 많아? 대체 신관이 어디야? 신관이 신관이라고 써져 있을 리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손찬은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 보기로 하고 가까운 출입구로 향했다.
휙! 계단을 올라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어?”
자동문은 아닌데, 하는 순간 안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얼른 뒷걸음질 쳤지만 상대가 워낙 빨리 달려 나와서 피할 수가 없었다.
“으악!”
“아!”
쿠당탕탕탕탕! 두 사람이 부딪친 순간 시끄러운 소리가 귓전을 때려 왔다.
‘아 시끄러워. 뭐야, 이 소리는?’
그는 살짝 휘청거린 정도였지만 상대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끄러운 소리의 출처는 출입구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트로피인 듯했다.
금방 중심을 잡은 손찬이 넘어진 여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
“으읏…….”
넘어진 채 팔을 움켜쥐고 신음하던 여학생이 퍼뜩 고개를 들더니 그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눈빛과 더불어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에 손찬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 저기 갑자기 문이 열려서 안에서 나오는 걸 못 봤어. 정말 미안해.”
그는 재차 사과하며 여학생을 부축해 일으켰다.
“으윽! 이거 놔!”
여학생은 기겁하며 거칠게 그를 밀쳐 냈다.
“하.”
아니, 넘어져서 짜증 난 건 알겠는데 누가 보면 그가 파렴치한 짓이라도 하려고 한 줄 알겠다.
“어디 봐 봐.”
자기가 달려와 부딪쳐 놓곤 피해자인 척 구는 태도에 짜증이 난 손찬이 억지로 여학생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그의 코앞까지 끌려오고 만 여학생이 기겁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얼마나 다쳤는지 보려고. 손해 배상 해 주려면 견적부터 제대로 내야지. 안 그래?”
“뭐?”
손찬은 태연히 여학생의 마이를 걷어 올리고 손목 쪽의 셔츠 단추까지 척척 풀었다. 멍하니 당하고 있던 여학생은 뒤늦게 기겁하며 얼른 그의 손을 뿌리쳤다. 동시에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눈빛이 날카롭게 날아와 꽂혔다.
근데 그 눈빛이 낯설지가 않았다.
‘어디서 본 적 있나? 노란 명찰. 남가현. 남가현, 남가현?’
교복이 조금 헐렁해 보일 정보로 빼빼 마른 체형, 창백해 보이는 피부에 싸늘한 눈빛까지. 아무리 예뻐도 목석같은 여자는 질색하는 그인데. 구면이라고 치기에 여학생은 그의 취향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전학 가기 전에 중학교에서 마주쳤었나 보지.’
그 정도 안면이라면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손찬이 생각에 잠긴 사이 여학생은 얼른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조금쯤 겁먹은 줄 알았는데 아래에서 쏘아보는 시선이 제법 독했다.
“야, 너! 앞으론 눈 똑바로 뜨고 다녀. 다신 마주치는 일 없게. 알겠어?”
“뭐?”
“진짜 별게 다 꼬여.”
날 선 경고를 날린 여학생은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트로피를 주워 그가 왔던 길 쪽으로 가 버렸다.
지금 누가 누구더러 경고하는 거야?
“와! 무슨 저런 게! 내가 더 짜증 난다, 내가! 재수가 없어도 내가 더 없지! 어우!”
잠시간 열불을 토해 내던 손찬은 잠시 소각장 쪽을 쳐다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두자. 시간이 아깝다.’
그는 애써 짜증을 억누르며 건물로 들어갔다.
이사장 최건후가 책상에서 서류를 뒤적이는 사이 손찬은 소파에 앉아 이사장실을 휘휘 둘러보았다. 값비싼 가구도 가구지만 여기저기 장식된 트로피며 상패가 쓸데없이 번쩍거려서 분위기만 보면 무슨 전시관 같았다.
“많이 컸구나.”
드디어 일 처리를 마쳤는지 최건후가 맞은편 자리로 와서 앉았다.
“부산에서도 공부를 꽤 잘했던데.”
“어차피 전국으로 보실 거잖아요.”
“내신은 학교별 편차가 크니까. 이 성적이면 무리 없이 A반으로 갈 수 있겠구나.”
최건후는 들고 있던 종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전체적인 시스템은 중학교 때랑 비슷해. 당연히 반 배정도 성적순이니까 엄한 애들이랑 섞일 일은 없을 거다.”
당연하겠지.
남들이 자음 모음 공부할 때 이미 알파벳 떼고 발음 기호까지 암기한 아이들이 시험 치고 들어오는 곳이 부영재단이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1지망, 2지망 써서 운 좋게 들어온 바깥 애들이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쉽게 적응할 턱이 없다.
“그런 건 어머니나 걱정하시지 전 별로 상관없어요. 인맥으로 장사할 것도 아니고.”
“하하. 너무 순진한 것도 안 좋다.”
“아직은 순진해도 될 나이죠.”
“아 참, 몸은 좀 어떠냐. 그거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깜빡했구나.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그렇지 무슨 요양을 부산까지 내려가서 해. 인사도 없이.”
‘참 그랬었지.’
“어디 수술이라도 받았었니? 아니면…….”
어려운 질문을 앞두고 고민하는 최건후 대신 손찬이 불쑥 정답을 말해 버렸다.
“건강은 핑계고요. 실은 눈치 안 보고 편하게 놀아 보고 싶어서 갔어요. 꾀병 좀 부려 봤죠. 제가 또 추위는 딱 질색인데 거긴 따뜻하고 좋잖아요. 눈도 잘 안 온다고 하고. 그래서 갔는데 와, 부산 애들 예쁘던데요?”
“어이고. 연애는 대학 가서 해. 괜히 우리 학교 물 흐리지 말고.”
“연애한다고 공부 못할 애들도 아니잖아요. 다음 달에 수능 끝나면 바로 고3인데 그 전에 여자 친구는 만들어 놔야 학교 다닐 맛이 나죠.”
“학교가 뷔페냐? 맛 따져서 다니게.”
지지도 않고 잘만 응수하던 손찬이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분위기 환기는 이만하면 충분히 했다. 최건후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지 슬슬 본업에 충실한 질문을 시작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