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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윤아
1화
一
“폐하.”
어두운 지붕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초 하나 밝히지 않은 처소 안, 앉아 있던 여인이 느리게 미간을 찌푸렸다. 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의 소리가 울렸다.
“소인, 윤이옵니다.”
침전 문이 열리고, 여인의 눈이 감겼다. 곧은 눈빛이 어둠에 종적을 감췄다. 마당에 선 군사들의 발소리가 매섭게 귓가를 스쳤다. 어둠을 밀고 들어온 이에게서 언뜻 외면하고픈 피 냄새가 났다. 폐하라 불린 여인의 이름은 반아였다.
윤아. 그리 불렀었지, 너를. 반아가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되짚었다. 홀로 문지방을 넘은 윤이 천천히 반아에게 가까워졌다. 스스로에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던 지난날처럼 황제는 마지막까지 꼿꼿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안부나 묻자고 검을 들어 이곳을 찾았느냐.”
윤이 살며시 웃었다. 애달픔 고인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듣고 싶던 목소리, 그리웠던 사람이다. 윤은 창호지를 뚫고 스며든 달빛을 사뿐히 밟으며 다시 황제, 반아에게로 가까워졌다.
“제가 올 것을 아셨습니까.”
“알았다.”
“어찌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뿐이다.”
차가웠다. 냉정한 답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마음 한쪽이 저릿했다. 슬픈 미소가 어둠을 빛냈다. 긴 세월, 자신은 연정을 그리고 또 그렸건만, 반아는 마지막까지 이유에 자신을 두지 않았다.
“왜 저를 보지 않으십니까.”
묻는 목소리가 가련했다.
“폐하의 한마디면, 누이의 한마디면 저는 사랑을 처음 받아 본 아이처럼, 햇살을 처음 본 아이마냥 웃곤 했지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눈짓 한 번에 무너졌나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어찌 저를 봐 주지 않으십니까.”
반아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뒤적이고 있었다.
“수백, 수천 번 묻고 싶었나이다. 어찌하여 제가 아니냐고. 폐하의 운명 한 자락에 왜 제가 없느냐고. 말이 안 되는 물음이었음을 압니다. 제게 마음이 있다 하여 폐하께도 같은 마음을 바라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허나 사람이기에 바랐습니다. 수도 없이 바랐나이다. 그리고 종국엔 그리 말했지요. 어쩌자고 폐하를 마음에 두었을까. 어쩌자고 연심을 품었나. 아십니까? 제 감정을 자책하는 심정을. 그것이 사람을 어디까지 무너지게 할 수 있는지를.”
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떨어지는 그의 눈가에 달빛이 내렸다. 윤의 모습은 이미 지난날 티 없이 웃던 그가 아니었다. 연정에 먼 눈에 담긴 것은 위태로움이었다. 금방이고 제 손에 쥐고 있는 칼날을 딛고 설 것 같은 위태로움.
다시 제게로 오는 발걸음 소리에 반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리도 어두운 밤, 조용하던 황궁에 피바람을 몰고 온 자를 마주하기 위해.
“폐하.”
힘없는 목소리가 바닥에 고였다. 고요만이 남은 둘 사이로 날 선 공기가 침잠했다.
“……어째서 제가 아니었습니까.”
“언제나 너였느니라.”
“어째서 저를 떠나셨습니까.”
“한순간도 마음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허면 저는 왜, 이토록 아픈 것입니까.”
윤아,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참으로 멀리 돌아왔다. 기억도 안 날 만큼 길고 긴 길이었다. 해서 그 세월, 한 번쯤 생각해 보곤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꼬이고 꼬여 풀리지 않는 이 실타래의 시작은 언제일까. 윤이 너를 처음 만난 날? 네가 볼모가 되어 떠난 날? 아니면 내 어머니께서 세상을 뜨신 날. 네가 보낸 서찰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적은 순간과 네가 황궁에 돌아온 날.
시작이라 할 만한 것들은 전부 되짚어 보았다. 혹 처음을 알면 이 질긴 인연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헌데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실은 떠올렸던 모든 게 처음은 아니었을까.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이리도 질긴 것을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하나의 처음을 풀어도 남은 인연이 수백 수천인 운명. 헌데 반아는 지금, 몇 번이고 되짚었던 일을 또 한 번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하나의 가닥을 찾았다.
사람은 마지막이 되면 비로소 처음을 생각한다 했던가. 처음, 이 질긴 인연의 시작.
✾
“황제 폐하께서 황윤 황자마마를 훤에서 유학시키시는 것이 어떠하냐 물으셨사옵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 선조. 나라가 건국된 지 300년 남짓 된 때였다.
양반들 사이에서 유교가 주류로 자리를 잡았고 양민과 천민은 선비랍시고 에헴, 하며 비단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그들이 고까워도 고개를 숙이는 때였다. 황제에 즉위한 황원에게는 슬하에 황후 단향이 낳은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유학이라니?”
훤나라 사신이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다 알면서 무엇을 묻느냐는 뜻이었다. 편전에 서 있는 신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훤과 선조는 국경이 맞닿아 있는 나라로, 형제국이자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팽팽하던 힘의 균형도 휘청거릴 때가 있었다. 그때가 되면 힘이 강해진 상대국에서 유학이란 빌미로 황제의 자식을 요구했다. 볼모나 마찬가지였다.
혹 강해진 자신의 힘 때문에 상대국이 다른 나라와 손이라도 잡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훤 역시 선조에 황자를 보낸 전례가 몇 차례 있었다.
“유학이라니 좋은 제안이나, 황실에서도 심사숙고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훤도 알다시피 황자 윤은 황실에 하나뿐인 혈통이다.”
형식적인 미소가 용안을 덮었다. 속에 붙은 불안과 화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한 번의 유산과 돌이 지나기 전 부모의 품을 떠난 두 아이 끝에서야 간신히 본 자식이었다.
황실에 악귀가 씌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황자 윤만이 저주라 불리는 것을 뚫고 살아남았다. 허나 아직까지 한 걸음도 걱정되는 여섯 살 난 아이였다. 게다가 지금의 훤 황제는 악명이 높았다. 선대 모든 황자들이 살아 돌아왔으나 이번만은 느낌이 좋지 못했다.
선조를 속국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훤 황제의 야욕이 이미 선조 조정의 귀에도 들려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욕심을 이루기 위해 훤은 선조의 대를 이을 황자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 방법에 볼모보다 좋은 수는 없었다. 먼 여정에 지쳐 죽었다 하면 그만이었다.
“고민하실 일이 무엇이옵니까. 이는 선대 황제 폐하들께서도 허락하신 일이 아니옵니까.”
“사신은 심사숙고하시겠다는 폐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까. 아니면 감히, 폐하의 말씀에 토를 다시는 겁니까.”
책주였다. 숱한 정쟁의 세월 속 선조는 수십의 황제를 거쳤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역사에 이름을 올린 책주, 곧 책사는 단 아홉이었다. 수십 번 황좌의 주인이 바뀌는 동안 책주는 견고히 자리를 지켰다.
오직 책사의 가문에서만 배출하는 책주는 그 정통성이 황실과 비등했다. 선대 책주의 직계 혈통만이 다음을 이을 수 있었다. 그들은 책주라는 직책에 걸맞게 정치적 수가 뛰어났으며 타고난 머리가 총명했다. 누구도 쉽게 건들 수 없었고 황제라 하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혹여 그것이 여인이라 하여도.
“소신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사옵니다, 폐하.”
사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선조 책주의 권세가 높으니 허릴 굽힐 수밖에.
처음, 서선희라 이름하는 여인이 선조의 책주가 되었다 했을 때 훤은 쾌재를 불렀다.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허나 그는 안일한 착각이었다. 선희는 전보다 더한 권세를 휘두르며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그의 정적이라는 이조 참판 조세현의 무리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선희는 선대 어느 책주보다 뛰어나고 강력했다. 웃는 낯은 감정을 볼 수 없었으며 스스로의 능력을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것이 간혹 오만하다는 평을 불러왔지만 그에 걸맞게 역량이 뛰어나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다.
“훤의 뜻은 잘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 편히 쉬거라.”
황제의 고갯짓에 사신이 편전을 나갔다. 신료들은 지금의 사건이 불러올 훗날을 짐작하며 줄을 바꿔 타야 하는 건 아닌지 가늠했다.
참판 조세현은 책주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수를 계산했다. 한 나라의 대를 이을 황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번 사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몇백 년간 행해 온 일을 자신의 대에서 뒤집을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몇 안 되는 후궁 중에 제 여식이 있었다. 드디어 그를 이용할 때가 온 것이다. 훗날 황제에게 할아버님이라 불리는 것을 상상하자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들도 그만 물러가시오.”
지친 기색으로 편전을 빠져나간 황제 원은 여느 때처럼 곧장 황후궁 교화전으로 향했다. 정략으로 한 혼인이었으나 황제와 황후는 금슬이 좋았다. 서로를 연모하며 아끼는 마음이 담장 너머까지 전해졌으니, 백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얘깃거리였다. 원은 황후 단향과 자주 조정의 일을 논했다.
“해서 황자를 보내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편전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단향의 눈꺼풀이 떨렸다. 차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지 말끝이 떨렸다.
“추운 곳이라지요? 겨울바람이 매섭다던데, 겨우 여섯 난 아이를 그런 곳에 보낸다면 얼마나 견디겠사옵니까. 훤의 황제가 악명 높은 폭군이라 들었나이다. 선조를 속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도 있사옵니다. 윤이를 보내면 그것이 마지막 모습일 것입니다. 허면 황실은 또다시 대가 끊기겠지요. 정녕 보내지 않을 방법은 없사옵니까.”
원이 단향의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못난 모습. 빌어먹게도 못난 모습. 힘이 없어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의 못난 모습. 원이 두 눈을 감았다.
네 번의 회임이 있었으나 이제 곁엔 황자 윤뿐이었다. 더 이상의 회임은 어려울 거라는 태의의 말이 있었고 다시 회임을 한다 하여도 단명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또한 단향의 심신이 더 약해질까 원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황후가 아닌 후궁에게서 후사를 보고 싶진 않았다. 외척 세력이 커질까 걱정되는 것은 물론, 제 부인을 연모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황후는 그런 황궁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보내십시오.”
하여 말했다. 보내시라고. 턱을 깨문 채 입술을 떨다, 조용히 깊은 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럴 수 없소. 황좌가 불안해질 것이오.”
“신첩도 알고 있나이다. 허나 나라가 흔들리는 것보다 낫사옵니다. 폐하, 훗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을 희생하셔야 하옵니다.”
단향이 잡은 손을 세게 쥐었다. 결심이 선 표정이었다. 훤의 국력은 지난 세월을 통틀어 가장 강력했다. 그것이 선조에 끼치는 영향은 위협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폭풍을 자초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후사는 언제든 생길 수 있다. 황제는 부인의 존체가 약해질 것이 염려스러우니 더 이상의 회임은 불가하다 하였으나 단향은 생각을 바꿨다. 몸이 약해져 병을 얻는다 해도 감당해야 했다. 후계 없는 황실을 만들 순 없었다. 원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희생?”
교화전 밖, 창문 너머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황자 윤이었다. 어린 눈동자가 허공을 방황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자신이 훤에 가야 한단 뜻인가. 순한 눈에 빠르게 눈물이 고였다. 여리고 하얀 볼을 타고 내린 그것이 고사리 같은 손에 떨어졌다.
윤은 그대로 뒷마당을 달려 교화전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린 끝에 어느 담장 앞에 섰다. 작은 손이 망설이다 주먹을 쥐었다. 겁먹은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엔 그저 비장함뿐이었다. 허나 윤이 뒤이어 한 행동은 고작 담장과 담장 사이, 틈새에 곧장 들어가 무릎을 끌어안고 우는 것뿐이었다.
그리도 어린 나이였다. 그늘진 곳에 들어가는 것도 떨려 하는 여린 심성.
‘저 분이셔. 훤에…….’
오늘 아침, 궁인들이 자신을 불쌍히 보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뒤에서 무어라 소곤거리는 듯했으나 별거 아니라 생각하며 넘겼건만,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저를 지켜 주지 못하셨다.
낮에는 지나가던 신료들도 자신을 피하는 눈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갖은 아부를 떨던 이들이다. 하루아침, 아니 한 밤을 자고 나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곤 차디찬 담장, 여기가 전부였다. 혼자 남겨진 설움이 밀려왔다.
“마마, 어찌 여기 계시옵니까?”
황궁 나인이 윤을 발견했다. 처소로 가지 않겠다는 걸 몇 번의 설득 끝에서야 어렵사리 달래고 길을 나섰다.
✾
“황자와 함께 호위 무사들도 보낼 것이다. 걱정 말거라. 이 아비를 믿어.”
결정은 내려졌다. 사신이 훤으로 돌아가는 보름 후, 황자 황윤도 함께 떠난다. 황제와 황후는 결정을 내린 뒤로 윤을 볼 때마다 슬픔 녹은 눈빛이었다. 그런 부모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윤은 더 큰 절망과 슬픔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섭고 겁이 나는데, 흉악한 외로움에 힘겹기만 한데, 다들 어찌 저러는지. 끝 간 데 없이 무거운 짐을 얹었다. 그런 분들께 그냥 나를 안아 달라 하기도 싫었다. 그저 미웠다.
신료와 궁인들은 황자가 훤으로 가 곧 죽는다는데 불쌍해 어쩌냐며 뒷말을 했다. 황궁에 윤을 위로하는 이는 없었다. 그의 편에 서 불가하다 항명해 주는 이 또한 없었다. 그간 잘해 주던 것은 정치적 수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러니 걱정하며 찾아오는 이가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해서 윤은 그 뒤로 궁인들을 따돌리며 황궁 곳곳, 담장 틈새에 몸을 숨기고 우는 것을 반복했다. 이리해도 결정이 번복되는 것은 아니나 슬픔이 덮치니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안아 주질 않으니 스스로라도 이리해야 했다.
덕분에 여린 눈이 퉁퉁 부어 못난 몰골이 되었다.
“그만 울어.”
1화
一
“폐하.”
어두운 지붕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초 하나 밝히지 않은 처소 안, 앉아 있던 여인이 느리게 미간을 찌푸렸다. 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이의 소리가 울렸다.
“소인, 윤이옵니다.”
침전 문이 열리고, 여인의 눈이 감겼다. 곧은 눈빛이 어둠에 종적을 감췄다. 마당에 선 군사들의 발소리가 매섭게 귓가를 스쳤다. 어둠을 밀고 들어온 이에게서 언뜻 외면하고픈 피 냄새가 났다. 폐하라 불린 여인의 이름은 반아였다.
윤아. 그리 불렀었지, 너를. 반아가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되짚었다. 홀로 문지방을 넘은 윤이 천천히 반아에게 가까워졌다. 스스로에게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던 지난날처럼 황제는 마지막까지 꼿꼿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안부나 묻자고 검을 들어 이곳을 찾았느냐.”
윤이 살며시 웃었다. 애달픔 고인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듣고 싶던 목소리, 그리웠던 사람이다. 윤은 창호지를 뚫고 스며든 달빛을 사뿐히 밟으며 다시 황제, 반아에게로 가까워졌다.
“제가 올 것을 아셨습니까.”
“알았다.”
“어찌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뿐이다.”
차가웠다. 냉정한 답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마음 한쪽이 저릿했다. 슬픈 미소가 어둠을 빛냈다. 긴 세월, 자신은 연정을 그리고 또 그렸건만, 반아는 마지막까지 이유에 자신을 두지 않았다.
“왜 저를 보지 않으십니까.”
묻는 목소리가 가련했다.
“폐하의 한마디면, 누이의 한마디면 저는 사랑을 처음 받아 본 아이처럼, 햇살을 처음 본 아이마냥 웃곤 했지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눈짓 한 번에 무너졌나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어찌 저를 봐 주지 않으십니까.”
반아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뒤적이고 있었다.
“수백, 수천 번 묻고 싶었나이다. 어찌하여 제가 아니냐고. 폐하의 운명 한 자락에 왜 제가 없느냐고. 말이 안 되는 물음이었음을 압니다. 제게 마음이 있다 하여 폐하께도 같은 마음을 바라는 것은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허나 사람이기에 바랐습니다. 수도 없이 바랐나이다. 그리고 종국엔 그리 말했지요. 어쩌자고 폐하를 마음에 두었을까. 어쩌자고 연심을 품었나. 아십니까? 제 감정을 자책하는 심정을. 그것이 사람을 어디까지 무너지게 할 수 있는지를.”
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떨어지는 그의 눈가에 달빛이 내렸다. 윤의 모습은 이미 지난날 티 없이 웃던 그가 아니었다. 연정에 먼 눈에 담긴 것은 위태로움이었다. 금방이고 제 손에 쥐고 있는 칼날을 딛고 설 것 같은 위태로움.
다시 제게로 오는 발걸음 소리에 반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리도 어두운 밤, 조용하던 황궁에 피바람을 몰고 온 자를 마주하기 위해.
“폐하.”
힘없는 목소리가 바닥에 고였다. 고요만이 남은 둘 사이로 날 선 공기가 침잠했다.
“……어째서 제가 아니었습니까.”
“언제나 너였느니라.”
“어째서 저를 떠나셨습니까.”
“한순간도 마음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허면 저는 왜, 이토록 아픈 것입니까.”
윤아,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참으로 멀리 돌아왔다. 기억도 안 날 만큼 길고 긴 길이었다. 해서 그 세월, 한 번쯤 생각해 보곤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꼬이고 꼬여 풀리지 않는 이 실타래의 시작은 언제일까. 윤이 너를 처음 만난 날? 네가 볼모가 되어 떠난 날? 아니면 내 어머니께서 세상을 뜨신 날. 네가 보낸 서찰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적은 순간과 네가 황궁에 돌아온 날.
시작이라 할 만한 것들은 전부 되짚어 보았다. 혹 처음을 알면 이 질긴 인연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헌데 짐작이 가지 않았다. 실은 떠올렸던 모든 게 처음은 아니었을까.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이리도 질긴 것을 만들었구나, 생각했다.
하나의 처음을 풀어도 남은 인연이 수백 수천인 운명. 헌데 반아는 지금, 몇 번이고 되짚었던 일을 또 한 번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하나의 가닥을 찾았다.
사람은 마지막이 되면 비로소 처음을 생각한다 했던가. 처음, 이 질긴 인연의 시작.
✾
“황제 폐하께서 황윤 황자마마를 훤에서 유학시키시는 것이 어떠하냐 물으셨사옵니다.”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 선조. 나라가 건국된 지 300년 남짓 된 때였다.
양반들 사이에서 유교가 주류로 자리를 잡았고 양민과 천민은 선비랍시고 에헴, 하며 비단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그들이 고까워도 고개를 숙이는 때였다. 황제에 즉위한 황원에게는 슬하에 황후 단향이 낳은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유학이라니?”
훤나라 사신이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다 알면서 무엇을 묻느냐는 뜻이었다. 편전에 서 있는 신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훤과 선조는 국경이 맞닿아 있는 나라로, 형제국이자 동맹국이었다. 그러나 팽팽하던 힘의 균형도 휘청거릴 때가 있었다. 그때가 되면 힘이 강해진 상대국에서 유학이란 빌미로 황제의 자식을 요구했다. 볼모나 마찬가지였다.
혹 강해진 자신의 힘 때문에 상대국이 다른 나라와 손이라도 잡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훤 역시 선조에 황자를 보낸 전례가 몇 차례 있었다.
“유학이라니 좋은 제안이나, 황실에서도 심사숙고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훤도 알다시피 황자 윤은 황실에 하나뿐인 혈통이다.”
형식적인 미소가 용안을 덮었다. 속에 붙은 불안과 화를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한 번의 유산과 돌이 지나기 전 부모의 품을 떠난 두 아이 끝에서야 간신히 본 자식이었다.
황실에 악귀가 씌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황자 윤만이 저주라 불리는 것을 뚫고 살아남았다. 허나 아직까지 한 걸음도 걱정되는 여섯 살 난 아이였다. 게다가 지금의 훤 황제는 악명이 높았다. 선대 모든 황자들이 살아 돌아왔으나 이번만은 느낌이 좋지 못했다.
선조를 속국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훤 황제의 야욕이 이미 선조 조정의 귀에도 들려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욕심을 이루기 위해 훤은 선조의 대를 이을 황자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 방법에 볼모보다 좋은 수는 없었다. 먼 여정에 지쳐 죽었다 하면 그만이었다.
“고민하실 일이 무엇이옵니까. 이는 선대 황제 폐하들께서도 허락하신 일이 아니옵니까.”
“사신은 심사숙고하시겠다는 폐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까. 아니면 감히, 폐하의 말씀에 토를 다시는 겁니까.”
책주였다. 숱한 정쟁의 세월 속 선조는 수십의 황제를 거쳤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역사에 이름을 올린 책주, 곧 책사는 단 아홉이었다. 수십 번 황좌의 주인이 바뀌는 동안 책주는 견고히 자리를 지켰다.
오직 책사의 가문에서만 배출하는 책주는 그 정통성이 황실과 비등했다. 선대 책주의 직계 혈통만이 다음을 이을 수 있었다. 그들은 책주라는 직책에 걸맞게 정치적 수가 뛰어났으며 타고난 머리가 총명했다. 누구도 쉽게 건들 수 없었고 황제라 하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혹여 그것이 여인이라 하여도.
“소신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사옵니다, 폐하.”
사신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선조 책주의 권세가 높으니 허릴 굽힐 수밖에.
처음, 서선희라 이름하는 여인이 선조의 책주가 되었다 했을 때 훤은 쾌재를 불렀다.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허나 그는 안일한 착각이었다. 선희는 전보다 더한 권세를 휘두르며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그의 정적이라는 이조 참판 조세현의 무리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선희는 선대 어느 책주보다 뛰어나고 강력했다. 웃는 낯은 감정을 볼 수 없었으며 스스로의 능력을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그것이 간혹 오만하다는 평을 불러왔지만 그에 걸맞게 역량이 뛰어나니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었다.
“훤의 뜻은 잘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 편히 쉬거라.”
황제의 고갯짓에 사신이 편전을 나갔다. 신료들은 지금의 사건이 불러올 훗날을 짐작하며 줄을 바꿔 타야 하는 건 아닌지 가늠했다.
참판 조세현은 책주와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수를 계산했다. 한 나라의 대를 이을 황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이번 사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몇백 년간 행해 온 일을 자신의 대에서 뒤집을 만큼 배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몇 안 되는 후궁 중에 제 여식이 있었다. 드디어 그를 이용할 때가 온 것이다. 훗날 황제에게 할아버님이라 불리는 것을 상상하자니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경들도 그만 물러가시오.”
지친 기색으로 편전을 빠져나간 황제 원은 여느 때처럼 곧장 황후궁 교화전으로 향했다. 정략으로 한 혼인이었으나 황제와 황후는 금슬이 좋았다. 서로를 연모하며 아끼는 마음이 담장 너머까지 전해졌으니, 백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얘깃거리였다. 원은 황후 단향과 자주 조정의 일을 논했다.
“해서 황자를 보내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편전에서 있었던 일을 들은 단향의 눈꺼풀이 떨렸다. 차분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는지 말끝이 떨렸다.
“추운 곳이라지요? 겨울바람이 매섭다던데, 겨우 여섯 난 아이를 그런 곳에 보낸다면 얼마나 견디겠사옵니까. 훤의 황제가 악명 높은 폭군이라 들었나이다. 선조를 속국으로 삼으려 한다는 소문도 있사옵니다. 윤이를 보내면 그것이 마지막 모습일 것입니다. 허면 황실은 또다시 대가 끊기겠지요. 정녕 보내지 않을 방법은 없사옵니까.”
원이 단향의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못난 모습. 빌어먹게도 못난 모습. 힘이 없어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의 못난 모습. 원이 두 눈을 감았다.
네 번의 회임이 있었으나 이제 곁엔 황자 윤뿐이었다. 더 이상의 회임은 어려울 거라는 태의의 말이 있었고 다시 회임을 한다 하여도 단명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또한 단향의 심신이 더 약해질까 원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황후가 아닌 후궁에게서 후사를 보고 싶진 않았다. 외척 세력이 커질까 걱정되는 것은 물론, 제 부인을 연모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황후는 그런 황궁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보내십시오.”
하여 말했다. 보내시라고. 턱을 깨문 채 입술을 떨다, 조용히 깊은 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럴 수 없소. 황좌가 불안해질 것이오.”
“신첩도 알고 있나이다. 허나 나라가 흔들리는 것보다 낫사옵니다. 폐하, 훗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을 희생하셔야 하옵니다.”
단향이 잡은 손을 세게 쥐었다. 결심이 선 표정이었다. 훤의 국력은 지난 세월을 통틀어 가장 강력했다. 그것이 선조에 끼치는 영향은 위협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폭풍을 자초하는 것과 매한가지였다.
후사는 언제든 생길 수 있다. 황제는 부인의 존체가 약해질 것이 염려스러우니 더 이상의 회임은 불가하다 하였으나 단향은 생각을 바꿨다. 몸이 약해져 병을 얻는다 해도 감당해야 했다. 후계 없는 황실을 만들 순 없었다. 원을 설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희생?”
교화전 밖, 창문 너머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황자 윤이었다. 어린 눈동자가 허공을 방황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자신이 훤에 가야 한단 뜻인가. 순한 눈에 빠르게 눈물이 고였다. 여리고 하얀 볼을 타고 내린 그것이 고사리 같은 손에 떨어졌다.
윤은 그대로 뒷마당을 달려 교화전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린 끝에 어느 담장 앞에 섰다. 작은 손이 망설이다 주먹을 쥐었다. 겁먹은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얼굴엔 그저 비장함뿐이었다. 허나 윤이 뒤이어 한 행동은 고작 담장과 담장 사이, 틈새에 곧장 들어가 무릎을 끌어안고 우는 것뿐이었다.
그리도 어린 나이였다. 그늘진 곳에 들어가는 것도 떨려 하는 여린 심성.
‘저 분이셔. 훤에…….’
오늘 아침, 궁인들이 자신을 불쌍히 보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뒤에서 무어라 소곤거리는 듯했으나 별거 아니라 생각하며 넘겼건만,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도 저를 지켜 주지 못하셨다.
낮에는 지나가던 신료들도 자신을 피하는 눈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갖은 아부를 떨던 이들이다. 하루아침, 아니 한 밤을 자고 나니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상에 의지할 곳이라곤 차디찬 담장, 여기가 전부였다. 혼자 남겨진 설움이 밀려왔다.
“마마, 어찌 여기 계시옵니까?”
황궁 나인이 윤을 발견했다. 처소로 가지 않겠다는 걸 몇 번의 설득 끝에서야 어렵사리 달래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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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와 함께 호위 무사들도 보낼 것이다. 걱정 말거라. 이 아비를 믿어.”
결정은 내려졌다. 사신이 훤으로 돌아가는 보름 후, 황자 황윤도 함께 떠난다. 황제와 황후는 결정을 내린 뒤로 윤을 볼 때마다 슬픔 녹은 눈빛이었다. 그런 부모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윤은 더 큰 절망과 슬픔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섭고 겁이 나는데, 흉악한 외로움에 힘겹기만 한데, 다들 어찌 저러는지. 끝 간 데 없이 무거운 짐을 얹었다. 그런 분들께 그냥 나를 안아 달라 하기도 싫었다. 그저 미웠다.
신료와 궁인들은 황자가 훤으로 가 곧 죽는다는데 불쌍해 어쩌냐며 뒷말을 했다. 황궁에 윤을 위로하는 이는 없었다. 그의 편에 서 불가하다 항명해 주는 이 또한 없었다. 그간 잘해 주던 것은 정치적 수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러니 걱정하며 찾아오는 이가 없는 건 당연지사였다.
해서 윤은 그 뒤로 궁인들을 따돌리며 황궁 곳곳, 담장 틈새에 몸을 숨기고 우는 것을 반복했다. 이리해도 결정이 번복되는 것은 아니나 슬픔이 덮치니 어쩔 수 없었다. 아무도 안아 주질 않으니 스스로라도 이리해야 했다.
덕분에 여린 눈이 퉁퉁 부어 못난 몰골이 되었다.
“그만 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