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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윤아
2화

누군가 무릎에 얼굴을 묻은 윤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개를 들자 제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저와 같은 자세로 앞에 앉아 있었다.
“봐, 눈이 못났다.”
“누구냐?”
“딱 보아도 내 나이가 더 많은데, 어찌 처음부터 말이 짧아?”
“몇인데……요?”
“아홉. 이름은 반아다. 서반아. 너는?”
“나이는 여섯이고, 이름은 황윤…….”
“아, 훤에 간다는 황자구나. 해서 울었나 보네.”
남의 입을 통해 듣는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새삼 상기된 처지에 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참으로 나빴다. 그리 확인시켜 줄 게 무어야. 해서 우는 걸 뻔히 알고도 저리 천진하게 말해 줄 게 대체 무어야.
서글픔에 어쩔 줄 몰라 눈썹을 찡그렸다. 반아가 웃으며 다과를 내밀었다. 들끓던 상심이 일순 잠잠해졌다. 겨우 달달한 다과 하나에. 남이 내민 손, 저 작은 손 한 번에. 겨우, 정말 겨우, 웃어 주는 저 예쁜 마음씨 하나에 말이다.
겨우 그 한 번이 없어 울었던 윤에게 참으로 슬프고 기쁜 순간이었다.
“도망갈래, 나랑?”
“어딜?”
“난 어머니의 눈을 피하고 싶고 넌 사신의 눈을 피하고 싶고, 그치?”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아가 그를 일으키더니 여유롭게 황궁을 거닐었다. 윤은 도망친다는 게 이런 뜻이 아니지 않나, 고민했다.
노을 지는 황궁은 고요했다. 세상이 마치 주황빛 비단으로 덧씌워진 듯,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높은 담장을 따라 거니는 둘의 발은 꼭 고사리 같은 손처럼 작았다.
반아의 걸음이 향한 끝엔 고즈넉한 정자가 자리해 있었다. 함영정(含朠亭)은 황궁에서 보기 드물게 낡은 곳이었다. 기둥은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웠고 지붕엔 먼지가 앉았다. 정자는 연못 가장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드넓은 연못의 반대편 끝은 또다시 높은 담장이었다.
“봐, 아무도 없지?”
도망의 뜻을 긴박하게 생각했던 윤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알고 있던 도망과는 달랐으나 정말 사람 하나 없었다.
“어머니랑 숨바꼭질할 때면 오는 곳이다.”
“어머니가 궁인이야?”
반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반아의 모친은 책주 선희였다. 반아의 성은 선희에게서 따온 것으로, 선대 책주의 직계 혈통은 모두 서씨 성을 썼다. 반아 역시 부친이 아닌 선희의 성을 물려받았다.
웃으면서도 날 서게 상대를 찌르는 선희가 유일하게 풀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딸 반아와 낭군 이재준이었다. 유일하게 진실 된 행동을 보여 주는 사람들이었다.
“네가 울던 곳이 책주전, 그러니까 어머니의 처소야. 하루도 빠짐없이 울어 대니 궁금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어 와 봤지.”
제 처지가 기억난 윤이 주먹을 꼭 쥐었다. 이놈의 서러움은 정도를 몰랐다. 덜어지라고 울고 또 울며 무던히 애를 써도 새로 차올랐다.
큰 눈이 곧 울 기미를 보이자 반아가 그를 안고 등을 쓸어내렸다. 선희가 달래 주던 방법이었다. 아까 다과는 반아가 울 때마다 재준이 몰래 쥐어 주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공연히 몇 번 더 운 적도 있다. 다과가 하도 맛있기에.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다과를 꺼내려는데 윤이 끝내 큰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몸을 떼려던 반아가 하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윤은 퉁퉁 부은 눈을 뜨지도 못한 채 한참을 울었다. 아무도 저를 달래 주지 않았다. 한 사람도 다가오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가도 미안하다 하시거나 고개 돌려 눈물지으실 뿐이었다. 누군가의 품이 절실했던 윤에게 그는 곤욕이었다. 웃는 얼굴이 그리웠다. 반아에게서 그를 보자 설움이 북받쳤다.
“그래, 사람은 때로 울어야 한다더라. 남들 앞에서만 울지 않으면 된다고, 어머니께서 그러셨어.”
“……남이잖아.”
그 와중에 아닌 것을 되묻는 목소리는 울음 탓에 물기가 서려 있었다.
“동무하자. 그럼 남은 아니잖아. 너 가는 날까지 내가 울 틈도 없이 놀아 줄 테니, 어때? 난 황궁에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심심했거든.”
반아가 억지로 윤을 떨어트려 놓고 허리를 굽힌 채 눈을 맞췄다. 황궁 사람들은 반아를 피하기 바빴다. 책주전 나인들도 저를 모시기만 할 뿐 놀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책주의 하나뿐인 자식에게 생채기라도 낼까 멀리서만 지켜봤다. 해서 반아는 황궁이 무료했다. 바쁘신 어머니와 한가로우시지만 재미없는 아버지는 반아의 심심함을 달래 주지 못했다.
그때 만난 게 이 애다. 황자 신분이긴 하나 이제부터 동무를 하기로 했으니 그런 건 상관없다 여겼다.
반아가 웃자 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거나, 죽을 거라며 겁나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만 봐 오다 반아를 보니 먹구름을 뚫고 해가 비치는 듯했다. 무서움이 저만치 멀어지고 앞으로 무슨 놀이를 할까 하는 여섯 난 아이가 할 법한 기대들만 남았다.



“누이!”
“윤아!”
윤은 그 뒤로 매일같이 반아를 찾아갔다. 책주전 담장 너머에서 누이, 하고 부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반아가 모습을 보였다.
둘은 손을 맞잡고 황궁 곳곳을 누볐다. 숨바꼭질을 즐겨 한 덕에 구석진 곳까지 잘 아는 반아가 윤을 데리고 다녔다. 궁인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사라지는 황자와 책주의 하나뿐인 자식을 찾으러 불안한 발을 굴렸다.
그들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은 세상 누구보다 천진하게 웃으며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윤은 반아를 누이라 부르며 잘 따랐고 반아는 생전 처음 생긴 아우를 다정히 대했다. 특히 반아에 대한 윤의 애정은 각별했다. 지나는 사람 전부가 저에게서 등 돌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기엔 이른 나이 여섯. 부모의 품이 절실하고 상처받기엔 마음이 덜 단련됐다. 그러나 황궁은 냉혹하고 현실적이었다. 훗날이 없을 황자는 구석으로 밀려나 홀로 남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 반아를 만났다. 자신을 버려진 황자가 아니라 윤 그대로로 보아 주는. 가식적인 위로도, 어쭙잖은 동정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심심하니 같이 놀자, 손을 내밀었다.
밝게 웃으며 윤을 대하는 이는 반아뿐이었다. 그것이 윤의 여리고 어린 마음을 휘저으며 어여쁜 색으로 물들였다. 함께 있으면 구르는 돌멩이도 새삼 재밌는 일이 되었다.
“나흘 후면 훤나라 사신이 떠난다는데, 난 어쩌지?”
“뭘 어째? 건강히 잘 다녀오면 되지. 넌 몸이 약하니까 의원을 데려가면 좋고.”
“그게 끝이야?”
“다녀오면 재밌는 얘기도 들려줘. 나도 훤에 가 보고 싶은데 아버지가 안 된다셔.”
무릎에 입술을 묻은 윤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녹았다. 저리 말하니 훤으로 가는 게 대단치도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금방 선조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다. 몸이 약한 건 어찌 알았는지, 신경 써 주는 반아가 좋았다.
“가서 울지 마. 넌 울음소리가 너무 커.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건 약한 거라더라, 어머니께서.”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함부로 울지도, 웃지도 말아야 한다. 황궁에선 무엇도 조심하고 경계하여야 한다고. 남들 앞인데 울고 싶을 땐 차라리 웃으라 하셨다. 해도 진실 되게 웃는 건 수를 다 보여 주는 것이니 그것은 또 안 된다 하셨다.
반아는 그런 선희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나 믿기는 철석같이 믿었다. 다만 동무는 남이 아니기에 괜찮지 않나 하여 윤의 앞에서만큼은 진심 어리게 웃었다. 허면 저 쪼그만 애가 따라 웃는데, 그것이 괜스레 좋았다. 처음 생긴 아우라 그런 게 아닐까, 짐작했다.
“누이는 나 가는 날, 돌아오는 날 마중 나올 거지?”
“그럼. 훤의 진귀한 것들을 많이 가져온다 하면.”
“갈 때는? 그땐 훤의 진귀한 게 없는데?”
“그건 덤이다.”
짓궂은 웃음이었다.
“서신을 보내면 필히 답신 주기로 약조해.”
“응.”
확신 가득한 답에 윤은 비로소 안심했다. 앞으로 서찰을 일흔 번은 더 쓸 거라 미리 경고를 해 두었다. 반아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답신을 보내기로 약조했다.

나흘은 눈 깜짝할 새 흘렀다. 황궁은 황자를 보내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훤나라 사신은 목적을 달성한 것에 즐거워했다. 황제는 황자의 빈자리를 걱정했고 선희는 훤의 도발을 대비해 병사를 모집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했다.
혹시나 황자에게 불상사가 생긴다면 그다음 훤의 계획은 전쟁일 것이다.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황자와 함께 훤으로 동행하는 이들의 규모는 굉장했다. 특히 무사의 수가 상당했다. 사신은 뭐 저리 거창하냐 투덜거렸지만 하나뿐인 황자를 보내며 저 정도 하는 게 무슨 문제냐는 선희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자, 짐의 말을 잘 새겨 듣거라.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 어떤 위험에서도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알겠느냐?”
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이 인상을 구기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살아 돌아올 수 없음을. 저승길이 될 것임을. 그런 곳에 자식을 보내는 부모의 심정을 저기서 웃고 있는 사신 놈은 모르리라.
해도 자식이 생사를 걱정할까, 아닌 척 거짓을 말했다. 살아 돌아오라, 희망을 안겼다. 황후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아들의 모습을 기억하려 흐르는 눈물을 참았다.
“누이.”
윤이 작은 손을 내밀며 반아에게 다가갔다. 선희가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간 윤이 반아와 친해진 것을 알지 못했던 황제 내외는 놀란 기색이었다. 선희는 책주전 나인에게 들어 알고 있었으나 황제와 황후는 다른 문제들로 정신이 없어 황자의 소식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반아가 윤과 손을 맞잡았다.
“약조한 거 잊지 않았지?”
“내 기억력이 좋으니 너 올 때까지 절대 안 잊을 거야.”
윤이 말갛게 웃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반아도 그를 보고 웃으며 똑같이 따라했다.
“보고 싶을 거야.”
“잘 다녀와. 나도 보고 싶을 거야.”
둘만의 수신호였다. 궁인들이 하도 둘을 떼어 놓으려 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처소로 돌아가야 했던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멀리서도 볼 수 있게 이런저런 수신호를 정했다.
지금 한 것은 ‘보고 싶다’였다. 놀자는 신호는 손을 쫙 펴고 허공을 휘적이는 것. 손가락 하나를 펴거나 서찰에 막대기 하나를 그어 보내는 건 둘이 함께 갔던 정자, 함영정에서 만나자 함이었고, 손가락 두 개나 막대기 두 개는 황궁 오래된 서고, 태서각(太書閣)에서 만나자는 뜻이었다.
혹 서로가 오기 전, 일이 있어 자리를 뜨는 일이 생길 땐 원이 그려진 서찰을 두고 가거나 흙바닥에 둥글게 원을 그려 놓고 떠났다. 내가 여기 있을 때 너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 외 한 번도 쓰지 않은 좋아한다, 연모한다도 있었다.
‘연정이란 무엇일까? 누이는 알아?’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하시는 걸 들어 봤지.’
‘나는 아바마마께 들어 봤어.’
‘좋아하는 거래. 생각하면 마음이 몽글몽글 변하는 거래. 꼭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하는 거라 하셨다. 그래야 눈에도, 손짓에도, 목소리에도 좋아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전해진다고.’
‘그것도 정하자. 나는 누이를 좋아하니까.’
‘나도 너를 좋아하지만 연모하는 건 아니다. 마음이 몽글몽글하지 않아.’
‘그래도 정하자.’
윤이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렸다. 해서 연모한다는 수신호도 정했다. 선희의 말마따나 얼굴을 마주하고 눈짓, 손짓에 마음을 가득 담아 전해야 한다기에 둘은 심각히 고민했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보고 싶다는 손짓을 건네는 것이었다. 제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을 들어 서로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맞추는. 윤은 반아의, 반아는 윤의 볼을 감싼 채 온기가 전해지고, 마치 인연의 뻗어 나간 가지처럼 둘 사이를 연결하는.
이것이 지난날 둘이 생각한 눈짓, 손짓이 담긴 연정이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윤은 제 가슴께에 손을 꼭 대고 웃었다. 돌아오면 누이에게 좋아한다, 신호를 보내 주어야지, 다짐하며.
반아도 웃었다. 윤이 돌아올 날 가져올 훤의 진귀한 물건들이 무엇일까 천진한 기대를 하며.

그렇게 황자가 훤으로 떠나고 세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 황궁 공기는 날 서게 변하고 있었다. 그사이 황자 윤이 훤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으나 황제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황후 역시 그러했다.
조정은 후계 문제로 회임을 압박했고 참판 조세현은 여식에게서 황실의 후사를 보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황궁이 가장 서슬 퍼런 눈동자로 감시하는 곳은 책주전이었다.
선조를 건국한 초대 황제 황정부터 책사 가문은 황실과 백성의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당시 황제 황정의 자식 중, 황좌의 주인이 될 만한 성품과 기량을 가진 자가 없었다.
해서 황제 정은 1대 책주의 자식 중 유독 총명한 서한을 귀애했다. 직접 공부를 가르친 일례도 있었다.
‘도저히 뽑을 놈이 없어. 하나같이 주색잡기에 빠져서는, 망할 놈들.’
‘서한은 어떠하시옵니까? 소문이 자자하던데.’
과거, 후계를 고민하던 황제 정에게 신하 하나가 묘책을 냈다. 어린 시절부터 형님, 아우 하며 지낸 자였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식들을 생각하던 황제가 반문했다.
‘한에게 보위를 물려주라고? 가당키나 한 소리냐, 이놈아?’
‘들어나 보시고 욕하십시오.’
‘개똥만도 못한 소리면 아작 날 줄 알아라, 오늘.’
‘우선 한에게 보위를 넘기십시오. 이제 막 기틀을 다져 가는 선조이옵니다. 폐하의 말씀처럼 믿을 황자마마가 계시지 않는데, 나라를 맡겼다 백 년도 안 돼 역사 속으로 사라질 일 있사옵니까?’